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도둑 놈! 놈! 놈! 읽기의 즐거움 6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지음, 유혜자 옮김 / 개암나무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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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릴 때, 장 자끄 상페의 꼬마 니콜라는 나에게 굉장한 자극이었다. 아, 그 유쾌하고 천진하고 개구진 이미지들, 그 구미 돋는 에피소드들. 생각해보면 꼬마 니콜라의 세계는 나한테 친구였다. 나는 나홀로 집에의 케빈처럼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어른 도둑들에게 맞서거나 구니스의 무리들처럼 대단한 보물을 발견하는 위험천만한 모험에 몸을 던질 수는 없다. 나의 현실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세계들도 나에게는 친구였다. 그러나 엉덩이를 들썩이게 하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그런 가까이 하기엔 초큼 위험한 친구들이라고 봐야 했다. 아주 친근하고 부딪히기만 해도 웃음이 나는 그런 친구는 따로 있었다. 꼬마 니콜라 같은.

 

 

프랑스와 독일 문학은 물론 다르다. 무엇이 다른지 이론적으로 줄줄 읊을 능력은 없어 설명하기 어렵지만, 프랑스는 몰랑몰랑한 푸딩의 느낌이 늘 어려 있고 독일은 투박하고 건조하지만 편안한 느낌이 번져 있다. 나에게 프랑스의 꼬마 니콜라를 연상케 한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의 [우체국 도둑 놈놈놈]은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와 독일, 두 친구를 대표한다. 꼬마 니콜라처럼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의 세계도 어쩔 수 없는 말썽꾸러기들이 주인공이다. 작가가 그린 한 무리의 이 영민한 아이들은 유리창깨기나 물건 훔치기 등 비생산적인 일에 힘을 빼지 않는다. 치려면 대형사고를 빡!!! 쳐야지. 이들은 감히 실종된 소녀를 찾겠다고 덤빈다. 꼬마 니콜라의 소박하고 낭만스런 장난기에 비하면 박력이 잔뜩 들어간 아이들이다.


실종된 소녀를 쫓아 우체국 도둑까지 잡게 된 이 친구들의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가 그린 이 야무진 아이들은 소녀도 찾고 학교에서 그들의 정의로운 도전을 인정 받는다. 아이들의 맹랑한 시도는, 단순한 눈요기가 아닌 스토리 전개의 한 부분으로 적극 등장하는 작가의 그림 때문에 더 재미있다. 그의 글은 담백하기만 한데 그의 그림은 담백한데다 유연하고 해학적이면서 유쾌하다. 이 그림은 초등학생들에게 장난스러운 이 이야기가 조금 더 흥미롭고 다이나믹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이기도 하다. 아마 이 작가의 이러한 천진함은 안데르센 상, 린드그렌 상을 수상하게 한 저력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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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9.11테러 이후의 세계 뉴아카이브 총서 4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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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충격적인 경험이었는데, 예전에 미싱용 윤활유를 보리차인줄 알고 마셔버렸던 적이 있었다. 너무 목이 말랐던 한여름 오후, 마침 컵에 말간 보리차가 담겨 있길래 꿀떡 삼켰더니 기름이 식도를 타고 넘어갈 때쯤에야 '아, 이거 기름이구나' 느낌이 왔다. 옆에서 화들짝 놀라신 아버지는 왜 기름을 마시고 있냐며 내 손에 쥔 컵을 빼앗아 가셨다.

기름을 그것도 공업용 기름을 거침없이 들이키고 나서는 물론 가장 먼저, 헉;;; 설마 내장이 어떻게 되지는 않겠지?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그보다 나중에 조금 더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보리차와 미싱용 기름의 색이 그렇게 똑같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름 눈썰미가 좋아서 물건을 잘 구분한다고 자신하며 살았던 나였는데 보리차와 미싱용 기름의 빛깔이 감쪽같이 닮았다는 걸 온몸으로 부딪혀 배우게 될 줄이야.... 물 같은 기름, 기름 같은 물. 마셔보기 전에도 (내가 기름을 물이라고 인식하던 그 순간에도) 기름은 기름이고 물은 물이었으나 내 인식 속에서 기름이 물이었다가 다시 본질인 기름의 모습으로 돌변했던 이 순간의 과정들은 지금 생각해보면 현실(인식) 속에 파고들어 나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만든 실재로부터의 충격이자 내 예상과 감각을 뛰어넘는 현실과 실재의 충돌이었다.

