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정체성, 어떤 여성이 될 것인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17
이현재 지음 / 책세상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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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구위의 반은 여성이다. 남성에 반대되는 개념의 성에 대한 구별이 아니라 예외적인 종족으로 인식되어 온 것이 여성이다. 보통 인간이라는 개념 속에 여성이 포함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멀지 않은 시대의 이야기다. 여성들이 투표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서구 유럽의 경우도 20세기 초, 중반 이후의 일이다. 인류가 문화를 발전시켜 오면서 성숙한 사회의 단계로 진입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 중의 하나가 여성의 문제일 것이다.

  학문으로서 ‘여성학’이 붐을 이루고 남녀 차별 철폐가 사회적 이슈가 되어 여성들의 권익이 신장되고 있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여성들의 위상은 달라졌다. 가시적인 변화들은 인식의 변화가 가져온 결과들이다. 그러나 과연 여성의 문제는 제대로 파악되었는가? 어디서부터 어떤 방법으로 접근할 것인가? 숱한 논의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답보 상태이거나 인식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 부분들에 대한 해결 방법은 무엇인가? 여성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아니, 여성으로서의 나는 누구인가?

  이런 수많은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결국 철학에게 부탁한다. <여성의 정체성>은 여성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여성’의 문제이다. 저자 이현재는 ‘인정이론’을 통해 여성의 문제에 접근한다. 지금까지 여성의 문제를 논의했던 기준과 방향을 점검하고 철학이 어떻게 여성의 정체성을 확립해 줄 것인가에 대한 접근 방식이 논리적이고 차분하게 이루어진다.

  주체로서의 여성은 다른 여성과의 동일성과 차이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결국 ‘여성의 정체성은 타자를 배제하는 논리에서 타자를 인정하는 논리로 나아갈 때 실현될 수 있다.’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지금까지 여성주의가 오해를 받았던 부분을 점검하고 어떤 여성이 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보부아르는 여성의 인간화를 첫 번째 목적으로 삼았다. 여성도 남성과 같은 인간으로 인정받는 것조차 힘들던 시대 상황을 고려하며 1세대의 출발로 본다. 이후 세 명의 걸출한 이론가를 차례차례 거론한다. 길리건의 ‘보살피는 여성’, 이리가레이의 ‘하나가 아닌 여성’, 버틀러의 ‘성적 이분법 허물기’가 그것이다. 세 사람은 조금씩 다른 방향에서 여성의 문제를 바라본다. 남성의 타자로서만 존재했던 여성의 문제가 철학 안에서 보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입장에서 그 차이를 인정하는 장면들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이 해결되기 위한 필요 조건은 여성들 간의 연대 가능성이다.

  백인 중산층 여성과 흑빈 빈곤층 여성은 과연 연대가 가능할까? 감성적이고 관습적인 연대는 이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낯선 자들과 반성적으로 연대할 때 여성들의 진정한 연대가 가능하며 현실은 분명한 모습으로 바뀔 것이라는 전언들에 공감한다. 여성이 여성 스스로를 배제하고 연대 가능성이 희박한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공동체적 연대 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내게는 일종의 코뮌으로 읽혔다. 국가와 계층을 초월한 전지구적 여성들의 연대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다. 다만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조직과 실천의 문제는 그리 만만치 않아 보인다.

  타자를 협동적 행위자로 인정하고 여성들 스스로 그 가능성을 열어갈 때 사회적 인식과 또 다른 타자인 남성들의 인식도 변화할 것이다. 다만 여성으로서 역할과 사회적 주체로서 당당히 서야 하는 여성들의 혼란과 갈등은 몇몇 이론가들의 주장으로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삶은 연습이 없고 정답을 알 수가 없다.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스스로 결정해야 하지만 잔다르크나 클로델의 경우처럼 분열된 여성의 모습은 과거를 대표하는 여성으로만 볼 수는 없다. 현재 진행형으로 지속되는 수없이 많은 문제들을 생각해보면 여성의 문제가 남성들의 문제라는 사실을 쉽게 확인 할 수 있다.

