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나선 - 생명에 대한 호기심으로 DNA를 발견한 이야기 궁리하는 과학 1
제임스 D. 왓슨 지음, 최돈찬 옮김 / 궁리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인류 역사의 전환점이 된 수많은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다. 곰팡이에서 우연히 발견된 페니실린부터 유럽의 근대사를 뒤바꾼 드레퓌스 사건에 이르기까지 지금 우리들 삶의 조건은 숙명을 가장한 우연이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나비효과처럼 결과를 알 수 없는 원인과 결과가 반복되는 원인은 거슬러 또 다른 원인의 결과였을 것이고 결과는 또 다른 결과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과학적 발견이거나 철학적 성찰이거나 마찬가지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 끝없는 열정, 호기심을 견디지 못하는 집요한 탐구, 전혀 다른 방식의 창조적 상상력, 타인의 연구 결과를 받아들이는 겸손한 자세,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독창성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건들이 지금 이 순간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 숱한 씨줄과 날줄이 모여 현재를 만들고 미래의 토대를 마련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 세상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인간은 무엇인가. 과학은 철학에서 출발한다. 모든 것의 기원을 찾고 사물을 바탕을 찾으려는 욕망이 과학자의 자세이다. ‘왜’라는 의문부호를 항상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는 것이 과학자의 운명은 아닌지 모르겠다. 군대를 가지 않아 인생에서 가장 명민한 시절을 학문에 몰입할 수도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불과 23세의 나이로 코펜하겐을 거쳐 캠브리지에서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제임스 왓슨 선택받은 조건을 갖춘 과학자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일반인들 머릿속에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DNA의 이중 나선 구조를 밝혀 크릭과 함께 노벨상을 수상한 제임스 왓슨의 『이중나선』은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과학적 성취에 대한 실명 소설처럼 읽힌다.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은 1953년 4월 25일 <네이처>에 DNA 구조를 밝힌 짧은 논문을 발표하며 생명과학 분야에 놀라운 발자취를 남겼다. 제임스 왓슨은 이 과정을 다룬 『이중나선』은 딱딱한 과학 이론서가 아니다. 과학자들의 연구 과정과 개인적인 일상사가 그대로 드러난 이 책은 흥미진진한 과학사로 읽어도 무방하고 1950년대 캠브리지를 중심으로 한 과학자적 성과로 읽어도 좋다.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연구 분야에도 불구하고 DNA 구조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끊임없는 토론 과정은 학문을 대하는 본보기로 삼아도 좋을 만하다. 마지막 부분에서 미국의 폴링과 경쟁하는 장면은 흥미진진한 소설을 보는 재미도 있다. 과학 용어와 상식이 부족하지만 간단한 이론적 설명이나 그림이 삽입되어 있고 지루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아 읽는데 큰 지장은 없다.

짧은 분량의 이 책은 추천사를 쓴 최재천의 말대로 과학자에게 왜 글쓰기가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축적된 연구 성과와 역할로 볼 때 프랜시스 클릭이나 노벨상 공동수상자인 윌킨스에 비해 제임스 왓슨이 더 명성을 떨치게 된 이유는 대중을 상대로 한 쉽고 재미있는 글쓰기 능력 덕분이다.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겠지만 자신의 연구 성과를 좀 더 쉽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은 사회적 관심과 연구 지원 등 다양한 혜택으로 돌아왔고 그것은 또 다시 과학의 발전을 이끌어내는 순환고리의 역할을 해냈다. 과장된 포장이 아니라 1968년에 출간된 이 책이 고전으로 자리잡은 이유를 헤아리며 읽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전달되는 유전정보를 담은 분자들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들의 화학적 특징은 무엇일까. 이러한 생명의 비밀과 신비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어 DNA 구조를 발견한 왓슨과 크릭의 이야기는 어떤 SF소설보다도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생존 인물들이 보여주는 과학과 과학자들의 세계 그리고 1950년대 영국과 유럽의 일상까지 읽어낼 수 있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에 과한 몇 권의 책에서 시작된 책읽기가 종횡무진 계속되겠지만 왓슨의 호기심을 불꽃처럼 타오르게 했다는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로 이끌어준다. 형이상학적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인문학적 질문들만큼이나 생물학적 인간에 대한 관심도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어느 한 분야도 인간의 삶에서 중요하지 않은 분야가 없고 인류의 생존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연구하고 노력해야 하는 분야가 많겠지만 생명의 본질에 대한 질문은 과학을 넘어 철학적 관점으로도 지속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다.

