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 소리 창비시선 340
문인수 지음 / 창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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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도 시는 존재한다고 믿는다. 오규원이 말년에 발표한 시들이 적절한 예가 될지 모르겠지만 두두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인간의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도 시는 언제나 그 자리를 지켜왔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해본 사람은 안다. 인간 언어의 한계를. 그 절절한 마음과 터질 듯한 두근거림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 역도 성립한다. 감당할 수 없는 절망과 고통을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언어의 한계는 사유의 한계이고 앎의 범위가 내 존재의 범위라고 생각해 본적 있는가. 아니면 그것을 부정할 만한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 그도 아니면 시의 힘, 언어의 세계가 가진 해석의 틀을 고민해 본 적이 있는가.

 

작은 점 하나 - 이시영

 

가장 적게 먹고

적게 일하며

느티나무 가지에 깃을 묻고 잠든 새는

하늘을 차고 오를 때 하얀 새똥을

지상에 남긴다

거대한 구두 발자국이 막 닿기 전

아침 햇살에 잠깐 보석처럼 반짝이며 응결하는

보도블록 위의 작은 눈부신 점 하나

 

머리가 희끗한 두 시인이 붉으레한 얼굴로 앉아있는 테이블에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시집에 친필을 받는 일은 존경의 마음이라기보다 수많은 시간과 고민의 결과물에 대한 아름다운 찬사라고 하겠다. 이시영의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와 문인수의 적막 소리는 그렇게 내게 왔고 오랜만에 가슴을 적셨다. 오규원은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두 시인은 자신의 시와 서로의 시를 낭송하며 독자들의 가슴을 적시고 또 적셨다.

 

이 메마른 시대에 무슨 시 따위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메마른 시대에 시가 아니면 무엇을 읽는단 말인가. 눈물이 날 것 같아 끝까지 낭송을 꺼린 이시영의 어머니 생각은 문인수의 하관과 짝을 이룬다.

 

어머니 생각 - 이시영

어머니 앓아누워 도로 아기 되셨을 때

우리 부부 출근할 때나 외출할 때

문간방 안쪽 문고리에 어머니 손목 묶어두고 나갔네

우리 어머니 빈집에 갇혀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돌아와 문 앞에서 쓸어내렸던 수많은 가슴들이여

아가 아가 우리 아가 자장자장 우리 아가

나 자장가 불러드리며 손목에 묶인 매듭 풀어드리면

장난감처럼 엎질러진 밥그릇이며 국그릇 앞에서

풀린 손 내밀며 방싯방싯 좋아하시던 어머니

하루종일 이 세상을 혼자 견딘 손목이 빨갛게 부어 있었네

하관 - 문인수

이제, 다시는 그 무엇으로도 피어나지 마세요. 지금, 어머니를 심는 중……

 

창비 시선 340권과 341권으로 나란히 시집을 출간한 것도 두 시인에게는 억겁의 인연이 아니겠는가. 고등학생 때 이미 전남일보로 등단하고 대학에 입학한 한 시인의 에피소드를 듣고 며칠 후 이성부 시인의 부음을 신문을 통해 듣는 우연처럼 두 시인의 시 낭송회가 기막힌 우연은 아니었을까.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이야 비할 데 없겠지만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은 또 다른 방식으로 전하고 있다.

 

어느 문창과 여학생의 질문처럼 시인에게는 어떻게 시가 다가가는 걸까.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몸부림치는 게 아니라 이렇게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스며드는가.

 

저녁에 - 이시영

 

마른 나뭇잎 하나를 몸에서 내려놓고

이 가을 은행나무는 우주의 중심을 새로 잡느라고

아주 잠시 기우뚱거리다

 

인물에 대한 이야기 현실에 대한 고통과 아픔의 결을 살려낼 줄 아는 이시영의 시와 소멸하는 것들, 죽음에 대한 다양한 성찰을 길어올릴 줄 아는 문인수의 두 편의 시가 또 하나의 짝으로 읽힌다.

