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책벌레로 부르기엔 한 마디로 규정되지 않는 다치바나 다카시. 읽고 쓰는 사람이라는 모호한 표현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불러야겠다. 그렇다고 다치바나 다카시를 정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인지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내가 그를 인상깊게 바라본 것은 고양이 빌딩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 우연히 개인 전용 도서관이자 집필 공간인 고양이 빌딩을 보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도대체 얼마나 읽고 써야 하는 사람인지 궁금했다. 이후에도 간혹 그의 책을 읽었지만 그가 일하는 방식이나 그가 쓴 글들만큼 그의 생각이 궁금하기도 했다. 책에 관한. 어찌 되었든지 이 책을 이제야 읽게 되었다. 책에 관한 책과 독서에 관한 책들은 앞으로도 계속 읽어나가겠지만 정답은 없어 보인다. 이 책도 결국 ‘다치바나식 독서론, 독서술, 서재론’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일반적인 방법은 없다는 것이 나의 잠정적인 결론이다. 나름의 목적에 따라 방법이 결정되고 실천적인 힘에 의해 변화를 모색하는 것만이 정답이다. 이론적인 독서 모형은 공교육 기관에서도 적용시키기 매우 힘들다. 읽어 온 책의 이력이 다르고 배경지식이 제각각이며 모형의 적합성과 방법, 유형에 따라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누구에게나 두루 적용될 수 있는 방법들이 동원되긴 하지만 효과는 미지수이다. 특히 독서의 목적과 결과는 천양지차로 나타나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설 수도 없다. 다치바나는 책읽기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지적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누구나 그렇듯이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나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체크하고 공감하고 이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한다. 나도 물론 그랬다. 충족되지 않는 욕심과 목적 없는 호기심은 넘쳐나지만 시간은 늘 부족하다. 지나치면 폐인모드가 되겠고 현실 생활이 불가능하다. 직업으로 삼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어버린 것 같으니 적절한 선에서 타협의 손길을 내민다. 불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다시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에 들어간다. 강철 같은 인문학적 토대 위에 자연과학에 대한 호기심으로 끊임없이 책을 읽고 자료를 조사하고 전문가와 인터뷰하고 그것을 글로 쓴다. 가장 이상적인 지적 활동가라고 볼 수 있다. 편협한 분야의 깊은 연구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학원에 다니면서 느끼는 것은 분과학문을 뛰어넘지 못하는 교수들의 지루함이다. 역동적으로 자가 발전하는 발전소처럼 다치바나는 스스로 지식을 가공하고 그것을 재생산하며 종횡무진 책의 세계를 주유한다. 그것이 직업이 되고 일이 되어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행복하고 기쁘게 즐길 수 있으니 얼마나 즐거운 인생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진다.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을 즐길 줄 알고 스스로 행복해지는 방법을 갖고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다치바다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이 책은 다치바나의 독서론을 소개하고 있으며 그의 서재와 작업실을 보여준다.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는 내용이 책의 핵심이 되겠지만 그 책의 제목이나 내용보다 과정들이 흥미롭고 경탄스럽다. 누구에게나 삶의 이력이 있듯이 읽어 온 책의 이력이 있을 것이다. 항상 실천과 변화에 방점을 찍고 있지만 사람을 표현하는 좋은 이력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그의 서재를 들여다보면 된다. 서재가 없다면? 책에 미친 사람들의 농담이라도 좋다. 사방 책으로 둘러 쌓인 구석방에 처박혀 해가 뜨는 것도 달이 지는 것도 모르고 책장을 넘기다 기지개를 켜고 숲속을 산책하다가 또 다시 책장을 넘기면서 한 3년만 지낼 수 있다면 어떨까? 주변 사람들은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확인하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오해가 있었다. 