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자유주의자가 되었나
복거일 엮음 / FKI미디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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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자유주의자가 되었나>는 우리사회 다양한 곳에서 활동하는 자유주의자들(自由主義者, liberalist)의 고백집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주의는 당연 '경제적 자유주의(economic liberalism)'를 의미한다. 총 스물한 명의 지식인들이 참여했다. 소설가 복거일을 위시하여 <대한민국역사>의 저자 서울대 이영훈 교수,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을 번역한 김이석 박사, 전교조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명지대 조전혁 교수(전 국회의원) 등이 눈에 띈다. 공저자 대표는 복거일이 맡았다.

대부분 대학 교수로 구성된 공저자들의 다양한 이야기는 무척 흥미롭다. 각기 다른 자유주의에 이른 배경과 원인이 소개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위 '진화적'으로 자유주의자가 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회주의의 허구를 학문적으로 깨달은 후 자유주의로 전향한 사람도 있다. 또한 기독교와 자유주의의 유사성을 파헤치며 논증한 사람도 있다. 자유주의에 대한 가지각색의 에세이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자유주의의 숭고한 정신과 함께 마르크스주의로 대변되는 집단주의의 허구를 생생하게 경청할 수 있게 된다.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첫 장의 서울대 이영훈 교수 편이다. <수량경제로 다시 본 조선후기>를 위시하여 평소 그의 저서를 탐독하면서 녹록지 않은 내공을 갖춘 학자라는 인식을 견지해왔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 해서 좌파에서 우파로 전향했는지는 나에게 자못 흥미로운 주제일 수밖에 없었다. 이 교수는 학자답게 실증적인 자료와 연구를 바탕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이탈했다. 그는 18~19세기 농민들의 계층별 동향을 분석하면서 농민층이 부농과 빈농으로 분열되는 게 아니라 표준적인 경작규모의 소농 계층으로 수렴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또한 양반가의 15~16세기 상속문서에 적힌 노비들의 수를 연구하면서 조선시대를 봉건사회로 규정해서는 곤란하다는 깨달음에 도착한다. 조선시대 경제사를 세밀한 실증으로 연구해가면서 그는 사적 유물론을 중심으로 한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뼈대를 완전히 부정하기에 이른다.

이 교수뿐만 아니라 각 공저자들은 각기 다른 학문적 입장에서 범사회주의를 비판하며 자유주의의 올곧은 가치를 설파한다. 미제스(Ludwig Mises), 하이에크(Friedrich Hayek), 프리드먼(Milton Friedman), 뷰캐넌(James Buchanan) 등 저명한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이론과 사상도 각 편마다 몇 토막씩 간략히 소개된다. 디테일은 떨어지지만 위대한 경제학자들의 학문적 입장을 가볍게 훑어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존재성은 충분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주의를 오해한다. 아마 자유주의의 밑바탕인 개인주의(個人主義, individualism)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利己主義, egoism)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유교권으로 속해 있던 한국과 중국, 그리고 메이지유신 이후 군사적 집단주의에 함몰된 일본 등의 동아시아 지역은 개별 인간에 대한 철학을 흡수한 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세계의 모든 문제를 '집단(공동체)'으로 묶어 사고하는 습관이 은연 중 몸에 배었다. 기독교 문화의 영향으로 개인주의를 자연스럽게 수용한 서구사회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의 핵심은 개인의 자유와 책임이다. 자유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인류 보편의 가치이다. 밀(John S. Mill)이 주장했듯이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범위에서 개인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이는 곧바로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로 구분되어 정의된다. 17~19세기 유럽에서 발생한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은 정치적·경제적 자유주의의 토대를 이룬 사건들이었다. 그리고 이 둘을 모두 포함해 '고전적 자유주의(classical liberalism)'라 명칭한다. 20세기가 되어 자유주의는 앞에 '진보', '질서', '신新' 등의 이름을 붙이며 그 형태와 의미를 변화시켜갔다.

21세기에 당도한 지금의 시점에서 자유주의를 정치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사람은 드물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토론이 불가한 보편적 통념으로서 자유주의의 역사성 속에 선언적으로 녹아있다. 문제는 경제적 자유주의이다. 다시 말해서 '자유주의 = 경제적 자유주의'라는 공식이 자연스럽게 자유주의 논의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프리드먼이 강조했듯이 경제적 자유는 정치적 자유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역사적으로 정치적·경제적 자유주의는 자본주의에서만 가능했다. 물론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무조건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아닌 곳에서는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그런 전례가 없다. 즉 정치적 자유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으로서 자본주의가 놓여 있는 것이다.