 

() - 이시영

 

강한 거센 빗줄기 사이로 어떤 뼈아픈 후회가 달려오누나

그때 내가 그 앞에서 조금 더 겸허했더라면

산 증거, 혼잣말 - 문인수

, 딸아야, 일어나!

그 엄마는 오늘 아침에 또

스물두살 아이의 방을 바라 큰 소리를 질렀다.

……

풀썩, 그 엄마의 무릎을 꺾는

, 죽음의 팔힘.

, , 죽었지……

 

태어나는 모든 것들은 사라진다. 다가오는 모든 것이 전부 떠나가듯이. 이 순간, 이 하루가 송곳처럼 예리하게 우리의 생을 찌른다. 오늘 우리의 생은 어떠했던가. 무엇을 바라 그렇게 치열하게 내달렸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는 자각 후의 짧은 생.

 

최첨단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너무 빠른 속도로 뒤에 여백을 남기는 것은 아닐까. 슬픔도 기쁨도 걷어내고 자연스럽게 스러져가는 까무룩한 소실점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죽음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루를 살아봐도 인생을 알 수 없고 더욱이 내일은 짐작조차 불가능하다. 늘어지게 잠이나 자야겠다. 그 다음은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지 않은가.

 

최첨단

 

그래, 그것은 어느 순간 죽는 자의 몫이겠다.

그 누구도, 하느님도 따로 한 봉지 챙겨 온전히 갖지 못한 하루가 갔다.

꽃이 피거나 말거나, 시들거나 말거나 또 하루가 갔다.

한 삽 한 삽 퍼 던져 이제 막 무덤을 다 지은 흙처럼

새 길게 날아가 찍은 겨자씨만한 소실점, 서쪽을 찌르며 까무룩 묻혀버린 허공처럼

하루가 갔다. 그러고 보니 참 송곳 끝 같은 이 느낌, 또 어디 싹트는

미물 같다. 눈에 안 보일 정도로 첨예하다.

 

120302-02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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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일곱 개의 고양이 눈
최제훈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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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피를 묻힌 검을 얼음 위에 꽂아두고 기다리는 거예요. 피 냄새를 맡고 다가온 늑대가 칼날에 묻은 피를 핥아 먹습니다. 그러다가 제 혀를 베여 피를 흘리죠. 하지만 차가운 금속에 이미 혀의 감각이 마비된 늑대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칼날에 계속 묻어나는 자신의 피를 핥아 먹고, 그것을 핥느라 또 피를 흘리고, 또 핥아 먹고……그러다가 쓰러져 죽는 겁니다. 저도 빙판에 꽂힌 칼날 같은 기억 한 조각을 핥다가 제 피인 줄도 모르고 흐르는 피를 핥고 또 핥다가 마침내 쓰러졌습니다. - 113

 

술이 깰 만하면 다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마지막에 그 담배로 다음 담배에 불을 이어 붙이듯 책을 읽다보면 전혀 무관한 분야의 책에서 같은 책을 인용한 것을 발견하거나 유사한 이야기를 예로 드는 경우를 발견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에스키모의 늑대 사냥이 그랬다. 그 우연이 반복되고 미세한 차이가 발견되면 그것은 필연이 되거나 결정적인 운명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시인이 아니다. 하지만 리얼리스트이기만 한 시인도 시인이 아니라고 말한 네루다의 이야기를 김용규의 철학카페에서 시읽기에서 읽고 얼마 후 이시영 시인의 강연에서 그 말을 인용하는 것을 듣게 되는 경우가 그러하다. 맥락에 따라 텍스트는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된다. 텍스트의 의미는 컨텍스트가 규정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서로 다른 상황의 유사한 텍스트들이 만들어내는 울림은 강렬하다.

