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를 쓰려고 제목을 치다가 오타가 났다. ‘대한민국 개좆론’이라고. 무의식적인 손가락의 실수지만 키보드를 두드리다 혼자 웃고 말았다. 우연한 오타가 그런대로 말이 된다. 육두문자가 저절로 튀어나올 정도로 대다수의 정치인들을 혐오한다. 모두 꼴보기 싫다는 단무지형 정치 혐오증에 가까운 증상은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병이 아닌가 싶다. 일천한 민주주의 역사를 바탕으로 고도 압축 성장을 하느라 좌충우돌 하고 있는 우리 나라의 모습은 위태롭기만 하다. 하지만 우수한 민족성 덕분인지 난파의 위기를 견뎌내며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간다고 믿고 싶다. 아니 그렇다. 이런 믿음조차 없다면 대한민국에 살 수 없다. 현재의 정치 상황에 대한 오호의 감정을 넘어 냉정한 판단력과 비판 능력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사람들도 있고 지금 이대로의 대한민국을 만끽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들만의 리그와 독주가 계속될 경우 과연 이대로 좋은가? 당신들에게 묻고 싶어진다. 당신들은 대한민국의 1%쯤 되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20% 되는 사람들일까?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유시민의 <대한민국 개조론>은 정치인으로서 나름대로 힘겹게 또 갖은 방법으로 욕을 먹어가며 버텨내고 있는 유시민의 모습은 안쓰럽다.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서 우리나라 정치풍토에서 신념과 지조라는 말을 꺼내기도 우습지만 그걸 지켜내려는 몇 안 되는 정치인이라고 나는 판단한다. 그가 보수이든 진보이든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정치적 신념에 대한 ‘진정성’이다. 정치인은 누구나 말을 바꿀 수 있고 생각이 달라져서 정치적 행보가 달라질 수도 있다. 그래도 올바른 정신이 박힌 유권자라면 그의 진정성을 보고 판단한다. 수많은 변절자로 낙인찍힌 정치가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유시민의 말과 행동들에 대한 지지 표현도 아니다. 다만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타인의 이야기에 귀기울여 본적이 몇 번이나 있나 돌아보았다. 그렇게 옳은 얘기를 저렇게 싸가지 없게 말할 수 있느냐고 비아냥거리던 동료 의원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유시민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싸가지 없어도 좋다. 나는 내 갈 길을 가자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태도와 방법을 수정해 보자고 생각했을까 궁금하다. 복건복지부 장관을 지내면서 그가 무슨 일을 저질렀고 무슨 일을 하려고 했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보면 된다. <대한민국 개조론>은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일하는 동안의 비망록이며 대국민 보고서이며 참았던 억울함에 대한 변명이다. 그의 말이 다 옳지는 않다. 독자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먼저 그의 진정성이다. 언제든 정치를 그만 둘 각오를 하고 누구보다도 국민여러분에게 욕먹을 각오를 하고 토해내는 그의 육성은 한 번쯤 귀기울여 들을만하다. 한나라당 지지자든 민노당 지지자든 노빠든 상관없다. 옳은 이야기에 대해서 냉정하게 들어보고 차갑게 비판할 수 있는 독자들에게는 알아두고 들어보아야 할 만한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다. 올해는 대선 정국이 어떤 드라마나 영화보다도 흥미롭게 혹은 잔혹하게 또는 가장 혐오스럽게 펼쳐질 예정이고 이미 서막이 올랐다. 절치부심 한나라당이나 길거리에서 지갑을 주었던 열린우리당이나 여전히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민노당이나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달리는 기호지세의 형국이다. 유시민이 어떤 역할을 하든 정치인으로서 어떤 행보를 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대한민국의 전직 보건복지부 장관의 자격으로 말하는 그의 이야기는 들어 보아야 한다. 이 책에서 유시민은 국민여러분을 왕으로 자신은 신하로 비유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음으로 당연한 주장이고 정치인들이 투표가 끝나기 전날까지만 내세우는 말이기도 하다. 임금이고 왕인 국민에게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아뢰는 말에 거짓이나 사심이 담겨 있다면 누가 그의 말을 듣겠는가. 자신을 과대 포장하거나 자신의 정치적 선전물로 활용하기 위한 책이라면 독자들이 먼저 눈치 챌 것이다. “대한민국은 밖으로는 세계화 시대의 선진통상국가로 나간다. 선진통상국가로 성공하기 위해 안으로는 사회투자국가를 건설한다.” - P. 33 이 한마디가 이 책 전체를 요약한다. 선진통상국가와 사회투자국가라는 양 날개로 힘차게 날아오르는 대한민국을 상상하는 유시민을 상상한다. 