 

 

[로쟈와 함께읽는 지젝]이 왜 그렇게 어렵고 난해했을까. 로쟈와 함께 지젝을 읽고 나서 나 혼자 지젝을 읽으면 더 좋으리라 짐작했던 나는 틀렸다.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보다 혼자 읽는 지젝이 비교할 수 없을만큼 훨씬 더 재밌었다. 911 테러 이후의 세계를 진단한 슬라보예 지젝에게 아직 실재에 눈을 뜨지 못한 사람들이 실재를 접하고 난 이후에 느낄 그 삭막함과 황량함을 따서 '실재의 사막'이라는 감각적인 제목을 붙였겠지만 이 책을 '실재의 사막'이라기보다 '실재의 오아시스'에 더 가깝다. 삶을 화려하게 하는 쪽은 가상화된 현실일지 모르나 삶을 생동하게 하는 것은 그것이 척박할지라도 어쩔 수 없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지젝의 사상이, 그의 글과 생각이 마음에 든 것은 그가 공산주의자도, 자본주의자도 아니어서가 아니다. 지금 세계의 주류와 그 지배층의 검은 속내를 들추고 그것은 거침없이 드러내서만도 아니다. 세계1차 대전의 잔혹한 시대의 끝에서 젊은이들에게 의식과 사유의 확장을 격려했던 헤르만 헤세의 메시지를 연상케하는 울림이 그의 글 속에 있어서이다. 지젝은 911 테러라는 명제를 확고부동하게 놓아두고 그 앞뒤 (과거와 미래)로는 움직이되 그 바닥 혹은 그 허공에 있는 모든 공간을 과감하게 파헤치고 끈질기게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생각하라'는 주문을 걸고 있다.

 

 

'생각하라'는 화두는 사실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이미 많은 책에서 나아가 광고에서까지 우리는 '생각하라'는 메시지를 접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미디어에서 '생각하라'고 주문할수록 우리는 길을 잃는다. 무엇이 생각인가? 어떻게 해야하는거지? 미래를 내다보는 것,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 만이 우리시대, 우리가 해내야만 하는 생각의 전부일 수 없다. 과거는 어제의 현실이었고 내일은 미래의 현실이므로 결국 우리가 생각해야만 하는 것은 언제나 '현실'이 된다. 뒤집어봐야 하는 것은 현실이다. 과연 테러인가. 누가 진정한 피해자인가. 누구의 전쟁인가. 아니, 이것이 전쟁이라고 할수 있는 것일까. 슬라보예 지젝의 글와 메시지에 부응해 나의 현실에 어디까지가 실재인가를 고민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실재라고 밝힌 전부를 나의 실재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밝힌 실재 역시 뒤집어 볼 일이다. 극한의 회의 속에서 실존을 구하는 것은 데카르트의 몫만은 아니다.

 

세계가 더 긴밀하게 연결될수록 국가와 기업 뿐 아니라 개인의 삶까지 서로 유기적으로 더 가깝고 복잡하게 맞물려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이 흐름은 지구가 그 자체로 부서져 근본적으로 와해되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다. 숙명이다. 지구라는 별에 발 붙이고 사는 인간들의 숙명이다. '생각하라'는 숙명. 보리차로 인식하고 있던, 저 컵에 담긴 황금빛 액체가 정말 구수한 물인지 아니면 미싱용 기름인지 아닌지 생각해야만 한다. 생각만으로 알 수 없으면 마셔봐야 한다. 분명 보리차일거라고 확신하고 있던 혀와 생각에 미끄덩하고 기분나쁜 충격이 올지라도, 마셔봐야 확인된다면 마셔봐야 한다. 슬라보예 지젝의 주문은 그것이다. 현실 속에서 그 현실이 전부라고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적어도 무엇이 실재인가 손을 더듬어 컵이라도 손에 쥐어 볼 것인가. 911테러는 그것을 목도한 만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내부와 곧 우리의 생각 내부에서의 전쟁을 일으키는 도화선이었고 그래야만 한다. 그것이야말로 지젝의 말처럼 궁극적 위협으로부터 적어도 우리 자신이 그 위협에 동조하는 일부가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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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죄악, 탐식 - 죄의 근원이냐 미식의 문명화냐
플로랑 켈리에 지음, 박나리 옮김 / 예경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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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어떤 뉴스를 읽다가 경악했다. 뉴스의 주된 내용인즉, 살이 일단 찐 후에는 어떻게든 살을 빼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우므로 찌기 전에 관리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 세상에나... 전세계 다이어터들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치는 기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이 나이 먹도록, 그렇게 많은 다이어트에 실패했던 것인가 싶기도 하고. 삼순이 말처럼 '세상에는 맛있는 것이 너무 많으므로' 어쩔 수 없이 이것이 운명인가 싶기도 하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쉽다. 많이 먹지 말고 맛있는 것을 조금만 먹으라고. 어떤 여자 연예인은 '딱 세 입만 맛있다'고 말하며 그 뒤로는 맛이 없으므로 더 먹고 싶지 않다고 말해 그 프로를 함께 시청하던 나와 친구 모양을 코웃음치게 했던 기억이 난다. 솔직히 말해보자면, 맛있는 음식일수록 더 많이 먹게 되지 않던가. 입에 쓴게 몸에 좋다는 건 상식이지만 입에 달면 손이 더가는 것 역시 상식이다. 미식은 대식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니까.