'새 정치'를 주장하며 신당을 창당한 모세력은 자신들의 이념을 '진보적 자유주의'로 명명했다. 그들이 '진보적'이라는 용어를 어떤 의도로 사용했는지 쉽게 가늠되지 않는다. 19세기말 밀을 중심으로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에서 처음 등장한 신자유주의 1세대로서의 '진보적 자유주의(progressive liberalism = 사회적 자유주의, social liberalsim)'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아 보인다. 본래 진보주의와 자유주의는 양립 부자연 관계다. 역사적으로 용어의 혼선이 있다. 본래 진보주의(progressivism)라는 말은 정치학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진보적 자유주의가 20세기 들어 서구사회에 많이 보급되면서 기존의 'liberalism'의 개념은 'progressivism'과 혼용됐다. 그 결과 요즘에는 아예 진보를 '리버럴(liberals)'로 부르고 있다. 즉 'liberals'의 의미 속에 함의된 '보수'와 '진보'의 성질이 혼용되면서 복잡성을 띠어왔다. 그래서 이와 구별하기 위한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라는 개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용어 전환의 역사성을 전제한다면 고전적 의미에서의 자유주의자들은 모두 자유지상주의자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단언컨대 나는(도) 자유주의자다. 철학적이고 체질적으로 사회주의(社會主義, socialism)를 싫어한다. 특히 사회주의의 원뿌리인 마르크스주의(Marxism)는 과히 증오하는 수준이다. 숭고한 개인의 개별성(individuality)을 어줍잖은 평등의 논리로 재단하여 결국 집합주의(集合主義, collectivism)로 귀결시키고야 마는 사회주의적 논리와 사상은 치를 떨 정도로 거리감을 둔다. 인간의 본성은 자유와 이기심이다. 역사의 진정한 주체는 자유를 본성으로 하는 개별 인간이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이를 먹어갈수록, 현실의 문제에 치열하게 복무할수록 이는 점점 더 확연해진다.

20세기 세계사를 유심히 탐구하다보면 '사회 역할의 강조'와 '개인 자유의 보장'은 정확히 반비례로 등가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회(국가)의 기능과 역할을 강조하는 개입주의자들은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의 유혹을 벗어던지지 못한다. 사회공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이성이 사물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인식론을 기반으로 한다. 이를 플라톤과 데카르트 식으로 환원하면 '이상주의(理想主義, idealism)'와 '설계주의(constructivism)', 그리고 '합리주의(合理主義, rationalism)'가 구조론적으로 병합된 세계다. 이러한 병합구조는 칼 포퍼(Karl Popper)가 말한 바와 같이 '의도하지 않는 결과의 법칙'으로 사회의 전체주의적 기작을 생산해낸다. 현대사는 이를 명징히 증명한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항시 천국으로 포장되어 있다.

인간의 이성은 위대한 힘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한없이 무기력하고 무능력하며 불완전하다. 인간 이성에 대한 교만은 밀부터 뷰캐넌까지 모든 자유주의자들이 외쳤던 경고였다. 그렇기에 개입주의의 교주라고 할 수 있는 케인즈(John Maynard Keynes)조차도 '하아비가의 전제'를 가정했던 게 아닌가. 나는 인간의 인식 능력을 매우 불완전하게 본 하이에크의 입장에 동의한다. 또한 "인간의 인식은 의식의 주관적 산물이므로 인간은 사물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는 칸트(Immanuel Kant)의 인식론을 적극 지지한다. 인식을 '형식(능력)'과 '내용(재료)'으로 구분하여 경험과 이성을 동시에 강조했던 칸트 철학이 현대 고도자본주의 사회의 복잡성을 설명하는데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직관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라는 칸트의 명언은 경험에 바탕을 두지 않은 사유는 내용이 없어 공허하고 지성의 능동적 활동에 따른 개념이 없는 경험은 틀과 형식이 없어 맹목적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인간 이성의 긍정과 부정을 양립시키며 경험을 통한 끊임없는 인식 능력의 발전을 주장했던 칸트의 견해는 충분히 새겨볼 만한 가치가 있다. 국가를 운영하는 지도자는 물론 사회 구성원으로서 존재하는 개별 시민 모두에게 말이다.

자유주의를 이러한 칸트주의(Kantianism)의 입장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자유주의자라고 해서 자본주의의 폐해로 꼽히는 빈부 격차, 환경파괴, 독과점, 공공재 부족 등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궁핍한 자에게는 정부가 따뜻한 최소한의 생활권을 보장해줘야 하고, 기업거래에 있어 명확한 법치를 세워 독과점을 규제해야 하며, 균형을 잃고 파괴되는 환경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물론 각론에 있어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는 있다. 중요한 것은 인간과 사회를 보는 기본 철학이다. 자유주의냐 사회주의냐는 결국 철학의 문제이다. 자유주의자로서 내 철학은 분명하다. 내 밥은 내가 해먹는 것이고, 자식 우유는 부모가 주는 것이며, 노후는 본인이 책임지는 것이다. 그게 안 될 때에 비로소 사회가 돌보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이를 먹어가면 갈수록, 아이를 키우면 키울수록, 현실의 각론에 치열하게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자유주의 철학에 대한 내 신념은 더욱 확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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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와 길을 걷다 - 어른이 되어 다시 읽는 동화
오소희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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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오소희를 처음 만난 건 꽤 오래전의 일이다. 당시 그는 세 살배기 아들과 함께 한 터키 여행을 에세이로 출간한 직후였다. 문단에 갓 데뷔한 시기였던 것이다. 광화문의 대형서점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대면했다. 인근 삼청동의 유명한 수제비 집에서 식사를 했다. 식후엔 차를 마시며 대화꽃을 피웠다. 우리는 차츰 서로를 탐색해갔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은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한 채 십 여년의 세월이 흘러 지금에까지 도달해 있다.

