세 왕 이야기 - 양장본
진 에드워드 지음, 허령 옮김 / 예수전도단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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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와서 "가장 감명 깊에 읽은 책이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주저없이 답변할 수 있는 준비태세가 되어있다. 『세 왕 이야기』라는 내 인생 최고의 책이 흔들리지 않고 내 중심에 굳건히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1999년 생일 당시 교회 후배의 선물로 처음 접하게 된 이 책은 나에게 신앙, 권위, 인내, 리더쉽, 용기, 겸손에 이르는 굵직한 삶의 본질적 요소들을 비춰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이자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제외하고는 내게 절대 불변의 지혜의 보물로 각인 되어왔던 것이다.

 

  『세 왕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3명의 왕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 두 번째 왕 다윗, 그리고 반역의 왕 압살롬.. 세 왕의 기질과 특성, 그리고 무엇보다 권위에 대한 그들의 상이한 이해와 행동을 보여주는 책이다. 책이 두껍지 않고 어린 아이들도 읽을 수 있는 평이한 문체여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한 편의 동화라고나 할까?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종류의 '창'을 만난다. 인류의 아픈 역사의 내면에는 공격성과 이기성으로 중무장한 '창'의 던져짐이 있다. 국가, 가정, 이웃, 학교, 회사, 친구, 동료 등에서도 '창'은 다양한 모습으로 포장되어 상대를 향해 던져진다. 크게는 국가간의 전쟁에서부터 작게는 개인의 소소한 일상에 이르기까지 '창'의 질주는 인류역사의 한 흐름이 되어 있다. 사랑과 절제, 희생의 인류의 절대가치를 부서뜨리고 도발하는 '창'은 상대를 향해 날라가서 상대의 가장 아픈 곳에 박혀 크고 작은 상처의 흔적을 남기곤 한다. 그리고 '창'을 맞은 상대방은 그 상처에 아파하며 치유와 회복의 번민에 빠져 애통한다.

 

  지금으로부터 3,000여년 전, 이스라엘의 한 남자의 삶에도 날라오는 '창'에 자유롭지 못했다. 그를 시기하고 언제나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던 국왕의 '창'은 언제나 서슬 퍼랬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자신의 권위를 '창'으로 대변하며 '창' 던지는 일에 몰두했다. 왕의 '창' 던지기 제일의 목표였던 다윗은 날라오는 '창'을 감내해야만 했다. 하지만 여기서 매우 중요한 관찰이 필요하다. 사울의 '창' 던지기 실력보다 다윗의 '창' 받는 실력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이다. 다윗은 언제나 자신을 향해 날라오는 '창'에 대해 어떠한 비판과 반격을 하지 않았다. '창'을 던지는 자와 던지는 행위에 대한 비판권과 재판권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닌 다른 존재에 있다는 진리를 인식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인식과 행동이 종국에는 상상할 수 없는 고차원적 축복으로 되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권위에 대한 다윗의 올바른 이해는 언제나 그의 삶에서 풍성한 자유와 안식을 누리게 해주었다. 사울의 '창'을 피해 도망다닐 때에는 권위의 주인이자 원천인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겼고 원수같은 사울의 목숨을 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앞에서도 모든 결정권을 그분에게 돌려드렸다. 또한 압살롬의 반역의 '창'이 던져질 때도 그는 감내하기만 했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수많은 '창'이 자신에게 던져질 때마다 그는 그것을 주워 다시 되던지지 않았다. 그리고 중심을 잃지 않았다. 이 놀랍고 경이로운 다윗의 '창' 받기 실력은 그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자, 하나님으로부터 '내 마음에 합한 자'라는 사상 초유의 닉네임을 선사받은 주인공이자, 메시야가 그의 직속 혈통에서 오게되는 영광의 계보의 중심에 서 있게된 동기가 되었다.

