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우웬 : 그의 삶, 그의 꿈 - 세계영성의 거장 시리즈 01
마이클 오로린 지음, 마영례 옮김 / 가치창조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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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작년으로 기억된다. 교회 담임목사님께서 우리집에 심방으로 오셨을 때다. 어머니와 나는 목사님께서 과연 어떤 말씀을 우리가정에 선포하실까, 하는 기대와 소망으로 가슴을 두근거리고 있었다. 당시 목사님께서 주신 메세지는 아직도 내 기억속에 강렬히 각인되어 있을 정도로 은혜롭다. 신앙에는 두 가지 기류가 있는데, 하나는 주님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나아감이며 다른 하나는 바로 그 주님의 모습을 닮아감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기류 모두 신앙의 소중한 줄기지만 결국 최고의 신앙의 수준은 후자의 형태로 귀결된다는 것이 당시 목사님께서 전하신 메세지의 핵심이었다. 신의 형상의 삶을 회복하며 이 땅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 그것은 기독교인이 추구해야 할 가장 종결적인 도전이자, 소망이요, 꿈이리라.

  바로 이러한 신적 성품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며 작은 예수의 삶을 가르치고 전파함은 물론, 정작 자기 자신 또한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우리는 도처에서 적잖이 볼 수 있다. 20세기 뛰어난 영성작가로 유명한 헨리 나우웬의 삶도 그러했다. 카톨릭사제이자, 대학교수이며, 영성작가로서의 그의 삶은 사변적이지 않았고 교조적이지 않았다. 자기가 가르치며 전파하는 내용을 자신이 먼저 실천하며 행동한 인물이다. 

  《가치창조》출판사에서 출간된 『그의 삶, 그의 꿈 - 헨리 나우웬』은 헨리가 하버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그를 보조하는 조교로 처음 인연을 맺게 된 마이클 오로린이 쓴 책이다. 가장 좋은 교사는 삶의 본보기를 통해 말없이 가르칠 수 있다는 확신 아래, 저자는 헨리의 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들려주고 있다. 최고의 영성 거장 헨리 나우렌. 과연 그는 어떤 생각을 가졌고, 어떤 책들을 썼으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자서전의 형식으로 쓴 이 책은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한 한 기독교도의 웅숭깊은 삶을 가감없이 소개한다.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책 속에서 풍성하게 자리잡고 있는 크고 시원한 사진들은 활자와 좋은 조화를 이룬다. 한 사람의 일생을 소개하는 작업에 있어 사진은 분명 적절한 조미료의 역할을 한다. 어릴 때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헨리의 다양한 사진들을 첨부시켜 독자의 안내를 돕고 있다. 더욱이 책의 양 사이드에는 헨리의 영성 깊은 명문장들을 배치했다. 저자가 전하는 헨리 나우웬의 삶, 그리고 그것을 부언하는 주인공 자신의 문장들과의 호흡을 통해 한 권의 자서전의 완성도를 깔끔하게 올려놓고 있다.

  책에서 소개된 헨리의 대부분의 삶이 아름답고 은혜로웠지만, 두 가지 부분에서 큰 흥미와 도전이 발산된다. 우선 그가 빈센트 반 고흐의 열렬한 팬이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반 고흐에 대한 헨리의 관심은 화가로서의 재능이 아닌, 영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이다. 빈센트의 그림 속에는 하나님을 찾는 사람의 고뇌와 환희를 보여주는 독특하고 소중한 증거들이 가득하다고 믿는 헨리에게, 빈센트는 다른 화가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아직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진지하게 단 한 번도 묵상하지 못한 나이기에, 이러한 헨리의 고흐 탐구는 내게 반드시 거쳐가야 할 숙제를 안겨주기도 한다.