   사석에서 작가와 단둘이 만나는 일은 독자에게는 분명한 특권이다. 그러나 그 특권은 섬세하고 예민한 수고를 담보할 때만 아름답다. 몇몇 작가들과 사석에서 교류할 기회가 적지 않았다. 그러면서 깨달은 건 '작가의 우주'를 맨얼굴의 형식으로 받아낼 때 독자는 무언가의 예민한 감각으로 무장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텍스트 바깥의 현실공간에서 작가와 조우하게 될 때 독자는 반드시 이러한 수고로움을 겸손한 마음으로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작가와 독자는 '디테일의 시공간차'라는 묘한 권력관계 속에서 전쟁을 벌이는 독특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세계가 있다. 그 세계는 복수의 굴절력을 가진 초공간의 우주이다. 작가는 오직 '언어'라는 제약된 차원의 도구로써 '그 우주'의 각론을 '이 우주'의 총론으로 편입시킨다. 독자는 '이 우주' 속에서 '그 우주'를 탐구하며 또 다른 '저 우주'의 스펙트럼을 자신의 현실 안으로 구속시킨다. 필연성을 띤 '그 우주'의 고유한 디테일은 다수 해석성을 관통하여 개별 독자의 심연 속으로 배달된다. 이에 대한 교감과 천착이 준비되지 않은 작가와 독자 간의 '비텍스트화'는 오히려 두 존재 사이에 불균형적 애매성이 채워지는 요인이 된다. 그런 차원에서, 처음으로 고백한다. 나는 작가 오소희와의 '거리두기'에서 항시 이 모호성을 극복할만한 여백을 유지해왔다. 그에 대한 내 사랑의 성상性狀이 바로 이 대목에서 가시화된다.

   내가 사랑한 이상으로 그는 텍스트 속에서 자신의 실존을 진보적으로 불태웠다. 오소희 전작全作을 완성해온 나에게 그의 비블리오그래피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으로 존재한다. '터키'에서 '동화'까지 여태까지 쏟아냈던 그의 모든 텍스트들은 시공간의 엄연성을 무력화시키며 나에게 '현재'라는 동일선상의 사랑을 요구하며 유혹한다. 그랬다. 나는 언제나 그의 텍스트 안팍을 현재의 관점으로 사랑해왔던 것이다.

   작품의 진화적 활화活火를 끊임없이 추구해온 그의 현재성은 어느덧 동화의 세계까지 도달해 세상에 찌든 내 피로와 무력을 포근하게 감싼다. 그의 신간 <어린왕자와 길을 걷다>는 동화 리뷰집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열여덟 편의 동화를 스무 개의 리뷰로 해설한다. 작가는 각 동화마다 자신만의 주석을 달아 인간 삶의 다양한 주제를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로 걸러낸다.

   책의 얼개는 간단하다. 동화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작가의 경험을 재료로 하여 자신만의 주관적 해석을 빚어낸다. 여행과 일상에서 추출된 다양한 에피소드는 작가가 지닌 고유한 표현력을 통해 독자에게 스킨십한다. 그의 따뜻한 문장은 독자로 하여금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 경탄하게 하고, '얼굴 빨개지는 아이'를 위로하게 하며, '행복한 청소부'를 경외하게 한다.

   이 책의 힘은 각 동화가 가진 메시지의 본질에 작가 자신의 삶을 녹여낸 데 있다. 책 곳곳에서 작가는 자신의 삶의 족적을 그대로 투영시킨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편에서는 시댁 식구의 이야기를, <안녕, 나의 별>편에서는 강아지 '별이'의 이야기를, <꾸뻬 씨의 행복여행>편에서는 남편의 이야기를, 각 편마다 여러 지인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며 동화의 아름다운 본래성을 현실세계 차원에서 승화시킨다. 이러한 작가의 시도는 동화가 비단 어린아이만의 전유물이 아닌, 오히려 어른이라서 친밀할 수 있는 텍스트라는 믿음을 직선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태생적으로 눈물을 많이 흘리는 편이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은 내 눈시울을 적셨다. 원작 동화의 본래성은 그대로 해석자 오소희에게 전이됐고 그의 삶으로 한결 두꺼워진 감동의 피드백은 해석자의 두께를 넘어 독자 다윗에게 전도되었다. 책의 막장을 덮은 후 나는 한동안 멈칫했다. 서른 중반을 지나 이제 마흔으로 향하는 내 인생의 중간 여정을 살폈다. 한 여자의 아내가 된, 무엇보다 두 여자의 아빠가 된 내 자신의 현존을 진지하게 응시했다. 난 어른인가. 이쯤이면 어른이 된 걸까. 혹 아직도 어린아이는 아닐까. 깊은 사유 속에서 난 간절히 기도했다. 내 영혼이 숭고한 방식으로 내 삶을 파고들어 자기공명영상 검사를 하듯이 단층으로 해부해서 '참 나'를 알 수 있기를.

   항상 그랬다. 작가 오소희는 그의 작품 속에서 나에게 끊임없이 내 속도의 점검을 주문했다. 더 나아가 시간이 가진 입체적 기작에 겸손할 것을 조언했다. 어른이 되어갈수록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해진다. 진정한 인생의 찬탄은 모든 시간대가 현재에서 통합되는 것이다. 삶의 감도가 높아지면 누구도 과거와 미래를 끌어당겨 현재라는 도마 위에 올려놓고 요리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다 한 가지 맥락에서 이해되면서 감사와 기쁨과 행복의 소유가 폭포수처럼 샘솟아지는 것이다. 오소희는 항시 이 깨달음을 나에게 촉구하고야 만다.

