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죽고 싶은가? - 첨단 의학 시대에 우리가 알아야 할 죽음의 문화
미하엘 데 리더 지음, 이수영 옮김 / 학고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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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과 끝

 

모든 에는 시작이 있을까. 생명의 기원, 우주의 근원, 세상의 시작은 언제 어디에서부터일까.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연속적인 흐름을 분절시켜 놓은 인간의 시간 단위. 만남은 이별을 전제로 하듯 탄생은 죽음을 예비하고 시작은 끝을 맞이한다. 어느덧 시작과 끝이 아니라 끝과 시작이 맞닿는 시간이 되었다.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된다. 인위적인 인간의 시간이든 편리에 의한 단위이든 한해는 저물고 새해는 밝는다.

 

무한 반복되는 시간과 달리 생명을 가진 것들은 탄생, 성장, 소멸을 반복한다. 개체는 계통발생을 반복하며 다음 세대에게 유전자를 남긴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그 흔적들이 시간을 견디고 또 변화하며 이전의 흔적들을 지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하루에도 수많은 세포들이 죽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손발톱이 자란다. 말하자면 한 우리의 존재 자체도 매일 매일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일을 반복하다가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

 

인간이 만든 모든 사물과 제도도 마찬가지다. 만들어지고 사라지고. 그렇게 이룩한 문명은 세월을 견디고 인류의 문화가 되고 지식으로 축적되고 세상을 변화시킨다. 그 목적과 방향에 대한 무수한 철학적 고민과 무관하게 우리는 오늘을 살고 세계는 존재한다. 시작과 끝은 매 순간 반복되며 그 모든 의 시작은 알 수 없으나 그 은 예정되어 있는 것만 같다. 그러한 무지(無知)의 지()를 얻기 위해 인간은 종교와 철학을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모든 세계와 무관하게 한 인간의 탄생은 죽음과 더불어 모든 것을 소멸케 한다. 주체적인 를 확인하고 세계는 인식하는 순간부터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세계는 내가 존재하는 순간에만 존재한다는 좁은 의미의 존재론이 가능하다. 이전의 시작과 끝은 무의미하며 내 죽음과 함께 모든 세계는 점등된다.

 

죽음, 존재의 소멸과 또 하나의 세계

 

인간의 죽음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졌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태도와 인식방법, 장례절차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지 않은가. 동양문화에서는 죽음을 터부시하는 오랜 전통에 따라 여전히 삶이 끝나는 순간 죽음이 시작된다는 불연속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삶과 죽음이 하나이며 삶의 그림자가 곧 죽음이라는 연속적 세계관을 가진 문화와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죽음은 통곡의 대상이며 건너고 싶지 않은 두려움의 강이다.

 

김열규는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에서 한국인에게 죽음은 너무 먼 곳에 있다는 사실을 역사와 문화적 전통을 통해 확인시켜 준다. 또한 최준식의 죽음, 또 하나의 세계한국죽음학회창립 이후 근사체험을 통해 삶과 다른 영역으로서의 죽음에 대해 문화와 종교적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임사체험 (), ()은 세계 각국의 임사 체험자를 면담하여 동서양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통해 사후세계에 대해 실증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에 비해 독일인 의사 미하엘 데 리더의 우리는 어떻게 죽고 싶은가?는 매우 현실적으로 읽힌다. 앞서 언급한 책들이 시대와 문화 혹은 임사체험자들을 통해 죽음 자체에 대해 성찰하고 있다면 이 책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맞이해야할 죽음에 대해 다루고 있다.

 

생명을 아주 짧은 시간 연장할 수 있다 해도, 1퍼센트의 가능성만 있어도 치료를 하려 드는 것이 의료계의 일상적인 형태다. 그러나 때로는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는 미명 아래 엄청난 불행을 안겨준다. - 25

 

30년간 응급의료 전문가로 일하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과 태도에 대해 깊이 고민한 저자의 생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문장이며 이 책의 화두가 되는 생각이다. 생명 연장의 꿈은 인간의 본능이다. 살고 싶다는 기본적인 욕망에서 출발하는 의학은 우리에게 좀 더 긴 삶의 시간을 선물한다. 그러나 끝까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생명을 연장하는 것만이 옳은 일인가.

