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서재 - 그리고 그들은 누군가의 책이 되었다
한정원 지음, 전영건 사진 / 행성B(행성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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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든 크든 누구에게나 서재는 있다. 고등학생의 서재에는 참고서와 문제집만 꽂혀 있겠지만 성인이 되면서 자신이 만들어가는 책꽂이가 바로 자신의 영혼이다. 보르헤스는 천국이 존재한다면 아마 도서관을 닮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서재는 바로 자신이 만든 유토피아의 모습일 게다. 당신은 그리고 나는 어떤 서재를 만들어가고 있는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일기장을 궁금해 한다.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한 것은 당연하다. 타인의 비밀에 대한 호기심은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늘 타인의 서재가 궁금했다. 학창시절에도 버스나 지하철에서 책을 들고 있는 사람이 읽고 있는 책이 너무 궁금했다. 아주 가끔 시집을 읽는 여학생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우리 사회의 ‘지식인’은 규정하기 어렵다. 학벌이나 직업으로 평가하기도 어렵고 사르트르식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들어봐도 지식인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그 사람이 가진 지식의 총량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발언의 내용과 실천적 행동의 족적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당대의 시대정신을 읽어내고 타인에게 그 의미를 전달할 수 있으며 역사 발전의 합리적 원칙을 제시할 수 있어야 지식인이다. 다른 사람에ㅐ게 미래에 대한 전망을 논리적이고 상식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인문학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의지와 인식의 힘을 가진 사람이 지식인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행성:B잎새’의 『지식인의 서재』는 지식인과 서재의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지식인의 가장 첫 번째 덕목은 말할 것도 없이 ‘책’이다. 책 속에서 길을 찾고 지식을 쌓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온 사람들이 지식인이다. 그러니 서재는 지식인의 가장 근본적인 영혼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열다섯 명의 열혈 독서가들은 『한국의 책쟁이들』의 주인공들과 조금 다른 눈으로 살펴 볼 수 있다. 책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인 사람들, 책을 통해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 사람들, 서재가 삶의 중심이지만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한 마디로 행복한 책읽기 종결자들이다.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만 판단하고 새로운 정보를 거부하는 사람, 자신의 이야기만 지겹도록 반복하고 들어주지 않으면 화부터 내는 사람, 남에게 가르치려고만 하는 사람 말이다 - 조국의 서재, 19쪽

책을 읽지 않고 늙어가는 수컷 영장류의 비애를 간명하게 전달하는 조국의 서재는 그의 미모만큼 핸섬하다. 규범적 틀을 깨고 나온 그의 생각과 변화의 욕망은 모두 서재에서 출발한다. 세상은 의문으로 가득 찬 사람이 필요하다는 러셀의 말처럼 그의 말이 설득력을 얻는 것도 물론 열린 생각과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독서를 만 권 이상 하고 나면, 사실 그렇게 새로운 것들이 많지 않아요. 같은 사실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한 게 많지요. 아주 독특하다고 생각되는 책은 10퍼센트나 될까요? 그래서 이제 저는 '아 이것은 정말 새롭다' 하는 것만 골라내어 독서를 하죠" - 이안수의 서재, 81쪽

충격적인 이안수의 말이다. 만권쯤 읽으면 그럴 법도 하다. 나는 태어나서 몇 권이나 읽었나 짐작해 본다. 세상의 모든 책은 고전에 대한 해석에 불과하다는 말도 있지만 만 권의 경지는 아직도 멀고 험한 경지인 것 같이 느껴진다. 양으로 승부할 수는 없으나 질은 양을 담보로 하지 않는가.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의 삶을 잘 꾸려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조국부터 최재천, 이안수, 김용택, 정병규, 이효재, 배병우, 김진애, 이주헌, 승효상, 박원순, 김성룡, 장진, 조윤범, 진옥섭에 이르기까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영화감독부터 건축가, 시인, 북디자이너에 이르기까지 그 깊이와 넓이가 탄탄한 사람들의 서재를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이들의 서재는 단순히 책을 꽂아 놓는 공간이 아니라 삶의 터전이며 내밀한 영혼의 숙성실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타인의 서재 훔쳐보기 프로젝트이다. 방송작가 한정원의 인터뷰와 전영건의 사진이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한다. 편안하고 진지한 이야기들이 수없이 오갔을텐데 짧게 정리된 글만 보는 아쉬움은 어쩔 수가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세계가 충분히 한 권의 책이 될 만한 사람들이어서 더욱 그러하다.