 

최제훈의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을 읽다가 말하자면 수없이 기시감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사성에 기초한 지루함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고 불안한 긴장감이라고 할 수도 없다. 미스테리 소설이 가진 두근거림과 불안정한 긴장이 뒤섞여 독특한 개성을 마음껏 드러낸다. 처음 읽는 최제훈의 소설이지만 주목할 만한 작가와의 만남이었다는 생각이 들기에 충분한 소설이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산장에 여섯 명의 인터넷 카페 회원들이 초대된다. 첫 만남이고 각양각색의 나이와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연쇄살인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이들의 만남은 평범하게 시작된다. 이들을 초대한 주인만 나타나지 않은 채.

 

해설을 쓴 정여울의 말대로 스포일러가 하나도 없는 서평을 쓸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떠오를 만한 소설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최제훈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종류만 다를 뿐 영원히 풀 수 없는 미스테리, 무한 반복되는 스토리를 만들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아니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이야기를 욕망했을까.

 

집에 돌아와 문을 열었을 때

어둠 속에서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을 보았네

내가 키우는 새끼 고양이는 세 마리뿐인데

하얀 고양이, 까만 고양이, 얼룩 고양이

나는 차마 불을 켜지 못했네

 

그 하나의 눈동자를 찾기 위한 소설을 읽는 재미를 스포일러 없이 말하기는 쉽지 않다. ‘여섯번째 꿈’, ‘복수의 공식’, ‘π’, ‘일곱 개의 고양이 눈등 네 편의 중편이면서 하나의 장편으로 구성된 소설이다. 각 중편들의 내용이 겹치고 스미고 가로질러 평면이 아닌 입체를 만들어 낸다. 각각의 중편으로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재미있는 소설이다. 최제훈이 무엇을 의도했던 각각의 중편이 어떤 내용이든 독자들에게는 신선한 즐거움을 준다. 마치 스릴러 영화를 본 후의 아쉬움이 다른 중편에서 아주 조금 해소되기도 하고 그 만족감은 또 다른 미스테리로 이어진다.

 

유사한 방식의 소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소설 속의 소설가가 자신의 소설을 이야기하고 또 다시 소설이 이어지기도 하는 등 창조적 상상력이 얼마든지 발휘될 수 있는 문학의 매력은 다양할수록 좋은 일 아닌가. 전통적인 의미의 소설에서 벗어난 장르 소설들이 나름의 매니아들을 거느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최제훈의 소설이 해리포터나 본격 미스테리를 표방한 소설과 구별되는 지점은 단순한 스토리 위주의 소설이 아니라는 데 있다. 탄탄한 구성은 말할 것도 없고 표현과 문장이 뛰어나다. 작가의 땀이 손에 잡히는 소설에 환호하지 않을 독자는 없다. 더구나 이 소설을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은 각 중편마다 QR코드가 붙어 있어 최정우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데 있다. 소설을 위해 작곡과 연주가 함께 하니 듣는 즐거움과 읽는 즐거움이 배가 된다.

 

폐쇄된 미로에 갇힌 사람은,

얼마나 헤매어야 그 미로가 폐쇄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될까? -179

 

출구를 위해 미로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영원히 풀 수 없는 엉킨 실타래만큼 폐쇄된 미로는 끔찍하다. 그것이 우리 삶의 알레고리가 아닌 한 희망 고문은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절망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미로에 가두기보다 여러 군데의 출구를 마련해도 좋지 않을까. 완벽한 미스테리보다 다양하게 해석되는 텍스트가 매력적인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영화 <메멘토><인셉션>처럼 기억할 수 없는 것과 꿈 속의 꿈 같은 현실은 보는 즐거움과 읽는 재미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금 더 내밀한 고통과 깊은 한숨까지 품은 최제훈의 다음 작품을 기다려 본다.

 

120229-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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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 Philosophy + Film
이왕주 지음 / 효형출판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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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자체가 메시지임을 간파한 맥루한의 말은 여전히 모든 예술에 유효하다. , 소리, 움직임, 언어 등 예술의 도구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분명히 다르다. 그에 대한 반응 또한 제각각이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발생한 사진과 영화는 예술 고유의 아우라를 벗어던지고 대중과 일상적으로 접속한다. 발터 벤야민의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이 적확하게 짚어낸 것은 근대성의 특징일지 모른다. 동시성과 복제 가능성이 기존 예술과 배치되지만 오늘날의 예술은 규정하기조차 힘들다. 하나의 영역과 테두리를 벗어나려는 노력이 아니라 그 경계 자체가 무의미해진 시대를 살면서 우리가 향유해야 하는 예술은 무엇인가.

