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두 얼굴 - 위대한 명성 뒤에 가려진 지식인의 이중성
폴 존슨 지음, 윤철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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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폴 존슨의 <지식인의 두 얼굴>은 매우 흥미로운 책이다. 대표적인 우파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이 선정한 지식인들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저자의 비판 수준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는 근거없는 험담이 아닌 사실을 갖춘 공격이라는 데 있다. 저자는 사실적 논거와 탄탄한 논리를 특유의 힘있고 맛있는 문체로 잘 버무려냈다.

   저자가 공격하는 지식인의 범위는 폭넓다. 철학자와 사상가, 작가와 평론가에 이르기까지 꽤 다양하다. 저자의 칼날이 닿는 대상은 가장 유명한 교육론 <에밀>의 저자이자 '사회계약론'의 창시자 장 자크 루소를 시작으로 다양한 좌파 철학자와 작가들을 관통하면서 '언어학 혁신의 아버지' 노엄 촘스키까지 도달한다. 거론된 지식인들은 그들이 제기했던 사상과 이론, 저서와 삶의 태도 등 내·외면적 존재성을 저자에 의해 처참하게 난자 당한다.

   내가 이 책에 주목한 이유는 저자의 논증이 내 입장과 대부분 일치한다는 데 있다. 특히 카를 마르크스, 버트런드 러셀, 장 폴 사르트르에 대한 저자의 비판논리는 내 견해와 완벽하게 부합한다. 개인적으로 변형되고 변질된 '좌파적 사고'를 싫어했고 멀리해왔다. 본래 좌파적 사고의 뿌리는 인간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휴머니즘이다. 19세기 원류 좌파들은 휴머니스트가 많았다. 그러나 20세기에 쉬지 않고 분출하던 좌파 운동은 폭력적인 집단 광기에 불과했다. 그것은 나치즘과 똑같이 통제되지 않은 야수성을 드러내면서도 또 다른 전체주의全體主義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된 지식인과 독재자들에 의해 20세기는 철저히 유린당했다.

   고백하자면, 일례로 사르트르를 보자. 그에 대한 나의 강한 분노는 오래된 경험에서 비롯됐다. 이십 대 초, 종교적(기독교적) 교리에 구속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나에게 실존주의實存主義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철학이었다. '신神의 예정'이라는 기독교의 핵심교리는 사르트르의 행위의 철학이 안내한 매혹적인 '자유의지(free will)'에 의해 멀리 떠나갔다. 시간이 지나 사르트르식 실존철학은 허울뿐인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까지 나는 많은 것을 잃었고 적지 않은 대가를 지불했다. 지금 생각하면 쓰레기와 같은 <존재와 무>를 여러 해설서와 함께 오기로 읽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
참으로 안타깝다. 불과 십수 년 만에 발생한 내 변화의 본질은 '진실의 깨달음'에 있다. '마르크스'와 '휴머니즘'을 절대적인 선善이자 정의正義라 여겼던 내 청춘시절의 조악한 지성과 경박한 정신력이 사르트르를 우상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지금의 시점에서, 무엇보다 인문학적 사고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나에게 사르트르는 행동없는 양심의 전형이자 사이비 지식인의 대표가 됐다. 그 사람의 책을 읽은 시간이 아까워 한탄하고, 그로 인해 야기된 내 신앙의 상흔에 치를 떨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사르트르를 위시하여 20세기의 유럽 젊은이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좌파사상가들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지면이 필요하다. 이들에 대한 내 견해를 피력하는 일은 언젠가는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 나름의 정리를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그 열정이 소원해질 즈음 <지식인의 두 얼굴>은 적기에 내게 찾아와 나의 의지를 부추겼다. 이들 지식인이 가진 추악함의 본질은 좌·우파의 이념 대립이 아니라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궁극의 정직함 속에 있다. 자신의 이론과 사상을 이율배반하는 양면적 태도, 지식인으로서 양심을 저버린 거짓과 부도덕성, 인류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어두운 역사의 인과관계, 내·외면을 지독한 방식으로 호도시킨 기만성 등은 이들의 공통된 오류이자 암연暗然한 한계이다. 바로 이점을 증명해내는 저자의 식견과 논리 전개에 나는 깊은 공감을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 폴 존슨은 지식인들이 가진 오류와 허구를 검증된 팩트와 탄탄한 논리로 꾸짖는다. 저자가 그들을 비판하는 방식은 대부분 비슷한 경향을 띤다. 우선 작품과 사상의 오류를 지적한다. 그 다음 삶과 태도를 꾸짖는 방식이다. 말미에는 감춰진 사생활을 신랄하게 파헤치기도 한다. 저자의 이러한 비판방식은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삶과 사상의 일치로 대변되는 도덕성의 안정감'이라는 점을 주지했을 때 충분한 설득력을 띠며 어렵지 않게 수용된다.