이렇게 여성주의는 철학과 만났다. 나는 이 만남을 통해 타자 배제의 논리, 희생 논리를 극복할 수 있는 여성의 모습을 꿈꾸었다. 이것은 단순히 여성주의에 새로운 이념적 장치를 마련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미래를 위한 새로운 철학의 탄생을 의미한다. 인정 이론을 통해 재구성된 여성철학은 다가올 여성의 세기에 새로운 사고방식을 제공할 것이다. - P. 165

070618-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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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꿈꾼 시대 - 육성으로 듣는 열정의 20세기
장석준 지음 / 살림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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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혁명은 시대를 넘어 영원한 미래의 희망이 되어 버렸다. 혁명과 희망을 동의어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거나 지독한 불행이다. 어느 시대를 살아가든지 경계선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보다 양 극단에 선 사람들이 훨씬 많다. 파시즘이 처음 등장했던 20세기 초반에도 그들을 교묘하게 이용하려다 오히려 뒤통수를 맞은 경우를 생각해 본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 앞장 섰던 수많은 사람들이 바보였을까?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 국민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2천 5백만이 희생됐고, 폴란드의 경우, 전체 인구 5분의 1일 죽었다. 그래서 20세기를 야만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일까?

  <혁명을 꿈꾼 시대>라는 장석준의 책은 20세기에 대한 회고록이다. ‘육성으로 듣는 열정의 20세기’라는 부제가 설명해 주듯이 헬렌 켈러에서부터 우고 차베스에 이르기까지 20세기를 뜨겁게, 온몸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의 신념과 열정을 담아냈던 연설들만을 모았다. 그 모든 순간들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갔는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이 책에 거론된 사람들의 삶은 책 제목처럼 일상에서 ‘혁명’을 꿈꾸었다. 꿈을 현실로 옮길 수 있다는 의지와 신념은 그 연설을 들었던 사람들에게 숙연한 감동을 안겨주거나 거센 비난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여러 등장인물이 등장하는 책의 한계는 깊이의 문제다. 23명이 등장하는 책에서 각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겠다는 욕심은 버려야 한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 책의 의도는 21세기의 관점에서 바라본 20세기이다. 책의 내용은 여섯 개의 주제로 20세기를 설명하고 있다. ‘전쟁, 자본주의, 제국주의, 인종주의, 파시즘, 남성중심 사회, 자본의 세계화를 넘어서’가 그것이다. 각 장마다 대표적인 인물들에 대한 설명이 붙어있고 그들의 인상적인 연설을 옮겨 놓았다. 이런 구성은 산만해지거나 백화점식 나열에 불과할 위험을 내포한다. 편집 의도가 좋다고 해서 괜찮은 책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책 한 권에 여러명을 소개하는 책은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실망하지 않는다. 그런면에서 이 책은 의심없이 선택할 만하다.

  책에서 기대하는 면이 독자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이 책에서 가장 후한 점수를 준 부분이 각 장 앞부분에 덧붙혀 놓은 ‘20세기’와 ‘21세기’의 대화부분이다. ‘시간’은 쉽게 정의되지 않는다. 의인화한 두 명의 인물이 대화를 나눈다. 21세기가 선배인 20세기를 찾아가 세기가 바뀌면서 최근 7년간 벌어진 굵직한 사건들을 전해주면 조언을 구한다. 그리고 꼭 100년간의 시간인 20세기에 대해 선배에게 한 수 지도를 받는다.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자들은 반드시 과거를 반복한다는 묵시적 전언을 읽어낼 수 있다.

  특정한 인물의 사상과 생애를 탐구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라면 사상사에 관한 책은 연구 목적이 아니라면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 선뜻 손이 가지도 않고 읽으면서도 많은 부담을 느낀다. 단순한 호기심과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을 위해서 책장을 넘기다가 한 숨을 쉴 때가 있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만만치 않은 공력을 들여 한 세기를 정리하려는 작업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 장석준은 시대를 통찰할 수 있는 주제를 중심으로 사회사적 측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인물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연설을 옮겨 놓으면서 적절하고도 설득력있게 사건과 시대를 분석하고 있다.

  ‘20세기’라고 하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자신의 시대를 스스로 정리하고 조망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알기 쉽게 접근하기 위해 21세기와 대화를 나누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21세기는 묻고 20세기는 답한다. 독자들의 궁금증을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적절한 분량과 명쾌하고 정확하게 핵심을 짚어 나간다. 지난 세기를 알고 싶다는 이 책 한 권을 조용히 권할 만하다.

