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뛰는 삶을 살아라
다릴 앙카 지음, 류시화 옮김 / 나무심는사람(이레) / 1999년 3월
평점 :
절판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눈에 안 보인다는 이유로 사기를 치는 사람도 많다. 보이지 않는 존재, 만져지지 않는 실체에 대한 믿음은 신에 대한 믿음과 유사하다. 그 믿음에 대한 이유와 목적이 서로 다를지도 모르지만 유사한 면이 많다. 뉴에이지에 관한 음악과 명상 등 관련 분야가 하나의 산업이 될 정도로 성장했다. 삶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낙관적 전망을 위한 도구로서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어쩐지 내겐 공허하고 무기력한 현실 도피로 비춰진다.

  친구의 권유가 손에 잡은 아릴 앙카의 <가슴 뛰는 삶을 살아라>는 일단 믿을 수 없다. 류시화가 번역 소개한 이 책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영적인 존재와의 대화를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풀어놓은 책이다. 인도인 다릴 앙카는 외계의 영적인 에너지를 만나게 되는데 그를 바샤르라고 지칭하고 있다. 이 바샤르가 다릴 앙카의 몸을 빌어 일반인들의 질문에 답하는 내용을 책으로 묶었으니 일단 호기심을 이끌어 내는 데는 성공했다.

  바샤르가 존재한다는 아사사니는 눈에 보이지 태양계 바깥의 우주에 존재한다고 스스로를 밝힌다. 수킬로미터 크기의 우주선을 타고 다니기도 하며 UFO와 같은 실제 존재를 믿지 않는 인간들을 설득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주로 하는 질문은 인간의 삶과 죽음 이후나 영혼의 관한 질문들이다. 바샤르는 성실하게 이 질문에 대답하며 그 실체를 인정받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바샤르라는 존재가 채널링을 통해 일본에서 일반인들과 만나 나눈 대화의 방식이 아니라 그가 지구에 대해 혹은 인간의 삶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먼 우주의 신비한 존재에게 자신의 삶과 고민을 털어놓고 삶의 길을 묻고 있다. 그가 답을 줄 수 있다는 생각도 재미있지만 진지하게 경청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절로 난다. 조소나 냉소가 아니라 그저 허탈한 웃음이다. 참 삶의 방법과 길은 알 수 없으니 별의별 방법이 다 동원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나는 물론 바샤르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바샤르는 버뮤다 삼각지대를 외부와의 통로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틀란티스 대륙도 실제한다고 말한다. 무엇이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신뢰도에 문제가 가는 대목이다.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긍정할 수도 없는 일이다. 있다는 증거도 없고 없다는 확증도 없다.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일도 많지만, 알 수 없다고 사람들을 미혹케 하는 일도 많다. 물론 과학적 사고와 합리적 이성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 그러니 신비주의를 신봉하며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모두 바샤르에게 물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특히 바샤르의 대답 중에 에이즈와 동성애에 관한 문제는 기가 막히다. 일종의 병이라고 파악하며 언젠가 미래에는 없어질 것이라고 판단한다. 인간에게 내재된 남성성과 여성성의 불균형으로 생긴 현상이라고 본다. 보수 기독교와 유사한 견해를 보이는 바샤르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구체적인 현실 문제를 묻는 다는 것이 그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의심이니 믿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우습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에게 길을 묻는 일이 더 재밌다.

  바샤르가 말하는 삶의 길과 방법은 한 마디로 요약된다. 제목이다. ‘가슴 뛰는 삶을 살아라’가 그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해라. 가슴 뛰며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영원한 존재이다. 우리는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우주 여러 곳에 존재한다.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영혼의 육체 이탈에 불과하다. 다른 곳에 다시 존재하게 된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임사체험>에서 품었던 의문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견해가 곳곳에 보인다. 일본에서 벌어진 이 대화의 내용들을 놓고 논의하는 것은 어쩌면 부질없다. 사람은 누구나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며 살고, 믿고 싶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한한 인생을 살면서 영원한 존재를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욕심일 수 있겠다. 하지만 우리가 태어난 이유와 삶의 방법은 아무도 모른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는 교훈을 얻을 수밖에 없다. 실제 이 땅에 발 딛고 서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이 살아온 과거에서 길을 물어야 한다. 내 손으로 모두 해결 할 수 없어도, 나의 고민은 여전히 ‘지금-여기’에 있다.

