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분 기적의 독서법 - 인생역전 책 읽기 프로젝트
김병완 지음 / 미다스북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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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12 독서의 해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책이 있을까.

이보다 더 강력하게 애독, 탐독을 넘어 광독을 하라고 부채질을 하는 책이 있을까.

매일 오전과 오후, 각각 48분은 반드시 책을 위한 시간이어야 한다. 내가 책에 몰입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그렇게 3년을 보냈을 때, 바르르 떨리던 물이 비로소 100도에 이르러 끓기 시작하는 것처럼 독서가의 삶도 끓어오를 것이라며 저자는 확신을 넘어 광신한다.

 

 

3년간 천 권의 독서는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3년이란 기간 동안 천 권의 책을 읽으면 삶의 임계점을 돌파하게 된다.

삶의 임계점이란, 의식과 사고가 비약적으로 팽창하여 인생이 획기적으로 전환되는 시점을 말한다.

이렇게 획기적인 인생역전에는 3년이란 한정된 시간 동안 천 권의 책을 읽어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P26

 

 

독서의 유익함에 대해 말해 무엇하랴. 입만 아프고 몸만 지친다. 이 세상에서 미쳐도 되는, 아무리 심하게 미쳐도 해로움이 단 하나도 없는 그것이 바로 책 아니던가. 그러나 구슬이 서말이어도 꿰어야 보배요 눈앞의 진수성찬도 먹어야 맛이다. 독서의 유익함에 대해 아무리 골백번 사무치게 들어도 독서의 세계로 거침없이 뛰어들어야만 책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법. [48분 기적의 독서법]의 저자 김병완은 그래서 책 권하는 책을 지었다. 독서에 미치면 인생이 바뀔테니 나처럼 해보라고 대단히 진지하게 강권한다.

 

삼성에서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일하다 어느 날 문득 깊은 허무를 느낀 후에,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도서관에 처박혀 책에 미치기 시작했다는 저자. 그는 본인의 독서경험에 비추어 책과 거리가 먼 혹은 나름 책을 가까이는 하지만 특별한 변화와 지혜를 길어올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아침저녁으로 48분씩 책에 몰입해 3년간 반드시 천 권을 읽으라고 조언한다. 3년내에 천권을 읽으면 반드시 인생이 바뀔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면서.

 

 

48분 기적의 독서법을 실천한다고 해서 눈에 보이는 실재적인 능력이나 재주, 기술이 무조건 향상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고와 의식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의식의 도약이 평범한 사람을 비범하게 만들고,

끌려가는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을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P280

 

 

책에 미쳐버리라는 권고를 시작으로 다독이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지, 책 읽는 시간은 어떻게 만들 것인지, 다독을 가능하게 하는 속독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차례대로 정리한 저자는 책의 마지막에 결론을 내린다. 3년간 천 권 독서, 그에 필요한 매일 48분. 이것은 [48분 기적의 독서법], 이 한 권의 동기이며 결론이자 전부이다.

 

왜 천 권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논거는 없다. 그저 천 권 정도 읽어야 사유의 임계점에 다다를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이다. 왜 3년 인가에 대한 논거도 불충분하다. 평범한 직장인의 일상 속에서 책을 읽을만한 시간을 긁어모았을 때 천 권 독서에 필요한 시간이 3년이라서 그렇단다. 왜 굳이 48분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도 명확치 않다. 오전, 오후 12시간 동안 각각 짬을 내볼 수 있는 시간을 모았을 때 48분이라고 저자가 계산했을 따름이다.

 

이 책에서 명확한 것은 '인생을 위해 다독하라'는 것과 다독을 달성하려면 '집념과 끈기'가 필요하다는 이 두 가지다. 그래서 저자는 [48분 기적의 독서법]을 읽은 독자가 반드시 3년간 천 권을 독파하도록 책 전반에 걸쳐 다독을 위한 동기부여에 온 힘을 쏟는다. 맹목적이다 싶을 만큼 다독을 권한다. 1년에 백 권 읽는 이가 많지 않은 요즘, 3년간 천 권을 읽기 위해 필요한 것은 명민한 두뇌나 타고난 집중력이 아니라 반드시 읽고 말겠다는 집념과 끈기임을 체득한 저자는 '다독'의 의지를 다지는 데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런데 그래도 충분하다고 느낀다. 왜 천 권인지, 꼭 3년이어야 하는지, 반드시 48분이 필요한지에 대한 객관적이고 명확한 논거는 없어도 좋다. 명색이 2012 독서의 해인데, 이렇게 미친듯이 독서를 권하는 책으로 벽두를 시작하는 것만큼 어울리는 일이 또 어디 있겠나.