이 미식과 대식, 나아가 먹는 것에 대한 총체적인 욕망인 탐식은 그래서 인류 역사와 개인의 삶 속에서 아주 긴밀한 자리를 벗어난 적이 없나보다. '식'이 인간의 생존에 절대적인 영향을 발휘하고 있으므로 '탐식'의 역사 또한 전혀 이상하거나 생소할 게 없다. 프랑스 역사학자 플로랑 켈리에는 이 탐식의 역사에 주목했다. 그런데 그냥 많이 열렬히 먹어치운 사람들의 역사가 아니다. 탐식을 죄라고 규정한 유럽의 종교 사회에서 유럽인들은 외면할래야 할 수 없는 '배부름과 맛'의 세계에 어떻게 탐닉해 왔는지에 주목한 것이다. 그래서 책의 제목 역시 종교적인 엄격함과 그 속에 은밀히 자리해온 욕망을 동시에 보여주는 [제7대 죄악, 탐식] 이다.




책은 중세의 신학자들이 규정한 '탐식은 죄'라는 명제에 대한 해설로부터 출발한다. 성경 어디에도 탐식이 죄라는 부분은 없었다. 먹어선 안될 음식을 구분한 하나님의 법은 신학자들의 필요에 의해 어느새 먹는 것을 탐하는 것이 곧 죄라는 해석으로 귀결되고 이러한 신학자들의 규율은 이후 유럽의 식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오늘날에도 프로테스탄트 문화인 북유럽과 가톨릭 문화인 남유럽에서 식사와 미각적 쾌락의 관계는 여전히 다르다. 덴마크에서 돼지고기는 맛보다 유연성이 성공 여부를 결정한다. 사회학자 클로드피슐러가 진행한 최근의 조사(2008)에 따르면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잘 먹는다는 개념을 쾌락과 화기애애한 분위기, 식품의 산지와 연결시키는 반면 영국에서는 영양분과 비타민, 약으로서의 식품에 연결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본문 p85~86

 

 

가톨릭이 지배하는 유럽에서는 먹는 것을 신분에 따라 나뉘었다. 평민들은 언제나 배를 곯았던 탓에 '코케뉴'라는 환상의 나라에 대한 민담이 널리 퍼졌다. 반면 귀족들은 무한정 먹고 살을 찌우는 것으로 미덕을 삼았다. 특이한 것은 신부와 같은 성직자들 역시 귀족처럼 엄청난 식탁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탐식을 죄로 정의하는 규율에 많은 해석의 차이를 용납해, 식문화가 비교적 자유로왔던 가톨릭 시대는 15세기를 지나면서 금욕적이고 원칙적인 개신교와 부딪힌다. 탐식에 관대했던 가톨릭을 비난하는 개신교의 등장으로 유럽의 탐식 문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 이후 점차로 '대식'은 경멸 당하고 '미식'이 사회 주류들에게 각광을 받으며 오늘날에 이른다.