  새털구름 가득한 푸른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 땅에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저 먼 곳에서 온 존재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나,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찾지 못하는 길을 먼 곳에서 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뉴에이지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세기말의 신비주의가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고 맑은 정신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음악이든 책이든 도구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무엇을 위해 살든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여유만으로도 세상은 다르게 보일 수 있다. 내가 찾는 것이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과 길을 여전히 책에게 묻고 있으니, 한편 서글프기도 하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책을 볼 때 가슴이 뛴다.

07101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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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치는하늘 2009-05-16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감사합니다. 덕분에 엄한 책 한권 피했네요.^^;인터넷교보에서도 이책, 칭찬 일색이어서, 살 뻔 했습니다. 타 리뷰만 보고 이책을 샀다면..ㄷㄷㄷㄷ

sceptic 2009-06-11 22:28   좋아요 0 | URL
ㅋㅋㅋ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그냥 좋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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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해지지 않아도 돼.
무릎으로 기어다니지 않아도 돼.
사막 건너 백 마일, 후회 따윈 없어.
몸속에 사는 부드러운 동물들,
사랑하는 것을 그냥 사랑하게 내버려두면 돼.
절망을 말해보렴, 너의. 그럼 나의 절망을 말할 테니.
그러면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
그러면 태양과 비의 맑은 자갈들은
풍경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거야.
대초원들과 깊은 숲들,
산들과 강들 너머까지.
그러면 기러기들, 맑고 푸른 공기 드높이,
다시 집으로 날아가는 거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너는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어.
기러기들, 너를 소리쳐 부르잖아, 꽥꽥거리며 달뜬 목소리로-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이 세상 모든 것들
그 한가운데라고.
                                        - 메리 올리버, 「기러기」

  함형수 시인의 말처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당신이 누구이든 얼마나 외롭든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다면 그는 분명, 행복한 사람이다. 한 편의 소설이 전하는 즐거움은 독자마다 다르다. 동갑내기여서가 아니라 고개를 끄덕이며 동일시된 감정으로, 혹은 공감을 극대화하며 읽을 수 있는 소설을 만나면 어떤 방식의 접근 방식보다도 세계를 , 혹은 과거를 해석하고 규정하며 정리할 수 있게 된다.

  만원으로 할 수 있는 가장 큰 행복 중의 하나는 바로 김연수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사서 읽는 일이라고 말하겠다. 한가로운 주말에 눈을 떼지 못했던 그의 장편은 기꺼이 그의 책들을 의심 없이 살 수 있겠다는 믿음을 주었다. 책을 쓰는 방식과 세상에 대한 접근 방식은 작가마다 다르다. 그런 점에서 김연수도 한계와 단점을 지니고 있다. 몸으로 부대끼는 현장성이나 폭넓은 사회적 관심에 대한 부족은 나의 개인적인 아쉬움이다. 그의 단편들이나 장편을 통해 우리가 그를 만날 때 가졌던 아쉬움이 남더라도 다른 측면에서 또 다른 즐거움을 전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만원의 행복은 연예인들의 쇼가 아니라 책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1. 인드라망

인드라망은 제석천이 사는 도리천 세계의 하늘을 뒤덮은 그물을 지칭한 것인데, 모든 그물의 매듭에는 구슬이 달려 있고 그 구슬 모두에는 사바세계 전체가 비추어진다고 한다. 그물 매듭의 구슬이 세계 전체를 비출 수 있는 이유는 세계의 모두가 하나의 그물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즉(卽)하고 의(依)하여 부분이 전체이고 전체가 부분인 세계로서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에는 촘촘한 그물이 덮여 있다. 그물에 매달린 구슬들이 서로 비추어 주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은 우리가 살아온 과거이며 현재이고 미래의 모습이다. 어떤 논리와 합리적 이성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생의 아이러니에 대해 작가는 정교한 씨줄과 날줄로 그것들을 직조하고 있다. 알버트 라즐로 바라바시가 『링크』에서 주장한 21세기를 지배하는 네트워크 과학을 빌리지 않더라도, 세상 사람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추측이나 가정이 아니라 실재하는 현상이다. 그것을 소설로 보여주기 위한 작가의 노력은 주인공의 할아버지와 여자 친구의 삼촌 그리고 노동운동가였다가 프락치로 등장하는 강시우의 아버지가 중첩되고 연결되면서 독자에게 흥미와 공감을 선사한다.

