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 왔다 - 2000년 제31회 동인문학상 수상작품집
이문구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6월
평점 :
품절


 시나 소설이 우리에게 하는 말은 너무 다양하여 선별하여 듣지 않거나 무비판적인 수용을 하게되면 그 피해 정도는 다른 것에 견줄 수가 없다. 특히 소설의 영원한 주제는 사람일 수밖에 없어 더욱 그렇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묻고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소설의 본령이라면 작가의 메시지는 독자의 의미망에 포착되기 전에 이미 공론의 장에 포함된다. 즉 문학은 개인적인 독서 행위를 넘어서는 사회적 몸짓과 긴밀히 결부되어 있다고 믿는다.

  이문의 소설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는 김명인의 시 ‘의자’에서 제목을 빌려와 일련의 단편들인 ‘나무’ 시리즈를 하나로 묶고 있다. <관촌수필>과 <우리동네>의 작가로 잘 알려진 작가다. 2000년 동인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소설은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작가의 마지막 책이었다.

  다른 작품들에도 마찬가지이겠으나 이문구 소설의 특징은 충청도 사투리의 힘으로 요약할 수 있다. 행동이 아닌 말의 힘을 보여주는 이 소설은 우리 문학에서 색다른 모습은 아니다. 아름답고 정감있는 토속어로 한국인의 현재 모습을 가장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로 읽히지는 않는다. 실용성과 환금성이 없는 나무들을 내세워 현재 농촌의 모습과 중장년층의 농촌 사람들을 상징적으로 그려냄으로서 사실적인 표현과 보여주기의 역할을 충실히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감동할 수 있는 독자는 많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의미도 찾을 수 없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수상자 선정의 말에서 ‘어떤 경의를 표하더라도 충분치 않을 것’이라고 극찬하고 있으나 쉽게 동의할 수는 없다.

  물론 한국어가 지닌 아름다움을 사투리의 힘을 빌어 그 바닥까지 드러냈다는 측면에서 이문구의 소설은 탁월하다. 전통문학의 해학을 이만큼 되살린 작가가 드문것도 사실이다. 책장을 덮을 때까지 나는 계속 소리 죽여 킥킥대거나 미소를 지으며 읽었다. 풍성한 언어가 주는 말의 힘은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대리만족이다. 그것 나름대로 충분히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소설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는 데는 동의한다.
 
  장평리 찔레나무, 장석리 화살나무, 장천리 소태나무, 장이리 개암나무, 장동리 싸리나무, 장척리 으름나무, 장곡리 고욤나무, 더더대를 찾아서 - 이렇게 8편의 단편으로 묶여 있는데 인물들과의 친연성으로 인해 마치 장편 소설을 읽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 단편의 주인공들이나 주변인물들은 모두 과거의 농촌을 상기시키는 감상적 피상적 대상의 인물들이 아니다. 작가의 경험에서 배어나오는 90년대 농촌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에피소드 정도의 사건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도시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농촌 사람들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작은 사건들이 모여 공동체적 삶의 모습들을 꾸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문체가 주는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강원도의 힘(?)을 보여준 작가 김유정을 떠올리게 하는 이문구의 소설은 소탈하고 깔끔한 맛으로 읽힌다.

  그러나 ‘동인문학상을 받으며’에서 보여준 작가로서의 의식이 아니라 사회와 친일문제를 바라보는 단적인 문장에서 난 깜짝 놀라고 말았다.

