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스치는 바람 2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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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권에서의 실망감은 2권으로 오면 애틋한 감동으로 모습을 바꾼다.

그 전에도 윤동주의 시를 여러번 읽었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윤동주를 비롯한 여러 시인의 시들을 읽곤 한다.

그런데 30년동안 살면서 이런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읽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시들을 너무 쉽게 읽고 있는 것 아닌가.

시는 영감이 아니다. 시는 삶이다. 우주를 밝히는 태양같은, 발을 보듬는 든든한 흙같은, 뜨듯한 손 건네는 사람같은 이 생명력 넘치는 아름다운 조선어를 빼앗긴 시인이 느낀 극한의 결핍과 처참한 고립의 삶이 그의 시를 낳았다. 그의 삶이 이렇게나 어려웠는데 그의 시가 이토록 쉼없이 가슴을 미어지게 할 정도로 눈물을 터뜨리며 쉽게 읽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미 몇 편의 훌륭한 역사 팩션을 발표해 한국형 팩션의 대표 작가로 인정받고 있는 이정명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도 세심하게 사건과 인물에 공을 들였다. 특히 스기야마와 유이치라는 두 일본인 간수를 실제 인물처럼 생생하게 묘사해 모든 사건들이 (비록 느리게 흐르더라도) 충분히 설득적이다. 단순히 감옥에 수감된 조선인의 심정을 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저자는 '문학'을 사랑하는 일본인에게 전쟁이란 무엇인지, 이 아비규환 속에서 그들은 어떤 심정이었는지를 세밀하게 그렸다. 조선의 시인과 그의 시를 향한 이 두 일본인 간수의 애정과 인간적 양심은 이 책이 그린 '인간애'를 더욱 진하게 완성한다. 소재는 '윤동주'일지라도 그의 궤적을 통해 이야기는 '말과 글' 즉 문학이 인류 공통에게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 힘을 발휘하는지로 귀화한다. 문학이 시인, 간수, 평범한 청년의 인생에 얼마나 강렬한 변화를 선사하는지 페이지마다 그들이 부딪혀 일으키는 파도가 넘실거린다. 그 파도는 1권에는 미처 느낄 수 없었는데 2권을 열면서 내 가슴을 울렁이게 하더니 결국 '왜, 어떻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의 의문이 한꺼번에 해결되는 2권 중반이후부터는 돌이킬 수 없는 역사(별같은 시인을 일찍 잃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너무 많은 시들을 너무 쉽게 읽어온 부끄러움이 결국 눈물을 왈칵 쏟는다.

 

' (동주의) 시를 적은 연을 간직한 소녀를 찾고 싶습니다. 그 연은 찬 감방에서 써낸 시인의 영혼이고, 그 시를 살리려다 죽은 한 간수의 영혼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이 망가뜨린 순결한 시인의 시를 지켜낸 그녀는 잃어버린 우리들의 양심이기도 합니다.'

 

감방 밖으로 연이 떨어지고 거기엔 동주의 시가 적혔다. 순결한 시인의 시를 가진 이 소녀는 지금 어디에 있나? 나의 책장 한 켠, 좁은 책 등에 써 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 순결한 시인의 시를 가진 것은 우리다. 이 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그 별빛에 매료되어 그의 시를 사랑해 온 우리다. 감방 밖으로 떨어진 연을 주워든 것은 우리다. 떨어진 연을 우리는 너무 쉽게 얻은 것은 아닐까. 삶이 곤할수록 시도 어렵고 그 시를 읽는 것도 어려워야 한다. 지천에 그의 시가 있어도 그 한 조각 한 조각 씹을 때마다 숙연해져야 한다.

별이 된 시인, 이미 세상에 없는 그 시인이 남긴 별빛 아래 그 빛을 만끽하는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이라곤 끊임없이 기억하는 일밖에 없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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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스치는 바람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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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학교 도서관에서 나는 낡은 냄새, 바스러질듯 가벼우면서도 육중한 존재감이 뚜렷한 그 냄새.