  독일에서 만난 헬무트 베르크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악장’을 듣고 싶다. 그 선율을 타고 한국과 독일, 서울과 베를린과 평양, 제 2차 세계대전과 광주, 강경대와 김귀정은 모두 연결되었다가 흩어진다. 세계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 속에서 드러나지 않는 모습들을 감추고 있지만 그것을 우리만 모르는 것은 아닐까. 그 연결 고리들을 찾는 재미가 이 소설에는 담겨 있다.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그 순간 우리가 예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는 점에서 인생은 신비롭다. - P. 150

우리는 지나간 뒤에야 삶에서 일어난 일들이 무슨 의미인지 분명하게 알게 되며, 그 의미를 알게 된 뒤에는 돌이키는 게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 P. 378


  나와 세계와의 갈등으로 세상을 파악하는 관점이 아니라 그저 나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작가의 이 말들에 공감하게 된다. 불가해한 인생과 그 연결망에 대한 신비로움은 인간이 영원히 알 수 없는 또 다른 세계의 일인지도 모른다.

2. 사랑

  그는 정민을 사랑했을까? 바보 같은 질문이지만 1인칭 화자인 나는 ‘정민’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만난다. 그녀는 그의 전부였고 생의 목적이었고 생명이었다는 식의 진부한 사랑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랑의 방식들 중에서 그들은 ‘이야기’를 선택한다. 이야기를 통해 그들은 연결되고 사랑하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현실을 직시한다.

  나의 정민에 대한 사랑과 베르크의 안나에 대한 사랑은 비교할 수 없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의미와 사랑이 찾아오는 방식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지극히 작가의 개성에 해당할 이 사랑의 방정식 또한 이 소설을 읽는 또 다른 재미가 된다. 가령 이런 구절들,

내가 한때나마 존재했었다면 그건 오직 당신 때문이었어. 얼룩무늬 소피에게 맹세했다시피. 존재가 없었다면 고통도 없었을까. 그렇다면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 순간이 내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어. 나는 그 고통을 매순간 맛보고 있어. 너무나 달콤한 고통이야. 나는 지금 하얀 숲속에 있고, 모든 것은 끝나가고 있어. 지금으로서는 그 고통을 이제 더 이상 맛볼 수 없다는 게 가장 힘들 뿐이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 P. 270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감정인 ‘사랑’은 존재한다. 그것을 확인하지 않거나 표현하지 못하는 것일 뿐. 그리고 그것은 ‘그리움’이라는 형태로 변형, 왜곡되기도 한다. 그녀 혹은 그를 기억하는 방식은 실로 다양하다. ‘그리움의 본질은 온기의 결여였다.’고 말하는 작가의 말에 공감하는 이유는 기억에 대한 방식 때문이다. 이성적인 작용이나 두뇌의 한 구석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몸에 대한 기억은 놀랄 만큼 문득문득 선명하고 새롭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옥상에 앉아 하늘의 별을 바라보다가 뺨에 스친 그녀의 머리카락이나 땀이 나도록 맞잡은 손의 온기 같은 것들 말이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사랑이 이루어질 확률도 그것이 이어져가는 방식도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과 삶이라고 하는 거대한 괴물(?)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고 있다. 1인칭 화자인 내가 사랑한 ‘정민’은 어디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3. 우리의 인생, 그 후

  우리는 인생을 두 번 사니까. 처음에는 실제로, 그 다음에는 회고담으로. 처음에는 어설프게, 그 다음에는 논리적으로. 우리가 아는 누군가의 삶이란 모두 이 두 번째 회고담이다. 삶이란 우리가 살았던 게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며 그 기억이란 다시 잘 설명하기 위한 기억이다. - P. 384

  지나온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은 참으로 편리하다. 시간이 점차 흐를수록 기억은 희미해진다. 안개처럼 아련한 추억들은 재생할 때마다 편리한 방식으로 재구성된다. 우리의 기억은 추억이라는 미화된 사진으로 인화되며 삶 또한 그러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적당한 망각과 편집과 재생 기능이 없다면 견뎌낼 수 없는 미련과 아쉬움, 고통과 환희들을 모두 감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누군가의 삶이란’ 이렇게 회고담의 모습으로만 존재한다. ‘삶이란 우리가 살았던 게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라는 말은 우리들이 존재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식일 수도 있다. 짧은 생에도 이토록 많은 기억과 관계들이 그물처럼 얽혀있다. 그래서 더더욱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제공하는 것이 작가들의 몫이다.