  김동인 선생을 친일문인의 범주에 넣고 그 이름으로 된 상을 받을 수가 있느냐고 하는 이도 있었다. 나는 애시당초 독립운동가의 자제가 아닐 뿐 아니라 일제 때 마키무라로 창씨개명했던 보통사람의 자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뿐더러 “진정한 의미의 친일문인은 춘원 하나뿐”이라고 한 스승의 견해를 전적으로 믿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팔모로 봐도 두드러지거나 유별난 구석을 가진 위인이 아니다. 오히려 천성이 늦되어서 무엇이나 뒤늦게 터득하고 뒤전에서 갈피없이 헤매기가 예사였다. 그렇지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는 태도만은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이 땅의 문학 부흥을 위한 혁신적인 개혁’이라는 조선일보사의 취지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이다. 문인이 문학을 위하는 언론에 신뢰에 호감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 시대의 작가가 반드시 사회의식이 투철하거나 균형감각을 유지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방식대로 인간과 사회를 분석하고 반영하여 작품으로 말하는 것이 작가의 소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관점으로 이문구의 소설들을 바라본다면 적잖은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다. “진정한 의미의 친일문인은 춘원 하나뿐”이라는 말을 어떻게 전적으로 믿을 수 있으며 순히 ‘문학을 위하는 언론’이라고 해서 ‘신뢰와 호감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놀랄만한 발언이라는 생각은 개인적인 판단일까? 논리와 이성으로 무장한 발언도 아니고 수상 소감에서 자연럽게 내비친 작가의 견해라서 더욱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나는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는 오래된 금언을 좋아한다. 작가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으로 당연히 자신의 견해와 관점들을 밝힐 수 있다는 데는 동의한다. 하지만 한 작가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좀 더 흐르고 작품과 더불어 작가의 의식과 삶에 대해 총체적 판단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작품 외적 문제로 시비거리가 될 정도의 작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 명의 독자로서 느끼는 이문구에 대한 발언은 실망스럽다.


2005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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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알랭 드 보통 지음, 이강룡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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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너에게는 우연이나

  나에게는 숙명이다.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는 일이

  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이 시는 정호승의 <새벽편지>에 수록되어 있는 ‘첫눈’이라는 시의 일부다. 1987년 민음사에서 출판된 이 시집을 읽고 나는 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어쩌면 먼 미래의 삶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유치할만큼 사랑에 관한 짤막한 구절일 뿐이었지만, 감수성 예민한 고등학생에겐 오래 잊혀지지 않는 구절이 되어 버렸다.


  ‘사랑이란……?’는 질문을 받는다면 지구위에 60억명이 제각기 다른 대답을 하게 된다. 누구도 정답을 말할 수 없다. 아니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나 감염되는 바이러스처럼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장 진부하면서 가장 흥미진진한 인간의 본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성에 대한 사랑을 한 철학자가 고민하고 있다.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와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은 그렇게 3년의 간격을 두고 나에게 찾아왔다.


  2002년 여름에 출판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원제가 ‘Essays in love’였고 ‘로맨스’라는 제목으로 95년에 번역되었지만 주목을 끌지 못했었다고 번역자는 전한다. 재번역판은 제목만으로도 주목 받을만하다. 모두가 궁금해하는 내용 아닌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친절하게도 제목위에 ‘소설’이라고 장르를 지정해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용은 작가의 대단히 사적인 경험을 들려주는 것으로 진행된다. 작가가 사랑했던 여인 ‘클로이’를 5840.82분의 1의 확률로 만나 사랑을 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헤어지는 장면을 설명한다. 헤어진 후의 감정까지도 상세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그 과정속에서 들려주는 알랭 드 보통의 이야기는 보통을 넘어선 특별함이 있다. 그것은 주관적 감정을 객관적으로 확대 시키는 능력이다. 또한 사적인 영역의 상황들을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일반적 상황으로 분석하고 정리하는 잠언과 같은 말하기 방식이다. 


  이 소설은 “삶에서 낭만적인 영역만큼 운명적 만남을 강하게 갈망하는 영역도 없을 것이다.”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누구나 믿고 싶은 내 사랑의 숙명론.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확률적으로 어려운 것인가를 설명한다고 해서 우연이 필연을 가장할 수 있는지.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의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전화는 전화를 하지 않는 연인의 악마 같은 손에 들어가면 고문 도구가 된다.”는 간단한 진술은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대목들이다. 그래서 이 책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투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는지 모르겠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분석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겠지만, 작가는 나름대로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사소한 대화와 상황을 통해 그것을 시도한다. 여기에 많은 철학자가 동원되고 여러사람의 금언들이 인용된다. 그런 장치들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객관화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읽는 사람들의 제각기 다른 상황에 적용하거나 공감하는데는 분명히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다.