다치바나 소설을 읽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고 속독을 권하는 이유가 알고 싶었다. 단편적인 이야기나 한 두 번의 인상으로 타인을 판단하거나 대상을 규정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문학을 통해 정신 세계를 형성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래도 사물을 보는 눈이 사려 깊지 못합니다. 사물이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식적인 경향을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문학이라는 세계는 처음 겉으로 나타난 것을 한 번 뒤집어 보면 다르게 보이고, 다시 그것을 뒤집어 보면 또 다르게 보이는 그런 세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표면만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가는 것이 문학인 것입니다. - P. 132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을 만큼 고전을 두루 섭렵했고 문학과 철학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보는 통찰력을 기른 그가 소설 무용론을 주장한 것이 아니다.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일과 관련된 책 읽기의 방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산처럼 쌓인 자료와 관련 서적을 뒤적이며 필요한 부분을 속독하고 정리해야 하는 경우 당연한 독서법이다. 바로 이런 목적이라면 ‘실전’을 위해 다치바나의 충고를 눈여겨 볼 만하다. ‘실전에 필요한 14가지 독서법’ 1. 책을 사는 데 돈을 아끼지 말라 2. 하나의 테마에 대해 책 한 권으로 다 알려고 하지 말고, 반드시 비슷한 관련서를 몇 권이든 찾아 읽어라. 3. 책 선택에 대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4. 자신의 수준에 맞지 않는 책은 무리해서 읽지 말라. 5. 읽다가 중단하기로 결심한 책이라도 일단 마지막 쪽까지 한 장 한 장 넘겨 보라. 6. 속독법을 몸에 읽혀라 7. 책을 읽는 도중에 메모하지 말라. 8. 남의 의견이나 북 가이드 같은 것에 현혹되지 말라. 9. 주석을 빠뜨리지 말고 읽어라. 10. 책을 읽을 때는 끊임없이 의심하라. 11. ‘아니, 어떻게?’라고 생각되는 부분(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을 발견하게 되면 저자가 어떻게 그런 정보를 얻었는지, 또 저자의 판단 근거는 어디에 있는지 숙고해 보라. 12. 왠지 의심이 들면 언제나 원본 자료 혹은 사실로 확인될 때까지 의심을 풀지 말라. 13. 번역서는 오역이나 나쁜 번역이 생각 이상으로 많다. 14. 대학에서 얻은 지식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 P. 83 다치바나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게 아니다. 독서의 목적에 따라 책은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상식 수준의 발언에 불과하다. 오독은 자유지만 오해를 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자각! 나는 왜 무엇을 읽고 쓰는가에 대한 반성적 성찰! 책의 내용과 방법은 독서의 목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목적 없는 산책은 그것대로 방법과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과연 지속적으로 그것이 가능한가? 아무 목적도 없다는 것이 하나의 목적은 아닐까? 이 책은 독특하고 재미있는 다치바나식 독서법이지만 나는 질문만 늘어났다. 어디를 향해 어디쯤 가고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의 시간을 가져야겠다. 물론 계속 읽어나가면서. 081014-117
오늘도 사람들은 웹을 통해 또 하나의 세상을 주유한다. 인터넷은 이제 선택의 문제를 넘어 섰다. 군대 생활을 했던 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내게 세상은 둘로 나뉘어졌다. 군대 생활 이전의 시대는 아날로그 시대였고 그 이후의 세계는 디지털 시대였다. 한 몸으로 두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나는 전역과 동시에 웹을 기반으로 한 SI업체에 처음 발을 디뎠다. 네스케이프 2.0을 통해 인터넷 세상에 처음 접속했고 사내 홈페이지에 들어가 출근부를 찍지 못해 애를 먹으면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불과 10여 년 전 일이지만 돌도끼를 쓰던 시대처럼 아득하다. 