나머지 각론에 대해서는 책의 내용에 관한 개인적인 판단과 객관적 자료와 검증이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에 보다 엄밀한 분석과 국민들의 동의와 정치권의 야합이 필요하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남에게 미룰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내가 움직이지 않고 실천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으면서 뭔가 바뀌기를 바라지만 않는다면 강 건너 불 보듯 할 수도 있겠다. 사학법은 거꾸로 돌아가고 국보법은 여전히 존재하며 연금개혁은 서로 못 본체 한 지 너무도 오래되어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국민들께도 말씀드립니다. 자기 머리로 생각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왕이 왕 노릇을 못하고 누군가의 수렴청정을 받게 됩니다. - P. 122 조중동의 기사가 자신의 생각이고 한겨레의 칼럼이 내 이야기가 되어 논쟁한다고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패배주의! 누구의 수렴청정인지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국민들에 대한 발칙한 경고와 불만이 은근히 드러나지만 사실이다. 빌헬름 라이히는 그것이 궁금해서 <파시즘의 대중심리>를 썼다.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믿는 수많은 노동 계급은 어찌하여 조선일보의 주장을 자신의 머리로 착각하는 것일까.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부와 지도자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주권자인 국민의 수준입니다. 대한민국 정치의 수준은 곧 국민의 수준이라는 말씀입니다. 남명 조식 선생처럼, 저도 정치적 사망을 각오하고 이 말씀을 드립니다. - P. 262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는 굴원의 <어부사>로 시작한 이 책은 남명 조식 선생의 ‘단성소’를 되새기며 끝맺는다. 너무 먼 얘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문제라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유시민의 이야기는 정치적 투정도 언론에 대한 불만도 국민에 대한 객기도 아니다. 그래서 참고 들을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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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니, 나는 얼마나 지독하게 편협한 시선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 왔는지 확인했다. 사물 혹은 사건들 속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치밀한 씨줄과 날줄들이 얽혀 있다. 눈에 보이지도 귀에 들리지도 않는 그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대상을 바라보는 방향과 눈높이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객관적인 기준과 판단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모든 시선들이 주관적이며 하나의 기준과 판단일 뿐이라는 말이 성립된다. 이것은 양시론 혹은 양비론이다. 모두가 그럴 수 있고 전부 다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이다. 좋은 변명이고 성급하게 일반화할 수 있는 오류이긴 하지만 설득력 있게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책을 읽고 몰랐던 사실을 확인하고 앎의 범위를 넓히고 인식의 지평을 확대하는 즐거움은 단순히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한 도구이기 이전에 인간적 삶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며 즐거움이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그런 면에서 신명호의 <조선왕비실록>은 내게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을 안겨준 책이다. 역사는 기록에 의해서만 후대에 전달된다. 과학기술이 발달하기 이전의 역사는 오로지 활자에 의해 책의 형태로만 존재한다. 물론 건축이나 미술품 유물과 유적을 통해 당시의 삶과 문화를 확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과거는 오로지 기록된 문자로만 전달된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아니, 내가 얼마나 맹목적인 시선으로 역사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 반성하게 된다.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을 어떤 관점과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의 문제는 역사에 대한 접근 방식을 결정짓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것을 사관이라고 하는데 단순하게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당시의 시대 상황이나 관련된 문제들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근본적인 토대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며 현재적 관점에서 적용하고 이해하는 척도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동일한 인물과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은 역사가의 고유 권한일 수는 없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객관적인 자료에 의해 판단될 수 있는 것이며 정확하고 타당한 인과관계와 논리적 사유를 통해 가능한 일이다. 