 

 

 

스테디셀러가 된 이지성 작가의 [리딩으로 리드하라]가 수많은 천재와 위인들의 인문고전 독서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뤘다면 [48분 기적의 독서법]은 책의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무조건 일단 읽고 읽고 또 읽고 계속 읽으라고 말한다. 어떤 무익한 책이라도 거기에는 무익에서조차 유익함을 배우는 독자가 있기 때문에 나쁜 책이란 없다. 중요한 것은 책의 질이 아닌 독자의 몰입이다. 어떤 책이든 내가 몰입하고 정신없이 빠져들어 신세계를 만나기를 수백 수천번 반복하면 내가 어느새 바다가 되고 우주가 되어버린다. 이것이 '다독'을 강조하는 저자의 주장이다. 아차차. 그냥 다독이 아닌 집중 다독이다.

 

 

나는 하던 얘기 또하고 또하는, 어디서 본 얘기가 또 등장하고 논거조차 명확하지 않은 자기 계발서를 싫어한다. 어떤 책이든 누군가에게는 필요할 것이라고 여기지만서도 앞에서 이야기한 책들은 누가 읽어도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다. 그런데 이런 책은 다르다. 아무리 듣던 소리 또하고 어디서 읽은 내용이 또 등장하더라도, 책 좀 많이 읽으라고 조언하는 이런 책들은 많이 출간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책에 미친 사회가 되길 바란다. 늦은 밤 이부자리에서 부부가 책을 읽고, 출근 지하철의 숨막히는 자리 다툼속에서도 저마다 책을 읽고, 구둣방 사장님도 순대국집 이모도 짬 나기가 무섭게 책을 읽기를. 아이들은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으면서조차 책을 읽고, 저녁 상을 치우자마자 온 가족이 책에 빠져드는 그런 사회가 되길 바란다. 인생만 바뀌겠는가. 나라가 바뀌고 역사가 바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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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여자집 2012-01-05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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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에 미친 청춘 - 한국의 색을 찾아서
김유나 지음 / 미다스북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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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세 가지가 있다. 일단 '색'이 있고 그 색을 자연에서 옮겨오는 '천연염색'이 있다. 그리고 이 천연염색에 매료된 '청춘'이 있다.

그래서 제목이 [색에 미친 청춘]. 미친다는 말을 참 좋아하는 나는 이 책의 제목도 참 좋다. 무엇이든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 색에 미친 이 24살 아가씨는 과연 어디까지 미쳤을까. 청춘, 나만의 색을 찾기 위해 천연염색의 세계로 뛰어든 저자의 이야기는 한순간에 나를 확 잡아끌 만큼 매혹적이었다. 색도, 천연염색도, 청춘도.

그러나 미안하게도, 책을 다 읽고나서는 김이 샜다. 색과 천연염색, 청춘, 그 어느 것하나 매혹적이지 않은 것이 없는데 이것을 다 담은 내용은 그다지 매혹적이지 않다. 과연 예술서라고 불러야 할지, 청춘의 자서전이라고 불러야 할지 책을 다 읽은 지금도 내내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된다. 너무 다채로운 내용이라 모든 색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을만큼 현란해서인지 아니면 그 많은 색이 한꺼번에 다 뒤엉켜 무슨 색인지 알아볼 수 없어서인지 결론을 내릴수가 없다.


