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사상사 살림지식총서 272
여인석 지음 / 살림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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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학문의 발달은 철학에서 출발한다. 여인석의 <의학사상사>는 인류가 걸어온 의학의 발달의 역사를 더듬고 있다. 의학이 무엇이고 질병이 무엇인지 그리고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궁극적인 의문에서 출발한 이 책의 내용은 의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역사와 철학적 배경 등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식을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먼저 에피스테메이다. 이 지식은 모든 실용적 목적으로부터 자유로운 지식으로 앎 자체가 목적인 이론적 지식이다.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지식이다. 사물과 세상에 대한 원리와 원인에 대한 지식이 여기에 속한다. 두 번째 지식은 테크네이다. 테크네는 실용적 목적이라는 점에서 에피스테메와 구별된다. 예를 들어 대학의 인문대나 자연대는 에피스테메에 해당하고 공대는 테크네에 해당된다. 마지막으로 엠페레이아가 있다. 이 지식은 경험적 지식이다. 전체에 통합하지 못하고 개별적이며 단편적인 지식을 말한다.

 의학은 엠페레이아에서 출발했다. 경험을 통해 개별 질병들에 대한 치유법과 처방을 내렸다. 차츰 테크네로 발전해서 에피스테메를 추구하는 학문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의학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에도 적용될 수 있는 일반론일 수 있지만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 고대 의학을 발달 과정을 돌아보는 일은 의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에게도 관심을 가질 만하다. 의사에 따라 환자의 질병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증상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원인과 처방을 내릴 수도 있고 객관적이고 관습적인 치료나 처방이 아니라 개별 환자들에 대한 관심과 인간의 질병과 생명의 본질에 대한 관심과 연구를 지속하는 의사는 분명히 구별될 것이다. 의사 한 명이 신체의 모든 분야와 질병에 대해 통달할 수는 없지만 전체적이고 통합적인 관점에서 환자와 질병을 다루는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가벼운 증상인 경우 평균 진료 시간 3분을 넘지 않는 현실을 감안하면 우리의 몸은 정형화된 질병들의 이름 속으로 규정된다. 같은 곳에 같은 증상이 있어도 원인과 처방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은 막연한 것일까.

 질병은 몸의 균형상태가 깨지면서 시작된다. 수많은 원인 중 가장 큰 원인을 찾아 치료하고 건강을 회복한다. 같은 증상이 반복되는데도 같은 처방이 효과가 없을 때가 있다. 질병의 원인에 대한, 혹은 생명 자체에 대한 인간의 탐구는 계속되겠지만 현대 의학으로도 풀리지 않는 현상들은 의학의 발전 단계에서 우리가 어디쯤 걸어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

 더구나 한의학과 서양의학은 충돌이나 대립보다 상호 보완적인 측면에서 관계 맺고 같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협진 체제가 요구된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들이다. 병원에서 고치지 못하는 것을 한의원에서 손쉽게 낫게 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가 허다하다. 현대인들은 사회의 발전이나 문명의 발달에 따라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한 원인에 의한 질병들에 의해 고통 받는다. 고통 받는 환자 입장에서는 의학의 발달 과정을 돌아보고 하나의 고정된 의사 양성과정과 치료법이 주는 형식들을 걷어내고 싶을 때가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연구과 숙련을 거쳐 환자의 몸과 마음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의사들의 질병과 생명에 대한 태도와 마음가짐이 궁금하다.

 어떤 분야든 전문가 집단의 노력과 자세에 따라 그 대상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의학의 경우 중요성을 두 번 거론할 필요도 없이 인간의 몸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의학이 걸어온 역사와 의학에 대한 관점들을 들여다 보는 일은 우리 몸에 대한 관심이다. 한 마디로 규정될 수도 없고 규정된다고 해서 의학의 발달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겠지만, 의학이 나갈 방향과 의사들이 질병과 생명에 대해 갖는 연구 태도와 환자에 대한 자세를 반성해 보는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이 갖는 의미이다.


070226-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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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2-27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들어와 리뷰를 읽고 갑니다. 잘지내고 계시죠.

sceptic 2007-02-27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님도 늘 건강하세요.

