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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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최초의 문민 정부의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은 전공이 철학이었다. 세상이 달라졌나? 플라톤의 이상적인 국가는 철인 정치였지만 진정한 철인이 아니어서 그런지 몰라도 철학자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해서 모두가 행복한 이상 국가가 실현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노태우와 김종필, 셋이서 한 화면에 잡힌 장면은 잊을 수가 없다. 철학을 전공했다고 해서 철학자가 되는 건 아니지만 국가라는 제도와 형태 자체가 가진 모순을 완전하게 가릴만한 차양은 아직 개발되지 못했다. 아나키즘에 대한 열망과 관심은 현실에 대한 대안을 모색한다기 보다 국가를 비롯한 모든 권력과 제도에 대한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갈망하는 몸짓이다.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한 개인의 생각을 적어 놓은 ‘마음의 철학’으로 보기에는 그 위치가 주는 영향력이 너무 크다. 단순한 개인의 철학이 아니라 세상을 지배했던 황제의 생각은 단순한 철학자의 그것과는 확연한 변별점을 지니게 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군주’가 지녀야할 덕목과 치세의 도를 말하는 처세술과 관련된 책이라면, <명상록>은 황제의 자리를 경험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었던 인간과 세상에 대한 경험적 추론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의 2장 3절에 ‘네가 불평하면서 죽지 않고 즐겁고 참되고 신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죽으려면 책에 대한 갈증을 버려라!’는 구절이 나온다. 전체적인 책의 내용과 상관없이 책에 대한 갈증으로 항상 목말라 하는 내가 개인적으로 곰곰이 뜯어본 구절이다. 아는 것이 힘이거나 모르는 것이 약이거나 상황과 기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진정한 행복을 구하는 것이 행복이라면 그 방법과 태도도 나름대로 다 달라진다. 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 필요한 것에 대한 ‘마음’과 그 마음을 다스리는 황제 아우렐리우스의 조언들이 아프게 다가온다.

  시대를 초월해서 죽음과 인간의 생에 대한 통찰을 필요로 하는 것이 인간이다. 황제 아우렐리우스는 인간의 보편성에 기대어 개별적 상황과 개인의 특수성과 무관한 본성에 대한 인식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성찰은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필요한 덕목이다. 로마 16대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생각을 빌어 현재의 나를 돌아보겠다는 생각이 어처구니 없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우주의 본성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깊이와 넓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현재적 유용성을 전해주고 있다.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로 로마의 황금시기가 저물 무렵에 황제에 오른 아우렐리우스는 이 책을 통해 인간과 우주 그리고 생의 본질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짧은 생에 대한 감각이다. 이 책에는 인간의 생 순간에 불과하다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된다. 그 깨달음은 철학자나 황제로서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단순한 진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짧은 생에 대한 인식과 그 찰나와 같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니면 지나치게 건방져 보인다. 하지만 아우렐리우스의 목소리는 높지 않고 차분하며 분명하고 명확하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에 놀라다니 이 얼마나 가소롭고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인가!

  물론 이렇게 냉소적인 목소리로 놀라게 하기도 하는 12절 13장을 보면 냉철한 분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기도 하지만 현재에도 살아 있는 친구의 충고처럼 살아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고전을 읽는 목적이 인류의 역사를 더듬거나 발자취의 향내를 맡으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선인들의 지혜를 빌려 오늘을 살펴보려는 무모함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문득, 키에르케고르의 목소리가 뼈에 사무치는 순간과 마주치기도 하는 법이다.