과학은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 줄 수도 없고, 죽은 사람을 살려 낼 수도 없다. 하지만 무지한 인간에게 아주 작은 앎의 기쁨을 느끼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질문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너와 나는 누구이며 우리는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이중나선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111108-1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68운동 비타 악티바 : 개념사 12
이성재 지음 / 책세상 / 200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식채널 1968(68혁명) 1부 - 주동자가 없는 시위(http://home.ebs.co.kr/servlet/wizard.servlet.admin.program.vodaodListServlet?client_id=jisike&command=vodplayer&charge=E&program_id=BP0PAPB0000000009&step_no=0001&seq=1178012&type=A&vodseq=241620)

세계화의 물결은 시간과 공간을 개념을 확장시켜 놓았을 뿐 아니라 획일적이고 몰개성적인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구촌이라는 이름으로 이웃나라를 넘다들고 어디서나 통용될 수 있는 화폐 통합이 이루어지는 세상은 유럽공동체의 이상과 꿈이 아니라 자본의 폭력과 브레이크 없는 무한 경쟁의 시나리오라고 볼 수 있다. 부자들의 사다리 걷어차기는 하루 이틀의 문제도 아니지만 구조적인 모순이 콘크리트처럼 굳어지고 그들만 행복한 세상이 지속될 거라는 가당찮은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역사는 인류에게 수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가르침을 주었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을 뿐이다. 끊임없이 변화 발전하는 것이 인간이고 사회는 유기체처럼 적절한 조화와 균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순간 ‘혁명’은 불가피한 것이 되고 만다. 군인들이 총을 들고 국가를 점령했던 박정희의 군사 구테타를 혁명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폭적이고 평화로운 혁명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지구 곳곳에서 혁명은 언제나 그렇게 조용히 계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1968년 5월은 유럽에서 혁명이라 부를 만한 역사적 변곡점을 맞이했지만 띠동갑인 1980년 5월 대한민국에서는 혁명이 되지 못한 채 군인들에 의해 시민들이 잔혹하게 학살당한 트라우마를 남겼다.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에 대한 대응방식은 각 국가와 민족의 정치와 역사적 전통 그리고 문화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그리고 또다시 18년이 흘러 2008년에 불붙기 시작한 ‘촛불’은 드디어 시위가 놀이로 치환되고 물대포에 웃음으로 대응할 수 있는 다양한 세대의 또 다른 열망으로 드러났다. 배후를 언급한 구세대의 음모론 그들의 프레임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스타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중학생부터 유모차까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변화의 요구와 과거로의 회귀를 거부하는 욕망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월가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1대99 거부 운동은 어떤가. 보통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상위 0.1%의 생활수준과 병역기피, 부동산 투기, 위장 전입 등 대한민국을 이끌 수 있는 사람들의 기본 조건에 사람들은 분노하기 시작했고 ‘저들’은 침묵하는 다수의 심중을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시대정신을 거스르는 사람들에게 표를 준 대한민국 국민들 스스로의 책임을 면할 수 없지만 오로지 ‘경제’와 ‘돈’이 신앙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열심히 살고 있는데도 불행한 이유를, 희망과 웃음의 의미를 이제라도 조금씩 생각해 보아야 할 때는 아닌가.

