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을 거부하라! - 노동 지상주의에 대한 11가지 반격
크리시스 지음, 김남시 옮김 / 이후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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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참 매력 없는 도시이다. 이웃 블로거 타다노부님의 말대로 사람들의 관계를 벗어나서 즐길 만하거나 사물과 대상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길러온 도시라고 보기 어렵다. 단순하게 말해 기능적인 면과 편의성 측면에서 탁월할 지 모르지만 그것 이상은 찾아보기 어렵다. 누구나 개인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 숨은 뜻은 공유하기 쉽고 말해진 것을 긍정할 수 있다는 것은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은 차갑고 인위적인 도시라는 결론은 어렵지 않게 도출된다. 그것은 서울이 아니라 도시의 일반적인 특성이라는 강변이 가능하지만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전제 조건을 가진 도시들을 비교할 때 그러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끔 서울이 아름답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은 서울의 야경 때문이다. 한강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어둠과 찬란한 불빛이 만들어내는 환상을 본다.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도시의 어둠은 네온싸인으로 인해 더욱 웅숭깊은 비밀스러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인공위성에서 촬영한 사진을 보면 휴전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의 밤은 확연하게 구별된다. 지구 전체의 모습을 살펴보면 흔히 선진국과 후진국의 구별은 더욱 확실해진다. 밤을 지워버리는 자본의 힘은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인간에게 어둠은 더 이상 휴식과 안정의 시간이 아니다. 밤은 극복의 대상이던 시절은 이미 오래 전의 이야기이다. 낮과 밤은 물리적인 시간의 구분일 뿐이다. 활동 시간은 무한대로 연장되었다. 끔찍하게도 그 활동 시간은 전부 노동시간의 연장에서 비롯되었다. 자본의 유혹은 밤을 밝혀 소비를 부추긴다.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공부하고 일하며 즐기고 관계 맺는다. 밤은 더 이상 밤이 아닌 시간이 되어 버렸다.

  대학 신입생 시절 열심히 따라 불렀던 “일하지 먹는 자여, 먹지도 마라! 자본가여 먹지도 마라! ~~”가 떠올랐다. 옮긴이의 글 제목이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라는 도발적인 제목이다. <노동을 거부하라!>는 책은 제목부터 옮긴이의 글까지 전부 도발적이다. 노동지상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노동을 거부하라니?

  이제는 상식이 되어버린, 숭고하고 도덕적인 가치인 ‘노동’을 거부하라는 말은 헛소리로 들린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은 과연 제대로 된 상식인가? 생각의 틀을 뒤흔드는 일은 쉽지 않다. 강한 거부감이 들더라도 귀 기울여 가슴을 열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는 사람은 이념적 지향을 떠나 존경스럽다. 이 책은 뉘른베르크에서 활동하던 좌파 연구 그룹인 ‘크리시스Krisis’가 발간한 책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았다.

  체제 전복적인 글도 아니고 국가 변란이나 내란, 음모를 모의하는 책도 아니다. 이 책은 독일의 정치, 사회적 상황을 고찰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노동하는 인간의 삶을 반성해보는 책이다. 지금까지 거론된 이론들을 점검하고 현실의 문제에 적용시키며 우리가 알지 못했던, 혹은 간과했던 ‘노동’의 문제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다.

  과연 인간은 일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 국가가 모든 국민을 먹여 살려야 할까? 아무도 일하지 않는 세상이 가능하단 말인가? 꼬리를 무는 의문부호는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조금씩 사라지고 11명의 이야기는 제각각 목소리를 높이며 혹은 차분하게 다양한 문제점들을 짚어 나가고 있다. 추상적 시간의 개념, 노동의 부패, 여성들의 노동, 저임금, 강제 노동, 노동 문화 등 하나의 주제를 둘러싼 주변을 점검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새롭게 인식된다. 자본주의 너머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책을 맺고 있는 이 책은 미래를 고민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된다.