 

  다시 시공간의 초점을 3,000년이 지난 작금의 우리 자신으로 맞춰보자. 우리는 과연 우리 앞에 놓여진 수많은 권위에 대해 어떤 행동들을 취했던가? 날아오는 '창'을 방패로 막기에 급급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창'의 주인을 비난하는 동시에 죄를 논하는 재판관으로 서있지 않았는가? 어쩌면 내 자신이 '창' 던지는 자로서 상대방의 마음과 영혼을 유린하는 주체가 아니었던가? 다윗의 삶이 보여준 권위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참된 권위에 대한 철저한 순종은 인간의 유한성과 오류, 불완전한 속성을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 어디에서 연유하는 지를 알려주는 지혜의 극치라 할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하지 못하는 것. 내가 해야하는 것과 내가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몰이해는 자신이 결코 하지 말아야 할, 자신의 주권영역이 아닌 곳에도 손을 뻗쳐 소중한 인생의 시간을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더 나아가 본질과 비본질의 우선순위의 헷갈림 속에서 영혼이 황폐해지며 패배자로 추락하는 삶을 살게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겸손한 자신감만이 가능을 입증할 수 있다. 다윗은 이미 3,000년 전에 이 이치를 깨달았고 현재의 감정보다 미래의 축복을 기대하는 믿음이 있었기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창'으로 대변되는 세상의 권위에 대한 득도의 안목을 가져 를 올려다 보는 동시에 '창' 앞에서는 겸허할 수 있는 그릇이 되기를.. 그리고 내면의 상처와 아픔을 되돌아올 미래의 축복과 희망으로 승화시키는 승리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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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처럼 찬양하고 다윗처럼 행복하라
김민식 지음 / 나침반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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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단골서점에서 책을 고르던 중, 제목이 눈에 번뜩여서 구입하게 된 책이다. 다윗을 묵상해 온지 10여년에 다다를 정도로 그에 경도된 나에게 책 제목에 '다윗'이라는 이름이 발견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내 이성은 마비되었다. 더불어 그처럼 찬양하고 그만큼 행복하라는 솔깃한 제목이라니... 지출계획에서 세종대왕 하나가 더 추가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저자인 김민식씨는 작곡가 겸 찬양사역자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신 분이며 나 못지 않게 다윗에 경도된 것으로 보인다. 책 머리말에 '우상이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일생 동안 다윗을 연구하고 사랑하고 모방하고 따라가고, 그가 누린 축복을 나도 누리겠다고 다짐을 했다'고 언급할 정도니 다윗에 대한 저자의 묵상수준은 이미 다른 차원이라 생각했다.

 

 다윗에게서 배우는 영테크라는 테마로 50가지를 정리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다윗의 삶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과 깨달음들을 50가지 영테크로 정리하여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종 다윗에 대한 경건한 분석과 묵상에서 오는 이야기들을 화려한 문체로 난사하고 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아쉬움이 있었는데 우선 문체가 너무 화려하고 비유적 미사여구가 상당하여 이야기의 초점을 내것으로 받아들이는데 다소 장애가 되었고 더불어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 한가지는 다윗의 삶과 신앙에서 이야기를 끌어내기보다는 저자가 하고 싶은 신앙적 메세지에 다윗을 맞추는 느낌이 얼핏 들기도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며 어쩌면 이러한 나의 지적도 내 자신의 무지함과 영성의 부족에서 오는 편견일 수 있으리라...

 

'성경을 읽다 보면 다윗 이전의 이야기는 모두 다윗을 향하여 몰려들고 다윗 이후의 이야기는 모두 다윗에게로 회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저자의 언급처럼 실제로 다윗은 성경에서 매우 많은 분량과 독특한 위치와 풍성한 영광을 차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자라는 전무후무한, 그야말로 이런 기가 막히고 충격적인 칭찬을 해 준 인물이 대체 다윗 말고는 누가 있던가? 다윗의 일생을 통해 말씀하고 싶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와 모형에 대한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아니셨을까?