고등학생 시절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몇가지 기억들 중의 하나다. 그 냄새는 나란히 앉아 어깨를 바짝 마주하고 읽는 이를 기다리는 책들의 냄새이기도 하고 그 책들이 담고 있는 사람과 삶과 생에 대한 기록에서 풍겨나는 냄새이기도 하다. 그 냄새는 자연스레 몇 개의 책과 작가들로 이어진다. 토지, 태백산맥, 이육사, 그리고 윤동주.

사실, 국어 교과서에 실린 윤동주의 시보다 더 깊이, 사춘기 소녀의 마음을 잡아끈 것은 반듯한 이목구비가 선명한 그의 얼굴이었다.

 

정말 딱, 그의 시와 같은 생김의 얼굴은 일제의 생체실험에 희생되어 젊은 날에 인생을 마친 비극적인 생애와 함께 '윤동주 시인'에 대한 환상을 품게 했다. 그의 시에서 딱히 감동이나 절절한 동감을 느끼지 못했으면서도 (나는 주로 이육사에 열광하던 쪽이었다. 그땐 윤동주 시인의 시는 너무 서정적이고 심심하고 가냘프다고 생각했으니까) 그의 시가 아니라 윤동주라는 사람에 매료된 나는 오랫동안 '한국의 시인'하면 김소월이나 김수영 (심지어 내가 좋아했던 이육사)보다 윤동주를 자동적으로 떠올리곤 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윤동주'는 이름만 떠올려도 어딘가 아련하고 가슴이 아린, 나에겐 그런 시인이었다.

 

이 책을 보자마자 고민도 하지않고 바로 구매해 책이 도착한 그날 읽어버린 것도 순전히 '윤동주'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이 애정은 책표지의 우울하고 으슥한 느낌 (서정적이고 사색적인 느낌을 유도한 책표지인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표지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이 주는 다소간의 촌스러움도, 첫권의 중반 이후까지 이어지는 따분한 호흡도 극복하고 결국 끝까지 다 읽게 만들었다. 그가 남긴 몇 편의 시와 그에 대한 증언과 기록들이 채 전하지 못한 윤동주를 알게 될 것 같아서 나는 끝까지 책을 읽어야 했다. 때로 이러한 역사 소설은 실제 기록보다 더 선명하고 정확하게 당시를 가르쳐주지 않던가.

 

혹시라도 나와 다르게, 이 책이 역사 팩션이자 추리소설의 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긴장감을 기대하며 읽게 되는 사람이 있다면 너무 지루해하지 말고 이 참에 한국이 낳은 별과 같은 시인 '윤동주'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기회로 삼기를 조언한다. 그리고 혹시, 나처럼 '윤동주', 이 이름만으로 이 책을 읽기로 선택한 사람이 있다면 축하한다. 이 책은 분명 팩션이라 이 책의 모든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윤동주의 시 한 편 한 편이 어떤 심정으로부터 만들어졌는지 절절하게 이해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분명 추리소설로는 별로다. 만약 소재가 윤동주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추리 소설 특유의 서스펜스 (비슷한 표현과 문장들이 계속 등장해 지루함이 더하다.) 대신 이 책은 윤동주의 싯구처럼 차분하면서도 정갈한 문장과 '문학' 안에서 소통하는 아름다운 인간애를 진하게 담았다. 읽는 내내 영화 피아니스트와 쇼생크탈출이 번갈아 떠올랐는데 이야기의 배경은 전쟁과 감옥이요 인물들은 그 안에 갇힌 예술가(양심있는 순전한 영혼)들이기 때문인가 한다. 1권 중반 이후부터 이야기가 본격 궤도에 오르면서 동주와 및 그를 비롯한 그 주변의 인물들에 대해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그제야 책은 기다렸다는듯이 재미와 눈물을 함께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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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건강법 - 개정판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민정 옮김 / 문학세계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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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신랄하다. 정말.