  로마의 황혼을 온몸으로 감당하며 전장에서 일기를 적듯 쓰여졌다는 이 책은 시대를 초월한 처세술로도 혹은 특별한 무엇인가가 숨어 있을 것 같은 인생에 대해 냉소하는 철학자의 고백담으로도 읽혀질 수 있다. 두고 두고 가슴에 새겨지거나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수 있는 책이 오래 남는다면 이 책은 그런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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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4-30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읽으셨군요. 저는 구판으로 읽었는지라^^
참 배울 것이 많았던 책이었습니다. 그의 심오한 철학의 깊이 빠질 수 있었던 책이라고 할까요.

sceptic 2007-05-01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판, 신판이 상관있나요...암튼 이중, 삼중역보다는 천병희의 번역은 꼼꼼하고 주석을 통해 스스로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번역하지 못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이버스페이스 시대의 미학 - 새로운 아름다움이 세상을 지배한다 살림 H classic 3
심혜련 지음 / 살림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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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적으로 아름다움과 예술에 대해 논하는 전통 미학과는 달리, 매체 미학은 예술 작품, 또는 예술적 미적 감응을 주는 대상이 어떻게 지각되고 수용되는가를 다룬다. - P. 29

  발터 벤야민이나 아도르노의 이론에 정통하지 않은 나로서는 이들의 논문을 잘 씹어 줄 수 있는 책들이 필요했다. 미학의 전통적 이론에서 파생된 매체 미학은 과학 기술의 발달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영화나 사진이라는 장르가 예술로 인정받기까지 지난했던 세월에 대해서도 고찰해 볼 만한 가치가 있지만 우리는 우선 사이버스페이스 시대에 매체 미학이라는 것이 어떤 역할과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영화나 사진의 무한 복제 시대에 돌입하면서 사람들에게 예술이 어떤 것으로 인식될 수 있는가였다. 벤야민이 아우라가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화나 사진을 옹호할 수 있었던 근거는 분명하게 읽히지 않는다. 다만 시대의 흐름과 문화적 충격 속에서 예술에 대한 개념과 구분 자체가 모호해졌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인정하고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인터넷이라는 정보 혁명으로 이제는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또 하나의 세상 속에서 우리는 매일매일 이원화된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영화 메트릭스가 경고한 세계가 바야흐로 현실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장자의 나비가 현실인지 꿈인지 알수 없는 원본 없는 이미지와 모방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자각을 할 때가 있다. 심혜련의 <사이버스페이스 시대의 미학>은 매체 미학을 중심으로 이러한 궁금증들에 대한 사유의 단초를 제공한다.

  필름 영화와 사진 시대를 넘어 이제는 디지털 이미지를 수용하는 관객들의 자세도 달라져야 한다. 디지털 기술의 현주소를 확인할 수 있는 영화 중 최근에 <300>이라는 영화가 주목을 끌었다. 보지는 않았지만 컴퓨터 그래픽 기술의 승리라는 평가와 촬영과정이 소개된 것을 보았다. 이제는 영화 속 장면조차도 이차적인 현실이 되어버렸다. 아니,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과 장면들을 관객들에게 이미지로만 전달되는 시대가 되었다. 영화가 어차피 현실과 거리가 먼 하나의 환상을 제공하는 것도 하나의 기능이라고 하지만 이쯤 되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의심하는 수준에 이른다.

“벤야민은 영화관에서 영화라는 새로운 예술 형식을 접하는 관객들은 분산적 지각과 시각적 촉각성에 의해 영화를 즐기면서 또 비판할 수 있다고 믿었다.(67페이지)”는 말은 영화라는 예술의 무한 가능성을 예고한 듯하다. 일상의 공간과 또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는 일종의 프리즘 역할을 하는 것이 영화라면 인간의식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영역을 재발견하기 위한 예술적 장치가 영화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그 시간과 공간이 사이버스페이스로 옮겨 간다. 움직이는 포착해야 하는 긴장감 속에서 감상하는 예술을 바라보는 방법을 바꿔야하는 것일까?

현재 디지털 매체 예술은 두 가지 방식으로 수용자에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하나는 상호 작용적 환경이고, 다른 하나는 사이버스페이스, 즉 온라인에서의 작품 전시다. - P. 143

  이 책에서는 주로 디지털 매체 예술에서 전통적 회화나 상호작용적 예술에 대해 폭넓게 다루고 있지는 않다.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개념이나 매체 미학에 수용될 수 있는 익숙한 개념들을 잘 녹여서 설명하고 있지만 새로운 개념이나 독특한 관점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마지막 장에서 영화 <올드 보이>를 분석하고 있는데 자신의 이야기를 실제 영화를 통해 보여주기 때문에 읽을 만하다.