  다만 앞서 지적한대로 깊이와 넓이는 독자가 이 책 이후에 채워나가야 할 부분이다. 하나의 실마리가 되어 호기심을 증폭시키거나 관련 분야에 대한 방향과 목적이 결정된다면 한 권의 책이 할 수 있는 역할로는 충분하고도 훌륭하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는 과연 혁명의 세기였을까? 그렇다면 21세기는 어떤 시대가 될 것인가? 두 세기에 걸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길을 묻는다. 저자는 그 길의 방향과 목적지를 제시하지는 못한다. 그것을 책을 통해 독자들이 직접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 지금, 여기의 문제가 과거의 연장이고 우리의 미래가 된다. 그것은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인류가 발전시켜온 역사이며 그늘이고 희망이며 아쉬움이고 절망이며 그리움이다.

혁명이야말로 끊임없는 혁명이 필요하고, 혁신을 주장하는 세력이야말로 혁신되어야한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닫는 것이 오직 20세기 초의 사회주의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불운이겠는가. - P. 79

  지나 간 시간에 대한 반성보다도 미래를 향한 희망과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한 궁금증이 앞선다. 그 궁금증을 우리는 20세기에게 묻는다. 그 길에 대해 20세기의 토니 벤은 이렇게 말한다.

“다음 세기에 사람들은 경쟁이 아니라 협력을 원할 것이다. 자립적인 경제 체제를 갖춘 세계 여러 나라들이 서로 협력할 것이다. 이번 세기에 우리가 항상 전쟁을 계획했던 것처럼 이제는 평화를 계획하길 바랄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민주적으로 통제하려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번 세기가 다음 세기에 전해야 할 참된 교훈이다.” - P. 409


070615-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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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부드러운 손 문학과지성 시인선 333
김광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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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역 광장 앞에서 불에 탄 전경 버스를 바라 본 것은 버스 안에서였다. 시위 군중에 막혀 도로는 주차장으로 변했고 승객들은 그대로 앉아 마냥 기다릴 수도, 내려서 걸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버스 차창 밖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똑똑히 기억하기 위해 두 눈을 부릅떴다. 10대 소년의 눈에 비친 87년 6월은 혼돈속의 질서였다. 무엇인지 모를 열기와 함성들, 거대한 강물처럼 군중들은 물결치듯 조금씩 움직였다. 광화문 네거리 빌딩에는 건물마다 아저씨들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고 길가 한켠에 한복을 입은 할머니가 흔드시던 하얀 손수건을 그 후로도 오랫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 

  6․10 항쟁 20주년을 맞이해서 누군가가 쓴 한겨레 칼럼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인용했다. 희미한 옛사랑도 아니고 그 그림자를 바라보아야하는 현실은 무기력하기만하다. 4․19에 대한 희미한 그림자가 이제는 다른 모습으로 희미하게 보인다. 87년 6월이 희미한 게 아니라 그 시대정신과 민중들의 열망과 가슴속의 뜨거움이 희미해졌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는 가장 큰 불행을 감지한 것처럼 시인도 소시민의 뒷모습을 노래했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2007년 시인은 정년퇴직을 했고 드디어 전업 시인이 되었다. 노년의 김광규 시인을 이 한 권의 시집을 통해 꼼꼼히 들여다본다.

  시집은 제목이 내용을 집약하는 경우가 있고, 부분으로 전체를 상징하기도 한다. 김광규의 <시간의 부드러운 손>은 제목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고교시절에 가슴에 담았던 수많은 시인들 중 오규원은 세상을 등졌고, 황동규나 김광규는 정년을 맞았다. 세월은 모두를 변화시키고 사람도 시대도 다른 무언가로 바꿔 놓는다.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홉 번 째 시집을 펴내는 시인의 목소리는 예전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다르면서 변하지 않는 숨결들이 편안하게 읽힌다.

춘추(春秋)

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

한 줄 쓴 다음
들린다고 할까 말까 망설이며
병술년 봄을 보냈다
힐끗 들여다본 아내는
허튼소리 말라는
눈치였다
물난리에 온 나라 시달리고
한 달 가까이 열대야 지새며 기나긴
여름 보내고 어느새
가을이 깊어갈 무렵
겨우 한 줄 더 보탰다

뒤뜰에서 후박나무 잎 지는 소리

  전통적으로 계절의 변화가 생의 변화를 대변한다. 봄에서 가을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단순한 세월의 흐름이 생의 진리를 안겨준다는 선(禪)적인 명상으로 깨달은 것도 아니다. 무심한 순간들이 생활 속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이다. 원래 그러했으나 인식하지 못한 많은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산수유 꽃피는 소리보다, 후박나무 잎 지는 소리 보다 아내의 눈치를 살피는 화자와 허튼소리 말라는 아내의 눈빛이 떠올라 한참 웃었다. 일상 속에 소소한 마음의 갈피를 잡아내는 시인의 매력은 여전하다.

