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끄러지는 말들 - 사회언어학자가 펼쳐 보이는 낯선 한국어의 세계, 2022 세종도서 교양부문
백승주 지음 / 타인의사유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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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사회 구조적 폭력에서 기인했을 때

공동체는 그 고통의 원인을 해부하고 사회적 고통을 사회적으로 치유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 김승섭, 『아픔이 길이 되려면』중에서


한 인간의 죽음에 대한 평가와 해석은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개인적 관계, 사회적 시선에 따라 사자死者의 삶을 다르게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노사이드, 전쟁, 천재지변, 교통사고, 여객선 침몰, 비행기 추락, 교량과 백화점과 아파트의 붕괴에 이어 압살 사고를 목도하고 난 후에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가. 꽃다운 나이의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일은 모든 인간에 대한 예의다. 그 원인과 결과 사이를 미끄러지는 말들은 칼날이 되어 산 자들에게 상처를 남긴다. 함부로 뱉은 말은 휘두른 주먹보다 가학적이다. 우리 주변에만 존재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누구이며, ‘미끄러지는 말들’을 하는 사람이 따로 있을까. 나는, 그리고 당신은?


백승주를 사회언어학자로 명명한 게 누구든 발화 의도와 목적에 맞는 의미를 차자고 그 말들이 흐르고 흘러 닿는 곳에서 제 기능과 역할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급식체와 인테넷 약어, 비속어 등 우리말과 글을 가꾸고 지키자는 PC한 잔소리도 아니고 혐오와 차별의 언어 사이사이에서 공동체의 도덕심을 고양할 목적도 없다. 어쩌면 백승주는 자기 삶을 더듬고 일상을 살피며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과 고민들이 자기 언어 안에서 어떻게 고이고 어디로 흘러가는지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게 아닐까.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의 평범하고 진솔한 이야기가 울림을 가지려면 특수성 안에서 보편성을 획득해야 한다. 구체적 경험은 생각을 통해 단단히 벼려지고 타인에게 닿아 온기를 전하거나 찬물을 끼얹어야 한다.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걸까. 그 원인과 대책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가. 도저히 손쓸 수 없는 자연재해도 아니고 교통수단에 의한 사고도 아니며 이기적 목적의 살육전쟁도 아닌 저 수많은 죽음 앞에서 그들의, 아니 우리들 혀에서 미끄러지는 말들은 결국 인간에 대한 예의와 세상을 향한 태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어느 자리에서 무엇을 했든 사고에 대한 반응, 문제를 해결하고 책임을 묻는 과정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가만히 지켜볼 일이다. 


백승주는 표준어와 일상어, 폭력과 재난 혐오와 차별의 현장에서 미끄러지는 말들을 꼼꼼하게 점검하고 한국어 교실에서 경험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리고 언어 너머의 의미를 더듬는다. 여러 글들을 모은 책으로 체계와 구성이 단단하지는 않으나 우리 사회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결국 공동체 구성원 전체의 집단적 무의식을 드러내며 우리 사회의 문화, 전통, 현재와 미래를 가늠하게 한다. 


