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 사랑, 결혼, 가족, 아이들의 새로운 미래를 향한 근원적 성찰
울리히 벡.벡-게른스하임 지음, 강수영 외 옮김 / 새물결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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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건 아니면 눈이건 또는 대양이건
한때 활짝 피었던 모든 것은 이제는 져버리고
오직 두 가지만 남았다네. 공허
그리고 상처입은 자아만이.

사랑의 열정은 처음부터 서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게 하거나 그 사람에 대해 진정으로 공감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 자신 속으로 가장 깊숙이 파고들어가는 것이며, 천 번, 만 번 접힌 외로움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 자신의 외로움으로 하여금 만물을 포용하는 세계로 뻗어나가 나래를 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천 개의 빛나는 거울에 둘러싸인 듯이


  한 때, 사랑이 생의 전부이던 시절 - 그 미망에 사로잡혀 온통 전 존재를 불태울 수 있다고 믿었던 순간이 누구에게나 존재하리라.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

  산업화와 근대화의 자본주의 사회가 ‘위험사회’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한 저명한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아내 엘리자베트 벡-게른샤임과 함께 ‘사랑’에 대한 주목할 만한 저서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을 남겼다. 이 책은 사랑과 결혼 그리고 가족과 아이들의 새로운 미래를 성찰하고 있다.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과 사랑의 근본적 구조에 대해 조망함으로써 인간 사회의 과거와 현재를 물론 미래를 통찰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우리는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사랑’에서 시작된다.

  인생은 어느 시인의 시처럼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다. ‘사랑’의 의미와 역할은 개인에 따르지만 이것 또한 사회화 과정에서 빚어진 남녀 간의 차이와 전통적 가족관계와 분리될 수 없다. 사랑은 결혼으로 열매 맺는다는 고정관념은 많은 사람을 불행에 이르게 한다. 가족과 아이들의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과연 ‘사랑’의 진정성을 확인하고 있는가.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과 그의 아내는 다양한 측면에서 사랑을 이야기한다. 이성 간의 사랑도 역사적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고 사회적 관점에 따라 다르게 반응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우리에게 사랑은 무엇일까?

  현대사회에서 사랑은 자본의 결합에 다름 아니다. 아니, 결혼에 대해 조금만 냉정하게 살펴보자. 소설가 정이현은 『낭만적 사랑과 사회』, 『달콤한 나의 도시』 등을 통해 이미 사랑과 결혼에 대한 속물적 욕망에 대해 냉소를 날린 바 있다. 어느 사회든 경제적 기반과 결혼의 상관 관계를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순수한 ‘사랑’에 대한 열망에서 한 순간도 자유롭지 못한 것이 인간이다.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 그 낯선 열정과 들림[憑]의 상태는 정상에서 벗어난 열기에서 비롯된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을까?

사람들이 사랑에 더 많은 희망을 걸면 갈수록 사랑은 그만큼 더 빨리, 모든 사회적 결속을 잃어버린 채 허공 속으로 사라져 간다. - P. 23

딜레마의 양측면, 즉 자기자신이 되는 것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 이 둘이 모두 뚜렷이 나타나고 제각기 주목해 달라고 아우성쳐대는 곳이 바로 이 오래된 결혼이기 때문이다. - P. 135