  현실을 벗어나 과거를 돌아볼 수 없고 거꾸로 미래의 모습은 언제나 현실에도 드러나기 마련이다. 구체적인 책의 내용과 이론들은 독자들의 몫일게다. 아마도 다양한 반응과 논쟁이 가능한 책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 쉽게 권할 만하지는 않다. 일단 이론적 토대를 설명하면서 현실의 문제를 점검하고 있기 때문에 만만한 내용도 아니고 쉽게 재미있게 풀어쓴 교양서도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간에 맞춰 일어나 노동하고 밤에도 노동하는 인간에 대한 모습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자본주의의 시대는 또한 ‘자명종’의 시대이기도 하다. 곧 사람들을 인위적으로 조명된 ‘일자리’로 몰아가기 위해 기괴한 시그널로 잠에서 깨우는 시계의 시대인 것이다.
……
야간 노동은 흔하지 않은 예외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런 시간의 고문을 인간 활동의 정상적인 척도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 자본주의의 ‘거대한’ 성과 중 하나다. - P. 52

  우리는 꿈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오래된 과거처럼 저절로 눈이 떠질 때 일어나고 졸릴 때 잠을 자는 인체의 시간을 말이다. 그나저나 책을 읽다가, 부지런함이 미덕인 사회에서 발칙하게도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던 마르크스의 사위 라파르그는 왜 아내와 함께 자살했을까 궁금해졌다.

  시계가 없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 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예전보다 ‘행복’해 졌을까? 더 여유있고 즐거워졌을까? 이렇게 바쁘게 정신없이 살아가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일까? 보다 희망찬 미래를 위해서? 책을 읽는 동안 의문 부호만 늘어간다.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현실 인식이 아니라 한번도 의심없이 받아 들이고 고민없이 믿었던 상식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책을 읽고 나서도 엉뚱한 맥락으로 레닌이 이 말이 긴 여운으로 머릿속을 맴돈다.

“자신을 무엇이라고 지칭하는 것과 실지로 그것인 건 서로 다른 문제다.”(레닌) - P. 247


080730-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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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이크로 소사이어티로 간다 - 세상의 변화를 읽는 디테일 코드
팔란티리 2020 지음 / 웅진윙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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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 티비를 보지 않는다고 하지만  평일 9시와 일요일 12시가 되면 티비를 켠다. MBC 9시 뉴스, 출발 비디오 여행 때문이다. 그런데 평일에는 이제 더 이상 뉴스를 안본다. 처음에는 답답했지만 이젠 견딜만하다. 1시간이 여유로워졌고 뉴스를 보며 받는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어 정신 건강이 좋아졌다. 조간 신문만으로 답답할 때가 있지만 굳이 네이버나 다음 뉴스를 기웃거리지 않고 오마이 뉴스 등 인터넷 매체도 기웃거리지 않은 지 한참 되었다. 그래도 살만하다.

  세상에 진실은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가 믿었던 모든 것들은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졌고 다가올 미래는 늘 불안하기만 하며 현실은 모래 위에 지은 성처럼 위태롭기만 하다. 그래도 환상이나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건 게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정작 자신은 90이 넘을 때까지 살다가 죽은 쇼펜하우어의 권유대로 자살을 선택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의 모습과 미래에 대한 호기심은 떨쳐버릴 수 없는 유혹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그에 대한 무수한 분석들이 난무하고 혜안을 가진 지식인이나 종교인에게 기대기도 한다. 때로는 앨빈 토플러와 같이 탁월한 미래학자에게 기대기도 하고 신내림을 받은 무속인을 찾기도 한다. 그러한 노력은 오늘도 내일도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NHN이 만든 오픈 네트워크형 연구조직 NORI(New Media Open Research Info-Net)의 쳇 프로젝트 그룹인 ‘팔란티리 2020’은 인터넷을 비롯한 매체환경의 변화에 주목하면서 네트워크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의 삶의 변화를 주시하고 있다. 토론 연구 그룹의 성과물을 담아낸 <우리는 마이크로 소사이어티로 간다>는 개인의 정체성과 프라이버시, 지식의 변화상을 비롯해서 구너력과 경제활동, 놀이문화, 예술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변화를 조망하고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연구 그룹의 구성원들이 현직 교수라는 것은 이 책의 최대 단점으로 보였다. 학문적 관점이나 객관성을 확보하고 싶은 의도는 충분히 이해되지만 현실 감각이 떨어지고 이론적 토대와 인과관계의 해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현실을 읽어내는 탁월한 감각과 시대를 앞서가는 능력을 검증 받을 수는 없지만 시도나 의도만큼의 성과를 읽어내기는 어려웠다.

