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독서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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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좋은 책은 항상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변화하게 한다. 책이 세계를 구원하지는 못하더라도 변혁의 동기를 부여하고 고취한다. 인류사에 남겨진 수많은 고전을 보라. 그것들은 인간을 탐구하고 시대를 조명하면서 인간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해왔다. 한 시대 공동체 구성원들의 지적 화두를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고전 속에는 오롯이 새겨져 있다. 이것이 없는 책은 고전의 반열에 오르지 않는다. 그러기에 고전은 뜨겁다.

  우리는 고전을 통해 인간의 당위적 가치와 그 시대의 고민에 직면하게 된다. 대작가의 혼과 숨결은 텍스트 곳곳에서 읽는이의 머리와 가슴을 진동시킨다. 고전은 '입증'된 텍스트다. 한 시대의 명품 텍스트가 후손으로부터 계속해서 읽히고 또 읽혀옴으로써 그 입증을 더욱 공고히 한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될 때, 길이 멀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고전을 통해 참된 길이 무엇인지를 교훈받는다.

  '지식소매상'임을 자처하는 우리시대 대표 진보 지식인 유시민은 신간 『청춘의 독서』를 통해 고전에 대해 얘기한다. 저자 자신이 젊은 시절 읽고 느꼈던 고전 중 14편을 선정하여 독자에게 소개한다. 저자가 전하는 14편의 고전들은 모두 한 시대를 풍미했고 지금의 시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찬란한 명저들이다. 저자는 저작마다 담긴 웅숭깊은 가치와 다양한 시대성에 대해 수준높은 식견과 진지한 자세로 풀이한다.

  유시민은 역시 진보 지식인답다. 훌륭한 명저였지만 서슬퍼런 정권의 칼날로 인해 공개적으로 읽기가 어려웠던 시대의 금서들을 리스트 위에 올려놓았다.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은 책 속에 담긴 빛나는 가치와 정신 때문에 오히려 제도권으로부터 핍박을 받은 작품들이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지금이 확실히 좋은 시대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수십 년 전의 '그때'보다는 상대적으로 나아진 것만큼은 사실이다. 이제 『전환시대의 논리』를 숨어서 읽고, 『공산당 선언』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남산에 끌려가는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젊은 시절 어렵게 구해 아무도 없는 곳에 숨어서 위대한 금서들을 탐독했다는 저자의 솔직한 고백을 통해 '진실'이 역사를 어떻게 압도해가는지를 새삼 실감한다.

  이 책의 가치는 다양함에 있다. 인간, 역사, 철학, 정치, 사회, 과학에 이르기까지 인류를 다채로운 각도와 방법으로 관류했던 고전들을 선택했다. 도스토옙스키에서 카(E. H. Carr)에 이르기까지 세기의 천재들이 뿜어내는 텍스트는 하나같이 역동적이며 찬란스럽다. 기존의 사상·관습과의 단절을 필두로 고전을 만든 위대한 천재들은 항상 새로운 것으로써 기존의 것들을 들추어봤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른 '무엇'을 생산 또는 재창조했다. 이러한 고전의 혁신성은 항상 시대성의 전복과 맞물려 발생했던 특징이다.