 

가장 대중적인, 그래서 예술이라는 이름조차 어색한 영화도 마찬가지다. 몇 년 전인가 기억조차 희미한 어느 날 새벽 독립영화관에서 영화를 한 편 보았다. 마지막 엔딩이 올라갈 때 알았다. ‘페이크 다큐멘타리먼트(fake documentary)’라는 사실을. 그때 충격은 영화의 내용과 무관하게 소름끼치는 경험이었다. 그것이 사실인가 허구인가의 문제에서 자유로워야 하는 영화조차 속임수를 쓸 때가 있다. 관객의 뒤통수를 내리치는 방법이 기막히지만 소설은 그렇지 아니한가.

삶의 가장 진지한 성찰로서의 철학과 영화의 만남이 어색하지는 않다. 영화는 모든 갈래와 만날 수 있고 모든 학문과 접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형식이 아니라 내용의 정교함과 필연성이 문제가 되겠다. 이왕주는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를 통해 철학의 외부를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 철학을 해석한다. 아니 영화에 나타난 철학적 질문에 해석을 시도한다. 말하자면 철학이 영화를 캐스팅한 것이 아니라 영화가 철학을 캐스팅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영화 <피아노>사랑은 소유하지 않는 것이라는 명제를 낳고 그 명제는 에리히 프롬을 호출한다. 지구에 인구 수만큼 다양한 형태의 사랑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진부하다. 이왕주는 영화를 해설하는 대신 그 사랑의 방식을 통해 인간을 설명한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두 종류의 인간을 구분한다. 하나는 존재지향의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소유지향의 인간이다. 존재지향의 사람들은 단지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놀라움, 기쁨, 행복을 느낀다. 그들은 길가에 피어난 한 송이 꽃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낀다. 그러나 소유지향적인 사람들은 단순히 어떤 것이 있다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 것이라야 한다. 내가 소유하고 지배하고 군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럴 수 없는 것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피어 있는 꽃이 아름다우냐 아름답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 110

 

어떤 영화를 보았느냐, 재미있었느냐는 질문처럼 난감한 것이 없을 때가 있다. 재미는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그리고 그 재미는 사람마다 다르다. 아주 오래 전 베를린 천사의 시를 후배커플에게 추천했다가 두고두고 욕을 먹은 적이 있다. 책이든 영화든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추천을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어떤 면에서 좋은가. 아니 나쁜가. 추천할 만한가 그렇지 않은가. 6년 전에 나온 책이지만 여전히 읽을 만하다.

 

매체의 특성상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신제품 때문에 지나간 영화는 재미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트루먼 쇼>, <굿 윌 헌팅>, <중경삼림>, <뷰티플 마인드>, <메멘토>, <일 포스티노>, <오아시스> 등 시간과 무관하게 다시 보고 싶은 영화들을 다시 읽는 재미가 무엇보다 컸다. 8개의 주제로 29편의 영화를 소개하며 각각의 영화와 철학자를 엮고 있는 이 책은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영화에 대한 소개서로 영화를 본 사람에게는 다시보기의 즐거움을 안겨준다. 우연하게도 몇 편의 영화를 서너 편을 제외하고 모두 본 영화였지만 잊었던 장면, 전혀 기억도 나지 않는 대사를 읽으면서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과거는 없고 오직 기억만이 있으며, 미래는 없고 다만 기대가 있을 따름이다. 존재하는 시간은 현재, 이 순간뿐이다. 우리가 사랑하고 미워하고 존경하고 질투하고 선택하고 거부하는 모든 것들이 이 현재의 지평 위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라는 것이다. 즉 삶의 시간은 오직 하나, 현재가 있을 뿐이며, 기억(과거)하고 기대(미래)하는 일들도 모두 이 시간의 지평 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현재형 사건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 132

