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 바쁜 마음도 쉬어 가는 라오스 여행기
김향미.양학용 지음 / 좋은생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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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수만가지 소리에 시달리다 보면 끊임없이 귀로 흘러들어오는 소리들이 그 자체로 일상이 된다.

분주한 아침, 마음마저 바쁘게 만드는 아침뉴스. 출근길 버스와 지하철의 굉음과 사람들의 발자국. 해가 하늘에 떠 있는 동안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내는 소리들이 하루를 꽉 채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 귀에 꽂은 음악까지. 귀는 온종일 온갖 소리의 홍수 속에서 지나치도록 많은 소리를 흡수하고 우리는 그 자극이 마치 당연한 것인듯 산다.





그러다 자정을 막 넘긴 어느 밤. 티비는 먼저 잠들었고 으례 노트북으로 감상하던 영화도 시들한 어느 밤.

마당 구석에서 귀뚜라미가 희미하게 날개를 비비고 어쩌다 가끔 먼데서 자동차 지나가는 자취만 들려올 때가 있다.

달빛이 내리는 것에도 고양이가 담을 넘는 것에도 겨울바람이 성큼 가까워지는 것에도 소리가 있다면 그 밤 역시 소리가 충만하겠지만, 여름가뭄을 지나는 시냇물 줄기마냥 모든 소리가 자리를 감추는 그런 시간이 있다. 그런 시간에 깨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 비움의 즐거움. 특별하게 신비한 어떤 소리가 들려서가 아니라 아무 소리도 없어서 편안하고 즐거운, 신비하기까지한 어떤 시간. 이 시간을 알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그 시간을 기다려 적막함을 만나야만 한다. 아무 소리가 없어 더 특별한 밤.





특별한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아무것도 없어서 라오스에 끌렸다고 한 저자들의 이야기에 그래서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무엇을 더 채우고 더 얹기 원한다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도시로도 충분하다. 우리가 갈망하는 변화란 채우는 것이 아닌 빼는 것. 소리를 비롯해 온갖 것의 무질서한 풍요 속에 내던져진 우리는 어쩌면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플러스가 아닌 마이너스라는 것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의 저자들은 도시에서 아둥바둥하고 있는 우리보다 조금 더 일찍 본능이 알려주는 것을 실천한 용자들이다.














제주도에서 터를 꾸리던 이 부부는 불현듯 라오스로 떠났다. 흔들릴지언정 일상이 있기에 여행이 있다는, 여행의 본질을 꿰는 말을 던진 저자들은 행복하기 위해 라오스로 향했다. 몇 번의 식민지와 처절한 내전을 거친 이 나라는 사실 이렇다할 관광지나 특별한 풍광이 많지않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많은 여행자들이 찾아온다고 소개했다. 그들이 라오스에 끌렸던 그 이유와 동일한 이유로 라오스에 매력을 느끼는 여행자들이 점점 많아지는가 보다.





황톳물이지만 인도차이나 6개 나라의 젖줄로 지구상에서 가장 오염이 덜한 강으로 주목받고 있는 메콩강처럼, 소박하고 단촐하지만 신선같은 미소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라오스. 인생의 섭리를 탐구하기 위해 철학자 혹은 구도자들이 인도를 찾아가듯이 문명과 삶에 지친 사람들이 라오스를 찾아가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부부가 조바심도 내지 않고 불안해하지도 않고 유유히 흐르는 메콩강처럼 돌아본 라오스 기행이 그 당연함을 설득시키니 말이다. 황무하고 멋없는 숲과 들판, 강과 사람들, 그들의 마을과 사원, 사는 자취들이 자연스럽게 일러준다. 장식도 없고 필요없는 멋도 부리지 않는 그런 천연한 삶의 터전이 라오스라고.