책세상의 열두 번째 개념사 시리즈 『68운동』은 유럽문화의 또 다른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던 1968년 전후를 조망하고 있다. 우리와 무관한 시공간에서 벌어진 사회적 변혁운동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독자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우리 사회의 모순과 당시 유럽의 상황 그리고 그 이후에 벌어진 변화 양상을 살펴가며 읽는다면 왜 현재진행형으로 이해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변화의 열망은 단순히 ‘친북좌파’와 ‘보수꼴통’의 싸움이 아니다. 건강한 상식이 통하는 사회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친북좌파식 공산주의적 발상’이라고 매도했던 부유세, 일명 ‘버핏세’ 도입을 검토하겠다는 입장 변화는 그들도 친북좌파식 공산주의 정당으로 거듭나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다함께 더불어 살아야 하는 사회에 대한 지극히 상식적인 접근의 시작이라고 보아야 한다.

정치는 사람들의 생활과 가장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노무현은 권력은 이미 자본의 손에 넘어갔다고 했지만 가장 큰 도둑에게 가장 관대한 우리들의 의식이 더 큰 문제는 아닌가. 각종 편법과 불법으로 상속된 재산으로 기업을 지배하고 그 돈은 세상을 지배한다는 생각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살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무소불위의 기업으로 성장 중인 대학의 부패,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 진학률과 등록금, 세대간의 갈등과 기성정치에 대한 환멸, 비정규직과 청년 실업 등 나열하기도 힘든 수많은 사회 문제들이 단 하나의 처방으로 해결될 수는 없다. 지금 다시 왜 1968년을 돌아보아야 하는지의 문제는 우리의 현실 속에 답이 있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 촉발된 68운동 돌아보고 독일과 이탈리아, 미국과 영국의 전개 양상을 살펴본다. 이후에 68운동은 무엇을 남겼을까. 교육, 노동, 정치, 여성, 문화 등 각 분야에 걸쳐 전근대적 요소를 바꾼 계기가 된 이 운동은 점진적인 변화 요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는 역사적 교훈이기도 하다. 가만히 앉아 손가락을 빨고 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법이다. 『88만원 세대』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라고 요구했던 저자들의 목소리는 이런 맥락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68 운동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 아직도 레드컴플렉스에 사로잡혀 선거용 카드로 사용하는 대한민국에서 모든 사회 변혁 운동은 ‘불온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대학에 가지 않겠다는 대학거부 선언이 이어지고 고용 없는 기업의 성장, 보편적 복지 대책 없는 고령화 사회, 사회안전망이 허술한 미래, SNS까지 검열과 심의의 욕망을 드러내는 정권 등 우리 사회에서 지금 이 시기에 68운동의 의미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모든 역사는 현재적 유용성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학문적 지식과 이론적 틀을 연구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역사는 언제나 우리들의 삶을 성찰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이 책은 우리가 살펴야 할 대한민국의 진지한 표정이어야 한다. 가볍게 개념을 확인하고 보다 깊고 다양한 책들을 만나기 위한 징검다리로 삼아도 좋겠지만 무엇보다도 ‘지금-여기’의 좌표를 읽어내려는 작은 노력의 시작으로 삼아도 좋을 듯하다.


지식채널 1968(68혁명) 2부 - 실패한 혁명(http://home.ebs.co.kr/servlet/wizard.servlet.admin.program.vodaodListServlet?client_id=jisike&command=vodplayer&charge=A&program_id=BP0PAPB0000000009&step_no=0001&seq=1178017&type=A&vodseq=241625)


111106-10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94
박형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해질녘 붉은 빛을 토해내며 서산마루에 걸린 태양은 죽음과 좌절, 소멸과 허무를 떠올리는 법이다. 그것을 푸른 시간을 예비한 빛의 굴절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밤의 시작을 알리는 황혼처럼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이 다시 시작된다. 누군가의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아이러니한 공통점은 망각이다. 언젠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것은 항상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을 가진 것이 인간이다.