 

우리에게는 인간답게 죽을 권리, 고귀한 삶의 연장선에서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할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첨단의학 시대에 살면서 인간의 생명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연장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떻게죽고 싶은가의 문제는 우리에게 깊은 고민을 남겨 놓았다. 넓은 의미에서는 안락사의 문제까지도 언급되고 있는 이 책은 소극적 안락사에 대한 고민과 일부를 공유한다.

 

정확한 기준을 마련할 수 없으나 소생 불가능한 뇌사, 고통만이 남아있는 치유 불가능한 질병 등 세상에는 오로지 죽음만을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의사들이 단 하나의 목적이 생명 연장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도 충분히 논의해야할 문제들을 제기한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의학적으로 심장사와 뇌사의 의미를 살펴보고 우리가 죽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먼저 숙고해보자. 임종을 앞둔 환자에 대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환자에 대한 죽음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간병을 받으면서도 비참한 죽음을 맞는 사람들, 통증 치료와 죽음의 문제, 완화의학의 경계 등 죽음에 이르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애매한 경계와 논쟁들이 독일 사회를 배경으로 진지하게 설명되어 있는 이 책은 의료복지가 제대로 갖추어진 선진국 의사의 배부른 투정으로 볼 수는 없다. 기초의약품이 없어 하루에도 수백 명씩 죽음을 맞이하는 아프리카의 현실과 동떨어진 이 책은 또 다른 측면에서 우리에게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인간답게 살다가 품위 있게 죽고 싶어 한다. 하지만 가족의 태도, 의사의 결정, 사회적 제도에 따라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선택권이 없을 수도 있다. 환자와 가족, 의사만 합의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이 책에서는 풍부한 사례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측면에서 사람답게 죽는 방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대책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 가꾸고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태도는 건강한 우리들의 삶을 위해서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다.

 

 

2011123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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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삶이 만나는 글, 누드 글쓰기
고미숙 외 지음 / 북드라망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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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이란 몸이 지닌 리듬과 탄성, 혹은 강밀도다. 거꾸로 말하면 과거부터 이어져 온 욕망과 훈련의 결정체, 그것이 곧 나의 몸이다. - 12

 

펜과 칼 그리고 혀

 

The pen is mighter than the sword. 기억도 가물가물한 영문법 책의 예문으로 추측한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격언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육체와 영혼으로 나누어 생각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때로는 육체적 고통보다 정신적인 고통을 견딜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영혼을 지배하는 말과 글은 인간이 사용하는 두 가지 종류의 언어다. 그러면 말과 글은 어떻게 다른가. 아니, 어떤 것이 더 치명적인 상처를 낼 수 있을까. 세 치 혀를 함부로 놀리는 일을 경계하고 그 두려움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것은 사실과 진실을 구별하지 못하고 팩트와 소문을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즐기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 때문인지도 모른다.

 

말과 글의 가장 큰 차이는 기록과 상대의 유무일 것이다. 일회적으로 흘러가는 말과 달리 영원히 기록되며 반드시 다른 사람이 있어야 가능한 말과 달리 글은 혼자서도 쓸 수 있다. 그래서 글쓰기는 자신과의 대면을 의미하며 반성과 성찰의 시간이고 자기 고백의 수단이다. 기본적으로 글을 쓰는 동안 내면의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나의 생각은 무엇이며 내 삶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고통스러웠던 삶의 순간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것이 글쓰기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이 아닐까 싶다.

 

고미숙과 그의 친구들(?)이 함께 쓴 누드 글쓰기, , 이라는 <감이당>의 모토가 그대로 반영된 책이다. ‘수유+너머에서 독립하여 인문의역학 공부모임이라는 <감이당>의 결과물들이 책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 책은 사주명리학과 글쓰기의 만남이다. 이름하여 누드 글쓰기라. 알몸을 드러내는 일은 누구에게나 부끄러운 일이다. 그것보다 더 힘든 일은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일이다. 고미숙, 김동철, 류시운, 손영달, 수경, 안도균은 사주팔자를 들여다본다.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는 음양오행과 더불어 인간의 몸과 기질의 특성을 결정짓는다. 미래를 점치는 일도 아니고 미신이라 할 수도 없는 사주팔자. 과연 믿을 만한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우리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가. 그리고 그것을 들여다보는데 글쓰기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독서의 최종목표는 글쓰기다. 책을 읽는 건 삶의 길을 찾는 탐색이다. 길찾기는 반드시 자신의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글쓰기란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표현형식에 속한다. 읽기와 쓰기가 하나로 이어져 있는 이 순환의 사이클이 바로 책의 매트릭스인 것. - 23