  저자들은 이 책에서 개인화가 초래한 삶과 사랑의 여러 가지 방식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예속적이고 관계 지향적이던 결혼제도가 개인화되는 과정에서 어떤 의미와 역할을 가지게 되는지 살펴보면 사회의 진화 과정이 한 눈에 들어온다. 결국 근대화는 자아의 발견과 결혼제도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는 지난한 과정과 다름없다. 사랑이냐 자유나 그것이 문제로다. 함께 사는 과정에 벌어지는 문제들은 고스란히 사회 문제와 연결된다. 교육과 취업, 가사노동이 산업혁명과 맞물려 남녀의 성별 투쟁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개인화, 파편화 된 것 같은 현대사회에서 사랑은 더 중요해진다. 끈끈하고 1차적인 관계가 사회의 기본 구조와 바탕이었던 전근대 사회보다 역설적으로 사랑의 중요성이 커진 이유는 전통적 결속보다 개인적 안정성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자유로운 사랑과 이혼 과정에서 자유는 증대됐지만 안전은 감소했다. 시대가 변해도 절대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능은 자식 사랑이다. 아이에게 모든 사랑을 쏟는다는 것은 아이를 자신의 아바타로 생각하는 부모들이 늘어간다는 뜻이다. 타자로서, 독립된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자신의 종속변수가 된다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저자들은 이 책의 말미에서 사랑을 신흥종교에 비유하고 있다. 우리의 세속적 종교인 사랑이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고 현실의 도피처가 될 수 없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사랑은 수많은 역설을 내포한 감정의 물결이다. 아무리 사회적 의미를 고찰한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는, 해석할 수 없는 불가해한 영역이 사랑은 아닐까?

사랑을 위한 결혼은 겨우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나서야 존재하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산업혁명의 발명품이었다. 그러나 사회 현실과는 정반대로 사랑을 위한 결혼은 가장 바람직한 목표로 간주되고 있다. - P. 296

  2010년의 사랑이 산업혁명의 발명품이든 신자유주의의 고통이든 사회 현실의 우울한 자화상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안에서 꿈을 꾸고 의미를 찾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소박한 생각들은 변함없이 계속된다.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조차 사회 변화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랑은 자본주의 안에 있는 공산주의이다’라는 말을 믿고 싶다.

사랑은 자본주의 안에 있는 공산주의이다. 노랭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주며, 이는 그를 한없이 기쁘게 한다. - P.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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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한 개비의 시간 - 제3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문진영 지음 / 창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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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여전히 흔들렸고, 버스 손잡이가 아닌 그의 팔을 잡았을 뿐인데 나는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았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내 옆에서 함께 흔들려주었기 때문인지도.

  그렇게 흔들리는 인생에서 단 하나 흔들리지 않는 무엇인가를 갖고 싶어 한다, 우리는. 아니, 흔들려도 좋으니 옆에서 함께 흔들려주는 누군가를 원한다. 하지만, 모든 것은 불안하고 곁에 있는 사람조차 나와 다른 리듬으로 흔들릴 때 고독을 절감한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독한 존재다. 혼자라서 느끼는 외로움과 다른 내 실존의 깊이. 사춘기를 지나면서 사람들은 근원적 자아와 마주한다.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자아정체성이 형성될 무렵에 낯설과 자신과 대면하지 못한 사람은 타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조차 불안하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죽도록 달려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알 수 없는 불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드디어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진 후에도 고독하기는 마찬가지다.

  신인작가 문진영의 『담배 한 개비의 시간』은 2010년 청년들의 그로테스크한 초상화이다. 제3회 창비장편소설상을 받았으니 한 젊은이는 구원을 받았으나 그가 현실에서 만났던 혹은 앞으로 만나게 될 수많은 청춘들은 결코 환한 미소를 지을 수 없을 것만 같다. 이 소설은 그만큼 우울하게 읽혔다. 소설은 어차피 읽는 독자들의 수만큼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고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데 동의한다면 나는 이 소설에서 미래의 희망이나 그래도 다시 한 번 따위의 안일한 현실 인식을 읽어내지는 못했다. 이 소설은 그만큼 참담한 현실을 건조한 목소리로 담아내고 있다.