  일곱 개의 키워드를 잡아 낸 일이나 그것을 풀어내는 발랄함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먼저 ‘나는 몇 개인가?’는 개인의 정체성에 대해, ‘여기가 너희 집 안방이냐?’를 통해 프라이버시를, ‘네가 아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를 통해 지식의 개념을, ‘클릭의 경제학을 읽어라’에서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나는 논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게임과 현실의 관계를, ‘누구나 파워 게임의 승자가 될 수 있다’를 통해 현대 사회의 권력을, ‘당신도 앤디 워홀이 될 수 있다’에서는 현대예술에 대해 면밀한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현대 사회를 가로지르는 중요한 키워드를 통해 시대를 읽어내고 트렌드를 잡아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미래를 내다보는 돌’이란 뜻을 가지니 고대의 신석 이름에서 빌려온 ‘팔란티리’는 2020년을 내다보려는 욕망을 드러낸다. 이 욕망은 특별한 목적과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다. 물론 현재 상황에서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려는 것은 당연한 준비이자 기득권자들의 여유로 여겨질 때도 있다. 10년 후에도 우리가 돈을 잘 벌 수 있을까? 어디가 돈 되는 곳일까? 상대방의 의도를 비하하자면 이쯤 되겠다. 사람들의 의식과 변화의 흐름을 읽어내는 일은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초석이 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 NHN은 산학 협동의 이름으로 미래 사회의 아젠다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 의도가 순수하고 선한 것일지라도 결과까지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이 책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KT나 현대자동차와 맞먹는 10조원의 자산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네이버나 한게임 사용자들은 알지 못한다. 아니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것은 없다. 다만 이렇게 비대해진 조직과 어마어마한 수익구조를 지닌 기업이라면 그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할 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작고 사소한 힘이 큰 변화를 이끌어 낸다는 사회를 예감했다면 뉴스 편집과 정치적 스태스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 좋다. 네트워크 환경은 빛의 속도로 변해 갈 것이고 누구든, 언제든, 어디서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세상이 펼쳐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 힘의 원천과 근원이 되는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에 대한 관심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인문人紋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기업의 철학과 역사 의식은 지속가능한 경영의 초석이 된다. 거창하게 말했지만 진리는 단순하다.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예민한 촉수를 뻗쳐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들이 지향해야 하는 것을 찾아내고 제시할 수 있을 정도의 기업을 사람들은 원하게 될 것이다. 녹색은 생명이며 희망이며 자연이고 환경이다.

  시뮬라시옹의 시대에 구현해내는 시뮬라크르들은 어쩌면 완벽한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끝없이 고민하며 미래를 구현해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과제이며 ‘팔란티리 2020’이 고민하는 주제가 될 것이다. ‘지금-여기’가 아니라 ‘내일-거기’를 알고 싶다면 과거와 현재를 통해 먼저 변화의 흐름을 읽어내기 보다 변화의 주체들에 대한 관심과 길 안내가 필요하다.

  앞서 질펀하게 흘려놓은 고민들은 개인이든 기업이든 시민단체든 정부든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의 것들이다. 하지만 그것들의 해법은 제각각이고 바라보는 관점 또한 상이하다. 그것들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가는 더더욱 난망스럽다. 어쨌든 한 기업의 시도와 노력은 일단 가상하다고 평가할 수 있으며 이러한 노력과 연구는 지속되어 마땅하고 그 결과물과 소통과정은 열린 체계로 지평을 넓혀가야 할 것이라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그래야 식상한 표현이 ‘보다 더 나은 미래’가 펼쳐질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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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명랑'의 코드로 읽은 한국 사회 스케치
우석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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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회를 바라보는 눈은 그 사회의 구성원 수만큼 많다. 우석훈의 책을 계속해서 읽고 있었다. <촌놈들의 제국주의>를 읽고 <직선들의 대한민국>을 거쳐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를 통해 최근의 생각들을 일괄하고 있다. 기획 의도와 내용상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앞의 두 책과 구별되지만 전체적인 맥락으로 볼 때는 함께 묶여도 무관하다. 잡지나 신문 등에 실린 칼럼과 비평문을 모아 낸 모음집이니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흐름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사회적 이슈들을 다루었던 민감한 문제들과 정부 정책이나 경제, 사회 문제를 통해 노무현 정부 시절을 돌아보는 추억담처럼 읽힌다. 벌써! 이제 이명박 정부가 아닌가. 책을 읽는 동안 격세지감을 느낀다. 작년에 출판된 책이 1년 만에 아련한 추억처럼 읽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물론 책에 실린 내용이 그 이전에 쓰인 글들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는 주식회사 대한민국에 대한 우려와 걱정이 앞서기 때문일 것이다.