외로운 발바닥 2007-03-05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주변에 의사들이 많아서 기본적으로는 의사들에게 호감을 갖고 있습니다. 개인별로 의사, 또는 병원과 관련하여 가진 경험으로 인해 의사들에 대한 생각이 정말 크게 차이나는 것 같습니다. 의료사고문제, 보험수가 적정화문제, 전공의들에 대한 착취문제, 의과대학 내부의 군대보다 더한 권력구조, 의사들에 대한 무조건적 적대심의 사회적 확산 등 정말 골치아픈 문제가 많은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의사들도 만족하면서 환자를 볼 수 있어야 결국 환자들한테도 이익인데 주변에 보는 의사들 중 상당수가 직업에 대한 만족도가 상당히 낮은 것 같아 걱정입니다...

sceptic 2007-03-05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사라는 직업 자체보다도 의사의 역할과 일반인이 가지고 있는 의학에 대한 개념도 한번쯤 생각해보아야하지 않을까 싶어져요...
 
자살 살림지식총서 222
이진홍 지음 / 살림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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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자살자살자살자살자살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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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교시절 문예반 시화전에 걸었던 시의 마지막 부분이다. 사춘기의 우울한 자화상의 반영이기도 하고 생에 대한 환멸을 다른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자살과 살자를 뒤짚어 결국 ‘살자’로 결론 내렸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죽음을 염려하거나 두려하는 것과 자살은 다른 문제이다. 생명의 탄생과 소멸 과정을 생의 자연스런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들의 운명이다. 그 자연스러움에 대한 반역이 자살이다.

 자신의 생에 대한 주체적 권리로서 자살을 바라볼 것인지 아니면 반인륜적이고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자살의 문제를 개인과 사회,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물론 개인의 문제로 국한시킨다 하더라도 자유인의 권리인지 아니면 불가피한 선택인지의 문제는 남게 된다. 인간이 자신에게 행사할 수 있는 마지막 자유인가, 생의 극단에서 불가피하게 선택하는 절망인가.

 2005년 통계에 따르면 교통사고 사망자보다 자살로 사망한 사람이 1.5배나 된다. 하루도 빠짐없이 뉴스시간마다 마주하는 교통사고와 사망자들의 모습 이면에 감추어진 자살은 점차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1만 2천여 명이 한 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대한민국에서만 매일 30여명이 자살로 죽는다는 이야기다. 최근의 연예인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해 뉴스에 오르내리지만 신분과 나이, 직업, 종교와 무관하게 지속되는 자살은 무엇인가.

 이진홍의 <자살>은 사회적 측면에서 그리고 문화와 환경, 윤리적 측면에서 다각도로 자살의 의미를 살펴보는 책이다. 살림지식총서의 특성상 제한된 분량이지만 에밀 뒤르깽의 <자살론>이나 죽음과 관련된 책들이 부담스럽다면 가볍게 접근해 볼만 책이다. 자살을 역사적 측면에서 고차원적으로 바라보는 책도 아니고 심리적 배경이나 사회 문화적 관점으로 깊이있게 다루고 있지는 못하지만 가볍게 그러나 진지하게 읽을 만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살은 설사 그 사람 자신에 있어서는 부정한 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국가에 대해서는 하나의 부정이다”라고 단언했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5권 15장) - P. 25

아주 오래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말은 자살을 개인이 아닌 국가의 차원에서 바라본다. 개인의 인권보다 국가의 권력이 우선시되던 시대이니 당연한 말이다. 관점은 달라졌지만 종교와 사회적 분위기 그리고 때로는 유행처럼 번져나가기도 한다. 주변에서 마주치는 사고사나 병사, 자연사와 달리 자살은 그 휴유증과 파장이 만만치 않다.