  문진영은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는 스물넷 대학생이다. 여자 대학생이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모래바람이 서걱이는 메마른 목소리로 담아내고 있어 독자들에겐 출구 없는 미로처럼 답답하게 읽힌다. 단순하게 소설을 쓰기 위해 오랜 시간 습작 과정을 거친 문학 소녀의 글이 아니라 감수성 예민한 대학생의 고백처럼 읽히는 것은 문진영의 문장이 가진 매력이거나 현실의 아득한 거리감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니체가 말했다.
한낮의 빛이, 밤의 어둠의 깊이를 어찌 할 수 있으랴. - P. 36


  소설은 네 명의 주인공이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이다. 보잘 것 없는 비정규직 혹은 예비 직장인의 생활에 대단한 사건은 없다. 물이 흐르듯 시간 속에 스며드는 청춘들의 하릴없음이 아프게 느껴진다. 미친 듯한 열정과 미래의 꿈에 대한 도전이 피 끓는 젊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부박한 현실에서 길어올릴 수 있는 작은 희망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는가. 이 소설에서는 그것을 찾을 수가 없다.

  대한민국 자본주의 본산 강남의 한 편의점에서 일하는 주인공은 희망도 미래도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 좌절과 슬픔 속에서 우울하게 살아가는 청춘도 아니다. 그가 사랑하는 혹은 사랑했던 M이나 편의점에서 교대로 일하는 J 또한 마찬가지다. 건너편 카페에서 일하는 물고기도 나와 비슷하다. 네 명의 등장인물은 성별과 상황만 다를 뿐 표정 없이 떠도는 미라처럼 감정이 배제된 것 같다. 익명성의 천박한 자본주의 중심에 서있는 주인공은 일회용으로 가득한 편의점처럼 조용하고 시원하게 그렇지만 환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이 흑백필름 같은 현실을 문진영은 결코 우울하게 그려내지 않는다. 한낮의 빛이 어둠의 깊이를 알 수 없다는 듯 네 명의 청춘들은 그들만의 깊이와 넓이로 하루하루를 견뎌낸다. 밝고 경쾌할 정도는 아니지만 잔잔한 미소를 떠올릴 수 있을 정도의 유머와 감각적인 문장들은 이 소설의 장점이다. 높고 큰 목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어딘지 꾹꾹 힘주어 눌러 쓴 초등학생의 공책처럼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 할 것 같은 진지함이 묻어난다.

게다가, 딱 한 판만 더 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 같거든. 한 판만 더, 한 판만 더…… 그러다가 막상 성공하고 나면, 그때는 최단기록을 내고 싶어지는 거야, 젠장. 사는 게 그런 거지. - P. 121

  사랑조차 돈에 저당잡힌 88만원 세대의 세태소설로 읽는다면 이 시대의 청춘이 너무 비참하다. 이 소설은 그렇게 통속적으로 읽을 수도 있겠으나 ‘꽃들에게 희망을’ 외치는 양치기 소년처럼 아이들에게 젊은이들에게 끝없이 경쟁을 강요하고 1등만 독려하는 사회의 어른들이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만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가르친 어들들에게 묻고 싶어졌다. 눈높이를 낮추면 취직할 수 있는지 취직하고 나면 결혼해서 집사고 행복하게 애를 키우며 살 수 있는 세상인지.

  세상은 조금씩 자란다고 믿는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들이 만들어가는 바람직한 세상을 생각해 보자. 새장 속에 갇힌 새처럼 날개짓을 할 수 있는 한정된 공간만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날 수 없는 날개를 달아 준 것은 아닐까? 우리는 지금 아주 많은 위험과 시련 속에 서 있다. 교육, 환경, 정치, 사회, 문화 등 어느 것 하나 희망만으로 가득했던 시절은 없었지만 지금은 혹독한 겨울이다. 아무리 난해한 문장들로 가득 찬 책이라도 읽을 수 없는 책이 없는 것처럼 이겨내지 못할 겨울도 없는 법이다. 어쩌면, 당신이 그런 책일지도 모른다.