  1991년 10월 이전을 정리한 김연수는 이 한 권의 소설로 시대를 마감했고 정리했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단편처럼 읽히다가 정교하게 얽히다가 하나로 묶인다. 스스로 ‘프로 소설가’라고 외치는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다. 그 목소리에 공감하며 벌써, 다음 소설을 기다리는 성급한 독자가 되었다. 그리고, 문득 궁금해졌다. 나의 인생, 그 후를.


071009-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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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10-09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연수의 이 소설에 대한 평가가 다들 좋군요. 발췌하신 소설속의 구절도, 님의 쓰신 리뷰속의 구절도 와닿는 것이 많네요. 잘 읽고 갑니다.

sceptic 2007-10-10 20:43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 맘에 드는 소설가라서...이 장편도 좋게 읽었습니다...여러가지로 보여주니까 지루하지 않고 단숨에 읽었어요...함 보세요...
 
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62
조향미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노을

어디서부터 울려 퍼졌나

꿈결처럼 아련한 노랫소리

영원인 듯

먼 지평선 아래로 잦아드는 화음

마지막 발자국을 지우며

사막 끝으로 장엄히 사라져간 부족의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노랫소리

  자기만의 색깔을 보여주는 시인을 만나기 어렵다. 시의 범주 안에서 살갑게 부대끼는 소리만 들릴 뿐인 시들과 마주하는 일은 지겹다. 같은 대상에 대한 전혀 다른 해석과 방법을 통해 언어의 울림을 전해주는 시인은 그만큼 만나기 어렵다는 말이다. 조향미의 세 번째 시집 『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는 자연의 울림과 생활의 발견으로 가득하다.

  자연을 통해 전하고 싶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숨겨 버릴 수도 있지만, 미주알고주알 친근하게 토로할 수도 있다. 방법을 선택하는 것은 시인의 몫이고 그 선택은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시의 빛깔과 향기로 남는다. 그 모든 재료와 조리법은 언어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있는 그대로의 자세와 대상들에 대한 인상을 전하는 시도 있다. 조향미의 ‘노을’은 하얀 화면에 소리 없이 빛이 스미는 장면을 보여준다. ‘노랫소리’라고 이야기하지만 소리는 없고 그리만 남는다. 시각화한 이미지는 선명한 심상의 울림으로 남는다.

  시라는 형식을 통해 무엇인가 발언하고 싶은 내적 욕망을 얼마나 조절할 수 있을까? 섣불리 뱉어낸 과잉 감정의 토로나 육화되지 않은 건조한 말들로 조합해 낸 시들은 이내 균열을 일으키고 가슴에 닿지 못하고 무너진다. 조향미의 시들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가만가만 속삭인다. 서정시가 보여줄 수 있는 감각의 이미지들을 잘도 잡아낸다.

산복도로 봄볕

스펀지 비어져나온 낡은 의자
구부정히 해바라기하는 백발노인
흐릿한 눈길 아슴한 저 길 위에
무장무장 쏟아지는 봄볕

황감하여라 두터운 봄볕
그러나 겨울옷처럼 묵은 육신
그만 벗고 싶다 하얀 나비처럼
팔랑팔랑 꽃상여 타고 싶다

죽기에 좋은 날이다


  절대 적막과 두터운 봄볕 속에서 ‘죽음’을 보는 시인의 인식태도가 절망적이거나 부정적이지 않다. 그것은 탈속적인 경지에 이른 생의 무결함을 보여주는 것 같다. ‘죽기에 좋은 날’이 어디에 있는가? 죽는 날은 모두 ‘좋은 날’이다. 흰소리 집어치우고 팔랑팔랑 꽃상여나 타고 싶다.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끊임없는 경쟁의 시선을 던지는 시인은 행복할까? 나는 마음을 보여주지 못하지만 시인들은 마음에 대해 잘도 말한다. ‘그대는 어디 자취도 없’고 ‘마음의 샘’은 아득하기 만하다. 두레박줄 내려 보지만 ‘찰랑!’ 닿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손등 하나 잠기지 않는 마음의 끝자락만 잡았을 뿐이다. 잡을 수 없는 것에 대한 한없는 욕망이 무화되는 순간이다. 가려고 하지 말자. ‘마음은 가도 가도 끝없다.’

