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의 거짓말 - 무엇이 우리의 판단을 조작하는가?
마이클 캐플런 & 엘런 캐플런 지음, 이지선 옮김 / 이상미디어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생각 없이 존재하는 것은 어리석음이 아니다. 그것은 짐승과 연체동물 그리고 신들의 달콤하고도 즐거운 어리석음일 것이다. 하지만 생각을, 그것도 어리석은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 앙리 드 몽테블랑 <타르네>

‘사람들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도 모자라 실수를 통해 무엇을 배우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면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에 어떤 내용이 전개된다 할지라도 평소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문장으로 표현한 작가의 글을 읽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지는 책들의 방향과 내용은 그 시대를 상징한다. 인간의 뇌와 심리에 관한 책들이 최근 몇 년간 출판의 한 축을 이루는 듯하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믿지 못하고 타인의 심리가 그만큼 궁금하다는 반증이다.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동물이라고 믿고 싶지만 인간의 판단과 행동은 그렇지 못할 때가 훨씬 더 많다. 컴퓨터처럼 논리적이고 정확하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싶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꾸준한 노력에 따라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합리적인 판단력과 이성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지만 훈련만으로 길러질 수 없는 능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뇌의 거짓말』은 인간의 수많은 ‘실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이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것이라면 심리 치료를 받아야겠지만 당황스럽고 어이없는 것이라면 원인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저자는 인류의 역사 자체가 ‘비이성’과 함께 해 왔다는 사실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철학의 역사를 들여다보아도 신뢰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끝없는 탐구와 의심으로부터 인간의 이성이 발달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는 곧 계몽과 희망의 길찾기였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진화심리학이나 행동심리학으로부터 경제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생각을 분석하는 데 더욱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완전한 인간은 생각할 수 없겠지만 이렇게 생각의 오류를 찾아 헤매는 동안 우리는 조금 더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인류가 저질러온 실수에 대해 반성의 기회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생각의 패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이해하고 그 함정을 살피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끝없이 이어지는 실수의 원인을 지적한다. 우리가 ‘실수’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일상적으로 하는 행동에 어떤 오류가 있는지 지적하고 그것의 원인이 무엇인지 밝히는 일은 실수를 통해 무언가를 배우기 위함이다. 인간의 생각과 행동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그것은 오랫동안 축적되어 온 경험에 근거한다고 믿지만 사실 그것이 그리 믿을만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 하지만 ‘뇌’는 늘 거짓말을 한다. 스스로를 속이고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러한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이 책은 적절한 도움을 준다.

지식은 무지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 - 206쪽

넘쳐는 지식과 정보 사이에서 우리는 때때로 길을 잃는다. 하루에 벌어지는 일과 쏟아지는 정보들은 한 순간도 우리의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한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읽어내고 발빠르게 적응하는 것이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시대가 되었다. 그렇게 정확한 정보와 통계자료, 축적된 노하우와 지식을 바탕으로 판단하여 어떤 일을 결정하고 인생을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의 함정에 빠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너무 똑똑해서 멍청해지기 시작한 듯 인간은 하루에도 몇 번씩 실수하고 후회하고 경험하고 배운다. 하지만 그 시행착오도 우리의 ‘비이성’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인지함정에 빠져 왜곡된 현실을 보고, 순간적으로 판단 착오를 일으키며, 집단적 편견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때때로 혼란스럽다. 도대체 어떤 것이 옳은 것이며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인가.

도덕적 가치 판단은 모든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삶의 태도와 방법을 결정짓는 것인지도 모른다. 신경과학, 행동경제학, 진화생물학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인간의 실패와 좌절을 반추하며 가장 ‘인간적인’ 인간의 모습을 조명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냉정하다. 여러 분과학문에서 다루어진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조합해 놓고 있기 때문에 위에 언급한 분야의 책을 보았거나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챙겨보아야 할 책이다.

하지만 문제는 남는다. 현상에 대한 분석과 정확한 해석만으로도 충분한 경우가 있지만 인간의 문제만큼은 정답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올바른 길과 대책을 명확하게 제시하지는 못한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다양한 논의와 문제제기를 확인하고 우리의 모습을 성찰하는 것이 끝없이 반복되는 실수와 시행착오로부터 무언가 한 가지를 건질 수 있는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그 다음은 각자의 몫이다. 인류의 역사와 인간에 대한 저자의 맺음말은 그래서 새겨 둘만하다.

