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지도 - 동양과 서양,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리처드 니스벳 지음, 최인철 옮김 / 김영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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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과 서양의 구분과 영역은 명확하지 않다. 굳이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빌려오지 않더라도 동양은 서구 중심의 용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유럽에서 볼 때 우리는 동쪽에 위치한 중동을 포함해서 일본까지 모두 동양이 된다.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유럽과 미국은 물론 서양이 된다. 방향은 기준에 따라 달라지지만 일반적인 용어로 굳어졌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언어는 많은 것을 규정한다.

  미국인 심리학자 리처드 니스벳의 <생각의 지도>는 동양과 서양이라고 하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정작 동양의 모태가 되었던 중동, 즉 이슬람 문화권은 빠져있다. 어쨌든 곁가지를 모두 잘라내고 나면 이 책에서 말하는 동양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이 양념으로 들어간다. 서양은 유럽을 포함한 미국을 지칭한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통상적인 방법으로 구분한 동양과 서양을 들여다보는 일도 의미가 있을까하는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이 이 책에 대한 첫 번째 느낌이다.

  그러나 기준과 전제가 불문명하고 쉽게 동의할 수 없지만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명쾌하고 설득력 있게 전개된다. 심리학자들의 실제 실험들이 얼마나 객관적이고 설득력이 있는지 따져볼 필요는 없다. 세상에는 수많은 경우가 수가 존재하고 실험의 목적과 과정 자체가 완벽하게 객관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의 인식 상태와 사고 구조에서 객관이라는 용어 자체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은 주관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객관성을 위한 노력들과 서로 상반된 두 개의 관점을 인정할 만하는 것이다. 2004년 4월에 나온 책을 2007년 1월에 22쇄를 찍었으니 엄청나게 팔렸다.

  많이 팔리기 위해서는 적당한 분량과 흥미 있는 내용, 간결하고 쉬운 문장 등의 요소를 갖춰야 한다. <생각의 지도>는 이런 조건들을 잘 갖추고 있다. 특히 동양과 서양을 비교하는 중심에 ‘사람’을 놓았다. 사람들의 생각과 심리적 차이는 독자들에게 매력적인 텍스트가 된다. 더구나 저자인 니스벳 교수에게 지도받은 역자 최인철은 사회심리학자로서 전문가답게 적절하고 쉬운 설명으로 번역한 책이 지니는 어색한 문장이나 전체적인 흐름과 맥락들을 잘 다듬어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다.

  동양(사람)은 도를 중시하고 더불어 사는 삶과 전체를 보는 시야, 상황론, 동사와 경험을 중심으로 한다. 이에 반해 서양은 삼단 논법을 중시하고 홀로 사는 삶, 부분을 보는 시각, 본성론, 명사와 논리를 중심에 놓고 있다. 이 책은 8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이것들을 각각 비교하고 실제 실험을 통한 결과들을 제시함으로써 설득력을 얻고 있다. 마지막에 동양과 서양에서 벌어지는 사고 방식의 차이는 어디에서 기원하는지, 그리고 누가 옳은 것인지에 대해 필자의 견해가 덧붙혀져 있다.

  컵은 옆에서 보면 사각형 위에서 보면 원형이다. 하나의 사물이나 사건을 놓고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이나 프랑스 영화 <라 빠르망> 등 영화에서 자주 사용하는 기법 중의 하나인 서로 다른 관점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방향과 위치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문화의 지도는 정확하게 칼로 잘라 낼 수 없다. 하지만 일반적인 관점에서 사람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선입견의 벽은 무섭다. 그러나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접근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사소한 것이 큰 차이를 만든다. 항상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화법의 주인공들에게도 유효한 책이다. 동서양의 차이나 문화의 다양성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에 대한 교훈까지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다.