 

 여하튼 기독도서는 언제 읽어도 흥분되고 감미롭다. 예배생활의 기본에서 기도와 말씀이 주식이라면 이러한 기독도서와의 만남은 보약차원의 에너지충전이라 하겠다. 모처럼 다윗에 대한 책이 나와 무척 반가웠으며 앞으로 다윗의 일생과 내 일생을 다윗쪽으로 비슷하게 만들어보려는, 이름하여 나만의 다윗벤치마킹엔진에 엔진오일이 되는 흐뭇한 책이었다.

 

 

다윗의 시편을 살펴보면 하나님께 응답을 강요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려 달라는 것만큼은 거의 떼쓰는 차원임을 알 수 있다.

다윗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뜻이 관철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탄원과 함성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 책 내용中

 

다윗은 하나님의 시선이 레이저 광선처럼 자신의 영혼을 파고들며 자기공명영상 검사를 하듯이 자신의 믿음을 단층으로 자르면서 감찰하심을 느꼈다.  

- 책 내용中

 

하나님께는 과거와 미래가 따로 없다.

그분께는 모든 시간대가 현재에서 통합된다.

영성의 감도가 높아지면 우리도 과거와 미래를 끌어당겨 현재라는 도마 위에 올려놓고 요리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거)과 하시는 일(현재)과 하실 일(미래)이 다 한 가지 맥락에서 이해되면서 전천후 감사와 기쁨의 소유자가 될 수 있다.

- 책 내용中

 

믿고 감사하며 조용히 기다리는 법을 배우라.

항상 문제의 원인은 우리의 조바심이었지 하나님의 느긋하심이 아니었다.

- 책 내용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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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놓음 -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결심 이용규 저서 시리즈
이용규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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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내려놓음』을 읽었다. 사실 『자신감』과 더불어 예전부터 가장 읽고 싶었던 기독교도서였다. 기대가 큰만큼 실망도 큰법인데 기대가 큰만큼 만족도 컸다. 이용규선교사님의 미국유학지와 몽골선교지에서 경험하고 깨달은 내용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강력한 메시지로 내 자신에게 밀려왔다.
 
 내려놓음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내려놓으라는 것인가? 책을 읽기 전 호기심이 적지 않았다. 그 호기심은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산산히 부서졌다.

 이용규선교사님은 이 책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내려놓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미래의 계획, 물질창고, 생명과 안전, 경험과 지식, 죄와 판단의 짐, 명예와 인정받기, 사역의 열매 등을 내려놓음으로써 정작 자신이 발버둥치지 않아도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얘기하고 있다. 동시에 내려놓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고 이끌어가시는지를 구체적인 간증들을 통하여 소개하고 있다.

 내려놓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어느 하나 내 것이 없는데, 그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결코 내려놓는 것은 쉽지가 않다. 하지만 결단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내려놓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내려놓은 그 순간 하나님은 그것을 사용하기 시작하시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와 이삭을 내려놓았던 것처럼,,,
다윗이 성전건축을 내려놓았던 것처럼,,,
주님께서 당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내려놓았던 것처럼,,,

 내려놓는 자세로 하나님을 섬겨야한다는 도전을 얻었다. 내려놓음이 갖는 신앙의 핵심을 깊이 묵상하는 동시에 이 소중한 책을 많은 것을 올려놓고 있는 이 땅의 짐꾼들에게 추천한다.
 


[ 책내용中 ]

  하나님과 함께하는 좁은 길을 선택하는 자에게 준비해두신 하나님의 축복은 그 길을 선택하기 전에는 볼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이삭 대신에 희생제물로 준비해두신 양은 아브라함이 순종하기로 결단한 이후에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우리가 미래를 내려놓는 순종의 결단을 하기 전까지는 철저히 가려져 있다.
 