너무 빠른 속도로 진화하는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 눈동자를 움직임을 빠르게 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물론 속도만이 승부를 좌우하는 건 아니지만 격세지감을 말을 쓸 만한 나이가 되어 버린 것인지 두 세기를 살아가면서 시대의 격변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볼 때가 있다. 이제 컴퓨터는 인터넷을 뜻하는 말로 바뀌었고 IT강국 대한민국에서 웹기반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진화 속도를 추월해서 이제 스스로 진화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변화의 속도에 적응하기 위한 개인의 노력을 촉구하는 일이 시대의 사명은 아니지만 미래 사회를 읽어내기 위한 필수 조건이 된 것은 틀림없다.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바라보고 싶다면 네트워크 세상에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세상은 링크되어 있으며 어느 누구도 독립적인 존재로 기능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진부한 명제가 이제 인간은 웹적 존재 혹은 네트워크적 존재라는 말로 대치되어야 마땅한 시대에 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웹은 진화하고 있다는 말은 당분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메다 모치오의 <웹 진화론>은 우리 시대를 읽어내기 위한 필수적인 도구 역할을 해 줄만하다. 저자의 관점은 현 시대를 예리하고 적확하게 분석하고 있다. 시대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는 이데올로기와 계급적 위치에 따라 상이할 수 있으나 그것은 정확한 분석을 전제로 가능한 일일 것이다. 어떤 책도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일 수 없다는 평소 개인적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이 책은 나름대로 현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이 곳곳에 배어있다. 객관적인 데이터와 사실의 나열이 지루하지 않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실에 대해 과장된 해석이나 지나친 의미 부여가 때로 독자들을 피곤하게 하는 데 이 책은 그런 면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일본에서 이미 40만부 이상 팔려나간 책이라는 사실을 이를 입증해 줄 수는 없지만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도 그다지 동떨어져있지 않기 때문에 충분히 설득력 있고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기 위한 좋은 지침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한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변화의 흐름을 읽어내는 일은 단순히 관련 분야의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분야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든지 그것을 활용하고 동참하고 이용할 수 있는 능력과 안목을 길러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웹은 이제 사치품이 아니라 생필품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저자는 서장에서 혼돈스럽기 때문에 더욱 흥미로운 시대라고 말하고 있다. 가치 판단이 개입된 명제이지만 다양성이라는 면에서 우리는 그것을 거부할 수는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구글에 대한 저자의 경외감은 우리에겐 조금 낯설다. 네이버라는 막강한 포털이 지배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과는 조금 먼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변화의 위험은 언제든 우리에게도 닥쳐올 지도 모른다. 그것이 위험이 될 것인지 아니면 기회가 될 것인지는 물론 우리들의 자세와 대응 방식에 달려 있다. 이 책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퍼블릭, 오픈, 프리’라는 모토이다. 인터넷을 한마디로 정의하고 미래 사회의 동력이 어디에 기반할 것인지를 읽어낸 키워드이다. 이것이 엄청난 이익을 초래하공 있는 믿기 어려운 현실을 우리는 목도했다. 구글은 그것을 실현했고 엄청난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웹 2.0의 본질은 ‘지식과 정보’의 게임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한민국의 포털들이 가야할 길이 어디인지 변화의 물결은 이미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재미있고 정확하게 읽어내고 있는 이 지침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지식과 정보가 게임처럼 즐겁게 유통되고 그것을 통해 부를 창출하고 개인과 사회의 변화를 가져오게 될 미래 사회를 나는 혹은 우리는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하는 대목이다. 