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들의 풍경 - 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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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말들은 저마다 자기의 풍경을 갖고 있다. 그 풍경들은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다르다. 그 다름은 이중적이다. 하나의 풍경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풍경들의 모음도 그러하다. 볼 때마다 다른 풍경들은 그것들이 움직이지 않고 붙박이로 보인다. 그러나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야말로 말들이 갖고 있는 은총이다. 말들의 풍경이 자주 변하는 것은 그 풍경 자체에 사람들이 부여한 의미가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풍경을 보는 사람의 마음이 자꾸 변화하기 때문이다. - <말들의 풍경>을 시작하며, 1989년 김현

  1990년 겨울에 나온 김현의 <말들의 풍경>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1부 말들의 풍경에서 김현은 최승호, 최승자, 김정란, 김혜순, 곽재구, 박남철, 유하, 황인숙, 송찬호, 기형도의 시에 대해 말하고 있고 2부 보이는 심연과 안 보이는 역사 전망에서는 이성부, 이승훈, 김정웅, 박상륭 등의 작품을 분석하고 있다.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이름들이다. 아득한 스무살 무렵 추억의 언저리를 더듬게 한다. 여전히 건재하게 한국 현대시에 주요 시인으로 남아 있는 이들이 당시엔 재기 발랄한 신인이거나 젊음의 열정을 내뿜을 무렵이었다. 17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충분히 감회에 젖을 만하다.

  고종석은 선배의 책 제목에 기댄 것도 아니고 똑같은 제목으로 책을 묶어 냈다. 영화용어로 ‘오마주’에 해당하는 것일까? 한국일보에 연재되었던 칼럼을 모아 <말들의 풍경>이라 이름 지었다. 법학과 언어학을 공부한 저자의 이력은 글을 읽는데 크게 도움을 주지 않는다. 최근에 <모국어의 속살>에서 보여주었던 혹은 지금까지 그가 보여주었던 우리말과 글에 대한 애정과 관심 그리고 비판적 관점들이 이 책에서도 오롯하다. 신문의 칼럼이라는 제한된 분량때문인지 깊이 있고 심층적인 내용을 담아내지는 못했지만 하나의 주제와 인상들을 찾아내 빛을 내고 담아내는 솜씨는 장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신문에 실린 글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려운 말이 없고 저자 나름의 뚜렷한 색깔과 고집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문장들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담백하다.

  제목에 걸맞게 우리말에 대한 관심과 분석들이 정확하고 날카롭다. 일상에서 사용되는 우리말의 특징과 한계들, 그 깊이와 갈피를 짚어낸 칼럼들이 하나의 주류를 이루고, 또 하나의 흐름은 인물에 대한 탐색이다. 정운영, 김윤식, 이오덕, 전혜린, 서준식, 양주동 등 우리말과 글을 살려 쓴 사람들의 글과 생각들을 꼼꼼하게 털어내고 제자리에 놓아 본다. 조금씩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나름의 고집대로 이오덕을 평하거나 김윤식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공감을 할 만하다. 홍승면, 임재경이나 정운영 등 선배들에 대한 인상과 글을 통해 보여주었던 특징들도 재미있었다.

  책으로 묶어내기 전에 분류하고 편집하고 내용을 수정하는 수고를 건너뛰며 날 것 그대로 시간의 순서대로 나열하는 방식을 취한 점이 독특하다. 각 글 뒤에 연도와 날짜를 밝혀 놓음으로써 당시의 맥락과 상황들을 엮어서 생각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다소 불편해 보일 수도 있으나 정치적 시론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는 기록의 성격을 지닌다. 그 재미라는 것이 개인이 속한 집단과 사회가 사용하는 한국어의 풍경들에 대한 소박하고 맛깔스런 밥상과 같다. 책을 묶어내는 방식이나 책에 대한 욕심을 조금 털어버린 채(수십권의 책을 냈기 때문에 욕심이 없어 그런지도 모르지만) 소탈하게 엮어낸 <말들의 풍경>은 김현의 그것에 견주어 비교하는 것은 온당치가 않다.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제 작고할 당시의 김현의 나이를 넘어선 저자가 선배에게 보내는 투정과 질투가 가당치 않다고 했지만 독자가 보기엔 정겹고 즐겁기만 하다.