   그러나 저자의 모든 비판에 고개가 주억거리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톨스토이와 헤밍웨이에 대한 비판은 수긍하기 힘든 면이 있다. 그들의 작품이 가진 문학적 성취와 특별한 삶이 만들어낸 예술의 본래적 가치를 감안한다면 다소 지나친 부분이 있다. 작가를 지식인의 범주에 넣어야 할 지 의문이지만, 사상가(철학자)와 동일한 잣대로 작가의 내·외면적 존재성을 재단하는 건 동의하기 힘든 기준이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작가에게 '진실'은 지나친 요구다. 허구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추출해내는 작가에게 진실은 비본질의 영역이다. 작가적 생명력의 원천은 허구의 세계를 발군의 창조력으로 그려내 독자로 하여금 의미와 감동을 전달하는 데 있다. 바로 이 점이
철학자의 정직성과 구별되는 지점이다.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Feuerbach, 1804.7.28 ~ 1872.9.13)의 말대로 "철학에 있어서는 신성한 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이 책의 후기를 짧은 리뷰로 갈음하는 것이 마뜩치 않았다. 보다 많은 글과 논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용단했다. 책에 수록된 지식인 중 내 나름의 견해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다섯 명을 추려서 리뷰를 세분화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이 디테일한 작업의 동기는 언젠가는 실천해야 할 정리의 한 방식이자, 이 책을 입체적으로 갈무리하는 방법의 한 형태 속에 놓여 있다.

   서설이 길었다. 카를 마르크스, 레프 톨스토이, 어니스트 헤밍웨이, 버트런드 러셀, 장 폴 사르트르. 이렇게 다섯 인물을 택했다. 지금까지 이들에 대해 견지해왔던 내 입장을 이 책의 리뷰를 다는 형식으로, 각기 독립적인 글로써, 나름의 주관으로 밀도있게 소화해보기로 했다. 이런 취지에서 이 글은 그 고된 작업을 예고하는 간략한 인트로에 불과하다.

 

 

 

① Intro : 본격 리뷰에 앞서
② 카를 마르크스 : 저주받은 혁명가
③ 레프 톨스토이 : 하느님의 큰형
④ 어니스트 헤밍웨이 : 위선과 허위의 바다
⑤ 버트런드 러셀 : 시시한 논쟁
⑥ 장 폴 사르트르 : 행동하지 않는 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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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떠남은 언제나 옳다 소희와 JB, 사람을 만나다 남미편 2
오소희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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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은 자서전에서 자신의 일생을 지배했던 '세 가지 열정'에 대해 말했다. '지식에 대한 탐구욕', '사랑에 대한 갈망', '인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그것이다. 러셀의 자전적 고백은 곧바로 내 책 읽기의 목적과 부합한다. 러셀의 인생이 다독多讀과 다작多作으로 점철된 책 속의 삶이었다는 점을 주지한다면 그와 나는 책을 통해 얻고자 하는 세 가지 목적에서 일치하게 된다. 즉 나는 책을 통해 지식을 얻고 사랑을 탐구하며 박애를 반추하는, 고독하지만 행복한 독자인 것이다.

   이러한 내 독서철학은 작가 오소희의 문필철학과 보기 좋게 일치한다. 러셀의 세 가지 열정에서 뒤의 두 가지는 오소희의 텍스트와 자연스럽게 양립한다. 오소희는 떠나야 할 때 비로소 떠날 수 있었고 그 가운데 항시 사랑을 말해왔다. 또한 인류를 향한 깊은 연민을 표출해왔다. 터키에서 남미로 이어지는 그의 비블리오그래피 속에는 '사랑-연민' 코드로 엮인 오소희표 휴머니즘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내가 그를 사랑할 수밖에 세 번째 이유다.