  그렇게 한 여자를 사랑하고 헤어지는 과정속에 아리스토텔레스, 비트겐슈타인, 역사, 종교, 마르크스까지 총동원하며 사랑의 딜레마를 풀어내려는 시도가 신선했다. 그것이 억지스럽지 않고 공감할 수 있는 내용으로 녹아들 수 있는 것은 작가의 경험에 바탕을 둔 진지한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 두 책에서 얘기하는 섹스에 대한 흥미로운 견해를 살펴보면,


  생각만큼 섹스와 대립하는 것은 없다. 섹스는 육체의 산물이다. 무분별하며, 디오니소스적이며, 직접적이며, 이성의 굴레로부터의 해방이며, 희명을 동반한 육체적 욕망의 해소이다.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섹스가 친밀함의 상징이기는 하다. 그러나 섹스 자체가 두 사람이 친밀해지는 것을 보장하진 않는다. 오히려 섹스가 상징하고 있는 이상적인 조건을 깨뜨릴 수도 있다. -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좀더 험난한 과정을 회피하는 방법으로 누군가와 섹스를 나누는 것은, 마치 책을 사두고 그것을 읽었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분명 시간이 흘렀고 사람 사이의 긴밀한 관계에 대한 관점이 변화했음을 느낄 수 있는 다른 표현들이다. 앞의 책에 비해 ‘Kiss & Tell’(유명한 인물과 맺었던 밀월 관계를 인터뷰나 출판을 통해 대중에게 폭로하는 행위)이라는 원제를 가진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은 ‘형식의 새로움’이 가장 큰 매력이다. 번역본의 제목이 주는 상업성은 정말 대단하다. 개인적으로 파란 하늘에 흰구름을 배경으로 한 표지만 한동안 바라보았다. 책은 내용 이전에 손으로 만져보고 쓰다듬고 냄새맡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오감으로 다가오는 책의 즐거움은 내용을 넘어선 감동을 준다. 이 제목과 표지를 보면 누구나 사고 싶어지는 책이다.


  하지만 내용이 주는 감동은 전만 못하다. ‘클로이’라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뤘던 앞의 책과 마찬가지로 이 책은 ‘이사벨’을 주인공으로 마치 한 사람의 전기를 쓰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독특함이 있다. 책 중간에 이사벨이 실존인물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어린 시절의 사진과 가족, 친구들의 사진은 잠시 이 책의 의미를 착각하게 만든다. 작가의 의도이든 아니든 나는 한 개인의 연애 보고서 이외의 다른 의미로 읽지는 못했다.


  키스에 대한 느낌은 오히려 앞의 책에서 이렇게 고백했었다.


  가장 달콤한 키스, 키스라면 이래야 한다고 꿈꾸어오던 키스였다. 가볍게 스치다가 머뭇머뭇 살며시 밀고 나가자, 우리 살갗에서는 독특한 맛이 풍겨나왔다.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키스에 대한 환상과 작가의 느낌을 설명해 줄거라는 기대는 끝까지 버리지 못했지만 결국 한 줄도 언급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결국 이사벨과도 헤어지고 만다. 그러고 보면 두 책의 공통점은 비극이다. 실패한 연애 이야기다. 만약 연애의 성공이 결혼이라고 가정한다면……


  이 책의 화두는 ‘감정이입’이다. “감정이입은 다른 이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는 능력이다.”라고 선언하며 작가는 이사벨을 만나는 순간부터가 아니라 헤어지는 순간부터 제시해서 독자들의 들뜬 마음을 일단 진정시키고 출발한다. 사랑을 하는 과정을 한 여자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형식으로 보여준다고 해서 특별한 내용이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소소한 과정과 대화들, 한 개인에 대한 철저한 관심과 기억들이 빚어내는 놀라운 효과는 행간의 의미로 다가온다.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의 머리, 혹은 가슴속에 그려질 ‘이사벨’을 그려본다면 그 효과는 더욱 확실하게 나타나는 셈이다. 그런 측면에서,