우리는 무언가를 추구하기 때문에 실수하며, 가장 멀리 도달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오히려 쉽게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의 이야기는 신학이나 생물학을 통해서가 아닌 역사를 통해 전해진다. 역사는 우리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분야지만, 우리의 결론들이 진실하다는 걸 입증할 수 없는 분야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작위성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며, 그 세상에 의미를 주입하려고 해쓴다. - 386쪽


11041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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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 버트런드 러셀의 실천적 삶, 시대의 기록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박병철 해설 / 비아북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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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개인적인 꿈과 사회적인 꿈을 추구하며 살아왔다.
개인적으로 고귀한 것, 아름다운 것, 온화한 것에 도움이 되며,
통찰의 순간들을 통해 갈수록 세속화되어가는 시대에 지혜를 제공하는 것을 꿈꾼다.
사회적으로는 개개인이 마음껏 성장하는 사회, 증오와 탐욕과
질시가 자랄 토양이 없어 죽어버린 사회가 창조되는 모습을 꿈꾼다.
나에게는 이런 믿음이 있고, 제아무리 참혹한 세상도 나를 흔들어대지 못한다.

역사에 명멸했던 수많은 철학자들을 떠올려본다. 철학사에 족적을 남긴 사람들과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린 철학자들 중에 버트런드 러셀처럼 실천적인 삶을 기록했던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다. 학문적으로도 일가를 이루고 시대를 기록하며 사회 구성원으로 자신의 생각을 실천하고 그 변화를 위해 노력했던 철학자는 많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러셀을 읽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새로 번역된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는 에그너 교수가 편집한 ‘러셀의 베스트’이다. 1872년에 태어나 1970년 98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70여권의 방대한 저서를 남긴 러셀의 글 중 정수를 모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으니 어지간한 러셀의 사상과 철학을 일괄할 수 있는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정치, 심리, 종교, 교육, 성과 결혼, 윤리 등 여섯 개 분야로 나누어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목소리를 높였던 러셀의 면면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엮었다. 『서양철학사』에서 ‘노벨상 수상 연설’의 내용에 이르기까지 러셀은 인간 이성의 합리성을 의심치 않았던 철학자로 이해된다. 따라서 윤리학은 러셀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분야다. 서양 사상의 근원인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러셀의 인생을 뒤흔들었다. 강단의 평온한 철학자를 거리로 나서게 한 이유를 살펴보면 종교가 아닌 인간의 편협한 사고와 아집 때문이라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어쨌든 러셀은 평생 대중적 글쓰기, 즉 쉽고 편안하면서도 풍자와 위트 넘치는 문장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죽을 때까지 매일 3천 단어 이상의 글을 쓴 것으로 유명한 러셀은 여전히 글쓰기의 전범으로도 삼을 만하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철학자의 문장이라고 해서 빛이 날만큼 눈부시게 현란하지 않다. 번역문을 통해 그 진가를 확인하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특유의 기지와 풍자가 번뜩인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를 거치면서 급변하는 인류 역사의 현장을 목도하면서 철학자는 불변하는 철학적 진리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깨달았을까. 생각은 갈피갈피 흘러가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이다. 하지만 러셀의 글은 하나의 주제와 일관된 흐름으로 읽는 사람들에게 긴 여운과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다.

“인도주의를 기억하라.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무시하라”

하지만 아쉬운 점은 짤막한 호흡이다. 하나의 주제와 연관된 러셀의 방대한 저서 중 일부분 만을 발췌해서 실었기 때문에 러셀의 저작을 어느 정도 읽었거나 집중력 있게 흐름을 따라가지 않으면 수박 겉핥기에 불과할 수도 있다. 당대의 사회를 이해하고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만이 아니라 시대를 꿰뚫는 통찰력과 철학적 사유가 필요한 게 아닌가. 이 책을 즐기기 위해서는 세계사의 급박한 흐름뿐만 아니라 시대정신을 읽어낼 필요가 있다. 또한 러셀의 저작들을 어느 정도 섭렵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쉽고 편안한 에세이들을 읽다보면 러셀의 유머를 통해 고뇌까지 느껴지는 듯하다.