 

미국에서 의상 디자이너의 길을 시작한 저자는 어느 날 청바지 한 벌을 염색하는 데에 12,000리터의 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패션 산업의 화학 염색이 지구를 얼마나 황폐화시키고 있는가에 충격을 받는다. 그러다 그녀의 눈에 든 것이 한국의 '천연염색'. 중학교 때 캐나다로 이민을 가게 되면서 한국의 전통적 정서와는 물리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꽤 거리가 먼 생을 살아온 그녀였지만 이 천연염색의 세계를 만난 순간 단번에 거기에 빠져들어 모든 것을 접고 한국으로 왔다고 한다. 전국 각지, 구석구석 물좋고 산좋은 아름다운 땅에 자리한 한국의 천연염색 공방을 돌며 그녀는 천연염색에 그녀보다 먼저 빠져든 선배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천연염색과 함께 자연으로 돌아가고 기본으로 돌아간 그들의 삶, 그런 그들의 색을 통해 찾아가는 저자의 색. 청춘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저자가 전국의 천연염색 공방으로 발품을 팔며 그녀만의 색에 대해 고민해가는 내용을 담은 것이 바로 이 책 [색에 미친 청춘]이다.

 


 

천연염색 공방을 꼼꼼히 찾아다니며 천연염색 그 자체와 함께 천연염색에 삶을 건 각 공방의 장인들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재미있다. 천연염색이 워낙 고되고 번거로운 일임에도 천연염색만이 줄 수 있는 '색'에 모든 고단함을 잊어버리는 장인들의 이야기는 숭고해 보이기까지 하다. 정해진 순서대로, 욕심내지 않고, 정도를 따라서 그리고 자유롭게 '색'을 구현하는 천연염색의 세계는 이 분야에 문외한인 나에게 대단히 아름답게 느껴졌다. 또한 디자이너로서의 고민과 청춘이 가져야 하는 삶에 대한 자문이 그녀의 천연염색 공방 여정에 잘 담겨 있어 인생과 예술에 대한 저자의 진지한 자세가 인상적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다소 산만하다. 각 꼭지 마다 저자의 염색 체험기가 단계별로 들어가 있는데 이걸 꼭 이렇게 나눠 넣어야 했을까 의문이 든다. 사진 자체도 한 컷 한 컷은 다 예쁜데 레이아웃이 아쉽다. 또한 각 색채별로 정의와 의의를 담는 것은 좋으나 왜 굳이 수많은 해외 예술가의 글을 인용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전통적인 색채와 그를 구현하는 천연염색을 탐구하는 내용에는 어울리지 않는 부분인데다 페이지의 레이아웃도 굉장히 난잡해서 도통 저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스카프 천 한 장을 넣어야 하는 천연 염색통에 두 장을 넣었다고 가정해보자. 원하던 색은 못 얻고 두 장 모두 망칠 뿐이다.

이건 나의 말이 아니라 저자가 쓴 말이다. 욕심부리기 시작하면 자신의 색은 볼 수가 없다.

[색에 미친 청춘], 조그만 염색통에 천을 너무 많이 넣었다. 조금만 욕심을 덜 부렸다면 분명 아름다운 책이 되었을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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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여자집 2012-01-05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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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홍 - 彩虹 : 무지개 김별아 조선 여인 3부작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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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종의 며느리 순빈 봉씨를 이해하는 데에 실패했다. 그 아이를 불쌍히 여길 수는 있으나 사랑할 수는 없었다. 그 측은지심조차 제한적이어서 그런 상황이었다면 그랬을 수도 있겠지, 정도의 안타까움에 그치고 말았다. [채홍]의 주인공이자 역사와 사랑에 대한 작가의 메신저인 순빈 봉씨. 그 아이가 사랑이라고 말하는 감정에 "그저 사랑하고 보니 사내가 아니었을 뿐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여인이었을 뿐입니다"라는 고백은 너무 거창하다. 그런 고백은 그녀가 아니라 곤장 마흔 대를 맞으며 죽어가는 정인을 두고 볼 수 없어 목숨을 걸고 형장으로 달려와 자복한 궁녀에게야말로 어울린다. 열 여덟 살의 달뜬 춘심, 오만하고 철없는 그 갈구와 열망을 사랑, 그것도 역사가 낳은 비극으로 포장할 수 있을까. 나의 실패는 내가 '어리석은 본능을 옹호하고 덧없는 욕망을 지지하는, 오직 인간의 편인 문학'의 사람이 아닌 까닭인가 보다.