대개의 경우에는 오직 스스로를 파괴해 버리고자 했던 강력한 의지를 제외한 다른 분명한 해독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자살의 원인은 영원한 비밀로 남을 뿐이다. - P. 53

유서로 밝혀진 단순한 이유만으로 알 수 없는 자살의 원인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생에 대한 욕망을 극복할 만한 강렬한 유혹은 무엇일 수 있을까하는 궁금증은 자살의 유혹이나 충동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다. 비록 미수에 그치건 성공하건 개인의 운명은 이후에 극명하게 갈라지게 된다. 그것은 단순한 생과 사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과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의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쉽게 말하고 더 쉽게 잊는다. 지나간 시간들과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망각은 생을 좀 더 행복하고 단순하게 살아갈 수 있는 원천이 되는지도 모르지만 묻혀버린 진실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저자 이진홍은 이런 말로 <자살>이라는 책을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극지에 서는 것과 같이 위험한 일이다.”(태공망, 文師)


070223-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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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소설 외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59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책세상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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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서 가장 불효했던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난센스 퀴즈의 답은 에밀 졸라.

 소설보다 먼저 드레퓌스 사건 당시 <나는 고발한다>는 선언문을 통해 행동하는 양심과 지식인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던 그의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프랑스 문학과 지성사에 빛나는 별들 중에 가장 문제적인 소설가 중 한 사람이었던 에밀 졸라는 <목로 주점>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책세상’에서 나온 <실험소설 외>는 ‘실험소설’과 ‘소설에 대하여’, ‘비평에 대하여’, ‘공화국과 문학’을 포함하고 있다. 그의 소설에 대한 견해과 문학 정신의 뿌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글들이 묶여 있다.

 계몽 철학의 시대를 거쳐 도달한 19세기는 다양하고 중요한 문예사조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자연주의’는 낯설고 새롭다. 기존의 문학에 대한 통념이 사라지고 자연과학적 방법을 문학에 접목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과격하기까지 하다. 자연과학적인 실험과 관찰의 방법을 그대로 문학에 적용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 ‘실험소설’은 과학과 문학의 만남을 필연적이라고 강변한다. 클로드 베르나르의 ‘실험의학 연구 입문’을 읽고 깊이 감명받은 에밀 졸라는 의사를 소설가로 바꾸어 놓으면 그대로 자신의 주장이 된다고 말한다. 작가의 개성과 생각을 이렇게 강렬하고 자신있게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은 용기에 해당한다.

 우회적인 방법은 안전하지만 개성이 없다. 에밀 졸라의 선명한 주장이 담고 있는 위험성만큼이나 매력적이고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소설에서 직접 적용했지만 그의 시대는 길지 않았다. 그를 따르는 소설가가 많지 않았고 문학적인 성취가 뛰어난 작품이 뒤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는 순환하고 역사는 반복된다.

 작가는 의사처럼 사회의 메커니즘을 파악해서 처방전을 내놓아야 한다는 주장은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놀라운 주장이다. 작가의 역할과 문학의 효용에 대한 지루하고 역사적인 논의와 관련해서 이렇게 명쾌하고 자신있는 주장을 했던 사람이 있을까 싶다. 뚜렷한 목적의식과 작가의 소명의식은 작품으로 발현되어야 한다. 에밀 졸라는 구체적인 작품들을 통해 그것을 실천한다.

 졸라의 ‘실험소설’에서 주장하는 핵심적인 주장은 다음의 문장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타인의 행동을 타인의 다른 행동들을 통해 검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일정한 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고찰한다. 한마디로 우리는 실험적 방법에 의존한다.(클로드 베르나르, 실험의학 연구 입문)” 내가 앞서 말한 모든 것은 과학자의 문장인 이 마지막 세 문장에 요약되어 있다. - P. 25

고전주의적, 낭만주의적 문학이 스콜라 철학과 신학 시대의 문학이었던 것처럼, 실험소설은 한마디로 우리 과학 시대의 문학이다. 이제 응용과 윤리라는 중요한 문제로 넘어가자. - P. 37

 인물들의 태도나 행동은 자연과학적인 실험과 관찰, 즉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한다. 현상으로 나타난 결과는 반드시 원인이 있으며 그것을 찾아내고 밝혀 나가는 것이 소설의 역할이라고 에밀 졸라는 주장한다. 소설을 읽는 목적과 대하는 태도가 독자마다 다르겠지만 현대 소설은 에밀 졸라에게 일정 부분 빚지고 있는 부분이 많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소설가들에게 내면화 되어 있는 부분들을 읽어낼 수 있다면 에밀 졸라의 영향력을 확인하게 된다.