   <그러므로 떠남은 언제나 옳다>는 여행작가 오소희의 남미시리즈 두 번째 책이다. 1권 <안아라 내일은 없는 것처럼>에 연속된 텍스트로서 '콜롬비아-에콰도르-칠레-볼리비아'로 이어지는 여행후기를 담았다. 2권은 1권에서 다루지 않은 여러 나라를 관통한다. 각 나라의 특징과 그곳의 독특하고 흥미로운 에피소드는 여전히 백미다. 저자의 글감을 포착하는 능력과 그것을 아름다운 언어로 풀어내는 문필력 또한 연속적이다. 무엇보다 장장 세 달에 걸친 지독한 여행의 말미가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갈무리되었다.

   남미의 각 나라가 갖는 개별성은 남미국가 전체가 갖는 보편성 만큼이나 흥미롭다. 저자는 크고 웅장한 것보다 소소하고 보잘 것 없는 데서 여행의 가치를 발견하는 습관이 있다. 그 습관은 남미여행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남미의 부국 브라질은 핵심만 짚고 아르헨티나는 이구아수 폭포 때문에 잠시 들릴 뿐이다. 저자가 가장 매료된 나라는 최빈국 볼리비아로 보인다. 라파스에서 살림을 차렸을 정도로 오래 체류했을 뿐만 아니라 돌고 돌아 다시 와서 결국 볼리비아에서 남미여행을 실질적으로 마무리하기 때문이다. 비록 국력은 왜소한 나라였지만 항시 활기와 온정이 넘쳤던 볼리비아만의 매력이 저자가 그곳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남미에서도 중빈의 존재는 작지 않다. 중빈은 첫 여행지 터키에서 세 살이었다. 그런데 어느덧 열 살이 됐다. 지난 7년간 아이가 얼마나 자랐는지 인식하기도 전에 나는 두 권의 여행기 곳곳을 차지하고 있는 중빈의 존재적 크기를 무의식적으로 가늠할 수 있었다. 남미에서 중빈은 '힐링'이었다. 중빈이 가져간 바이올린은 여행지 곳곳에서 사람을 감싸고 공간을 채우는 힐링의 아이콘이었다. 라파스에서는 거리의 악사로서, 오타발로에서는 음악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사막의 지프차 안에서는 지친 자들을 위로하는 격려자로서 중빈의 바이올린은 쉼없이 연주됐다. 그때마다 그곳의 사람들은 평온해졌고 그곳의 온도는 따뜻해졌다. 연주실력과는 무관하게 음악이 선사하는 전우주적 공감대가 중빈의 바이올린을 통해 곳곳으로 마음마음으로 오롯하게 전파된 것이다. 중빈의 연주는 장소와 상황에 따라 변질되거나 훼손될 수 없는, 예술이 본래적으로 지닌 궁극적인 순수성을 진솔하게 발현해냄으로써 사람과 공간을 빛나게 했다.

   지난한 여행의 끝은 사막이다. 원래 사막여행이 마지막 코스는 아니었다. 볼리비아 여행 당시 버스파업으로 인해 남부로 가는 길이 전면 차단된 것이다. 저자는 라파스에서 파업 소식을 듣고 볼리비아의 아타카마 사막과 남부의 소금사막 우유니를 여행코스의 마지막으로 변경한다. 돌고 돌아 볼리비아로 다시 가는 비효율적인 코스였지만 소금사막 우유니를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는 분명한 우연이었다. 하지만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멋진 결말로 이어졌다. 경로를 수정하면서까지 꼭 가야만 했던 볼리비아의 기묘한 사막은 저자의 '긴 이완'을 완벽하게 갈무리한 아름다운 '필연'으로 치환되었기 때문이다.

   사막은 객관이 최대를 넘어 과잉으로 피드백되는 공간이다. 모든 외연이 허물을 벗고 자기 자신을 가장 객관적으로 응시할 수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구조와 계급이 파괴되고 형용사와 부사가 삭제된다. 오직 명사만 남는다. 지구라는 작은 행성을 가꾸고 책임지는 평등한 존재로서의 '인간' 말이다. 그 보통명사만이 아무런 수식 없이 담백하게 놓여질 뿐이다. 그렇기에 사막은 고독하다. 인간의 동일성과 평등성을 묵묵히 받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막이 선사한 실존적 고독을 깊이 음미하면서 기나긴 여행의 대미를 아름답게 장식한다.