차근차근 라오스 여행길을 안내해준 저자들의 글과 사진, 포토에세이에 남겨둔 아쉬움에도 멋을 부리지 않은 저자들의 모습이 라오스와 무척이나 닮아서 참 신기했는데 책을 다 읽고보니 그걸 신기해하는 내가 참 바보같았다. 라오스를 닮았으니 라오스로 찾아간 여행자들 아니던가. 글도 사진도 당연히 라오스를 실어오기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들이 아닌가 말이다.










라오스 남자들은 일생에 한번은 반드시 승려로 지낸다고 한다. 공양을 해서 끼니를 잇고 수행을 하며 인내와 절제를 배운다. 그래서일까. 저자들이 만난 라오스 사람들에게는 잔잔하고 너그러운 미소가 있었다. 그 어떤 문화재나 예술품이 줄 수 없는 넉넉하고 포근한 감동이 거기서 왔다. 지구 반대편에서 시속 100킬로미터로 질주하고 있어도 라오스 사람들은 천천히 그들만의 걸음을 고수한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어쩔 수 없었던 미약한 개발과 발전의 결과이기도 하고 라오스 사람들을 잉태한 그곳의 환경적 특성이기도 하다. 라오스 인들은 여전히 시속 4킬로미터로 터덜터덜 굴러가도 그것만으로 행복해한다. 곤핍 이상의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곤핍조차도 넉넉하게 받아들이는 듯, 욕심이 비치지 않는다.





소리가 그친 후에야 적막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났듯 라오스 여행기를 읽고나서야 바쁜 마음이 쉬어갈 수 있는 둥지를 찾는다. 어떤 사람은 여행을 통해 에너지를 채운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여행을 하며 에너지를 소진한다고도 한다. 그래서 여행이 참 재미있다. 무언가를 채우면서 동시에 다 비우고 오는 길. 라오스를 다녀오는 길에는 아마 그럴테지. 욕망이나 성난 것은 버리고 아무것도 없어 오히려 충만해지는 비기를 채워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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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1 - 미천왕, 도망자 을불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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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를 괴롭힐수록 좋은 와인을 만난다.' 와인생산자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다. 좋은 와인을 빚을 좋은 포도를 맺으려면 포도나무는 자갈이 많고 척박한 토양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거기에 햇빛은 강렬하고 심지어 강우량까지 적은 기후에서 포도나무는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곤핍하고 고단한 시간을 보낸 포도나무에서 열린 포도는 오랜 숙성을 거쳐 명주가 된다.

옛 사람들을 만나고 우리의 역사를 마주할수록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의 땅은 어쩌면 커다란 과수원. 거친 광야에 먼저 자리 잡은 선진들이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었다. 향기로운 과실을 맺기 위해 그 척박함을 견디고 이겨 점차로 더 아름답게 이 땅이 가꾸어져 우리에게로 흘러온 것 아닐까. 우리가 오늘의 달콤한 결실을 만나기 위해 백 년 혹은 천 년 전에 이 땅에 머물렀던 사람들은 고단함을 견뎌야 했을터다.


을불이 낙랑과의 전투에서 대승하고 결국 고구려의 긍지를 회복한 그 순간, 그는 동천왕부터 봉상왕 시절까지 진나라에게 무릎을 꿇은 채로 견뎌야 했던 세월들을 떠올렸다. 고구려가 진나라의 군사를 몰아내고 낙랑을 회복하는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개인 을불과 나라 고구려 모두가 참담하고 고단한 시간들을 지나왔다. 그래서 승리가 있었고 감동이 있었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것은 소설 [고구려]가 을불이라는 덕장을 통해 그리는 감동이 낙랑 전투의 대승, 그 한 순간에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고구려]의 진짜 감동은 을불과 고구려가 향기로운 승리를 결실하기까지 통과해야 하는 고생길 굽이굽이에 깊이 흐르고 있다.


"왕이 밥을 지었다고!"

"그렇다."

"밥이라! 나는 낙랑군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문호는 껄껄 웃으며 자신의 창을 잡아들었다.