순빈 봉씨는 세종의 아들인 문종의 두번째 빈이었다. 휘빈 김씨가 요술에 의지하여 지엄한 왕궁의 법도를 어지럽힌다 하여 폐위한 뒤 세종은 천하일색이라는 순빈 봉씨를 두번째 며느리로 맞았다. 그러나 순빈 봉씨는 본래 학업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을 뿐더러 아버지와 두 오라비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란 고명딸이었다. 당연히 그 버릇이 어련했을까. 열 여덟의 그녀는 세자빈이 대체 무얼 하는 자리인지도 모른채 궁으로 들어와 앉게 된다. 말을 타고 저잣거리에 나가 오라비들과 돌아다니며 제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마음껏 누리며 갖은 사랑을 다 받았던 그녀에게 애당초 궁중 생활이 잘 맞을리가 없었다. 더구나 그녀의 의지처가 되어주어야 할 하나뿐인 남편인 세자는 어려서부터 세종의 엄격한 훈육 아래 하늘 아래 오직 '인의예지'가 전부인 인간형이라 순빈 봉씨가 바라는 감정적인 소통이 불가한 사람이었다. [채홍]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의례가 지엄한 궁중의 법도 아래 궁녀들과 내시들은 육체적이고 감성적인 욕망을 모두 거세당한 채 한평생 살아야 했던 곳이 조선의 궁궐이었다. 뿐만 아니라 왕과 왕후 조차 너무 귀하신 몸이라 날을 정해두고 합방을 하는 것은 물론이요 정서적인 모든 것이 지극히 제한적이고 단단한 율례 속에 맞추어 살아야 했다. 순빈 봉씨는 이러한 숨막히는 궁 생활 속에서 외로움에 시들어가다 어느 궁녀에게 마음을 의지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마음이 몸이 되어 서로 정을 통하고 이에 소문이 퍼져 세종은 결국 순빈 봉씨를 심문 끝에 그녀를 폐위시킨다.



"무엇이오? 대체 무엇이 빈으로 하여금 아내의 예를 저버리고 불경지설을 함부로 토로하게 했고? 이미 친영의 격식을 갖추었으니 육례에 어긋남이 없거늘, 그토록 친정의 가솔이 그리우면 귀녕의 절차를 논하면 될 것을, 무엇이 이 같은 무례를 저지를 만큼 큰 문제란 말이오?"

"그걸 저하께서 정녕 모르셔서 소첩께 하문하시는 것이옵니까? 지금 격식과 의례와 절차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지 않사옵니까? 격식, 의례, 절차..... 정말로 그것으로 사람이 살아진다 하더이까? 그것만으로 살 수 있다 하더이까?"

봉빈의 눈에 문득 눈물이 고였다. 그것은 흡사 담벼락을 향해 헛된 팔매질을 하는 듯한 답답함에서 비롯된 분루이기도 했지만 정녕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목석같은 사내를 향한 간절한 읍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세자의 대답은 한결같이 일목요연하고 몰인정했다.

p105

세자가 바쁜 만큼 봉빈은 외로웠다. 빈궁에 머물 때는 그나마 질투도 하고 애도 태우고 사랑을 얻을 곰곰궁리도 했는데, 그 모두가 사라져 텅 빈 마음에 깃드는 것은 오직 지독한 외로움뿐이었다. 종학으로 나오면 격식을 따지지 않고 끼니 때마다 겸상도 하고 의례적인 것들은 작파하고 필부필부처럼 스스럼없이 오가며 복잡한 절차 없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웃고 울고 사랑하려 했는데.... 간절히 그것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기다렸기에 기대가 깨어진 뒷마음은 더욱 쓰리고 아팠다.