자신의 책읽기 노하우와 서재의 비밀, 책에 대한 관점 등 고수들이 들여주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책은 단순히 물질적인 형태 너머의 4차원의 세계를 열어준다. 그 비밀의 문을 열어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를 우리는 15명의 고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세상에는 읽을 책뿐만 아니라 읽어야 할 사람과 읽어야 할 삶이 너무 많다. 하지만 비균질적으로 흐르는 시간의 한계를 헤아려보면 ‘책’이 왜 우리에게 필요한지 느끼게 된다. 우리들의 삶은 유한하며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아는 것이 힘이든 모르는 것이 약이든 읽으면서 고민하고 생각할 일이다. 오늘도 읽고 쓰고 그리고 느껴야 할 일들이 우리에겐 너무 많지 않은가. 지식인의 서재는 아니더라도 나만의 서재 하나쯤은 지금 당장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두 칸짜리 작은 책꽂이부터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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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홈
황시운 지음 / 창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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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금 무엇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걸까
난 지금 어디로 쉬지않고 흘러가는가

난 내 삶의 끝을 본적이 있어
내 가슴속은 갑갑해졌어
내 삶을 막은 것은
나의 내일에 대한 두려움
반복됐던 기나긴 날 속에
버려진 내 자신을 본 후~
나는 없었어 그리도 또
내일 조차 없었어
내게 점점 더 크게 더해갔던
이 사회를 탓하던 분노가
마침내 증오가 됐어
진실들은 사라졌어 혀 끝에서~

YOU MUST COME BACK HOME
떠나간 마음보다 따뜻한
YOU MUST COME BACK HOME
거칠은 인생속에
YOU MUST COME BACK HOME
떠나간 마음보다 따뜻한
YOU MUST COME BACK HOME
나를 완성하겠어
다시 하나의 생명이 태어났고
또 다시 부모의 제압은 시작됐지
내겐 사랑이 전혀 없는 걸
내 힘겨운 눈물이 말라버렸지
무모한 거품은 날리고 흠~

주위를 둘러봐 널 기다리고 있어
그래 이제 그만 됐어 나는 하늘을 날고싶었어
아직 우린 젊기에 괜찮은 미래가 있기에
자 이제 그 차가운 눈물을 닦고 COME BACK HOME~
YOU MUST COME BACK HOME
떠나간 마음보다 따뜻한
YOU지금 어디로
쉬지않고 흘러가는가  

- 서태지와 아이들 '컴백홈'
 


상표를 떼지 않은 옷을 입고 쓰러질 듯 무대를 휘젓는 서태지, 양현석, 이주노의 모습은 등장부터 충격적이었다. 폭발적인 반응과 주목을 받으며 대한민국 가요계를 평정했던 ‘서태지와 아이들’은 세기말의 문화 코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노래와 몸짓과 이미지는 기존의 가요계의 문법을 뒤흔들었고 그야말로 ‘아이들’의 잠재된 충동과 욕망을 폭발시켰다. 질서와 규범의 파괴는 따분하고 지루한 일상에 충격을 주었다. 서태지는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했다. ‘교실 이데아’와 ‘컴백홈’의 가사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다. 더구나 그 때는 어떠했겠는가.

황시운의 장편소설 『컴백홈』은 멈칫거리지 않고 땀 흘린 후에 마시는 이온음료처럼 흡수해버렸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미덕중의 하나가 ‘재미’라는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은 일단 재미있다. 쉼 없이 막힘없이 책장이 넘어가게 만드는 능력은 작가의 가장 중요한 능력 중 하나이다. 서태지 키드라면 아련한 추억에 젖을지 모르지만 소설의 내용은 서태지와 무관하다.

슈퍼울트라 개량돼지라 불리는 박유미는 130kg에 달하는 거구의 왕따 여고생이다. 극단적인 외모를 가진 주인공 유미의 생각과 행동은 출구 없는 현실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초등학교 절친 지은은 고등학생이 되어 일진이 되고 직접 유미를 구타하고 돈을 갈취하면서 우정을 유지하는 기괴한 형태의 친구가 된다. 이들의 관계는 단순히 불량 청소년들의 일탈 행위를 보여주고 그 원인을 사회적 현실로 돌리는 식상한 청소년 소설의 문법에 기대지 않는다. 서태지를 축으로 그의 노래와 환상적 이미지는 유미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가 된다.