  가볍게 그러나 사소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읽고 싶은 사람에게 권해줄만한 <생각의 지도>는 당연하게 여기는 통념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기도 하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고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차별과 평등은 먼 곳에 있지 않고 늘 우리들 주변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아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알고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이야기가 된다. 우리는 외국인 노동자와 장애인과 노숙인과 동성애와 여성과 양심적 병역 거부자와 북한과 심지어 가난한 사람들까지도 서양이 동양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070417-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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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장수 2007-04-18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미있게 읽은 책인데 멋지게 쓰신 리뷰를 보니 반갑습니다.
22쇄의 힘에는 분명 대학교재의 공이 크겠지만 22쇄 찍힐 만큼 많은 사람이
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짱꿀라 2007-04-18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얾음장수님처럼 저도 잘 읽고 갑니다. 저 또한 읽은 책인데 많은 도움을 받았답니다.

sceptic 2007-04-20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음장수님이나 santaclausly처럼 제게도 많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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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릴케 <두이노의 비가> ‘우리가 그토록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것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이다.’는 글에서 제목을 빌려왔다는 은희경의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는 그의 소설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겉으로 드러난 외모의 아름다움과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미적 쾌감에 대한 반응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아름다움’이라고 통칭되는 것들에 내재한 감각적 흥분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본능에 가까운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다만 그것이 인생에 적용되지 못하는 아이러니에 대해 우리는 늘 안타깝게 수런거린다. 창밖의 빗소리처럼 들릴듯 말듯 속삭이는 생의 이면들에 대해 하늘의 별처럼 명료한 목표와 동경이 없어도 우리는 걷는다. 그 비루한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므로.

  시간의 누적으로 쌓여온 단편들을 묶어내는 일이 소설가에게 쉼표와 같다면 독자들에게는 시대와 세월의 나이테를 들여다 보는 일과 같다. 은희경의 소설은 아름다움으로 빛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에게 낯설고 허무한 생의 간극들을 확대경처럼 보여줄 뿐이다. 냉소적이거나 비관적이지 않으면서 긍정과 희망의 웃음을 함부로 흘리지도 않는다. 소설의 한 구절을 인용해서 한 권의 소설집에 나타난 특징들을 살펴볼 수는 없다. 시처럼 소설도 결국 독자들마다 다가오는 느낌이 다르고 마음의 결마다 묻어나는 향기가 다른 법이기 때문이다. 단편 ‘고독의 발견’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익숙한 목소리를 낸다.

언제부터 그랬던 걸까. 그때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언제부터인가 내 곁에서 나만 모르는 일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언제부터일까. 나는 언제부터 이들 사이에서 제외되어 있었을까. -  P. 63

  누구나 하고 싶은 말들을 작가가 대신 토해낼 때 우리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울컥했던 마음들이 정화되거나 확인되지 않았던 감정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은희경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살아가는 것 같은 사람들의 빈 곳을 보여준다. 문장은 수려하지만 화려하지 않고 목소리는 높지 않으나 강건하다. 의심을 찬양하거나 고독을 발견하는 일은 일상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일이다. 하지만 독자들의 입장에서 ‘의심’과 ‘고독’을 즐길 만큼 미학적인 사람은 많지 않다. 생활인과 소설가는 그만큼의 간격을 벌리고 서서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으면 좋겠다.

  몸이 계급인 현대 사회에서 다이어트와 기아飢餓는 공존한다. 지구 한 구석에서는 10세 미만의 아이들이 5초에 한 명씩 굶주려 죽어가지만 또 다른 현생 인류는 몸에서 살을 제거하기 위해 가히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붓고 있다. 단지 아름다움을 위해 목숨 걸고 살을 빼는 사람들과 구별되는 주인공의 행위도 결국에는 현대인의 모호한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으로 밖에 비쳐지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결국 나를 멸시한다. 내가 아름다움을 멸시할 수는 없으므로.

