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로 글목을 돌다 - 2011년 제35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공지영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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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어스름 골목길을 돌아 친구의 집을 찾아 간 적이 있다. 익숙하지 않은데다 담에 막혀 다음 골목의 모양과 방향이 알 수 없어 답답했던 기억이 난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그렇게 방향을 바꿔야 할 때마다 고민한다. 그 끝을 알 수 없고 목적지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과정과 결과를 예측할 수 없고 가끔은 상상하지도 않았던 운명에게 허를 찔린다.

인류의 역사는 피의 역사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잔혹한 동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증거는 너무 많다. 잔혹한 종교와 이념 전쟁, 세계대전과 아우슈비츠로 대표되는 대량 학살 등이 그것이다. 프레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인류의 악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아니어도, 80년 광주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잔인한 폭력 앞에서 수많은 예술가들은 ‘인간’의 존재를 성찰한다. 우리는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가.

35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맨발로 글목을 돌다』는 공지영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지난한 세월을 견뎌낸 작가에게 각종 문학상은 걸어온 길에 대한 평가이고 걸어갈 길에 대한 채찍이다. 그렇다면 공지영의 수상은 전자일까 후자일까. 아마도 전자쪽에 무게를 둔 것이 아닌가 싶다. 블라인드 테스트로 수상작을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지난 1년간 발표된 소설 중 가장 탁월한 성취를 이뤘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였을까.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인간에 대한 예의』를 읽으면서 부터였는지 한참 후에 『별들의 들판』,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도가니』를 읽고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공지영 소설은 불편하다. 그 불편함은 공감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불편이나 외면하고 싶은 진실에 대한 불편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과잉 때문이다. 후일담이나 사소설에 가깝기 때문이 아니라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드러내려는 섬세함 때문이다. 그것은 소설적 평가 이전의 문제일수도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재미있다, 감동적이다의 차원을 넘어 숨김과 거리의 차원을 말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대중적 감응력과 조우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해부실 불빛에 드러난 장기처럼 낱낱의 것들을 고스란히 드러내려는 것 같은 문장은 아름답기보다 불편하다. 이상문학상을 수상하기에 충분한 역량과 활동을 보여온 공지영에게 갈채를 보낼 수는 있으나 그의 소설을 이 시대 최고의 소설이라고 인정하기 싫은 이유를 나도 알 수가 없다.

수상작에 대한 찬사와 기대 다양한 해석은 ‘글목’에 모아진다. 치열한 개인적 삶은 결국 세계와 대결을 의미한다. 소설은 이것이 보여주는 다양한 양상을 드러낼 뿐이다. 작가마다 독특한 시선과 개성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우리는 그 찬란한 스펙트럼을 즐긴다. 켜켜이 먼지 묻은 세월의 두께와 발랄하고 신선한 감수성들이 충돌하고 과거와 현재가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그래서 소설은 여전히 우리 삶의 총체성을 짐작할 수 있는 최고의 고전이다. 하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얼마나 잘 담아낼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다. 그것이 문학의 다양성이 사라진 시대라면 더더욱.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읽는 이유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에 대한 경외감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문학적 감수성에 대한 흐름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독자마다 그 이유가 다르겠으나 대상 수상작 뿐만 아니라 우수상 수상작들이 바로 이 시대의 문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지아, 김경욱, 전성태, 김숨, 김언수, 김태용, 황정은 등이 바로 다음 수상 후보자이며 그들의 소설이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물리적인 폭력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고통에 대한 통찰이 문학의 바탕은 아닐까. 공지영의 소설은 시대의 아픔을 넘어 이제 인간의 보편적 고통에 대한 불가해함을 통찰한다. 문장과 표현을 넘어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는 방식은 공지영의 소설을 읽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작가가 지금까지 지켜온 인간에 대한 애정과 세상의 폭력에 대한 저항은 앞으로도 애정을 가지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연민을 느끼게 한다. 물론 이 연민은 작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 우리 사회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누구나 ‘평범성이 주는 온갖 열락을 향한 은밀하고 애타는 동경’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인간이 성장해가는 것은 운명이다!’