  김현 선생이 생전에 이촌동 자택을 찾은 제자나 지인들이 돌아갈 때 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계시더라는 이야기를 고등학교 때 문예반 동기 녀석한테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특별한 이야기도 아니었지만 우리는 한동안 헤어지며 버스에 대고 손을 흔드는 우스꽝스런 짓을 했었다. 그 몇 년 후에 돌아가셨다. 제대로 이해되지도 않았겠지만  선생의 책들을 읽으며 문학에 눈떴다. 감탄과 아쉬움들은 표현이 부족해 말로 다하기 어렵지만 이제 아련한 추억과 그리움의 시간으로 남아 있다.

  17년이 지난 후 고종석은 <말들의 풍경>에서 이렇게 말한다. 언어를 바꾸려는 힘과 현실을 바꾸려는 힘의 작동원리가 같지는 않겠지만 언어의 언저리에 서성이며 쑤석거리는 모습으로 남게 될 줄이야…… 한결같은 모습으로 계속될 고종석의 이야기에 여전히 귀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현실은 언어 이전에 있는 것이어서 언어를 바꾸려는 노력이 고스란히 현실을 바꾸는 힘이 될 수는 없겠지만, 언어의 비틀림을 응시하는 일은 현실의 비틀림을 살피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 P. 99


07083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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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ptic 2007-09-04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글은 아니라서..즐거운 독서 하세요...
 
예술, 정치를 만나다 - 위대한 예술가 8인의 정치코드 읽기
박홍규 지음 / 이다미디어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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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실존주의 철학자 부버는 “교육은 만남이다.”라고 선언했고, 볼노우는 “만남은 교육에 선행한다.”고 말했다. 교육에서 뿐만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행위 이전의 문제다. 서로 자아를 확인하고 관심과 공감이 형성될 때 만남은 의미를 갖는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아니라 학문과 예술도 마찬가지다. 겹쳐지고 누벼지는 지점이 없으면 만남은 불가능하다.

  최근 들어 ‘○○, ○○를 만나다’는 책 제목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특별한 홍보가 필요 없는 무임승차를 노린 새로운 마케팅 기법인 것 같다. 이다미디어의 편집팀과 홍보팀 관계자들의 각성을 요구한다. 책 제목이 성의 없어 보여 빛을 바란다. 박홍규의 책이 아니었다면 사지 않았을 <예술, 정치를 만나다>는 대중적인 시각과 접근법으로 박홍규를 새롭게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위대한 예술가 8인의 정치코드 읽기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정치와 직간접적으로 자의든 타의든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예술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책이다.

  루벤스, 괴테, 바그너, 베르디, 피카소, 채플린, 사르트르, 레논 - 이들이 그 주인공인데 인물들 사이의 연관성으로 묶이기는 힘들다. 음악 3명, 문학과 미술이 각 2명, 영화 1명으로 장르를 구분하지 않았으며 앞에 4명은 20세기 이전, 뒤에 4명은 20세기 이후의 인물들이다. 저자가 말하듯이 이밖에 정치와 관련된 예술가들은 더 많이 있지만 박홍규의 개별적 저작이나 다른 책에서 소개된 인물들은 제외되었다.

  중세를 벗어나 르네상스와 고전주의를 거친 예술의 특징들은 미술과 음악에서 공통적인 특성으로 나타난다. ‘일그러진 진주’인 바로크와 낭만주의는 전 시대에 대한 반발과 계승 발전되었다는 주지의 사실을 굳이 확인하지 않더라도 거장들의 삶은 역동적이었고 시대의 중심에 서 있었다. 당대 최고의 화가이자 정치가로서 화려한 삶을 살았던 루벤스나 괴테, 반유대주의와 히틀러의 추종으로 유명한 바그너, 그와 비교되는 이탈리아의 베르디의 삶은 역사와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너울거리는 한 인간의 모습과 고뇌하는 예술가의 면면들을 보여준다. 예술가도 정치적 동물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생각들을 작품 속에 반영하거나 작품과 무관하게 정치적 행위들을 남겼다.