"애초에 이길 수가 없는 싸움이었구나. 천시, 지리, 인화라 했거늘 우리는 무엇으로 저들을 대적했는가! 군사를 부림에 한참 미치지 못했음을 이제야 알겠다." (3권 중에서)


왕손인 을불이 집도 절도 없이, 비천한 소금장수의 초라한 행색으로 낙랑까지 흘러들어갔다. 유복하고 풍성했던 시절 자신의 삶 밖에 보지 못해 화를 불렀던 그는 고독하게 유리하는 동안 타인의 삶으로 시야를 확장했다. 천민으로 취급받고 노리개와 웃음거리가 되는 고구려인, 죽은 아이들을 삶아먹을 수밖에 없는 처참한 숙신 사람들, 대의를 위해 기꺼이 희생과 충의를 보여주는 많은 사람들. 단 하루 몸도 마음도 편히 누워 쉴 수 없는 모진 날들이었겠지만 그 속에서 포도나무처럼 을불은 자랐다. 혹독한 삶의 고개들을 넘는 그에게 지혜와 덕이 차곡차곡 쌓였다. 궁 안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알뜰살뜰한 가르침을 받은 을불 역시 덕망 있는 군주로 성장했겠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봉상왕에게 잃고 궁 밖으로 도망한 후에 을불은 비로소 고구려의 대업을 이룰 왕재가 되었다. 어쩌면 그에게는 가혹한 말이겠지만 을불이 도망자가 되었기에 을불과 고구려 모두가 살았다.


소설 [고구려]는 제1권 첫 장에서 스승과 제자인 두 선인의 대화를 시작으로 제3권에서 승리의 감격 속에 여정을 마치기까지 이러한 을불과 고구려의 역경을 담고 있다. 짧고 군더더기 없는 김진명의 필치는 거침없이 숙숙 달려 고구려를 회생시킨 위대한 왕인 미천왕의 생애를 박진감 있게 그려냈다.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북방 정벌의 긍지로 기억되는 고구려의 패기와 덕망이 김진명이 그려내는 미천왕기 속에서 고스란히 살아난다.


그렇게 김진명을 통해 부활한 고구려의 시간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영웅과 강한 나라 모두 운명처럼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하늘의 운세대로 나라가 무너지는 별자리를 거슬러 을불과 고구려는 치열하게 싸워 살아남았다. 그리고 우리는 역사의 기록을 펼치고 더듬어본다. 이렇게 강한 고구려가 우리의 역사 속에 있었노라고. 그러나 고구려와 그 왕들은 이제 그 장렬했던 순간을 두근거림과 아득한 긍지의 역사로 남긴 채 이 땅에 묻혔고 지금 우리가 서 있다. 우리는 제대로 살아남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척박한 토지를 견디어 낸 포도나무의 자취를 기억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 이후에는 무엇이 남을까.


[고구려]라는 소설이 비추는 것은 우리 역사에의 재조명이 전부가 아니다. 불세출의 영웅 을불과 고구려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우리의 역사를 아는 것에서 한 걸음이 더 필요하다. '우리 젊은이들이 삼국지를 읽기 전에 고구려를 먼저 알기 바란다.'는 저자의 말은 단순한 관심과 앎이 아니라 우리나라와 민족에 대한 긍지, 그리고 이 긍지의 계승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노력을 촉구하는 바람 아닌가. 17년이라는 인고의 세월 끝에 김진명이라는 작가는 소설 [고구려]를 맺는 것으로 소임을 다했다. 남은 것은 이 가슴 떨리는 소설을 읽은 우리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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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서울 산책 - 오세훈의 마지막 서울 연가!
오세훈 지음, 주명규 사진, 홍시야 그림 / 미디어윌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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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사이, 서울은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



지하철 광장에는 시간마다 국내외 아마추어 예술가들이 공연을 펼치고, 시내 곳곳마다 크고 작은 문화 행사가 무료로 열린다.