  잇달아 한 사람의 책을 읽다보면 행간에 숨은 정보들을 많이 읽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밝히지도 않은 나이와 이력들 그리고 그간의 행적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교묘하게 얽혀 마치 퍼즐을 맞춰 전체 그림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맛본다. 개인적인 호기심이 아니라 그의 생각과 사유 방식들이 어디에서 발원한 것인지, 어떤 과정과 경로를 통해 지금에 이르렀는지, 앞으로 그의 행동 방식과 관심사까지 두루 살펴 볼 수 있다.

  이것은 한 개인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우석훈의 글을 통해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현주소이다. 대단한 문학적 감수성을 숨기고 지극히 냉철한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일찍이 관료 사회에서 공무원들과 국제 기구에서 일했던 경험들이 우석훈으로 하여금 현실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사회와 개인을 보다 미시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사유의 틀을 제공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우석훈의 글들은 탄탄하고 매력적이지는 않지만 솔직하며 합리적이다. 그래서 계속 읽힌다.

  사람들의 술버릇 중에 같은 말을 반복하는 사람이 있다. 중언부언 - 곁에서 듣는 사람에게 이것만큼 괴로운 것도 없다. 우석훈의 이야기 중에는 이렇게 중복되는 부분도 있다. 세 권의 책을 짧은 기간 동안 읽어서 그런 느낌 일 수도 있지만 이것이 술주정으로 들리지는 않는다. 생태와 환경 그리고 평화로 요약될 수 있는 거대 담론들은 실제 현실 속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나야 하는지 구체성을 담보하지 못해 조금 답답한 면이 있기는 하다. 책의 목적과 기능이 개별적인 사례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할 목적과 방향에 대한 희망이나 합의가 부재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21세기가 훌쩍 넘어섰다. 20세기에 넘어온 사람과 넘어오지 못한 사람을 분류하는 ‘인물열전’ 부분은 경제학자 우석훈이 아니라 인문학자 우석훈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박노자와 진중권에 대한 평가 강금실과 김지하에 대한 비판은 우리 시대를 가장 선명한 눈으로 바라보는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석훈은 목하 열애중이다. 대한민국을 사랑한다고 하면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거부할 것이고 동북아 중심국가론을 주장하는 손학규와 김지하와 한통속으로 몰아갈 염려가 있겠지만 녹색환경과 생태 경제학이라 불릴 만한 일관된 관심과 주장은 평화 경제학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된다. 이름이 거창하고 그럴듯해서가 아니라 우석훈이 주장하는 미래는 분명 희망의 메시지가 전해지고 환한 미소가 떠오른다.