110313-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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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페인 유골 분실 사건 - 상식의 탄생과 수난사
폴 콜린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양철북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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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그릇된 것이 그릇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습관이 오래 굳어지면 겉보기에 옳은 것처럼 보이게 된다.” - P. 35

어떤 기준으로도 분류하기 어려운 책을 만나면 조금 당황스럽다. 형식과 내용의 독창성은 좋은 책이 갖추어야 할 미덕이지만 잘못하면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다. 지루하고 비슷한 방식의 글쓰기보다 맛깔스럽고 재밌는 내용과 형식은 독자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준다. 세상에 태어나는 수많은 책들 속에서 그런 책을 찾아 읽는 것 또한 독자들의 안목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

폴 콜린스의 『토머스 페인 유골 분실 사건』이라는 책을 보고는 눈을 의심했다. 세계의 혁명을 꿈꾸었으나 자본주의의 상품 코드가 되어버린 체 게바라도 아니고 논쟁을 하다가 부지깽이를 휘두른 비트겐슈타인과 칼 포퍼의 이야기도 아니고 기행을 일삼았던 작가나 예술가의 일대기도 아니고 『상식』(1776)과 『인권』(1791)을 썼던 미국과 프랑스의 사상적 혁명가 토마스 페인의 이야기라니?

관심을 가질만한 인물의 재탄생인지 아니면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거리가 새로 발견된 것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영국과 미국 사람들에게 토머스 페인이라는 인물이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가장 급진적이고 괴팍한 형태의 ‘상식’이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면 18세기에 그가 쓴 소책자 ‘상식’의 파괴력을 짐작할 만하다. 그 내용은 차치하고 그의 쓸쓸한 생애에 먼저 눈길이 간다. 상식과 인권을 주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결국 토머스 페인의 인생은 ‘종교’의 문제가 핵심처럼 보인다. 토머스 페인은 무신론자였을까?

그들이 믿는 신을 믿지 않는다면 인간의 기본적인 가치, 상식, 인권을 말할 수 없다는 논리는 아니겠지만 페인의 삶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그의 사상이나 그가 쓴 책의 내용이 아니라 바로 ‘신’에 대한 그의 생각을 더 궁금해 하는 사람들의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종교는 상식과 인권에 앞서는 걸까?

문학을 전공한 이 책의 저자 폴 콜린스는 토마스 페인이라는 실존 인물의 죽음부터 그의 생애와 사상을 점검하기 시작한다. 거꾸로 더듬어가는 시간여행은 우리들의 상상력을 극대화시킨다.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토마스 페인이 죽은 현실적 공간에서 출발해서 그의 유골을 추적하는 과정은 흥미진진한 영화처럼 펼쳐진다. 하지만 그것은 비극이다. 토머스 페인의 페인이 쓴 『상식』은 어떤 책인가?

왜? <상식>은 1776년 1월 10일 출간된 뒤 세 달 만에 12만부가 팔렸다. 그 뒤 3년 동안 판매량이 50만 부까지 늘었다. 종이가 귀하던 시절이라 다들 책을 돌려 가며 보았다. 미국 인구가 250만이었고, 그 가운데 상당수는 문맹이었으니 글을 아는 사람은 모두 이 책을 읽었다고 봐야 한다. 식민지 시대 미국에서 성격을 제외하면 그 어떤 문서도 넘볼 수 없는 지위다. - P. 34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지녔던 책의 저자 토마스 페인은 죽음 이후가 더 극적이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의 영향을 주었고, 『인권』을 발표해 프랑스 혁명을 옹호했던 토머스 페인의 유골은 그만큼 중요한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이 책은 삶과 죽음의 경계로서 ‘유골’의 의미를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삶이, 그의 사상이 걸어온 길을 죽음 이후의 ‘유골’의 행적이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 저자고 말하고 싶은 진실은 아닐까?

그 진실은 여전히 유효한 토마스 페인의 사상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국민과 국가의 관계 그리고 인간이 가져야 하는 당연한 권리와 자유의 의미에 대해 분명하고도 상식적인 대안을 내놓은 페인의 삶을 유골을 통해 미루어 짐작하는 아이러니! 이 책은 죽음 이후를 추적하는 기이한 방식으로 시대를 풍미했던 한 사상가를 기억하고자 한다.