  고전의 태동적 진보성은 유시민의 평소 성향을 고려하면 매우 적확한 조합으로 연결된다. 저자는 한국 정치·지식계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편에 속한다. 그의 정치적 신념과 정책적 행위는 기존의 것을 혁신하는데 많은 부분 닿아 있다. 이러한 저자의 진보성은 시대 안에서 시대를 혁신하려 했던 고전의 성질과도 상통한다. 난 믿는다. 모든 고전은 태생적으로 진보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E. H. 카가 불후의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강변했듯이 인간 능력의 계속적인 발전에 대한 믿음이 역사의 진보를 입증하며 추동한다. 그러기에 인류사의 수많은 고전들은 각 시대마다 다르게 읽히며 후손들에게 올바른 길을 찾아줄 수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각 고전 속에 살아 숨쉬는 다양한 진리와 가르침을 풀어놓는다. 기존의 해설서와는 별도로 저자만의 시각과 사유로 각 고전의 단물을 빨아내는 해석이 인상적이다. 젊은 시절 날카로운 첫키스와 같은 책 《죄와 벌》을 통해 평범한 다수가 갖는 강력한 힘과 선한 수단과 목적 사이의 인과관계를 사유했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통해 지식인으로서의 의무를 배웠고, 《공산당 선언》을 읽으며 혁명의 가치와 매력에 경도되었다. 《맹자》에서 진정한 보수守가 무엇인지를 알았고, 《사기》를 통해 권력의 단면과 정치의 속성을 배웠다. 《진보와 빈곤》을 읽고 문명과 빈곤의 함수관계를 학습했고, 《역사란 무엇인가》를 통해 역사와 사회에 대한 개안을 일으켰다.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부분은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편이다. 이 소설은 개인과 언론 사이의 무서운 구조적 관계성에 대해 묘파한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카타리나와 신문사 '차이퉁'의 대립은 당시 독일에서 작가 자신과 일간지 <빌트>와의 대결구도를 그대로 상징한다. 판매부수 400만 부로 독일 내 단연 1위 신문 <빌트>는 논조가 매우 보수적이며 때로는 극우적이다. 하지만 많이 팔린다고 해서 '일등 신문'으로 불리지는 않는다. 비록 <빌트>보다 판매량이 많진 않지만 품위 있고 사회적 영향력을 갖춘 다른 신문들이 균형감 있고 다양하게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한국의 현실과 대조한다. 1위부터 3위까지 모두 '빌트'로 점령당한, 자타가 모두 '일등 신문'이라고 부르며 읽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에 빠져 있는 한국 언론시장의 세태에 한숨을 짓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공급받는 '정보'와 '진실'은 일차적으로 미디어의 프레임을 통해 가공된 것들이다. 신문의 헤드라인이 갖는 엄청난 '폭력'에 대해 고발하는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유시민이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읽었을지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총 세 권의 역사 관련 책을 집필한 저자의 입장에서, 동시에 지식소매상을 자처하는 지식인으로서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서 있는 고전이다. 저자는 자신의 50년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책으로 《역사란 무엇인가》를 꼽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삶이 전면적인 전환점을 맞이했다고 고백한다. 이는 저자 자신이 카(Carr)가 제기한 역사의 진보적 속성과 역사가(지식인)의 임무에 대해 전회에 가까운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인간 능력의 점진적 발전에 대한 믿음을 전제하는 카의 논증에 깊은 울림을 선사받은 것이다. 랑케의 실증주의 역사관으로 한국 현대사 50년을 담아내기는 역부족이다. 인간은 분명 발전했고 역사 또한 분명 진보했기 때문이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이미 역사학의 교과서가 되어 있다. 비단 역사가뿐만 아니라 언론인, 지식인, 정치인, 경제인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읽어야 할 불후의 명저다. 물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 또한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이다. 카의 불후의 명저를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책으로 꼽는다는 점에서 유시민과 내 기호가 일치한다. 흐뭇한 일이다.

  나는 지쳤다. 존경했던 이들은 먼 곳으로 떠났고, 사랑하는 동료들은 시대의 삭풍에 떨고 있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겠으나 그것을 어떻게 이루어야 할지 몰라 번민한다. 내가 받들고자 하는 사람들은 나를 외면하고, 같은 방향을 보고 걷는 사람들과도 손을 잡기가 어렵다. 가끔 나는 내 자신이 물 밖으로 팽개쳐진 물고기 같다고 느낀다.   <p. 312>

  유시민이 고독해 보인다. 책 말미에 고백한 위의 문장은 저자가 현재 얼마나 외로운 심리상태에 빠져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책 곳곳에서 길을 잃은 한 지식인의 고독과 번민을 느낀다. 그는 왜 길을 잃었을까. 무엇이 두려운 걸까. 혹 자신의 길과 지표가 되어 주었던 한 사람의 죽음이 그를 그토록 외롭고 두렵게 만든 것은 아닐까. 자신의 삶과 정치에서 이정표과 같은 역할을 해주었던 멘토의 부재와 같은 뜻과 이상을 지녔던 동지들의 초토화를 지켜보며 그는 얼마나 많은 혼란을 겪었을까. 어쩌면 유시민은 자신이 처한 현실의 외로움을 동일한 현실세계가 아닌 인류의 위대한 고전들 속에서 해결받고 싶었는지 모른다.