 

저자는 2000년에 걸친 유럽 탐식의 역사를 설명하고 이를 위해 문학, 미술 등의 자료들을 꼼꼼히 열거하고 인용한다. 특히 책에 실린 선명한 미술작품들은 음식에 탐닉해온 유럽사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재미있는 점은 그간 중세 미술작품들 대부분이 아름다움이나 위용, 감동을 전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 책에 실린 탐식의 그림들은 전반적으로 감동보다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게 하는 작품들인 것이다. 음식에 심취해 정신없이 먹고 있는 모습이 아름다울 턱이 있나. 그들 스스로 죄라고 못박은 탐식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고발당하고 있다.


성직자들과 귀족들의 방탕한 대식과 16세기 이후 발달한 미식 문화가 이미 지나간 역사라고만 할수는 없다. 탐식의 역사는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거리에 가득찬 온갖 음식점과 티비 광고에서 연이어 흘러나오는 식품 광고들. 신문과 잡지 심지어 블로그마다 맛있는 음식점과 먹음직스런 식품에 대한 정보가 넘쳐난다. 마시고 씹고 먹고 즐기길 열렬하게 권하는 한편에선 건강을 위해 살을 뺄 것을 걱정하는 이 사회가 두툼한 살집을 자랑해야 아름답다고 여겼던 유럽 중세와 크게 다를 것이 무언가.

 

 

식욕과 미각적 쾌락이라는 섭리는 본능적인 신체적 욕구와 번식하고 번성하여라는 신성한 명령에 부응하는 셈이라고 했다. 예수회 신부 뱅상 우드리가 서술한 내용도 이와 유사하다.

"자연은 우리가 필수적으로 음식물을 섭취하면서 생명을 유지해야 하게끔 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는 이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음식물의 섭취는 미각의 쾌락과 연관되어 있는데, 미각의 쾌락이 없었다면 약을 먹을 때 느끼는 혐오감을 음식을 먹을 때에도 느꼈을 것이다."

본문 p99

 

 

먹는 것을 즐기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 먹는 즐거움이 인간으로서의 다른 존엄을 깡그리 무시한다면 그 순간부터는 죄가 아닐까. 먹는 것은 중요하지만 모든 삶이 먹는 것을 중심으로 돌아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칠면조 두 마리를 먹어치우고 저녁 식사를 하러가는 왕이나 좋은 식재료와 요리법, 훌륭한 쉐프들을 줄줄이 꿰면서 그와 같은 해박한 식견 없이 음식을 먹는 것은 저급하다고 폄훼하는 미식가나 아름다워 보이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제7대 죄악, 탐식]은 '먹는 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본능적이고 절대적인가를 알려주는 동시에 어디까지 사람을 추하고 방탕하게 만들 수 있는지도 알려준다. 무엇이든 과하면 좋지 않다. 맛(식)을 사랑은 해도 맛에 미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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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9.11 이후 달라진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7
이현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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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소.....

이렇게 책장을 넘기기 힘든 책은 또 처음이었소.

문장도 쉽고 내용도 재미있고. 그런데 책장이 넘어가질 않았소.

 

나는 '이대로는 곤란하다'는 절박함에 더하여 제대로 생각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리며 뭔가 제대로 알고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중간중간 반문이 들곤 했소. 아마 로쟈씨가 말한 '자신을 내던질 용의'가 없는 독자여서, 차마 빨간약은 삼킬 수 없는 무리라 그런가 보오.

 

특히 가장 힘들었던 실재에 대한 열정.

 

아, 물론 현실을 뛰어넘는 폭력적인 자극 앞에 불현듯 실재를 깨닫게 된다는 것, 그래서 그 폭력을 실재에 대한 열정으로 표현한 부분은 이해가 가나 (혹시 이 부분이 내가 오해한 부분이라면, 이해를 구하오. 내겐 이렇게 이해되었소.) 이 부분을 읽는 순간 나는 이 책을 계속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소. 실재를 자꾸 그런 폭력적인 사건의 계기로만 경험하게 된다고 연결짓는 것 같아서 내키지가 않았소. (나는 뼛속까지 비폭력주의자라오. 개혁은 필요하되 어디까지나 평화적인 것이 좋소) 이론으로는 이해가 가지만 내가 그 이론에 동조할 수 없을 때 나는 독서가 고역으로 순식간에 전환되는 것을 몇 번 겪었는데 그 기억하기 싫은 감각을 이 책이 다시 알려주었소.