  하나님은 일부로 우리의 약점을 드러내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나 우리가 약점을 가리려고만 할 때, 오히려 우리가 명예욕이라는 올무에 걸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자라지 못할 수 있다. 우리가 약점까지 하나님 앞에 내려놓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가려주시고 그분의 영광으로 그것을 바꿔주신다. 우리의 약함은 하나님이 가려주셔야 제대로 가려지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아주 작은 어린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인정받고 싶어 울고 있는 아이다. 이 아이는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우리 속사람을 힘들게 하고 괴롭힌다. 우리는 우리 속에 어린아이가 있는지 모른 채 그의 감정에 이끌려 살아간다. 그러나 이 어린아이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통해서만 안정을 얻고 쉼을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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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의 비밀을 안 최고의 부자 록펠러
이채윤 지음 / 미래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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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한 인물을 평가하는데 있어 공과 과를 구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동일인물에 대한 확연하게 구분되는 아래 장단의 프로파일을 소개하면서 리뷰를 시작하고자 한다. 

미국 역사상 가장 냉혹한 사업가.
석유 회사 독점을 위해 경쟁업체 직원을 매수해 정보를 빼내고,
경쟁업체가 기업들과 판매 계약을 맺으면 터무니 없이 낮은 가격을 내놓아 계약을 취소하게 만드는 일들을 서슴치 않음.
도산위기에 놓인 경쟁업체를 인수하며 1881년 당시 미국에서 생산되는 석유의 95%를 독점 공급.
1913년  러드로라는 마을에서 열악한 노동환경을 견디지 못한 광부들이 파업을 일으켰는데, 회사의 무력 진압으로 50여 명이 숨지게 한 소위 '러드로 학살사건'.
 

인류 역사상 최고 부자(시대의 화폐가치를 환월할 경우 현재 세계 최고의 부자인 빌게이츠의 3배가 넘는 재산을 보유).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와 과학적인 자선사업을 실행.
수많은 소외된 이들을 돌보며 교육 발전을 위해 천문학적인 금액을 쏟아 부음.
의학연구소와 재단을 포함하여 시카고대학 등 12개 종합대학과 12개의 단과대학, 4,928개의 교회를 지어 사회에 바침.
UN본부 건립시 자신의 토지를 국가에 헌납.
100년이 지나 4대에 이르는 작금까지 활발한 자선사업으로 세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음.
 

 빨간 글씨로 표시한 이력과 파란 글씨로 표시한 이력의 상충에 머리가 아프지 않는가? 인류 역사상 최고의 부자인 석유왕 존 데이비슨 록펠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위의 프로파일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공과 사가 뚜렷이 구분되는 인물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거의 100세에 가까운 그의 일생에서 전반부의 삶은 사업을 시작하여 회사를 확장하면서 앞만 보고 달려온 냉혹한 사업가였던 반면에 50세가 넘는 후반부의 삶은 소외된 계층을 돌아보고 수많은 학교와 교회를 설립한 아름다운 자선사업가였다. 그에 대한 공과 사는 오랜 시간이 지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모범적이고 훌륭한 부자, 최고로 빛나는 자선사업가라는 위인의 반열에 올라 세인들의 판단이 정리되기도 하였다. 