백 년 가까이 긴 세월을 살았다면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그리고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게 되지 않을까. 엉뚱하게도 러셀의 하얀 머리칼을 떠올리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겨우 인생의 출발선에 서 있는 십대, 결혼을 앞둔 신혼 부부, 중년의 사십대 그리고 황혼녘에 선 사람들에게 인생은 무엇일까. 나이가 인생을 말해주지는 않지만, 러셀의 글을 읽으면서 나의 존재와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세상에 대한 나름의 생각들을 정리해 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존경하는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이렇게 말했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 러셀, <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246쪽


11041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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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중독자의 고백
톰 라비 지음, 김영선 옮김, 현태준 그림 / 돌베개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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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중독(中毒).
; 독으로 지칭되는 유해 물질에 의한 신체 증상인 중독(intoxication, 약물 중독)과 알코올, 마약과 같은 약물 남용에 의한 정신적인 중독이 주로 문제되는 중독(addiction, 의존증)을 동시에 일컫는 말.

‘미친다’는 말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부정적인 뉘앙스로 정상에서 벗어난 말과 행동을 의미하기도 하고 때로는 열정과 몰입의 경지를 일컫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미쳐야[狂] 미친다[及]는 말이 있듯 나는 어디에 미친 사람들이 좋다. 나도 늘 어디엔가 미쳐 살고 싶다. 대부분 사람들은 중용을 지키고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침묵이라는 비겁한 방법과 양시론[兩是論]이라는 적절한 처세술로 살고 싶지 않다. 그러니 때때로 오호(惡好)가 분명하여 입는 손해가 훨씬 많다. 까칠하고 모난 성격으로 오해받기 쉽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미친 듯 몰입하고 열정을 갖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데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마음과 몸이 편한 대로 사는 일이 결코 지속가능한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그래서 나는 여전히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블로끄의 말처럼 ‘오, 나는 미친 듯 살고 싶다’.

책에 미친 사람이 어디 한 둘이랴. 톰 라비의 『어느 책중독자의 고백』은 수많은 책중독자들의 공감을 얻었으리라. 이 책 구석구석에 숨겨진 책에 대한 애정과 증오와 환상과 현실적 고통들이 오롯이 전해진다. 군데군데 밑줄을 치며 공감하고 킬킬대고 한숨 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내게 책이란 무엇인가, 라는 생각을 하며.

이 책의 저자 톰 라비는 사전적 의미에서 책에 ‘중독(addiction, 의존증)’된 사람이다. 책중독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나 저자의 경우는 물질적 대상인 책 자체를 탐하는 사람이다. 읽지 않으면서도 책을 사고 산 책을 또 사고 그러면서도 헌책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고 쌓여가는 책 사이에서 일상의 균형을 잃어가면서도 행복하기만 하니 분명 중독이다.

물론 의학적인 측면에서 어떤 병명으로 불리거나 치료를 해야 하는 수준이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흔희 ‘mania’라고 불리기도 하는 사람들인데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될 가능성이 높지만 적절한(?) 균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저자 톰 라비는 책을 읽고 즐기는 것은 물론이겠지만 책을 수집하고 소유하는데 집착을 보이는 책중독자이다. e-book 시대를 맞고 있는 상황에서 이해할 수 없는 지나간 시절의 추억거리로 생각할 수 있겠으나 내가 아는 한 책을 읽는 사람은 e-book을 읽지 않는다. 작은 메모리에 수천권의 책을 저장하고 주머니 속에 휴대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저자의 행동과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디 책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책은 삶의 도구이며 즐거움의 대상일 수 있지만 저자는 그것과 거리가 멀어보인다. 삶의 이유이며 의미이고 전부이다. 하지만 단순히 책에 대한 소유욕만 가진 사람은 아니다. 저자는 장서광과 애서가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분리한다. 저자는 물론 애서가라고 주장하는 것이겠지만.

순수한 마음과 영혼을 가진 이들은 책에 담긴 내용 때문에 책을 사랑한다. 장서광들이 무게와 크기와 외형적인 질로 책의 중요성을 결정하고 책을 대량으로 수집해 점점 더 높이 쌓아 올리는 반면, 애서가들은 살 책을 조심스럽게 선택한 다음 거기에 담긴 내적 아름다움과 지혜를 얻기 위해 책을 음미하면서 열심히 읽는다. - P. 89

‘사람들은 인생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책읽기가 더 좋다.(로건 스미스)’라는 대목을 읽으며 고개를 주억이고 있는 나 자신에게 깜짝 놀라다. 평생 조용한 구석방에 처박혀 책만 읽고 어줍잖은 글이나 끄적이며 살고 싶은 욕망은 그 어떤 다른 욕망보다도 음험한 것은 아닐까. 누구나 자신이 꿈꾸는 삶이 있다. 그것에 도달하려는 노력이 어떠한가에 따라 인생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과정과 결과도 사뭇 다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고 있는지 돌아보자.