  우리는 최소한 그렇게 선명하고 밝은 미래를 그리며 이 사회를 만들어가고 경제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위정자들은 최소한 그만한 청사진과 철학적 신념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둡고 암울하다. GNP 2만불 혹은 3만불이 대한민국의 지향점이어야 할까? 숫자놀음에 불과한 단순한 경제지표를 볼모로 우리 모두는 부나비처럼 제 날개가 타오르는지도 모르고 달려드는 것은 아닐까? 1% 혹은 10%를 위한 정책을 하위 50%가 지지하고 열광하는 이유를 우석훈은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빌헬름 라이히는 <파시즘의 대중심리>라는 탁월한 저서에서 이 비합리적인 정치 성향에 대해 ‘성정치학’이라는 분석틀로 이론화했다. 다양한 분석들이 적용되고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조중동의 기사를 자신의 신념으로 믿고 있는 대다수 비규정규직과 세입자들이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미래의 희망과 비전이 분명하지 않고 사회적 타협이나 지향이 일치하지 않는 사회는 불안하기만 하다. 우리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명랑’이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있을까? 우석훈은 스스로를 ‘명랑 좌파, C급 경제학자’라고 명명한다. 우울하고 비관적인 전망이 미래를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비합리적인 낙관과 막연한 믿음, 모든 게 잘 될 거라는 환상은 현실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절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모두 함께 움직일 수 있는 구심점, 공동의 이익을 위한 접속 코드가 필요하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찾고 접속하고 현실을 재편하려는 작은 노력과 실천들이 필요하다. 매우 명랑하고 즐겁게 말이다. 세상은 즐거움으로 가득한 곳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내가 즐실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실천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우석훈의 외침은 계속될 것이다. 그것은 메아리 없는 아우성이 아니라 멀리서라도 작고 힘찬, 수많은 울림들을 하나로 모으는 확성기가 될 것이라고 믿고 싶다.


080725-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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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들의 대한민국 - 한국 사회, 속도.성장.개발의 딜레마에 빠지다
우석훈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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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난 침대에서 일어나 눈을 떠 보면
네모난 창문으로 보이는 똑같은 풍경
네모난 문을 열고 네모난 테이블에 앉아
네모난 조간신문 본 뒤
네모난 책가방에 네모난 책들을 넣고
네모난 버스를 타고 네모난 건물을 지나
네모난 학교에 들어서면 또 네모난 교실
네모난 칠판과 책상들
네모난 오디오 네모난 컴퓨터 TV
네모난 달력에 그려진 똑같은 하루를
의식도 못한채로 그냥 숨만 쉬고 있는걸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네모난 것들뿐인데
우린 언제나 듣지 잘난 어른의 멋진 이말
세상은 둥글게 살아야 해
지구본을 보면 우리 사는 지군 둥근데
부속품들은 왜 다 온통 네모난건지 몰라
어쩌면 그건 네모의 꿈일지도 몰라
네모난 아버지의 지갑엔 네모난 지폐
네모난 팜플렛에 그려진 네모난 학원
네모난 마루에 걸려있는 네모난 액자와
네모난 명함의 이름들
네모난 speaker 위에 놓인 네모난 tape
네모난 책장에 꽂혀 있는 네모난 사전
네모난 서랍속에 쌓여 있는 네모난 편지
이젠 네모같은 추억들
네모난 태극기 하늘높이 펄럭이고
네모난 잡지에 그려진 이달의 운수는
희망이 없는 나에게 그나마 기쁨인가봐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네모난 것들뿐인데
우린 언제나 듣지 잘난 어른의 멋진 이말
세상은 둥글게 살아야 해
지구본을 보면 우리 사는 지군 둥근데
부속품들은 왜 다 온통 네모난건지 몰라
어쩌면 그건 네모의 꿈일지도 몰라



  갑자기 화이트의 ‘네모난 꿈’을 듣고 싶었다. 가사를 천천히 들여다보며 노래를 들었다. 네모는 궁글게 사는 꿈을 꾸었을까? 아니면 둥근 지구가 네모난 꿈을 꾸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살고 현실은 여전히 모호한 환상과 꿈이라는 환각제를 통해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한다. 마약처럼 몽롱하게 먼 미래를 부정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은 뒤로 밀린다. 눈앞의 이익과 단기간의 손익 계산에 머릿속은 컴퓨터처럼 돌아간다. 잘 산다는 것, 행복한 삶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크게 신경 쓰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주변을 돌아보면 모두가 열심히 사는 것 같은 데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적다. 행복해지는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않고 그것이 왜 중요한지 비웃기까지 한다.

  이렇게 21세기의 대한민국은 몇 가지 형태의 삶의 형태로 수렴되었다. 아이를 키우는 방식과 학교를 다니는 목적, 대학을 선택하는 기준, 배우자를 결정하는 관점, 직장을 선택하는 방법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 같다. 최선은 중요하지 않고 이유도 물을 필요가 없다. 자명한 논리처럼 너무 분명해서 그것들에 대한 질문조차 우습게 들린다. 우리는 과연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우석훈은 네모난 세상보다 무서운 <직선들의 대한민국>에 경고장을 날리고 있다. 생태 경제학이라 명명될 만한 기준과 관점을 유지하면서 우석훈이 진단하는 대한민국은 끔찍하기만 하다. 과연 어떤 기준으로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이 책은 21세기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사회에 던지는 경고장이자 진단서에 해당된다.