“어떤 그릇된 것이 그릇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습관이 오래 굳어지면 겉보기에 옳은 것처럼 보이게 된다.” - P. 35

적어도 마르크스가 나오기 전까지 가장 중요한 개혁가로 기록될 만한 인물, 토마스 페인은 어떤 삶을 살았든지 어떤 죽음을 맞이했든지 인류에게 인상 깊은 말들을 남겨 놓았다. 그것은 시대와 상황을 고려할 때 더없이 중요한 목소리였으며 아무나 흉내내기 어려운 용기였음을 기억한다. 이 책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소설처럼 극적인 유골찾기를 통해 독자들의 흥미를 이끌어내기 때문도 아니고 방대한 자료와 기록을 바탕으로 정교한 시간의 퍼즐 맞추기를 완성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혹은 살아야 할 미래의 ‘가치’에 대해 근본적인 고민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 그보다 먼저 『상식』과 『인권』을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저자는 감히 이렇게 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토머스 페인은 바로 당신의 등 뒤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

토머스 페인은 어디에 있는가?
독자여, 그가 없는 데가 어디인가? - P. 272


110309-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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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의 나무 아우또노미아총서 12
움베르토 마투라나.프란시스코 바렐라 지음, 최호영 옮김 / 갈무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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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처음 이메일을 사용할 무렵 아이디를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이나 취향을 알 수 있었다. 뒤에 붙어있는 숫자로 나이나 생일까지 짐작할 수 있다. 이제는 인터넷에서 사용하는 사람들의 닉네임과 아이들로 개인의 정체성과 관심분야 그리고 전공이나 직업까지 짐작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인식의힘’은 또 다른 나의 모습인 것이다.

어떤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단순히 ‘안다’는 것을 넘어 형이하학적 세계와 분리된 아닌 형이상학적 영역에 대한 깨달음은 아닐까 싶었다. 나를 넘어서 타인과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삶의 비밀을 읽어내고 싶은 욕망이며 세상의 진실을 포착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태도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끝없는 호기심과 지식에 대한 탐닉으로 이어졌고 난삽하고 계통없는 잡식성 독서로 출발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넘나드는 고민으로 이어졌다. 나는 누구이며 세상은 어떤 곳인가. 존재의 의미를 찾고 싶었고 그렇게 움직이는 모든 것, 행위의 근본질서가 궁금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을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영원에 대한 도전만큼이나 부질없는 노력은 아닐까 싶은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다. 걷다 보면 길이 생길지도 모르고 가보지 않은 길로 접어들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또 길이 아니면 어떤가.

이웃 블로거 소나기님이 보내준 책을 읽었다. 『국민을 그만두는 방법』에 이어 『앎의 나무』는 나에게 아주 소중한 책으로 기억될 것이다. 또 다른 나의 정체가 되어버린 ‘인식의힘’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는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책을 왜 읽는가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해 주었다.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
말한 것은 모두 어느 누가 말한 것이다. - P. 33

이 책은 눈에 보이는 대상을 우리가 인식하는 과정으로 시작한다.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는 세상의 모든 대상을 의심하게 한다. 실제로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그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는 것인지 알 수 있을까. 굳건하게 믿어왔던 세계에 대한 불안과 혼란으로부터 우리들의 지식과 정보와 인식방법을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

전체 10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하나의 견고한 구조물과 같다. ‘인간 인지능력의 생물학적 뿌리’라는 부제가 잘 말해주듯이 ‘앎’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결국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고민하는 책이다. 일상경험의 관찰과 행위가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어 자기생성과 증식, 섭동작용을 거쳐 개통 발생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어떻게 인식활동에 영향을 미치고 문화현상 언어적 영역으로 확산되는지 살펴보는 것은 결국 거대한 ‘앎의 나무’가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 책은 거대한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이고 생물학적 차원에서 인식의 과정에 대한 탐구이며 ‘앎’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다.

칠레 태생의 두 학자가 쓴 이 책은 아우또노미아총서 중 하나이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에 대한 심오한 성찰과 과학적 분석은 다양한 학문 분야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알기 쉽고 간명하게 ‘앎’의 영역을 정리하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접했다는 생각보다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성장하는 과정의 비밀을 깨닫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 과정에 따라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는 하는 것일까.

이 책의 저자들은 섬세하고 정교한 흐름으로 앎의 나무를 설명한다. 처음부터 시작되는 고정관념과 타성에 젖은 의식 깨트리기는 신선한 충격이다. 하지만 무언가 한 대 얻어맞은 듯이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과 달리 책의 대부분은 생물학에 기반한 인간의 의식과 인식과정을 탐구하고 있어 조금 지루하고 이해하기 쉽지 않다. 기초적인 지식과 자세한 설명으로 어렵지 않게 풀어내고 있지만 책 전체가 씨줄과 날줄처럼 조직돼 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읽어야 할 책이기도 하다. 한 번 읽고 저자의 의도를 고스란히 읽어낼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어려움의 핵심은 바로 앎을 잘못 아는 데, 앎을 모르는 데 있다. - P. 279 