다이어트, 안나수이, 프링글스, 다이어트 등 소설에 등장하는 감각적인 소재와 10대 소녀들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이 소설은 절망과 불안에 대한 보고서로 읽힌다. 서태지는 90년대 청소년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희망’은 그저 현실을 견뎌내는 마취제가 될 수 없다. 작가는 어줍잖은 희망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다만 유미가 꿈꾸는 달의 이면을 생각해 보게 한다. 도달할 수 없는, 단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는 달의 뒷모습은 어떨까. 우리는 어른이 되고 나면 하늘도 달도 별도 쳐다보지 않는다. 코앞에 놓인 현실만 생각한다. 팍팍한 생활 탓이라고 하기엔 슬프지 않은가. 아무리 삶의 무게가 우리의 어깨를 짓누른다 하더라도 말이다.

사람들은 툭하면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들 했다. 그런데 어떤 순간이 적당한 때인지를 가르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살다보면 누구나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걸 알게 되는 삶의 순간이 저마다 정해져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이에 걸맞는 행동과 삶의 패턴이 있다. 그러나 철들지 않겠다는 꿈을 꾸는 것이 유치한 생각일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때’를 알고 그 때에 맞춰 공부를 하고 직업을 선택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노후를 준비하면 행복은 저절로 보장되는 것일까. 과연 인생에서 우리가 찾아야 하는 값진 비밀은 무엇일까.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고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유미처럼 달에 가고 싶은 마음을 떨쳐 버릴 수는 없었다. 서태지와 함께 달에 가려는 유미의 꿈은 이루어질까.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이라는 장석남의 시가 생각난다. 무언가 그리운 것이 있다는 것은 삶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증거다. 유미는 늘 서태지를 그리워하고 지은이를 그리워한다. 가족과 친구로부터 멀어진 유미가 서태지를 그리워하고 달에 가고 싶어하는 것은 어쩌면 생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유일한 방편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유미와 미혼모가 될 지은이를 통해 삶의 비극과 희극이 어떻게 다른지 묻고 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양상은 거리에 있지 않고 내가 걷는 길과 방법에 따라 달라진다.

올해 마흔이 된 서태지는 최근 이지아와의 결혼과 이혼 문제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현실 속의 서태지도 유미만큼 괴롭고 힘겨운 시간들을 견뎌낸 것은 아닐까? 유미는 서태지와 함께 달에 가서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 아니, 유미는 서태지를 진짜 좋아하긴 한 걸까.

우울한 일탈 청소년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은 건강한 웃음과 밝은 모습으로 현실을 그려내지 않는다. 청소년들에게 권하기도 불편하고 성인들이 읽기에도 그리 탐탁하지 않은 면에 대해서 무어라 말하기 힘든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이물스러움은 소설이 현실과 다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소설에서 보여줄 수 있는 상상력과 문장을 이끌어가는 힘이 문제가 아니라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세계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고루한 독자의 문제가 아니라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세계의 문제다. 작가의 말대로 다음부터 점점 더 쉬워졌으면 좋겠다.

모든 일은 처음이 힘들 뿐, 그다음부터는 점점 더 쉬워지게 마련이다. - 222쪽


11052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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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자본 세계사 가로지르기 3
박홍규 지음 / 다른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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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이든 단 한 가지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고 싶어요, 영원히 살고 싶어요, 죽은 우리 엄마를 살려주세요, 세상에서 축구를 제일 잘하고 싶어요, 나보다 예쁜 여자가 없었으면 좋겠어요 ……. 말도 안되는 상상이겠지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복권 당첨, 부자되기, 부동산 재벌 등을 선택하지 않을까 싶다. 도대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돈’이란 무엇인가.

자본주의에 기초한 삶의 방식에서 모든 것은 화폐가치로 환산된다. 우리는 돈은 피보다 진하다는 말이 실감나는 현실을 살아간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돈 혹은 자본이란 말을 잘 알아야 한다. 도대체 돈은 무엇이며 자본의 역사는 어떠했는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우리는 조금 더 자본을 제대로 알 수 있지 않을까?