 

사주팔자와 글쓰기

 

자신이 태어난 연월일시가 네 개의 기둥이며 그에 해당하는 여덟 글자. 그 중에서도 일()에 해당하는 간지 중에서 천간에 해당하는 글자가 주인이다. 심심풀이로라도 운세나 토정비결을 본 적이 없었지만 이 책을 보면서 내 사주를 확인해 보았다. 중심글자는 신. 음양오행에 따르면 신은 음에 해당하는 금이다.

 

신금辛金()

 

날카롭고 예리한 금속이나 보석을 상징한다. 침착하고 예리한 판단력과 논리적인 언어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일을 깔끔하고 명확하게 마무리한다. 그러나 그런 만큼 예민하고 자기중심적이며 냉소적인 면이 있다.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실수를 용납 못할 정도로 엄격한 내면의 잣대가 있다.

 

여기까지 찾아보다가 덮고 말았다. 아직 누드 글쓰기를 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인가 보다. 하지만 손영달, 김동철, 수경, 류시성은 사주팔자를 풀어놓고 자신의 삶을 쓴다고미숙이 누드 글쓰기의 존재론에 대해 이야기하고 안도균이 사주명리학의 개요를 설명한 후 각각 비겁, 관성, 식상, 재성이 강한 네 사람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엮인 이 책은 위험하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라고 했을 때 요구하는 내용과 기대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고미숙과 안도균의 글을 제외하고 실제 자신의 삶을 사주명리학으로 풀어내는 누드 글쓰기를 들여다보는 일은 한 편의 소설을 보는 것처럼 흥미롭기도 하지만 타인의 생을 들여다보는 불편한 일이기도 하다. 사주명리학을 풀어내는 예문으로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통해 자신과의 대면을 시도하는 일이 얼마나 가능할 것인지는 의문이다. 읽는 사람에 따라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일 것 같은 독특함만은 인정해 줄만하다.

 

글쓰기는 시인이나 소설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몸과 삶이 만나는 글이라는 누드 글쓰기가 왜 필요한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지 모르겠다. 치유하는 글쓰기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입 속의 검은 혀가 아니라 온몸으로 누드로 글쓰기를 시작하라는 저자들의 이야기는 독자들 각자가 판단할 일이다.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거나 운명 따위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영원히 살 것처럼 사는 사람들에게 성찰과 겸손을 선물하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인생의 순환은 단선 레일 위를 유유히 달리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조건이 만나는 틈새로 새로운 복수(複數)의 길을 여는 과정이다. 인생은 그렇게 주체와 조건이 중층으로 얽혀 있는 다차원의 세계다. 넓고 평평한 도로와 비포장도로가 섞여서 나타나기도 하고, 막다른 골목과 틈새의 길이 동시에 주어지기도 하며, 갈림길인가 하면 어느새 길이 모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삶이란 알다가도 모르고 잡힐 것 같으면서도 종잡을 수 없는 것. 그러므로 눈을 뜨면 역설이요, 감으면 모순인 인생의 길들은 그 자체로 지극히 정상적인 순환의 논리 안에 들어와 있는 셈이다. 따라서 자신의 삶을 보고자 한다면 뫼비우스의 띠 같은 이 모순과 역설의 논리를 익혀야 한다. - 35

 

 