책중독을 해부하고 중독 여부를 테스트하고 책의 역사를 말하는 앞부분은 애피타이저에 불과하다. 장서광과 애서가, 수집광과 돌연변이들, 책 도취증, 책 읽기, 정리와 보관, 빌려주기 등 각 장의 이야기들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흠뻑 빠져들게 한다. 20여 년 전에 나온 책이기 때문에 상황이 조금 달라졌지만 기본적인 책중독자들의 성향은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혹시 책중독 경계에 서 있는 듯싶다면 한 번 읽어보시라. 물론 마지막 장 ‘치유하기’는 의미가 없겠지만.

재치있는 글솜씨와 실제 사례, 재밌는 일화들을 들려주고 있어 지루하지 않은 책이다. 다만 중간 중간 가벼움을 넘어 역겨움을 담아낸 삽화는 옥의 티다. 내용 자체가 충분히 따분함을 덜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과장된 그림들이 오히려 책 내용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불쾌함을 준다. 개인적인 느낌일 수 있지만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책중독자들에게 무슨 위로와 격려가 필요하겠는가. 결국 그들은 빵이 아니라 책을 사고 읽는 과정을 즐기는 사람들일 뿐. 그러니 오늘도 나는 열심히 사고 읽고 쓰고…….

책중독자들에게 먹는 것은 그저 씹어 삼키는 일일 뿐이다. 너무 많은 시간이 기본적인 감각을 충족시키는 데 쓰이고 있다. 우리는 빵만으로 살 수 없다. 우리는 또한 읽어야 한다. 이는 집에서 하는 식사에 해당하지만 상당 부분 외식에도 해당한다. - P. 202


110407-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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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답게 살아라 - 내 삶에 태클 거는 바이러스 퇴치법
문지현 지음 / 뜨인돌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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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누구나 그 시절을 겪었지만 전혀 다른 기억으로 남아 있는 시절이 바로 청소년기이다. 생각은 봄꽃이 흐드러지듯 만개하여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이성에 대한 관심,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하지만 상황과 능력은 아직 준비가 덜 되어 불면의 밤이 깊어만 가던 시절이다. 모든 감각은 예민해져 있고 그 어떤 사소함도 그대로 넘기지 못하는 나이가 십대다. 그래서 십대는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고 가장 고통스런 시간이기도 하다.

특히 대한민국의 청소년은 치열한 경쟁과 답이 없는 미래를 향해 오늘도 달리고 있다. 실업계든 인문계든 내가 마음먹은 삶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소수에 불과하다. 대다수 아이들은 다양한 직업과 삶의 형태를 꿈꾸지 못한다. 좌절과 패배의식을 먼저 경험하고 한 줄서기에 익숙해져 있다. 스스로 서고 혼자서 걷는 연습이 부족하며 생각하고 토론하는 힘은 더 미흡하다.

그래도 늘 ‘희망’이라는 이름의 미래를 향해 달려간다. 웃고 떠들고 낄낄거리며 하루를 보내고 먹고 마시고 잠자고 뛰는 시간이 즐거워 보인다. 그렇게 밝고 건강한 모습들로 행복한 하루하루가 십대의 특권이며 무기이고 장점이다. 무한한 가능성에 도전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권리!

하지만 그들이 늘 그렇게 즐겁고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초중고를 거치면서 네모난 틀에 담겨 벗어나지 못하는 아이들을 살펴보자. 모두가 조금씩 다르게 생겼고 조금씩 생각이 다르며 취향과 능력 또한 제각각이다. 현실에서는 몇 가지 주어진 길 안에서 그 다양한 빛깔들을 담아내려니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많이 아프다. 다치고 상처받고 좌절하며 고통스러워한다.