  날씨와 생활은 은희경의 소설과 함께 도착한 오디오북에 수록되어 있는 단편이다. B라는 소녀의 엉뚱한 상상을 시작으로 한 성장소설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우리들 삶이 보여주는 부조리에 관한 보고서이다. 차안에서 들려오는 차분한 성우의 목소리가 들려주는 은희경의 소설은 라디오의 단막극처럼 건조하게 들렸다. 처음 접해보는 오디오북이 내게는 모래바람처럼 귀가에 맴돌았고 운전하는 내내 머릿속만 울리다 돌아 나가버렸다. 나는 듣는 체질이 아니라 읽어야만 하는 활자 중독증 환자다.

  활자에 중독되었든 지도에 중독되었든 현실을 견디는 비법을 누구나 한가지 쯤 지니고 있다. 현실 밖에서 곰을 만나는 일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를 여행할 확률만큼이나 낮다. 그 확률에 기대어 소설을 쓴다는 것은 상황의 우연성이 상징하는 현실의 우발성은 아닐까. 반복적이고 비루한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용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밖의 것들에 대한 모호함 때문이다. 불확실한 미래만큼 잡히지 않는 투명한 막들에 둘러쌓인 상상계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그랬을 것이다.
 
  현실계를 벗어나 상상 속의 먼 우주를 유영하는 유리 가가린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것은 우주 밖에 떠도는 우리들의 꿈에 대한 환멸이 아니라 현실 속의 암흑을 떠도는 나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특별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나 평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이야기가 소설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삶은 그런 식으로 비루하게 이어지는 거고, 우리는 아버지들의 위선 속에 세상을 배우는 거잖아.(108페이지)’라고 툭 던지는 한 마디 속에 유리 가가린의 꿈은 좌절하고 만다. 그 두려움과 상상할 수 없는 영원 속으로 떠나고 싶게 하는 것은 신형철의 해설처럼 은희경의 소설이 아름답고, 낯설고, 허망하기 때문이다.


070415-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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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뇌를 알고 가르치자
김유미 지음 / 학지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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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두뇌에 관한 호기심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들에 대한 것만으로도 신의 영역을 들여다 본 듯이 신기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모두 알고 싶은 욕심도 없다. 특히, 물질적인 뇌의 구조와 영역을 나누고 각각의 역할을 실험했던 수많은 과정들 때문에 의학의 발달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심리학이나 교육학 등 인류의 문명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알고 있는 것과 알고 싶은 것 사이에는 늘 ‘문’이 존재하는 법이라고 한다. 후회할지언정 인간은 늘 그 문고리를 잡아당기고 만다.

  인지 심리학이나 교육학의 경우 기초 학문 분야의 성과를 바탕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인지 신경 과학의 경우 뇌전도나 MRI 촬영이 블랙박스를 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어쨌든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원을 파악하는 것은 뇌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그 한 축을 형성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몸과 영혼을 관장하는 뇌의 기능을 안다는 것은 인간의 학습과 행동과 반응 등 많은 것들을 설명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교육 분야에서 두뇌 기반 학습에 관한 관심과 연구는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학지사에서 2002년에 나온 김유미의 <두뇌를 알고 가르치자>는 3쇄가 발행되었지만 앞으로도 계속 많은 독자와 만나게 되었으면 좋겠다. 단순히 두뇌에 대한 관심이나 교육에 대한 흥미로 접근하는 독자들에게도 권할 만하지만 잘못된 상식과 모르고 저지르는 아이들에 대한 실수들을 줄이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 모두에게 좋은 안내서가 될 수 있겠다.