"빈센트의 고뇌를 내 경험에 비추어 살펴보면서 그가 내게 상처 입은 치료자가 되어 주고 있음을 점점 더 깨닫게 되었다. 그는 내가 전에는 볼 용기조차 내지 못했던 것들을 그림으로 그려냈고 내가 전에는 말할 용기조차 내지 못했던 것들을 질문했다. 그리고 내가 감히 가까이 다가갈 용기조차 낼 수 없었던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 클리프 에드워즈가 쓴 책 반 『고흐와 하나님』 Van Gogh and God의 추천서문중에서   <p. 109>

  또 하나는 그가 주야장천 원칙으로 삼았던 삶의 철학에 있다. 그것은 바로 <낮아져야>만 하는 겸손의 삶이다. 대학 강의에서 신약의 복음서를 중심으로 예수님의 삶을 설파한 헨리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면서 겸손의 원리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자아상을 확립한다. 이러한 헨리의 겸손관은 캐나다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 합류한 이후, <기본>을 잊고 살았던 자신에 대한 반성을 통해 더욱 공고히 다져진다. 헨리의 삶을 곱씹으며 '낮아지는 것'이 복음과 그리스도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동인이며, 그 속에서 우리는 연합을 추구하고 기쁨을 찾게 된다는 저자의 명문장에 나는 한아름의 은혜와 도전을 얻는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낮아지는 길을 택하신 것이 매우 분명하다. 예수님은 한번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거듭거듭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쳤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 얼마나 낮아지셔야 했는지를 알 수 있다." - Letters to Marc about Jesus중에서   <p. 150>

  신앙의 끝은 결국 <겸손>이다. 주님이 그랬던 것처럼, 수많은 신앙인의 선진들이 그랬던 것처럼 겸손함으로 무장되는 길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서 있게 되는 방정식의 신비리라. 이를 명징히 보여준 헨리 나우웬의 삶을 다시 한 번 곱씹으며, 수십여 권에 달하는 그의 영성 있는 작품들을 두루 읽어볼 도전의식을 발동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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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얀시의 어메이징 그레이스
필립 얀시 지음, 정성묵 옮김 / 가치창조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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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 다듬어지지 않았던 어린 시절에 나는 하나님을 이분법으로 분리하여 해석했다. 구약의 하나님은 너무나 무서운 공의의 하나님이었고, 신약의 하나님은 따뜻한 사랑의 하나님이었다. 과연 동일한 분인가, 할 정도로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은 극명한 차이로 구분되었다. 하지만 성경을 이해하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이뤄지고, 당신의 신성을 깊이 알아가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한 분이시라는 참된 진리를 명징히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한 창조주이시며, 용서와 인내가 많으신 사랑의 주님이시며, 절대로 변하지 않는 유일한 신이심을 나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리고 당신의 속성과 비전은 절대로 변하지 않으신다. 만약 하나님이 변하시는 분이었다면 인류는 이미 오래 전에 멸종을 당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신성은 결국 '사랑'이라는 초고차원적 우주의 힘으로 발현된다. 인간과 함께 하기를 좋아하시고, 인간이 행복하기를 갈망하시며,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본성은 우주 시공간의 태동에서부터 무한대로의 종말에까지 계속된다. 

  탁월한 복음주의 지성인으로 평가받는 필립 얀시는 신간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를 통하여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은혜'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그의 이전 작품과는 다르게 수많은 비쥬얼을 책 속에 놓여놓고 있어 아름다운 활자와 함께 은혜의 하나님을 수식한다. 

  책의 구성은 특이하다. 한 집안의 백년에 걸친 사랑 결핍과 비용서의 아픈 이야기를 하나님의 은혜를 은유하는 아름다운 언어들과 교차하여 들려준다. 이러한 교차식 구성은 올컬러판의 의미심장한 사진들과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의 은혜를 깊게 묵상케 한다. 각 페이지마다의 수많은 사진, 간결한 문장과 문단, 인용되는 명문구의 조합이 이뤄내는 연금술에 취해 불과 몇십 분만에 은혜의 강을 건널 수 있다. 