TV는 시계이자 달력이고 교회이며 친구이자 애인이다.(올드보이) - P. 164

  영화 <올드 보이>가 선태된 이유는 TV라는 매체 때문이다. 오대수는 오로지 TV를 통해서만 세상과 소통한다. 이우진의 연인이 강물로 떨어지는 마지막 순간에 찍힌 선명한 사진들은 앨범이 된다.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 사이의 관계를 푸코의 <감시와 처벌>의 개념을 적용시켜 적절하게 풀어내는 방식도 재미있다. TV와 사진이라는 매체를 바라보는 방법이나 분석적 태도는 <올드 보이>를 보면서 미처 깨닫지 못한 것들에 대한 것들이다. 사이버스페이스 시대의 미학의 개념과 방법론을 알아야 영화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세상은 아는 만큼만 보이고 보이는 만큼 이해하고 이해한 만큼 공감한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이다. <눈부신 날에>에서 보여주었던 새로운 가족의 개념과 삶의 이유들은 사이버스페이스가 아니라 현실 공간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들이다. 박광수의 의도가 어떠하든 우리에게 눈부신 날은……



070427-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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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7대 불가사의 - 과학 유산으로 보는 우리의 저력
이종호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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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를 거의 보지 않아서 대화에 끼기 어려울 때가 있다. 세간에 화제를 모았던 드라마 <주몽>에 한나라의 철기군이 등장하고 고구려에서 그것을 물리치거나 배우려는 시도가 역사적으로 볼 때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이종호의 <한국의 7대 불가사의>는 특별한 구석이 있다.

  불가사의不可思議는 불교에서 온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마음속에 떠오르지도 않으며 생각할 수도 없는 오묘한 이치라고 한다. 말하자면 현실 밖의 세상을 말한다. 니나와 폴이 여행하던 4차원 세계에서나 가능한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시간여행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의 일들을 모두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문명이 발달하고 과학은 진보하며 인간의 지식과 지혜는 누적적인 형태로 발전한다고 굳게 믿는 직선적인 세계관에 기대어 인류의 특별한 문화 유산을 두고 불가사의라고 부른다.

  먼저 세계 7대 불가사의를 보자.  ① 이집트 기자에 있는 쿠푸왕(王)의 피라미드 ② 메소포타미아 바빌론의 공중정원(空中庭園) ③ 올림피아의 제우스상(像) ④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神殿) ⑤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로스 능묘(陵墓) ⑥ 로도스의 크로이소스 대거상(大巨像) ⑦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파로스 등대(燈臺)가 있다. 그 밖에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로마의 원형극장(콜로세움), 영국의 거석기념물(巨石紀念物, 스톤헨지), 이탈리아의 피사 사탑(斜塔), 이스탄불의 성(聖)소피아 성당, 중국의 만리장성,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를 7대 불가사의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위와 같은 내용은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유적들을 불가사의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순하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인류의 과학과 기술은 중세이후 이성 중심의 서양의 직선적 세계관에 기인한다. 지금보다 장비와 기계들이 발달하지 못했지만 인간의 지혜와 지적 능력은 오히려 뛰어났을 것이라고 판단해 볼 수 있다. 굴삭기가 발명되면 삽질하던 인간의 근육은 퇴화하기 마련이다. 지금 우리가 놀라고 있는 것들이 그 당시에는 당연하거나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이종호는 <한국의 7대 불가사의> 다음과 같이 선정했다. ① 고인돌 별자리 ② 신라의 황금 보검 ③ 다뉴세문경 ④ 고구려의 개마무사 ⑤ 무구정광대다라니경 ⑥ 고려 수군의 함포 ⑦ 훈민정음.

  위에 소개한 일곱 가지 문화유산이 과연 모두가 동의할만한 것들인가 하는 문제는 의미가 없다. 저자 개인의 선정이나 역사학자 일반인들의 견해가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한국 문화유산의 우수성과 독창성이 세계 문화유산에 견주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저자의 신념을 들여다보는 과정 자체가 재미있다. 신념은 지식과 경험으로부터 비롯된다. 건축을 전공한 저자의 유럽의 중심지 파리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우리 것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민족주의적인 것인지 하는 문제는 책을 통해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다.