   서평의 서두로 돌아가자. 작가와 독자는 결코 호락호락한 사이가 아니다. 둘 사이는 사랑이 있되 긴장이 있고 공감이 있되 거리가 있다. 독자는 작가의 초공간적 우주를 견뎌낼 힘을 지녀야 한다. 이 준비가 안 된 독자는 작가와의 '싸움'에서 백전백패한다. 작품에 대한 작가의 고통은 질량이 그대로 보존돼 종국 독자의 고통으로 치환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작가와 독자는 함께 성장한다. 이는 두 존재가 기묘한 사랑의 방정식 관계에 놓여있다는 명징한 알리바이가 되는 것이다. 고백컨대, 작가 오소희를 통해 나는 정말 많이 성.장.했.다.

   신간 <어린왕자와 길을 걷다>는 내게 유독 감동적이었다. 동화를 다룬 짧은 분량의 책임에도 녹록지 않은 감동을 선사받았다. 서평쓰기가 다소 힘들었다. 한 문장 쓰기도 어려웠다. 그저 시간을 담보로 해서 끈질김만으로 마지막 문단에 도착했다. 이제 서평을 정리할 때가 됐다. 전작을 모두 포괄하는 헌사로 서평을 갈무리하고자 한다. 그렇다. 오소희의 텍스트는 내 마음의 해부학이며, 오묘한 정신분석학이며, 시대를 초월한 상담학이며, 인생의 진행속도를 쥐고 흔드는 영혼의 경영학이다! 그가 있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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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김정일의 246분 -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의 진실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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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시민이 또 책을 냈다. 평소 그를 좋아하고 그의 책을 탐독해왔기에 이번 신간도 머뭇거리지 않고 구독했다. 금번 출간의 목적과 책의 성격은 기존과는 다른 특수성을 가진다. 정국을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넣은 NLL 대화록 사건의 전말을 밝히기 위한 목적이 이 책의 집필 이유다. 특정 사건에 대한 정치적 목적으로 쓰여진 책이라는 얘기다. 그래서인지 이미 공개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전후 문맥에 맞춰 풀이했다. 결론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은 전혀 없었다는 게 이 책의 핵심이다.

   NLL 사건에 대한 내 견해부터 말하자. 나 또한 대화록 원본 전문을 읽은 사람으로서 이에 대한 입장은 단호하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은 없었다.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이와 반대된 생각을 갖는다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정치적 반대편에 위치한 자들의 공격은 다분히 악의적인 면이 있다. 이는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과 양심의 문제이다. 원본을 읽지 않아서 몰랐다면 게으른 것이고 읽었음에도 정리되지 않았다면 무지한 것이다. 이를 처음으로 제기해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정문헌 의원과 서상기 의원은 사실과 다른 거짓 발언을 했다. 의도와 상관없이 지금이라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게 도리다. 두 사람의 발언이 만들어낸 파장을 감안하면 국민에게 사과하고 의원직을 사퇴하는게 적절한 처사로 보인다. 그게 참된 보수의 모습이 아닌가.

   세간의 많은 사람들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전문을 읽어보지도 않고 자신의 견해를 내뿜는다. 특정 정파나 일부 언론의 목소리에 편승해 자신의 주관을 피력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물론 개인마다 정치적 자유가 있고 입장차가 있으며 각기 다른 해석이 존재할 수 있다. 그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실관계의 객관성을 가늠하는 역량은 감정이 아닌 이성의 영역이 추동하는 법이다. 팩트를 발견하고 추출하는 기능은 따뜻한 가슴에 있지 않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차가운 머리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보수·우파주의자임을 자처하는 나조차도 NLL 발언의 진실과 관련된 입장은 분명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NLL 포기 발언이 없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굳이 유시민의 책과 강연이 없어도 이미 공개된 정상회담 대화록을 진지하게 일독만 해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분명한 사실관계가 정파성이라는 이기적 용광로 속에서 모호하고 부적절한 과정을 통해 침해받고 왜곡됐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저자 유시민은 이러한 나와 엇비슷한 감정에서 책을 썼을 것이다. 더욱이 노무현의 '정치적 경호실장'이라 불릴 정도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애정이 극진한 그로서는 현실 정국에서 벌어지는 코메디와 같은 사태를 묵과할 수 없었을 게다. 이해가 간다. 그러나 이 책은 분명한 한계 또한 지니고 있다. 'NLL 대화록 설명서'라는 본래의 목적을 넘어서 당시의 정상회담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있다. 잘한 부분도 없진 않겠지만 못한 부분이 훨씬 더 많았던 게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여론조사를 보라. 이는 국민 다수의 견해다. 평소 참여정부의 공과를 최대한 합리적으로 구분해왔던 저자였기에 중용을 잃어버린 서술로 자화자찬한 그의 서술은 한없이 아쉽다 하겠다.