  19세기의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혹은 제국주의와의 결합으로 예술은 한층 더 정치성을 띠게 된다. 격동의 20세기 명멸했던 수많은 예술가들 중에 <게르니카>를 각인시킨 피카소나 온몸으로 세상을 풍자했던 채플린, 자유와 정의를 추구했던 사르트르, 반전평화의 메시지를 노래에 담아냈던 존 레논의 생은 그들이 남긴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모습이 먼저 다가오기도 한다. 만남이 예술에 선행한다는 전제가 가능하다면 표현주의 관점이라는 편향된 시각이 아니라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선행 조건으로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저자는 연대기적 요소에 따라 이들의 삶을 단순화하여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특유의 방대한 인문학적 지식과 당대의 역사와 사회, 정치 환경에 대한 해석으로 그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예술을 해석하기도 한다. 예술에 대한 모든 비평과 해석이 주관적이라는 전제하에 박홍규의 관점을 들여다본다면 공감과 관심을 충분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정치적 상황에 따라 부침이 심했던 예술가들의 삶은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현실 상황에 반응했을 것이며 그들이 남긴 작품들 속에는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고뇌와 절망, 환희와 열망들이 담겨있을 지도 모른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예술과 예술가들을 정치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새로운 즐거움으로 남는다. 전혀 새로운 시도는 아니지만 ‘정치’라고 하는 하나의 코드로 읽어내는 방법은 충분한 가치와 재미를 선사한다.

  <아나키즘 이야기>에서 존 레논의 ‘이매진’으로 박홍규의 아나키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책을 읽고 귓가에 맴도는 노래를 한참동안 컬러링으로 사용했다. 예술은 고급과 저급으로 나눌 수 없고 특히 일본을 통해 유입된 미술 - 예술에 대한 개념이 어떻게 오해되었고 100년 이상 이 땅에 뿌리 깊게 고정관념을 만들어 왔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삼중당 문고판 <구토>를 책꽂이에서 다시 꺼내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채를린 영화를 다시 꼼꼼히 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예술의 전당에서 보았던 <오르세미술관전>보다 최근에 덕수궁 미술관에서 보았던 <비엔나미술사박물관전>이 인상 깊었던 이유를 되새겨 보았다. 합스부르크 왕가 컬렉션답게 바로크의 거장들이 대거 등장했기 때문이거나 일목요연한 하나의 주제와 정리가 되어있었기 때문일까? 수백 년 전 유럽의 왕들의 호사 취미에 대한 거부감이나 가려진 민중들의 고통의 신음소리가 들렸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직접 보지 않고 먼저 읽고 알고 규정 지어버리는 그림에 대한 태도 때문일지도 모르겠으나 눈에 낀 색안경이나 관념성을 지워버리고 싶은 욕망이 앞선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아니라 그림은 보는 만큼 알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한 권의 책을 통해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다시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저자의 말대로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다’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하나의 태도가 아니라 당연한 말인지도 모른다. 예술의 순수성이라는 용어가 애매하고 모호해진다. 순수성은 어디까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유’라는 가장 기본적 가치에 충실해야할 예술의 본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정치적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인간 영혼의 가장 본질적인 자유를 위해서만 복무하는 예술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070828-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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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7-08-29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는 행위에 의해서도 가치가 만들어지지만 만든 행위 자체에서도 가치가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보는 시각은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무수히 다양해지니까 꼭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를 본다에서만 찾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sceptic 2007-08-30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연한 말씀이시죠. '꼭'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를 본다에서만 찾을 수 없겠죠...만든 행위가 기본이고, 보는 행위는 다른 시각일 뿐이죠.
 