   책을 덮고 오랫동안 상념에 빠졌다. 인간에 대해 새삼 궁구했다. 항시 개인주의를 경도했던 내게 오소희의 일갈은 '내'가 아닌 '우리'를 들여다보게 했다. 그는 항시 인간을 탐구했고 조명했다. 공간은 비본질이었다. 오직 본질은 인간뿐이었다. 그가 극도의 집중력으로 인간을 관찰할 때면 여행지는 어느덧 배경으로 멀리 물러나 그 목적가치를 철저히 휘발시켰다. 그의 여행패턴은 언제나 사람이 시종始終을 지배하게 했다. 이러한 오소희식 인간학人間學은 러셀의 세 번째 열정에 그대로 침잠한다. '인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야말로 작가 오소희가 세계여행에서 그토록 갈급해왔던 유별난 사랑의 원류源流였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인간이다. 우리는 이 작은 행성에 공존하고 같은 공기를 마시며 똑같이 2세들의 미래를 소중해하는 기본적 공통점으로 묶여 있는 동일종족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나'를 뛰어넘는 '우리'의 평화를 지향할 의무가 부여된다. 그것은 진실된 평화이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생명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평화, 단지 우리 시대만이 아닌 영원한 평화인 것이다. 작가 오소희의 에세이는 바로 그 선상에까지 닿아 있다.

   오소희가 옳았다. 그러므로, 떠남은, 언제나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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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아라, 내일은 없는 것처럼 소희와 JB, 사람을 만나다 남미편 1
오소희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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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작가가 있다. 보통 독자가 작가를 좋아하게 되는 과정은 고만고만하다. 처음에는 작가의 텍스트에 매료된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게 되면 작가 자체를 사랑하는 경향을 띤다. 한 작가를 오랫동안 탐구하고 사랑하다 보면 어느덧 그 작가와 그의 텍스트가 한 지점에서 합일되고 응축되는, 그리하여 자기 가슴속에 아로새겨지는 귀결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왠만해서는 이별할 수 없는 지독한 사랑이 시작되고야 만다.

에세이작가 오소희는 나에게 그런 존재다. 어느덧 그는 나에게 농밀한 존재가 되어 있다. 나는 그를 통해 내 젊은 시절을 가득 채웠던 대작가의 숨결을 읽었다. 오소희는 톨스토이다. 사랑을 말하기 때문이다. 오소희는 괴테다. 지독하게 사랑을 말하기 때문이다. 오소희는 하루키다. 사랑을 말해도 '너무'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오소희는 사랑 예찬론자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첫 번째 이유다.

오소희는 나에게 항시 '신비로움'을 견지한다. '신비롭다'는 말은 "시간이 가진 권력을 이겨낸다"는 내밀한 속성을 함의한다. 신비롭기 위해서는 '과거·현재·미래'가 동일한 시간대로 통합되고 유지될 수 있어야 한다. 시간을 견디고 무료를 초월하며 실존을 관리하는 자존감은 신비로움을 발현해내는 필수불가결한 전제이다. 오소희는 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현재라는 단 하나의 시간대로 통합시키는 신비로운 작가인 것이다. 그것이 내가 그를 사랑하는 두 번째 이유다.

사랑을 예찬하고 신비를 견지하는 작가 오소희의 신간이 출시됐다. 그의 신간소식은 언제나 나를 들뜨게 했(한)다. 이번에는 남미다.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는지 이번 신간은 두 권으로 구성됐다. <안아라, 내일은 없는 것처럼>은 그 시리즈의 첫 번째다. 이 책은 '페루-볼리비아-브라질-콜롬비아'로 이어지는 남미 여행기다. 역시 아들 중빈과 함께 했다. 세 살이었던 중빈이는 이 책에서 열 살이 되었다. 벌써 7년의 시간이 흘렀다.

남미를 여행지로 삼은 저자의 선택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간 다뤄왔던 나라들을 보라. 터키, 라오스, 아프리카는 대중적으로 인기있는 여행지가 아니다. 지금까지 저자가 보여준 세계여행의 동선은 그의 여행포인트를 잘 집약한다. 저자에게 여행지의 네임벨류는 비본질에 속한다. 오히려 그것을 거부한다. 대중의 시선이 잘 미치지 않는 곳, 인기 여행지가 되기에 부족한 곳이 저자의 목적지가 된다. 저자가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는 피로할 때였다. 일상에서 더 낮아지기 힘들어 자신의 직립을 피로하게 느낄 때 비로소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여행철학은 남미가 가진 본질적인 매력이 무엇인지를 은밀하게 암시한다.