조금만 손품을 팔아 박물관 사이트에 접속만 해도 무료영화, 무료강습 등 이런저런 문화 체험들에 쉽게 참여할 수 있다.

광화문 앞에 펼쳐진 너른 잔디융단이 더 이상 낯설지 않고 청계천을 따라 거니는 데이트 역시 이젠 무척 익숙하다.



몇 년 전만해도 갈 곳과 놀 곳이 부족했던 서울은 이제 거리마다 특유의 분위기와 명소를 가진 다이나믹한 도시로 변모했다.

물론 서울의 변화에 이런저런 비판의 소리도 적지 않다. 그리고 그 비판의 소리 중에는 무척이나 타당한 이야기들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서울의 변화가 반갑고 기쁘다.

되살아나는 서울의 성곽길, 도심 한가운데의 캠핑장, 생태공원과 박물관 등 이제라도 서울이 구석구석 예술과 자연, 문화가 숨쉬는 도시가 되어가는 것 같아서 반갑고 기쁘다.














서울 산책 가이드라고 할 수 있는 [오후의 서울 산책]을 펴 내면서 저자 오세훈은 이렇게 말했다.

" 서울은 정말 모두가 생각하는 대로 갈 데가 없는 재미없는 도시일까? 그래서 난 이번에 두 발로 직접 서울을 거닐면서 서울이 얼마나 갈 데가 많은 도시인지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직접 카메라를 들고 서울 전역을 돌아보고 난 저자는 서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서울은 갈 데가 없는 곳이 아니라, 그동안 너무 야박하게 평가돼 왔다는 것을 알았다. 막상 작정을 하고 찾아보니 좋은 곳이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내 생각도 그렇다.





2008년 이후, 서울시가 문화정책을 적극적으로 펴기 시작하면서 서울의 즐길거리들을 안내하는 책이 꽤 많이 출간되었다. 서울의 맛집과 관광명소들은 물론, 숨어있는 좋은 카페들과 골목길, 산책길에 대한 책들은 저마다 대동소이한 내용으로 서울을 가이드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 책들 중에서도 분명 눈에 쏙 들어오는 좋은 책들이 있다. 이 책이 그렇다.












직접 서울시정을 했던 공직자로서 동시에 누구보다 서울을 사랑하고 아끼는 한 사람으로서의 걸음이 담긴 이 책에는 서울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하는 곳곳을 안내한다. 으례 많은 책에서 보았던 곳들도 있고 전혀 처음 보는 곳도 있다. 기존의 책들이 20~30대를 타깃으로 데이트나 여가장소를 혹은 관광장소를 소개하고 있다면 이 책은 조금 다르다. 혼자 가도 좋고 둘이 가도 좋고 가족이 가도 좋은 곳. 데이트여도 좋고 공부를 위해서도 좋고 취업을 위해서나 취미 때문에 찾아가보아도 좋은 그런 곳들이 있다. 서울을 처음 와보는 사람도, 서울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도 좋을 그런 곳.









식상한 콘텐츠를 일부 싣고 있지만 서울 전체를 직접 돌며 행복하고 아름다운 곳을 소개하는 책이니 만큼 빠지면 안되는 곳은 다 들어갔다고 보는 게 좋겠다. 개인적으로 제일 좋았던 부분은 서울 둘레길에 대한 소개였다. 시간이 그득하게 쌓여있는 서울의 성곽길과 2014년 완공 계획인 외사산 둘레길에 대한 이야기들은 무척 설레였다. 외사산 둘레길이 완전히 조성되면 2박 3일, 55시간 걸어서 서울을 한 바퀴 도는 대장정이 열리게 된다면서 저자는 그래도 둘레길을 따라 서울을 한 바퀴 일주하는 사람은 많이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이미 완공 전부터 이렇게 기대되는 서울 일주길인데 꼭 많은 사람이 찾아야만 의미가 있을까. 그도 책에 썼듯이, 심신이 지쳤을 때 찾아갈 만한 성찰의 길이 서울 둘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있다고 생각이 든다.