  생활 속에서 길어 올린 수많은 시들이 김광규 시의 특징으로 분류된다. 그만큼의 의미와 한계도 지니고 있다. 확장되지 못하고 의미의 영역이 좁아질 위험성이 있다. 시야와 관점이 폭넓다고 해서 좋은 시가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의 문제가 일반화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만고만한 키 높이로 가지런하게 놓여있는 느낌을 받는다. 한 번쯤 발로 툭 건드려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가을 거울’과 같은 시를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 알의 모레 속에 온 우주가 담겨있다’고 한 윌리엄 브레이크가 생각나게 하는 명편이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난 후에 갈잎 손바닥에 고인 한 숟가락 만한 빗물이 거울이 되어 세상을 비추고 나를 비추고 온 생애를 담아낸다. 무심하게 던지는 한 마디가 ‘마지막 빗물’이라는 표현과 함께 시인의 전 생애 혹은 독자의 삶을 반추하게 하는 거울이 된다.

가을 거울

가을비 추적추적 내리고 난 뒤
땅에 떨어져 나뒹구는 후박나무 잎
누렇게 바래고 쪼그라든 잎사귀
옴폭하게 오그라진 갈잎 손바닥에
한 숟가락 빗물이 고였습니다.
조그만 물거울에 비치는 세상
낙엽의 어머니 후박나무 옆에
내 얼굴과 해와 하늘이 비칩니다
지천으로 굴러다니는 갈잎들 적시며
땅으로 돌아가는 어쩌면 마지막
빗물이 잠시 머물러
조그만 가울 거울에
온 생애를 담고 있습니다


  이 죽음에 대한 탐구와 ‘마지막’에 대한 성찰들은 결국 삶과 죽음으로 귀결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소멸의 그림자를 들여다본다.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르든 소멸이라고 부르든 사라짐이라고 부르든 ‘출입통제선’이라는 경계를 이룬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흔적을 남긴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상관없이 경계를 넘나드는 순간 그 미련과 아쉬움을 떨치지 못한다. 그것은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경계 너머를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공포는 무지에서 올 때가 많다. 삶과 죽음의 그 분명한 경계를 출입통제선 이쪽과 저쪽으로 나눠 놓은 솜씨도 솜씨지만 그 무심한 눈길이 오히려 두렵다. 엉뚱하게도, 이렇게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는 날에는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날, 조용히 눈감고 싶다는 시와 무관한 개인적인 욕망! 항상 생활 속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 - 자웅동체처럼 한 몸으로 묶여있는 삶의 비극성은 ‘출입통제선’ 언저리에서 서성거린다.

생사(生死)

방독면 쓴 방역요원들이 계사(鷄舍)에
사정없이 분무기로 소독약을 뿜어대고
닭과 오리 수천 마리를 비닐백에 잡아 넣어
한꺼번에 살(殺)처분한다
조류독감 때문이다
출입통제선
바깥의 냇가에는
어디서 날아왔다
천둥오리들 한가롭게 무자맥질하며 놀고
백로 몇 마리 한 발로 서서
명상에 잠겨 있고


070614-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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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스캔들 창비청소년문학 1
이현 지음 / 창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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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 혹은 1318세대라고 하는 구분과 명칭은 모호하기만 하다. 학생이라고 부르기도 그렇고 그저 나이를 기준으로 13세부터 18세까지를 같은 집단으로 묶기도 어렵다. 그들이 성장하는 과정이라는 데 공통점이나 특징을 부여하는 것 이외에는 뚜렷한 성향을 파악하기 어렵다. 좌충우돌, 아노미, 질풍노도, 사춘기 등 전통적으로 청소년 시기를 명명하는 수많은 말들도 결국에는 성장의 과정에 있는 변화무쌍한 시기를 지적하는 말임에는 틀림이 없다.