p195

성동(열다섯 살 된 사내아이)이 되도록 세자는 여인을 알지 못했다. 음양의 이치에 대해 배우기는 했으나 그것도 학문적인 흥미로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그는 다만 피로했다. 제아무리 즐거이 감당하는 책임과 의무라도 잠시 놓고 도망칠 곳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때 마침 나타난 도피처가 세 명의 승휘, 후궁들이었다. 그들은 김씨만큼 집안이 좋지 않았고 봉씨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총명하거나 강건하거나 지혜롭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러하기에 책임질 것도 의무감을 느낄 일도 없었다. 명분을 따지고 격식을 차리며 규범과 규율을 들먹일 필요는 더더욱 없었다. 승휘들을 만나러 갈 때면 세자는 어린 날 숨바꼭질을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요구하고 다그치지도 않았다. 저항 없이 순정하며 경계 없이 수용하였다. 그 뭉근한 평온이야말로 완벽했다. 사랑이라는 불완전하고 변덕스런 마음 따위로는 절대 흠집 낼 수 없는 옥구슬의 세계였다.

p275



사랑이 과연 독인가? 나를 괴롭고 고통에 못이겨 쓰러지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서? 과연 내 목숨까지 달아나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겠다고 결심했을 정도로 참혹했던 내 옛사랑을 돌이켜 볼때 사랑은 독이 아니다. 사랑이 사랑 그 자체로 온전할 때는 결단코 독이 될 수 없다. 사랑 그 자체로 온전한 사랑은 어느 시대에건, 누군가에게건 삶이 된다. 사랑이 독이 되는 때는 오직, 그 사랑에 이해와 희생이 결여되었을 때 뿐이다.

나는 순빈 봉씨의 사랑이 그녀를 죽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이 그녀를 죽인 게 아니다. 사랑이 죄라서 그녀가 죄인인 것이 아니다. 이해와 희생을 모르는 철없는 춘심을 사랑이라고 부른다면 사랑에 대한 모독이다. 극중에 궁녀들의 형을 관리하는 내시 김태감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까지는 막을 수 없다'고 했다. 이에 눈 먼 사랑의 열정을 들어 내시인 김태감은 자신의 불능에 대한 두려움과 젊은 아내에 대한 사랑으로 아내를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왕의 물건을 훔쳐 정을 통하던 내시에게 전하다 발각된 궁녀가 등장한다. 이런 행실들을 사랑이라고 부르기가 사랑에게 미안할 지경이다.

작가는 순빈 봉씨의 입을 통해 말한다. 사랑은 순간이라고. 서로가 서로를 배신하고 죽음에 내어주었지만 생을 뜨겁게 관통했던 사랑만은 고스란하다고. 한순간 뜨겁게 사랑하고 뒤돌아서면 끝인 찰나의 열망일지언정 고스란히 남는다라....... 다 태워버리고 까맣게 재만 남아도 그것이 고스란히 남았다고 할수 있을까. 소설의 제목이 '채홍 - 무지개'인 까닭은 무지개가 태양의 반대편에 뜨는 이치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왕이라는 태양이 빛나는 반대편에는 권력과 욕망과 사랑과 질투 등의 인간적인 감정들로 채색된 여인들의 무지개가 떴다고 작가는 적었다. 그러나 무지개는 태양을 받아 반짝인다. 태양이 없이는 무지개도 없다. 태양(법도와 질서)이 반짝일 때에야 비로소 그 앞에서 무지개(감정)도 반짝인다.

욕망과 감정에 충실한 순빈 봉씨가 가엽지 않은 것은 아니다. 조선은 실로 대단한 남존여비의 세계였고 특히나 궁은 그 대단한 사상의 핵이었다. 궁녀들 간의 동성애가 유행한 것은 그 잔인한 시기를 견뎌내기 위한 그네들의 마지막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또한 순빈 봉씨가 그렇게 굴레 밖으로 대탈주 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녀의 여린 마음과 외로움을 헤아려주지 않은 문종의 부덕이다. 그러나 욕망 앞에 솔직한 것과 사랑에 솔직한 것은 다르다. 사랑하는 이와 한 이불 속에서 정을 통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고 내 정인이 다른 사람의 이부자리에서 노닥이는 것에 활화산같은 분노가 있는 것 역시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나만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도 나를 사랑해야 이치가 되는 것이다. 나아가 이것이 천륜(부부와 부자)에 어긋나지 않은 때에야 '사랑'이라는 영원하고 항시적인 것이 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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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의 거짓말 - 명화로 읽는 매혹의 그리스 신화 명화의 거짓말
나카노 교코 지음, 이연식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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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표지에 등장하는 여인의 뒷모습을 보고 잠시 기분이 나빴다.