  누구나 감추고 싶은 것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아버리면 더 이상 자기를 좋아하거나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프라이버시에 대한 욕구 뒤에는 누군가가 우리에 관한 모든 사실을 알아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놓여있다. 그것이 비밀 누설에 대한 두려움을 키우는 주범이다. -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라는 작가의 발언은 주목할만하다. 누구나 감추고 싶은 무언가를 바닥까지 뒤집어 보여주려는 의도를 짚어내는 것으로 이 책의 의미는 드러난다. 거울처럼 투명하게 독자들에게 되비쳐 주려는 것이 작가가 노린 효과는 아니었을런지 모른다. 특별한 형식과 독특한 방식으로 또 하나의 연애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지만 앞의 책에서 보여준 감동과 공감의 울림이 부족하다. 앞으로도 가볍고 친숙하게 그의 책들이 쏟아지겠지만 골라 읽기가 또 하나의 숙제로 남는다.


  그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알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질수록 알고자 하는 의지는 줄어든다는 역설을. -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2005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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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그밖의 것들
버트런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오늘의책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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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시간을 무익하지 않게 쓸 수 있을 방법이 있을 때는 절대로 책을 읽지 않습니다.”

  이 책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구절로 기억되는 부분이다. 물론 그만큼 공감했다는 이야기다. 러셀은 이렇게 명쾌하고 시원스럽게 자신의 생각들을 드러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유머와 재치 넘치는 표현과 신랄한 풍자가 읽는 재미를 더하여 에세이가 어떤 형식의 글이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듯싶어 시원스러웠다.

  그것은 러셀 특유의 박학과 관점 때문이다. 사회,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관심과 학문적 깊이에서 비판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일관된 관점을 유지하며 어렵지 않게 생각을 풀어내고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또한 인간사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며 부당한 억압이 없는 세상에 대한 희망을 읽어내는 것이 러셀을 바로 읽는 방법일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에 관해 설명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20세기 최고 지성으로 손꼽히는 그의 에세이들을 죽기 전에 출판을 준비하던 미발표 에세이들이라고 한다. 이 책은 1931년부터 1935년 사이의 글들을 모았다.

  흔히 비판적 지성이라 명명되는 촘스키와 자주 비교되는 러셀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보수와 안정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통념을 깨고 진보적 성향을 견지했던 흔치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촘스키와 비교되는 또 다른 면은 글쓰기 방식이다. 복문이 주를 이루는 만연체가 ch촘스키의 특징이라면 러셀은 간결체의 특징을 보여준다. 그래서 논리전개가 빠르고 논리 구조가 탄탄해서 꼼꼼히 읽지 않으면 행간에 숨어있는 사색의 깊이와 위트를 놓치기 쉽다.

  그의 글들이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시간을 초월한 인간 세상에 대한 통찰력 때문인지도 모른다. ‘경험의 교훈’에서 “젊은이들은 상상과 논리적 추론에 영향을 받고 노인들은 경험의 안내에 따라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다.”라고 말하거나, ‘비겁의 이점’이란 글에서 “기업이나 학교, 정신병원 따위의 윗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 열에 아홉이, 독자적 판단력을 가진 입바른 사람보다는 나긋나긋한 알랑쇠를 선호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지금 변한게 있을까? 계속되는 지적이다.