세계사 가로지르기 시리즈로 나온 『세상을 바꾼 자본』은 색다른 경제사다. 청소년을 위한 시리즈의 하나로 ‘자본가를 꿈꾸는 청소년들에게 들려주는 이상한 경제학’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비밀 아닌 비밀들이 많다. 사회에 나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동자로 살아가는 데도 대한민국의 사회, 경제 교과서에는 노동자의 권리나 노사관계에 대해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내용을 담고 있지 못하다. 경제의 주체와 관점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직접적인 생활의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기업가의 입장이나 수박 겉핥기식의 원론만 다루고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보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삶을 위한 사회, 경제 교과서도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 책은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경제 이야기가 가득하다. 우선 저자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자본의 시대는 16세기 서양이 비서양을 침략하고부터 시작되었다. 황금과 화폐로 축적된 자본은 무한한 탐욕으로 세계를 지배했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본이 가난을 극복하게 해 준다는 이유에서 환영했다. 그러나 자본은 대부분의 인간에게 행복이 아니라 불행을 대부분 초래했다. 단적으로, 자본의 시대에 사는 한국인은 돈과 행복이 무관하지 않고 충분한 돈이 없어서 대부분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인간을 자본인이라 부른다. 이 책은 그런 자본인, 탐횡인으로부터 해방되자는 취지로 쓴다. - 74쪽

이 책의 목적이 뚜렷하다. 자본으로부터의 자유! 그것이 이 책의 목적이 아닐까 자본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이 아니라 돈에 종속된 사람이 아니라 주체적인 인간이 되자는 말이다. 그러나 그 길은 멀고 험난하다. 얄팍한 경제에 관련된 지식만 가지고 그렇게 살 수는 없다.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치면 이야기가 달라지더라도 자본인, 탐횡인으로부터 해방되어야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현실을 거부하자는 말이 아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말도 아니다. 우리가 발딛고 있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한발 더 나아가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고민을 시작하는 말이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사랑하지 못한다. 아는 것으로부터 사랑은 시작된다. 사랑한다는 말은 안다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우리의 삶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의 조건인 자본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리오 휴버먼의 『자본주의 역사 바로알기』가 한 쪽에 치우진 자본주의에 관한 역사책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물론 이 책도 읽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책은 항상 빛과 어둠을 함께 드리운다. 이 책이 가진 장점을 읽어내는 독자라면 자신의 생각을 조금 더 말랑말랑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자세가 독서의 기본이다.

이 책의 저자 박홍규는 다양한 분야의 인문학 서적을 읽고 쓰고 번역하는 법학자이다. 게다가 추천사를 쓴 강수돌 교수보다 더 지독한 반자본주의자이다. 이반 일리히의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의 번역자 답게 자전거를 타고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는 괴짜 법학 교수이다. 휴대폰은 물론이고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자동차도 없다. 우리 모두 박홍규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들의 삶의 조건이 어떠한지는 정확하게 알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읽고 생각하고 우리들의 삶을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더구나 모든 걸 돈이 해결해 준다고 생각하는 청소년들에게 색다른 경제 개념이 필요하다. 과연 자본은 무엇이며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주는 책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청소년들의 눈높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와 문장들이 여과없이 사용되어 조금 더 쉽고 친절한 안내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리 좋은 생각도 독자의 눈높이를 생각하고 저변을 확대하는 일에 신경 쓴다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성찰적 지식인으로 존경받는 저자의 책이 논쟁의 중심에서 또 다른 책을 재생산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그의 책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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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의 사회
장 보드리야르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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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롭게 된 인간들은 지금까지 어느 시대에도 그러했던 바와 같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 15쪽

시대를 뛰어넘는 고전은 시간을 견뎌낸 글이다. 우리는 보통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는 말로 이름값에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모든 고전에 내게로 다가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 고전이라는 농담이 있다. 개인의 필요와 배경지식 그리고 호기심에 따라 고전은 때에 따라 읽어야 하는 게 아닐까.

고미숙의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 김찬호의 『돈의 인문학』 등 돈에 관한 책을 읽다가 문득 떠오른 책이 바로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였다. 아마도 『시뮬라시옹』을 읽고 미뤄 두었기 때문인지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무렵인지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어쨌든 오래 맴돌던 책을 들고 조금씩 정독했다.

알랭 드 보통처럼 대중적인 소설 형식이나 가벼운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내지 않는다면 프랑스 철학자들의 책은 난해하다. 그런 편견 때문인지 이 책은 첫 장부터 집중하고 긴장하며 읽기 시작했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다른 책에서 여러 번 접했고 인용된 부분들도 보았으니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보드리야르가 당대를 읽어내고 해석하는 방식이 궁금했을 뿐이다.