문화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고 모든 것일수도 있다.



그러나 매일 아침 출근길에 만나는 한강 다리와 강변의 풍경, 점심 시간을 쪼개 거니는 공원의 산책로, 퇴근길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지하철 광장의 흥겨운 멜로디, 서울이 바뀌면서 서울에 사는 우리들의 삶에는 이미 문화가 가득 들어와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무척이나 부정적일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그가 서울에 들인 애정과 노력에 이의를 달 수는 없지 않을까.







[오후의 서울 산책]에 담긴 전 시장의 발걸음을 따라 서울을 돈 후 이제 다음 서울을 기대한다.
서울에 대한 긍지와 애정이 가득한 합리적인 시정 속에서 몇 년후, 그리고 또 몇 년후에 지속적으로 서울이 더 풍부하고 풍요로운 문화의 도시가 되길 바란다. 누구라도 쉽고 가볍게 문화 생활을 즐길 수 있는 도시가 되길. 더 풍부하고 풍요로운 문화 속에서 자란 우리 다음 세대들에게 서울은 더 아름다운 도시로 기억되고 소비되는 곳이리라. 서울은 충분히 그럴만한 힘이 있는 도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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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키
존 윈덤 지음, 정소연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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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과 함께 빛을 발하는 것은 어쩌면 오히려 쉬운 일이다.

다음 십년 그리고 그 다음 십년,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강력한 흡인력을 발산하며 독자를 끌어당기는 것보다야 쉬운 일이 아닌가.

그래서 베스트셀러와 스테디셀러의 단계를 넘어 그보다 오래오래, 세대와 인종, 문화마저 다른 독자들에게까지 그 가공할 매력을 발휘하는 작품들은 명작이라고 불린다.







1900년대 중반, SF 소설과 영화계에서 막강한 상상력을 발휘했던 존 윈덤의 1968년 작품 <초키>는 명작이다.

작품은 반백년 정도 전에 출간되었고 그 상품성을 인정받아 TV시리즈로 제작되기도 했다지만 그마저도 벌써 16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2011년의 가을인 오늘, <초키>에서는 세월의 묵은 내를 거의 느낄 수 없다. 43년 전에 쓰여진 이 공상 소설은 여전히 흥미진진하고 강력하다. 마치 히치콕의 스릴러가 그러한 것처럼.








어떤 아이들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내 친구'가 있다.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이자 어느 때라도 내가 필요할 때 나와 대화할 수 있는 그런 착하고 좋은 친구. 처음에 데이비드는 아들 매튜에게도 그런 친구가 생긴 줄 알았다. 데이비드의 아내는 매튜의 새 친구, 초키가 시간이 지나면 매튜의 의식 속에서 사라져버릴 어떤 공상의 존재라고 성급히 단정짓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데이비드는 매튜와 대화를 나누는 초키가 매튜가 만들어낸 공상의 존재가 아님을 믿을 수 밖에 없게 된다. 수영을 전혀 하지 못하던 매튜가 갑자기 수영선수같은 수영실력으로 수영협회의 훈장을 받는다든가, 그림에는 영 소질이 없었는데 어느날 참신하고 기이한 시선과 기술로 주목할 만한 작품을 그려낸다든가 하는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매튜는 이런 이상한 일들이 자신의 능력이 아닌 초키가 해낸 일이라고 털어놓는다.





문제는 '초키'다. 이 초키라는 존재는 매튜를 대신해 수영을 하거나 그림만 그리는 게 아니었다. 초키는 1년이 왜 365일이어야 하는지 왜 하루는 24시간이어야 하는지에 강한 의문과 반발을 갖는다. 신형 자동차나 배의 엔진이 매우 낭비가 심한 구식이라며 힐난하고 성별이 남과 여, 둘로 나뉘어 있는 것 역시 비효율적이며 혼란을 야기한다고 주장한다. 지구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에 의문을 가지고 인간이 가진 공학기술과 세계관에 딴지를 거는 것이다.