 『십일조의 비밀을 안 최고의 부자』는 바로 이 록펠러의 일생을 다루고 있다. 이미 록펠러와 관련하여 많은 연구 논문과 자서전이 발행된 바 있다. 『하나님의 황금』, 『존 D. 록펠러』, 『존 D. 록펠러: 미국 기업의 영웅 시대』 등의 연구 논문과 책들은 유명하다. 자서전의 경우도 그 유명한 록펠러 전기인 『타이탄』과 4대에 걸친 록펠러 가문의 스토리를 모두 다룬 『록펠러 가의 사람들』은 이미 세간에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십일조의 비밀을 안 최고의 부자』는 『삼성처럼 경영하라』의 저자 이채윤씨가 집필한 책이다. 어머니에 의해 철저한 기독교 교육을 받은 록펠러를 조명하고 있다. 태어난 배경에서부터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로부터 받은 철저한 신앙교육, 사업을 시작하며 동역자를 만나고 사업을 확장하여 석유왕이 되기까지.. 사실 여기까지의 삶은 정확히 록펠러 일생의 절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형선고를 받고 새로운 삶의 전환점을 겪게 되는 록펠러는 하나님께 뜨겁게 기도하여 수명이 연장되는 응답을 받게 되고 지금까지 돈을 벌기에만 급급했던 자신을 목도하면서 남은 일생은 소외되고 어려운 이들을 위해 돈을 쓰는데 급급한 삶으로 바뀌게 된다. 어쩌면 록펠러라는 인물이 그리는 두가지 상반된 이미지는 그의 인생의 전반부와 후반부가 상충된 삶을 살았다는 것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책은 어머니의 철저한 신앙교육에 의해 록펠러가 성장했음을 설명하고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온 것을 강조하고 있다. 록펠러의 어머니니는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다음 세 가지 약속을 지키게 했다고 한다.
1. 십일조 생활을 해야 한다.
2. 교회에 가면 맨 앞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린다.
3. 교회일에 순종하고 목사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이에 대한 어머니의 철저한 교육과 기도로 인해 록펠러는 어렸을 때부터 마지막 생을 마감할 때까지 단 한번도 십일조를 거르지 않았고 예배생활과 교회에서의 봉사와 헌신에 여념이 없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사업가로서 뛰어난 달란트를 발휘하여 1881년 당시 록펠러의 회사는 미국에서 95%라는 경이로운 시장지배력을 가지는 초일류기업이 되었다. 더욱이 50세가 넘어서 시작한 자선사업은 그 규모와 과학성에 있어서 획기적인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데 재산의 절반이상을 자선사업에 투자하여 소외된 계층에 대한 구제사업과 학교 건립을 통한 인재 양성에 기여하였다. 

 록펠러는 록펠러 의학연구소와 록펠러재단을 위시하여 시카고대학 등 12개 종합대학과 12개의 단과대학, 4,928개의 교회를 지어서 사회에 바쳤다. 그중 시카고대학은 설립 이래 100년 동안 70여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으며, 현직 교수 중 노벨상 수상자가 수십명이나 될 정도였다. 하지만 록펠러는 자신이 세운 그 많은 대학과 교회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자신은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다는 태도를 견지했던 것이다. 

 저자는 록펠러의 삶을 찬양으로 일관하되 책의 각 파트가 끝날 때마다 관련 성경말씀을 달아놓아 록펠러의 부와 성공이 철저한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했다는 것을 꾸준히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서 저자는 여느 기독교 신자와는 달리 록펠러는 의무감에서 십일조를 드린 게 아니라 어떤 신념을 가지고 십일조를 드렸다고 언급한 뒤 록펠러가 드린 십일조가 하나님의 밭에 뿌려져서 싹을 틔우고 자라나 열매를 맺는 씨앗이었음을 부연한다. 

 이 책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록펠러의 일생을 용비어천가조로 장점만을 부각했다는 것이다. '러드로 학살 사건'을 위시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독점사업가였던 록펠러의 단점과 오명도 함께 다뤘으면 독자가 록펠러를 천착하는데 균형감각 있게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계속 남는다.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에 대한 강한 도전을 불러 일으키는 좋은 책이라 평할 만 하다. 이 책은 신앙인 록펠러만을 철저히 다루고 있다. 그가 어머니로부터 어떤 신앙교육을 받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철저한 십일조생활을 통하여 성경말씀 말라기 3장 10절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받아누려 인류 역사 이래 전무후무한 부자가 된 것에 대해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십일조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책을 정리하고 있다. 단순하게 번 돈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정성껏 자신이 번 돈을 계산하고, 허튼 곳에 돈을 쓰지 않고, 씨앗을 뿌리는 마음으로 감사하며 기쁨으로 십일조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늘의 밭에서 그 씨앗이 움트고 자라나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넘칠 만큼의 열매로 돌려준다는 것이다. 