   사실 증명을 위한 증거 제시와 그것을 논증하기 위한 논거 대입의 적절성은 매우 중요하다. 자신이 증명하려는 사실이 분명한 '사실'일지라도 논증방식이 설득력을 잃게 되면 증명의 고결성은 침해받는다. 유시민의 논조는 간단하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은 반전과 전율이 뒤섞인 한 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였다는 것이다. 노무현의 정면돌파와 김정일의 호탕함이 빚어낸 낭만적인 무대였다는 게 유시민의 일관된 입장이다. 책 내용의 절반 이상을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찬양으로 도배하고 있다. 유시민의 말대로 2007년 남북정상회담은 찬양할 게 많은 축복의 잔치였을까. 저자의 견해에 동의할 수 있는 국민이 과연 얼마나 될까.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만난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형편없는 점수를 주고 있는 사람이다. 사실, 엄밀히 말해서, 정국을 차갑게 만든 NLL 논란의 빌미도 노 전 대통령의 부적절한 발언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는 부분을 꺼내서 반대편으로부터 오해를 사게 만들었다. 대북관계의 유연성을 강조하는 일부 세력들은 NLL 추후 협상 명분을 1992년의 '남북기본합의서''남북불가침부속합의서'에서 찾는다. "남과 북의 해상 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로 명시돼 있는 부속합의서 10조 항목을 NLL 협상 명분의 근거로 들이대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남북기본합의서의 역사적 배경과 의미, 그에 따라 존재하는 본래적 전제를 철저히 외면한 것이다.

   남북기본합의서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로 대변되는 공산권의 몰락으로 인해 체제유지에 위협을 느낀 북한이 벼랑 끝에 몰려서 시작한 협상이었다. 당시 북한의 GDP는 마이너스였다.
노태우 정부는 민족자존과 번영을 위한 '7.7 선언'을 시작으로 적극적인 북방외교를 펼치고 있었다. 이에 체제 위협을 느낀 북한 측은 한반도 비핵화를 요구했고, 노태우 정권과 미국은 이에 동의하여 "한반도 내에 핵무기는 없다"고 선언하며,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의 전제가 성립된 것이다. 결국 남북은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을 각기 서명 및 발효하게 된다. 즉 남북기본합의서는 애당초 한반도 비핵화를 전제로 시작된 협상이었던 것이다.

   북한은 1999년 제1차 연평해전을 일으키고 서해 5도 한참 밑에 내려온 '조선 서해 해상군사분계선'을, 2000년엔 후속조치 성격으로 '서해 5도 통항질서'를 발표하며 남북기본합의서를 위반했다. 또한 부속조항에 있는 군사훈련 협의사항도 전혀 지키지 않았다. 북한은 남북기본합의서의 불가침 조항 등을 위반했기에 그 부속합의서의 협의사항을 남측이 이행할 의무는 전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햇볕정책을 주창했던 김대중 정부에서조차 NLL을 논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에서는 2007년 정상회담 이후 벌어진 국방장관회담 등을 통해 NLL 협의의 발판을 마련해줬다. 북이 버젓이 핵 개발과 핵 실험을 실시하고 합의 내용의 군사관련 지침사항을 일관되게 무시해오고 있는데 왜 우리가 먼저 몸을 낮춰 협상 테이블에 올려줘야 하는가. 더욱이 서해 앞바다를 실질적으로 북에 내주게 되는 '등면적 공동어로수역'을 역대정부 최초로 논의했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짜증나는 일이다. 그럼에도 2차 남북정상회담의 내용과 가치를 확대 포장하고 예찬한 저자의 서술은 다수 국민의 정서와는 배리된 초라한 수사에 불과한 것이다.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은 냉철하면서도 입체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북한'이라는 의미는 자유와 인권의 부재 가운데 굵주림에 허덕이는 우리 동족이 아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명명되는 북한 권력의 지도층을 두고 얘기하는 것이다. 북한 정권은 정통 공산주의 체제가 아니다. 김일성이 창시하고 김정일이 이론적으로 발전시켰다는 북한의 혁명사상인 '주체사상主體思想'은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와 궤를 달리 한다. 사유재산을 부정한다고 해서 무엇이든 마르크시즘의 카테고리로 편입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북한 군부지도부는 마르크스의 'M'자도 모르는 세력이다. 단언적으로 북한이라는 집단은 김씨 3대 세습독재체제로 근거되는 왕조체제인 것이다.

   현대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엽기적인 독재체제를 오직 선군정치와 공포정치의 방식으로 공고히 유지해가면서 인권을 말살시키고 인민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는 북한 정권을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대한민국이 어떻게 지지하고 대변할 수 있는가. 이는 공산주의의 기본 이념에 대한, 아니 북한 체제가 갖고 있는 본질적 오류에 대한, 더 나아가 숭고한 인간성의 숙지에 대한 깊은 이해에 달려있는 부분이다. 한국의 진보세력은 이 부분에 대한 중량감과 숙연성肅然性을 너무 낮게 설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게 문제다.

   책에 피력된 유시민의 대북관은 앞서 언급한 한국 진보좌파세력의 중론과 그대로 부합한다. 그는 북한 체제가 가진 특수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최대한 좋게좋게 구슬리면서 인내하며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치 세 살배기 어린아이를 다루듯 참고 또 참으면서 달래고 퍼주며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개인이 아니다. 북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는 것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서라도, 국가 간 외교는 인간 사이의 교제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다. 집단(집단주의集團主義, Collectivism)이 무서운 것은 개인보다 훨씬 많은 다양성과 의도성, 개별성과 모호성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문서로 협의된 약속도 지키지 않고 지속적인 도발로 전쟁 분위기를 고취시키는 북에게 '햇볕'이라는 어쭙잖은 용어를 전면에 배치하며 퍼주기식 정책으로 일관했던 진보정권 10년의 대북정책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유시민은 적어도 국민의 대북정서가 어떤 분포로 형성되어 있는 지에 대해서는 공부가 덜 된 것 같다. 이 책은 그런 기조 위에서 쓰여졌다.

