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이산의 책 1
강상중 지음, 이경덕 외 옮김 / 이산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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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학계에서는 제3자의 시각이 크게 주목받고 있는 듯 하다. 자신을 1세계의 주류로 여기고 있었는데, 구조주의 및 후기구조주의적 사유틀과 근대에 대한 반성, 오리엔탈리즘의 문제의식등이 일본인들이 자신들을 다시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재일한국인이라는 독특한 위치를 점유한 지식인의 독특한 시각은 자신의 얼굴을 다시금 고쳐 보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리라.

이 책은 일본 식민지 근대화 과정을 추적하면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지적 편력을 담고 있는 논문집이다. 일본 근대화의 지배규율 담론을 푸코와 사이드를 통해 해부한다. 푸코와 사이드에 대한 이해는 아주 표준적이다. 그러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분석을 통해 일본의 근대를 살펴보는 시각은 유익하다.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 가령 시라토리 사학이 만주와 조선침략을 꾀하는 정치권력과 관계함을 밝힘으로써 지식과 역사학의 관계에 대한 혐의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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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비평 14호 - 2001.봄
도서출판 삼인 편집부 엮음 / 삼인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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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조선일보에 당대비평의 임지현의 사진이 대문작만하게 나왔다. 임지현은 매스미디어의 힘을 업고 자신의 [일상적 파시즘론]이란 아성의 지존이 되기 위해 여기저기서 논객들을 불러 모았다. 자신은 논의의 진전을 위해서 자리를 마련했다고 하지만 임지현 스스로가 너무 준비가 안되어있었다. 파시즘에 대한 개념 정의부터 일상의 문제까지 뭐 하나 딱부러지게 자신의 의견을 내놓지 못하고 얼버무리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리고 하는 소리가 아직 개념의 혼동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학자로서는 안이하기까지한 발언을 아무러 수치심없이 내뱉는다. 그렇게 많은 지면을 계간지에 할애하면서도 그렇게 무성의할 수 있는가? [당대비평]이 한 교수의 학습노트화되는 꼴이 아닌가? 솔직함을 넘어서 무례하고 파렴치한 건 아닌가?

임지현의 [일상적 파시즘론]이 또 조선일보에 의해 화용론적으로 도용당했다. 역시나 임교수 자신의 논지와는 좀 동떨어진 헤드라인으로 임교수의 모호한 이론이 거침없이 조선일보의 무기로 전유되고 있다. 조선일보가 바라는 것은 임교수의 [일상적 파시즘론]의 진의가 아니라 그 모호한 담론이 조선일보가 자주 쓰는 '홍위병론'으로 빠꿔놓기에 너무도 안성마춤이란 사실이다. 임지현은 민주주의 대 파시즘의 이분법을 넘어서 오히려 근대 민주주의의 적자가 파시즘이라고 명한다. 그리고 민중의 긍정적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자발적 동원의 매커니즘을 문제삼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민중과 그 동원의 매커니즘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그 문제가 선결되지 않고 자발적 동원 매커니즘이란 모호한 범주로 비판할 경우 민중 자체를 부정해 버릴 수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 있어서 과연 민주주의 대 파시즘의 이분구도가 유효하지 않다는 인식이 타당한 가이다. 국가보안법이 서슬퍼렇게 살아있고 조선일보 같은 언론들이 활개치고 있다는 사실은 민주주의 대 파시즘의 이분구도가 한국사회에서는 아직 유호하다는 분명한 방증이 아니던가?

김동춘 교수의 반박이 가장 날카로왔다. 그는 임지현의 사고방식이 탈맥락적이라고 비판한다. 스티브 라이히 등의 [파시즘의 대중권력]이나 포스트 모더니즘 이론서 읽기에 빠져 있기 보다는 우리의 근현대의 역사를 실증적으로 파고들어서 현대 한국의 지배층 및 권력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파고드는 작업부터 선행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따진다. (이는 김동춘이 스스로 행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임지현은 동유럽사 전공이다. 그는 현실 한국의 양상을 제대로 읽어낼 효과적인 이론틀을 만드려고 하지 않은 채 서구에서 유행하는 이론에 손쉽게 기대어서 한국사회를 연역적으로 재단하려 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의 '일상적 파시즘론'의 불철저성이 그걸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 하다. 학자로서 땀을 흘리겠다는 자세보다는 손쉽게 무임승차 하겠다는 듯한 인상을 준다.