결국 이 책은 우리가 이제까지 확실하다고 믿어왔던 것들에 대한 의심을 통해 가장 인간다운 것 중의 하나인 ‘앎’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책이다. 새로운 관점과 세계인식으로부터 또 다른 미래가 펼치지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이 세상 너머의 세상과 나와 우리를 넘어 선 존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10306-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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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원자 - 세상만사를 명쾌하게 해명하는 사회 물리학의 세계
마크 뷰캐넌 지음, 김희봉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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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모방은 정보 수집 면에서 이득이 있지만 상식을 포기하게 하기도 한다. - P. 131

인간의 삶은 사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와의 본능적인 관계에서 시작되어 수많은 타인과의 관계와 사회제도, 규범, 문화의 틀 안에서 의식이 형성되고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존재가 인간이다. 본능적 자아에서 사회적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을 거쳐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학습되고 내면화된 습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한 방법과 태도를 배우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기술을 익히며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그래서 때로는 가치관의 혼란을 겪기도 하고 견고한 사회적 편견에 좌절하기도 하며 인생관이 바뀌기도 한다. 큰 흐름, 보수적 질서에 편입되는 과정을 우리는 어른이 된다고 말한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유를 들어 따지고 상식이 무엇인지 묻기 시작하면 피곤한 사람으로 낙인 찍힐 우려가 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람들에 맞서 제도와 시스템을 고쳐나가려는 노력은 외롭고 힘겨운 싸움이 되기도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는 한 작은 모래 한 알 움직일 수 없을 때도 있다. 그것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힘과 삶의 태도의 문제다.

인간 개개인은 전체 사회에서 볼 때 작은 원자에 불과하다는 놀라운 발상. 마크 뷰캐넌의 『사회적 원자』는 물리학의 잣대로 인간과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이다. 개인적인 삶의 태도와 결합되어 읽는 내내 색다른 감동을 안겨준 책이다. 객관적인 평가는 차치하고라도 이 책은 새로운 시각을 얻고 사유 방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어떤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은 개인마다 다르고 사회 현상에 대한 견해도 제각각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것은 독특한 관점이나 주관적 견해가 아닌 경우가 많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가의 문제와 나에게 어떤 이익이 주어지는가의 문제가 결합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물질세계는 명쾌하게 해명되었을까? 과학자들은 여전히 원자를 중심으로 구성된 세상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불규칙한 움직임과 알 수 없는 흐름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변화가 단지 물질세계만의 문제는 아니다. 인간을 하나의 원자로 본다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어차피 사회라는 거대한 조직 안에서 인간은 나름의 법치과 시스템 안에서 움직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나름대로 그들의 생각과 행동과 변화의 패턴을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물리학으로 사회를 해석하려는 시도가 충격적일 만큼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절대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진 사람들의 경제 행위와 예측 불가능하고 불합리한 심리,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타인을 모방하고 자신의 판단을 미루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는 오직 알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론 물리학을 전공한 저자는 물리학의 복잡한 이론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물리학의 원리가 사회를 해석하고 인간을 분석하는데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치밀하게 파헤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은 결국 인간에 대한 물리학적 평가에 불과하다. 인간은 사회적 원자다. 수많은 사회 현상들을 토대로 그것이 어떤 패턴을 가지고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은 사람들의 오래된 관심사이다. 이 책은 그것을 탐구하려는 목적으로 인간의 심리와 행동을 분석한다.

단순한 호기심이나 물리학자의 사회학 들여다보기가 아니라 다양한 사회 현상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이고 거꾸로 사회적 원자인 인간을 통해 사회를 파악하려는 시도이다. 사람이 아니라 패턴을 통해 인간의 심리와 행동 그리고 사회의 흐름을 해석하는 과정이 어떤 인문학 서적보다도 흥미롭다. 저자의 통찰력은 실제 사례를 통해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그것을 물리학의 세계에 견주어 분석하는 데서 얻어진 듯하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수많은 심리학, 철학, 사회학, 문학의 주제로 다루어졌던 이야기들이 하나로 모아질 수도 있고 다양한 모습으로 파생될 수도 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하지만 이 책이 모든 인간과 사회의 비밀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할 지도 모르는 노력들이 작은 결실을 맺고 그것이 또 다시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다는 진지한 성찰과 고민만으로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에 열광했던 독자라면 이 책은 본격적으로 물리학이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해 보기 위해 반드시 읽고 싶어질 것 같다. 저자는 이 책의 말미에서 ‘진실’을 이야기한다. 세상의 진실, 사회의 진실 그리고 개인의 진실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과 행동 그리고 패턴과 흐름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우리는 ‘과거의 지혜’를 되살려 흄과 스미스의 시대 사람들이 높이 쳐들었던 횃불을 이어받아, 진실이 무엇이든 그 진실을 찾을 수 있다는 낙관과 확신으로 세계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 P. 255