시골, 원형적 삶의 공간에서 퍼올리는 한국어의 아름다움과 공동체에 대한 기억. 박형준의 시의 토대는 그의 유년 시절과 농촌에서의 삶이다. 이제 얼마나 더 우리에게 농촌 공동체의 따스한 기억이 ‘추억’으로 혹은 ‘낭만’과 ‘아쉬움’으로 여겨질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기억의 원형은 안타깝지만 지속적으로 전수되리라 믿는다.


황혼



아버지 삼우제 끝나고

식구들, 산소에 앉아 밥을 먹는다



저쪽에서 불빛이 보인다

창호지 안쪽에 배어든

호롱불



아버지가 삐걱 문을 열고 나올 것 같다


박형준의 새 시집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는 그간에 시인이 보여준 세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황혼’이 서시가 되었지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떠나는 것들과 남은 것들의 아쉬운 결별보다 보이지 않는 간격에 관심을 가져보자. 창호지 안쪽에서 흔들리는 그것은 누구인가.

독특한 감수성은 시인에게 필수아이템이다.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을 개성이라고 하지만 시인 나름의 빛깔과 무늬가 독자에게 수놓아질 수도 있고 불편하고 어색한 남의 옷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박형준의 그것은 어떠한가.



당신의 팔



당신의 팔 속에서

강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



사람이 사랑을

사랑이 사람을

못 믿고

사랑을 사람이 두고

못 믿고



강물 속에 고기가

고기 속에 고기가

흐린 불빛 떠다니는

정육점 같은 팔 속에

나는 있고

고기 같은 강물 속에

당신은 있다



물살이 저녁 강 연안 지대에 부서진다

저녁 강물의 테이블엔

식빵 가루 점점이 흩어져 있다

어디선가 날려온 은빛 깃털이

물살에 떠밀려간다

울음 한번 짧게 울곤,

다른 데로 날아가는 두루미 부리같이



나는 당신의 팔 속

강물에 떠다니는

부스러기를 찍어 먹고

살 속의 창에

가슴속에 두고 아껴온

입맞춤을 하고 나는 언제나

당신의 팔에서 타인을 사랑한다

언제나 당신의 팔 속에서 죽는다


보통 보이지 않는 대상을 표현하려는 자들의 몸부림만큼 처연해 보이는 것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낯섦과 새로움에 반하고 기꺼이 당신의 팔 속에서 안기고 싶은 것이다.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로부터의 탈주 혹은 외면.

동물의 왕국에서나 눈여겨 볼법한 황제 펭귄의 생태가 갑작스레 따뜻하게 전해지는 것은 옆으로 누운 활자처럼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쓸려가지 못하는 운명 때문은 아닐는지. 삶은 누구에게나 그렇게 고단하게 북풍을 견디고 눈보라를 맞으며 바다를 바라보는 일은 아닌지. 그래서 시인은 봄은 ‘의지’로 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지.


황제펭귄



얼음이 단단해지는 남극의 겨울이 오면 황제펭귄은 바다에서 내륙으로 이동한다. 포식자를 피해 짧은 다리로 빙산을 타고 얼음길을 걸어 바람막이의 안전한 평지를 찾아 100km를 이동한다. 그들은 그곳에서 제의처럼 짝짓기를 끝내고 암컷은 알 낳기에만 몰두하여 몇 주 후에 주먹 크기만 한 알을 낳는다. 암컷은 힘을 모두 소진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알을 품을 수 없어 수컷에게 넘긴다. 암컷은 수컷에게 알을 넘기기 위해 수컷에게 최대한 몸을 밀착시키고 신속하게 알을 건네준다. 수컷의 짧은 두 다리 사이에는 주머니가 있어서 이 속에서 알은 안전하게 부화의 과정을 거친다. 암컷들은 원기를 회복하기 위해 다시 바다로 되돌아간다. 그때부터 수컷들의 순례의 행진이 시작된다. 눈보라와 영하 60°C의 강추위 속에서 수백만 마리의 수컷 펭귄들이 다리 사이에 알을 끼우고 암컷들이 떠난 바다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알을 지키기 위해 둥그렇게 뭉쳐 서로를 보호한다. 온몸이 눈보라에 뒤덮인 채로 어둠 속에서 백야의 무덤이 되어간다. 바깥에 있는 펭귄들은 안으로 들어가고 안에 있는 펭귄들은 다시 바깥으로 나오면서 그들은 그렇게 2개월 이상을 보낸다. 드디어 순례의 정점에서 새기들이 부화하고 수컷들은 되새김질한 먹이를 새끼에게 먹여주지만 그들 역시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에 이내 한계에 도달한다. 바로 이때 저 멀리 바다에 가 있던 암컷들이 입안에 가득 먹이를 지닌 채 아침 해를 등에 지고 나타나기 시작한다.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오는 암컷들의 실루엣에 커다랗게 원을 이루면서 움쳐 있던 수컷들의 대오가 무너지고, 그들은 환호성을 지르면서 자신만의 목소리로 짝을 부른다. 2개월 이상의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암컷들은 자신의 짝의 목소리를 정확히 기억한다. 입에 가득 문 먹이를 품은 채 뒤뚱거리는 다리로 수컷고 제 새끼에게 안겨든다.