  과연 하나님의 은혜는 공평한가. 필립 얀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공평하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는 받아 마땅한 것의 정반대 것을 받는다고 부언한다. 그럼에도 은혜는 놀랍고, 은혜의 향기가 코끝을 스치기만 해도 인생이 영원히 변할 것임을 고백한다. 그렇다. 하나님의 은혜는 공평하지 않다. 하지만 공평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기준은 결국 하나님의 넓은 사랑 안에서 통폐합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을 통하여 '공평하신 하나님'이라는 신적 언어를 완성시킨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의인이 된 존귀한 존재들이다. 죄인이면서도 동시에 의인이 될 수밖에 없는 자아의 역설적 존재감을 확인할 때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농밀하고 수준 높은 차원인지를 깨닫게 된다. 나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님의 은혜는 어떤 언어로도 표현될 수 없는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나는 죄인이다. 하지만 의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공평하지 않다. 하지만 당신의 사랑 안에서 공평함으로 완성된다. 이 놀라운 신의 언어를 곱씹으며 나같은 죄인을 살리신 놀라운 주의 은혜를 찬양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를 찬양하리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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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들의 이야기 1 - 분열왕국의 시작
한홍 지음 / 두란노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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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특별은총의 결정체인 성경은 총 66권으로 기록되었다. 구약 39권, 신약 27권으로 기록된 성경은 1600년 동안 40여 명의 기자들에 의해 쓰여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를 주제로 삼고 있다. 구약이 오실 메시야를 예언하고 있는 말씀이라면, 신약은 오신 메시야에 대한 말씀이다. 시대순 정렬이 아닌 특유의 기록방식으로 인해 처음 읽는 이가 쉽게 소화하기 어려운 책이기도 하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성경을 읽다보면 흥미있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지루해서 몸서리를 치는 부분도 있다.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수용해야 하는 성경읽기의 원칙을 인정하면서도 흥미와 지루함이 부분적으로 교차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기에 언제나 성경을 묵상할 때에는 기도하며 주의 은혜를 요청하게 된다. 

  아마 구약성서에서 가장 뛰어난 가독성으로 읽혀지는 곳은 이스라엘의 왕정시대가 펼쳐지는 사무엘서부터일 것이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 하나님 마음에 합했던 위대한 왕 다윗, 지혜와 함께 전무후무한 부귀영화를 이룬 왕 솔로몬. 이렇게 세 왕이 다스렸던 통일왕국이 솔로몬 이후 남과 북으로 갈라져 훗날 멸망하기까지의 사무엘서, 열왕기서, 역대서에 이르는 부분은 소설 《삼국지》와 드라마 《용의 눈물》 못지 않은 흥미와 스펙타클을 선사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거인들의 발자국』을 통해 처음으로 만난 한홍 목사는 군림하는 리더십이 아닌 섬기는 리더십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다. 좋은 리더십은 반드시 팔로우십(Followership)에 전제 하에 완성될 수 있음을 강조하는 한 목사는 신간 『왕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 군왕들의 리더십 스타일을 분석 조명하고 있다. 과연 리더십의 본질은 무엇이며, 하나님은 어떤 리더십을 지향하시는지를 이스라엘의 왕들을 통하여 관통하고 있다. 

  제목 '왕들의 이야기' 밑에 'I. 분열왕국의 시작'이라는 부제가 있어 시리즈의 일 편임을 알 수 있다. 다윗을 통해 흡족한 만족을 누리셨던 하나님의 마음은 솔로몬의 후반기 치세에서 실망과 분노를 느끼신다. 이후 르호보암에 이르러서는 나라가 두 쪽으로 갈라지기에 이르며 남과 북이 각기대로 파란만장하고 지난한 역사를 펼치게 된다. 이 책에서는 통일왕국의 시초였던 다윗 왕에서부터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받는 아합까지를 다루고 있다. 각 왕들의 통치시기를 정리함으로써 하나님의 리더십 코드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준다. 