<초키>는'초키'가 일으키는 사건들과 '초키'를 인지한 사람들이 벌이는 사건, 이 두가지가 맞물려 돌아간다. 초키는 유일하게 교통이 가능한 상대인 매튜를 통해 어떻게는 목적을 달성하려고 애를 쓰고 매튜는 초키에게 시달리면서도 초키와 자신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 애를 쓴다. 매튜의 아버지 데이비드는 초키 때문에 힘들어하는 아들을 돕고 점점 통제가 어려워지는 상황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매튜의 무의식 최면을 통해 초키를 발견한 과학자들은 급기야 매튜를 납치하기에 이른다.

얼핏 우주에서 날아온 지성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SF 공상 소설같지만 만약 그게 전부였다면 <초키>는 SF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 같은 독자에게 절대 매력적일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당신이' 초키가 실재하는 양 말하기 시작하는군."

메리가 손을 뻗어 담배를 집어 들고 불을 붙였다.

"실재한다는 개념은 상대적이야. 악마, 악령, 마녀 등도 그걸 믿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진짜 존재하는 것들이지.

마치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신이 실재하듯이 말이야. 자기 믿음에 따라 살기 시작하면 객관적인 실재는 거의 무의미해져.

그래서 우리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걱정하는 거야. 매튜의 놀이에 어울려주면서 우린 매튜의 믿음을 강화시키고,

이 초키라는 존재를 더 확고하게 만들어 버릴지도 몰라."

p51~52 페이지









"초키도 제가 그림을 못 그렸다고 했죠. 전 열심히 했지만 잘 그려지지가 않는다고 대답했고요.

그랬더니 초키가 그건 제가 주위를 제대로 보지 않아서래요. 전 '제대로' 보는 게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고 했죠.

보거나 보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고요. 그러니까 초키가 아니라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보지 않으면서도 보고 있을 수 있다고, 제대로 보지 않으면 그렇게 되기도 한 대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조금 말다툼을 했죠."

p118~119








매튜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이건 옳지 않아요. 초키가 받아야 할 상이에요. '초키가' 저와 폴리를 구했어요.... 이건 사실이 아니에요, 아빠..."

아이는 고개를 수그린 채 메달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성장이라는 과정이 주는 충격, 환상이 깨어질 때의 고독한 상처가 남기는

가슴에 사무치는 기억들을 떠올렸다. 정당하지 않은 상을 주기도 하는 세상에 자신이 살고 있다는 자각도 그중 하나였다.

가치가 흔들리고, 믿음직스럽던 것들이 갑자기 보잘것 없게 느껴지고, 확고하던 것이 공허해지고,

금이 놋쇠가 되고, 어디를 보아도 일관성이라고는 없는.......

p203~204









우주 저편에서 등장한 고등 지성체인 초키를 내세운 이 이야기 속에는 '인격'과 '자아'를 가지고있는 생명체들이 고민하는 실존에 대한 철학이 숨겨져 있다. 이야기 초반, 12살 평범한 소년인 매튜를 평범하지 않게 하는 초키의 정체-외계에 대해 궁금해지다가 초키(작가)가 계속 던지는 의문과 초키를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이 진행될수록 관심은 더 이상 외계가 아니라 지구로 수렴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별을 움직이는 법칙, 관념과 질서에 대한 재기넘치는 비판이 초키와 매튜, 데이비드의 말 속에 담겨 있다. 존 윈덤의 날카로운 통찰은 시대가 지나도 녹슬지 않고 여전히 묵직하다.




그래서 재미있다. 초키의 정체에 다가가는 과정도, 초키로 인해 사건에 휘말리는 매튜의 심리를 따라가는 것도, 매튜를 지키기 위한 데이비드와 메리의 상반된 노력과 반응을 지켜보는 것도. 너무 진지하지도, 어렵거나 복잡하지도 않은 이야기가 군더더기 없이 흐르면서 사건 속으로 자연스럽게 빠져든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직접 감독 및 제작을 맡아 영화화하고 있는 데에는 아마도 시대를 초월해 독자를 매료시키는 존 윈덤의 깊은 성찰과 지성 때문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든다. 과연 스필버그가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어떻게 빚어낼까, 벌써 기대가 된다.