20111227-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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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구애 - 2011년 제42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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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경우, 책을 선택하는 데는 몇 가지 경로에 따른다. 다른 분야의 책도 마찬가지 경로를 따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작가의 명성, 전작의 우수성, 출판사의 홍보, 각종 문학상 수상, 주변의 추천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반인의 경우 평론집을 통해 책을 찾아 읽는 경우가 거의 없다. 더구나 한국 문학 전체의 흐름을 읽고 신진 작가와 기성 작가의 작품을 두루 읽고 그들의 신작을 적절하게 선택하거나 평가하는 일은 쉽지 않다. 최근 몇몇 통계를 보면 책을 읽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부익부빈익빈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읽는 사람은 1인당 평균 독서량이 작년보다 증가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더 줄었다. 10명 중 6명은 1년에 한 권도 읽지 않으며 베스트셀러의 집중 현상은 점점 심화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는 책 읽는 사람 입장에서 쉽지 않은 고민이다.

 

재와 빨강으로 처음 만난 편혜영의 소설 저녁의 구애는 주목할 만한 작가의 발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와 빨강에서 보여준 작가 색깔과 문장이 작가 고유의 것으로 육화될 것인지 중간에 힘을 잃어버릴 것인지 지켜보는 일은 소설을 읽는 즐거움 중 하나이다. 독자는 언제나 여러 선택지 중에서 최선을 희망한다. 합리적인 소비에 버금갈 만큼 책의 선택은 자신의 시간과 영혼에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소설 한 권 읽는데 뭐 그리 복잡할 것 있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분야별로 제대로 읽어나가고 즐기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고려할 만한 사항이 많다.

 

편혜영의 소설집 저녁의 구애에는 8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소설집은 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일정기간 동안 정리하는 의미가 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시간이 흐른 만큼 성장하고 변화하는 것은 자연스런 인간의 모습이다. 작가도 마찬가지다. 내적 변화와 외적 상황에 따라 작가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한다고 믿는다. 이 소설집은 편혜영의 한 시기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소설집일 것이다. 그것을 무엇이라 평가하든 말이다. 통상적으로 하나의 문장 혹은 몇 개의 키워드로 작품 세계를 드러낼 수도 있다. 김형중은 해설에서 그것을 동일성의 지옥이라고 표현했지만 독자들이 그렇게 읽어낼지는 의문이다. 그렇다면 편혜영의 저녁의 구애는 어떻게 읽어낼 수 있을까.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지라는 신현림의 말대로 그것은 시대와 무관하게 반복되는 일상성에 대한 도전이며 그 간극을 뛰어넘는 한숨이다.

 

동일성과 일상성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며 시찌프스처럼 무한 반복되는 일상을 견디는 일이 인간의 삶이라는 비극적 인식은 편혜영 소설의 기본 전제이다. 하지만 그 일상은 모든 사람에게 조금씩 다르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함께 생활하면서도 서로 다르게 받아들이고 반응할 수 있다. 편혜영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비틀어보아야 하는 소설가라는 직업에 충실한 듯하다. 기다릴 무언가가 있고 해야 할 일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행복이라고 한단다.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이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소설가는 행복을 말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거나 허망한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 소설의 역할인지도 모른다. 편혜영도 마찬가지다. 넓은 의미에서 편혜영의 소설은 희망 없는 시대,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적나라한 보고서로 읽히기도 한다.

 

김은 누구나 이기적이므로 누구에게든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타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 40

 

우정이라는 것은 애정의 정도와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자신에게 헌신적이거나 유익할 때에만 유효한 감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모든 지나간 일을 되새기는 과정이 그렇듯 과거의 어떤 일이 미친 결과나 상처는 아무런 파동 없이 떠올랐고 그러는 과정에서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것에 대한 서글픔과 뻔한 회한만 남았다. - 40

 

표제작 저녁의 구애의 몇 문장이다. 인간과 삶에 대한 통찰은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닐까. 소설을 읽으면서 밑줄을 치는 일은 때로 우스꽝스럽게 여겨진다. 소설보다 더 극적인 생을 사는 사람들, 현실보다 밋밋한 소설들, 사람과 책 사이에서 현실과 허구의 매트릭스를 경험하는 우리에게 책읽기는 현실에 대한 확인이며 꿈이다. 그래서 때때로 너무 상투적이고 진부해서 진심으로 여겨지지 않는 말의 홍수를 견디는 일이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얘기를 하는 동안 김은 여자에게 말한 것들이 이제껏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임을 깨달았다. 자신의 말은 모두 어디서 읽거나 누구에게 들은 얘기 같았다. 너무 상투적이고 진부해서 진심으로 여겨지지 않는 말이었다. 반면에 그래서 진심처럼 들리기도 했다. - 61