조대리의 트렁크
백가흠 지음 / 창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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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집을 읽으면 제목과 내용이 뒤섞이고 차례를 다시 훑어보지 않으면 나중에 누구의 단편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백가흠의 소설집 <조대리의 트렁크>는 9편의 단편이 모두 기억나고 다른 소설가의 단편과 헷갈릴 것 같지도 않다. 이 책은 그만큼 인상적이었다. 인상적이라는 말은 다르다는 건데 소재나 내용 면에서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것들을 선택했다는 말이고 문체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다는 말이다.

  아침마다 조간을 펼치며 심각한 수준으로 무섬증을 느낄 때가 있었다. 사회면을 들여다보는 일이 곤혹스럽고 마치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애써 눈을 돌리고 싶고 외면하고 모른 척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다. 분명, 내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며 우리들의 자화상임에도 불구하고 피하고 싶을 때가 많다. 백가흠은 그것들을 들춰낸다. 덤덤하고 무심하게 들춰낸다.

영화를 보다가 눈을 질끈 감거나 귀를 막고 듣고 싶지 않은 소리가 있다. 그것을 굳이 보여주는 감독이나 돈 내고 보지 않으려 노력하는 관객을 떠올려본다. 비슷한 상황은 아니지만 ‘웰컴, 마이!’를 보면서 나는 책장을 넘기기가 두려웠다. 끔찍한 현실은 소설 속에서 재현되고 실날하게 이면의 감추어진 진실들을 드러낸다. 뉴스에 스쳐지나가는 장면이나 사건의 제목 속에 숨어있던 불편한 현실과 적나라한 진실들을 보여주려는 작가의 의도는 성공적이다.

  백가흠과의 첫 만남은 흥미로 이어질 것 같다는 느낌이다. 소설이 보여주는 현실은 아름답고 과장된 꿈을 표현하려는 공간이 아니다. 가볍고 유쾌할 수도 있고 무겁고 진지할 수도 있지만 삶의 진정성이 배어나는 시린 느낌이 드는 소설이 나는 좋다. 손등이 갈라져 피가 나거고 역거운 장면과 상황들이 이어져도 현실과 소설의 공간은 중첩되고 갈라지며 혼란스런 감동과 충격으로 독자들을 몰아갈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저마다 다른 진실을 쏟아내며 아파하고 비명을 지르는 소설이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다. 소설을 통해 원하는 것은 독자마다 다를 것이다. 현실을 잊을 만큼 매력적인 이야기와 재미를 느낄 수 있고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확인하거나 전혀 다른 측면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해 주기도 한다. 철저하게 거짓과 환상의 세계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불편하더라도 그것이 진실하다면 두 눈 부릅뜨고 한 번쯤 확인할 필요도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정상성에서 벗어나 있다. 기준에 따라 ‘정상’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소수자들의 이야기라고 하면 더 적절하겠다. 버려진 아이와 적응하지 못하는 어른, 장애와 동성애으로 이어지는 소설의 면면은 때로 공포영화보다도 그로테스크하다. 장면 자체보다도 상황이 보여주는 비극성과 구조적인 비명이 더 끔찍하게 들린다. ‘웰컴, 베이비!’에 등장하는 엿보는 아이, ‘웰컴, 마미!’의 반지하방에 갇힌 아이, ‘루시의 연인’의 주인공, ‘조대리의 트렁크’에 갇힌 할머니, ‘굿바이 투 로맨스’의 두 여자는 모두 갇힌 사람들이다. 공간적
인 폐쇄성은 단순한 두려움보다 단절의 다른 표현이다. 인간의 존재 가능성은 소통에 있는 것이 아닐까? 서로 공존하며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도전이 백가흠이 도달하고 싶은 세상이라는 생각은 지나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믿고 싶다.