마음

가도 가도 끝없다
그대 마음의 솜털까지 헤아릴 듯
햇살처럼 화안하던 그 자리
한순간 자욱이 안개 내리고
천지사방 길 끊기고
그대는 어디 자취도 없네
아득해라 마음의 샘
두레박줄 내리고 내려도
끝닿을 줄 모르다가
드디어 찰랑!
수맥을 찾은 듯
한 동이 물 가쁘게 당겨올렸으나
막상
두레박은 텅 비어 있네
손등 하나 못 잠기네



071005-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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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7-10-05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감하여라 두터운 봄볕, 이라니!
참 좋네요 ^^

sceptic 2007-10-09 13:14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순간, 유리벽 안에...세상과의 단절이죠...
 
촘스키의 아나키즘
노암 촘스키 지음, 이정아 옮김 / 해토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상상해봐, 천국이 없다고
노력하면 너무 쉬워
우리 밑에 지옥도 없다고
우리 위에는 하늘뿐이라고
상상해봐, 모든 사람들이
오늘을 위해 산다고 

상상해봐, 어떤 국가도 없다고
그건 어렵지 않아
누구도 그 때문에 죽이거나 죽지 않고
또 어떤 종교도 없다고

상상해봐,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산다고
넌 날 꿈꾸는 사람이라고 할지 몰라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야
나는 언젠가 네가 우리와 함께하길 바라
그러면 세계는 하나가 되겠지

상상해봐, 어떤 사유私有도 없다고
넌 상상할 수 있을 거야
탐욕도 굶주림도 없다고
모두가 형제라고

상상해봐, 모든 사람들이
세계를 공유한다고

넌 날 꿈꾸는 사람이라고 할지 몰라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야
나는 언젠가 네가 우리와 함께하길 바라
그러면 세계는 하나가 되겠지

  존 레논의 ‘Imagine’이다. 반자본, 반국가, 반종교를 외치는 이 노래는 아이러니하게도 광고음악으로 자주 사용되곤 했다. 한참 동안 핸드폰 컬러링으로 사용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팝송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노래는 박홍규의 <아나키즘 이야기>에서 첫 페이지를 여는 노래이기도 하다.  

  아나키즘은 자유이다. 어느 것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 인간이 꿈꾸는 완전한 세상이다. 이념적 성향으로 분류하면 아나키즘도 다양한 방식을 추구한다. 사회주의와 모호한 경계를 드러낼 때도 있고 개인주의나 자유주의와 결합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정교한 이념적 틀이 중요하지는 않다. 바쿠닌이나 크로포트킨 그리고 최초의 <최초의 아나키스트>의 주인공 윌리엄 고드윈의 생각도 아나키즘을 대표할 수는 없다. 시대와 환경이 달라졌고 세상은 변하고 있다. 아나키즘은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쉽게 규정되거나 함부로 단정짓기에는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을 지닌 채 확대 재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변형생성문법’으로 구조주의 언어학의 기틀을 마련한 촘스키는 늘 사회를 향해 발언한다.  

  <촘스키의 아나키즘>은 그래서 새롭게 보이지는 않는다. 대담 형식으로 구성된 이 책은 지금까지 촘스키가 보여주었던 사유의 진폭을 보여준다.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에 대한 냉엄한 비판과 소수의 자본가와 권력자들을 향한 비판의 칼날은 세월이 흘러도 무뎌지지 않는다. 그를 지탱하는 힘은 인간의 언어에 대한 분석과 학문적 바탕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지만 언제나 청년정신으로 살아가는 그의 생각이나 글들은 거시적인 안목에서 우리의 현재를 돌아보게 하는 풍향계의 역할을 해준다.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다분히 미국적 현실에서 미국의 지성인으로 미국에 대한 비판을 가하는 국내용으로 그를 평가하는 것은 지나치다. 자본주의의 절정에 선 나라에서 국가를 넘어 제국으로 치닫는 미국에 대한 그의 생각은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판단으로 보아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열 살 때부터 그를 매료시켰다는 아나키즘은 도대체 어떤 사상인가? 단순하게 정부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로 번역하는 오해의 소지가 있고 편견을 가질 수 있게 할 수 있으니 그냥 아나키즘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무정부주의는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분명 반자본주의다. 그러나 무정부주의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도 반대한다. - P. 59

  어쨌든 이 책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촘스키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지만 명확한 개념을 밝히거나 아나키즘의 구체적 아젠다를 이끌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각종 강연회나 인터뷰를 통해 철저하게 현실 사회의 모순에 대한 촘스키의 눈과 입을 빌려 아나키즘에 대한 이야기를 적용해 나간다는 면에서는 오히려 읽을 만하다. 