이 도보승들에겐 흔히 Emperor라는 칭호가 붙는다.

이 피안의 황제들은 자신을 침묵 속에 열어놓고

자신의 고독으로 세계를 창조한다.

봄은 의지로 온다.


희망은 미래를 위한 일종의 환각이다. 그것은 이루어지짐과 무관에게 모든 것들의 존재이유가 되기도 한다. 펭귄은 무엇을 바라 2개월 이상의 긴 시간동안 바다를 바라고 있었을까. 시인은 우리가 사는 일도 황제펭귄의 그것과 비슷하지 않겠느냐고 묻는 듯하다. 그러다 문득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듣기도 하겠지만. 과거로 단단하게 뭉쳐진 빗방울처럼 그렇게.


빗소리



내가 잠든 사이 울면서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여자처럼



어느 술집

한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거의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술잔을 손으로 만지기만 하던

그 여자처럼

투명한 소주잔에 비친 지문처럼



창문에 반짝이는

저 밤 빗소리


그리하여 어느 날 투명한 울음을 울기도 할 것이다. 낯설게 다가오는 자신의 모습과 차창에 비친 또 다른 누군가와의 대면. 어색하기보다 차라리 객관화된 외로움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투명한 울음으로 가득한 한 사람 한 사람이 부대끼며 전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오늘도 어디론가 사라진다.


투명한 울음



그런 날이 있다

지하철 첫차를 타고 가는 여자가

차창에 떠 있는 자기 모습을 보고

우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런 날이 있다

그녀의 눈에 떠 있는

내 얼굴을 보고 운 적이 있다

그런 날에는 깨진 사금파리에 빛나는

시려운 빛이라도 그리워진다


사라진 사람들은 저녁 빛을 받으며 돌아온다. 빛의 세상을 살아내고 어둠의 세계를 견디기 위하여 불빛을 찾아 하나둘씩 모여드는 사람들은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서로를 위로한다. 그 위로는 인간의 몫이 아니다. 시인은 사물들이 보여주는 형상들, 소리들에 주목한다. 부드럽고 따뜻한 것, 차갑고 단단한 것 그리고 빛과 그림자.


저녁 빛



사물 속에 빛나는 고통처럼

또 저녁이 온다

버드나무 꽃가루 자꾸 날아와

다래끼를 나게 하는 바다



선창가 외진 술집

금 간 담벼락 밑에 핀 질결이꽃처럼

먼지투성이의 삶을

눈빛으로나마 바다에 빠뜨리며 걷는다



시간을 들여다보느라

한 개의 초점만 남은 눈먼 시계공

수평선에 잔해를 이루며 노을은

시간의 땔감들을 한 단씩 태우며 저문다



새살이 돋아나는 통증인가

부서진 초침과 분침 들

부드러운 상처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별들로

또 하나의 성좌를 이룬다

수평선이 빛이 나에게 고통을 준다


모든 고통이 사라진 후 잠에서 깨어난 듯 어두워지는 사위를 둘러본다. 부박하고 처량한 삶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일은 고통스럽다. 젊은이에게 간신히 작은 열매가 맺힐 무렵 찾아온 사랑처럼 누군가에겐 꽃이 피고 바람이 불고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나마 시인은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는 고백을 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나지 않아서 울고 생각나도 울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사람들은 박형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그 젊은이는 맨바닥에서 잠을 잤다