  국적과 세대를 불문하고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아 가장 혼란스런 시기이며, 그 어느 때보다 심한 성장통을 겪는 세대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누구나 그런 시기를 거쳐왔으며 유사한 갈등 때문에 불면의 밤을 보내보았기 때문이다. 아련한 추억과 부끄러운 기억들, 두근거리는 떨림과 가슴 벅찬 희망이 뒤섞여 자기 생의 주체로 홀로 서야 하는 과정은 우리 모두의 과거이며 미래 세대의 현재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창비 청소년 문학’의 첫 번째 주자로 나선 이현의 <우리들의 스캔들>은 장편소설을 통해 이 시대 청소년들이 겪는 갈등과 고민의 단면을 보여준다. 장편임에도 단면을 보여준다고 말하는 이유는 특정한 사건에 얽힌 단순한 문제를 다양하고 다채롭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학교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는 식상하지만 가장 중요하다. 대부분의 청소년이 학생이며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가장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쉽게 변하지 않는 관료 조직인 학교의 생리와 모순들은 변화에 민감하고 개방적이며 자유로운 생각을 가진 학생들에게 억압과 통제의 수용소로 인식된다. 학교 자체가 가진 순기능을 주장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어이없는 일들과 마주치면 할 말을 잊는다. 학교는 늘 학생들의 중심에 놓인다.

  여기서 학교 밖의 아이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떠나간 아이들, 대안 학교의 아이들과 직업을 가진 청소년들은 문학에서도 소외된 느낌이다. 물론 대다수의 청소년들이 학교에 다니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고민이 가장 심각하겠지만 식상한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자신의 정체성과 혼란스런 가치관의 문제에 직면한 청소년들의 문제를 좀더 깊이 있게 다루어주는 본격적인 청소년 문학을 기대한다. 기성 작가들의 경우에도 이 문제와 주제에 대해서는 소홀한 편이다. 소홀한 것이 아니라 관심 밖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헤르만 헤세의 소설들 - <지와 사랑>, <수레바퀴 아래서> - 은 한동안 밤잠을 설치게 했다. 사춘기의 혼란스런 시절들을 문학과 함께 할 수 있다면 행복한 일이다. 풍부한 감성과 깊은 사색은 성숙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그들은 우리들의 희망이며 미래이다. 단순하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과 삶에 대해 보다 진지하고 비판적인 시선을 가질 수 있도록 최소한의 과정은 마련해주어야 한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그것이 왜 잘못되었으며 어떻게 고쳐나갈 수 있는지 대안을 찾아보고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들이 필요하다. 현실에서 교육은 그러한 일에는 관심이 없다.

  이 소설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오로지 정해진 규칙과 질서에 순응하는 인간을 요구하는 것이 학교 교육의 현주소이다. 미래의 학교가 궁금하다. 이대로 계속 버틸 수 있을까? 학교의 관료성은 상명하달과 의사소통 구조의 단절에 있다.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사를 교육의 주체라고 이야기하지만 주체적인 힘이 발휘되거나 소통하거나 그들이 원하는 학교가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대단히 어렵다. 학생과 교사는 끊임없이 충돌하고 학부모는 학교를 불신하며 교사는 학생을 믿지 못한다. 그들의 눈높이가 다르고 교육과 학교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자세와 마음이다. 사회의 시스템과 학교에 요구하는 일반인들의 태도가 변해야 한다. 상급학교의 진학을 위한 발판이나 취업을 위한 수단으로, 혹은 보다 많은 돈과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도구로 학교가 전락해버린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사회의 요구에 적응해야 하는 학교는 교육의 방향과 앞날을 위해 제 몸을 바꿔나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학생들은 빛의 속도로 소통하고 어른보다 먼저 느낀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한 학급의 카페가 운영되고 그 과정에서 교생과 담임 교사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에피소드나 학교와의 불화는 학생들의 입장에서 일상과 같은 것이다. 이런 내용이 하나로 묶이면서 익명성이 보장되는 공간에서 하나 하나 스스로의 정체를 드러내며 반전을 보여주기도 한다. 소설의 내용은 충분히 학생들에게 공감을 얻을만하지만 현실적인 측면에서 면밀한 조사가 아쉽다. 한참 사극을 보는데 저 멀리 배경이 된 도로 위로 자동차가 지나가는 장면과 같은 부분이 있다. 디테일을 놓치면 좋은 그림을 망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동 문학도 아니고 성인 문학도 아닌 ‘청소년 문학’이라는 미개척 분야에 대한 창비의 본격적인 도전은 관심과 결과가 주목된다. 보다 다채롭고 적극적인 기성 작가의 참여와 해외 문학 작품의 발굴도 필요하다고 본다. 어른과 청소년들이 함께 읽고 공감할 수 있는 작품들을 기대한다. 그 작품들을 통해 세대 간의 공감이 이루어지고 서로의 입장과 문제점을 이해할 수 있다면 청소년 문학도 분명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070611-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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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6-12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읽었던 책들이 평생의 밑거름이 되지 않나 싶게
저도 그 시절에 많은 책을 읽었어요.
저는 데미안을 읽고 한동안 멍해있었죠.
이제 그때처럼 마음이 짠해지는 책을 찾기란 쉽지 않더군요.