  ‘사랑의 후방낙법’이나 ‘웰컴, 베이비!’에서 작가는 ‘사랑’에 대해 유리창에 비친 흐릿한 빗물 수채화처럼 이야기한다. 투명하고 맑은 사랑이 아니라 애매하고 모호한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는 사랑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고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남의 일일 때만 허용될 수 있다면 그것은 무관심과 다름없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복잡한 삶의 모습들을 모두 담아낼 수는 없지만 뒤안길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단순히 좋은 소재로 그치지 말아야 한다. 소설을 통해 현실을 뒤바꿀만한 혁명을 하자는 게 아니라 또다른 시선과 간접 체험을 통한 세상에 대한 통찰력은 키워나가야 하는 것인 아닌가 싶다.

  백가흠의 소설은 열린 세상 속의 닫힌 사람들에 대한 답답한 보고서일지도 모른다. 외부적 시선으로 그들을 들여다보는 관찰자의 시선이 아니라 ‘매일 기다려’의 노인처럼 내부의 순수하고 견딜 수 없는 생의 욕망들이 밖으로 분출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기다려 볼 참이다. 작가의 방향과 다음 책들이 어떤 방향으로 흐르든 또 하나의 기다림이 아니겠는가. 구린내 나는 현실과 불편한 진실을 찾아 떠나는 작가의 뒷모습을 바라볼 준비는 되어 있다.


070824-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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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 30주년 기념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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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만들어 나아갈 방향과 목적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넓은 의미에서 자연은 동물과 식물의 삶과 죽음을 말한다. 인간도 물론 여기에 포함되며 누구보다도 먼저 문명을 만들어 왔고 문화를 이룩해 온 특이한 종이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진화는 특별함을 가지고 있지만 진보와 진화의 개념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보다 편리하고 안정된 생활을 위한 생존의 욕망에서 비롯된 인간의 물질 문명과 사회 구성 원리는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진화의 관점에서 인간의 노력과 무관하게 통제할 수 없는 유전자들과 개체와 집단 전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일은 흥미롭기만 하다.

  1859년에 나온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세상을 바라보는 틀 자체에 대한 반성과 회의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저자의 관점이 아니라 그 책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말한다. 폭풍과 해일처럼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끊임없이 수정되었으며 자연과학 뿐만 아니라 역사와 철학 종교에 까지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 공산주의와 마르크스, 정신분석학과 프로이트의 영향만큼 세상을 온통 뒤흔든 사건이었다. 중세적 사고와 가치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에 인류가 만난 이 세 사람은 아직까지도 유령처럼 우리 곁은 떠날고 직간접적으로 생활 깊숙한 곳까지 손길과 영향을 끼치고 있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1976년에 출판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도 다윈의 <종의 기원>만큼 충격이었던 같다. 전공과 무관하게 생물학이나 동물생태학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다는 것은 당연한 충격과 후유증을 동반했을 것이다. 종이나 집단 수준의 이타주의와 행동 양태들이 연구되던 무렵에 개체 중심의 ‘유전자’를 앞세운 진화론은 새로운 과학에 해당한다.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지적했던 정상과학의 붕괴로부터 새로운 패러다임이 시작된 것이다. 불멸하는, 이기적 유전자의 대한 도킨스의 철저한 분석과 논증이 이 책의 골간을 이루고 있다.

  생물들 사이에서 수없이 목격되었던 이타적 행위와 행동 방식들을 새로운 해석과 눈으로 바라보는 일은 분명히 낯선 일이다. 하지만 타당하고 적절한 논리와 일관성 있게 하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쉽게 이의를 제기할 수 없어 보인다. 그 이후에도 꾸준한 연구와 노력들이 이어졌을 것이고 새로운 사실과 방법들이 나타났겠지만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고 알을 까고 태어난 새처럼 저자는 진화의 원리에 새로운 이정표를 새웠다.

  전체 1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잘 다듬어져 있고 전체의 내용과 구성 체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앞부분에서 제기된 문제점과 논의들이 책의 서술과정에서 조금씩 반론을 제기하고 이론을 설명한다. 뒤부분에서 그것들이 일관성 있는 하나의 틀로 조목조목 바뀌어간다. 생존기계인 모든 생명체에 대한 이타성은 유전자 단위의 이기적인 태도에서 출발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그래서 타당성을 얻고 긍정적이고 설득적인 주장으로 독자들을 이해시킨다.