  많이 외롭고 두려웠던 것 이상으로 책은 정말 잘 썼다. 매우 수준있고 진지한 책이다. 유시민의 고독과 번민을 마음 깊이 이해한다. 그리고 그의 모든 저작 중 가장 잘 쓴 『청춘의 독서』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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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한 글감옥 - 조정래 작가생활 40년 자전에세이
조정래 지음 / 시사IN북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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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 소설가가 자신의 일생에서 세 편의 대하소설을 남긴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사실 대하소설은 소설가의 인생에서 단 한 편도 남기기 쉽지 않은 영역이다. 세계 문학사에서도 이례적인 일을 한국의 소설가 조정래는 이루었다. 이백자 원고지 오만 장이 넘는 거대한 서사 물결은 조정래 문학의 장엄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문장은 누구나 길게 쓸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는 아무나 길게 쓸 수 없는 법이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의 저자 조정래는 그의 문학적 풍성함과는 달리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껏 써오지 않았다. 세 편의 대하소설을 써오면서 한 사람의 소설가로서, 동시에 한 인간으로서 얼마나 많은 번민과 난관이 있었겠는가. 그는 대하소설을 쓰면서도 단·장편과 산문집 집필도 꾸준히 병행해왔다. 그야말로 글로 '감옥'을 살아왔던 것이다. 신간 『황홀한 글감옥』은 글로 감옥을 살아왔던 소설가 조정래의 내면과 철학을 담은 자전 에세이다. 

  책의 얼개는 간단하다. 문학에 관심있는 대학생들의 질문과 그에 대한 저자의 답변으로 구성되었다. 수준있고 구체적인 다양한 질문들은 평소 꾸준히 저자에게 전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중 가장 의미있고 글로 남길만한 가치가 있는 84개의 질문을 추려서 정리했다. 아직까지 작품 외의 다른 텍스트로 자신을 드러낸 적이 없는 저자이기에 문학 청년들로서 궁금함이 적지 않았을 게다. 저자 개인의 신상에서부터 세 편의 대하소설 집필을 비롯한 문학 전반에 걸친 궁금증, 더 나아가 인생 철학에 이르기까지 풍성한 질문들이 이 책의 가치를 추동한다.

  이 책이 자못 긴요한 이유는 일반 독자를 아우르면서도 문학의 길을 가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좋은 안내서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삶과 문학에 대해 설파한다. 자신의 문학 인생 40년을 통해 경험하고 느끼고 깨달은 지혜의 보물들을 풀어놓고 있다. 조정래 특유의 강한 어조와 뚜렷한 철학이 책 곳곳에 잘 배어 있다. 

  이 책이 주는 가장 강렬한 울림은 '글'에 대한 소설가 조정래의 경외심이다. 저자는 글쟁이로서 글에 대한 자못 진지한 자세를 견지한다. 누구나 처음부터 글을 잘 쓸 수 없으며 각고의 노력과 투혼으로부터 훌륭한 글쓰기는 완성된다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신념이다. 세계 문학사를 다시 썼던 굴지의 작가들은 모두 그 '고통'을 감내했다. 질문자들의 질문 중에 맞춤법과 어법이 틀린 것을 교정해주고, 우문에 대한 구체적인 조언을 달아놓는 저자의 엄숙함에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조정래의 문학 신념이 웅숭깊다. 그것은 바로 '진실'이다. 형태와 방법은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문학인은 반드시 진실만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비인간성과 불의와 편법으로 점철된 작금의 세계에서 결코 양보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진실이라는 것이다. 옳고, 바르고, 참된 것을 위하여 모든 비인간적인 것에 저항하고 맞서야 하는 것이 작가의 소임이라고 외치는 조정래의 모습에서 대작가로서의 무게감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그의 말대로 작가는 인류의 스승이며 그 시대의 산소인 것이다.