  속도가 승패를 좌우하는 시대를 살면서 ‘느림의 미학’을 말하고, 전 국토의 80%가 도시화되었으면서 친환경적인 삶을 외치고 있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수돗물로 청계천을 복원했다고 대국민 사기극을 쳐도 사람들은 박수를 친다. 이거라도 어디냐!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만이 대안을 찾고 미래의 길을 모색하는 토대가 된다는 사실은 너무 자명한 일이다.

  비판 정신이 긍정의 힘이라는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거대한 어항이라고 표현된 청계천을 필두로 토목공화국의 몰락에 대한 경제학자의 우려는 이상적인 관점이나 좌파의 논리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자화상이다. 그것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과 고민이 진지하다면 언제든 우리는 귀기울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경제학자 우석훈은 생태와 환경을 화두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 이야기는 단순하게 경제 논리와 숫자 놀음이 아니다. 우리들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며 미래 사회에 대한 우려와 냉정한 조언이다. 저자가 말하듯이 최소한 ‘경제 이성’만 가지고 있어도 우리 사회가 선택한 것들이 이렇게 엉망이 되어 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대중은 선택 능력이 없다는 것인가? 판단 능력이 마비되어버린 감각의 제국 대한민국의 미래는 과연 부정적이기만 한 것인가?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아마도 참 다양한 반응과 대안과 비판과 미래를 그려 낼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좌파든 우파든 무관하게 최소한 이성적인 논의와 방안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지극히 단순한 생각에서 출발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지만 과연 현실 정치와 경제를 보는 관점에서 통용될 것인가의 문제는 씁쓸함을 넘어 분노를 만든다.

  우리가 가는 길이 비록 멀고 험해도 가야할 길이고 지속 가능한 삶을 유지하는 것이라면 행복하겠다. 문제는 그 길조차 모호하며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이미 갈림길을 지나쳐버린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생태적 사회를 위한 변화는 가능한가? 세상을 바꾸는 힘은 과연 아름다움에서 나온다고 믿어도 될까?

  이 책에서 우석훈 거시적 관점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경제학자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한다. 때로는 좌파는 우파든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고 그들의 한계와 역량을 난도질한다. 간만에 속이 좀 풀리고 시원한 느낌이다. ‘래디컬radical'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는 강유원을 만났을 때처럼 큭큭거리며 읽었지만 단순히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해서 기뻐할 수 있는 문제들은 분명 아니다. 현실적인 대안이나 미래에 대한 아젠다가 제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찌보면 읽고나서 더 가슴만 답답해졌다.

  그래도 지금 이대로는 아니다. 아닌건 아닌거다.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는 책이다. 책은 어쩌면 필요없는 사람들에게 자꾸 읽히고 정작 읽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외면 당하는 물건인지도 모르겠다. 고민의 끝자락에는 ‘실천’이 남는데 쉽지 않다. 아니 게으르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동차 키를 챙기고 기름값에는 아예 눈감아 버리고 정몽준도 아니면서 버스비를 모르고 사는 생활 패턴에는 문제가 있다. 바쁘다는 핑계만으로 용서되지 않는 부분들이 누구에게나 있겠지만 책 한 권 읽고 고개만 끄덕인다고 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미래는 더욱 참담하다. 더구나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CEO 이명박을 보라. 걱정되지 않는다면, 그럭저럭 잘 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노무현이 그리웁다면 당신은 이 책의 필독자이다!!!