* 존 윈덤은?

1903년에 태어나 1969년 타계했다. A.C.클라크, E.F.러셀 등과 함께 영국 SF계의 대표적 작가이다. 《트리피드의 날》(1950) 《해룡() 잠을 깨다》(1953) 《저주받은 마을》(1958) 등 우주의 침략을 테마로 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단순한 SF 스릴러가 아니라, 한계상황에 놓인 지구인류와 인간성과의 대비를 영국풍의 면밀한 수법으로 그려낸 극히 사색적이고 독특한 작품들을 쓴 작가로 평가받고 있으며 트리피드의 날, 저주받은 마을 등이 영화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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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피라예 - 가장 최고의 날들
자난 탄 지음, 김현수 옮김 / 라이프맵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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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의 터키의 한 연구소에서 실시된 조사에 의하면 터키 여성의 21.8%가 초등학교를 아예 가지 않았거나 마치지 못했고 불과 17%의 여성들만이 고등학교 또는 대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2010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터키여성의 42%가 남편이나 애인으로부터의 폭력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다. 아내의 귀를 자르고 고문한 남편의 징역은 2년, 그러나 그것조차도 남편이 뉘우치고 있다는 판단이 들면 바로 풀어주고 즉시 그가 고문한 아내와 함께 살수 있게 된다.



여성이 국가의 수장으로 나서고 남성의 사회적 지위를 초월하는 알파걸들이 속속 출현하고 있는 지금, 그러나 우리의 세상 한 켠에는 여전히 여성에 대한 폭력과 천시가 당연시 되는 사회가 있다. 이미 1926년에 남녀평등권이 도입되었고 일부일처제가 법으로 확립되었으며 여성에게도 엄연히 선거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이 남성보다 낮은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 갇혀있는 터키. 그런 터키 여성들의 자주와 독립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내 이름은 피라예]가 한국에 왔다.











[내 이름은 피라예]의 주인공 피라예는 진보적이고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고등학교 시절을 거치며 시와 좌파주의에 심취한 터키의 여대생.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후계자가 되어 치과를 물려받기를 강요하는 아버지의 뜻에 의해 치의생과로 진학한 그녀는 결혼한 언니 그리고 몇 번의 연애를 거치며 터키에서 자주적인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매일 고민하고 저항하며 살아간다. 유명한 부호이자 보수적인 집안으로 시집을 가게된 그녀는 아들을 요구하는 시어머니와 자신을 속박하는 남편 등 터키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당연시 되는 결혼 생활에 점점 지쳐간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을 낳은 그녀가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진단을 받자 시어머니는 대리모를 들일 것이라며 선언을 하는데....