창문으로 사과나무의 꼭대기만 보였다



가을에 간신히 작은 열매가 맺혔다

그 젊은이에게 그렇게 사랑이 찾아왔다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그는 그때까지 맨방바닥에서 사랑을 나눴다



지하 방의 창문으로 때 이른 낙과가 지나갔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여자를 기다렸다



그녀의 옷에 묻은 찬 냄새를 기억하며

그 젊은이는 가을밤에 맨방바닥에서 잤다



서리가 입속에서 부서지는 날들이 지나갔다

창틀에 낙과가 쌓인 어느 날



물론 그 여자가 왔다 그 젊은이는 그때까지

사두고 한 번도 깔지 않은 요를 깔았다



지하 방을 가득 채우는 요의 끝을 만지며

그 젊은이는 천진하게 여자에게 웃었다



맨방바닥에 꽃무늬 요가 펴졌다 생생한 요의 그림자가

여자는 그 젊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과나무의 꼭대기,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111103-09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 미천한 것, 별 볼일 없는 것, 인간도 아닌 것들의 가치와 의미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불온성이란 어떤 뜻밖의 만남에서 느끼는 ‘저들’의 기분이다. 위대함과 탁월함의 찬양자들, 자신의 고상함과 고매함을 자랑삼는 자들,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며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는 자들, 바로 그런 자들이 어떤 당혹스런 만남 앞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 21쪽

언어는 사유의 도구이다. 그것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사유의 범위와 한계가 다르다는 의미이다. 언어의 한계가 사유의 한계라는 말은 자신의 존재는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로 규정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존재는 우리말 ‘있음’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영어의 ‘be’, 독일어의 ‘sein’과는 용법상 차이가 많다. 그래서 우리에게 ‘존재론’이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는 변명이 가능하다. be 동사가 없는 한국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으면서 ‘존재론’을 처음 만났지만 쉽게 그 개념이 잡히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은 원시시대부터 인간에게 유전되어온 오래된 기억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탐구와 사유의 대상이지만 좀처럼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아득함이기도 하다. 이진경의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은 ‘이진경’과 ‘존재론’의 결합이 아니라 ‘불온한 것들’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 책이다. ‘존재론’이라는 뜬구름에 도전하는 ‘이진경’은 철학자가 아니다. 다만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펴낸 책과 사유의 폭을 수용한다면 이 책은 무엇보다 ‘재미(?)’ 있을 수 있다. 어떤 재미를 찾을 것인지는 물론 각자의 몫이다.

그래서 이 책의 시작은 ‘불온성’에 대한 저자의 정의로부터 시작된다. 뜻밖의 만남에서 느끼는 ‘저들’의 당혹스런 감정이라는 정의에는 많은 함의를 포함한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저들’에게 불온한 것이 ‘우리’에게는 불온하지 않는가. 이것은 단순한 편가르기가 아니다. 저자의 대전제에 포함한 음험함을 간파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동참할 생각이 있거나 얼떨결에 그의 이야기에 말려들거나!