그래, 어쩌면 당신은 늘 내게 책장을 펼쳐 보이고 있는 한 권의 책이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언어로는 도무지 해독해낼 수 없는, 난해한 문장들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었다. - P.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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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지음 / 사회평론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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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아니, 우리 각자가 삶의 지향점으로 삼고 있는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자. 사람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생의 목표와 가치관은 변할 수 있다. 또한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질 수 있고 주변 사람과의 관계와 행복의 의미가 바뀔 수도 있다. 사람들의 선택할 수 있는 폭과 범위는 각자 조금씩 다르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결정된 운명적, 태생적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한국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누구나 조금씩 다른 부모와 환경에서 태어나 자란다. 그것이 전부 일수는 없지만 완전히 달라질 수도 없다. 개인의 선택과 노력 여하에 따라 자신의 삶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느냐가 바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민주화의 척도가 아닐까?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주변을 돌아보자. 얼마 전에도 중산층이 줄어든다는 보도를 접한 적이 있다. 20대 실업률 증가, 중산층 감소, 양극화 심화 - 이런 객관적 사회 지표들은 단순히 경제 상황에 따른 사회 변동으로만 볼 수 없다. 정치제도의 합리성, 사회제도의 민주성, 경제적 투명성이 확보되어야 건강한 사회라고 볼 수 있다. 선진국 혹은 복지사회를 만들고 싶다면 건전한 상식과 합리적 의사결정이 통용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속한 집단은 그런가?

  세상 사람들의 냉소는 이제 한계를 넘어섰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 정치에 대한 냉소, 경제적 이기주의는 2010년 대한민국의 현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조건들이다. 학교에서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는지, 사회에 나가면 사람들이 괴물로 변하는지 가족과 친구,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만 잘 사는 사회가 지속 가능한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게 아닌가?

  김용철과 삼성, 아니 우리 모두와 삼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단순한 한국의 재벌 그룹 이 상의 상징이 되어버린 ‘삼성’은 우리에게 무엇이며 앞으로 무엇이어야 하나. 삼성그룹 구조본의 법무팀장이었던 검사출신 변호사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는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혹은 알고 싶지 않았던 우리 사회의 건강진단서를 보는 것 같았다. 설마 이 정도까지겠는가 그래서 설마 이건 아니겠지 하는 미련을 털어버리게 만든 책은 일요일 오전에 읽을 만하지 않다.

500페이지에 달하는 두툼한 분량이지만 막힘없이 읽힌다. 기사문을 작성하듯 짧은 문장과 간결한 표현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래서 사실을 전달하듯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 진실을 전달하겠다는 의지를 읽어낼 수 있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양심선언을 사람들은 벌써 잊었다. 주류 신문과 방송이 외면해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통해 발표 되었던 삼성의 비자금과 불법 승계의 썩은 고리들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 사회의 주류로 행사하며 세상은 이런 곳이라는 떳떳하게 밝히고 산다. 백주 대낮에 그들이 당당할 수 있는 이유, 우리가 그들이 되고 싶은 부끄러운 현실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가마니로 덮어 놓은 부패한 음식의 악취가 천지를 진동하지만 코는 쉽게 그 냄새에 익숙해진다. 무뎌진 후각만큼 우리 삶의 가치는 성공한 재벌에 대한 면죄부를 향해 달려간다. 좀 더 많이, 확실하게 벌고, 보다 강한 권력을 갖는 자가 살아 남는다. 영화 속 조폭의 한 마디처럼 ‘강한 놈이 살아 남는게 아니라 살아 남는 놈이 강한 놈이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도 십년을 지키기 어렵다는 말이다. 진시황도 죽었고 히틀러도 죽었다. 김일성도 죽었고 박정희도 죽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재벌은 죽지 않는다. 창업자의 손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룹의 지배권을 넘겨주기 위한 상상을 초월하는 뇌물과 그 모든 비리와 불법을 인정해주는 검찰과 언론을 가진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오늘도 행복하신가?