  이스라엘의 왕정시대는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나중은 미약한 역사였다. 실질적인 초대왕 다윗이 이룩한 통일왕국 이스라엘은 찬란하게 시작하지만 손자 때인 르호보암 시기에 남과 북이 분단되는 아픔을 겪는다. 이어 북이스라엘은 19명의 왕을 거쳐 BC 722년에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당하고, 남유다(다윗의 혈통, 정통성 왕조)는 23명(통일왕국 포함)의 왕을 거쳐 BC 586년에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을 당한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역사를 관찰하다 보면 꽤 흥미있는 사실을 목도하게 된다. 북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 열 개의 지파를 포함한 거대한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쿠테타로 아홉 번이나 왕조가 바뀌는 불신앙과 타락의 극치를 보여주는 처참한 역사이다. 물론 남유다의 역사도 부끄러운 역사였지만 그나마 괜찮은 왕들이 몇몇 출현했다는 점이 대조된다. 더욱이 남유다는 왕조가 단 한 번도 바뀌지 않고 다윗의 혈통을 통하여 왕위를 이어 나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다윗과의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에 기인하고 있다. 

  하나님은 다윗을 매우 흡족케 생각하셨다. 성경에서 다윗만큼 하나님에게 사랑과 인정과 영광을 받은 이는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내 마음의 합한 자'라는 찬란한 닉네임을 선사받은 다윗의 축복의 핵심 포인트는 바로 '순종'에 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었지만 근본적이며 실제적인 만왕의 왕은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왕권과 권위에 철저히 순복하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완벽한 이해와 철저한 순종, 그것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였으며 가장 강력한 리더십이 발현되는 원동이었던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솔로몬을 싫어한다. 전무후무한 부귀영화를 누리고 가장 강력한 제국을 만들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지 솔로몬 자신이 잘나서 이룩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더욱이 집권 후반에 수많은 이방여인들이 가져온 각 국의 우상들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온통 우상 바다로 만든 것은 나라가 분단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우상숭배가 너무 미웠지만 아버지 다윗의 신실함을 생각하셔서 그 죄의 값을 한 세대 미루기로 작정하신다. 아버지 잘 만나서 득을 본 것이다. 회개가 없는 죄성, 자기영광과 교만, 씻을 수 없는 우상숭배의 죄 등은 아버지 다윗과 대조되며 하나님의 호오가 무엇으로 구분되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준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역시 다윗이다. 성경적 리더십 담론은 결국 다윗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성경을 읽다 보면 다윗 이전의 이야기는 다윗으로 몰려가고 다윗 이후의 이야기는 다윗으로 회귀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작은 것에도 어린 아이의 심정으로 하나님께 매달린 자, 하나님의 명예를 위하여 목숨걸고 용기로 나선 자, 큰 죄를 지음에도 즉각 회개하는 자, 하나님의 STOP 명령에 바로 그 자리에 정지하는 자,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오직 순종으로 일관하는 자, 시작과 끝이 하나님 앞에 합했던 자 다윗. 이러한 다윗 신앙의 순결함은 이후 이스라엘 모든 왕의 하나님적 기준이 되었으며, 그의 혈통의 왕조를 하나님이 친히 지키시는 언약의 실현이 되었으며,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족보를 통해 태어나는 영광을 이루게 되었다. 

  이 책의 막장을 덮으면서 이러한 다윗의 위대함을 새삼 곱씹게 된다. 다윗을 흠모하며 탐구한지도 어언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묵상하면 묵상할 수록 더욱 웅숭깊어져만 가는 인물이 바로 다윗이다. 나는 다윗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와 모양을 볼 수 있었다. 이 시대에 또 다른 다윗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는 영원불변한 나의 좌우명으로 뇌리 속에 각인되어 있다. 순종과 겸손이 하나님의 영광을 얼마나 극대화시키는지를 명징하게 보여준 다윗의 존재감은 평생토록 내 심장 안에서 찬란한 태양으로 불타오를 것이다. 

  한 목사는 에필로그에서 하나님적 리더십 코드를 정리한다. 리더된 자에게 교만은 절대악임을 갈파하고 있다. 인생의 모든 문제와 번민은 내가 하나님이 될 때에 생기는 법이다. 교만은 하나님중심주의를 전복한다. 죄인 중에 괴수임을 고백한 사도바울처럼 자기자신의 한계와 오류, 불완정성을 인정하며 끊임없이 주님의 에너지를 공급 받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가장 빠른 길이요, 유일한 길임을 재인식한다.  