 그렇다. 맞는 말이다. 십일조는 예수를 믿는 상당수의 신앙인들에게도 강단있게 결단하지 못하고 있는 하나님의 요구다. 이 땅의 많은 크리스챤은 세인들로부터 "어떻게 수입의 10분의 1을 헌금으로 드릴 수 있느냐?"는 그들의 이성과 상식의 언어에 유혹과 조소를 당하고 있고, 정작 자신의 마음속에서는 돈이라는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신앙생활의 시험거리에 번민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원칙과 요구는 단호하다.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지금 시대에도 십일조 생활을 우리에게 명령하고 계시다. 그런면에서 40명이나 되는 직원을 두고 수입을 정확하게 계산해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모범을 보여주었고, 씨앗은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며 아무 곳에나 뿌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풍요로운 대지인 하늘에 뿌리는 것이라는 점을 인류에게 확연히 보여준 록펠러의 삶은 응당 존경받아야 할 용기 있는 신앙인의 모습이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라기 3장 10절> 

 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록펠러처럼 십일조의 비밀을 알고 이를 철저히 시행하여 하늘 문이 열리는 동시에 창고에 복의 복이 가득 쌓이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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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란 무엇인가
김세윤 지음 / 두란노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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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도 학생회 교사로 헌신하고 있을 그 해 추석즈음에 학생회 전도사님으로부터 선물 받은 책이다. 당시 받자마자 가벼운 통독으로 읽긴 했지만 읽은 후 머리 속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음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깊이 있는 내용인 만큼 읽는 이의 자세에도 깊이가 있어야 했는데 그저 문자만 주욱 훑은 것이 원인이었다. 2년여의 시간이 흘러 책장 한구석에 꼽혀 있던 이 책이 내 눈에 들어왔고 주말을 기회삼아 재차 읽을 수 있었다.
 

 신학의 대학자가 쓰신 책 답게 평범한 여느 기독도서들과는 상당한 무게감의 차이를 느꼈다. 당시 전도사님께서 기독교의 가장 기본이라면서 책을 건넸고, 저자인 김세윤교수님 또한 머리말에서 평신도들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쓰려고 노력했다고 전제했지만 썩 쉬운 내용은 아니었다. 어휘나 학구적인 용어에 있어 쉽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라는, 기독교의 핵심을 풀어가는 데 있어 그 깊이와 무게감이 장중했다는 뜻이다. 여하튼 내 자신의 부족한 신학적 소양은 차치하고 책의 내용을 언급해 보자.

 

 김세윤교수님은 복음이 필요로 하는 새로운 시대에 직면해 있음을 주지시킨 뒤 예수의 복음과 사도들의 복음의 차이를 지적하며 이 두가지 차이를 시작으로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의 복음은 하나님의 복음, 곧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한 데 비해 예수님 사후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증거했다고 언급한다. 그러면서 사도들의 복음이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복음에 어떻게 연장되는 지를 구체적이고 깊이 있게 설명하고 있다.

 

 '복음'에 대한 깊이 있는 대학자의 접근이기 때문에 내 사견을 붙이는 것보다 책 내용을 발췌정리하는 것으로 리뷰를 대신하는 것이 나을 듯 싶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는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상속자 되게 하고,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며,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라고 초대한 것이다. 또한 예수의 죽음은 그 약속을 성취하여 실제로 우리를 죄가 씻긴 하나님의 백성으로 창조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로 바친 사건이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의도에 있어 그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와 그의 죽음은 약속과 성취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 이후 그의 제자들이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켜 그의 이러한 가르침과 주장을 옳다고 인정했음을 깨달았을 때, 그들의 관심의 초점은 당연히 예수의 약속보다 그의 죽음으로 그런 약속을 성취했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런 이유로 부활 이후 사도들의 복음 선포는 예수의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성취하신 그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구원 사건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의 부활이다. 이런 이유로 사도들의 선포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항상 같이 등장하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이 그의 메시아로서의 구원의 행위의 중심이고, 그러기에 사도들의 선포의 초점이 되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이 복음 선포의 초점이 되게 하는 것이 바로 그의 부활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분리될 수 없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를 통한 약속과 그의 죽음을 통한 그 약속의 성취, 그리고 그의 부활을 통한 그 성취의 확인. 이 세 가지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상호간 해석을 도와준다.