 

토끼의 묘동일한 점심산책에서 확인할 수 있는 지루함과 건조함, ‘저녁의 구애에서 보여주는 허망함과 피곤함, ‘관광버스를 타실래요?’정글짐의 낯설음과 불분명함, ‘크림색 소파의 방을 통해 확인되는 안타까움과 불안, ‘통조림 공장의 그로테스크함과 우울한 전망.

 

스타카토처럼 짧게 던져지는 문장과 모래바람이 불 듯 서걱이는 건조함은 희망없이 미래를 바라보아야 할 우리들의 모습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소설의 아이러니는 현실에 대한 풍자와 비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이렇게 시니컬하게 비틀고 무미건조하게 툭툭던지는 문체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들뜬 감정을 가라앉히고 냉정한 시선으로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생의 비의(悲意)를 확인하고 싶다면 편혜영의 소설이 제격이겠다.

 

전화를 끊으면 그는 누군가 자신을 낯선 도시로 내몰았고,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도록 공교히 음모를 꾸몄으며 자신은 순진무구하게도 그 유혹에 쉽게 넘어가버렸다는 생각을 했다. 늘 구군가에 의해 설계된 인생을 살아온 느낌이 되살아나면서 화가 났다. 자신을 통제하는 대상이 있다는 생각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그 통제에 안도감을 느낀다는 것 때문이었다. - 167

 

 

2011122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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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각자는 자신의 경험과 기억 전체가 한 단위를 형성하며, 그 단위가 다른 어떤 사람의 단위와도 다르다는 명백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 단위를 라 부른다. 과연 그 는 무엇일까? - 148

 

과학은 진술한다’. 과학의 유일한 목표는 대상에 대해 옳고 적절하게 진술하는 것뿐이다. 과학자가 강요하는 것은 오직 두 가지, 진실과 성실뿐이다. - 194

 

물질세계는 자아, 즉 정신을 배제함으로써만, 제거함으로써만 구성될 수 있었다. 정신은 물질세계의 일부가 아니다. 그러므로 정신이 물질세계에 작용을 가할 수도 없고 물질세계의 어느 부분이 정신에 작용을 가할 수도 없다. - 196

 

세계는 내게 단 한 번 주어진다. 존재하는 세계가 주어지고, 또 지각되는 세계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관과 객관은 단지 하나이다. 물리학이 이룩한 최근의 성과로 주관과 객관 사이의 장벽이 무너졌다는 말은 옳지 않다. 애초부터 그 장벽은 존재하지 않았다. - 208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생각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만들 뿐이다.” 자연적인 사건은 그 자체로 좋지도 나쁘지도 않으며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다. 가치는 찾아볼 수 없으며 특히 의미와 목적을 찾아볼 수 없다. 자연은 목적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 226

 

이런 이론화 과정은 우리가 사실들을 질서 있는 패턴으로 기억하는 데는 매우 유용하지만, 실제 관찰과 그로부터 나온 이론 사이의 구분을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실제 관찰은 항상 감각이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이론이 감각을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연한 얘기지만 이론은 감각을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 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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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란 무엇인가.정신과 물질 궁리하는 과학 4
에르빈 슈뢰딩거 지음, 전대호 옮김 / 궁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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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각자는 자신의 경험과 기억 전체가 한 단위를 형성하며, 그 단위가 다른 어떤 사람의 단위와도 다르다는 명백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 단위를 라 부른다. 과연 그 는 무엇일까? - 148

 

19449월에 쓴 에르빈 슈뢰딩거의 서문이 낯설다. 67년이라는 시간의 간극 때문이 아니라 그간 상전벽해 해버린 과학의 발달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의 이론 물리학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막막하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이론적 정의보다 우선 그 의미를 생각하는 버릇 때문에 쉽게 답을 떠올리기 어려운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는 슈뢰딩거 방정식을 발견하여 파동역학을 수립하고 물질의 파동이론과 양자역학의 한 축을 담당한 공으로 193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으며 말년에 과학철학에 몰두했다.