 

하지만 일단 한 번 표지를 열고 그 안을 들여다본 책은 내 서연의 대상이라, 나로서는 책이 나를 놓기전에는 먼저 놓을 수가 없는 것을...... 그러나 기쁘고 슬프게도 책은 단 한번도 나를 먼저 놓아준 일이 없소.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도 마찬가지. 차라리 정말 재미도 유익도 아무것도 없는 책이었다면 뭬얏!!! 하며 과감히 던져버릴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그러지 못했소. 분명 재미는 있는 책이었으니까.

 

이 책을 계기로 만나게 된 인물들이 굉장히 많소. 뭐 이 책에 인용된 수많은 영화감독과 저자들을 비롯해 당연히 길잡이 로쟈씨의 주타겟이었던 지젝, 그리고 나를 이 책으로 잡아끌었던 로쟈씨. 나는 지젝을 만난 것보다 이렇게 진하고 깊은 연구심으로 독자들에게 지젝을 알려준 로쟈씨가 더 대단해보이오.

그런 대단한 로쟈씨 앞에 솔직해지자면, 나는 아직 이 책을 다 읽지 못했소.

잠시 내 마음의 고향인 문학의 숲에서 뛰놀고 있는 중이오. 문학의 샘에서 첨벙대는 수많은 인물과 사건들을 차례로 만나면서 나는 로쟈씨가 안내해준 지젝의 이야기들을 떠올려보고 있는 중이니 책망은 아껴주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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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 호스
마이클 모퍼고 지음, 김민석 옮김 / 풀빛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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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보다 사람이 못한 곳이 있다면, 전쟁터 말고 어디를 떠올릴 수 있겠어.

지금이야 핵 미사일 한 방 날리겠다는 으름장을 놓을 기세만으로도 서로서로 눈치를 보면 발발 기는 세상이지만 말야.

그때는 정말 그랬을 것 같아. 대포를 옮기는 말이 다치건 죽건, 사람이 여기저기서 쓰러지건 말건, 일단 중요한 건 적지에 포탄을 시원하게 날려줄 대포였겠지. 진흙에 발이 얼고 피로와 굶주림에 차례로 동료들이 죽어나가도 사람도 동물도 어쩔 수가 없이 그 상황을 견디고 내가 살아남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세상이었을거야.

 

마이클 모퍼고의 다른 소설 [굿바이 찰리 피스풀]도 그랬고, 아마 내가 아직 읽어보지 못한 이 작가의 다른 소설도 그럴거라고 생각해. 전쟁, 그 속에서 어쩔 수 없는 비극을 겪은 사람들의 실화를 길어내 거기에서 생생한 이야기를 재탄생시키는 작가. 나에게는 이 작가가 그래. [굿바이 찰리 피스풀]을 정말 재미있게 그리고 애틋하게 읽었기 때문에 말야, 도입부, 구성, 인물과 엔딩까지 다 내 마음에 진하게 남은 작품이라 나는 그 작품 한 편에 이 작가 아저씨가 참 좋아졌어. 무엇보다도 있잖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야기, 이미 다들 잊어버린채로, 있을 곳을 잃고 시간의 강바닥 아래로 깊이 가라앉은 일을 애써 건져내는 그 아저씨의 노력이 참 대단해보여. 묘비명 하나, 빛바랜 작은 사진 한 장도 그냥 지나치질 않아. 거기에 얽힌 아련한 기억들, 분명 그 때 그 시절에 그 세계를 온통 차지하고 있었을 많은 이야기들을 먼지를 툴툴 털어내고 우리 눈 앞에 복원해내는 그 솜씨는 참 멋있어.

 

사실 [워 호스] 벌써 30년이나 된 작품이야. 나랑 나이가 같아. 그렇게 생각하니까 왠지 이 소박한 이야기가 더 짠하게 느껴지네.

어른들을 위한 전쟁소설이라기보다, 아이들에게 더 공감을 불러일으킬만한 정서를 가진 동물소설이야. 조이라는 말이 주인공이고, 이 멋지고 고귀한 생명체는 인간들의 전쟁에 휘말려 갖은 고생을 다하게 돼. 가엾게도 말이지. 그래도 사람 복은 타고난 말인가봐. 첫 친구였던 앨버트를 시작으로 조이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 그 중에 프랑스 소녀 에밀리의 애정은 특히나 대단했지. 앨버트가 아직 소년일 적에 조이가 군대에 팔려갔는데, 이후에 조이는 군마로 프랑스 격전지를 헤매다 영국군령의 동물병원으로 오게되고 거기서 든든한 청년으로 자란 앨버트와 조우해. 그리고 그 다음은, 모두가 기대하고 예상하는 대로 둘은 고향으로 돌아가 행복하고 평안한 일상에 안착하지.