가장 인상 깊은 저자의 표현은 ‘또 하나의 지구’라는 말이다. 인터넷을 또 하나의 지구라고 표현할 만큼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부정할 수 없는 말이다. 웹 진화의 한 복판에서 낡은 경제 이론과 보수적 사유가 가져오게 될 재앙을 생각해 보았다. ‘거친 산길’을 걷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겠지만 그 선택이 모여 사회의 흐름이 된다는 사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인터넷 공간의 지적 풍요, 정보 공유와 조직의 선택은 웹 진화와 새로운 삶의 방식에 결정적인 역할을 미칠 것이다. 웹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것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우리 삶의 필수 요소가 되었다. 대변혁의 시대에 우리가 가야할 길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흐름과 변화를 먼저 정확하고 날카롭게 읽어낼 수 있는 혜안이 필요하다. 이 책은 그러한 관점을 갖는데 필요한 아주 중요한 도구가 될 것이다. 별빛처럼 선명하게 길을 제시해 주던 시대는 끝났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 사이로 난 좁은 길들을 찾아내고 그 별들의 움직임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싶다면 일단 고개를 들고 별을 바라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081012-116
작가의 죽음은 한 시대의 종말을 예고한다. 2007년에 오규원이 세상을 떠난 것처럼 2008년에는 박경리와 이청준이 시대를 마감했다. 사람은 흔적을 남기며 오래 기억되기를 바라지만 무정한 시간은 흔적조차 남겨 놓지 않는다. 수많은 시인들이 명멸하지만 그를 기억하는 독자를 갖고 있는 시인은 많지 않다. 김종삼은 나에게 <북치는 소년>으로 다가온 특별한 시인이었다. 오랜만에 민음사에서 펴낸 오늘의 시인총서 15 김종삼시선 <북치는 소년>을 꺼내보았다. 황동규는 서문 ‘잔상의 미학’이라는 글을 이렇게 시작한다. “여백이 완벽보다 더 꽉 차 보이는 때가 있다. 잘 짜여진 일상 가운데서 일부를 떼어내어 거기 달려 있는 창에 창호지를 발라 안이 안 보이게 한 후 그 속에 들어가지 않는 쾌감이 있는 것이다. 그 쾌감에는 반성을 거부하는 어떤 것이 들어 있다.” 1979년에 초판이 나왔지만 10년 후에 내가 산 시집은 1989년에 찍은 7판이다. 그러고도 20년이 흘렀으니 종이는 누렇게 변색되어 간다. 조심스레 몇 페이지를 펼쳐 보다가 다시 <김종삼 전집>을 순서대로 읽어나갔다. 배 人家들을 끼고 흐르지 않는 오밤중의 개울은 碇泊中인 납작한 배 우리의 현대시사現代詩史를 조망할 때 화려하지는 않지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시인이 김종삼(1921~1984)이다. 은근하고 조용한 매력을 지닌 시인 김종삼을 다시 읽는다. 그의 시는 긴장과 압축으로 표현될 수 있으며 읽고 나면 꼬리가 긴 여운을 남긴다. 전후 한국 현대시에서 그가 남긴 족적은 선명하다. 정갈한 한국어의 적절한 배치만으로도 그의 시는 농가의 초가집처럼 깨끗하고 소박한 느낌을 준다. 묵화墨畵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시詩가 완성된 하나의 구조물이라면 김종삼이 지은 집은 여백의 미를 가장 잘 살린 한옥과 같은 느낌이다. 군더더기 없이, 언어가 주는 울림과 이미지만 남겨진 단형 시들은 은근하며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 여운과 감동은 시를 읽고 난 후에도 머릿속에서 공명되고 잔잔한 파문이 되어 가슴 깊은 곳까지 멀리 퍼진다. 북치는 소년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김종삼 시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그의 시에서는 압축과 정제된 언어의 울림 그리고 언어 밖의 여백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언제 읽어도 깔끔하고 어떻게 바라보아도 편안하다. 한 편의 시가 아니라 그림처럼 하나의 장면을 선명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말의 여백과 울림을 기막하게 배치하는 솜씨는 그의 시를 특별하게 한다. 그의 시는 절제의 미학이라 할 만하다. 올페 올페는 죽을 때 나의 직업은 시라고 하였다 後世 사람들이 만든 얘기다 나는 죽어서도 나의 직업은 시가 못 된다 宇宙服처러머 月谷에 둥둥 떠 있다 귀한 時刻 未定. 직장다운 직장 한 번 가져보지 않았는데도 김종삼은 6.25 전쟁 직후부터 1984년 타계할 때까지 30여 년간 200여 편에 불과한 작품만을 남겼다. 