  민족적 우수성을 홍보하기 위한 발상도 아니고 애국심의 발로도 아니라면 상대적으로 저평가 된 한국 문화의 가치를 새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 것이기 때문에 좋은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도 위험하지만 우리 것은 무조건 안 된다는 패배주의도 경계해야 한다. 객관적인 평가야 어차피 불가능하겠지만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방법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말에게까지 철갑 옷을 입혔던 고구려의 개마무사나 서기 3000년 전에 이미 별자리를 관찰하고 고인돌에 새겨 넣었던 우리 조상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일은 책의 내용과 상관없이 즐거운 시간 여행이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문화유산에 대한 철저한 고증과 분석을 통해 우리 것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시도하고 있는 저자의 노력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제대로 알지 못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비단 문화재의 경우만은 아닐 것이다.

  과거의 불가사의에 매몰되지 않고 현재 그리고 미래에 우리가 만들어 갈 문화유산들이 우리가 걸어왔던 역사보다 더 환상적이고 재미있는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상상을 해 본다. 저자가 꼽은 문화유산들은 우리들 일상에서 마주칠 수 없는 거리감이 있는 것들이다. 민중들의 삶과 생활에서 묻어나는 불가사의나 지금보다 발달했던 물건이나 제도들에 대한 검토와 반성도 필요하다.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가장 미련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시간 여행은 계속 되어야 한다.


070425-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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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데이즈 문학과지성 시인선 327
하재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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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불며 부는대로 세상에 거스리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은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선악의 가치 판단을 삶의 방식이나 태도에 적용시킬 수는 없지만 대체로 선망하거나 부러워 하는 삶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인위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는 말이다. 문학에 있어서도 같은 방법을 적용해 볼 수 있겠다. 시를 쓰는데 있어 인위적이거나 작위적인 언어는 생경한 풍경을 만들고 목에 걸린다. 모호한 에너지를 사소한 말장난에 쏟아붇는다는 무식한 비난에 상처 입을 수도 있겠지만 그 언어들이 울려주는 깊은 말맛이나 감동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비판에서 시인은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시인의 약력을 들여다 보는데 나보다 나이가 어려지기 시작했다. 새로 등장하는 시인들의 경우 처음이라서 혹은 젊으니까 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지는 부분과 완고하 저항감으로 심하게 거부 반응이 일어나는 시들이 있다. 시에 대해 가지고 있는 굳은 마음이 있거나 다양성과 새로움에 적응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휘파람

그림자들이 여러 개의 색깔로 물든다
자전거의 은빛 바퀴들이 어둠 속으로 굴러간다

엄마가 아이의 이름을 길게 부른다
누가 벤치 옆에
작은 인형을 두고 갔다

시계탑 위로 후드득 날아오르는 비둘기,
공기가
짧게 흔들린다

벤치, 공원, 저녁과는 상관없이

  쓰다만 시처럼 허무하게 혹은 ‘상관없이’ 떠도는 언어처럼 하재연의 <라디오 데이즈>는 무심하게 다가온다. 현실에 존재하는 것들과 언어로 표상되는 것들 사이의 간극을 찾아 읽는 재미를 선사하기에는 아직 서툴고 시어들 사이의 긴장감이나 긴밀한 알레고리를 찾아내기에도 버겁다. 하지만 ‘휘파람’과 같은 시로 시집을 여는 젊은 시인의 시집에는 겉멋이나 감정의 질퍽함은 묻어나지 않아 다행스럽다.