  뇌에 관한 기본적인 구조와 기능은 물론이고 연령별 두뇌 발달과 연구 성과들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는 이 책은 궁극적으로 교육에 관한 많은 시사점을 전해 준다. 특히 아동의 다양성에 관해 가드너의 ‘다중지능이론’이나 풍요로운 경험의 중요성, ‘주의注意’, ‘정서’, ‘음악’ 등과 관련된 이론과 교육의 적용에 관한 이야기들은 귀 기울여 들을만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사실들은 원인과 대책을 모를 때가 많다. 원인을 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의 경우 그 해법과 대안은 자연스럽게 찾아지기 마련이다. 예전부터 그래왔다는 막연함이나 이유를 알 수 없는 막막함으로부터 뇌에 관한 연구는 인간을 밝은 세상으로 나오게 해 주었다. 다양한 과학 기술의 발달과 지적 호기심의 결과 불과 몇 십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을 손쉽게 알아내고 있다. 단순한 누적적 지식의 양으로 인간의 문명을 판단할 순 없지만 우리의 미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적응하기 힘든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뇌에 관한 연구도 이와 같이 계속될 것이고 그 성과 또한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러나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돌아 볼 필요가 있다. 부모가 아이들을 키우고 대하는 태도가 어떠하며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가르치는 궁극의 것들이 무엇인가에 대한 반성도 필요하다. 두뇌 기반 학습이 효율적이라면, 그것을 수업에 활용할 때 놀랄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면 분명 반길만한 일이다. 하지만 교육의 목적과 사회의 변화에 따른 교사들의 태도 변화와 궁극적인 지향점에 대한 반성이 없다면 뛰어난 전술들은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만다.

  훌륭한 전략에 대한 적절한 논의와 관심 그리고 효과적인 전술들이 결합될 수 있는 풍토를 상상해 본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들이 모두 다 교육에 반영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맹목적인 경쟁과 가진자를 위한 교육에는 근본적인 대책과 해결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원론적인 수준에서 ‘잘해보자’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3불 정책을 흔드는 몇몇 대학들의 배타적 이기주의와 0교시 부활에 관한 소식들이 뉴스 일면을 장식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교육을 위시한 모든 정책들은 언제나 기득권 보호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고 세상은 불온하고 검은 그림자를 굳이 숨기지도 않는다. 번지르르한 말과 명분뿐인 구호들만 난무하는 세상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지. 신동엽의 말처럼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07041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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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4-12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너무 잘 쓰셔서 모시고 갑니다. 모시고 가도 되죠. 행복하세요.

비로그인 2007-04-13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멩이만 남기고 껍데기가 가는 세상은 언제나 올지..
교육에 관한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고 답도 없고 이야기 끝에는 꼭 한숨이 섞입니다.

sceptic 2007-04-15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antaclausly님 쓸데없는 글 가져가셔도 물론 상관없죠. 늘 건강하세요.

承姸님, 답이 없어도 끝없이 답을 찾아야 하는 것이 현실이죠. 내일부터 또 찾아봐야죠...
 
전갈
김원일 지음 / 실천문학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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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이노피온 왕이 오리온을 장님으로 만들자, 복수하러 나선 오리온 같네.” 안나가 커피를 홀짝거렸다.
  “장님이 된 처지에 왕을 복수한다고? 내가 그렇게 보여?”
  “전갈자리 신화예요. 신탁을 받은 오리온이 시력을 회복해선 복수하러 나섰다가 여신 아르테미스의 설득으로 마음을 바꾸었죠. 아르테미스의 오빠가 아폴론인데, 누이가 미남 오리온을 사랑하게 될까바 전갈을 보내 누이를 지키게 했는데, 오리온이 전갈 독침에 죽었죠.”

  김원일의 장편소설 <전갈>의 제목과 관련된 신화의 한 장면이다. 주인공 강재필와 안나가 나누는 대화가 인상깊다. 한 인간의 숙명은 어쩌면 신화의 시대부터 운명 지워진 것은 아닐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디선가 느꼈거나 보았던 익숙한 기시감은 운명처럼 발목을 감싸고 목을 조여오기도 한다.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그닥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어떤 운명을 타고 태어나 누구와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가느냐가 가장 중요한 일처럼 보일 때가 있다. 물론 그것은 삶에 대한 각기 다른 방식의 해석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보통 인생을 ‘만남’이라는 주제로 읽어내면 그렇다는 얘기다.