신간 <안아라, 내일은 없는 것처럼>은 저자 특유의 문체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전작과는 다른 힘이 느껴지는 책이다. 전작들은 저자의 주관적 관조를 바탕으로 인간과 세계를 읽어내는 재미가 중심이 됐다. 반면 이 책은 객관적 사실에 의거한 각 나라와 역사에 대한 서술을 이례적으로 많이 할당했다. 즉 남미국가들이 갖는 고유성, 역사성, 연계성을 적절한 분량으로 제시함으로써 여행의 에피소드와 사람들을 관찰하며 추출한 기존방식의 이야깃거리를 보다 긴밀하고 입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저자의 이러한 시도는 남미에 생소한 독자에게 나름의 정보를 제공함과 동시에 그곳을 더욱 치밀하게 쳐다보게 하는 장치가 된다. 잉카의 중흥과 몰락, 스페인과 포르투칼의 정복사, 남미의 독립영웅 볼리바르, 페드로 2세와 룰라의 브라질 개혁 등 곳곳에 배치된 짤막한 역사 서술은 독자의 남미 탐구를 견인하는 안내서의 역할을 한다. 각 나라를 이동할 때마다 현재의 남미를 일군 역사적 사실에 대해 짧지만 요점적으로 정리했다. 독자는 저자의 자상한 배려로 인해 남미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저자의 발자취를 더욱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된다.

저자가 탐색한 남미의 삶은 한국의 그것과는 많이 대조적이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맨살을 그대로 내보이는 남미인의 모습은 겉치레를 중시하는 한국인의 유전자와는 조화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경직'의 한국적 삶은 '이완'의 남미적 삶과는 다르다. 하지만 서로의 장단을 논하기 앞서 저자는 매우 중요한 화두를 던진다. 그것은 바로 '행복'이다. 속도와 정보, 경쟁과 효율의 논리에 휩싸인 한국식 신자유주의는 세계 1위의 자살률로 대변되는 불행복한 현재상의 원인이다. 그러나 한국보다 훨씬 도태된 경제력을 가진 남미국가의 느리고 이완된 삶은 아이러니하게도 월등히 높은 행복지수의 동기가 된다. 이 대극적 차이에서 저자는 진정한 행복의 원형을 반추한다. 서울에서의 경직됨이 새삼 화두가 될 만큼 남미는 저자에게 이완됨의 극치를 보여주며 평안을 선사한 것이다.

저자는 또 사랑에 빠졌다. 매 여행지마다 저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장소가 있었다. 터키의 올림포스가 그랬다. 남미 또한 저자를 사랑에 빠지게 만든 장소가 있다. 그곳은 세계문화유산인 페루의 마추픽추도 아니고, 세계에서 가장 웅장한 폭포 이구아수도 아니다. 또한 브라질의 아이콘 리우데자네이루의 예수상도 아니고, 지구의 밀림 아마존도 아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콜롬비아 외곽의 작은 마을 '빌라 데 레이바'이다. 본래 사랑에 빠지면 호기심은 증폭된다. 장소를 사랑한 자는 그곳의 모든 특징을 발견하고 싶고 모든 길을 탐험하고 싶다. 조용하고 한적하며 아늑한 도시 외곽의 작은 마을에서 저자는 녹록지 않은 사랑에 빠진 자기자신의 모습을 직시한다. 마치 사랑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 자인 듯, 끝내 눈물을 떨구며 상념에 잠기는 저자의 지독한 사랑이 멋지다.

저자의 사랑타령은 결국 책의 제목으로 회귀하게 만든다. 제목의 의미를 사유했다. '안아라, 내일은 없는 것처럼'은 멋진 문구다. 여기서 방점은 '안아라'에 있지 않고 '내일은 없는 것처럼'에 있다. 현재의 충실을 역설하는 제목의 의미는 사랑의 원형적 기작을 암시한다. 사랑은 본래적으로 현재형이다. 과거는 지나간 것이다. 미래는 오지 않은 것이다. 과거와 미래는 교만한 시간대다. 오직 현재만이 겸손하다. 바로 지금 안아야 한다. 인간 삶의 유한성에 대한 인식은 더욱 '지금'의 중요성을 각인시킨다. 결국 책 제목 '안아라, 내일은 없는 것처럼'은 작가 오소희의 사랑에 대한 실존적 세계관을 과히 집약적으로 담아낸 명문장이다.