 

과학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생명은 무엇일까. 더구나 생물학자가 아니라 물리학자가 던지는 호기심은 근본적이고 원론적인 질문이다. 살아있는 세포의 활동과 역할을 고찰하는 일은 단순히 환원주의 입장에서 원자와 분자 수준의 물질을 탐구하는 일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2500여 년 전부터 철학자들이 했던 고민과 현대 물리학자들의 고민이 근본적으로는 달라진 게 없다. 세상은 무엇으로 만들어졌으며 인간의 생명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

 

그 수많은 질문 중에 하나는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과학자와 철학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궁구하게 만든다. ‘DNA 이중 나선 구조를 밝히는 과정을 재미있는 소설처럼 풀어낸 제임스 왓슨의 이중 나선에 소개된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일단 재미가 없다. 과학자들이 극찬하는 고전이면서 많은 연구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책이고 제임스 왓슨 때문에 읽게 됐지만 이중 나선처럼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다. 그러고 보면 최재천이나 제임스 왓슨처럼 재미있고 쉽게 전달할 수 있는 글쓰기 능력은 그들을 빛나게 한다.

 

이 책은 궁리하는 과학 시리즈 네 번째 책으로 정신과 물질을 함께 묶었다. 두 권을 한 권으로 묶는 데는 분량의 문제 뿐 아니라 내용의 흐름도 고려했을 것이다. 옮긴이 전대호의 말대로 생명의 본질에 대한 탐구는 자연스럽게 정신과 물질의 관계를 살펴보는 내용과 연결된다.

 

우선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전체 7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전 물리학의 접근 방법에서 시작하여 유전의 매커니즘과 돌연변이, 양자역학적 증거를 살펴 본 후에 질서와 무질서 그리고 엔트로피를 통해 생명의 물리학 법칙들을 점검한다. 생명은 일정한 계통에 따라 순차적으로 개체가 발생하는 기계가 아니다. 20세기 중반까지 밝혀진 과학의 이론에 입각해서 생명의 본질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는 슈뢰딩거의 이야기는 전문지식이 없어도 들어볼 만하지만 역시 쉽게 이해되거나 재미 있지는 않다.

 

오히려 정신과 물질이 이해가 빠르다. 과학이 아니라 철학에 가까운 이야기로 가득한 정신과 물질은 유물론과 관념론의 논쟁처럼 어디까지 혹은 무엇을 인식하느냐에 따라 우선순위도 달라지고 영역도 분리된다. 정신은 무엇이며 그 정신을 만들어내는 것은 무엇인가. 물질은 객관화 될 수 있는 것인지 또 그것이 정신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가만히 들여달 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한 권에 묶여 있어 자연스럽게 두 권을 함께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대신 개념적인 용어와 이론들이 들장하기 때문에 마음을 단단하게 먹어야 할 책이기도 하다. 대상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나열하거나 하나의 현상을 밝히는 책이었다면 고전이 되었을 리가 없다. 모든 고전은 궁극적인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그 질문은 시간을 견뎌내며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고 정답은 없지만 언제나 진지하게 고민할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자연은 위대하다. 이 명제 앞에 나약한 인간은 고개를 숙이고 그 신비로움에 대한 경외감에서 종교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이 발달하면서 과학기술은 눈부시게 발달했으며 지구상에 가장 오만한 생명체가 되었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하다. 선악이 없으며 인위가 없다. 돌연변이 조차도 하나의 흐름이며 생명의 신비에 해당한다. 그래서 자연은 목적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는 슈뢰딩거의 성찰은 생명과 정신과 물질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에 대한 출발이다. 목적은 없지만 본능적인 호기심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자연의 일부인 생명이란 무엇인지 여전히 탐구 중이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생각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만들 뿐이다.” 자연적인 사건은 그 자체로 좋지도 나쁘지도 않으며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다. 가치는 찾아볼 수 없으며 특히 의미와 목적을 찾아볼 수 없다. 자연은 목적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 226

 

 

201112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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