마치 여대생의 일기를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하는 이 책은 터키 여성의 현실을 고려해 봤을 때 꽤 파격적인 캐릭터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주인공 피라예는 굉장히 공격적이고 고집스런 성격이며 그녀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연애와 결혼사는 매우 과감하고 격렬하게 요동친다. 점점 개방적이고 진보적이 되어 가는 이스탄불의 대학생들과 그에 비해 여전히 보수적이고 폐쇄적으로 남아있는 피라예의 남편 하림의 세계가 대비되며 터키 남성과 여성 그리고 과거와 현재가 부딪히는 흥미로운 장면들이 그려진다. 이스탄불의 부유한 치과의사로 살고 있는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 남편의 폭력과 바람을 좌시하지 않고 이혼을 감행하는 그녀의 언니가 진보적인 성향의 인물로 나오고 피라예의 친구들은 자유 연애를 즐기며 피라예 역시 자유롭게 교제를 하지만 어떤 남자들은 여전히 과거의 전통적인 인식을 가진 인물들로 등장해 피라예에게 실망을 준다. 특히 피라예의 남편 하림은 피라예를 마음을 다해 사랑하지만 남자 환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피라예를 참지 못해 손찌검을 하거나 대리모를 받아들이면서도 대리모를 비하하는 등 여성 인권에 반하는 행위을 하곤 한다. 특히 피라예의 시어머니는 전통적인 인간상을 대표하고 있는데, 전통과 관습을 무척이나 중요시하고 불합리하고 반인권적인 제도까지도 강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자주적인 피라예와 완벽하게 대치되는 인물로 나와 결국 피라예와 그녀의 남편 모두를 불행하게 하는데 한 몫 제대로 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 책이 남성우월주의의 전통적인 사회에서 자신의 힘으로 자주와 성공을 일궈가는 여성의 가슴 벅찬 일대기를 그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터키 여성들에게는 무한한 공감과 교감을 이끌어 낼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의 오늘을 살고 있는 나의 눈에 피라예는 부유한 가정에서 좋은 부모님을 둔 덕분에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 살아갈 수 있는 운 좋은 여성으로 비칠 뿐이다. 더구나 유별나게 공격적인 그녀의 말은 때때로 너무 과하지 않나 싶을 정도다. 분명 그녀는 똑똑하고 야무지게 자신의 존엄성을 주장할 줄 아는 여성이지만 주장만 있을 뿐 포용이나 이해가 없는 캐릭터였다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이건 작가에게 아쉬운 점이기도 한데, 피라예의 주변 남성들이 그녀를 좋아하고 그녀의 친구들조차도 그녀를 공주처럼 대우한다는 점에서 마치 할리퀸 로맨스(하이틴 로맨스)를 읽는 느낌을 주기까지 한다. 부유하게 자라고 일류 대학을 다니고 친구들에게 공주처럼 대우를 받아야만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이 되는가? 더구나 그녀가 시집살이를 하는, 이야기의 후반으로 가면서는 그녀의 복수심을 이해는 하지만 복수하는 방식이 너무나 안타깝다. 어떤 엄마가 자기 자녀를 볼모 삼아 남편에게 복수를 할 수 있을까? 자기 자신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아들을 아빠없는 자녀로 키운다는 결론은 너무 심하지 않았나 싶다. 할리퀸 로맨스로 시작해 아내의 유혹같은 막장 드라마로 치닫는 이야기, 정말 과격하다.









공공연하게 인권을 무시받고 천대를 당하는 여성들의 삶을 조명하고 사회적인 제한과 압박을 이기기 위해 노력하는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내 이름은 피라예]는 터키 문학에 혁명적인 책이 될 수도 있겠다. 터키 독자들이 그토록 많이 이 책을 읽은 것은 이 책이 주는 대리만족의 카타르시스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한국의 독자인 나는 주인공인 피라예에게 커다란 공감이 가지 않고 관심없는 드라마 주인공을 보듯 지켜보기만 하다 책을 덮게 된다. 혜택받은 몇몇만 아무 노력 없이 모든 걸 누릴 수 있게 하는 게 자본주의 체제라고 생각한다는 피라예가 그 자신이 부모의 부에 커다란 혜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독립적인 여성으로 그려지는 이 어색한 상황이 아마 피라예라는 인물에 대한 공감을 막고 있는 것 같다. 물론 터키의 사회상과 변화하고 있는 그들의 인식을 읽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터키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읽어볼 만하다. 이 책에는 피라예의 인생 이야기에 사용되는 터키의 문화와 경관 그리고 도시들의 역사를 세밀하고 흥미롭게 그리고 있으니까. 하지만 운명적인 한계를 이겨내는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보고 싶다면 굳이 이 책을 들 필요는 없다. 강경애나 박완서 등 여성주의를 문학으로 녹여낸 다른 작품들이 더 현명한 선택이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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