  오늘날의 당신이 성공을 원한다면 과거에 하던 그대로 하면 된다. 자기 생각대로 과감하게 굴지 말고, 소심하게 살피며 교묘하게 환심을 사는 것 말이다. …… 당신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목표를 실현하고자 애쓰지 말고 백만장자들의 지원을 받는 단체가 정해놓은 목표를 추구하고자 노력하라. 사적인 우정에서는 될 수 있는 한 영향력 있는 사람들로 가려서 사귀되, 혹시 실패할 경우에는 영향력이 커질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들을 사귀어라. 이렇게만 하면 당신은 공동체의 최고인물들 전원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게 될 것이다. - ‘비겁의 이점’

  달라지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를 불행하다고 할 순 없겠지만 미래에도 같은 이야기가 여전히 통용될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 세상의 보편적 정서에 공감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오늘의 세상은 두 가지의 불행으로 고생하고 있다: 자신이 살 수 없는 재화를 소망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팔 수 없는 재화를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 - ‘세상이 미쳐가고 있는가?’

  그가 살던 시대에도 교육은 가장 큰 관심거리였고 대안 교육에 관심을 가졌던 그의 입장에서 당연히 할 말이 많았을 것이다. 교사든 교사가 아니든 우리는 누구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자신의 입장에서 교육하는 교육자다. 아이들의 부모는 학교 선생보다 훨씬 중요한 세상의 가장 훌륭한 교사다. 러셀의 이 말은, 그래서 세상의 모든 부모와 교사가 기억할만하다.

  아동에게서 남다른 사고력의 징표를 읽어내는 법과, 너무 남다른 것이 교사에게 불러일으키는 짜증을 자제하는 법. 이 두 가지를 배우는 과정이 모든 교사들의 훈련과정에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 ‘협력에 관하여’

획일화된 학교 교육과 남의 아이들과 내 아이를 비교해서 평균적(?)이거나 그 이상의 아이로 키우고 싶은 - 오로지 성적면에서만 - 기성 세대에게 울리는 경종으로 들린다. 러셀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사상가다.



2005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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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강화
이태준 지음, 임형택 해제 / 창비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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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이태준의 문장강화(文章講話)는 시대적 의미를 벗어날 수 없다. 1939년 ‘문장’지에 연재되던 글들을 이듬해 출판했고, 1946년 증정판을 출판해으며 1988년 창비에서 신판을, 그리고 2005년 개정판을 냈다. 60여년간 끊임없이 이 책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쉽고 간결한 내용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 책은 문장과 작문에 관한 기초 입문서 정도의 내용이다. 문장과 언어의 차이를 비롯해서 문장의 종류, 산문과 운문의 차이, 퇴고의 이론과 실제, 문체 등 다양하고 꼼꼼한 실용적 글쓰기에 대해 정리하고 있다.

  시나 소설류의 문학적 글쓰기를 따로 다루지 않았으나 기본적인 글쓰기에 대한 전반적인 형식과 내용은 골고루 포함되어 있다. 물론 이것이 저학년용 글쓰기 교본 정도로 취급될 수는 없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할 때 우리말에 대한 관심과 글쓰기에 대한 최초의 교본 역할을 할만한 책이 전무했으리라는 짐작은 어렵지 않다. 이태준의 계몽적 의도가 일부 포함되어 있겠으나 해방을 전후해서 우리말과 글에 대한 안내와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었다는 추측은 어렵지 않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풍부한 예문이다. 딱딱한 이론서가 범하기 쉬운 오류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극복했다. 본격적인 현대문학의 개화기였던 1930년대의 작품들의 풍부한 인용과 고전문학에서 빌려온 예문들이 풍성하다. 실제 글쓰기 상황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 이론은 어떤 형태로 실제에 적용되는지를 적절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당대의 문장가들의 문장을 통해 글쓰기의 실제를 보여주는 방법은 가장 적절한 형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6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어휘와 표현이 많이 바뀌었고, 특히 빈번하게 사용되던 한자어 표현이 사라졌기 때문에 예문들이 오히려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임형택 교수는 한자어에 대한 명확한 해설과 의미를 밝히는 해제 작업을 통해 이 책을 현재화했다. 원본에 손상이 갈만한 시도를 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밝히듯이 이태준의 의도나 내용이 주는 간결하고 담백한 형식이 훼손되지는 않았다.