 

전쟁에서 프랑스군, 독일군, 영국군의 부대를 두루 돌면서 조이는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죽음을 접해. 사람이고 말이고 구분없이 죽어나가는 게 전쟁터잖아. 조이는 존경하는 동료였던 탑손도 잃고 조이가 좋아했던 군인들의 죽음도 지켜보았어. 그 과정에서 조이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정신적 고통을 느꼈는지는 잘 나타나 있지 않아. 다만 작가는 조이의 귀로 들어오는 군인들- 인간들의 대화를 통해 작가의 메시지를 남겨.

 

"너희는 친구니까 말해 줄게. 나는 연대에서 유일하게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야.

미친 건 다른 사람들이지만, 정작 그들은 모르고 있지.

전쟁에 참가해 싸우면서도 왜 싸워야 하는지도 몰라. 그게 미친 거 아니니?

어떻게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이면서 왜 그런 짓을 하는지 모를 수 있지? 상대편이 다른 색깔의 군복을 입고,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만으로 말이야. 그들은 나더러 미쳤다고 하지.

너희 둘은 내가 이 어리석은 전쟁에서 만난 생명체 가운데 유일하게 이성적인 동물이야.

너희가 이곳에 있는 단 한 가지 이유도 나처럼 끌려왔기 때문이겠지.

용기만 있다면 이 길로 도망가 다시는 안 돌아올 텐데.

하지만 그렇게 되면 군인들이 나를 잡아 총으로 쏴 죽일 테고, 아내와 아이들과 부모님은 평생 수치스럽게 살아야 할 거야.

난 미치광이 노병 프리드리히로 행세하며 어떻게든 이 전쟁에서 살아남을 거야."

p130

 

독일군의 초췌한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한두 시간 뒤에는 서로를 죽이려고 발버둥 칠 거야.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지 하느님만이 아시겠지.

내 생각에 하느님도 그 이유를 잊어버렸을지 몰라. 잘 가게. 우리가 직접 보여준 셈이야. 그렇지 않나?

서로 믿기만 한다면 사람들 사이의 문제는 얼마든지 풀 수 있다는 것 보여 준 거야. 믿음만 있으면 되는 거야.

그게 전부인데, 안 그래?"

키 작은 영국군은 밧줄을 잡으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서 한두 시간 정도만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게 해 준다면 이 불행한 상태를 말끔하게 정리할 수 있을 텐데."

p 158

 

전쟁에 뛰어든 군인들 대부분이 왜 이 전쟁을 하고 있는지 몰라. 심지어 마이클 모퍼고가 그린 전장에는 죽이고 파괴하는 걸 즐기는 군인은 아무도 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계속 돼. 엄청난 생명들을 희생하면서 말이야. [굿바이 찰리 피스풀]에서도 그랬지만, 마이클 모퍼고는 이런 참상에 대해 꼭 신에게 물어보고 싶나봐. 신이시여, 당신은 이 처참한 광경을 지켜보고 있겠지요. 왜 이런 죽음이 필요한가요. 이 참상이 남긴 상처와 고통과 희생은 어디서 치유받고 채움받아야 하나요.

 

종전 후에, 조이는 앨버트와 함께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와. 앨버트는 사랑하던 메이지와 결혼을 하고 예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아. 그런 평안한 마지막을 전하면서 조이가 했던 말이 잊혀지지 않아. 우리는 영웅 대접을 받았지만, 진짜 영웅들은 전장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거기 묻혀 있다...... 가슴 한 가운데가 가라앉는 슬픈 말이야.

 

이 소설을 영상으로 옮긴 영화가 개봉되어다고 해. 사실 나는 소설이 너무 동화같아서 영화가 그리 기대되지는 않아. 어떤 분위기의 영화일지 대충 짐작이 가서 그럴까. 하지만 영화화로든 무엇으로든, 돌아오지 않고 거기 묻힌 영웅들을 추억하는 이야기는 늘 환영이야. 그것이 이렇게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아련함을 남겨 책장을 덮고 나서도 내내 마음이 저리더라도.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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