   서평을 정리하자. 유시민의 신간 <노무현 김정일의 246분>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NLL 포기 발언이 없었다는 논증을 위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해설하는 기능을 지닌 책이다. 그 기능에는 충실했다. 그러나 너무 많이 나간 게 문제였다. 지나친 미화와 불필요한 논거, 그에 따른 편협한 시각의 의견개진은 대부분의 국민의 대북정서와는 멀리 떠나 있다. 읽는 동안 눈살이 찌푸러졌다. 굳이 긴 분량이 필요한 책은 아니었다. 쓸데없이 지면을 많이 할애했다. 유시민에게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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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사 - 나라 만들기 발자취 1945∼1987
이영훈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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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교과서 문제로 나라가 시끄럽다. 최근 교육부 검정을 새롭게 통과한 교학사 교과서에 대한 논란이 교과서 논쟁을 다시 부채질하고 있다. 이번 논쟁을 '좌편향·우편향'이라는 좌우이념전쟁의 구도로 몰아가서는 곤란하다. 역사교과서 문제의 본질은 "지금의 대한민국이 어떻게 건설되었는가"라는 숭고한 질문 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역사가 E. H. 카는 객관적 사료뿐만 아니라 시대정신을 바탕에 둔 역사가의 해석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역사가는 사실의 비천한 노예도 아니고 난폭한 지배자도 아니다. 역사가와 사실의 관계는 평등한 관계, 주고받는 관계다"라고 말했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역사전쟁은 카의 이상과 달리 '사실'과 '해석'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이 무너지고 해석이 사실을 난폭하게 지배하는 형국이다.

   이런 배경에서 균형있는 역사서가 새롭게 출간된 점은 반가운 일이다. 사실 한국 근현대사를 다룬 책 중 쉽게 추천할 만한 책이 없었다. 극히 좌익적 관점으로 기술하는 바람에 역사적 사실과 해석을 굴곡시킨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인물의 공과功過를 상식의 중량대로 담아내지 못해왔다. 아직까지도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역사 서술이 서점가를 지배해왔다. 압도적 다수였다. 이게 늘 근심거리였다. 그러던 중 반가운 책 한 권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영훈 서울대 교수의 신간 <대한민국 역사>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책이다. 엄밀히 말해서 해방 이후부터 87년 체제까지를 다루었다. 국민의 힘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해냄으로써 형식적 민주주의를 달성한 1987년을 한국 근현대사의 첫 번째 종점으로 규정한 저자의 기준은 적절해보인다. 또한 보수와 진보에서 각기 다른 이념적 잣대를 들이댐으로써 여태까지 균형있는 평가를 받지 못해왔던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나름 용기있게 풀어냈다고 할 수 있다. 김구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작금의 한국사회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을 보는 것처럼 정치적 이념이 양극단으로 치열하게 벌어진 극심한 이념전쟁을 펼치고 있다. 중도와 중용의 본래적 가치는 사라졌다. 모든 것이 자기와 자기세력만의 이념주의로 빨려들어가고 있다. 이 나라 정치가들은 모든 걸 이념의 문제로 치환한다. 국방과 안보는 물론 건국과 독립의 문제까지 이념의 프레임으로 파고드려 한다. 이런 배경에서 나라와 국민이 세계 속에서 앞으로 전진할 힘을 갖기란 불가능하다. 그야말로 '국가이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저자 이영훈 교수는 '자유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모두 옹호한다. 저자는 두 이념을 각기 '이성'과 '감성'으로 영역으로 구분하는데 그 선후에 있어 단연 이성을 앞세운다. 즉 자유민주주의의 굳건한 토대 위에 민족주의가 발흥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인류보편의 가치인 자유와 민주주의가 민족감정의 방향을 건강하게 견인해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올바르다. 현대사를 보라. 이 순서가 호도된 '민족주의'로 인해 얼마나 참혹한 역사를 만들어냈는가를. 단언한다. '자유'가 '민족'보다 앞선다.

   민족주의는 반드시 자유민주주의를 전제해야 한다. 김구를 보자. 김구는 위대한 독립운동가였다. 일제의 침략에 맞서 열혈투쟁으로 무장한 용기있고 기백있는 위인이었다. 이를 부정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해방 이후 세계정세를 보는 안목과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정치력에 있어서는 부족한 면이 적지 않았다. 더욱이 자유와 비자유에 대한 기본 식견과 공산주의의 본질을 꿰뚫는 힘은 한없이 부족했다. 물론 김구는 자유와 민족을 동시에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자유민주주의자이기 이전에 민족주의자였다. 그의 정치이념의 구조가 이러했기 때문에 민족의 분단이 임박하자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고 몇 차례나 자신의 입장을 바꾸면서 허둥지둥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은 살아남았으며 번영하였다. 김구는 대한민국이 건국에 끝까지 반대했지만 매우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정치가의 한 사람으로 자리 잡고 있다. 대한민국의 건국세력을 "일신一身에 구차한 안일安逸을 취하는 자"라 했던 그의 매도는 그를 존경하는 한국인들의 가슴에 긴 유언으로 남았다. 그의 비극적 죽음은 대한민국의 나라만들기 역사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 <p -161>