이 책은 우선 목적과 방법 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역사의 기록 자체가 왕이 중심이 되어 국가 단위의 사건과 흐름들을 위주로 되어 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그 이외의 것들에 대한 관심은 아직도 미미하다. <한국생활사박물관>가 주목받고 높은 평가를 받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선조들의 일상들이 어떠했는지 우리처럼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어떠했는지가 서술의 초점이 되기 때문에 훨씬 더 흥미있고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들은 소외된 이웃이 아니라 역사의 주체이며 국가의 주인이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주체는 항상 왕과 양반들이었으며 권력을 쟁취한 자들의 잔치였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역사의 주제는 여성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어쩌면 이 책의 부제처럼 ‘절반의 역사’이다. 기록되지 않은 ‘숨겨진’ 절반의 역사는 누구에 의한 것인가? 당연히 그것은 여성들의 몫이다. 근대 이전에 여성에 대한 문제는 다른 책을 통해 충분히 확인할 수 있으며 본격적으로 여성이 주체적인 삶을 영위한 것은 불과 100년도 안된다. 지금도 물론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지구 위의 절반이 넘는 여성들은 인권의 사각 지대에 놓여 있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조선시대에 비추어 판단하거나 비난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겠지만 역사에 등장하는 여성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신사임당이나 유관순이 아니라 권력의 핵심에 놓여있던 조선의 왕비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으며 어떻게 살았을까? 이렇게 지극히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호기심에서 출발한 책이 바로 <조선왕조실록>이다. 태조를 왕위에 오르게 한 신덕왕후 강씨, 태종 이방원의 아내였던 원경왕후 민씨,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의 아내 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어머니이자 광해군의 할머니였던 인수대비 한씨, 선조의 왕비였던 인목왕후 김씨,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 너무나 유명한 고종의 아내 명성황후 민씨. 이렇게 일곱명의 파란 만장한 인생사가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그려진다.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과정까지 어떤 드라마나 영화보다도 극적이었던 대표적인 왕비들을 선발했다. 왕비가 되기 전 태어나는 과정과 왕비로 간택되거나 왕실의 며느리가 되는 과정 그리고 왕비가 되는 과정은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머나먼 이야기로 읽힌다. 대표선수로 발탁된 일곱 명의 왕비는 그 어느 왕비보다도 사연 많은 여인들이다. 한 나라의 왕비로 한 남자의 아내로 무엇보다도 정치권력의 중심에 서 있던 그녀들의 삶은 눈물과 한숨으로 점철되어 있다. 저자는 단순한 역사적 자료를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양한 문헌과 사료를 통해 생략되거나 보이지 않는 부분들을 유추한다. 결국 이 부분들은 역사가의 해석과 판단에 맡겨질 수밖에 없다. 이 책은 바로 이 부분에 주목하고 있다. 조선왕조에서 벌어졌던 절체절명의 순간에 왕조의 운명을 뒤바꿀 만한 역할을 했던 왕비들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들은 비로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역사의 중심에 선다. 남성들보다 더욱 치밀하고 냉정한 판단력을 보여주며 남편과 아들과 손자의 운명을 뒤바꾼 여인들의 열정과 눈물들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사실에 근거한 판단과 해석, 질문과 상상들 사이에서 즐겁게 시간 여행을 한 느낌이다. 일방적이고 직설적인 설명이 아니라 독자에게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실록이나 관련 서적을 인용하면서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저자의 솜씨도 믿을 만했다. 깊은 여름밤 혹은 낯선 휴가지에서 이 책과 함께 과거의 역사 속으로 잠시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070722-089