 

<중경삼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한 대목이다. 기억과 기대 그리고 현존재에 대해 한 참이나 눈길이 머무는 문장이었다. ‘삶의 시간은 오직 하나, 현재 있을 뿐이라는 작가의 통찰에 고개를 끄덕이며 밑줄을 그었다. 추억은 사람마다 다르게 적힌다. 같은 시간과 공간을 살지만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판단하며 기억한다. 그것이 사랑이든 삶이든.

 

버리고 행복하라는 비노바 바베의 말이나 유위有爲는 무위無爲를 누르지 못하고, 억지스러움은 자연스러움 앞에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노자의 말이나 지나가는 모든 것 앞에 고개 숙이게 하는 말이다. 우리가 영화에서 읽어내는 것은 영원한 사랑이나 삶의 비극성이 아니라 현재 나의 모습이 아닐까. 스크린에 투영되는 것은 멋진 배우의 얼굴이 아니라 어두운 극장에 외롭게 앉아 화면을 응시하는 우리들의 얼굴이 아닐까. 철학은 영화를 캐스팅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모든 영화에 철학은 까메오로 출연한다.

 

사랑은 중간에서 만나는 것이다.’ 감독 파스칼 바일 리가 영화 <좋은 걸 어떡해>에서 새롭게 보여준 사랑의 정의이다. 평범해 보이는 이 정의야말로 사랑에 대한 간곡한 진실을 더 많이 담고 있지 않은가. - 354

 

12022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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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습니다 - 나를 탐험하는 방법 청소년을 위한 세상읽기 프로젝트 Why Not? 6
마르틴 라퐁 지음, 파스칼 르메트르 그림, 신성림 옮김 / 개마고원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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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앞세운 책들은 독자들에게 주목을 끌기 쉽다. 막연하게 청소년이 아니라 열일곱이나 스물 혹은 서른이나 마흔을 내세운 책들은 보다 구체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지금-여기 바로 나의 문제를 진단하거나 내게 필요한 책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특정한 시기에만 책을 읽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현재가 중요하다. 즉흥적이고 순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과거든 미래든 지금 이 순간의 삶에 미친 영향과 방향에 대해 고민한다는 뜻이다.

 

철학은 말할 필요도 없다. 철학자들의 먼지 묻은 책상 위에 놓인 책도 좋고 대중적인 철학서도 좋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 삶의 방향과 목적을 돌아볼 수 있는 책이다. 어려운 개념서를 일반인들 입장에서 쉽게 이해하고 접근할 수는 없다. 자발적인 모임이나 각종 아카데미를 찾아다니며 강의를 듣는 방법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중적인 철학서를 뒤적인다. 내 생각의 힘을 키울 수 있는 책,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책, 내 앎의 범위를 넓힐 수 있는 책…….

 

한겨레신문 다음 주제가 철학이다. 분야별로 네댓 개 주제를 정해 글을 쓰다 보니 따로 또 같이 묶일 수 있는 주제의 책들을 찾고 읽기가 쉽지 않다. 유사성과 차별성을 통해 책의 특징을 드러내고 주제를 적절하게 드러낼 수 있는 책들이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읽은 책과 비어있는 공간들을 메울 수 있는 책들을 선별해서 읽는 일이 쉽지 않다. 요즘은 열심히 청소년들의 눈높이에 어울릴 만한 철학서를 추리고 미처 읽지 못한 책들을 찾아 읽고 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읽은 책 몇 권을 정리한다. 마르틴 라퐁의 나를 찾습니다, 김성우의 스무 살에 만난 철학 멘토, 안광복의 열일곱 살의 인생론이 그것이다.