어쩜 이렇게 노골적이고 가혹할 수 있을까. 독자는 독자대로, 작가는 작가대로 사정없이 잘근잘근 다져 '그런 식으로 책을 읽지도, 쓰지도 마.'라며 매몰차게 등짝 스매싱을 갈기는 이 책은 참 야무지다. 20대의 당돌함과 천재 작가의 명철함이 치열하게 공존하는 [살인자의 건강법], 이 한 권으로 저자는 그녀와 같은 당돌함과 명철함을 가진 20~30대 독자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이름도 무지하게 길고 어려운 특이병으로 얼마 있다 숨이 넘어갈 예정이신 고령의 작가 선생은 그의 비서를 통해 일부러 기자 인터뷰를 하겠다고 판을 벌려놓고는 기자를 한명씩 그의 앞으로 끌어들인다. 흡사 한니발 교수가 그를 면회하러 온 프로파일러들을 가지고 놀며 따분함을 달래는 섬뜩한 영화 장면들을 떠올리게 하는 '기자들 집단 능욕' 대목에서는 일단, 이 고령의 작가 선생이 대체 어떤 작자인지를 알게 된다. 치과에 신경치료일을 예약해 놓고 차례로 사람을 죽이는 사이코패스마냥, 이 작가 선생님은 기자를 한명씩 그야말로 '멘붕'시키며 매우 큰 만족감을 얻는다.

 

 

“그럴 수밖에. 중상 모략가들한테 책잡힐 거리를 제공하는 게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기자 양반은 상상도 못하실 거요.”

“아하! 그렇다면 그건 친절이 아닙니다, 타슈 선생님. 마조히즘과 과대망상증의 어정쩡한 결합일 뿐이지요.”

“됐소, 됐다고! 뜻도 모르는 말 좀 그만 쓰시오. 문제는 순수한 선의란 말이오, 젊은 양반! 당신 생각으로는 어떤 책들이 순수한 선의를 담고 있을 것 같소? 톰 아저씨네 오두막? 레미제라블? 물론 아니지. 그 책들은 말이오, 사교계에 진출하고자 하는 작가의 야심을 담고 있소. 암, 정말이지 순수한 선의를 담고 있는 책은 극히 드물다오. 그런 책들은 말이오, 고독과 비천함 속에서 탄생한다오. 작가는 잘 알고 있지. 그것들을 세상에 던져놓고 나면 더 외로워지고 더 비천해진다는 사실을 말이오. 그럴 수밖에. 사심 없는 친절의 본질은 알아보기 힘들다든가 알아볼 수 없다든가 보이지 않는다든가 예상할 수 없다든가 하는 것이거든... 드러내놓고 베푸는 선행은 사심 없는 선행이라고 할 수 없으니까.”

“ 방금 하신 말씀에서 모순이 보이는데요. 진정한 친절이란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죠. 그런데 선생님께선 자신이 친절하다고 목청껏 외치고 계시지 않습니까.”

“허어, 난 내 맘대로 해도 되오. 어쨌든 아무도 날 믿지 않을테니까.”

p65

 

“사실대로 말씀 드릴까? 정말로 지적이고 총명한 사람들은 이 이렇게 설명해달라고 애원하지 않소. 변변찮은 자들이 뭐든 설명해주길 바라지. 설명되지 않는 것까지도. 어차피 설명해봐야 멍청한 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영리한 사람들은 설명해달라고 하지도 않는데 내가 뭐하러 설명 같은 걸 하겠소?”

“저더러 못나고 둔하고 어리석다고 하시더니, 이젠 변변찮다고까지 하시는 겁니까?”