40여 년 전, 1970년에 나온 『소비의 사회』는 시대정신을 정확하게 간파한 역작이라고 할 만하다. 산업사회로의 이행과정에서 파생된 무수한 사태들에 대해 단순히 자본주의의 검은 그림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사회’로 명명했다. 사진과 영화의 등장을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예리한 논문으로 당대 사회를 분석한 발터 벤야민처럼 광고의 홍수 속에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인간의 욕망을 간파한 이 책은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의 심리와 자본의 속성을 적절하게 분석하고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적확하게 해석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책이다. 우리는 여전히 소비의 사회를 살아간다. 고(故) 전우익 선생의 말씀대로 우리는 평생 무언가를 사서 버리고 또 사고 버리는 패턴을 반복하다가 죽는다. 소비가 미덕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라캉의 말처럼 끊임없이 타인과 나를 비교하고 경쟁하고 불행해한다. 현대사회의 거대한 소비 시스템은 점점 견고해지고 거역할 수 없는 틀이 되어버렸다.

이 책이 나온 이후 세계 경제는 신자유주의 물결과 세계화의 도도한 흐름에 휩쓸려가고 있다. 각국의 경제 블록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무국적 거대자본은 부유하는 자본주의의 미래를 보는 것 같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반성과 남미의 도발적 흐름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는 ‘복지’에 대한 사회적 고민을 소모적 정치 논쟁으로 비화시키고 있다.

이 책은 사물의 형식적 의례, 소비의 이론, 대중매체, 섹스 그리고 여가 등 3부로 이루어져 있다. 중세 기사의 한 벌의 갑옷과 투구를 뜻하던 ‘파노플리’가 어떤 의미를 뜻하는지에 대한 설명에서 시작해서 악마와의 계약 이야기로 끝난다. 각장은 현대 사회 상품과 사물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욕망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과 다양한 분석을 통해 ‘소비’가 갖는 다양한 의미를 풀어 놓는다.

현대사회에서 ‘소비’를 키워드로 삼는다면 수많은 이론과 분석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이 책이 의미를 갖는 것은 시대를 통찰하는 폭넓은 시야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보드리야르의 관심과 현대사회에 대한 분석이 어떤 변화를 보였고 이후에 어떻게 비판받았는지에 대해서는 더 깊이 있는 관심과 독해가 필요할 것 같다.

이 책은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읽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고 현대 사회를 본질적으로 성찰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예견하는 자연스런 흐름은 한 권의 책으로 얻을 수 없다. 하지만 꾸준한 관심과 다양한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책읽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알고 의미를 부여하고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것들이 모두 의심스러워 보인 적은 없는가. 우리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하지만 소비하지 않아도 존재할 수는 없을까.

소비는 하나의 신화다. 현대사회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하는 말(parole), 우리 사회가 스스로를 말하는 방식, 그것이 소비다. - 328쪽


110515-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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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 문학과지성 시인선 390
김광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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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 모든 사물들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특히 익숙한 것일수록, 오래된 것일수록 우리에게 많은 말을 건넨다. 그것은 사물에 투영된 우리들 의식의 반영일 뿐 아니라 생활 속에 배태된 사유의 본질을 의미한다. 언어는 사람됨을 규정하고 우리의 의식을 특정한다. 언어의 한계의 우리의 한계이며 생각의 범주이고 삶의 테두리가 된다. 그렇다면 언어를 확장하는 과정이 외부의 세계를 확장하는 일이 아닐까.

평범한(?) 삶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창작 행위를 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 말은 옳으면서 그르다. 동일한 생활 패턴을 반복하다보면 생각의 범위와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 작가들이 하나둘씩 교수 자리를 꿰차거나 샐러리맨의 평범한 일상을 즐기고(?) 있는 것이 독자의 입장에서는 불편하다. 뭐 특별한 감흥이나 다른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상상력과 발군의 글솜씨를 가졌다 하더라도 한정된 세계에서 특별함을 창조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신현림의 말대로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지지 못한다면 문학은 고급 살롱의 언어 유희에 그칠 위험이 있다. 세기말의 혼돈과 새천년의 희망을 지나 자본주의가 굳건하게 세계를 지배하고 경쟁질서가 공고한 사회에서 문학의 역할은 과연 어떠해야할까.