 

, 중학생 정도면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나를 찾습니다는 재미있는 그림이 곁들여져 쉽게 읽힌다. 짧은 분량과 친근한 그림으로 독자들을 편하게 해주는 장점이 있지만 내용은 그렇게 쉽게 풀어내지 못한 단점이 있다. 너 자신을 알라, 자기를 아는 방법, 알 권리 등 3부로 나누어져 있지만 소크라테스, 몽테뉴 등 철학자들의 개념과 이론들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아주 쉽고 단순하다고 볼 수만은 없는 책이다. ‘why not?’ 시리즈 중 여섯 번째로 나온 이 책은 철학의 시작인 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철학의 시작이고 삶의 출발이다. 나이, 성별, 고향, 학교, 직업, 재산, 지역이 나를 말해줄까. 나는 누구일까. 하루에도 수없이 타인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어려울 질문일까. 당신은 누구인가. 자신에 대해 말해보라. 어쩌면 가장 어려운 질문에 대한 고민이 철학의 시작은 아닐까.

 

그에 비해 스무 살에 만난 철학 멘토는 철학자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은 책이다. 사르트르와 푸코, 니체와 하이데거, 베버와 헤겔, 마르크스와 롤스가 런닝 파트너로 달린다. 김성우는 각 철학자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사상적 토대를 설명한다. 그것이 우리들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며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이야기한다. 두 명의 철학자를 하나의 주제로 묶어 이해하는 방법은 어떤 분야에서도 자주 사용하지만 그만큼 유용하다. 인류의 오래된 지혜를 전해주는 철학의 고전들을 대신 읽어주는 이 책은 철학적 개념에 대한 이해를 돕고 내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는 책이다. 더불어 내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 진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함께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안광복의 열일곱 살의 인생론은 열다섯 개의 주제에 대한 철학적 물음에 답하는 책이다. 현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부딪치는 고민과 자신의 경험을 편안하게 풀어내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신의 문제를 고민하게 만든다. 일상생활에서 겪게 되는 수많은 일들을 떠올려 보면 항상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주체적 생각과 비판적 판단능력이 없이는 세상을 살아가기 어렵다. 라캉의 말대로 남이 가진 것이나 부러워하며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철학자를 몰라도 좋고 철학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도 좋다. 문제는 삶의 목적이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 자기만의 철학이 없이는 살아가기 힘들만큼 복잡한 세상이다. 김훈은 신념이 강한 자를 믿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념이 아니라 의문이다. 스스로에 대한 질문 세상에 대한 의문들에 답을 찾기 위한 과정이 삶은 아닐까. 가볍지만 꾸준히 생각도 연습이 필요하다. 철학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늘 우리와 함께 있다. 손 내밀고 철학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120221-015~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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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카페에서 시 읽기
김용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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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리쾨르가 갈파했듯이, 하나의 작품을 해석한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존재가능성을 찾는 일입니다. ‘텍스트 앞에서의 자기 이해를 얻는 것이지요. 그것은 텍스트를 향해 자신의 고유하고 한정된 이해 능력을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앞에 겸허히 나서는 일입니다. 그럼으로써 텍스트에서 더 넓어진 자기를 얻는 것입니다. - 10

 

영화 <일 포스티노>를 본 적이 있는가. 햇빛에 반짝이는 감청색 바다와 수평선,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어촌, 밤바다의 별똥별과 부서지는 파도……. 영상매체가 주는 감동은 문자 언어와 사뭇 다르다. 세계적인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주인공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그의 전용 우체부 마리오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칠레 출신 작가의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영화화 한 작품이지만 배우들의 연기와 아름다운 자연이 만들어내는 영상이 환상적이었다.

 

이 바닷가에 사는 청년 마리오는 시인을 만나 은유를 배우게 된다. 그리고 시를 가슴에 품게 되고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시는 힘이 세다. 이 영화는 결국 네루다도 마리오도 아닌 가 주인공인 셈이다. 우리는 왜 시를 읽어야 하며 어떤 시를 읽어야 하는 것일까? 학창시절에 배운 밑줄 쫙~’이나 참고서의 깨알 같은 해석이 우리를 시에서 멀어지게 한 것은 아닐까. 시를 읽지 않고 도대체 무슨 책을 읽는다는 말인가.