책은 우리에게 많은 말을 건넨다. 헤어진 인연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몰랐던 지식을 전해주기도 하며, 잊고 있던 과거를 돌아보게 하기도 한다. 책을 통해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며 사색에 잠기고 나를 돌아본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 과정은 어떠했는지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 과정과 진행 방식들이 우리의 과거이며 현재고 미래의 모습이다. 한 권씩 책을 읽어나가면서 책을 통해 인류가 걸어왔던 길을 돌아보고 나의 삶과 우리의 현재를 조망한다. 직접적인 행동과 실천의 문제가 늘 숙제로 남겨지지만 인식의 힘을 키워나가는 과정과 깊은 사색과 성찰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식이 아닌가 싶다. 커뮤니티에서 출간된 평화교육시리즈 중 한 권인 <지쿠호오 이야기>를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만감이 교차했다. 내 아버지는 일본에서 태어났다. 탄광 갱도가 무너져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4살 때 한국으로 돌아오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이에 세발 자건거를 탄 아버지의 모습이 흑백 사진으로 단 한 장 남아있다. 그 사진이 내가 알고 있는 할아버지에 대한 전부이다. 한국에 돌아와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며 세 딸과 외동 아들을 키우셨던 할머니의 이야기는 전설처럼 혹은 그 시절 모든 어머니의 이야기로 친척들이나 고모들에게 후일담으로 명절 때마다 귀동냥하며 자랐다. 할아버지가 일했던 탄광이 어디였는지 궁금하지도 않았고 어떻게 건너갔는지 물어본 적도 없다. 나와 관계없는 너무 먼 이야기였고 아버지도 할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전설처럼 가끔 흘려듣곤 했었다. ‘아이들의 힘으로 만들어가는 나라 운동본부’라는 이름이 긴 단체에서 이런 책을 만들고 번역해서 한국에서 출판한다는 것은 역사 바로 알기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우는 일일 것이다. 일본이라고 해서 왜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없겠는가. 한국의 학생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까마는 맹목적인 일본문화에 대한 추종이나 비이성적인 반일 감정이나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바로 알고 올바로 인식하는 데서부터 한일 관계는 재정립되어야 한다. 더욱이 지나간 역사에 대한 왜곡이나 우리가 걸어온 길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아픈 과거에 대한 반성도 성찰도 그리고 미래를 향한 제대로 된 방향 설정도 쉽지 않을 것이다. 지쿠호오는 일본의 대표적인 탄광을 말한다. 이곳은 단순히 메이지 유신 당시부터 일본의 부의 원천과 상징이 되는 곳이 아니다. 근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한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 민중들이 쏟았던 피와 땀의 현장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탄광이 단순히 그들만의 문제였고 과거였다면 우리가 돌아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곳이 한국인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19세기 말부터 시작해서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한국인의 수가 급증했다. 토지몰수와 생활난을 이기지 못한 반강제적 이주 노동자들의 삶은 비참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노동시간과 인간 이하의 노동 환경은 짧은 설명과 간단한 삽화였지만 남의 일 같지 않아 가슴이 먹먹했다. 다른 역사책을 통해 객관적으로 서술된 텍스트를 접하는 것과 달리 이해를 돕기 위한 그림들이 상징적이었지만 상세한 설명보다 오히려 깊은 인상을 남긴다. 지쿠호오 이야기 뿐만 아니라 야마에 살았던 사람들 그리고 한일 병합과 연락선에 실려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 근현대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인 이야기들이다. 위안부와 징용에 동원된 한국인의 구체적인 수치가 분노를 배가 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학생들이 이 책을 통해 그 심각성과 사실 여부 자체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다양한 교육 방법과 역사에 대한 접근 방법이 있겠지만 이렇게 민간의 노력과 적극적인 성과물들은 훨씬 더 효과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노력과 과정들이 국가의 개념을 넘어서 연대와 참여의 장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의 문제이다. 단순히 한국과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책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중국과 동남 아시아 여러 나라가 모두 연계되어 있는 역사이다. 