  책 곳곳에 시詩에 대한 작가의 애틋한 선망을 엿볼 수 있다. 아내 김초혜 시인에 대한 저자의 사랑도 시에 대한 선망과 함께 자주 표현되고 있다. 세계의 모든 소설가들이 시인을 질투했던 것과 동시에 세상의 모든 시인들이 소설가에 대해 우월감을 가졌던 것을 저자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저자는 한용운, 김소월, 조지훈, 김영랑, 서정주, 박목월의 시 한 문장씩을 인용하며 시인이 지닌 천부적인 문학적 역량을 부러워한다. 시가 갖는 '응축'의 힘은 소설의 '전개'를 압도하며 포괄한다는 게 저자의 견해다. 시인은 소설보다 시가 우월한 문학이라고 거만할 수 있는 것이고 소설가는 회복할 길 없는 열등감을 시인에게 느끼는 것, 이라며 시인에 대한 절대적인 경외를 보내는 저자의 시샘을 이해할 만하다. 본래 세계의 모든 시인은, '천재'였기 때문이다.

  조정래의 네 번째 대하소설을 기대하기는 무리인 것으로 보인다. 조정래 자신이 이제 더 이상 대하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단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세 편의 대하소설을 통해 한국 문학사에서 조정래가 쳐올린 공의 높이는 결코 낮지 않다. 이 땅의 많은 독자들은 『태백산맥』을 통해 알았고, 『아리랑』을 통해 느꼈으며, 『한강』을 통해 깨달았다. 충분하고 풍성하며 모자람이 없지만, 그래도 '한 편 더'를 기대하는 것은 저자의 인권(?)을 생각지 않은 너무 지나친 욕심일까.

  나는 본래 세상의 모든 글쟁이들을 존경하고 경외해왔다. 온라인상에 책을 읽고 글로 남기는 서평쓰기의 기본 전제는 작가에 대한 존경이다. 물론 지나친 혹평으로 작가와 텍스트를 지탄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조차도 기본적인 존경심 속에 포괄된다. 문인들 사이에서 "시 쓰다 안 되면 소설 쓰고, 소설 쓰다 안 되면 평론 쓴다"는 말이 있다. '창조'적 텍스트는 '비판'적 텍스트를 압도한다. 리뷰어로서의 오래된 신념이다. 이를 다시 한 번 곱씹게 했다는 점에서 조정래의 신간 『황홀한 글감옥』은 나에게 매우 소중한 책이다. 일독을 자신있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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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 대통령 - 노무현, 서거와 추모의 기록 1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한걸음더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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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위의 이름 석자가 내게 의미하는 바는 매우 크다. 나는 한때 노무현에 울었고 노무현에 웃었다. 그의 말과 행동을 주목했고 내 가치관에 대입시켰다. 한국에 이런 정치인도 있구나, 하며 뿌듯해 했다. 물론 그의 모든 것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방향성만큼은 항상 옳았다. 그랬기에 그의 행적에 따라 내 울음과 웃음은 교차되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크게 웃었다. 그가 탄핵되었을 때 울었다. 그리고 그가 죽었을 때 '엄청' '크게' 울었다.

  내가 노무현에 열광했던 이유는 분명하다. 기존의 한국 정치인과는 다른 무언가를 내재했기 때문이다. 자기를 버릴줄 아는 소신과 용기는 한국 정치에서 이론으로만 작동되었던 가치였다. 노무현이 다른 정치인과 구별되었던 것은 그것을 확고한 행동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3당 합당이라는 거대한 대세를 홀로 거슬렀고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예고된 낙선을 감내했다. 어쩌면 그의 이러한 '바보'스러운 모습이 그의 자산이 되었고 결국 국민의 마음음 움직이면서 대통령의 권좌에까지 올랐던 것이리라.