  우리 주변에는 삼성에 다니는 가족, 친구, 선후배가 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국어교사가 된 제자와 삼성전자에 입사한 제자를 함께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을 바라보는 내 심정은 복잡했다. 김용철은 이 책을 통해 글로벌스탠다드를 지향하는 삼성의 비리를 고발하지 않는다. 이 책은 오롯이 비정상적, 비상식적 사고방식으로 우리 사회를 부패시키고 있는 이건희와 그 가신들 그리고 이재용에게 바쳐져야 한다. 그리고 그들과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부패한 검찰과 썩은 언론을 위해 쓰여졌다. 이것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우리들의 정서 문제이다. 당신은 삼성의 입장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는 삼성이 만든 제품이나 삼성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묻는 말이 아니다. 무노조 경영의 신화(?)를 창조하고 있는 삼성에 대한 태도는 바로 우리 사회의 주류의 가치관에 동의하는지 여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삼성에 대한 입장은 재벌친화적인 우리 사회 주류의 가치관에 동의하는지 여부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통한다. - P. 389

  감정적으로 혹은 법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사람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삼성을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이념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이대로 우리 사회가 계속 유지될 수 없다는 공포와 불안에 대해 귀 기울여야 하지 않는가. 지금 이대로의 현실을 우리 아이들에게 떳떳하게 말해줄 수 있는가. 대기업, 판검사와 변호사, 언론인이 되어 우리 사회를 이끌어 달라고 당당하게 아이들에게 권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을 닮으라고 권해줄 수 있는가. 이 땅에서 아이들을 길러야 하고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부모와 교사의 입장에서 나는 이 책을 울면서 읽었다.

나는 삼성 재판을 본 아이들이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게 정의”라는 생각을 하게 될까봐 두렵다. 그래서 이 책을 썼다. - P. 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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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서 춤추다 - 서울-베를린, 언어의 집을 부수고 떠난 유랑자들
서경식 & 타와다 요오꼬 지음. 서은혜 옮김 / 창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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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는 위험하다. 흔희 회색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지점이 경계에 해당한다. 경계는 불분명하고 불안하다. 소속감을 느낄 수 없고 그렇다고 경계 밖도 아니다. 이 경계를 바꾸어 생각하면 이쪽과 저쪽 모두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말이 가진 뉘앙스와 이미지는 늘 적색 신호를 보내는 듯하다.

  사람은 누구나 소속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과 어울려 있어야 마음이 편하고 어느 집단에 소속되어 함께 움직일 때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과 집단의 정체성에 차이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그 모순된 간격을 메우거나 거부한다. 소속을 바꾸거나 집단의 성격을 바꾸거나!

  문제는 자신의 선택과 노력이 가능한 일인가 그렇지 않은 일인가에 달려 있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이질적인 집단에 속해 있는 개인을 상상해 보라. 재일동포 서경석은 바로 이러한 자신의 정체성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다. 디아스포라 서경석의 글은 어느 한국인 못지  않게 유려하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다보면 경계를 넘어 또 다른 사유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서경석의 전작을 한 권이라도 읽어 본 사람이라면 『경계에서 춤추다』라는 제목이 슬프게 느껴졌을 것이다. ‘춤’은 기쁨의 몸짓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방인의 다른 말인 경계인 서경석이 춤을 춘다고 했으니 그 함의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이 반어적인 의미로 들리는 것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역설적으로 서경석은 경계를 즐기며 진짜 ‘자유’의 춤을 추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이 책은 일본의 여류 소설가 타와다 요오꼬와 나눈 편지를 묶은 것이다. 집, 이름, 여행, 놀이, 빛, 목소리, 번역, 순교, 고향, 동물 등 일상에서 접하게 되는 열 가지 주제를 가지고 서로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독자들은 두 사람의 은밀한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는 재미를 맛본다. 공개를 전제로 쓰인 편지지만 사색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들이 드러나는 것은 편지라는 형식의 힘이 커 보인다.