국가와 국가간에 벌어진 전쟁의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자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역사 속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누구였을까를 생각해 보자. 국경을 넘어 전쟁터에서 총을 쏘며 아비규환의 지옥을 헤매였던 그 많은 사람들을 과연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싸웠을까? 갱도에서 숨이 막혀 생손톱이 다 빠지도록 벽을 긁다가 질식사한 사람들의 시체에는 성한 손톱이 하나도 없었다는 이야기를 나는 이 책보다 먼저 살아 있는 사람들을 통해 어린 시절에 전해 들었다. 그들은 한국인이기 때문에 분노해야 하는가? 하방연대는 계층과 계급을 넘어 국경을 넘어 현실 속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이루어져야 한다. 잘못된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고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들만의 전쟁과 그들만의 갈등 속에서 대다수 민중들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리고 누구를 대상으로 싸워야했는지 먼저 깨달아야 한다. 그 원인과 문제점들을 짚어보면 실타래가 풀리듯 해결방법도, 대안들도 찾아지게 된다. 물이 빠지고 바닥이 드러나듯 그렇게 선명하고 정확한 눈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미래의 주인이 될 청소년들에게 뿌연 시야를 걷어낼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삽화와 일본어 원문 표기라는 방식을 택한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책이 크고 무겁고 비싸다. 군살을 빼고 좀 더 가볍고 저렴하게 접할 수 있는 책으로 만들어졌으면 좋았겠다. 하지만 우리가 미처 몰랐던 일본의 민중사와 조선인 탄광 노동자의 삶을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는 책으로 손색이 없다. 070719-088
처음 가는 길 - 도종환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없다 다만 내가 처음 가는 길일 뿐이다 누구도 앞서 가지 않은 길은 없다 오랫동안 가지 않은 길이 있을 뿐이다 두려워 마라 두려워하였지만 많은 이들이 결국 이 길을 갔다 죽음에 이르는 길조차도 자기 전생애를 끌고 넘은 이들이 있다 순탄하기만 한 길은 길 아니다 낯설고 절박한 세계에 닿아서 길인 것이다 처음부터 길은 없었고 한 사람 두 사람 걷다 보면 길이 된다는 노신의 말은 부정되어야 하는 걸까? 없는 길을 찾아가는 사람들과 필요한 길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두려워말라고 위로하는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우리가 살아가는 길이 순탄하기만 할까마는 살면서 부딪히는 모든 길들을 즐겁고 행복하게 걷고 싶은 것은 모두의 숨은 욕망이다. 하지만 이런 길들조차 때로는 낯설고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힘겹다. 일주일에 한 편씩 시를 배달하려고 수많은 시집들을 뒤적이며 가슴에 닿는 구절들을 고르고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문학집배원 도종환이 시집을 엮었다. <꽃잎의 말로 편지를 쓴다>는 여러명의 시인들이 쓴 시들 중에서 도종환의 가슴에 들어온 시들을 골라 엮었다. 일월부터 십이월까지 각 주마다 한 편씩을 고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계절과 시기에 맞는 시가 있는가 하면 언제 읽어도 마음 한 구석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시들도 있다. 이런 종류의 시집은 결국 개인의 취향에 기댈 수밖에 없다. 시를 고르는 안목과 취향은 오롯이 시인의 몫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느 누구라도 같은 형식의 시집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나도 좋은 시들을 모아 놓은 폴더가 꽤 된다. 그러면 내가 엮어도 부끄럽지 않은 시집 한 권이 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유명한 시인도 아니고 시를 보는 안목을 검증받은 적도 없으므로. 도종환 시인에 대한 믿음과 그가 선택한 시에 대한 간략한 해설들이 편안한 감동으로 다가온다면 이 책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또 하나의 값진 선물은 시낭송 CD이다. 플래쉬를 만드는 데도 정성을 기울였고 여러 시인들의 육성을 들을 수도 있다. 자작시를 낭송하기도 하고 다른 시인들의 시를 읽어주기도 하며 목소리 고운 성우의 낭송도 섞여있다. 감성적인 플래쉬를 배경으로 시의 내용이 더욱 명확하고 선명하게 전달된다. 시는 눈으로 읽는 것보다 소리내어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시집보다도 이 한 장의 CD가 값지다. 집에서 아이들에게 보여주거나 학교에서 다같이 감상해도 손색없는 훌륭한 멀티미이더 교재이다. 