  이스라엘 역사 속의 왕들을 통해 배우는 통치 원리와 혼탁한 세대를 밝힐 '하나님의 리더십' 코드를 읽고자 하는, 심령이 깨어지길 소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한 권의 리더십 파노라마를 권하고자 한다. 더불어 하나님의 리더십 코드가 요원해져만 가는 작금의 시대에서 다윗의 왕권을 실현하는 리더들이 많아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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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휴식
마크 부캐넌 지음, 마영례 옮김 / 가치창조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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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는 신학적으로 크게 두 가지 기류로 구분될 수 있다. 하나는 '일반은총(Common Grace)'이며, 다른 하나는 '특별은총(Special Grace)'이다. 일반은총이란 인류 보편에게 일반적으로 주신 일반적인 은혜이다. 태양으로부터 밝음과 따뜻함을 얻을 수 있고, 육지의 동식물과 바다의 물고기를 맛있게 먹을 수 있으며, 아름답고 광활한 대자연을 목도할 수 있는 은혜들이 바로 일반은총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특별은총은 무엇일까.

  문자 그대로 특별한 은총이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섭리하시는 구속사 의 실현을 위해 특별히 작정하신 은총을 의미한다.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임하는 일반은총과는 달리 특별은총은 철저한 하나님주권주의를 표방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나 주관성으로는 절대로 변형되거나 훼손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특별은총이다. 그렇기에 지극히 하나님중심적이며 선택적이고 구속사적인 은총이다. 이러한 위대한 특별은총의 결정체가 바로 기록된 은혜인 '성경'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대략 1600년 동안 40여명의 기자들에 의해 기록된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어떠한 것인가를 농밀하게 알려주는 책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신성과 성품, 일하시는 방식과 용인술, 원하시는 것과 싫어하시는 것 등을 망라하여 하나님에 대한 가장 정확한 학습과 탐구를 할 수 있다. 

  성경을 읽으면서 느끼는 바가 적지 않은데, 그 중 하나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 자신을 표현하실 때에 독자인 인간을 염두하신 흔적을 강하게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언어에 구속될 수 없는 절대성과 고차원성을 갖고 계시기에 인간의 지혜와 시각에서 당신을 이해시키기 위한 배려심이 성경 속에 충만하게 함축되어 있다는 얘기다. 이는 하나님 자신을 의인화한 메타포에서 충분히 설명된다. 인간의 메타포가 기술이라면 하나님의 메타포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언어는 그 본질성과 고차원성에서 인간의 언어를 압도한다.

  피곤하다, 후회하다, 계획을 바꾸다, 등의 언어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신성과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으신 하나님께서 어찌 피곤하시고 후회하시며 계획을 바꾸실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고차원적 배려가 성경 속의 메타포적 활자에 오롯이 함의되어 있기에 성경은 신이 전하는 러브스토리이다.

  영적 언어의 연금술사로 불리는 마크 부캐넌의 신간 『하나님의 휴식』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는 제목을 전면에 배치했다. 피곤치 아니하신 하나님께서 휴식하신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오류인가, 라는 의문과 어리둥절함으로 이 책은 내게 다가왔다. 하지만 책을 읽어가면서 어느새 의문과 어리둥절함은 산산조각 나고 진한 감동과 강한 도전으로 승화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책의 막장을 확인할 때까지 부캐넌 특유의 아름다운 언어는 스피드의 세계에 살고 있는 분주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휴식>의 웅숭깊은 본질을 증거한다.

  마크 부캐넌은 이 책을 통하여 하나님이 요구하는 <휴식>의 본질과 성질에 대해 얘기한다.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일곱 번째 날에는 쉴 수밖에 없으셨던 하나님의 휴식 속에서 인간을 향한 고차원적 사랑이 함의되어 있음을 뛰어난 문학적 언어로 풀어내고 있다. 과연 영적 언어의 마술사답게 신학의 깊이와 문학의 아름다움을 접목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몰입도를 배가시키고 있다.