노시인의 시집을 읽다가 잠깐 상념에 잠긴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로 유명한 시인 김광규의 시를 오래 읽어왔다.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아니다 그렇지 않다』, 『좀팽이처럼』, 『아니리』,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처음 만나던 때』, 『시간의 부드러운 손』 등 편안하면서도 일상속에 숨겨진 작은 비밀들을 감각적으로 묘파할 줄 아는 시인 김광규의 시선은 나이와 함께 무디어진다. 여전히 일상에 매몰되어 있는 생의 감각들을 되살려내고 있지만 예전 같지는 않다.

저녁나절

썰물이 빠진 뒤
뭍으로 길게 닻을 던진 채
개펄 바닥에 주저앉아 나른한
오후를 보내고 있는 거룻배들
정물로 머무는 동안 소금의
하얀 발자국 조금씩 드러날 때
말나루 먼 바다에서 아련히
밀물 들어오는 소리
갈대숲 어느새 물에 잠기고
물새들 날카롭게 지저귀고
잠에서 깨어난 거룻배들
물 위로 떠오르고
황혼의 냄새 불그스레 번져갈 때
조약돌처럼 널리 땅 위의 기억들
적시며 밀려오는 파도
어두워가는 여생의 하루


그것은 세월과 나이의 힘이며 절정을 지나 생을 마감하는 시인의 조근조근한 말투처럼 여겨져 옷깃을 여미게 한다. 환한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밀려오기 전, 말로 표현하기 힘든 빛의 여운과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운 시간을 나는 ‘푸른 시간’이라고 부른다. 시인도 저녁나절 그 시간에 또 하루가 저물어 가는 아쉬움을 ‘어두워가는 여생의 하루’라고 했을 것이다.

김광규 시인의 시는 어깨에 힘을 빼고 툭툭 던지는 쨉처럼 상대를 긴장시키고 거리를 조절한다. 시는 언제나 독자들에게 편안한 긴장을 주는 언어의 견고한 구조물이다. 헐렁하고 편안해 보이지만 단단하게 잘 빚은 백자 같은 기품이 있어야 오래 여운이 남기 마련이다. 쉽게 읽히지만 단순하지 않고 오래 기억하고 싶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는 언어의 바다.

나뉨

소형 임대 아파트 주민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오고 가지 못하도록
주상복합 고층 아파트 입주자들이
통로를 막고
길에 철조망을 쳤다
그렇다
우리는 예부터 나누어진 겨레
분단국가에서 살고 있다

분노와 절망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데도 슬픔이 배어나오는 시인의 목소리가 좋았다. 당연히 주목해야 하는 이웃의 모습, 상식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인간에 대한 예의가 무엇인지 말해주는 것 같은 김광규의 시는 통렬한 풍자보다 쉽고 간명하다. 계급과 계층이라는 말을 몰라도 눈에 보이는 일상에서 생각해 보자고 요구하는 낮은 목소리가 더 멀리 울려 퍼지기도 하는 법이다.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삶은 끊임없는 연속입니다
쉴 새 없이 뛰는 심장
숨 쉬는 허파
가슴속에 품은
사랑도 그렇지 않은가요
산책을 하다가 피곤하면
길가의 벤치에 앉아 잠시
쉬어가듯이
우리의 삶도 사랑도 그렇게
가끔 쉴 수 있다면
좋으련만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단 한 순간도 쉬지 않는 심장, 처럼 우리들의 삶도 멈추지 않는 걸까. 우리들의 사랑도 그러한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숭산 스님의 말씀처럼 오직 모를 뿐!

고희를 맞은 시인의 눈에 비친 세상은 한결 고즈넉해 보인다. 편안하게 일생을 살아온 명예교수의 뒷짐과는 또 다른 고요함의 세계 같은 것이 이 시집 곳곳에 배어 있다. 여행의 기록이 지루하게 펼쳐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일상에서 길어 올린 시편들이 가슴을 울린다. 잔잔하지만 넓은 파문을 일으키는 그의 몰년이 시집의 마지막이다. 하지만 아직, 그의 몰년을 말할 때는 아닌 것 같다. 조용히 스러지는 김광규의 시들은 푸른 시간에 읽기 좋다. 아니면 몰년 부근에.

몰년(沒年)

죽은 이는 그해까지 살았습니다.
예측 못한 미래를 끝내고
사후(死後)를 남긴 셈이지요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 …… 나머지는
괄호 안의 빈칸 속에서
갑갑한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산 자들의 몫입니다



110513-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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