 

예수와 그의 사도들이 같은 복음을 선포하면서도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된 이유는 한마디로, 예수는 그의 죽음과 부활에서 성취돌 구원을 향하여 가면서 그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로 그 구원을 약속했기 때문이고, 그의 사도들은 그의 죽음과 부활의 관점에서 이미 성취된 그 구원을 되돌아보며 선포했기 때문이다. 즉 관점의 차이 또는 구원사적 시점의 차이에서 유래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나단의 신착에 의해 다윗 왕조를 문자적으로 재건하고 유대 민족으로 하여금 모든 민족들 위에 군림하게 하는 메시아를 기대했다. 즉 정치적 자유와 사회적 정의와 평화, 그리고 경제적 풍요를 그 메시아가 가져다 줄 구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는 다윗 왕조를 재건하지 않았고,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독립시키지도 않았다. 예수의 메시아적 행위는 그의 죽음이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로 드려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키는 것, 곧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들이 되게 해서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게 한 것, 즉 하나님의 신적 생명(영생)을 얻게 한 것, 바로 그것이 예수가 가져온 구원이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종말론적인 유보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이 이미 일어났다. 그리스도의 죄에 대한 죽음으로 죄 문제에 대한 결정적 해결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의 부활로 오는 세대 또는 하나님 나라의 신적 생명(영생)이 죽음을 꺾고 이 세상에 결정적으로 침투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죽음을 가져다주는 사단에 대한 결정적 승리이다. 그러므로 사단의 죽음의 현상들인 질병들을 하나님의 영(성령)의 힘으로 치유하면서 하나님의 생명의 통치를 시위하던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통치가 사단의 죽음의 통치를 확실히 꺾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죄와 죽음의 세력은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살아 있는 자들이 죄와 죽음이 없는 신적 생명을 누리는 축복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와서 그의 구원을 완성할 때 주어질 것이다.

 

우리는 지금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결정적으로 이루어진 구원을 벌써 덕입게 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얻게 될 그 완성된 구원의 첫 열매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이 첫 열매는 지금 하나님의 영(성령)의 힘으로 우리의 실존의 모든 면들에게 치유를 가져오며 그 힘을 발휘한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첫 열매를 얻고 체험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미래에 그 구원을 총체적으로 수확할 것을 바라 볼 수 있으며, 지금의 첫 열매를 그 완성된 구원에 대한 보증금으로 여기고 확신 가운데서 소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선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그 구원의 첫 열매를 벌써 받아 누리고 그리스도의 재림 때 그것의 완성을 받으라고 권고한 것이다.

 

우리의 구원을 끝까지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의로우심/은혜에 대한 신뢰에서 오는 안도함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심판석에 서야 함을 늘 생각하면서 두렵고 떨림의 자세로 의인의 삶을 사는 것, 바로 이 두 측면들이 서로 논리적 긴장을 일으키면서 우리에게 함께 있을 때 우리는 건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창조 전부터 존재하며 하나님의 초월에 참여하던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하나님의 초월에서 이 내재(세상) 속으로 보내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예수는 하나님의 초월의 힘을 가지고 이 내재 속에 계셨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신성을 보여줄(계시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실행할 수 있었다.

 

신약성서의 언어로 복음을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아마 요한복음 3:16을 인용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의 독종자(獨種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었다"(필자의 사역).

 

이 복음을 믿어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영생을 얻으라!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다윗의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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