  저자가 여섯 번째 챕터에서 출애굽기와 신명기에서 거론된 안식일의 의미적 차이를 상세하게 풀이한 부분은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안식일의 기초를 창조에 두고 있음이 출애굽기라면, 신명기는 애굽에서의 해방에 두고 있음을 지적한다. 출애굽기에서는 에덴동산을 기억하고, 위를 올려다보고 있으며, 신학적 근거를 제공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일깨워주는 반면 신명기에서는 애굽을 기억하고, 뒤를 돌아보고 있으며, 역사적 정당성을 제공하며, 하나님의 구속을 일깨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최종적으로 출애굽기는 <초청>이고, 신명기는 <경고>라 정리한다. 이 얼마나 깊이있는 통찰인가.

  저자의 안식 예찬이 더욱 감동스러운 이유는 안식을 그저 계명을 지키는 차원에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순종과 예배와 겸손과 자유의 의미까지 넓고 깊게 포괄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본받음으로 하나님이 되려는 시도를 멈추는 것'이 안식일에 대한 훌륭한 정의라고 갈파한 후 안식을 통하여 우리의 연약함과 왜소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위대하심을 찬양하게 되는 고결한 의식에 참예할 수 있음을 일깨우고 있다. 이 또한 얼마나 웅숭깊은 해석인가.

  하나님의 안식은 일을 끝마친 것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는 저자의 언급에 나는 오롯이 동의한다. 하나님의 안식은 일을 잘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특별 수당이 아닌 것이다. 안식은 그저 순수한 선물이다. 일의 결과를 예견치 않고 그냥 쉬어야만 하는 하나님의 고차원적인 배려이며 지시이다. 일상에서 완결되지 않은 것을 확인하면서도 쉬어야만 하는 것, 그 모든 것들 속에서 죄책감이나 미안한 마음 없이 취할 수 있는 휴식,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순수한 선물로 주신 안식의 본질이다.