  세대와 연륜과 무관하게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동시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동시에’도 마찬가지다. 한 권의 시집을 통해 하재연이 말하고 싶었던 것들보다는 말하고자 하는 방식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무심함 속에서 일상에 던져진 것들과의 거리감. 혹은 일상속에 틈입된 시간과 공간의 기억들을 떠올리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

동시에

그녀는 책장을 넘기고 있었고
남자가 문 열린 차를 타고 벼랑으로 내달았고
고양이가 식탁 위의 커피잔을 건드렸고
양탄자가 약간 들썩거렸고
고장난 시계 초침이 열두 번을 돌았고
소년은 마라톤 결승 테이프를 끊었고
그녀는 행운을 빌었으나
양손이 쪼글쪼글해지고
머리칼이 가늘어지고
커피는 쏟아졌고 양탄자는 젖지 않았고
남자가 녹색 지붕 아래 비행하는 순간

그러다가 문득, 봄날의 당신은 안녕하냐고 묻다가 만다. 그 안녕이 ‘안녕?’인지 ‘안녕……’인지 알 수 없다. 쉼표를 찍고 있지만 마침표보다 완고해 보인다. 안부를 묻는다기보다 작별을 고하는 안녕은 봄날의 인사치고는 서늘하다.

봄날의 인사

당신은 경비행기를 타고

젖소들은 앉았다 섰다
자동차들은 클랙슨을
로즈마리는 바람에 나부끼고

나의 눈동자는 눈동자의 마음대로 굿바이
헬로, 당신의 프로펠러가
내 뒤뜰의 나무를 망가뜨렸답니다

당신은 대기 속에 있지 않고
나는 땅 위에 있지 않고
우리 모두는 우리의 마음대로

당신의 머플러가 나의 구름을
흩어버렸답니다

봄날의 당신은 안녕,

  이별한 모든 것들에 대해, 이별할 모든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시인의 자유이다. 고속도로 위에서 우리는 안녕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시간과 장소를 구별하지 않고 이별 선언은 가능하다. 다만 그 무모한 가능에 도전하지 않을 뿐이다. 안녕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말을 하는 우리의 자세와 그 말을 듣는 당신의 태도가 문제일 뿐이다. 시인에게 안녕이라는 선언이 시작인지 끝인지 알 수 없으나 나에게는 희망없는 메아리처럼 메마르다.

  때때로 시를 읽다가 답답하거나 허무할 때가 있거든 시인이 아니라 내 잘못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내가 시를 버릴 수 없는 이유다. 하늘이 높고 바람이 푸른 하루다.

고속도로 위에서

우리는 안녕, 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일은 가운데서 만나자,
껌처럼 늘어지는 불빛들을 눈으로 가리며
너는 입술이 삐뚤어지게 웃는다
네 머리칼을 날리며 지나가는 차들의 광속 너머로
붉은 머리를 치켜든 라이트 사이로
너는 뛰어간다
네게는 무대도 코러스도 없다
등을 구부렸다 곧게 펴고서 너는 곧잘
평균대 위에서 선 아이처럼 팔을 벌린다
바람은 너의 냄새를 흩어버린다
네 맥박이 뛸 때만 너는 움직인다
우리는 안녕, 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네 발목은 금방 잡힐 것만 같다
아무 데로도 가지 않는

07042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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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4-23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흩날리는 꽃잎들이 떠오릅니다.

sceptic 2007-04-26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흩날리는 꽃잎보다 노을진 나무가 제 정서에는 와 닿습니다.
 
빠꾸와 오라이 - 황대권의 우리말 속 일본말 여행
황대권 글.그림 / 시골생활(도솔)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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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톱이 길다며 쓰미끼리를 가져오라고 하시던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25년 전 외삼촌을 따라 이민을 가신 외할머니는 이제 80이 넘으셨다. 어린 시절 일본어를 배우셨고 인생의 황혼무렵에 영어 때문에 고생하실 외할머니의 고달픈 언어 생활을 돌이켜보는 일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굴곡진 한국사의 일부분이다. 컵을 ‘고뿌’라고 하시고 접시를 ‘사라’라고 하시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까마득하다. 물론 우리들 주변에서 지금도 그런 말들이 쓰이고 있기는 하다.