아니야, 이런 미인형이 아니잖아. 좀더 두툼하고 풍성한 살집을 자랑해야지. 어디 이렇게 매끈하고 수려한 등과 다리 라인을 자랑하는 여인을 당시에 미인이라고 쳤겠어. 응??

그러나 이 작품은 1890년대의 작품이었고, 이 그림 속에서 입맞춤을 나누고 있는 남과 여가 피그말리온과 그의 조각상 갈라테아 라는 것을 안 것은 책을 중간쯤 읽었을 때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이야기 하는 건 남자가 피그말리온이고 여자가 갈라테아인데, 이렇게 매끈하고 아름답게 생긴 조각상이 피그말리온의 간절한 기도 덕에 진짜 사람이 되었다는 신화가 아니다. '스스로의 창조물에 욕정을 품고 마침내 사랑을 이루려는 남자를 화가는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확실히 이는 인형에 대한 사랑이나 시간과도 통한다.' 중요한 게 여기다. 아름다운 그림으로 구현된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는 사실 전혀 아름답지 않은 것이다. 이 둘의 뒷 이야기를 들어보면 더욱 아름답지 않아진다.




당신은 그리스 신화를 알고 있나? 얼마나 알고 있는가?

누군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 나는 '잘,... 사실은 전혀 모르는 쪽에 가깝다.'라고 대답을 해야 한다. 물론 제우스, 헤라, 아프로디테 등등 이런 유명한 이름들은 알고 있지만 그리스 신화집을 읽다가 집어치운 적이 한두번이 아니기에 이름만 알고 있는 게 전부. 왜 번번이 집어 치웠냐고 물으신다면,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복잡한 족보 때문이라고 하자. 다 접어두고 일단 제우스가 마음에 안 든다. 헤라도 그렇고. 막장 연속극을 이미 오래 전부터 찍고 계신 두 분이시다. 그래서 나는 어린이 추천만화나 소설로 그리스 신화가 등장할 때면 내심 긴장이 된다. 혹시, 동심을 어둡게 하는 이상한 에피소드들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겠지, 응? 하며 걱정을 하곤 한다.

나에게 그리스 신화란 이런 것이라서, 참으로 알기도 버겁고 이해하기는 더더욱 버거운 존재였다. 전혀 아름답지 않은 이 신들을 그토록 아름답고 환상적으로 그려낸 화가들의 그림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프로디테가 불륜의 화신이라면서 왜 그리 아름답게 그려놓았는가? 불륜에 재주가 있으려면 절세미모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합의라도 있었던 거야?

이렇게 그리스 신화 앞에서만은 유독 배배 꼬여있던 나의 시선을 시니컬한 유머로 툭툭 건드린 사람이 [명화의 거짓말]의 저자 나카노 교코다.



와세다 대학에서 독일 문학과 서양 문화사를 강의하고 있는 나카노 교코는 [무서운 그림]이라는 전작을 통해 독특한 미술 읽기 시각을 보여준 적이 있다. 그런 그녀가 이번에는 그리스 신화를 페이지 위에 올리고 난도질을 했다. 그녀에 의하면 명화 속에 등장하는 그리스 신화의 인물들 대부분은 절대로 정상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성애 앞에 앞뒤 못가리고 무너지는 인물들이 다수이며 결벽증이 엄청나다거나 아예 도덕 관념을 상실한 존재도 있다.

그런 그리스의 신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보인다. 사람이. 그들은 위엄있고 아름답고 휘황찬란한 신의 모습을 흉내내고 있지만 본질은 인간과 같다.

나카노 교코는 먼저 신화를 들어 설명한 뒤 그림을 한 장, 한 장 들어 이해를 돕는다. 화가들이 완성한 환상적인 그림 속에 인간의 추접한 모습을 간직한 그리스 신들이 있다. 하늘 위에 운집한 그리스 신들의 영광도 그녀의 해설 앞에서는 빛을 잃는다. 대신 나카노 교코의 블랙 유머를 입는다.