이러한 과작寡作은 그의 시작詩作 태도를 말해준다. 절제된 언어의 형식과 간신히 탄생한 한 편의 시들은 깊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오래 생각하고 정성들여 시 한 편을 완성하는 과정이 보이는 듯하다. 한 편 한 편을 꾹꾹 눌러 쓴 그의 육필 원고를 보면 그 과정을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장편掌篇 ․ 2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川邊 一○錢 均一床 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一○錢짜리 두 개를 보였다. 시의 본령이 언어에 충실하게 복무하는 일이라는 측면에서 김종삼은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1930년대와 1960년대에 벌어졌던 순수 참여 논쟁의 관점으로 볼 때 김종삼의 시詩는 가장 순도 높은 순수시에 해당한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의 시가 가진 특별함에 값할 만한 시인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그만큼 그는 시詩의 본질에 충실했던 시인이다. 민간인民間人 1947년 봄 深夜 黃海道 海州의 바다 以南과 以北의 境界線 용당浦 사공은 조심 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嬰兒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水深을 모른다. 스무살 무렵 동생이 죽고 나이 들어서도 형을 먼저 보낸 불행한 가족관계는 그에게 술을 마시게 했다. ‘아우는 스물두 살 때 결핵으로 죽었다 / 나는 그 때부터 술꾼이 되었다(‘掌篇’중에서)’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은 트레이드 마크처럼 손에서 놓지 않은 파이프 담배와 술잔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평생 월세방을 전전했을 만큼 가난했지만 그의 시에서 생활의 흔적은 만날 수가 없다. 오히려 서구 지향적이고 클래식과 음악에 함몰된 모습들이 곳곳에 배어나온다. 그것은 김종삼의 시에서 생경하고 어색함으로 남아 다른 시들보다 독자들의 공감을 얻는데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제작製作 그렇다 非詩일지라도 나의 職場은 詩이다. 나는 진눈깨비 날리는 질짝한 周邊이고 가동中인 夜間鍛造工廠 깊어가리마치 깊어가는 欠谷 고종석의 말대로 ‘무적자無籍者의 댄디즘’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김종삼은 영혼의 유목민이었으며 보헤미안이었다. 현실 밖의 어린왕자처럼 맑고 순수한 서정의 시세계를 보여준 시인 김종삼은 수많은 독자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시는 여전히 살아 숨쉬는 한국어의 현재형이다. 깊은 가을에 그의 절창 몇 편을 읽어볼 만하다. 오래 곁에 두고 가끔씩 꺼내 읽고 싶은 몇 안되는 전집 하나가 늘었다. 081010-115
한 작가의 작품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독자가 있는 작가는 얼마나 행복한가. 그런 면에서 성석제는 몇 안 되는 행복한 작가 중의 한 사람일 것이다. 독자들의 사랑과 생계에 대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할까? 모든 작가들이 보험을 가입하듯 대학에 자리를 마련하는 동안 최종심에 오른 교수 자리를 거절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한 용기이다. 개인사적인 이야기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생활인으로서 고충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작품 세계에 대한 이해와 분석이 작품 자체만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1930년대 신비평주의자들에 의해 주창되었으나 작품을 둘러싼 사회, 문화적 배경이나 현실의 문제를 제거하고 작품을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성석제의 소설도 예외일 수 없다.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들은 해설을 맡은 이경재의 말대로 ‘방외인’들이다. 평균보다 조금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들 말이다. 그것이 설정이든 진솔한 모습이든 토요일 저녁 가끔 보게되는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의 진행자들과 유사하다.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다가서지만 현실의 벽은 높기만 하고 반대편 끝에 서 있는 사람들과의 거리감을 좁힐 수 없는 사람들 말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성석제의 소설에서 자주 만나게 된다. 