  한 인간은 태어나면서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복권 추첨과 같다. 1차적으로 인종과 국가, 부모와 환경을 선택할 수 없는 우연의 산물이 인생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는 역사의 현장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현실적인 인간이 과거 속의 인간을 대신 살아내는 과정은 설명하기 힘들다. 조부와 부모의 삶은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 속에 분명하게 살아 숨쉰다.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현재형으로 이어지는 진행형의 과거이다. 나는 부모의 미래형이며, 부모는 나의 과거형이다.

  밀양이라는 소도시를 배경으로 독립운동에 몸담았다가 만주 731부대 위병초소 근무를 했던 조부와 도시 빈민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부친의 삶은 주인공에게 그대로 대물림된다. 주인공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 조부의 행적을 쫓는 일은 다분이 작위적이다. 감옥에서 독학으로 대입 검정 고시를 마쳤다고 하지만 출소해서 조부의 행적을 쫓는다는 설정은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 그러나 소설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담담하게 쫓아가면서 이 땅에 태어나 굴곡진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온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격앙된 목소리도 아니고 냉소적인 비판도 아니다. 지나간 시간들을 찬찬히 훑어보고 조금씩 현재와 과거를 이어나가는 목소리가 진지하고 차분하게 들린다.

  김원일의 관심과 소설적 이력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편소설 <전갈>은 치명적인 독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 독의 근원을 묻고 있는 작품이다. 어떻게 만들어진, 누구를 향한 독인가에 대해 묻고 싶어지는 소설이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역사와 사회를 조망하고 그것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말하는 소설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단순히 스토리가 주는 흥미와 사건 전개의 재미가 아니라 현재 우리들의 삶의 뿌리에 대해 되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결코 가볍거나 만만치 않은 주제를 3대의 삶을 교차적으로 제시하면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은 담백하고 간결한 문장과 함께 대가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최근의 소설이 보여주는 경쾌함과 발랄함 속에서 김원일류의 소설들이 지니는 의미는 결코 간과할 수 없다. 독자의 입장에서도 묵직하고 감동적인 작품을 만나 느끼는 긴 여운은 또 다른 재미를 확인하게 된다. 소설은 결국 우리들 삶의 모습을 반영하게 마련이다. 외면하고 고개 돌려도 우리들의 모습의 과거이며 현재이며 미래이다. 그런 면에서 <전갈>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끝나지 않은 역사의 단면이다.

  항상 밝고 행복한 일로 가득한 인생이 없겠지만 철저하게 망가지고 비참한 인생도 찾기 힘들다. 소설은 보통 후자에게 애정과 관심을 보낸다. 주류와 보통 사람들 너머에 있는 사람들, 정상분포곡선의 좌우측 끄트머리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가운데 서 있는 사람들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시대 정신은 당대의 관심과 문화, 철학적인 배경이나 가치관을 반영하지만 소설은 그 모든 것들을 뛰어넘어 구석구석을 뒤집고 다니며 먼지를 털고 젖은 이불을 널어 말리듯 모두에게 햇빛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와 독자가 소설에서 건져 올려야 하는 것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장편이었다. 개인적인 느낌이겠지만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다양한 소설가들의 다양한 소설들은 타인의 삶에 대한 애정과 통찰을 키워준다. 어디 내 인생만 중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으며 나의 고통만을 이야기할 수 있으랴.


07041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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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모든 얼굴 - 현대 회화의 사유
이정우 지음 / 한길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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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겨울 마그리트전에서 느낀 것은 일차적으로 원본에 대한 강렬함이었다. 진중권의 <미학오딧세이>나 다른 책들을 통해 만났던 그림들을 볼 때마다 원본 없는 이미지를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었다는 이상한 느낌이 든다. 마치 영화배우를 스크린이 아닌 실제로 만났을 때의 당혹감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이미지를 통해 원본의 아우라를 잃어버린 예술을 접하는 일은 감동없는 그림 읽기에 불과할 때가 있다. 이런 그림, 혹은 이미지들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철학아카데미 원장 이정우는 <세계의 모든 얼굴>에서 현대 회화의 사유 방식을 보여준다. 철학의 개념들과 현대인들의 사유 방식을 그림이라는 창을 통해 보여준다. 그 창은 맑고 투명한 창이 아니라 왜곡되고 구부러진 볼록 렌즈나 오목렌즈와 비슷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 없이는 현대 회화의 사유도 읽을 수가 없다.