  과학의 심층부분을 이해하는 것은 낯선 이론과 수학적 통계와의 싸움이며 일반인들의 입장에서 접근하기는 더더욱 어렵게만 느껴진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쉽고 재미있게 읽힐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와 논증의 욕망을 잘 통제하고 있어 학문 영역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넓고 깊은 공감을 얻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알고 새로운 지식과 진화의 큰 틀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다면 지금까지 이 책이 주목받고 있는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인간만이 만들어 놓은 ‘문화’에 대한 유전 가능성은 존재하는가? 새로운 자기 복제자인 ‘밈meme'의 개념을 제시하며 인간의 특이성을 설명하는 11장은 이 책의 또 하나의 가치가 아닌가 싶다. DNA 유전자와 밈의 유기적 관계는 책을 통해 확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낳아 준 이기적 유전자에 반항하거나 더 필요하다면 우리를 교화시킨 이기적 밈에게도 반항할 힘이 있다. 순수하고 사욕이 없는 이타주의라는 것은 자연계에는 안주할 여지가 없고 세계의 전 역사를 통해 과거에 존재한 예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육성하고 교육하는 방법도 논할 수 있다. 우리는 유전자 기계로서 조립되었지만 밈 기계로서 교화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들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들의 전제에 반항할 수 있는 것이다. - P. 349

  밈은 인간이 유전자의 복제 욕구를 수행하는 이기적인 생존기계라는 저자 스스로의 주장에 대한 유일한 희망일까? 재미있는 가설이지만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지닌, 문화를 지닌 이기적인 개체인 인간의 특성을 나타내는 유일한 단서일까? 로빈 베이커의 <정자전쟁>에서 보여주었던 인간이라는 생명체에 대한 미시적 욕망도 <이기적 유전자>에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생명 자체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고 유전하는 과정에 대한 새로운 눈을 빌릴 수 있었다. 30여 년간 지속되었을 이야기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이야기들도 듣고 싶어졌다. 인간은 얼마나 단순하며 또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가를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이기적인 유전자보다 ‘밈’에게 관심이 간다. 인간의 미래, 아니 생명의 미래는 여전히 오늘의 모습 안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070823-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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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23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질러서 엊그제 받았습니다.
근데 책이 쌓여서 독서가 계속 늦어지고 있다는...ㅠㅠ
늘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추천꾹!

sceptic 2007-08-23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천히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읽을 수 있는 계절이 오네요...벌써 처서라니...
행복하게 읽으세요...
 
이별의 능력 문학과지성 시인선 336
김행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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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규원이 보여주었던 언어의 명징성은 서정시가 도달할 수 없는 하나의 세계를 구축했다. 맑고 투명하며 일상적이고 진부한 의미를 벗어난 시어들 간의 긴장과 비약은 상상력의 한계와 절정을 보여주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명제가 시사하는 바가 무엇이든 언어가 보여주는 세계는 유한하며 그 인식의 한계는 개인의 앎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데 공감할 수 밖에 없다.

  김행숙의 시집 <이별의 능력>은 <사춘기>에서 보여주었던 발랄함과 형식들을 조금 더 밀고 나아갔다. 언어는 손에 잡히는 대상과 사물 그리고 세계에 대한 명명법이다. 존재의 형식보다 내용이 앞선다. 그러고 나면 눈에 보이는 구체적 대상들이 아닌 세계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해진다. 영화 <메트릭스>에서 보여주었던 가상 현실의 세계는 인간의 상상이 빚어낸 극한의 세계다. 장자의 ‘호접몽’이든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든 상관없이 명칭과 해설이 아니라 만져지지 않는 혹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부단한 낚시질.



  발이 미운 남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나의 무용수들. 나의 자랑.

  발끝에 에너지를 모으고 있었다. 나는 기도할 때 그들의 힘줄을 떠올린다.