  편지는 단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해 쓴 글이기 때문에 받는 사람에게 모든 초점이 맞춰진다. 불특정 다수의 독자를 염두에 두기도 하지만 일단 받는 사람의 입장에 맞추게 된다. 서울의 서경석과 베를린의 타와다 요오꼬는 서로 다른 공간에서 동일한 사물과 사건에 대한 생각을 나눈다. 따로 또 같이 고민하고 소통하는 모습은 인종과 국가의 벽을 넘어 공감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내밀한 언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있어 무림 고수들이 내공을 겨루듯 한치의 양보없이 팽팽하게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글쓰기는 형식과 무관하지 않다. 자유롭게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편지 형식은 독자들에게도 편안하고 즐겁게 대화를 엿듣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베를린에서 타와다 요오꼬는 이방인이고 서울에서 서경식은 경계인이다. 일본인이 베를린에서 사는 것과 한국인이 서울에서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느낌일 수 있지만 오히려 서경석에게 서울은 더 낯설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의 가족사를 굳이 알지 못하더라도 서경식에게 ‘고향’은 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화두가 된다.

저 자신이, 루쉰처럼 어떤 시점에서 명확히 고향을 잃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재일조선인 2세라고 하는 것은 태어나면서 고향을 잃어버린 존재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제가 어릴 때부터 루쉰의 『고향』에 마음이 끌렸던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먼 거리’를 알아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 P. 204

  서경석은 찬찬히 생각해 보아도 돌아가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결국 돌아가고 싶은 곳, 돌아가야할 장소 따위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에게 돌아갈 고향은 있는 것일까? 세월이 흐르고 모든 것은 사라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먼 거리’만 확인하는 과정이 인생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이라고 외치고 싶은 게 사람의 욕심이다.

  경계에서 보면 일본이든 한국이든 혹은 독일이든 낯선 땅이 아니라 어느 곳이든 돌아가야할 장소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 경계로부터 자유롭게 춤을 추어 보자. 경계를 넘나들며 신나게 뒤섞고 흔들어보자. 우리는 그렇게 하나가 될 수 있지만 영원히 혼자일지도 모른다. 서경석과 타와다 요오꼬는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거나 공간만 이동한 경계인은 아닐까? 내 몸이 놓인 자리가 아니라 삶의 자리와 방식이 문제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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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사이프러스에서 사계절 1318 문고 56
박채란 지음 / 사계절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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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마. 사랑이 제일 중요한거야. 작은 민들레 홀씨 하나에게도, 수백년을 살아낸 메타세콰이아 나무에게도, 그리고 너희들에게도, 똑같이 사랑이 가장 중요해. 
사랑이란, 너희가 선택한 바로 그 삶 안에서 살아 있으려는 마음이니까. - P. 263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웁다는 말 한 마디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말을 백 번쯤 되뇌었는지 모르겠다. 그리움은 사랑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 충분 조건이다. 그립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은 눈을 감은 채 그리움의 부피를 가늠하는 일이고 그 무게에 눌려 숨조차 쉬기 버거운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사랑이 없는 삶은 누구에게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말이다. 첫사랑은 말하자면 우리가 비로소 성인이 되기 위한 관문과 같은 것이다. 대부분 과거의 일일 터이니 ‘첫사랑’을 떠 올려 보자. 아득한 열기와 혼돈이 되살아날지도 모른다. 끝없는 자책과 후회가 밀려온다면 지독한 첫사랑의 아픔을 간직한 사람이다. 서툴고 모라자서 아름다웠던 순간을 추억하며 늙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모두 비겁한 것만은 아니다. 청소년기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그 혼란을 ‘사랑’과 함께 했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박채란의 『목요일, 사이프러스에서』는 네 가지 사랑이 등장한다. 이성에 대한 사랑(새롬)은 물론이고 가족에 대한 사랑(태정과 선주),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새롬과 선주) 그리고 삶에 대한 사랑(하빈과 선주)이 그것이다. 사랑의 종류를 나눌 수 있을지 의문스럽지만 그 대상을 나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열 여덟, 고등학교 2학년인 여학생들 사이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 소설은 엉킨 실타래처럼 사건의 실마리가 쉽게 풀리지 않는다.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을만큼 치밀하게 계산된 전개 과정은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사춘기 소녀들의 관심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거창한 꿈을 꾸기도 하지만 대부분 소박하고 사소한 일들이다. 이성에 눈을 뜨고 사랑에 빠지기도 하지만(새롬), 부모님의 이혼으로 헤어진 아버지를 그리워하기도 하고(태정), 자살한 언니와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 엄마 때문에 괴로워 하기도(선주) 한다. 백혈병에 걸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하빈) 아이의 입장에서 새롬과 태정 그리고 선주의 고통은 어떻게 보였을지 짐작이 간다.