   김구를 포함하여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수놓았던 주요인물들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대체적으로 냉정하고 차분하다. 이승만의 공과를 잘 구분하였고 박정희의 명암을 잘 드러냈다. 두 전직대통령에 대한 과오로만 일관하고 있는 기존 역사책들의 한계를 적절하게 바로잡았다. 현재의 성공한 대한민국의 역사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균형있고 입체적인 천착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런 차원에서 일방적인 비판에서 벗어나 공과 실을 명확하게 구분하여 균형을 잡은 점은 저자의 용기이자 이 책이 가진 힘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강점은 "지금의 대한민국이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가"에 대해 명확하고 일목요연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 책이 가진 전제는 대한민국은 성공한 국가라는 점이다. 기존 한국사학자들은 낡은 계급적 민중사관에만 집착하고 그에 따라 역사를 해석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이에 따라 역사를 국가정체성의 강화가 아닌 오히려 대한민국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부각시키는 도구로 사용해왔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대한민국의 역사는 실패한 역사가 아니다. 오류와 상처도 있었지만 종국적으로 대한민국은 성공했다. 세계대전 이후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

   '세계에서 유일한 3대 신용 상승', '세계 5대 공업국과 7대 수출국', '올림픽 5위', '일제 35년과 한국전쟁을 이겨내고 이룩한 건국과 경제발전', '안정된 수준에 오른 민주주의', '일본·그리스·스페인이 부러워하는 튼튼한 재정',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건강보험', '한류의 폭발적인 인기와 세계적인 관심' 등 대한민국은 꽤 괜찮은 나라이다. 전 세계 수많은 나라가 대한민국의 성공을 우러러보고 있다. 자부심 좀 가지자. 인정할 건 인정하고 싸우자. 나라의 건국과 국가 현존의 긍정에 대해 당파로 갈라져 싸우는 나라가 도대체 어디 있는가. 국가정체성과 애국심, 자긍심의 문제에 '좌·우'가 어디 있는가. 모든 걸 좌·우 이념의 문제로 환원하는 건 한국사회가 가진 지독한 암癌이다. 이 못된 질병이 사라지지 않는 한 대한민국은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서지 못할 것이다.

   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20세기 말부터 사실을 신성시하는 랑케의 실증주의 역사관을 비판하고 역사도 당대의 편견이 반영된 담론의 일부라는 포스트모더니즘 역사관이 확산됐지만 최근 들어선 비록 완벽하진 않더라도 사실 자체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강조하는 경험주의적 전회(Empirical Turning)가 일어나고 있다""역사적 진실은 도외시한 채 정파적 이념에 따라 역사를 재단하려는 자세부터 버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렇다. 분명한 역사적 사실은 '객관'으로 내려놓고 그 전제 하에서 필요한 것들만 '주관'으로 다스리자. 한 나라의 근현대사를 갖고 정파적 이념으로 갈라져 싸우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할 것이다. 부끄럽다.

   역사전쟁의 한복판에서 기존의 굴곡된 인식을 바로잡으려 한 것만으로도 이영훈 교수의 <대한민국 사>는 꼭 한 번 읽어볼만한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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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타임스 세트 - 전2권
폴 존슨 지음, 조윤정 옮김 / 살림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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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 존슨의 <모던 타임스>를 2독했다. 오래전에 읽은 것까지 합치면 총 3독을 한 것이다. 성경책 두께의 두 배가 넘는 역사책을 세 번씩이나 정독한 것은 나름의 목적이 있었다. 이 책이 세 번이나 읽을 만한 가치를 지녔는지는 사람마다 평가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 관점에서 20세기사를 꿰뚫어보는 데 이 책 만큼 적확하고 흥미로운 책을 찾아보기란 결코 쉽지 않다.

   존슨은 이 책에서 현대세계는 1919년 5월 29일에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이날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증명된 날이다. 아인슈타인은 태양 표면을 스쳐지나가는 빛이 자신이 제시한 수치만큼 휘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핵심적인 가설이 실제측정을 통해 입증된 날이 바로 5월 29일이다. 그렇다면 상대성이론과 현대세계는 무슨 연관이 있는가. 상대성이론은 왜 근대를 끝맺음시켰는가. 저자는 역설한다.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유대·기독교'라는 종교적 동인이 약화되고 그 여백을 니체가 주장한 권력의지가 채우기 시작하는 단계라는 것을 말이다. 바로 그 기초 위에 상대주의로 대변되는 20세기 고유한 특징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사람들은 상대성이론과 상대주의를 혼동해버린 것이다. 바로 이 혼동의 시작이 근대를 끝맺음시키고 현대를 여는 기준이 되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시대의 구분을 특정 종교가 갖는 정신의 쇠락적 관점으로 풀어나간 점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서양사와 기독교사가 분리될 수 없다는 전제는 삼척동자도 아는 상식이다. 이를 인정하게 되면 저자의 시각은 넓은 포용력 안에서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서양사는 기독교의 역사와 정신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풀이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기독교가 서양세계에 전달한 문화와 정신 면에서 서양인 스스로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엄연한 전제 앞에서 20세기의 역사는 그 틀이 규정되고 작동될 수밖에 없는 명확한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역사 탐색은 1차 세계대전으로 대변되는 '유럽의 자살'로부터 시작해 다양한 현대사의 굴곡을 지나 1990년대의 언저리까지 도달한다. 양차 세계대전을 통해 인간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 이후 냉전체제를 통해 드러난 공산주의의 폐해와 무기력함을 신랄하게 고발하며, 다시 인간의 자유가 회복되는 과정을 기술한다. 또한 그 과정을 통해 희망을 엿보기도 한다.