가끔, 사람들은 ‘말실수’라며 눙치고 넘어가거나 오해를 풀라고 하고 양해를 강요한다. 그러나 대개 그 실수는 무의식의 반영으로 평소 생각과 태도 자신의 신념이 고스란히 드러난 말들이다. 감추고 싶거나 입 밖으로 내뱉지 말아야 할 말들이 혀에서 미끄러졌으니 급정거하는 버스 안에서 타인의 발을 밟는 진짜 실수와 구별되는 가짜 실수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며 하나의 세계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 보내는 메시지, 써놓은 SNS, 심지어 메모와 낙서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미끄러지는 말들이 우리의 생각이며 태도이고 자기 정체성이 아닐까. 말과 글을 조심하고 삼가야 하는 게 아니라 평소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를 성찰할 일이다. ‘마인드 리딩Mind Reading’과 ‘공감Empathy’능력은 본능이 아니라 학습과 노력의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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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공구 - 공구와 함께 만든 자유롭고 단단한 일상
모호연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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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 렌치와 육각 렌치를 집어 든 건 자전거 때문이었다. 타이와 튜브를 갈고 안장 높이와 브레이크를 손보며 공구를 손에 들기 시작한 건 부끄럽지만 최근의 일이다. 거의 쓸 일 없이 구비했던 망치는 캠핑용 팩을 박을 때만 사용하다 보니 트렁크에 던져뒀고, 그나마 전동 드라이버와 택배 상자를 여는 칼과 가위 정도가 자주 사용하는 공구의 전부다. 평생 책장만 넘기던 희고 고운 손이 부끄러울 때가 많았다. 이삿짐을 나르고 에어컨을 설치하고 나물을 다듬고 농사를 짓는 분들의 손을 가끔씩 훔쳐볼 때마다 슬그머니 내 손은 주머니를 찾았다. 카센터, 재래시장, 이삿날, 시골 들녘과 바닷가 수산시장에서 거칠고 투박한 손을 훔쳐볼 때마다 이유 없이 부끄러웠다. 용접하는 손이든 타자기를 두드리는 손이든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노동자의 손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반려 공구는 손이다. 


모호연의 이야기는 모호하지 않고 분명하다. 메시지가 분명하고 목적이 뚜렷하다. 마치 드라이버와 망치의 길이 다른 것처럼. 공구는 동물이 아니지만 ‘반려’의 수식을 받아 재해석되고 의미를 부여받아 새로운 가치로 거듭난다. 책상 위 필통에 꽂힌 커트와 드라이버, 공구통의 다양한 공구들이 생명을 부여받아 한 사람을 위해 헌신한다. 감정 소모나 배려와 소통도 필요 없다. 묵묵히 언제나 그 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한다. 의미를 부여하고 정성을 쏟는 건 생물이 아니어도 괜찮지 않을까. 


저자는 각 공구의 쓰임새와 종류, 사용법과 주의사항을 살뜰하게 설명한다. 익숙한 도구도 많지만, 수동 샌딩기, 타카, 실리콘건처럼 가정에서 잘 활용하지 않는 도구도 소개된다. 허나 DIY 가구에 관심이 있거나 각종 기계류, 잡다한 물건을 만들고 수리하는 취미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 타인의 공구 사용법과 나만의 노하우를 비교해 보는 재미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실용주의는 자본주의의 동생쯤 사촌 동생쯤 되지 않을까. 인간은 ‘쓸모’를 찾아 성장하고 교육받고 진로와 직업을 고민한다. 그런 면에서 공구는 행복하다. 분명한 쓸모와 제각기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정확하게 활용되기 때문이다. 자연과 사물을 곁에 두는 사람들의 속내는 저마다 다르겠으나 예측 가능성에 바탕을 둔 자연과학적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안정감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게 아닐까 싶다. 순리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반드시 부작용이 발생하는 공구는 그런 면에서 실용주의의 출발이자 종착역이다.


이 책을 굳이 분류하자면 에세이가 되겠으나 저자의 감정과 생각보다 공구에 관한 깊은 관심과 설명이 주를 이루고 있다. 자기계발서로도 손색이 없는 전형적인 실용서다. 유튜브와 인터넷이 잠식한 자리에 여전히 텍스트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를 웅변하듯 공구의 사용법뿐만 아니라 사용자의 정서, 인생에 관한 비유, 글쓴이의 일상 등이 고루 다뤄지고 있어 색다른 재미를 느끼게 하는 책이다. 매뉴얼 같은 실용서가 기존 책의 성격과 범주를 넘나든 지 오래다. 운동, 요리는 물론 공구에 이르기까지 바야흐로 모든 사람이 크리에이터로 기능하는 시대다. 누구든 쓸 수 있고 모든 게 컨텐츠다. 