 

라고 철학자 김용규는 말한다.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의 연작으로 보이는 제목의 철학카페에서 시읽기한국의 움베르토 에코라는 수식이 지나치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알도와 떠도는 사원, 다니를 통해 그런 명성을 얻었다고 하지만 철학적 사유의 깊이를 전달하는 문학을 통해 독자들을 사로잡지 않더라도 설득의 논리학이나 영화관 옆 철학카페등으로 이미 대중과의 소통을 지속해 온 저자의 신작은 이름만으로도 믿고 읽을 만하다.

 

최근 거센 바람을 일으키는 강신주의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과 비교하며 읽는다면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비교가 능사는 아니나 각각의 빛깔과 특징이 뚜렷한 철학자들의 대중과의 만남은 지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깊이와 넓이를 통해 다양한 방식의 문화읽기가 가능해진다고 믿는다. 철학은 할 일이 많고 나름의 영역을 확보한 철학자는 많지 않다. 게다가 글쓰기 능력을 겸비한, 대중적인 철학자와 동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에게 행운이라고 말하고 싶다.

 

철학카페에서 시읽기는 두 가지 측면에서 재미있다. 하나는 저자의 스토리텔링 능력이다. 하나의 주제를 편안하게 풀어내고 소리 없이 밀고 나가는 힘은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책장의 속도로 감지된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재미있게 빠져들었다면 그 능력은 증명되는 셈이다. 또 하나는 시에 대한 애정과 시를 해석하는 깊이다. 철학적 관점에서 시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생각하면 이성과 논리를 바탕으로 분석주의 관점으로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김용규는 가슴으로 받아들인 시를 친절하고도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철학과 시의 만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철학자가 시를 어떻게 읽어내느냐가 문제다. 이 책은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책이다.

 

베아트리스를 온통 뒤흔들어 마리오를 사랑하게 만든 시의 기본적인 힘은 메타포(은유)’. 봄날, 서점에서 시집을 안 사면 뭘 사느냐고 묻는 김용규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책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편안한 마음으로 시의 즐거움을 맛보고 싶은 독자에게 맞춤한 이 책은 저자의 바람대로 젊은이여, 시를 읽자고 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최승자의 청파동을 기억하는가에서부터 정호승의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를 거쳐 신경림의 을 지나 진은영의 ‘70년대과 오규원의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에 이른다. 김수영을 비롯해 김혜순, 정현종, 강은교, 마종기의 시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시의 대표적인 시인들의 시를 통해 에리히 프롬부터 들뢰즈까지 수많은 철학자를 만나게 되는 책이다. 마치 화려한 백화점에 진열해 놓은 명품들만 모아 놓아 눈이 부실 정도다. 자칫 시적 허영(이런 말이 성립될지 모르겠으나)에 들뜬 사람들에게는 더 없는 성찬이 될 것이다. 기막힌 뷔페에서 여유있게 즐기는 만찬을 누가 마다하겠는가.

 

하지만 이 책은 수동적으로 남이 읽어주는 시를 즐기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궁극적으로 스스로 시를 읽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어야 한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평생 시심 가득한, 메타포를 가지고 놀 수 있는 삶이 된다면 저자가 이 책을 쓴 목적은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문학은 슬픔의 미학이다. 기쁘고 행복할 때 시집을 들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없다. 슬프고 외로울 때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잃었을 때 수천 년간 고민해 온 철학자들의 고민만큼이나 시인은 우리에게 다양한 삶의 문제들을 풀어놓고 타인과의 관계, 사물의 본질, 사회의 모순을 이야기한다. 언어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세계, 리듬이 전해주는 보이지 않는 울림까지 읽고 느끼고 즐길 수 있는 독자가 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시는 우리의 삶과 세계를 새롭게 바꿔놓는 위대한 일을 수행합니다. - 53

 

120214-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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