  부모님 세대의 끝자락 쯤에서 일제 시대에 초등 교육을 받았던 분들의 기억과 언어 습관에 남아 있는 일본말 뿐만이 아니라 왜곡되고 변형된 형태로 남아 있는 일본어는 아직도 생활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특히 공사 현장이나 당구장 등 일제 강점기에 새로 생겨난 물건이나 제도에 대한 용어들은 쉽게 고쳐지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야끼만두’를 시켜 먹고 ‘우와기’나 ‘가다마이’의 준말인 ‘마이’를 입고 생활하는 것은 분명 한국인이다. 정말 고치기 어려운 것이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말이다.

  황대권의 <빠꾸와 오라이>는 우리말에 남아 있는 일본어에 대한 철저한 확인과 분석 작업이다. 93년 1월말부터 5월까지 대략 4개월간 1만페이지가 넘는 일본어 사전을 뒤적이며 우리말에 남아 있는 일본어의 흔적과 어원을 찾아내는 일은 황대권의 영어생활 때문에 가능했겠다.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언어 생활에 대한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은 우리말에 녹아 있는 부끄러운 자화상을 그려보는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 말이라는 것이 떠오르는대로, 입에서 나오는대로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렇게 생활 곳곳에 깊게 자리잡은 말들을 고쳐나가는 것도 의식적인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국어 순화나 일본어의 잔재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나른한 봄 햇살을 받으며 사전을 뒤적이고 우리말에 녹아 있는 일본어에 대해 확인하는 게으른 풍경이 떠오를 정도로 그저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그리고 재미있게 그것들을 추억하고 있다. 엽서를 통해 여동생에게 이 글들을 전했고 그것들을 모아 출판한 책이니 감옥으로부터 전해진 엽서의 내용들이 하나의 주제로 묶인 책이다.

  일본어를 확인하고 어원을 찾아가는 방식이 유년 시절의 추억과 가족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정감 넘치는 60년대의 풍경과 언어 생활을 먼저 보여주고 저자의 일기장이나 에피소드를 통해 일본어가 사용된 예를 들어주니 독자들 입장에서는 수필을 읽어나가는 느낌이 든다. 같은 얘기를 하더라도 이야기하는 방식과 태도에 따라 듣는 사람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50대 이상 나이를 먹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유년 시절의 추억을 길어 올리는 흑백 필름의 역할을 해 줄 것이다. 그 속에 우리가 알지 못하고 사용했던 일본말들을 확인하고 돌이켜보는 작업은 의미 있는 일이다. 35년간 일본의 억압적인 식민지 통치 아래 생활했고 해방후 6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일본의 말과 문화의 영향은 여전하다. 세대가 달라지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점차 사라지겠지만 국적 불명의 어휘들은 정확하게 그 뜻과 어원을 알고 사용하거나 정리하거나 해야 할 것이다.

  과거사 문제와 상관없이 청소년들에게 일본 문화는 매력적인가 보다. 대중가수의 노래를 따라 부르기 위해 일본어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이나 일본인이 가진 정신과 생활 태도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를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에 대한 국민 정서나 감정은 논외로 하더라도 한 나라의 말과 글은 그 나라 사람들의 정신을 반영한다. 맑고 깨끗한 언어는 민족주의나 국수주의의 논란을 넘어선 자리에 있다고 믿는다. 내가 사용하는 말과 글에 대한 관심과 반성은 나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일이다.

  감옥에서의 추억과 유년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 책을 펴냈을 저자나 출판사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최근 유행처럼 번지는 우리말과 관련된 책들 속에 묻혀 갈 책일 수도 있겠다. 정확한 우리말과 글을 사용하기 위해서 일상속의 일본말을 확인하는 작업은 필수적이다. 이렇게 재미있는 접근 방법도 좋지 않을까 싶다. 기억과 학습이 경험과 결합될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을 테니까.


07042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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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4-20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리뷰를 늘 기다리는 분 중에 한분이 인식의 힘님이랍니다. 매번 읽은 기회를 제공해 주시니 이 기쁨을 어찌 전해드려야할지....... 감사합니다.

sceptic 2007-04-23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끄럽습니다. 사적으로 끄적이는 글을 읽고 덕담 나눠주셔서 늘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봄날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