  지난 봄 국민들을 통탄했다. 일국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내던지는 엽기적인 사태를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통탄스러움 속에는 놀람 외의 보다 본질적인 감정이 스며있었다. 그것은 강렬한 '분노'였다. 노무현의 죽음으로 촉발된 전국적인 공분憤 사태는 '기가막힘'과 '왜', '후회'와 '자기환멸'이 서로 혼합되어 만들어내는 가슴저린 공황이었다. 그렇게 전국민의 눈물바다는 일주일간 계속해서 범람했다.

  사람사는세상 노무현 재단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도서 『내 마음속 대통령』을 통해 당시의 생동감 있는 사실을 정리했다. '노무현, 서거와 추모의 기록 I'이라는 표지 전면의 문구가 말해주듯 이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다. 국민에게 미처 알려지지 못한 사실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공개된 글과 편지, 지인들의 풍성한 인터뷰와 전국 각지에서 펼쳐졌던 추모 열기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마음은 무거워진다. 노무현의 죽음과 온국민의 추모가 교차하며 생산해내는 의미와 가치를 가슴 속 한 켠으로 밀어넣는다.

  이 책의 가장 큰 유의미성은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사실들을 확인하는데 있다. 소개된 것들 가운데 가장 가슴을 뒤흔든 건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낸 노무현 전 대통령의 편지였다. 4월에 쓴 노 대통령의 편지에는 수사팀의 교체와 관련하여 자신의 진솔한 심정이 그대로 묻어있다. 진행되고 있는 수사의 부당성과 상식을 벗어나는 검찰의 태도에 대해 피의자로서의 고통과 답답함이 잘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결국 그 편지는 참모진과의 협의를 거쳐 부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된다. 그는 왜 청원을 포기한 걸까.

  그 뒤 계속해서 공개되는 컴퓨터 속 저장된 글을 통해 노 대통령이 느꼈을 참담함과 비애, 좌절과 굴욕감을 충분히 느끼게 된다. 그는 "남은 인생에서 해보고 싶었던 모든 꿈을 접습니다"라는 절망스러운 고백까지 하고 있다.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그리고 얼마나 굴욕적이었을까. 그가 자신의 최소한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 허덕이고 있을 때 검찰의 수사는 오리무중이었고 언론은 계속해서 호들갑이었다. 어쩌면 그의 죽음은 그때 이미 준비되고 있었는지 모른다.

  노 대통령의 비공개된 글과 편지 외에도 이 책은 그의 죽음 전후의 상황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쓰고 있다. 주관적 감정 표출보다는 객관적 사실을 열거함으로써 추모집이라는 책의 성격과 가치를 훼손하지 않고 있다. 노 대통령의 죽음이 어떤 배경에서 발생되었고, 전국적인 추모열기는 어떠했으며,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지에 대해 잘 정리했다. 책의 뒷부분에는 수십여 페이지를 할애해서 몇몇 추모 사진들을 수록하기도 했다. 한 장 한 장 넘기는 동안 어느덧 눈시울은 젖는다.

  나는 노무현의 죽음이라는 테마에서 검찰과 언론의 책임론을 굳이 제기하고 싶진 않다. 물론 검찰은 무리한 표적수사를 감행했고 언론은 무책임하게 보도했다. 검찰로서 과연 정당한 수사를 실시했는가, 또한 언론으로서 보도 윤리에 어긋나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에서 검찰과 언론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검찰과 언론에 대한 국민의 비판은 당연하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노무현의 죽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정신과 의무이다. 그가 평생을 신념으로 안고 살아왔던 화해와 통합의 대한민국을 우리는 성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의 죽음의 의미를 한낱 공분과 책임공방으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더 나은 대한민국을 위해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응시하며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어쩌면 그것이 노무현 자신이 죽음으로써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의 핵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더라도 떳떳하게 정의를 말할 수 있고 떳떳하게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소원한다. '상식'의 크기가 인간 삶의 입증을 결정한다. 우리는 상식이 당위에서 존재로 옮겨가는 세계의 실현을 위해 힘써야 한다. 바로 그 동기부여와 연장선상에 '노무현'이라는 이름 석자가 있다. 훗날 내 아이와 후손에게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고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반드시 전하리라. 