“이 양반한테는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다니까.”

p68

 

 

좋은 말로 괴팍한 할아버지고 나쁜 말로는 그냥 미친 영감이다. 나는 처음에 이 작가 선생께서 인생의 지루함을 달래시느라 일부러 그러시는 줄 알았다. 일부러 기자들의 말끝마다 꼬투리를 잡고 놀려주는 것 아닌가 했다. 아, 그런데 이 분은 진심이셨다. 진심으로 기자들 나아가 독자들의 가식과 위선을 요기조기 쪽쪽 후벼판 것이다. 뭐, 작가 선생님이시니 무지한 독자들을 사정없이 꼬집는 거야 그렇군, 할 수도 있는데, 작가들도 깐다. 대놓고 깐다. 어느새 나도 기자의 입장이 되어 뭐 이런 노인네가 다 있어, 할 즈음에 (나의 약점을 이렇게 대놓고 꼬집는데 기분이 산뜻하고 경쾌할리 없다) 내 또래의 여기자 하나가 그를 방문한다. 5번째 인터뷰어, 니나. 헐, 이 기자는 초반부터 그 남다른 아우라를 서슴없이 풀어놓고는 차츰차츰 이 노작가를 압박한다. "이봐요,. 당신이 저지른 파렴치한 짓들을 나는 알고 있단 말이요." 꼬장꼬장하고 성질 사나운 노작가가 칭찬할 정도의 명철함으로 그를 압박한 결과, 5번째 인터뷰는 니나의 승리....... 인 듯 보였다.

그러나, 이 파격적인 엔딩에 가서 승자는 불분명해 진다. 니나를 그의 화신으로 삼고 운명한 노작가를 최후 승리자라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사랑은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지. 그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라오, 니나.”

“제발 사랑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주세요. 살인 충동이 치밀어 오르거든요.”

“그럴 리가? 그것 보시오, 니나, 그건 그렇세 시작되는 거라오.”

“그건 이라니요?”

“사랑 말이오. 내가 당신한테 그 황홀경을 일깨워주었단 말이오. 나 자신이 말할 수 없이 자랑스럽구려, 니나. 그 살인 충동은 나로 죽어 다시 당신으로 태어나고자 하는 욕구라오. 당신은 이제 막 살기 시작한 거요. 그게 느껴지오?”

“지금 느껴지는 거라곤 엄청난 분노뿐입니다.”

“난 지금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고 있소. 나도 여느 평범한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부활이란 사후에나 일어나는 현상인 줄 알았소. 그런데 내가 살아서 두 눈을 뜨고 지켜보는 가운데 당신이 내가 되어 가다니!”

“그렇게 심한 욕은 처음 듣습니다.”

“그렇게 격분하는 것 자체가 당신이 살기 시작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오, 니나. 이제부터 당신은 계속해서 격노하게 될 거요. 예전의 나처럼 말이오. 허위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저주를 퍼부으며 황홀경에 빠지겠지. 당신은 분노의 귀재가 될 거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거라오.”

p247

 

 

이토록 다정하게 '니나'라고 부르고 있지만, 본래 이 양반 누군가를 그렇게 이름으로 부르는 법이 없다. 그냥 기자양반, 비서, 당신 뭐 이런 식이었지. 마치 첫사랑 레오폴딘을 대하는 것 마냥 말랑말랑한 태도로 니나를 대하는 작가 선생을 보고 있자니 또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이 양반, 자기 소설 완성하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 아냐? 아닌가? 죽음을 앞두고 이 미련하고 무지하고 파렴치한 세상에 자신의 분신으로 두고 가기에 딱 적합한 인재가 나타난 상황에서 작가 선생님은 그의 죽음을 자처함으로써 니나를 타슈화시키기에 성공한다. BBC 드라마 셜록의 2시즌 마지막 편에서, 셜록과 이야기를 나누던 모리아티가 셜록의 눈앞에서 권총으로 자살해 그의 범죄를 완벽한 성공으로 승화시키는 장면이 던진 충격에 버금가는 파격적인 엔딩. 그러니까 최후 승리자는 결국 이 작가 선생이라고.

 

어쩌면 최후 승리자는 레오폴딘일 수 있다. 일평생 이 작가를 지배하면서 작가 머릿속에서 내내 살아있었을 뿐 아니라 이제는 니나의 머릿속에서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를 읽는 독자 속에서 살아 있을 테니. 어쩌면 독자들일수 있다. 여전히 공기하나 통하지 않는 우주복을 입고 피칠갑의 책장 사이를 공기처럼 날아가며 '아, 다 읽었다. 이 책도 재밌네.'하고 잊어버릴 수 있다면. 뭐 승리자가 누구인들 어떠랴. 이것은 책의 일인 것을.