080723-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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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2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의 모습은 도대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한없는 궁금증에 목마를 때가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대단히 ‘철학적’이다. 인간의 본성과 역사에 대한 고찰 없이는 말할 수 없으며 간단하게 한 마디로 정리할 수도 없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로 요약되는 그 실체 없는 삶에 복무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그 한 복판에 서 있는 것이 ‘경제’이다. 일본의 번역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용어에 대한 개념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이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경제는 생활이며 생존의 조건이며 때로는 생의 궁긍적인 목적이다. 일상에서 사용하는 경제라는 용어는 맥락에 따라 전혀 방식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경제를 말하는 방식이 경제학자나 공무원이 다르고 시장 상인이 다르며 월급쟁이가 다르다.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외치는 대통령에게는 또 다른 것일 수도 있다. 누가 죽였는지 모르지만, 언제부터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지 모르지만 초지일관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통령에게 경제를 살린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궁금하다. 누구를 위한 경제이며 어떤 방식으로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그 주장과 논리를 듣고 있노라면 경제와 더불어 역사와 정치가 함께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경제를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홍기빈은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를 통해 고대 그리스 철학자에게 경제를 묻고 있다. 경제는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에게 답을 줄 수 있을까? 홍기빈이 희랍의 현자에게 경제를 묻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볼 만하다.

  이 책은 경제학에 관한 역사적 고찰에 바쳐지고 있다. 학문적 관점에서 이론적으로 풀어내는 경제학은 실생활에서 적용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거시적 관점이든 미시적 관점이든 경제학은 실제 운용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삶을 지배할 수 있을 만큼 현대사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 또한 독립적인 분과학문으로 기능할 수도 없다. 정치와 사회 현상을 떠나서 경제를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논리이다.

  이 책은 현대 경제학의 정의에 대해 알기 쉽고 설명하고 있으며 그 문제점들에 대해서도 고려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경제는 무엇이며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스스로 질문을 만들어낸다. 물론 독자의 몫이지만 해답이 쉽지만은 않다. 경제라는 말을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는 부분도 유용하지만 시장을 발명한 그리스인들의 생활과 ‘행복’에 대해 그리고 민주주의의 발생과 폴리스의 정치적 상황들을 통해 경제 문제를 풀어내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인간의 경제 부분은 이 책에서 핵심적인 부분에 해당한다. 이미 다른 책을 통해 화폐의 기능과 자본주의의 함수 관계에 대해 이해한 독자라면 흥미있게 접근할 수 있다.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조건으로서 화폐와 인간의 욕망에 대해 고민해야 하고 당연히 유한한 재화 속에서 무한한 욕망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활동을 프락시스praxis와 포이에시스poiesis로 구별한다. 후자는 ‘무언가를 생산하는 행위’이고 전자는 ‘행위 그 자체를 목표로 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 P. 111

  인간의 욕망은 프락시스든 포이에시스든 하나로 귀결될 수 없다. 두 가지 욕망의 덩어리로 엉키고 뒤섞여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하나의 욕망이 채워졌다고 해서 갈증이 해소되지도 않고 완성되지도 않는다. 어차피 채워질 수 있다면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지도 않았을테지만 말이다.

  어쨌든 최소한의 노력으로 희소한 가치를 얻으려는 유한한 가치에 대한 무한한 욕망이 인간의 경제 행위의 기본 조건이 된다는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조건 지워지고 많은 사람들의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물론 불가능하다.

  그래서 저자는 중농주의자들과 애덤 스미스, 독일 역사학파, 마르크스, 베블린, 폴라니, 케인스의 이론들을 소개하며 과연 우리에게 지금 현재의 관점에서 필요한 관점과 행동에 대해 간접적으로 고민을 요구한다.

경제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각이 존재하고 때로는 정책 입안자와 실물경제를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게 된다.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을 간과하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과연 어떤 경제가 필요하며 진짜 경제를 살리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지 다같이 고민만 한다고 해결될 일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대한민국의 경제를 살릴 수 없고 그 시대에 요구되던 상황과 정신을 오늘에 되살릴 수도 없다. 다만 과거에게 길을 묻고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방법과 가치는 이미 오래전부터 모두가 알고 있지 않았을까?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목적이 다르게 때문이 아니었을까? 서로의 이익이 다르고 지향점이 다르기 때문이었을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책은 과거의 오래 된 경제에 대한 기억을 들추고 있다. 당대의 삶과 생의 목적을 돌아보는 엉뚱한 작업을 통해 혹은 화폐와 자본주의의 기원에 대해 살펴보는 일이 지금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진짜 경제가 무엇인지 고민해 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080721-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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