 현실의 문제를 재현하고 우리의 처한 상황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돕는 역할을 소설은 할 수 있다. 그것을 개성적으로 표현하는 일이 작가의 역할이며 사명이다. 그의 주장이 과격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낭만주의와 계몽주의 소설이 보여주지 못했던 새로운 영역을 보여준다.

 그러나 자연주의로 분류되는 그의 주장이 가진 문제점은 사실주의와의 변별점이다. 현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해야 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면서 자연주의는 보다 과학적이고 인과적인 관계에 무게를 둔다. 실험과 관찰이라는 과학적 방법에 철저히 기대고 있지만 이전의 소설들이 보여주지 못했던 사실적이고 치밀한 완결성을 보여준다. 명확하게 분류할 수는 없지만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의 경계를 가르는 것이 초점은 아니다.

 <실험 소설 외>는 에밀 졸라의 소설과 비평 그리고 문학에 대한 생각들을 명확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또한 역자 유기환의 해설은 에밀 졸라의 생애와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에 도움을 준다. 가보지 않은 길을 누군가 먼저 걸었다면 그 결과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무관하게 용기와 박수를 보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자신의 신념에 기댄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더더욱.


07022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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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타인의 행동을 타인의 다른 행동들을 통해 검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일정한 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고찰한다. 한마디로 우리는 실험적 방법에 의존한다.(클로드 베르나르, 실험의학 연구 입문)” 내가 앞서 말한 모든 것은 과학자의 문장인 이 마지막 세 문장에 요약되어 있다. - P. 25

고전주의적, 낭만주의적 문학이 스콜라 철학과 신학 시대의 문학이었던 것처럼, 실험소설은 한마디로 우리 과학 시대의 문학이다. 이제 응용과 윤리라는 중요한 문제로 넘어가자. - P. 37

소설가는 재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현실 감각 다음으로 작가의 개성을 강조하는 이유다. 위대한 소설가에게 필요불가결한 것은 현실 감각과 개성적 표현이다. - P. 81

소설에서, 인간 탐구에서 나는 전술한 대로 인간을 결정하고 완성하는 환경을 그리지 않는 모든 묘사를 단호히 비난한다. 지금까지 충분히 많은 오류를 저지른 덕분에 이제 나는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안목, 심지어 권리를 가졌다고 자부해도 좋지 않을까. - P. 88

스무 살의 젊은이들이 많은 것을 알 수는 없다. 그들은 아직 모색 단계에 있다. 하지만 그들은 고역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 속에서 모든 것을 다시 세우기 위해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낀다. 그것은 진정 아름다운 시절이다. 이 시절의 젊은이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후일 조심성 많은 어른이 되었을 때, 그들은 이 뜨거운 욕망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 P. 102

빵과 명예에 대한 탐욕은 반드시 고결한 정직성을 훼손하기 마련이다. - P.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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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3-24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늙었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나이를 먹고보니 요즘은 102쪽의 글들이 늘 가슴에 남아요.
하루하루 꽉 채워서 살고 싶은데 생각처럼 되지 않는군요.
좋은 주말,멋진 주말 보내세요.

sceptic 2007-03-26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들 인생은 언제 늙고 언제 젊은지 알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매일 매일 전부하고 생각하는 하루살이가 되려고 노력해요. 행복하세요.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랜덤 시선 16
김경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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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웅 시인으로부터 “한국어로 씌어진 가장 중요한 시집 가운데 한 권”이라는 찬사를 받은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단 한 줄에 기대어 시집을 샀다. 우연히 만난 젊은 시인에 대한 평가 때문에 책을 사는 일이 드문데 무모할 정도의 평가에 호기심이 동했다. 게다가 ‘랜덤하우스중앙’에서 발간한 시집이었으니 뒤적거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종의 편견이지겠지만 창비나 문지, 실천문학사나 민음사 등 몇 개의 출판사는 시집을 선택하는 데 있어 내게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편식과 편견은 귀차니즘과도 연결되어 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돌아다니며 찾아 나서는 게 귀찮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좋은 책을 놓칠 기회도 많아진다.