  억압과 구속이 무엇인지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촘스키의 메시지는 오히려 공허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가 말하는 방식이나 그의 눈에 비친 모습들을 이해조차 할 수 없을 수도 있다. 보이지 않는 족쇄와 견딜 수 없는 모순들이 보이는 사람들에게 적절하겠다. 공무원과 국가를 상전처럼 모시고 사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한 번쯤 불합리하다고 느껴 본 사람이라면 함께 공감할 수 있다. 

  김수영의 ‘푸른 하늘을’이 갑자기 떠오른 이유를 알 순 없지만 ‘자유’나 ‘혁명’ ‘피’의 이미지로 대변되지 않는 아나키즘을 생각하며 엉뚱한 시가 떠오른 이유를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다. 오늘은 머리가 엉켜버렸으므로.

푸른 하늘을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071004-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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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10-05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상만 할 수 있으면 즐겁지요.아나키즘처럼 이상적이며 낭만적인 것이 어디있겠습니까...인류가 사라지지 않는하 규제적 이념정도로만 '이매진'될 것입니다.그것도 의미없는 일은 아니지만...보이지않는 모순들을 보더라도 아나키즘적 방법이 거부될 수도 있습니다.
최근에 읽던 테리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의 한대목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형식에 대한 집착이나 형식을 부인하는 니힐리즘,독재와 아나키가 실상 한 동전의 이면임을 알아야한다." 독재와 아나키를 같은 선상에 놓은 것은 동의할 수 없지만 어떤 맥락에서 이 논의가 나왔는지는 알기때문 뉘앙스는 이해합니다.멀리 거슬러올라가면 마르크스와 바쿠닌 논쟁(고진은 오히려 정치적으로 맑스가 바쿠닌편에 가까왔다고 말하지만) 식민지시대 아나볼 논쟁과 비슷한 맥락이겠지요.아나키즘의 풍부한 상상력은 여러가지로 응용가능하고 보완적 성격을 가질 수 있지만...거대담론으로는 규제적일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sceptic 2007-10-05 18:17   좋아요 0 | URL
아나키즘은 이상적이거나 낭만적이지 않고, 존 레논의 노래가 낭만적이죠...^^

맑스와 바쿠닌은 갈등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제 생각엔 사상적으로 가장 근접한 동지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고진에 말에 공감하는데요, 독재와 아나키를 같은 맥락에 놓은 것도 이해는 갑니다. 가장 큰 문제는 너무 다양한 방법론과 현실에 대한 접근 방법이 파격적이라는...

어쨌든 꿈이나 꿀수 있는 현실 저편의 이상이 아니라, 정교화한다면 현실에서도 실현 가능한 방법들도 찾아지지 않을까요? 그래도 '이매진'을 한 번씩 들으면 마약처럼 노곤해집니다.
 
상상의 공동체 -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 나남신서 377
베네딕트 앤더슨 지음, 윤형숙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워보았다. 첫 번째 문장을 자신있게 외웠고 뒤에 문장은 더듬더듬 기억이 났다. 초등학교 시절에 뜻도 모르고 열심히 암기했던 문장들이 하나 둘씩 떠오른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1968년 12월 5일에 박정희가 반포한 ‘국민교육헌장’은 취지와 의도와 무관하게, 앞부분에 ‘민족’을 내세우고 있다. 민족을 중흥하겠다는 국민교육의 목표는 ‘상상력’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 베네딕트 앤더슨이 <상상의 공동체>에서 내세우는 핵심적인 주장이다. ‘민족주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던 책의 개정증보판을 원제대로 나남출판에서 2002년에 출판했다. 월드컵의 광풍(?)이 몰아치던 시기였기 때문에 ‘민족주의’에 담론들이 넘쳐났고 보이지 않는 열기로 가득했던 한반도의 상황들을 돌아보는 데 유효한 저작이다.