책을 덮은 후 다시 생각했다. 나와 오소희 사이의 거리를. 다시 이 서평의 서두로 간단히 돌아갔다. 그렇다. 나에게 오소희는 언제나 사랑스럽고 신비스러운, 여전히 그런 작가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내가 그를 너무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흐뭇한 마음으로 다음 권 <그러므로 떠남은 언제나 옳다>로 손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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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적들 - 전원책의 좌파 비판
전원책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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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전원책이 처음 내 눈에 띈 건 텔레비전 토론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군가산점제를 주제로 한 토론에서 상대 여성패널을 높은 식견과 탄탄한 논리로 꾸짖는 모습은 참으로 볼만했다. 당시 그는 대한민국 젊은 남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이후 그는 정치·사회를 주제로 한 텔레비전 토론에 자주 등장하며 건강한 보수의 입장을 대변했다. 말빨있고 순발력 넘치는 진보논객들이 활기를 띨 때 전원책의 존재는 보수의 입장에서는 오랜 갈증을 푸는 한 모금의 물과 같은 것이었다. 진중권과 유시민을 상대할 수 있는 보수논객이 있다는 것은 즐겁고 흥미로운 일이었다.

전원책의 프로필을 훑으면서 놀란 게 하나 있다. 그가 시인(詩人)이라는 사실이다. 자기 자신조차 '본업은 시인, 생업은 변호사'라 일컬을 정도로 시인에 대한 자존감이 확실한 사람이다. 실제로 그는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고 신춘문예로 재등단했다. 이미 두 권의 시집을 내기도 했다. 텔레비전에서 봐왔던 그의 이미지는 보수논객으로서의 냉철하면서도 비타협적인 신념주의자로 각인되어 왔다. 그런 그가 언어의 정점이자 언어를 넘어선 세계를 창조해내는 시인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놀랄 만했다. 그 외 집필한 몇몇 저서의 존재는, 그가 마냥 대중적 인기에 함몰된 '말만 하는 지식인'은 아니겠다, 하는 기대감을 갖게 했다.

전원책 변호사의 『자유의 적들』은 보수주의자로서 좌파를 비판한 책이다. 4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분량은 탄탄한 펙트와 흥미로운 소재를 풍성하게 담아냈다. 저자는 다양한 소재와 개성있는 논리로 좌파를 꾸짖는다. 일방적이고 비논리적인 비난에 함몰되지 않고 풍성하고 깊이있는 역사적·철학적 재료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다듬고 논리를 펼치는 저자의 내공은 인상적이다. 저자가 비판하는 대상은 꽤 폭넓다. 좌파의 원류인 마르크스를 위시하여 기독교와 20세기의 과학사(科學史)까지 건드릴 정도로 광범위하다.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강점은 저자의 폭넓은 인문학적 식견에 있다. 책 곳곳을 채우고 있는 다양한 철학자의 사상과 그에 대한 저자의 주관은 책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또한 문학사를 풍성하게 수놓았던 대작가의 이름도 수시로 거론된다. 그야말로 지식의 잡동사니라 할 만하다. 즉 저자는 '좌파 비판'이라는 책의 본질을 증명하기 위해 정치와 사회를 넘어서는 다양한 좌파적 카테고리를 향해 밀도있고 입체적인 파상공세를 퍼붓고 있는 것이다.

비판의 칼날이 닿는 범위는 폭넓고 수위는 가차없다. 좌파를 비판한 책이기 때문에 좌파의 본령이자 원류인 마르크스는 저자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진다. 또한 실존주의의 거장 사르트르를 강도높게 비난한다. 인류가 낳은 가장 위대한 소설가 톨스토이도 혼쭐이 난다. 한미(韓美) 전직 대통령들도 예외는 아니다. 수많은 지식인, 철학자, 작가, 정치인, 언론인 등에 이르기까지 저자의 공격대상은 다양하다. 공세수위 또한 상당히 높아서 '씹는 맛'의 희열만으로 책장은 쉽게 넘어간다. 저자는 특히 마르크스와 사르트르에 대해 한맺힌 분노를 뿜어내는데, 그들을 인류의 절대악으로 규정한다.