십대는 십대에 맞는 생각과 행동과 삶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는 없을까? 어른들의 눈과 기준으로 정해진 틀 안에서 움직여야 하는 그들의 모습은 별로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만의 생각과 처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 그렇게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어른들의 과거가 떠오르고 아이들의 미래가 조금 보일지도 모른다.

정신과 전문의 문지현의 『십대답게 살아라』는 청소년들의 아픈 마음의 갈피를 잘도 짚어낸다. 수많은 갈등과 고민은 현실에서 문제 행동으로 드러나고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그 원인들은 당연히 청소년들의 내면에서 찾을 수 있다. 심리적인 원인은 다시 외부적인 충격이나 자극에서 찾을 수 있다. 다양한 문제 상황들을 저자는 ‘바이러스’라고 이름 붙인다.

낮은 자존심 바이러스에서 게으름 바이러스, 분노, 아웃사이더, 염려, 완벽주의, 편견, 의존, 투덜이 바이러스 등 다양한 문제들을 실제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실제 심상과정에서 터득한 경험들이 녹아있다는 사실을 쉽게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방법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실생활에서 바로 적용하고 조금만 노력하면 다른 모습으로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들을 쉽고 간단한 설명과 더불어 제공하고 있다.

이 책은 한 마디로 십대가 겪는 여러 가지 문제 행동과 심리를 치유할 수 지침서이다. 간결한 분량과 쉬운 설명이 또 하나의 장점이다. 중학교 1학년 정도의 눈높이에서 접근할 수 있는 난이도와 시원한 편집으로 책이 줄 수 있는 답답함을 덜어냈고 사례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기 때문에 추상적인 느낌을 줄 수도 있는 내용을 친근하게 잘 전달하고 있는 책이다.

십대를 위한 책이긴 하지만 십대를 둔 부모와 그들을 가르치는 교사 등 십대와 함께 생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만한 책이다. 그들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변화는 시작된다. 길을 찾고 함께 걸어가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일지도 모른다. 먼저 공감과 치유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자신도 모르는 문제 한가지씩은 가지고 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그것이 콤플렉스가 되어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을 뿐이다. 언제나 시작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십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며 우리 사회의 미래라고 말한다. 늘 그들의 교육과 진로를 고민하지만 그들의 겪는 아픔과 고통과 상처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 경우가 많다. 너희들이 뭐가 부족해서……라고 말하는 순간 대화는 단절되고 소통은 불가능해진다. 이 책은 기성세대와 십대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해주지는 않는다. 다만 어른들은 아이들 몰래 이 책을 뒤적이며 그들의 고민과 상처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알면서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몰라서 화내고 짜증내지는 않았는지 먼저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한다.

왜냐하면 십대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우리들의 미래가 달라진다. 바꾸어 말하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과거 십대를 보낸 시간의 결과물이다. 그러니 십대에게 어른을 요구하지 말고 십대는 십대답게 살라고 주문하자. 아니, 어른들이 십대답게 살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미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자, 한 발자국씩 움직여 보자. 거기, 우리들의 오래된 미래가 있다.


110406-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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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384
권혁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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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모든 순간들을 즐길 수는 없다. 우리는 힘겨운 순간을 지나고 환희의 기쁨을 맛보며 평온한 일상을 보내기도 한다. 아무도 미래를 예측할 수도 없고 결과를 알 수도 없어서 인생을 부조리극에 비유하는 지도 모른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고 운명은 순간순간의 인간의 목을 조른다. 4월 훈풍에 꽃은 피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변덕이 죽끓듯한다. 또 다시 봄이 찾아오고 시간은 물처럼 흘러가고 그러는 동안 수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더 많은 이야기들이 우리의 귀를 더럽히고 떠나갈 것이다.

권혁웅의 『소문들』은 뒤틀린 인간의 마음과 생각들, 세상의 수많은 소문들이 난마처럼 뒤엉켜 있다. 아니, 그 뒤엉킴은 내가 세상을 보는 눈인지도 모르겠다. 시인은 시를 통해 통렬한 풍자와 시원스런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한다. 아름답고 섬세한 감수성을 드러내는 일만이 어찌 시의 전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의 삶이 그렇지 않은데…….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말이 있으니 이를 무족마(無足馬)라 한다 인적 끊긴 지 오래인 인가의 굴뚝을 끌어안고 살다가, 성체가 되면 지붕 위를 뛰어다니며 긴 혀로 수염에 붙은 침이나 귓속의 귀지를 핥아 먹는다 한 마리에 천 냥이나 하는 귀한 짐승이어서 특별히 이 짐승 기르는 일을 업으로 삼은 자를 말전주꾼이라 부른다 - ‘소문들-짐승’ 중에서