  사랑은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하빈의 전언이 이 소설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삶은 숙명처럼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모든 것은 우리의 선택이었다. 부모와 환경을 탓하기도 하지만, 실제 그것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지만 우리의 삶은 우리의 ‘선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작가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아이들에게 다양한 사랑의 의미를 보여준다.

  먼저 새롬이를 살펴보자. 사랑하는 오빠에게 버림받은 완벽한 외모의 소유자. 못생긴 손이 콤플렉스지만 오빠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별의 아픔보다 누군가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더 견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정이는 부모님의 이혼으로 아버지를 잃는다. 영원히 떠나버리려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분노가 뒤섞인 마음이 안타깝다. 마지막으로 선주는 남부럽지 않은 사회경제적 조건을 갖춘 환경이지만 억압적인 부모 때문에 자살한 언니를 돕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고통받는다. 세 명의 아이들은 하빈이라고 하는 아주 특별한 아이를 만난다. 또래 아이들보다 두 살이나 많은 하빈이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어내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소설의 후반부에 그 이유가 그럴듯하게 설명되지만 오히려 독자들은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믿고 싶을 것이다.

  작가는 하빈이의 입을 빌어 사랑의 의미와 중요성을 말한다. 식물에 대한 사전적 지식을 통해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해준다. 식물이 가지고 있는, 아니 자연의 신비가 품고 있는 진리를 인간은 얼마나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되묻고 있는 듯하다. 스스로 세상에 파견된 안전요원이라고 말하는 하빈이는 쉬운 인생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코끼리가 아카시아를 돕는 방식을 통해 세 명의 아이들의 고민을 해결해 준다. 어쩌면 세 명의 아이들은 하빈이를 통해 스스로의 문제를 발견하고 자신을 치유했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하빈이는 ‘거울’의 역할을 한 것이다. 사람들은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가끔 살아있으려는 마음을 의심한다.

  이 책의 제목이 된 ‘사이프러스’는 네 명의 아이들에게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고 세상을 배우는 공간으로 작용한다. 식물로 둘러쌓인 옥상 정원에서 아이들은 가슴에 응어리진 모든 의문을 풀어내고 나와 타인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착한 사람이 모두 바보가 아니라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깨우치기도 하고 가족의 소중함을 확인하기도 하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10대 소녀들의 혼란스럽고 불안한 심리 상태를 읽어내고 표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 소설이 감동적인 이유는 현실을 문제를 읽어내는 섬세함과 대안을 제시하는 상상력이 기막힌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적 상상력을 포기하지 않은 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의 심각한 문제들을 밀도있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특히 이 모든 소동과 혼란의 중심에 ‘자살’이라는 쉽지 않은 소재를 끌어들여 그 심각성과 중요성을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원인을 제시하고 해결 방법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다소 억지스런 면이 없지 않지만 사회과학 분야의 책이 아니기 때문에 문학적 형상화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다만 하빈이의 생활기록부를 담임의 책상에서 확인하거나 전학 온 학교의 담임을 불러내는 일 등 현실감을 떨어뜨리는 몇 가지 요소가 아쉬웠다.  

  청소년들의 자살은 대입제도 등 사회구조적 문제, 부모들의 양육태도, 주변 환경 등 다양한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앞으로 많은 작가들이 좀 더 깊은 관심과 애정이 필요한 주제이다. 무겁고 심각한 소재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작가뿐만 아니라 기성세대 모두가 짊어져야 할 책임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청소년 문제는 바로 우리들의 현재이며 미래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 아이들은 안녕하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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