다만, 저자가 책의 인물들 특히 작가 선생의 입을 빌어 독자와 작가들에게 던진 대포같은 일침들이 무척이나 따갑다. 이 따끔함을 우리에게 선사한 저자 아멜리 노통브만이 유일한 승자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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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강화
이태준 지음 / 필맥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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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에 박문출판사에서 보완하여 새로 내고, 저자가 원고를 집필한 것은 1939~1940년이라고 하니 이 책의 나이는 태동부터 치면 대략 70살쯤 된다. 그간 수많은 출판사에서 연이은 교정본을 낸 이 책은 아직도 서점 어딘가에서 정정한 기력을 떨치며 하얗게 쇤 수염을 가다듬고 있을거다. 이 책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워낙 오래전에 세상에 나온 책이라 나는 딱히 흥미가 가지 않았다. [문장강화]라고 제목을 달고 있는데 문장에도 유행이 있고 나이가 있고 시대가 있어서 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걸맞는 문장이 있고 그에 따라 문장을 강화하는 방법 또한 달라진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는 여전히 이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책의 저자도 권두에서부터 시대마다 문장이 다르다고 분명하게 써놓았으니. 그러나 백년전의 '엄마'와 지금의 '엄마'가 빛깔은 다르지만 그 말을 뱉을 때 혹은 머리에 떠올리는 것만으로 느껴지는 따스함은 여전한 것처럼 (물론, 이 역시 사람마다 다르리라 생각한다) 문장에도 그러한 법칙이 있다. 이 책은 시대를 불문하고 글(장르를 불문하고) 을 쓰는 이가 가져야 할 좋은 글에의 시도 방법와 접근로를 안내하고 있다.

 

 

문장작법에 대한 설명을 가장 기본으로 두고 문장의 종류로 쪼개서 들어갔다가 그 문장이 집결해 완성하는 글의 종류로 커졌다가 글의 완성도와 매력을 좌우하는 문체까지 두루 다듬어보는 이 책을 읽고나면 왜 이 책이 이렇게 유명한지, 이 나이가 되도록 도포 자락 나부끼며 그 운중한 기운을 유지하고 있는지 이해가 된다. 70년이라는 간극 때문에, 설명을 위한 인용글이나 문장에서 혹은 설명 스타일 자체에서 오래된 책방의 삭은 종이냄새가 어쩔 수 없이 나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좋은 책이다. 올해 초까지 유독 많이 출간되던 여타의 '글쓰기 안내서'에서는 그림자도 볼 수 없었던 '글쓰기의 품격'을 지키며 글쓰기에 대해 알려주고 있다. 전통마을 서당에 가면 뵐 수 있는 위엄있으면서도 자상한 서당 선생님같은 느낌이랄까.

 

 

 어려운 한자어나 복잡하고 현란하고 무진장 긴 문장을 구사했기 때문에 '품격'이 느껴진다고 한 것은 결코 아니다. 글의 품격은 얼마나적법한 어휘와 표현을 구사했는지와 독창적이면서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문장과 내용을 담았는지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이 책이 인용한 글과 문장 그리고 이 책 자체가 품격있게 느껴졌다는 말이다.