  우리가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민족이라는 개념에 대해 의심해 본적이 없다면 베네딕트 앤더슨의 이야기는 놀라움으로 가득해 보일 것이다. 종교적 공동체와 언어 공동체로 양분할 수 있었던 사람들을 근대화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묶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근대적 의미의 ‘국가’의 성립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지역적 특성을 토대로 국가와 민족은 하나가 되었으며 단일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이루지 않더라도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문화적, 언어적 공통성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애국심과 인종주의는 ‘문화적 조형물’로 이루어진 역사적 공동체일 뿐이다.

  민족은 본래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공동체이다.
  민족은 가장 작은 민족의 성원들도 대부분의 자기 동료들을 알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며 심지어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도 못하지만, 구성원 각자의 마음에 서로 친교(communion)의 이미지가 살아있기 때문에 상상된 것이다. - P. 25

민족은 제한된 것으로 상상된다. 왜냐하면 10억의 인구를 가진 가장 큰 민족도 비록 유동적이기는 하지만 한정된 경계를 가지고 있어 그 너머에는 다른 민족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 P. 26


  문화적 기원을 통해 ‘민족’의 의미와 기원을 살펴보는 작업은 보이지 않는 인종간의 결속력의 근원을 살펴보는 일이다. 과연 민족의식의 기원은 무엇인가?  식민지와 제국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크리올이라 불리우는 식민지 이민자들의 의식을 통해, 혹은 식민지의 원주민들의 의식을 통해 저자는 민족주의의 한계와 계급성을 드러내고 있다. 자본주의의 기원과 함께 민족주의의 개념이 기원이 밝혀진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민족주의가 안고 있는 파시즘의 성격을 말한다. 생각해보면 파시즘적 민족주의가 내포하는 있는 불온한 의도는 다중의 의도와 신념을 빌미로 숨겨진 의도에 복무하고 있다. 숨겨진 의도는 민족주의를 내세워 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소수 기득권층과 배타적 이기주의자들의 검은 속내에 감추어져 있기 마련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민족주의가 신자유주의 물결과 함께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 것인가는 지금 우리들이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국가간 경계가 모호해지고 다국적 자본이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상황에서 과연 ‘상상의 공동체’는 유지될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하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상황을 파악하는 논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전개된 상황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능동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나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민족은 언어와 종족을 넘어선 위치에 자리 매김하고 있으며 공고한 물적 토대를 바탕으로 확고부동하게 자리잡고 앉아있다. 쉽사리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이 거대한 괴물을 상대로 한 지난한 싸움들이 힘겹게만 느껴진다. 싸워 무너뜨려야 할 대상으로 파악해서도 안되겠지만 그 기원과 역할을 알지 못한 채 맹목적인 믿음을 고수할 수는 더더욱 없는 노릇이다.

  서장에서 밝히고 있는 민족에 대한 정의는 이 책 전체에서 저자의 주장을 견고하게 지탱하고 있다.

민족은 제한된 것으로 상상된다. 왜냐하면 10억의 인구를 가진 가장 큰 민족도 비록 유동적이기는 하지만 한정된 경계를 가지고 있어 그 너머에는 다른 민족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 P. 26

민족은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된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계몽사상과 혁명이 신이 정한 계층적 왕국의 합법성을 무너뜨리던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 P. 26

마지막으로 민족은 공동체로 상상된다. 왜냐하면 각 민족에 보편화되어 있을지 모르는 실질적인 불평등과 수탈에도 불구하고 민족은 언제나 심오한 수평적 동료의식으로 상상되기 때문이다. - P. 27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의해 미혹된 채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는 나에겐 너무나 많은 들보들이 눈을 가리고 있다. 걷어내고 부러뜨려도 누군가 색안경을 씌우고 안개를 뿌린다. 청명하게 맑은 시선으로 푸른 가을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그것이 현실을 바라보는 가장 기본적인 준비라고 믿는다. 민족이라는 개념이 ‘상상된 공동체’이든 ‘문화적 조형물’이든 ‘역사적 실체’이든 상관없이 현실 속에 굳건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편견과 왜곡된 의식은 쉽게 바로잡히지 않는다.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한 작은 노력들을 시작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07100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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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2 20: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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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2 23: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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