또하나 김동춘의 비판에 대한 임지현의 반박이 너무 구질구질해 보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김동춘이 투박한 민중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이제 현실적으로 없다라고 말헀는데 그에 대해 그는 '아님 말고'하는 식으로 구렁이 담넘듯 넘어간다. 또한 탈근대의 문제설정에 있어서 김동춘이 근대의 모순으로부터 스스로 떳떳하다면 당신이 부러울 뿐이라고 빈정거린다. 이 모든 것이 현실 한국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결여된 학자가 그 대신 고상한 이념적 아성에 기대어 자신에 대한 반론을 폄하하는 태도가 아닌가? 탈근대가 환원론적 사고방식의 오류에서 벗어나 개체성에 주목한 담론일 것인데 오히려 임지현식의 탈근대론으로 보이는 '일상적 파시즘론'은 '형이상학적'으로 보인다. 만일 일상적 파시즘론이 학계의 주요한 이슈로 떠오른다면 이 땅에 뿌리 내리지 못한 지식인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그러한 결핍을 만회하는가 하는 입지전적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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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철학
에밀 앙게른 / 민음사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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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들의 의미는 과연 무엇이더란 말인가? 여기서 말하는 '이 모든 것들'이란 좁게 말해서 인간이 이제껏 행한 바를 의도한 것이다.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눈을 뜨는 그 지점을 향한 갈구는 실용주의와 현실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현대에는 시대착오적 실언으로 매도당하기 십상이다. 우리는 단지 긍정의 철학을 좀더 순응적으로 변형시킨 다양과 차이의 철학, 점진주의, 서로 단절된 작고 겸손한 유토피아로의 귀환 정도에 만족해야 한다.그러나 인간은 겸손해진 대신 자기만의 유토피아에 갇혀 버린다. 인간의 성숙이 경험과 사유의 확장이라는 은유를 받아들인다면 인류는 더 이상의 성장을 멈추고 피터팬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의미를 찾는 것은 이 모든 현실과 현상들의 한계를 직접 보게 하고, 그로부터 그 경계를 넘어서는 것을 찾아 떠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역사철학 혹은 역사주의는 현실주의와 자아의 한계성을 스스로 자각한 자의 사유이며, 그런 면에서 역사주의니 역사철학이니 하는 것은 결코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필수적이다. 비록 그것이 현실에 어떤 새로운 이득을 직접적으로 주지는 못하더라도 자기와 시대의 한계를 깨닫도록 한다는 것, 그 점 하나만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어떤 이는 이를 '부정의 신화'라고 매도한다. 그러나 진정한 긍정은 부정의 형태를 띠고 있다. 다양을 긍정함은 하나하나의 부정들을 통해 개개가 지닌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긍정이란 단지 각각을 100%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고유한 한계들 때문에 어느 하나를 유일하게 긍정할 수 없는 그 상황을 말하기 때문이다. 긍정은 부정의 한 양상일 뿐이다. 고로 부정은 긍정보다 크며 궁극적이다.

역사철학은 그런 면에서 한계와 부정을 통해 역사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다. 큰 이야기가 만용으로 치부되는 시절인 까닭인지 어느새 절판된 이 책을 찾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먼지만 푹푹 뒤집어 쓰고 잠자고 있던 이 책을 깨웠다. 이제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의미를 찾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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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의 삶과 죽음
레지스 드브레 지음, 정진국 옮김 / 시각과언어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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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문자적 인간과 이미지적 인간이다. 문자적 인간은 부정의 신화 속에 산다. '부정의 신화'란 혁명적 좌파를 공격할 때 자주 쓰는 수사로써 현실 부정을 통한 유토피아 정신을 폄하해서 이르는 말이다. 문자는 드브레가 말한대로 상징이며, 상징은 '아직 없는 것'을 향한 갈구이다. 나는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이고자 한다. 그것은 '이미 없는 것에 대한 갈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 끝은 역사의 시작으로 휘어져 들어간다.

맑스의 공산주의적 이상사회는 합리적 이성으로 무장한 원시공동체 사회이다. 노스텔지어적 벡터와 유토피아적 벡터는 힘의 방향이 완전히 반대지만 서로 휘어져 들어간다. 이미지적 인간은 우선 즉자적이다. 즉자적 반응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각계에 포착된 바를 어떤 검열없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가능한가? 아무런 검열없이 인식이 가능한가? 푸코가 고민한 문제였고, 그의 답은 그런 인식은 불가능하다였다. 내가 보기에 이미지적 인간 역시 하나의 신화로 보인다.

특히 요즘 예술가들이 추앙하는 영웅들은 대개가 이런 인간이다. 과도한 이데올로기 시대에 대한 또 다른 과도한 반동으로 이미지로부터 모든 담론들을 희석해내려는 시도들이 이어진다. 검소한 청교도적 전통을 지닌 미국은 선불교의 유입 속에서 미니멀리즘이란 미술장르를 탄생시킨다. 하지만 거꾸로 이 미술을 설명하려는 두터운 논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과연 어느 쪽이 승리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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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 궁리필로소피 1
케니스 맥리쉬 지음, 장영란 옮김 / 궁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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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수업을 받다가 비극의 개념 중에서 영웅의 '결함'으로 해석된 그리스어 harmatia에 대해 배운 기억이 난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영웅)은 윤리적 결함을 지닌 바가 있고 그로 인해 비극적 구성이 자리잡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란다. 결함lack이 아니라 단지 실수error일 뿐이다. 만일 윤리적으로 결함있는 주인공이 비극적 결말에 다다른다면 어떻게 관객들이 그에 대해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킬 것인가?

그들은 단지 주인공의 운명에 대해 만족해 하는 것이 더 개연성있는 설명이 아닌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교도 아리스토테레스의 비극론에 대한 기독교적 수용의 결과가 아닐까 한다. 신의 무한성에 대비해 인간의 유한성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으며, 그래서 아리스토테레스의 '하르마티아'가 지닌 '실수'라는 행동적 차원의 형이학적 의미에서 '결함'을 의미하는 존재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의미로 이해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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