sceptic 2007-06-14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무살 이전과 이후의 독서는 질적으로 다르니까요...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이던 시절이죠...
 
잊혀진 병사 - 어느 독일 병사의 2차 대전 회고록
기 사예르 지음, 서정태 엮음 / 루비박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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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장 최근에 본 전쟁에 관한 영화는 <아버지의 깃발>이었다. 최초의 영화는 기억나지 않지만 로버트 드 니로의 <디어 헌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플래툰>이나 <풀 메탈 쟈켓>, <씬 레드 라인>, <진주만>에 이르기까지 인상적인 전쟁 영화들은 꽤 많다. 헐리웃 영화의 경우 베트남 전을 소재로 한 영화가 많았고, 당연히 지고 나서 징징거리는 내용이었다. 가해자가 양심의 가책을 받거나 공식화된 영웅담으로 흐르는 뻔한 내용들이다. 그것을 전쟁의 전부라 믿었고 미국은 항상 정의의 편에 서 있다는 정말 위험한 이데올로기를 심어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헐리웃 전쟁 영화들이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불량스런 깡패 국가 미국의 모습이 감추어진 채 포장된 모습과 피상적인 추측만이 가능하던 시절의 친미 성향을 가진 정치와 역사의 관점에서 교육 받는 시절의 이야기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의 경우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거의 모든 영화가 아우슈비츠에 모아진다. <뮤직 박스>, <쉰들러리스트>, <베를린 천사의 시>를 비롯해 <피아니스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변주되어 영화팬은 물론이고 일반인들에게 영화라는 장르가 가진 위력을 마음껏 뽐내며 스크린 앞에서 좌절과 분노 그리고 현실에 대한 안도감과 행복을 만끽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독일은 여전히 깊이 머리 숙여 반성하고 있고 일본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다시 우경화로 치닫고 있다. 과거는 망각의 세월 속에 묻혀 가고 현실은 지나간 시간을 돌이킬 틈이 없다. 그러나 현재는 단지 과거의 오래된 미래일 뿐이다.


  루비박스에서 나온 <잊혀진 병사>는 일단 책의 두께가 중량감을 보여준다. 735페이지를 한 권으로 묶어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전쟁이든 역사든 사람들은 결과와 영웅만을 기억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래서 어떻게 됐어’라고 묻는다. 이 책의 저자인 기 사예르는 16세의 나이로 1942년에 전쟁에 뛰어든다. 고등학교 1학년쯤 되는 나이에 군에 자원 입대하는 소년의 생각은 불을 보듯 뻔하다. 조국에 대한 충성심과 전쟁에 대한 환상과 넘치는 에너지의 발산을 위해 뭔가 흥분된 자극이 필요했을 것이다. 프랑스계 독일인 저자는 아버지가 프랑스인이고 어머니가 독일인이다. 이런 중간자적 혈통은 포로가 된 후 결정적으로 석방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름없는 무명 용사 기 사예르가 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는지 무엇이 그를 전쟁터로 이끌었는지는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없다.


  이 책의 내용은 단순하다. 16세 소년이 전쟁에 투입되어 1945년 포로가 되어 석방될 때까지 러시아와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동부 전선에서 보낸 3년간의 비망록이다. 그 기록들의 생생함에 입을 다물기 어렵다. 전쟁에 관한 어떤 책보다 더 생생하게 전쟁의 순간들을 포착했고 묘사한다. 뛰어나 글솜씨나 달변이라서가 아니라 단지 그 참혹한 현장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했을 뿐이다. 그래서 더욱 피비린내나는 현장을 보여준다. 전쟁에 과한 어떤 분석이나 자료들도 2차 대전의 원인이나 그 결과가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데 그치고 있다. 몇 명이 죽었거나 다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상황이었는가를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일은 지금까지 수없이 반복되어 왔다.