이별노래 - 박시교 봄에 하는 이별은 보다 현란할 일이다 그대 뒷모습 닮은 저 꽃잎의 실루엣 사랑은 순간일지라도 그 상처는 깊다 가슴에 피어나는 그리움의 아지랑이 또 얼마나 세월 흘러야 까마득 지워질 것인가 눈물에 번져 보이는 수묵빛 네 그림자 가거라, 그래 가거라 너 떠나보내는 슬픔 어디 봄산인들 다 알고 푸르겠느냐 저렇듯 울어쌓는 뻐꾸긴들 다 알고 울겠느냐 봄에 하는 이별은 보다 현란할 일이다 하르르하르르 무너져내리는 꽃잎처럼 그 무게 견딜 수 없는 고통 참 아름다워라 사람을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혹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서늘한 바람 한 줄기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산다는 일이 모두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라지만 그것이 행복인지 고통인지 가늠하기 힘들다. 만난다고 해서 행복이 아니고 떠난다고 해서 모두 슬픔은 아닐 것이다. 먹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비추는 여름 하늘의 표정만큼이나 다양하게 우리의 삶은 변화를 겪고 과거를 아쉬워하며 미래를 기다린다. 그렇게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시는 그저 잠시 발을 담글 수 있는 시원한 냇물이거나 편안하게 기대 울 수 있는 푹신한 베개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꽃잎의 말로 편지를 쓴다>는 말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현실 밖에 존재할 것 같은 치유와 배려의 언어라는 뜻일 것이다. 아무 말도 없이 건네는 짧은 한 편의 시가 때로는 수많은 수다와 변명보다도 더 큰 위안이 된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 오규원 강가에서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다시 한번 멈추었었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강은 젖지 않는다, 오늘도 나를 젖게 해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강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고기들은 강을 거슬러올라 하늘이 닿는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사랑, 짐슴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이미 고인이 되어 버린 시인의 시를 읽는 일은 서먹하다. 그의 시를 좋아했다. 고교시절 시를 처음 접한 후 그를 시를 읽어오면서 그의 언어에 공감하면서 오랫동안 꺼내보는 시집들 중의 하나가 되어 버린 그의 엉뚱한 곳에서 만난 것 같은 기쁨이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사춘기 소년의 연습장에 수없이 끄적였던 말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독자에게 전해지는 순간 시는 독자의 것이 되고 만다.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든 절박했을 것이고 가슴에 깊이 각인되었다는 것은 울림이 있는 시였다는 뜻이다. 적어도 내겐.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모든 것들에게 우리는 의미를 부여한다. 처음이다, 마지막이다라고. 처음도 마지막도 혹은 비가 오기 시작하면 젖어 버리고 한 번 젖어 버린 사람은 다시 젖는다는 말이 무의미해진다. 장마의 먹구름이 낮게 가라앉아 잔뜩 찌푸리고 있다. 구름은 걷힐 것이고 푸른 하늘은 그 구름 너머에 그대로 있을 것이다. 산다는 일도 때때로 그렇게 구름이 끼거나 바람이 불거나 혹은 ‘쨍’하고 해가 뜨거나! 070717-087
가시리 가시리잇고 바리고 가시리잇고 날러는 어찌살라고 바리고 가시리잇고 고려가요의 절창으로 꼽히는 ‘가시리’의 일부다. 떠나는 임에게 “나는 어떻게 살라고 버리고 가시겠습니까”라고 묻는 원망과 회한의 목소리가 듣는 사람의 애를 끊어놓는다. 버림받은 사람의 심정은 어떤 설명이나 위로도 소용이 없다. 떠나는 사람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보다 그것을 견디고 적극적으로 이겨내기 위한 노력들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론일 뿐이다. 떠나는 자와 남는 자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감은 여전히 문학의 좋은 밑거름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황석영의 장편소설 <바리데기>는 이렇게 우리 민족의 의식 속에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는 이별과 유랑을 모티브로 활용하고 있다. 주인공 바리데기는 ‘국민 여동생’이라 불릴 만하다. 영화배우 문근영이 아니라 ‘바리데기’야말로 우리 민족의 여동생이다. 고전 설화에서 차용한 주인공의 이름과 행적들은 ‘민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남과 북이라는 분단 현실과 갈등의 이데올로기를 넘어 문화적 공통체로서 하나일 수밖에 없는 당위와 필연성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이 소설은 단순히 고전문학에 대한 경의와 현대적 수용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작가 황석영이 왜 한국을 대표할 만한 작가인가를 보여주는 이 소설은 수많은 씨줄과 날줄들이 교묘하게 얽혀 있다. 