  내가 너무 노무현의 입장에 서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가 너무 그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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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희, 사소한 아이의 소소한 행복
최강희 지음 / 북노마드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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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았다. 

  개인적으로 연예인의 책 출간을 냉소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간 만나왔던 연예인들의 책은 나름의 개성과 예상 외의 만족으로 나를 즐겁게 했다. 신현준의 『고백』에서 그의 진지한 삶의 태도와 깊은 신앙심을 보았다. 차인표의 『잘가는 언덕』에서는 탤런트가 글까지 잘 쓸수 있구나, 하고 감탄했다. 손미나의 여행기는 여행의 외연이 아닌 내면을 조명했기에 극찬했다. 션·정혜영 부부의 에세이를 통해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색깔과 따뜻한 가족애를 탐구했다. 항상 만족스러웠다. 중요한 건 텍스트 자체이기 때문이다.

  배우 최강희를 좋아한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연기를 잘하기 때문이다. 드라마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 펼친 최강희의 연기는 정이현이 창조한 오은수라는 캐릭터를 자신만의 색깔로 재창조한 모습을 보여줬다. 영화 <애자>에서 그녀의 눈물연기는 작품의 완성도에 비하면 실로 아까운 열연이었다. 최강희는 항상 성실했다. '4차원'이라는 수식어는 무의미하다. 배우는 연기만 잘하면 된다. 가수가 노래만 잘하면 그만이듯이.

  지금껏 읽어왔던 연예인의 책들이 준 만족감과 배우 최강희의 성실함을 믿었기에 그녀의 신간은 어렵지 않게 내 손에 안착했다. 그것이 속은 것임을 모른채 말이다. 중고생 일기 수준의 낙서와 연결고리 없이 나열된 사진들은 진지한 독서를 차단시킨다. 이 정도 수준의 에세이를 만들기 위해 양장본을 두르고 올칼라로 돈을 바를 필요가 없다. 나무는 한정되어 있고 종이는 비싸다.

  마치 네이버 검색창에서 '최강희'라고 친 후 나오는 무수한 사진들을 보는 것 같다. 각 페이지를 도배하고 있는 사진들이 왜 그자리에 무슨 이유로 배치되어야 하는지 납득하기 힘들다. 사진과 함께 수록된 최강희의 시와 수필들도 수준 미달이다. 텍스트라 해봐야 수많은 사진들에 가려 얼마 있지도 않거니와 하나같이 유치찬란한 문장들뿐이다. 사진은 글을 보조하지 못하고 글은 사진을 견인하지 못한다. 아무리 포토에세이라곤 하지만 완성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진 이상 최소한의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결락된 책은 나무(종이)에 대한 모독이자 독자에 대한 불손이다.

  최강희의 사진을 보고 싶다면 인터넷 검색으로 충분하다. 책을 덮은 후 머릿속에 남는 것은 최강희의 뽀얀 피부와 이쁜 다리뿐이다. 완독하는데 불과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지만 시간은 금이라는 삶의 진리를 새삼 곱씹게 된다. 이런 싸구려 에세이를 위해 지갑을 열고 시간을 낭비한 내 자신이 초라하다.

  리뷰 쓰는 것조차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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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 영원히 철들지 않는 남자들의 문화심리학
김정운 지음 / 쌤앤파커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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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이가 들어가며 점점 깨닫는 것 중 하나는 남자와 여자의 명확한 상이함이다. 동일한 종족이면서도 남자와 여자는 많은 차이를 가진다. 이러한 차이는 종국 두 성별간의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왜 수많은 연인들이 이별을 하는가. 왜 그리도 많은 부부들이 이혼을 하는가. 이는 너무 다른 두 성별의 특질에 기인한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자세의 크기에 따라 두 존재의 친밀감의 완성도는 결정된다. 상대의 호르몬 분비와 사고의 기작이 나와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최대한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노력을 통해 행복한 이성애는 완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이론과 실천 사이에는 항상 괴리가 따르는 법. 더욱이 남녀의 사랑만큼 그 괴리감이 농밀한 곳은 없다. 어렵고 어렵도다. 남자에게는 여자가, 여자에게는 남자가 말이다.