마르크스를 신랄하게 짓밟는 저자의 논거는 대부분 어렵지 않게 수용될 수 있는 것들이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중 하나는 '기존질서에 대한 폭력적 전복'이다. 마르크스의 의도와는 별개로 그의 사상을 추종하고 영향받은 독재자들에 의해 인류의 고통과 질곡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피할 길이 없다. 그 어떤 면죄부를 끌어다 놓더라도 '집단화의 폐착'으로 귀결된 '혁명을 위한 불가피한 폭력'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카를 마르크스에게 있다. 지식인에게 '해석'의 의무보다 '변혁'의 역할을 강조했던 마르크스의 전언은 결국 자신을 꾸짖고 굴절시키는 '자기부정'이 되고 있다. 저자가 마르크스와 사르트르에게 퍼붓는 강도높은 질타의 당위성은 보혁(保革)의 이념을 초월하는 보다 궁극적인 가치의 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간 한국의 지식사회에서 보수에 대한 진보의 비판은 양질(良質)의 콘덴츠가 나름 잘 생산되어 왔다. 하지만 그 반대의 입장은 빈약했던 게 사실이다. 양적으로 적었을 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싸구려가 많았다. 대형서점의 정치·사회 코너를 한바퀴 돌면 이를 확연히 체감할 수 있다. 우리사회에서 논리가 전제된 보수지식인의 폭과 영향력이 얼마나 초라해왔는지를 인식하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이런 배경에서 이 책은 단연 눈에 띈다.

물론 이 책의 한계가 없는 건 아니다. 저자의 역사적·철학적 식견이 잘 버무러져 좌파를 해부해고 재단한 점은 충분한 설득력을 띤다. 일방적인 비난이 아니라 오랜 기간 연구하고 입장을 정리한 저자의 준비성 또한 돋보인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소재를 건드리면서 책 전체를 응집하는 구심력은 다소 부족하다. 책의 구성뼈대가 되는 26개의 소재가 산만하게 흩어져 있어 초반에는 흥미있게 책장이 넘어가다가도 중반을 넘기면서는 주제성을 잃은 엉성한 곁가지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다소 난삽한 것이다. 구심력을 잃게 되면 자연스럽게 원심력이 작동하는 법이다. 충분히 흥미로우면서도 전체적인 힘은 떨어지는 완료성의 미흡이 이 책의 한계다.

저자는 많은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많은 얘기를 하기 위해 배치된 많은 소재와 그에 따른 불필요한 논거가 너무 많이 사용됐다. 그것이 저자의 주장이 응집력을 잃고 난삽하게 흩어지며 '좌파 비판'이라는 책의 본질을 흐려지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본질에 이탈한 여러 소재를 난잡한 병렬식 구도로 풀이하기보다 큰 틀의 몇몇 주제를 세우고 그 안에서 논지를 전개하며 유기성을 갖췄다면 보다 힘있는 책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대통령 선거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 지지율 1%도 안되는 모후보의 사퇴로 본격적인 보수와 진보의 양자대결이 되었다. 그들이 진짜 보수인지 진짜 진보인지는 차후의 문제로 넘기자.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기 이전에 '정직'과 '정의'와 '상식'의 전제가 필요하다. 그 전제는 절대조건이다. 보수도 좋고 진보도 좋다. 궁극적으로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 자체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전원책의 좌파 비판 『자유의 적들』은 한국사회의 굴곡된 이념주의의 자화상을 '동전의 앞뒷면적' 차원에서 응시하게 하는, 흥미롭지만 힘은 부족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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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연기를 훔쳐라 - 배우지망생에게 전하는 신현준의 연기노트
신현준 지음 / 한국슈타이너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연예인의 책 출간을 즐겁게 보지 않는 편이다. 연예인이라는 네임벨류에 편승해 책 한 권 팔아보고자 하는 교묘한 상술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물론 텍스트의 질이 우선이다. 연예인이냐 아니냐는 비본질에 속한다. 얼마나 훌륭한 책이냐가 본질인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간 읽어왔던 대부분의 연예인 책들을 곱씹어보면 씁쓸함 그 자체이다.

한 권의 책은 오직 책으로서 존재한다. 작가의 이력과 평판은 중요하지 않다. 책은 책이다. 유명한 사람이 썼다고 해서 텍스트의 권위가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며 유명작가의 신작이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지금 내가 잡고 있는 텍스트의 현재상. 그것이 한 권의 책에 대한 유일한 평가기준이다.