독일의 극작가 고트홀트 에프라임(Gotthold Ephraim Lessing, 1729~1778)이 1778년에 남겼던 말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계속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라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정직한 노력에 따라 가치가 매겨진다. 사람의 힘을 늘리는 것은 소유물이 아니라 진리 탐구이며, 이것을 통해서만 인간의 완성에 끝없이 다가갈 수 있다. - P. 255


110227-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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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그만두는 방법 - 국가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과 문화
니시카와 나가오 지음, 윤해동 외 옮김 / 역사비평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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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행위가 습관이 되고 버릇이 되고 생활의 일부가 되다가 때로는 책이 일이 되고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기도 하고 책이 또 다시 다른 책을 낳기도 하는 뫼비우스의 띠를 걷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책이 인연이 되어 만나는 사람도 많다. 나이답지(?) 않게 생각이 깊고 넓은 겨울길님은 이제 읽는 단계를 넘어 자연스레 글쓰기의 단계로 넘어간 듯싶다. 두 번 만남이 모두 인상 깊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일상사는 물론 삶의 방법과 태도까지 즐겁고 유쾌하며 긴 여운이 남는 대화는 다음 만남을 기다리게 한다. 또 한 분의 이웃 소나기님은 느린 호흡으로 산책하듯 책을 즐긴다.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가 좋고 타인의 글을 모방하거나 현학적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서도 생각과 삶을 통해 책을 받아들이고 녹여내는 통찰력을 지닌 분이다. 꽤 긴 시간동안 블로그에 책에 관련된 글을 올렸으나 책 선물을 받은 건 처음이다. 일면식도 없는 분과의 소통과 작은 인연이 감사할 뿐이다. 연초에 소나기님이 보내온 두 권의 책 중 첫 번째 책을 읽었다.

니시카와 나가오의 『국민을 그만두는 방법』는 작고 짧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는 역사책이다. 좋은 책은 당연히 훌륭한 저자를 전제한다. 서문에서 『국경을 넘는 방법』의 속편이라고 밝히고 있는 이 책은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 학자의 깊은 사유와 역사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준다.

자극적인 제목으로 독자를 현혹하는 책이 아니라 ‘국민’의 개념과 의미부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하는 책이다.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 과정을 이해하고 있는 독자라면 책의 의미와 내용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으리라. 국가 지배이데올로기로서의 문명과 문화의 차이는 무엇인가.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이 두 용어의 차이를 이해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굳게 믿고 있는 문명과 문화의 차이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된다. 우리가 한 나라의 문화라고 명명하는 것들에 대한 고찰, 하나의 문명권이라고 인식하는 것들에 대한 반성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성찰이다. 한 나라의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금메달 시상식에 울려 퍼지는 애국가에 눈물 흘리는 태도를 다시 생각해 보자.

거기에 민족이 결합되면 더욱 복잡한 양상을 보여준다. 민족이란 개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심했듯이, 베네딕트 앤더슨이 ‘상상의 공동체’라고 명명했듯이 문화만큼 모호한 개념이기도 한 민족이라는 개념은 곧바로 문화와 연결되는 것은 일종의 만들어진 이데올로기는 아닌가. 저자는 이 개념을 일본인과 일본문화론에 적용시키고 있다.

글로벌 시대에 접어들었다. SNS는 지구를 하나로 묶고 있다. 아이폰 오카리나 어플의 경우 놀랍게도 전세계 곳곳에서 오카리나 연습을 하는 사람들의 소음에 가까운 소리들을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다. 인종과 민족을 넘어 문명과 문화 그리고 민족의 구분은 또 하나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것이 또 다른 구별짓기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역자 서문의 인상 깊은 부분 하나.

무릇 독서라는 행위는 ‘계발’에 그 핵심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명 개념은 문명 간의 위계성, 혹은 보편의 우월성을 논의의 전제로 삼습니다. 그러나 문화 개념은 개별성을 전제함으로써 각 문화의 특수성이나 차별성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110224-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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