어쩌면 공구의 사용은 세상살이와 유사하다. 모든 사람에게 스물과 서른이 처음이듯, 예순과 여든도 처음이다. 아빠 연습을 해본 적이 없고, 이혼을 예상하지 않았으며, 부모와 자식 잃은 슬픔은 두 번 경험할 수 없다. 모든 공구의 사용도 마찬가지다. 익숙해지기까지 시행착오를 겪고 각자의 손 모양, 악력, 신체 조건에 따라 다르게 활용해야 한다. 처음이 제일 어렵다. 익숙해지면 그런대로 견딜만한 슬픔과 고통처럼 공구도 빈도에 따라 어깨에 힘을 빼고 사용할 수 있는 여유와 자신감을 준다. 인생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앞으로 남은 첫 나이들, 첫 경험들, 그 모든 ‘첫’들을 위해 반려 공구가 곁에 있다면 좀 위로가 될까?

그러니 기억하자. 망가진 드라이버는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뿐, 인생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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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우리 영혼은
켄트 하루프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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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은 주문하지 않은 택배다. 아무도 늙기를 원하지 않지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시간이 다가온다.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인간의 욕망과 외로움이 덜해지지 않는다. 밤에 우리 영혼은 평안과 안식을 원하지만 오히려 철저한 외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친밀한 가족 관계, 애틋한 연인이 곁에 있는 사람이 노년에 그들과 이별한다면 상실감과 외로움은 배가 된다. 켄트 하루프의 마지막 소설의 주인공 애디와 루이스는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인생을 살다 혼자가 된 여, 남 노인이다. 


“우리 같이 잘래요?” 용기를 낸 건 여성인 애디다. 성별이 바뀌었다면 아마 이 소설의 성격이 달라지고 또 다른 논쟁에 휘말렸을 수도 있었으리라. “라면 먹고 갈래요?” 보다 직설적이나 전혀 애로틱하지 않은 돌직구는 루이스에게 가 닿는다. 44년간 한집에서 산 70세 여성 노인의 제안에 47년째 가상의 도시 홀트 시에 거주하는 남성 노인은 고민 끝에 이를 수락한다. 저녁에 건너가 잠을 자고 아침에 돌아오는 일상이 이웃과 타인들의 눈에 곱게 비칠 리 없다. 그들의 외로움보다 관계를 규정짓는 일반적 시선과 각자의 도덕적 기준이 이 소설을 혼란스럽게 바라보게 한다. 혼자 사는 두 남녀 노인의 만남에는 문제가 없으나 법적으로 혼인 관계를 형성하는 데 따른 현실적 문제들 ― 이를 테면 유산 상속과 자녀들과의 관계 등 ― 앞에서 노인들은 절망한다. 아니, 쉽게 포기한다. 애디도 마찬가지다. 손자를 이기는 할매는 없다. 자식이 가로막는 노년의 위로와 행복이라니. 지나치게 현실적인 결말 앞에 모임에 참석한 분들의 의견이 갈렸으나 두 사람이 찰떡같은 티키타카는 환타지에 가깝다. 그들의 대화, 정서적 공감, 따로 또 같이 나누는 일상 등 이상적 연인의 모습이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앞에 굴복하는 관계 양상이 소설의 결말을 흐릿하게 한다. 