  남녀의 차이에 대한 도서들은 전세계적으로 꾸준히 출간되어 왔다. 대표적으로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가 있다. 이 책은 출간된 지 15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꾸준히 읽혀지고 있는 남녀관계의 바이블이다. 그 외 수많은 저서들이 남녀의 태생적 차이와 이를 증거로 한 연애와 결혼에 대한 조언들을 증거해왔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의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도 이러한 책더미에 한 권을 더 보태고 있는 책이다. 단 남녀간의 차이를 넘어 남자와 관련된 문화 전반에 걸친 심리학적 고찰을 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존재성은 특별하다.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는 충격적인 제목은 저자의 논지를 유도하기 위한 익살스런 센스로 풀이된다. 저자는 결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하지 않는다. 말이 그렇다는 얘기다.

  이 책은 심리학을 다룬 책답지 않게 매우 재미있게 읽힌다. 남성이 태생적으로 갖는 특성들을 문화심리학의 관점에서 고찰한다. 무엇보다 매우 쉽고 유연하게 풀어쓴 점이 돋보인다. 또한 저자 특유의 유려하고 코믹한 문체도 독자로부터 재미있게 읽히는 데 한몫 한다. 저자 자신의 경험과 다양한 실례, 적절한 인용과 알기 쉬운 설명 등은 인문학에 대한 대중의 거부감을 타파하는 이 책의 강점들이다.

  문화와 사회 전반에 걸친 풍성한 내용들로 인문학 서적의 범주를 넘는 확장성을 지닌 점도 이 책이 주는 풍성함이다. 남녀의 심리학적 차이에서부터 회사 경영에 도움이 되는 정보들까지 솔깃한 얘기거리들이 풍성하다. 연애법과 결혼생활의 조언도 담고 있다. 무엇보다 한 사람의 남자로서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인생을 살아야 하는 외로운 의무에 대해 재미와 행복의 의미를 불어넣고 있다.

  저자가 전하는 논지의 핵심은 간명하다. 바로 '행복'이다. 저자는 우리사회의 행복의 요원을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찾는다. 경제나 사회구조의 문제로 말하지 않는다. 보다 본질의 문제를 지적한다. '사람'이 문제라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의 본질은 바로 '재미없게 사는 남자들'에 있다고 진단한다. 세계의 모든 문화와 관습은 결국 인간이 만든 것이다. 우리사회가 재미없고 행복하지 못한 이유의 문화심리학적 해석의 키워드로서 바로 불행한 남자들이 존재한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저자의 진단과 해석 위에 쓰여진 '남성 행복론'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이 많이 팔려 자신의 소원인 캠핑카를 하루속히 장만하고 싶다고 토로한다. 이 토로에는 저자의 인생철학이 잘 묻어있다. 그것은 바로 재미있는 삶이다. 매사가 재미로 점철될 수는 없다. 하지만 죽지 못해 사는 것보다는 사는 게 재미있어 살아가는 게 훨씬 나은 인생이 아닌가.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재미있게 살아야 하지 않는가.

  재미없게 사는 것만큼 불행한 삶은 없다. 재미는 신이 인간에게 선사한 가장 위대한 축복 중 하나이다. 일과 사랑, 관심과 취미, 삶과 신앙 등 인간이 행하는 모든 영역에서 재미는 행복을 증명하는 보증수표다. 우리의 삶이, 아니 이 땅의 남자들의 삶이 왜, 어떻게, 재미없고 희망없이 흘러왔는지 우리는 깊이 반추해야만 한다. 경제나 사회의 문제로 환원할 일이 아니다. 보다 본질의 접근이 있어야 한다. 존재론적 탐구가 필요한 것이다. 이 책의 긴요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재미'있는 삶을 위하여 남자의 '재미'에 대해 매우 '재미'있는 문체로 탐구한 이 한 권의 '재미'있는 책을 '재미'를 갈구하는 이 땅의 수많은 남성들에게 일독 추천하는 바이다. 참 '재미'있는 인문학 에세이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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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2009-11-02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추천하는 이들이 주변에 몇 있던데 꼭 읽어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