아마 인류 역사상 가장 해묵은 가장 아름다운 거짓말이 그리스 신화 아닐까. 화가 뿐 아니라 수많은 음악가, 조각가 등 엄청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을 그리스의 신들 속에는 아름답지 않은 인간이 있다. 책 첫 장에 랄프 왈도 에머슨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진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아름담다. 하지만, 거짓 역시 그렇다.' 진실과 거짓, 둘 다 아름답다. 그러나 진실은 아프고 거짓은 즐겁다. 아마 그래서 그리스 신화는 오랜 세월 수많은 예술 작품 속에서 명맥을 유지해 왔는가. 아프지만 아름다운 진실보다 즐겁고 아름다운 거짓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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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란 쏙 성경, 성경 쏙 이슬람
박요한 지음 / 코람데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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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테러가 일어났을 때만 해도 나에게 '이슬람'이란 그렇게 험상궂고 무서운 단체가 아니었다. 사막과 먼지의 중동, 예수님도 거기서 태어났고 성경의 처음 무대도 거기인데 악감정을 가져서 뭐할텐가. 그런데 2004년 즘이었나? 이슬람 무장단체에 피랍된 한국인이 공개처형되고 그 동영상이 유투브에 떠돌았다. 어쩌다 그 동영상을 클릭하게 된 나는 정말 그야말로 정신이 고꾸라질듯한 충격을 먹고는 그후로 이슬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성지를 향해 절을 하는 유순한 등을 떠올리는 대신 가장 먼저 총이 떠올랐고 끝이 구부러진 그들의 칼이 떠올랐고 알라 외에는 없다!고 외치며 살육도 불사하는 그들의 전투적인 포교가 그들에 대한 나의 감상들을 지배했다. 그러나 그들, 이슬람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교리가 과연 폭력적인가에 대한 의문은 언제나 그 공포스런 선입견 뒤에 슬그머니 나타났다. 알지도 못하면서, 제대로 알려고 해본 적도 없으면서 무턱대고 손사래를 치며 덮어두고 비난과 암묵적인 멸시를 하는 것은 과연 나의 신앙에 적합한 것일까.

 

 

교양삼아 성경을 읽었다는 어떤 스님처럼, 나도 그래서 교양삼아 코란을 읽어볼까 했다. 그러던 차, 코란 보다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이 책 [꾸란 쏙 성경, 성경 쏙 이슬람] 이다.

선교회에서 시무하던 박요한 선교사는 이슬람에 대한 많은 연구 끝에 이 책을 내 놓았다. 동일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서 출발하지만 너무나 다른 두 종교 기독교와 이슬람. 저자는 각 종교의 경서인 성경과 코란을 비교, 대조하면서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두 종교 사이를 파고 들었다. 총 5가지 주제에 따라 나뉘어 있는 각 장에서는 성경과 코란에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는 사건들, 그러나 조금 다른 설명들, 코란에는 있으나 성경에는 없는 것들 그리고 성경에 있지만 코란에 없는 것들에 대해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비교적 잘 정리가 되어있다. 저자가 처음 머리말에서 쓴대로, 이슬람에 대해 잘 모르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길잡이가 되어 줄 수 있는 책이다. 무엇보다 성경과 코란을 대조해서 보여주고 있어서 둘의 차이와 비슷한 점을 파악하기가 쉽다.

 

 

그러나 이 책은 어디까지나 기독교인이 쓴,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꾸란이 실려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처음, 저자의 머리말을 읽고 난 뒤에 나는 성경과 코란에 대한 지극히 객관적이고 냉철한 비교와 대조를 기대했다. 실제로 저자는 이슬람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 듯한 눈치여서 그런 내용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성경과 코란의 비교, 대조가 이 책을 이루고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위에 쓴 대로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코란과 이슬람이다. 코란과 성경을 내용상으로 비교하고 대조한 것은 체계적이고 상세하지만 냉철하거나 객관적이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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