이토록 나는 책 평가에 있어 단호한 편이다. 리뷰어로서 양심과 주관을 팔 순 없다. 하지만 이러한 책에 대한 내 신념도 가끔 굴곡될 때가 있다. 이는 철저히 내 개인적 성향에 기인하는데, 나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관대한 편이다. 대인관계는 물론 책읽기에서도 이러한 성향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신경숙의 소설은 다 좋고 오소희의 여행수기는 다 좋다. 책 평가에서 작가의 외연은 중요하지 않지만 작가를 향한 내 호감도는 여전히 종속적이다. 어찌할꼬. 이 궤변을.

배우 신현준을 좋아한다. 그렇기에 연예인의 책 출간을 곱지 않게 바라보면서도 그가 책을 출간한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찾아 읽곤 했다. 신현준의 신간 <배우, 연기를 훔쳐라>는 배우 지망생에게 전하는 신현준의 연기노트다. 책의 구성은 간명하다. 연기경력 20년이 넘는 중견배우로서 저자가 후배에게 들려주는 애정어린 조언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책 곳곳에서 배우로 살아가는 것의 고통과 자부심, 후배들을 향한 진실어린 애틋함이 잘 녹아 있다. 무엇보다 현재 방송연예과 교수로 재직중인 그의 이력을 증명하듯 연기와 배우에 대한 실재적이고 기술적인 조언들이 틈틈하게 잘 기록되어 있다.

저자는 '오디션', '감독과의 관계', '촬영기법', '인터뷰 스킬', '매니지먼트' 등 배우로서 숙지해야 할 여러요소들에 대해 설명한다. 곳곳에 자신의 경험담과 동료배우의 예를 언급하며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다. 저자가 2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작품에 출연했는지 책 곳곳에서 확인된다. 또한 여러 배우들과 절친하게 지내는 저자의 인맥도 눈에 띈다. 배우로서의 프로의식을 확인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저자 신현준의 확고한 배우관, 연기관이 책 속에 잘 드러나 있다.

하지만 이 책의 한계 또한 곳곳에서 발견된다. 엄밀히 말해서 '한 권의 책'으로 평가하기에 함량미달인 부분이 많다. 메시지의 타겟을 배우 지망생에 한정하였기 때문에 독자층의 보편적 공감을 담아내기에는 한계가 있다. 군데군데 설명해놓은 배우가 가져야 할 전문적인 기술 관련 내용은 좋다. 하지만 대부분의 글이 서점에 범람해 있는 자기계발서의 반복 정리된 수준에 머물러 있어 아쉽다. 저자의 진정성과 열정만으로 좋은 책이 될 수는 없다. 그가 배우로서 흘렸던 땀과 고통만큼이나 글쓰기도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 앞으로 꾸준히 책을 집필할 의사가 있다면 글쓰는 자로서의 역량과 밀도도 고민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책의 막장을 덮은 후 배우라는 직업의 존재성에 대해 잠시 사유했다. 저자가 배우 지망생 후배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결코 새로운 것들이 아니다. '뚜렷한 목표의식'과 '예리하고 섬세한 감각', '철저한 자기관리'와 '변하지 않는 초심'은 비단 배우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직종과는 상관없이 일에 승리하고 사람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들이다. 어쩌면 배우라는 직업만큼 가장 '인간적인' 직업은 없을 것이다. 인간의 표정과 몸짓을 연구하고 내면과 행태를 천착하며 남이 직접 되어보는 게 바로 배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배우는 가장 적극적인 타인이며 가장 실재적인 인간학도다.

이런 면에서 책과 배우는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인간학이라는 측면에서 배우는 책과 가까울 수밖에 없다. 책과 배우의 공통분모는 인간탐구이다. 끊임없이 인간을 탐구하고 성찰하는 과정 속에서 책과 배우의 실존이 놓여 있다. 저자가 책 곳곳에서 독서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 책읽기가 인간을 성찰하는데 가장 건강하고 객관적인 방법이라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배우로서 책이 가진 힘을 인정하고 그것을 사랑하며 후배들에게 장려하는 배우 신현준의 모습. 막장의 저자의 책 추천리스에 미소를 짓는다. 순전히 그것 때문에 별점 반 개를 더 얹는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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