  그림을 통해 현대사회의 사상의 흐름을 읽어내고 세계의 면들을 밝혀내는 작업은 단순한 회화와 철학의 만남을 넘어서 세계를 인식하고 사유하는 또 하나의 틀을 제공한다. 분석틀은 세상에 대한 잣대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의식에 대한 것일 수 있다. 안과 밖을 통틀어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분석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틈을 메우는 작업의 결과물로 이 책을 이해하면 안될까 싶다.

의미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그것을 회화로 표현한 사람이 르네 마그리트이다. 마그리트는 현대 회화에서 유니크한 위치를 차지한다. - P. 116

마그리트는 하나의 면을 찾는데 집중한 사람이 아니라 그런 면들을 가로지르면서 世界 자체를 찾아간 사람이다. 즉 면들을 가로질러 보다 입체적인 존재론을 추구한 사람이다. 이런 점에서 마그리트의 회화는 회화에 대한 회화, 메타회화, 회화의 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 P. 117

  예를 들면, 마그리트의 그림들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이렇게 살펴볼 수 있다. 그림을 보는 방식이 사람마다 다르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림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그림을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아니고 이 모든 것일 수 있는 방식을 보여주는 책이 <세계의 모든 얼굴>이다.

  그림을 통해 무한한 상상력을 엿볼 수도 있지만 제공된 이미지들은 지각된 것 이상을 넘어설 수 없다. 회화에서 재현이냐, 표현이냐를 따지는 것은 논재의 의미가 없다. 회화의 역사를 통해 世界(유일무이한 전체로서의 세계)에 대한 태도를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철학의 목표가 구체적이고 특정한 장면을 보여주는 세계에 대한 규명이나 사유에 있지 않고 世界에 대한 모든 얼굴들을 보여주는 작업이라면 철학과 회화는 분명 거부할 수 없는 공통된 운명을 지닌 듯하다. 그 면들을 찾아보는 것은 물론 감상자의 몫이고 즐거움이고 권리겠지만 철학자의 이야기에 귀기울여 보는 것도 재미있다.

내면세계의 대부분은 외면세계에서 온다는 것을 명심하자. 상상은 지각에 근거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상상이란 지각된 것의 변형이다. - P. 33

회화는 재현/표현의 이분법으로 이해될 수 없다. 회화는 언제나 世界(유일무이한 전체로서의 세계)의 무한한 얼굴들을 드러내는 작업인 것이다. - P. 34

  그림이나 철학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이해하고 알아갈 수 있을까? 철학아카데미에서 사흘에 걸쳐 진행된 강의의 내용을 책으로 묶어 놓은 이 책은 우리가 익수하게 접했던 수 많은 그림들 속에서 미처 읽어내지 못한 특별한 부분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특히 인상파 이후 입체파와 추상화가 대표되는 현대 회화의 난해함에 대한 거친 도전이기도 하다.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는 이 시대의 회화가 가진 맹목성과 불안감을 적절하게 분석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 이 그림들과 이런 종류의 책들이 모두 자기 기만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나올 때까지는 유효하다는 말이다. 누가 알겠는가, 회화의 독창성과 활기가 여기서 끝나버릴지. 그러나 회화의 존재 탐구는 계속되리라고 나도 믿는다.

오늘날 회화는 예전과 같은 독창성과 활기를 보여주지는 못하는 것같다. 그러나 화가들의 영혼이 죽지 않는 한 회화의 존재 탐구는 계속 되리라고 믿는다. - P.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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