  일상 생활에서 끊임없이 부딪히는 글쓰기는 전문가만의 영역이 아니다. 일기에서 이메일, 하다못해 이런 아마추어 서평과 독후감에서 비롯하여 각종 글쓰기의 영역과 범위가 넓어진 이 시대에 학교교육의 문제점을 새삼 거론하고 싶지는 않다. 깊이 생각하고 바르게 글을 써서 자신의 생각과 정서를 올바로 표현할 수 있는 기본적인 국어교육의 부제도 탓하고 싶지 않다.

  글쓰기의 기초와 개념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의 지침서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책이 우리에겐 다양하게 필요하다. 이 책이 전부를 해결 해 줄 수는 없지만 여전히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글을 쓰는 행위는 전문가들만의 영역이 아니며 일상 속에서 그 수많은 글쓰기가 오히려 소중하고 삶의 일부를 이룬다고 믿는다. 이태준의 ‘문장(文章)에 대한 이야기식 강의는 그래서 편안하게 독자들을 글쓰기의 세계로 안내한다. 가볍고 기꺼운 마음으로 글쓰기의 ㄱ부터 시작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의 초보적인 글쓰기를 돌아보는 반성의 기회를 삼을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2005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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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을 만나다 - 항소이유서에서 소셜 리버럴리스트가 되기까지, 지승호의 인물 탐구 1
지승호 지음 / 북라인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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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든 인간은 정치적이다. 이 명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싫든 좋든 우리 모두는 매 순간 정치적으로 행동한다. 그것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열정 혹은 냉소와 무관심은 개인적 성향일 뿐, 모두가 호흡하는 공기처럼 온몸을 휘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정치인에 대해서도 같은 공식이 성립될 수 있겠다.

  ‘항소이유서에서 소셜 리버럴리스트가 되기까지’라는 부제를 단 <유시민을 만나다>는 지승호의 인터뷰를 통한 ‘인물 탐구’라는 이름에 값한다. ‘지승호의 인물탐구 1’이라고 했으니, 이후의 책들 또한 기대된다. 이 책의 1부에서는 유시민이라는 코드를 정혜신, 한홍구, 김정란, 유시춘을 통해 다각도로 살펴보고 있으며 2부에서 본격적으로 여섯 번의 인터뷰를 시기별로 나누어 싣고 있다. 마지막 부록이 압권이다. 스물여섯 청년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를 ‘정본(?)’이라는 이름으로 달고 있다. 본인이 직접 당시 복사본의 오류를 바로 잡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재밌다.

  2002년 여름 유시민은 “바리케이드 앞에 화염병을 들고 다시 서는 심정”이라는 격문을 날리며 정치가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전에 <거꾸로 읽는 세계사>,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등의 저술가로, 칼럼니스트로, ‘100분 토론’ 진행자로 알려진 그는 가장 선동적인 방법으로 정치에 입문한 경우로 볼 수 있다.

  얼마 전 열린우리당의 당의장 선거에서 집단 이지메 수준의 비난과 수모를 겪어가며 침묵을 지킨 유시민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것은 사실이다. 분파주의자이며 분열적이고 독선적인 개혁론자라는 부정적 평가와 더불어 토론의 달인, 정치 천재로 불리며 노무현 정권 창출의 특등 공신으로 미래의 한국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히기도 한다.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행복한 역할과 소임을 저버리고 불행한 정치인의 길로 들어선 그를 더 이상 비판적 지성인으로 만나기는 어렵다. 싫든 좋든 그는 살아 숨쉬는 유기체와 같이 정치 환경에 적응하며 우리 정치의 한 축을 담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인에 대한 관심과 평가는 모든 유권자에게 중요하다. 김영춘 의원의 발언대로 “저렇게 좋은 말을 저렇게 싸가지 없이 할 수 있냐?”는 정서의 문제로 그를 대할 수는 없다고 본다.