허허실실의 진이 개무시진이다 팔문금쇄진에는 휴(休) 생(生) 두(杜) 경(景) 사(死) 경(驚) 개(開)라는 여덟 출구가 있다 이 가운데 개문으로 적을 유인한 후에 도륙하는 진이 개무시진이다 적군이 이진에 빠지면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바닥없는 절망에 이르게 된다 - ‘소문들-진법(陳法)’ 중에서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소문들’ 연작은 전통적인 언어유희의 방법을 차용하며, 시대를 이야기한다. 이 시대가 아니었다면 쓰여지지 않았을 시가 아프게 다가온다. 시공을 초월해서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는 시만큼 당대를 이해하고 현실을 담아낸 시는 우리에게 깊은 사색의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에게 시는 무언가. 여전히 현실 속에 감추어진 속살을 드러내고 생의 이면을 들춰내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문학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살아가면서 부대끼는 수많은 일들은 정리되지 않은 채 흘러가고 그 흐르는 시간의 갈피 사이사이에 숨은 의미를 생각해 보는 일이 필요할 때 우리는 시를 읽는다. 권혁웅은 이 시집을 통해 정제된 언어와 섬세한 감수성에 기대지 않는다. 비틀고 뒤엉킨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짚어내고 시대와 현실을 뒤먹인다.

그의 심장은 목덜미 어디쯤에 있었다

언덕 위에는 기나긴 논증처럼 모텔이 서 있었다
고개를 돌렸을 때
그것은 한쪽 눈이 가느다란 빚쟁이로 보였다
구름을 대출하는 자, 선이자를 떼고
강물에 기댄 자, 지류 하나를 끌어다
제 믿음의 보증을 세울 테지만
나는 신품성사(新品聖事)도 회상도 없이
사랑하는 자의 피가 먹고 싶어서
그 사람을 당뇨 환자로 거기에 세워두었다
설탕에 켜켜이 재워둔 사람이란
인연에 대해 오래 생각하는 사람이거나
쏟아져 얼룩으로 남은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그는 사례의 하나로 불려 나와
다음 증명에서 부정될 테지만 아무것도
추증(追增)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사랑하는 자의 심장이 목덜미쯤에서
펄떡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잠은 태지(胎紙)처럼 얇아져 뒤척이다가
구겨질 거라 생각했다
언덕이 복리이자처럼 부풀어
그가 잠든 곳을 가리고 있었다

자본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 간 자리는 치유하기 힘들다. 우리의 삶은 매일매일 경쟁과 이기심으로 가득하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렇지만 미래에도 그럴 것이라고 위로하지는 말자. 인간의 삶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지만 그것이 모든 일의 변명이 될 수는 없다. 더 나은 방법을 고민하고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인간의 도리가 아닌가.

시원한 바람이 불고 청명한 달이 비치는 것 같은 담박한 인품은 시대를 초월하여 빛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때로는 시대의 ‘광풍(狂風)’ 앞에 온몸을 던질 줄 아는 기개와 어떤 상황에서도 초연할 수 있는 초연함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죽음은 모든 인간의 숙명이다. 비갠 후, 교교한 달빛 아래 맑게 빛나는 한 잔의 술을 떠올려 본다. 사위는 적막하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바다라면 또 어떤가. 권혁웅의 시는 혼탁함을 오히려 청아한 목소리로 걸러내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읽혔다.

광풍제월(光風霽月)
죽은 할아버지를 배웅하러 갔다가
할머니는 초승달에 온몸을 다 긁혀서 돌아왔다
십이지장처럼 표면적을 넓힌 할머니,
표정 없는 표정이 십 리에 걸쳤다

머리를 들어낸 자리에서 새어 나오는 한숨은
바람 소리도 흉내 낼 수 있다네
독방 안에서 촘촘하던 월명(月明)이여 폐활량과 병목 구간에서 잠간씩 빛나던 담배와 자차분한 늦은 식사여 시든 젖꽃판이 부르던 원왕생이여

저기 칠성판을 타고 할머니 강을 건너시네  

- '기록 보관소 C구역' 중에서


110403-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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