   저자가 현대사를 풀어나가며 사용한 정신적 문체는 바로 '자유주의(liberalism, 自由主義)'다. 개인의 도덕적 책임이 바탕이 된 만개한 자유야말로 사회를 발전시키는 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자유를 훼손하거나 억압시키는 요소를 철저히 거부하며 비판한다. 이는 경제 역사에서도 일관되게 적용시킨다. 케인즈주의로 대표되는 1930년대 이후의 경제사를 저자는 가차없이 난도질한다. 나치즘과 파시즘, 스탈린주의를 위시한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 또한 사회주의적 성격을 지닌 모든 지도자와 정책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뉴딜정책을 통해 대공황을 극복했다고 언론과 대중으로부터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도 저자의 시각에서는 양심없고 독선적이며 어리석은 정치인으로 재평가된다.

   이러한 저자의 지나친 보수자유주의적 관점의 역사기술은 보는 사람에 따라 거부감을 발산시킬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팩트를 무시하지 않고 다양한 사례와 통계로 성실한 논증을 펼쳐낸다. 종전 후 스탈린의 야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동유럽이 통째로 공산권이 되는 비극을 막지 못한 점을 꼬집는 존슨의 지적에 그 어떤 이념의 편향이 있단 말인가. 처칠이 항상 옳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스탈린을 바라보고 예측하는 지혜에서만큼은 루즈벨트보다 몇 수 위였던 것은 분명하다. 인류 역사상 스탈린의 세계만큼 많은 수의 사람을 그토록 집요하게 살상한 체제가 있었던가. 스탈린 치하에서 죽은 사람이 최소한으로만 잡아도 1,300만 명이라는 건 주지의 통설이다. 2차 세계대전의 비극이 히틀러라는 개버러지같은 인물에 의해 시작되었다면, 전쟁 이후의 비극은 스탈린이라는 희대의 악마에 의해 진행되었다.

   20세기 공산권과 소위 '제 3세계'로 불리는 독재국가에서 자행된 사회공학으로 죽어나간 사람들의 숫자는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다. 동유럽 공산국가의 숱한 독재, 중국의 모택동이 저지른 문화혁명, 캄보디아 크메르루주가 자행한 전원화정책, 아프리카의 내전과 남미의 독재자들에 의해 벌어진 다양한 형태의 살육과 핍박 등은 플라톤주의(Platonism)에 기초한 전체주의가 얼마나 거짓되고 위험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인간의 자유와 개인의 도덕적 책임감은 19세기를 번영시켰던 동력이다. 그것이 철저하게 무너져 버린 20세기의 역사는 처절하고 고달픈 희생을 감내해야만 했다. 말장난에 불과한 개버러지같은 변증법으로 국가를 '객관화된 정신의 최고의 인륜형태'로 규정한 헤겔식의 국가주의는 예외없이 전체주의로 귀결된다. 부인하지 말라. 반드시 그렇게 된다. 사회와 국가를 유토피아로 만들 수 있다는 인간의 오만한 믿음은 곧바로 현실세계를 디스토피아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은 몰랐던 것이다. 지구상에서 플라톤주의와 헤겔주의는 본래적으로 생성될 수 없는 거짓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이 오류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국가를 가족과 같이 만들 수 있다는 잔인한 착각이다.

   공산주의를 위시한 범사회주의적 사고의 맹점은 사회가 가정이 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발생된다. 헤겔은 국가를 가족과 시민사회가 결합된 최고선의 인륜체로 규정했다. 마르크스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달콤한 말로 대중을 선동하며 사회와 가정을 혼동시켰다. 그러면서 폭력적 혁명을 부추겼다. 국가와 사회는 가정이 될 수 없다. 동시에 인간은 산술적이고 결과적으로 평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거짓된 전제에 함몰된 채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인간의 교만한 믿음과 착각은 결국 사회를 천국이 아닌 지옥으로 만드는 역설적인 자기파괴였던 것이다. 현대사는 이를 명확하게 입증하고 있다.

   <모던 타임스>는 인류의 미래에 대한 메시지로 끝맺음한다. 저자 폴 존슨은 미래를 무조건 희망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인류의 미래는 하나의 존재로서의 개인의 자유가 얼만큼 지켜지고 확장되느냐의 관점, 동시에 개인의 도덕적 책임의식이 얼마나 생동감있게 살아있느냐의 관점을 통해, 바로 그 흐름의 과정에 달려있다고 일갈한다. 즉 저자는 사회와 국가가 아닌 개인과 가족으로부터 인류의 희망찬 미래가 달려있다고 보는 것이다. 저자의 판단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더이상 집단주의라는 이름으로 개인이 사회라는 용광로에 빠져드는 참혹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각자의 창의와 개성이 살아숨쉬는 자유와 책임의 세계가 될 때에야 비로소 인류의 미래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 쪽의 관점에서 쓰여진 역사서라는 한계는 반드시 존재한다. 저자의 주관적인 역사 해석이 너무 짙기 때문에 역사서로서의 이 책의 한계를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양차 대전 이후 세계를 뒤덮었던 전방위의 사회주의적 사고와 제도가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무시하며 전체주의라는 거대한 악마를 만들어냈던 토대가 되었음을 자각하게 된다면, 저자의 입장은 충분한 힘과 논리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를 꿰뚫어볼 수 있는 흥미진진한 책이다. 젊은이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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