근데, 아무래도 옛 글이 많이 인용되다 보니 엄청난 한자어, 생전 처음 읽는 한자어도 종종 등장했다. 친절한 각주가 없었으면 이 책의 품격을 이해하는 데 머리 꽤나 굴려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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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르담 드 파리 청소년 모던 클래식 1
빅토르 위고 지음, 박아르마.이찬규 옮김 / 구름서재(다빈치기프트)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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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이 비극의 주인공이 콰지모도라고 생각했다. 에스메랄다가 베푼 단 한번의 호의에 구원을 얻은 불쌍한 꼽추, 콰지모도. 괴팍하고 사납지만 순수하고 강인한 영혼을 가진 이 생명체가 이 비극의 주인공이라고만 여겼다. 에스메랄다는 허영에 눈이 먼 멍청한 여자였고 클로드 부주교는 비틀린 욕망에 사로잡힌 변태 아저씨로만 생각했다. 아... 그러나! 명작이 왜 명작이던가. 언제 읽어도 그 시대의 것인양 생생하고 다시 읽어도 처음 읽는 것인양 새로운 작품이 명작아닌가. 콰지모도의 비애에 흠뻑 취해보자 싶어 다시 읽게 된 노트르담 드 파리(노틀담의 꼽추가 아니다!)는 역시 명작이었다.

 

우리나라의 많은 번역본이 대부분 '노틀담의 꼽추'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이 작품의 처음부터 주목을 받는 것은 콰지모도다. 첫 씬부터 병신 교황으로 등장해 비장한 엔딩까지 장식하는 인물인만큼 당연히 그 주목을 안 받을 수 없겠다. 하지만 이 콰지모도의 등장에 앞서 콰지모도가 노트르담의 영혼 중 하나가 되도록 포석을 깐 이가 있었으니 바로 클로드 부주교다. 콰지모도가 노트르담에 살 수 있도록 거둔 사람이며 에스메랄다를 향해 뒤틀린 연정을 품고 결국 그녀와 스스로를 죽음에 이르게 한, 진중하다못해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 부주교야말로 '노트르담 드 파리'라는 비극의 시작이자 중추다.

 

 

콰지모도나 에스메랄다의 입장에서 보면 이 부주교는 당연히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식의 경악할만한 인물이겠지만, 부주교의 성장과정과 그의 환경을 생각해볼때 이 부주교가 에스메랄다에게 펼친 잘못된 방식의 사랑과 그의 선택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남들보다 비상한 머리, 혈육에 대한 엄격한 애정(여기에는 콰지모도까지 포함), 진지하고 폐쇄적인 성격을 가진 그에게 '신부'라는 직업은 최선인 동시에 최악이었던 것 같다. 몸의 욕망조차 학문의 힘으로 이겨내는 타입의 천상 학자인 이 사람에게 '신부'는 최선의 직업 환경을 제공할 수 있었겠지만 정서적으로는 최악의 환경에 그를 가뒀다. 사람들과 접촉할 필요도, 이유도 없는 그의 환경은 그의 폐쇄성을 더욱 강화했고 신부라는 직업에 받는 경외는 자연스럽게 그의 고압적이고 오만한 성품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 과정에서 그가 가진 '혈육에 대한 엄격한 애정'이 내재한 그의 깊은 고독은 어떤 출구도 만나지 못한 채 35년을 갇혀있었다. 그 자신도 몰랐던 이 깊은 고독이 에스메랄다를 향해 폭발하면서 노트르담 드 파리의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당연하게도) 그의 애정을 거부했고 난생 처음 뼈아픈 거절을 경험한 이 부주교는 결국 영혼을 악마에게 팔고야 만다. 그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친족 - 동생과 콰지모도-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를 소유하려고 했으나 이런 방식의 연모가 끝이 좋을리가 없다. 난생처음 겪는 애정과 애증(이렇게 누군가를 사랑해 본적도, 증오해 본적도 처음이리라) 속에 이 불쌍한 총각은 결국 사고를 친다. 그래서 사람이 책만 보면 안된다. (만일 클로드 부주교가 시장의 상인이나 하다못해 거리의 악사였다면 아마 그는 에스메랄다에게 이토록 기형적인 연정을 품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의 선택은 구구절절 틀린 것이었고 에스메랄다는 그의 희생양이 되었지만, 나는 노트르담 구석구석 서린 그의 고독함에 연민을 느꼈다. 이 불쌍한 사람. 자신의 외로움을 자신마저 알아주지 못했던 가여운 사람. 당신도 노트르담의 가련한 영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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