내가 어느 쪽에 있든, 아니 어느 쪽에 속하는지도 몰라도 깊은 가을 진지한 질문과 사색을 즐기기를 원한다면 일독을 권할 만한 책이다. ‘이진경’에 대한 믿음과 ‘불온한 것들’에 대한 호기심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구성은 단순하다. 불온성에 대한 개념과 정의로 시작한 후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힌 다음 장애자, 박테리아, 사이보그, 온코마우스, 페티시스트, 프레카리아트에 대해 분석한다. 총론과 각론의 결합인 기본적인 구성을 통해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존재론에서 벗어나 불온한 것으로 관심의 초점을 이동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불온한 것들에 대한 호기심에서 ‘나’의 존재론으로 이동이며 나와 관계 맺은 ‘너’와 ‘세상’에 대한 관심에서 인식론과 가치론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아니면 말고.

존재론은, 그 추상적인 말과는 반대로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정치적인 사유의 장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존재와 같은 추상적 단어로 많은 것을 대체하며 가리는 경우조차 만약 그 사유나 주장이 제대로 전개된 것이라면,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존재론은 자신의 사유를 걸 존재자들, 자신이 맨 처음 시선을 던진 출발점이 무엇인가에 따라 아주 다른 방향, 아주 다른 형태의 궤적을 그린다. - 352쪽

‘출구 혹은 입구’라는 부제의 에필로그에서 저자의 ‘존재론’이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존재는 존재자에 의해 결정되며 자신의 사유를 걸 존재자에 따라 아주 다른 방향과 궤적을 그리게 된다. 즉, 존재론은 자신의 삶의 방향성과 궤적에 대한 성찰이며 인과론적 차원에서 맨 처음 시선을 던지게 되는 우연과 조우하게 되는 순간의 깨달음인 것이다. 저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것은 허망한 성찰보다 뚜렷한 존재론적 접근 방식이라고 굳게 믿는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는 마이너스 존재들: 장애자, 박테리아, 사이보그, 온코마스, 페티시스트, 프레카리아트에 대한 이해와 새로운 접근 방식은 각론의 재미이다. 도구를 사용하여 원하는 결과를 얻은 원시인이 최초의 사이보그라는 주장은 신선하지 않은가. 책표지에 한 사람의 그림자가 물구나무선 모습은 책을 읽는 동안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낯설음에 대한 요구이며 새로운 시각에 대한 지속적인 충고로 들린다.

한 권의 책에서 무엇을 읽어내든 독자의 몫이라는 무책임한 말이 아니다. 이해의 폭과 넓이를 어디까지로 설정할 것인가. 스키마의 정도와 주체적인 수용능력을 일일이 표시할 수도 없다. 때로는 부딪치고 깨지고 헤롱대며 수용할 뿐이다. 그렇게 책장을 덮으려던 순간에 저자가 친절하게도 한마디 던져줄 수도 있다. 아니 그의 내밀한 의도를 언뜻 엿보일 수도 있다. 불온한 것들과 친구가 되라고, 그것은 낯설고 불편한 것들과의 만남이며 새로운 인식의 출발이라는 것을.

불온한 것들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낯설고 불편했던 것들에 익숙해지고 편안해지는 것만은 아니다. 반대로 익숙해지는 것보다 빠르게 그것들과 다시 낯설어지고, 익숙했던 것들마저 다시 낯설고 불편하게 만나는 것이다. - 358쪽


111101-09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정투쟁 - 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형식론 악셀 호네트 선집 1
악셀 호네트 지음, 문성훈.이현재 옮김 / 사월의책 / 201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자신의 욕구가 충족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심리적 기초를 형성하는 데 비해, 권리 인정은 자신이 모든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다는 점에서 자신을 존중할 수 있는 의식을 불러일으킨다. - 230쪽

대한민국 정치사에 전례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2011년 10. 26 서울시장 재보선 결과는 1979년 10. 26에 버금가는 변화를 예고하고 있지만 그 방향과 흐름을 정확히 진단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정부와 정치권은 자신들만의 시각으로 현 상황을 해석하며 검찰의 칼날을 들이밀거나 이후의 추동세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지리멸렬해질 우려가 있을 수 있다. ‘권력이 시민에게 넘어왔다’는 당선자의 말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것을 정치권과 시민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앞으로 남은 사회적 상황과 정치적 지형 변화는 어떤 스포츠보다 즐거운 게임으로 즐길 수도 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만 아니라면.