통시적 관점과 공시적 관점들이 뒤섞여 있고 하나의 사건이나 단순한 서사구조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그의 소설이 난삽하거나 중심 없는 부침을 거듭하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남과 북의 갈등을 표면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태양 아래서 그림자를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처럼 우리들의 또 다른 얼굴인 북의 현실과 상황들을 ‘바리’라는 여성 주인공을 내세워 차분하고 환상적인 장면들로 구성하고 있다. 어차피 현실은 과거의 꿈에 불과하다면 소설에서 사실적 묘사와 설화적 몽환구조는 서로 상통하는 겹침과 펼침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하지만 이 소설이 단순한 민족의 개념과 현실 상황에 대한 개탄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 바리는 북에서 출발해서 중국을 거쳐 영국에 이르는 유랑길에 오른다. 어른 소녀의 입장에서 감내하기 힘든 현실적 고통들과 위험 속에서 늘 그의 길잡이가 되어 주는 할머니와 칠성이의 영혼은 특별한 능력을 지닌 바리에게 유일한 삶의 길잡이며 위로이기도 하다. 무속은 우리 삶의 원형에 가깝다. 초현실의 세계는 원시시대부터 21세기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와 내용을 달리하면서 끊임없이 유지되고 있다. 귀신을 보고 영혼과 접속할 수 있는 능력은 서양의 슈퍼맨과 개념 자체가 다르다. 여성 주인공으로 무속적 영감을 가진 지닌 소녀의 신산스런 삶은 우리 민족적 삶의 원형이기도 하며 우리들 어머니의 모습들이었다. 반면에 공시적 관점에서 전 지구적 변화의 물결과 자본주의와 세계화, 인종과 전쟁 문제 등 폭넓은 시야에서 현재 인류의 삶을 조망하고 있다. 과연 한 권의 소설에서 이런 거대 담론들이 제대로 용해될 수 있으며 한국 문학의 관점에서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대안들이 제시될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의심들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한 장치들을 곳곳에 배치하고 있다. 바리의 남편은 이슬람교도인 파키스탄인 ‘알리’이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관타나모까지 끌려갔다가 살아 돌아온다. 밀입국으로 영국에 도착한 바리는 나이지리아인 부터 베트남인에 이르기까지 과연 국경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되묻고 싶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들여다본다. 삶은 어디에서나 계속되고 지역과 시대를 넘어 산다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질문들은 비슷한 형태로 이어진다. 나는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시간을 기다리고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늘 기대보다는 못 미치지만 어쨌든 살아 있는 한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지나간다. - P. 223 시기적으로 1994년 11살이던 바리가 2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10여 년간에 걸친 삶의 역경들은 한반도 20세기 후반을 함께 했던 우리 인류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산다는 것이 단순히 시간만을 견디는 일일까만은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가장 한국적인 주인공을 내세워 현재 우리들이 외면하고 있는 또 하나의 우리들과 국경을 초월한 삶의 고단한 형태들, 국가간 이기주의와 패권주의 등 9.11 테러에서 아프카니스탄 침공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모습과 상황만 다를 뿐 종교와 인종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는 나라들의 모습들을 모두 한 배에 탄 우울한 인류의 자화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의 압권은 바리가 꿈과 현실을 넘나들면서 할머니와 칠성이와 소통하고, ‘황천무가’에서 차용했다는 지옥 장면이었다. 바리는 우리에게 과연 생명수를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책의 부록으로 실린 인터뷰에서 작가는 그것을 독자에게 되묻고 있다. 설화 속의 바리는 생명수를 얻어 부모를 살려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 소녀 바리는 생명수를 구하기난 한 것일까? 그 생명수는 과연 증오와 갈등, 죽음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21세기에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작가는 바리의 입을 빌어 소설에서 이렇게 그 해답의 실마리를 풀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 P. 286 아득한 먼 옛날 설화 속 주인공 ‘바리’는 여전히 우리들 주변에 널려있다. 그 모습과 상황만 다를 뿐. 그 대상이 생명수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일 뿐. 그가 구하고자 하는 것이 부모가 아닌 다른 누구일 뿐. ‘바리’는 늘 무엇에겐가 버림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바로 내가 된다. 070715-0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