  그들은 길다. 쓰러질 때 손은 발에서 가장 멀리 있다.


  표제시로 제시된 ‘발’은 이 시집에서 보여주는 세계의 단면이다. 구상과 추상의 간극과 대립은 그림에서 보여지는 부분과 애써 설명하고 싶은 부분들에 대한 연민이다. 발을 보며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보여주거나 만들어가는 상상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다.

  시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독자와의 공감 여부를 떠나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시의 한 단면이라면 김행숙의 시는 존중되어야 한다. 언어가 펼쳐 보여주는 찬란한 프리즘의 세계처럼 화려하게 혹은 날카롭게 사물과 세상의 이면들을 속속들이 집어내는 감각은 시인 고유의 영역이다. 좋다거나 싫다는 감상 이전의 문제이다. 다만 소통의 문제가 남는다.

  단일한 사물과 사건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 양상과 감정은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나지만 언어 실험이나 이미지의 극한을 보여주는 시를 독자와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독자, 즉 문학 소비자를 염두 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달라지겠지만 우리가 들여다보고 상상할 수 있는 세상은 그리 넓고 크지 않다. 독자와의 공감이 시의 미덕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김행숙의 시들은 나름의 빛깔과 향기로 빛날 수 있다.

비에 대한 감정

그날 비는 감정적으로 내렸다

젊은 코끼리가 온 힘을 모아 코를 휘두르듯이
초목이 출렁이듯이

마침내 낙타가 해진 무릎을 꺾고 아무것도 담지 않은 눈빛을 던지듯이
낙타의 등에서 기절초풍할 비단이 펼쳐지듯이
중국 도자기가 굴러 떨어지듯이

그날 자동차들은 비단에 휘감겨서 아름다웠다
커브 길에서
상욕이 튀어나왔다

그날 나는 감정적으로 비와 대립했다
함께 하늘을 올려다본 사람들이 저마다 가슴을 쳤다
아, 입을 벌렸다

코끼리의 위대한 코에 감겨 공중 부양된 저 아이들이 꺄르르 꺄르르 웃고
마침내 앙, 울음을 터뜨리듯이

그날 비는 감정적으로 내렸다
마지막까지 내렸다


  장마 기간에 내린 수많은 빗방울 속에 나는 무엇을 보았으며, 어떤 장면들 보아왔는지 생각해 보았다. 시인의 시선과 비교하자는 것이 아니라 표현의 문제이며 전달의 문제로 접근해 보자는 것이다. 비에 이입된 화자의 감정은 지극히 주관적이며 경험을 공유할 수도 없다. 객관화 된 표현이나 매끈한 표현들을 원하는 독자들의 입맛을 달래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관된 세상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

  손과 발의 거리처럼 닿을 수 있으나 가장 먼 거리에 놓인 신체의 부분들처럼 그것들의 연장선에 놓인 세계는 닿을 수 없는 거리만큼 생경하고 이물스럽다. 시에 대한 평가와 영역에 한계는 없다. 그것들이 놓인 자리와 앞으로 놓일 자리만큼 다양하고 풍요로움을 기대해야 한다. 그래도 여전히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더 휘저어라. 나는 충분히 섞이지 않았다. 나는 생각 못한 알갱이처럼 남아 있어서 목에 걸리고

  길고 외로운 팔을 욕조 밖으로 늘어뜨리는 것이다. 당신의 목욕시간은 너무 길어, 당신은 소리치는 것이다.

  아주 길어져야 하는 것들이 있다고 나는 소리치는 것이다. 식사시간보다 목욕시간보다 더 길어지면 긴 것, 연약한 것, 갈 곳 없는 것, 사라지는 것,

  그리고 극단적인 기침이 어디서 터져 나오는 것이다. 사람 많은 곳에서 사람 아닌 것처럼 구부리고

  구부렸다, 폈다, 구부리는 운동 속에서 나는 계속 되지 않는다. 나는 불연속적으로 사람들 속으로 사람들을 떠난다.


07082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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