프랑크푸르트학파 계보의 3세대로 평가받는 악셀 호테트는 『인정이론』을 통해 선배들의 ‘비판이론’을 한발 넘어서고 있다. 아도르노나 호르크하이머가 주도한 1923년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는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한 분파로 발전했고 하버마스는 이들의 뒤를 이어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변동의 성격과 결과를 분석하는데 주력했다. 이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변동과 갈등 양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보이지 않는 계급사회에 내재하는 갈등의 원인은 무엇이며 이를 해소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결과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권력 투쟁’과 ‘계급 투쟁’을 넘어 ‘인정 투쟁’이라는 말로 인간의 삶과 사회적 현상을 분석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권력 투쟁은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하다. 인간의 가장 본능적이고 전통적인 ‘권력’에 대한 욕망을 갈등의 기본 원인으로 보는 관점이다. 그것은 단위사회의 크기에 따라 서로 다른 양상만을 보여줄 뿐 가장 궁극적이고 지속적인 투쟁이 될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희미해진 개념 중 하나가 계급이다. 중산층이 무너지고 상하위 소득수준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는 상황에서도 소득의 재분배나 지속가능한 사회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권력의지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계급투쟁은 모든 갈등의 원인을 ‘돈’으로 돌리려는 환원주의가 될 우려가 있지만 가장 분명하고 즉물적인 현재적 관점의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해 달라는 많은 사람들의 말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도록 열심히 일하면 일한만큼의 대가를 얻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달라는 요구이다. 지나친 소득격차, 자녀양육, 대학입시, 학벌주의, 주택문제, 노후대책 등 다양한 사회적 의제들의 밑바탕에는 언제나 경제 문제로 환원된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돈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아니, 먹고 사는 문제가 궁극적인 사회적 갈등의 근본원인일까. 호네트는 ‘인정투쟁’의 이념이 매우 오래된 역사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는 근대 사회철학의 토대가 되는 헤겔과 미드의 이론을 철저하게 분석하며 인정투쟁의 이론을 검증한다. 두 철학자가 주장한 이론적 틀이나 저작을 꼼꼼하게 읽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책을 읽어나가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확실한 개념이 자리 잡지 않은 상태의 독서는 무의미한 공상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인정의 개념은 인간의 본능에서 연유한다. 어머니와의 분리가 이루어질 수 있는 바탕에는 어머니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인정하는 첫 번째 단계가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정받지 못하면 분노하게 된다. 그것이 인간이다. 앞서 언급한 사회적 갈등과 다양한 투쟁의 근본적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인정욕구에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사랑, 권리, 연대’라는 상호주관적 인정의 유형들을 통해 현대사회에서 인정관계가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는지 분석하고 있다. 결국 폭행이나 권리의 부정 더 나아가 가치의 부정은 자기 정체성을 무시당하는 일이기 때문에 가장 극단적인 좌절과 분노를 가져온다. 인간은 돼지가 아니기 때문에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인정’이 필요한 것이다.

전체 3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마지막 사회철학적 조망에서 이 책의 부제가 된 ‘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형식론’을 펼치고 있다. 마르크스와 소렐, 사르트르의 전통을 더듬고 ‘무시와 저항’이라고 하는 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논리를 살펴본다. 이렇게 부지런히 일했고 이정도로 열심히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주어진 현실과 삶의 조건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은 도덕과 윤리적 개념으로 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사회적 갈등의 원인은 권력과 자본 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인정’은 삶의 가장 기본적이고 궁극적인 조건이며 이유가 아니겠는가. 호네트가 그것을 어떻게 분석하고 증명하고 있든 그것을 인정하는데서 우리의 고민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새로운 가치 있는 속성은 인정 행위를 통해 확인됨으로써 인간 주체의 자주성 능력을 향상시키게 되며, 이것이 바로 문화적 변동이라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진보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369쪽


111028-09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