 김경주의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는 너무 거창한 평가와 기대 때문에 편안한 읽기가 불가능했다. 시집 전체를 훑어내거나 단편들 속에서 명문을 찾아내거나 하는 재미를 잃어버렸고 초조한 마음으로 읽어나갔다. 특이한 경험이었다.

외롭다는 것은 바닥에 누워 두 눈의 음(音)을 듣는 일이다 제 몸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외로움이란 한 생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사랑이다  - ‘우주로 날아가는 방1’중에서

외로움이라는 인간의 표정 하나를 배우기 위해 산양은 그토록 별자리를 기억하고 있는지 모른다 바바게스트 하우스 창턱에 걸터앉은 젊은 붓다가 비린 손가락을 물고 검은 물 안을 내려다보는 밤, 내 몸의 이역(異域)들은 울음들이었다고 쓰고 싶어지는 생이 있다 눈물은 눈 속에서 가늘게 떨고 있는 한 점 열이었다  - ‘내 워크맨 속 갠지스’중에서

 다소 당황스럽다. 외로움에 대해 직설적으로 말하는 시를 오랜만에 만나는 기분이다.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서정시라지만 그것을 어떻게 보여주느냐 하는 것이 시인의 능력이라지만 ‘외로움’이라는 단어 자체가 불러일으키는 파장 자체가 만만치 않다. 그러나 ‘그러므로 외로움이란 한 생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사랑이다’라는 선언 앞에서 무력해진다.

 인간의 본질적인 외로움에 대해 토해내는 시인들의 말이 이제는 진부할 만큼 감동과 울림이 없는 이유는 삭막해진 가슴 때문이거나 감정을 드러내는 일 자체가 사치스러운 상황 때문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눈에 보이는 시각적 이미지나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되는 시대에 외로움이나 고독이 설 자리는 많지 않아 보인다. 근원적인, 가장 밑바닥에 자리잡은 감정들에 대해 말해야 하는 ‘서정시’의 시대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인지는 시인들만의 몫은 아니다. 전업작가로, 특히 시인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시를 길어 올리고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끌어내는가에 대한 관심과 개인적인 호기심을 넘어서 문학에 대한, 혹은 시에 대한 전망이 안개 낀 유리창과 같아 보인다.

 김경주의 첫 시집은 주목받을 만한 첫 시집은 그만한 찬사가 어울리든 아니든 ‘생활’ 속에서 마주치는 것들에 대한 촘촘한 그물망과 마주하게 된다.

어쩌면 벽에 박혀 있는 저 못은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깊어지는 것인지 모른다

이쪽에서 보면 못은
그냥 벽에 박혀 있는 것이지만
벽 뒤에 어둠의 한가운데서 보면
내가 몇 세기가 지나도
만질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못은
허공에 조용히 떠 있는 것이리라

- ‘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중에서

 일상을 벗어나서 우주나 존재론적 측면에서 인간에 대해 접근하는 시들에게 주어진 사명과 김경주의 이 시집에 드러난 접근 방식은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한국어의 의미와 영역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 끊임없이 실험하게 될 시인의 목소리는 이후에도 계속되리라 믿는다. 극찬과는 무관하게 묵묵히 그리고 자신의 길이 무엇이라는 생각도 없이 걸어가는 과정 속에서 보여주는 이야기들을 들어볼 참이다.

‘이 무시무시한 신인의 등장은 한국 문학의 축복이자 저주다’라고 평가를 받은 시인이 도대체 다음에 어떤 시를 써야 하는지 의문스럽다. 권혁웅 시인의 평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도 독자들의 몫이겠지만 프로스포츠 신인왕 2년차의 징크스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시인의 몫이다. 첫 타석에서 홈런을 쳤다고 박수치는 소리에 어리둥절하지 않기를. 한 동료시인의 주관적 박수소리에 매몰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07022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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