소설 서두에서 애디는 루이스에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심 갖지 않기로 결심했으니까요. 너무 오래, 평생을, 그렇게 살았어요. 이제는 더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라는 말로 자신의 남은 생을 이야기한다. 작지만 분명하고 주체적인 삶의 계획이다. 이 결심은 소설 중반에 다시 반복돼 애디의 결심을 재확인한다. 그러나 결국 자식과 손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관심을 갖는다. 200쪽이 안되는 중편 소설을 통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이든 독자들은 또 각자의 입장에서 노년의 성과 사랑, 자식들과의 관계, 현실적인 문제 등 다양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상찬하거나 비난하는 소설보다 이렇게 다양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작품이 더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면에서 동의할 만하다. 그러나 개성있는 인물들을 통해 다양한 주제를 드러내는 장편 소설과 달리 중, 단편의 미덕은 칼날처럼 깊은 인상을 남기는 묵직한 한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애디의 파격적 제안으로 시선을 끌었으나 과정과 결과는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해피엔딩의 환상도 없고, 현실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갈등도 없이 너무 쉽게 자식 앞에 무너지는 애디의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전화기를 붙잡고 극복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내뱉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인 애디의 “당신, 거기 지금 추워요?”는 “우리 같이 잘래요?”라고 제안할 때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위로로 갈음되지 않는다. 루이스의 입장에선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외로움을 느끼는 정도의 차이, 혼자 사는 일상의 장단점, 노년을 위한 준비와 가족 관계, 자기 욕망과 삶에 대한 적극적 용기 등 이 소설은 어쩌면 지극히 현실적인 노년을 위한 고민을 담은 켄트 하루프의 마지막 고백이 아니었을까 싶다. 태평양 건너 미쿡이든 한국이든 늙고 병들어가며 삶의 종착역을 향해 치닫는 사람들의 태도와 삶을 대하는 자세는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밤에 우리 영혼은, 그보나 낮에 우리의 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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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문학과지성 시인선 572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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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에 낮달이 선명하다. 흰 손톱처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달의 모습이 기이하다. 별들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나 밤과 낮, 계절의 변화에 따라 인간의 시선에 닿을 때도 있고 잊혀질 때도 있다. 수많은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그러하다. 어머니와 동생을 부양하던 20대 여성의 죽음은 처참하다. 전날 먹은 파리바케트 빵조각이 목에 걸린 것처럼 목이 멨다.


현실은 한 번도 인간의 욕망을 이긴 적이 없다. 자본의 논리와 탐욕을 앞선 어떤 ‘-ism’이 있었을까. 그 간극을 좁히려는 부단한 이상주의가 시詩의 본령이 아닐까. 오랜만에 읽는 진은영의 시집에도 예외 없이 슬픔과 고통이 주인공이다. 삶을 사랑하는 시인의 눈에 타인의 고통과 모순된 현실이 보이지 않는다면 어떨까. 자연의 아름다움, 사랑의 위대함, 철학적 진실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진은영의 좋은 시들은 대체로 라임rhyme과 리즌reason의 절묘한 교직물이다.”(신형철 해설, 「사랑과 하나인 것들 : 저항, 치유, 예술」, 113쪽) 


언어로 표명된 눈부신 아름다움 너머엔 반드시 리즌이 자리한다. 라임에 천착한 시의 본질에 닿아 있는 시가 무엇인지 독자에게 맡겨질 수는 없다. 치열한 일상과 생의 비극을 노래한 시들 사이사이에 놓인 진은영의 고백이 아프게 새겨진다.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에 오랜만에 나온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는 사랑 노래가 아니다. 


청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시집 한 권을 읽고 몇 편을 필사할 때가 있다. 서시에 첫 구절이 시집 제목이 되었다. 사랑은 잘 팔리기 때문이지만 진은영의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니다. 사랑의 종류와 방법을 논할 생각은 없다. 다만 자기만의 사랑과 타인의 사랑이 다를 때 우리는 늘 ‘태도’를 본다.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는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청혼이 남아 있을까.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어도 사랑할 수 있을까. 숱한 의문이 떠오를 때쯤 「사랑의 전문가」가 나타난다. 