  그러나 이 책처럼 그저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전쟁의 순간들을 다큐멘터리처럼 그려내고 있는 자료는 없을 것이다. 전쟁을 미화하고 있지 않는 것은 물론 어떤 이데올로기나 국가적차원의 이유나 접근, 설명도 필요없다. 단순히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생명의 숭고함과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던 그 순간의 기록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을 뿐이다. 스스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느끼며 전쟁을 반대하거나 몸담았던 시간들에 대한 반성과 회의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단순한 사실의 기록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그 상세하고 구체적인 상황들과 그 현장에서 인간이 느껴야 했던 모든 것들이 이 책에는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지만 많은 사람들은 전쟁을 이렇게 이해한다.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의 한계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전쟁터에 생각없이 뛰어들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손쉽게 전쟁에 대해서 배운다. 그들은 안락한 의자에 앉아 발을 불가에 뻗고 평소처럼 다음 날 일할 준비를 하면서 베르‰窩犬?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읽기만 한다. - P. 366


  장교가 아닌 병사의 입장은 전쟁을 대하는 태도와 마음이 다르다. 죽고 죽이는 현장에서 오로지 살아남아야겠다는 본능이 앞서기도 하고 전우의 죽음으로 울부짖기도 하며 배고픔과 추위를 견뎌내야 한다는 생각 뿐이다. 전쟁은 그들만의 리그로 전개될 뿐이다. 위정자들의 오판과 권력에 대한 욕망, 교묘한 정치적 선동과 대중들의 야합은 인류의 파멸을 재촉할 뿐이다. 여전히, 지금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히틀러나 아이히만 같은 인간에 대한 연구와 대중 심리나 아우슈비츠에 관한 수많은 저작들조차도 ‘전쟁’이 무엇인지 제대로 밝혀주지 못할뿐더러 독자들에게 ‘전쟁’을 제대로 알려주지도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책장을 넘기면서 손에 피를 묻히는 기분이었다. 내가 경험했던 군대와 ‘전쟁’에 관한 피상적인 개념들은 하나 둘 사라지고 만다. 인간의 절규와 죽음의 아비규환 그리고 영하 30도의 추위와 굶주림은 살아야겠다는 본능 이외에 그 어떤 욕망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처절했던 전쟁의 기록들을 긴 호흡으로 훑어보며 무거워진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그들은 극심한 두려움에 모든 신념이 사라졌고 어떤 일에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들은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모든 작전에 앞서 두려움을 느꼈다.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한 사람들에게도 자신도 모르게 나무 꼭대기를 비추는 태양빛처럼 공포가 엄습해왔다. - P. 571


독일인은 영웅인가. 미치광이인가? 누가 이런 극단적인 희생정신을 평가할 수 있을까? 침묵 속에 아이들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 P.

619

  

  적들이 몰려올 때 느껴야하는 두려움과 공포는 전쟁 상황이나 피아간의 식별을 넘어 당연한 본능으로 세포 구석구석까지 고스란히 전달된다. 타인의 죽음과 고통을 바라보며 전쟁에 대해 순간순간 떠오르는 상념들을 저자는 날것으로 제시한다. 어떤 화려한 수식이나 포장도 없고 개념화하지 않는다. 그 순간들의 기록과 상념들을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처절한 육성이 귓가에 어른거린다.

 이 책은 1967년, 그러니까 전쟁이 끝나고도 20여년이 끝난 후에 쓰여진 독일 병사의 비망록이다. 패전국의 어느 병사가 쓴 회고록이 승전국의 전쟁 영웅이 쓴 이야기보다 값진 이유는 독자가 책을 통해 확인할 일이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지독한 전쟁 경험을 하며 이름 없는 병사가 생각한 것은 다음 몇 줄로 요약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전쟁의 이론이나 전략가의 충고보다도 독자들의 가슴에 깊이 각인될 수 있을 것이다. 반전평화를 부르짖는 수많은 함성과 요구들보다 처절하고 참혹한 살육의 현장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에 한 번 쯤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인간성에 호소하지 않고 복수를 원하지도 않는다. 나는 분별력을 잃었기 때문에 지금 이 글을 제외하고는 침묵하며 지냈다. 그리고 외로움 속에서 용서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는 것을 배웠다. - P. 678


  

070608-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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