  2002년 대선을 통해 노무현의 ‘정치적 경호실장, 노빠 주식회사 대표, 노무현과 영혼의 샴쌍둥이’라 불리며 민주세력에게 사표 선동을 통해 비판적 지지를 호소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신념을 누구보다도 분명히 했다. 그것은 개인적인 신념일 뿐 민노당 지지자들에게 씻을 수 없는 앙금을 남겼고 여전히 노회찬 의원을 비롯한 좌파세력에게 미운털이 박혀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논리와 신념과 굽힐 줄 모르는 의지로 열혈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 이유를 민언련 최민희 사무총장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첫째 과거의 정통 운동권 출신이라는 점, 둘째 일정 시점에서 현장과 거리를 두면서 학습할 시간을 가졌기 때문에 사회를 객관적이고 관조적인 자세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는 점, 셋째 제도권 정치인으로 변신하되 그 방식이 순수하게 개혁을 바라는 세력들을 모아서, 그 세력의 대표성을 가지고 정치에 입문했다는 점을 들었다.

  물론 이런 이유들 뿐만 아니라 정통 TK 서울대 출신으로 지역, 학력 컴플렉스가 없고 과거 화려한 민주화 경력은 도덕적으로 완전하다는 점을 추가도 들 수 있다. 하지만 열성 지지자만큼 그에 대한 비판적 정치인과 혐오 세력도 만만치 않게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의 후배들인 386의원들에게 집중 포화를 맞은 당의장 선거에서의 모습은 ‘그토록 유시민이 그들에게 상처를 줬을까, 어떻게 말을 싸가지 없이 했길래 후배들이 저렇게 들고 일어나는가, 유시민은 옳고, 그들은 전적으로 틀렸는가’하는 자성을 누나 입장에서 했다는 유시춘의 말처럼 현재의 그를 돌아보는 거울이 될 것이다.

  유시민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영원한 자유주의자’라고 지승호는 말한다. 항소이유서에서 인용한 네그라소프의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말처럼 그는 슬픔과 노여움이 많은 ‘소셜 리버럴리스트’라고 불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이름으로 우리에게 정의되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영향력 있는 한 명의 정치인이 우리 삶에 주는 영향은 막대하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비판과 지지를 함께 보내야 한다. 지역주의와 낡은 정치를 청산해야한다고 믿는다면,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있는 자리에서 행동해야 한다고 믿는다. 양비론이나 특정 정당과 물에 대한 맹목은 우리 사회의 발전을 후퇴시키는 방법이다.

  아무리 부정적으로 평가한다고 하더라도 노무현과 유시민을 정치적 야욕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파렴치하고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위험 인물이라는 의미의 마키아벨리스트로 볼 수는 없다. 진정한 의미의 마키아벨리즘이란 ‘나쁜 수단으로 좋은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두 사람을 후자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지나친 판단일까?

  유시민이라는 한 정치인에 대한 평가의 잣대는 국민들 각자의 몫이다. 홍세화가 유포시킨 ‘똘레랑스’의 개념이 한국 정치의 치료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볼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을 처음 갖게 한 정치인이 유시민이다. 개인적으로 유시민이나 강준만, 진중권, 한홍구, 하종강, 박노자 등의 말과 글들을 좋아한다. 그러나 노회찬의 정치스타일을 가장 선호한다. 적과 아군들을 모두 웃겨버려 할 말을 없게 하는 그의 스타일은 지나온 경력과 앞으로의 가능성, 정치인으로서의 역량과 민노당의 미래만큼이나 궁금하고 기대된다.

  말과 글이 적확하며 상식적이던 지식소매상에서 자유주의 메신저의 상징으로 그가 보여줄 한국 정치가 그리 어둡고 답답하지만은 않다는 느낌을 갖는다. “안 되면 어때요? 열심히 해보고 안 되면 그 나름대로 분석을 해보고, 거기서 의미를 찾고, 또 다른 부분에서 제가 할 일을 찾으면 되죠.”라고 자주 말하는 그가 정치적으로 성공하기보다는 제 자리에서 묵묵히 국민들에게 쓰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하며 책장을 덮는다.


2005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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