사랑의 전문가


나는 엉망이야 그렇지만 너는 사랑의 마법을 사랑했지. 나는 돌멩이의 일종이었는데 네가 건드리자 가장 연한 싹이 돋아났어. 너는 마법을 부리길 좋아해. 나는 식물의 일종이었는데 네가 부러뜨리자 새빨간 피가 땅 위로 하염없이 흘러갔어. 너의 마법을 확신한다. 나는 바다의 일종. 네가 흰 발가락을 담그자 기름처럼 타올랐어. 너는 사랑의 마법사, 그 방면의 전문가. 나는 기름의 일종이었는데, 오 나의 불타오를 준비. 너는 나를 사랑했었다. 폐유로 가득 찬 유조선이 부서지며 침몰할 때, 나는 슬픔과 망각을 섞지 못한다. 푸른 물과 기름처럼. 물 위를 떠돌며 영원히


연쇄적 반응과 충돌의 메타포가 뒤섞인 사랑은 결국 슬픔과 망각이다. 영원히 섞이지 못하는 너와 나의 거리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상대를 향한 비난으로 자기 사랑이 마무리된다면 사랑의 아마추어다. 사랑의 전문가는 마법을 부리는 대신 타자를 변화시킨다. 스스로 열망하는 세계로 잠입하는 데도 불구하고 상대를 전문가라 칭하는 아이러니다. 그렇게 한 사람을 사랑하고 한 계절을 사랑하고 한 생을 사랑할 시간도 많지 않다는 조언과 충고들을 흘려듣다가 거울을 본다.


도둑맞은 가을을 아쉬워할 필요도 없다. 침이 고이는 귤을 기다리고,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기다리면 된다. 금세 여름비가 시원할 테고 또다시 낙엽이 질 때 우리도 무지개처럼 각자 다른 빛깔과 모습으로 사라질 것이다. 때를 알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아름다운 건 운명을 수용하는 겸손 때문이 아닐까. 보이지 않고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을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낭만적 사랑과 감정적 사치를 허용한다. 


봄여름가을겨울

작은 엽서처럼 네게로 갔다. 봉투도 비밀도 없이. 전적으로 열린 채. 오후의 장미처럼 벌어져 여름비가 내렸다. 나는 네 밑에 있다. 네가 쏟은 커피에 젖은 냅킨처럼. 만 개의 파란 전구가 마음에 켜진 듯. 가을이 왔다. 내 영혼은 잠옷 차림을 하고서 돌아다닌다. 맨홀 뚜껑 위에 쌓인 눈을 맨발로 밟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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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역사
제임스 수즈먼 지음, 박한선.김병화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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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문제는 우리 모두가 무한한 욕구와 유한한 수단 사이의 연옥에서 살라고 저주하는 것 같지만, 수렵채집인들은 물질적 욕구가 많지 않아서 그 욕구는 몇 시간만 일하면 채워질 수 있다. 그들의 경제적 삶은 희소성에 대한 집착보다는 풍부함의 전제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 들어가며, 21쪽


일과 놀이를 구별하는 일은 헛되다. 누군가에게 삶은 놀이처럼 쉽고 누군가는 시시포스Sisyphos의 고뇌에 불과하다. 그 차이를 극명하게 가르는 사회적 계층과 보이지 않는 계급 사이에서 우리는 종종 길을 잃고 방황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삶의 목적지와 방향을 탐색하려는 목마름조차 사라지면 인간의 삶은 생존과 경쟁에 매몰된다. 


사회인류학자 제임스 수즈먼은 ‘일work’을 들여다본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우리에게 일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일은 노동labour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생존을 위한 모든 활동이 일이다. 자본과 결합한 노동의 개념과 역사는 숱한 경제학자와 사회학자들의 밥줄이니 굳이 재론할 필요도 없고 앞으로도 다양한 해석과 분석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요한 하위징아의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의 현대적 고찰은 잘 이뤄지지 않는다. 인류학이 경제학에 밀린 탓일까. 태초에 벌어진 도구와 기술에서 출발해서 공생하는 인간의 모습, 끝없는 노역과 시간이 돈이 되는 과정, 도시를 이뤄 끝없는 욕망을 분출하는 현대인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면 인류의 역사가 과연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문명발달로 인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진보적 관점은 부정되어야 할까.