  우리는 너무 빠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작금의 인류는 속도와의 전쟁 속에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지나치게 분주하다. 이미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빛의 속도에 비유될 정도이며 예술과 문화를 위시하여 삶 속 작은 부분 하나 하나까지 초고속으로 변화하고 흘러간다. 이러한 고속도의 시대에서 빠름은 선이 되고 느림은 악이 된다. '빨리빨리'를 외치며 쉬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가는 현대인들에게 수천 년 전에 계명으로까지 못박으신 하나님의 요구는 점점 녹록해져만 가는 듯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주의 말씀은 영원한 법이다. 아무리 시대와 문화가 빠르고 다양하게 바뀐다 할지라도 창세 전에 계획하신 하나님의 위엄한 요구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각에도 정해진 날에 안식할 것을 요구하신다. 이는 명령이고, 이치이며, 질서이자, 사랑이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에 승리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을 왕왕 인식하게 된다. 이는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라는 성경구절을 묵상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안식을 통하여 일상에서 천국을 맛보고, 포도주 한 잔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맛보며, 근육의 통증 속에서 또는 우리 이마에 흐르는 땀 속에서 기쁨을 맛보기를 기도한다. 내가 나서서 하는 운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운행에 그저 가만히 있음으로 침투되고 싶다. 아직도 요원하기만 한 완전한 주일성수를 다짐하며 한 권의 책을 통해 얻은 감동과 도전을 가슴속 깊은 곳으로 밀어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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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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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윤석전 지음 / 연세말씀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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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게 된다. 그분의 신성은 물론, 일하시는 방법과 스타일, 그리고 좋아하시는 것과 싫어하시는 것에 대한 깊이있는 학습이 가능하다. 성경을 묵상하면서 가장 흥미롭게 알게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역을 실행하시면서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으시다는 것이다. 철저한 <하나님중심주의>의 기본적 토양 위에서 <인간중심주의>라는 나무를 세우시면서 당신의 작정을 완성하신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혼자 일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그분의 성품이요, 그분의 방식이다. 무슨 일을 하시든지 항상 인간과 함께 일하신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지 않았다면 홍해는 갈라지지 않았을 것이요, 다윗이 용기있게 나서지 않았다면 골리앗은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며, 베드로의 설교가 없었다면 한 번에 3,000명이 회개하는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기적의 역사를 작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시요, 실행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자명하지만, 그런 이적의 도구로 사용된 존귀한 존재가 인간이란 사실 또한 자명하다. 즉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쓰임이라는 오묘한 조화와 연합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윤석전 목사는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에 어떤 사람을 지목하여 사용하시는지를 설교한다. 총 아홉 개의 카테고리 안에서 하나님의 용인술을 설파하는 윤 목사는 결국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라 귀결하여 정리하고 있다. 비록 말을 못한다 할지라도, 리더십이 형편없다 할지라도, 추진력이 부족하고 아는 것이 미흡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여 살아가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세워진 교회에서도 언쟁과 다툼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목사를 위시하여 교회 내의 수많은 조직구조는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파생된 작은 권위들의 유기적 생명체라 할 수 있다. <토론>보다는 <순종>이, <지시>보다는 <섬김>이 필요한 것이 교회 조직이다. 하지만 작금의 한국 교회의 현주소를 보면 개인의 달란트를 확인하려는 문화가 팽배한 느낌이다. 목사는 목사대로, 장로는 장로대로, 집사는 집사대로, 평신도는 평신도대로 자신을 낮추고 섬기며 순종하는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 아니라, 자신을 부각하고 자신의 의견만을 주장하며 상호간에 토론하면서 사역을 감당하는 세상적인 리더십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현재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점들은 세상적 리더십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리더십에 대한 분별력의 부재에서 발생하는 결과가 아닌가 싶어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교회를 다니면서 매번 확인하는 것은 교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못난 사람이 아니라 잘난 사람이라는 점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못난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언제나 잘난 것이 문제가 된다. 그 잘남들의 부딪힘과 논쟁을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는 분란이 일어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용인술을 보라.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이끄시어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셨고, 말 못하는 사람 모세를 선택하여 당신의 백성을 출애굽하셨고, 양치기 소년이었던 한 집안의 막내 아들 다윗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정시대를 시작하셨으며, 예수를 지나치게 핍박했던 자를 선택하시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도로 만드셨다.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나약함이나 부족함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연약함 안에서 당신의 찬란한 계획의 불꽃을 준비하신다. 말과 외모와 가문과 지식 등의 외연적 겉치레가 아닌 오직 <중심>만을 보시는 하나님, 바로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용인술의 실체다. 

  마치 주일 예배의 설교처럼 무겁고 깊이있게 설파하는 윤석전 목사의 가르침은 이 시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의 필요충분조건이 무엇인지를 웅숭깊게 정리한다. 기독교의 핵심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부활>이라는 절대 명제를 부여잡고, 겸손하며 섬김으로 일하는 자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인사원칙을 재확인한다. 언제나 하나님의 명령과 요구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순종의 삶을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시다. 예수가 하나님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포함하는 현현(顯現)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담고 있는 자를 찾고 계신 것이다.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에는 수많은 리더십이 존재한다. 아무리 시대가 바뀐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어도 주의 말씀은 영원하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작정과 섭리는 불변하다. 이는 하나님의 용인술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성령에 충만함을 입은 자, 바로 그런 사람을 사용하시어 당신의 구속사를 진행하신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인사권에 침투되어 하나님의 역사에 소중히 쓰임을 받는, 그리하여 먼 훗날 면류관으로 보상받는 소망의 백성이 되기를 기도하며 나아갈 뿐이다.
 

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최고의 권위를 두고 절대 복종하며 순종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목숨이라도 내어놓고 과감하게 복종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또 하나님은 그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즉각 움직이는 사람을 쓰십니다. 내일로 모레로 미루는 사람에게 일을 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p. 37>

우리는 꿈이나 환상, 직감에 매달리지 말고 언제나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을 최우선 순위에 놓아야 합니다. 내 영감이라도 성경과 다르면 깨끗하게 포기하고 버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견고한 터요,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진리임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p.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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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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