인간은 스스로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어리석은 존재가 아닐까. 모두 이기적 욕망 탓이라고 하기엔 인류의 역사가 보여준 모습이 혼란스럽다. 목적지를 알 수 없고, 방향이 설정되지 않아 한 국가와 공동체는 때때로 퇴보하며 흔들리고 해체되고 되살아나기를 반복한다. 문명의 흥망성쇠는 필연이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처럼. 이 과정에서 우리는 한순간도 쉼 없이 일을 한다. 때로는 생존을 위해 때로는 이타적 목적과 사회 전체를 위해. 그러나 저자는 이 책에서 그 과정의 결정적 장면과 결과가 과연 필연적인지 묻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쉬기 위해 일하지만 일없는 시간을 불안해 한다. “2008년 폴 돌란 등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는 근무 시간이 줄어들수록 불안을 더 크게 느낀다. 근면과 성실은 우리 스스로 부여하는 낙타의 짐이다. 이걸 프로테스탄트 윤리로 부르든, 육 윤리로 부르든 그건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약 5,000년 전 낙타가 가축화된 것처럼, 인류도 신석기 혁명 이후 스스로 가축화되어가는 과정에서 묵묵한 인내의 가치를 체화해 왔다는 것이다.”라는 박한선의 해제가 책 머리를 두드린다. 과연 우리에게 일은 무엇인가. 


일과 인간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의 사용, 농경 사회, 도시의 탄생, 산업혁명이라는 결절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류 역사에서 이 장면들은 이후에 태어난 인간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버렸다. 유발하라리가 『호포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에서 상술했듯 현재의 변화는 느린 점들의 변화를 한 곳에 모아 폭발하듯 현대인의 뇌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4차 산업혁명이 아니라 우리는 상시 혁명 시대를 살고 있는게 아닐까. 


빅데이터, 사물인터넷은 물론 AI 알고리즘이 일상생활을 파고든 지 오래다. 나를 위한 과학, 기술의 발달은 오히려 종속적인 존재로 만든다. 주체적인 판단력과 지속 가능한 일의 즐거움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딩크 족Double Income, No Kids을 넘어 파이어 족(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이라는 신인류가 등장하며 인류의 삶에서 일의 의미와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저자는 우리에게 ‘일’이 무엇이었는지 말해주는 대신 미래의 인류에게 ‘일’의 개념을 다시 설명하려는 듯하다. 


예를 들어, 오늘 저녁 메뉴를 떠올리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살펴보자. 음식을 먹는 목적, 방법, 과정이 제각각이다. 내가 먹는 음식이 나를 말해준다. 어디 음식뿐이랴. 내가 사용하는 물건, 입은 옷, 사는 집도 마찬가지다. 다만 조금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면 일의 기쁨과 슬픔은 우리 삶의 핵심에 해당한다. 무슨 일을 하는지, 일을 통해 무엇을 얻고 싶은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그 일은 어떤 기쁨과 슬픔을 주는지 등등. 돈만 벌 수 있다면 ‘불쉿 잡Bullshit Jobs’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노동의 미래와 경제 문제에 골몰하는 우리에게 ‘일의 역사’는 어쩌자고 자꾸 뒷통수를 당겨 뒤를 돌아보게 하는가. 현재와 미래가 고민이라는 그 방향과 목적지는 늘 과거에서 먼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에너지와 삶과 일의 관계는 인간이 다른 모든 살아 있는 유기체와 가진 공통된 연대의 일부이며, 인간의 목적의식, 세속적인 데서도 만족을 찾아내는 무한한 재주와 능력 또한 지구상에 생명이 처음 태동한 이후 내내 연마된 진화적 유산의 일부다. - 4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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