특별한 사람들의 황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보여주는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라 코미디여서 비극에 가까운 이야기가 성석제 소설의 근간을 이룬다. 그의 소설은 이야기라고 하는 소설의 본질에 가장 근접해 있는 듯하다. 독자들은 허리띠를 풀고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졸기 직전의 나른한 상태에서 그의 소설을 읽을 수 있다. 예민한 감각과 긴장은 필요없다. 좌우로 입술을 당겨줄 근육과 아무생각 없이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만 하면 된다. 이보다 더 편안하고 즐거운 소설이 있을까 싶다. 성석제는 천상 이야기꾼이다. 소설이라는 형식도 기본적인 틀도 때로는 그에게 거추장스러워 보인다. 마지막 단편 ‘깡통’의 경우 화자가 직접 소설 속에 개입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소설이라는 형식적 장르를 떠나 ‘이야기’라고 하는 가장 원초적인 작업에 가까워지는 그의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목으로 사용된 <지금 행복해>는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의 제목이면서 작품 전체를 드러내는 은유에 해당한다. 과연 사람들에게 행복의 의미는 무엇인지 되묻고 있다. 사람마다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도 방법도 제각각이다. 다양한 인물을 통해 그 접근 방식을 다각도로 보여주는 정교한 구성은 아니지만 평균에서 벗어난 황만근과 같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이야기는 우리들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그것은 반성적 성찰이 아니라 유쾌한 공감이며 자각이다. 물론 그 웃음에서 숨어있는 예리한 시선들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단순한 재미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웃음에는 진한 페이소스가 섞여있다. 성석제 특유의 문체와 발랄한 감성이 어우러져 재미와 유쾌함을 선사하는 이 책은 여행 이야기에 특별히 눈이 간다. ‘여행’, ‘설악풍경’, ‘피서지에서 생긴 일’이 그것이다. 이 세 작품은 누구나 한번쯤 꿈꾸었을 법한 이야기로 공감을 얻고 있으며 구수한 사투리와 지역적 특성을 살려 구체적이고 생생한 표현들이 매혹적이다. 예의 주도면밀하고 걸죽한 입담은 그의 소설과 여행 이야기들을 하나로 엮어내는 접착제 구실을 한다. 씁쓸하고 개운치 않은 결말이 예견되며 비교를 통한 혹은 환상과 기대를 통한 인물들의 심리가 빤히 들여다보이면서도 안타깝고 애잔하다. 철저하게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을 유지하고 있는 그의 소설들은 인물들을 자유자재로 조정하고 묘사하며 정밀한 심리묘사를 가능하게 한다. 구체적이고 섬세한 전달이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단순한 시점의 효과가 아니라 능란하고 편안하게 이끌어가는 구성에 기반하고 있으며 특히 신선하고 적절한 비유는 성석제 특유의 소설적 재미를 더해준다. 우울하고 내면화된 도시적 감수성이 아니라 여전히 지방색이 물씬 묻어나는 인물들에게 독자는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친근감은 동일한 계급의식에서 출발하는 것만은 아닌 것이다. 공동체의 일원들이 보편적으로 얻게 되는 편안함과 익숙함은 성석제의 소설에 나타난 인물들의 특징이다. 낚시 이야기를 풀어 낸 ‘낚다 섞다 낚이다 엮이다’와 미래 사회를 예견하듯 톱니바퀴처럼 정교한 이야기의 구성을 보여주는 ‘톡’은 또 다른 시도와 즐거움이 있다. 하나의 규격화된 틀이 아니라 자유롭고 편안한 형식들을 내용에 따라 재단하는 솜씨가 즐겁고 그 발걸음은 경쾌하기만 하다. 그러니 누가 성석제의 소설에 딴지를 걸 수 있겠는가? 아주 오랫동안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내고 그것을 지켜가며 조금씩 변화를 시도하는 작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귀 기울이는 독자. 나는 그 독자중의 한 사람이다. 그간 읽어왔던 <홀림>,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인간의 힘>과 더불어 이 책도 책장 한켠에 꽂혀 성석제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의 편안하고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와 함께 지금 행복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잠깐 동안의 여유를 찾고 싶다면 <지금 행복해>를 읽어보자. 081008-114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니?”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번 쯤 하게 된다는 말이다. 누구나 한 번쯤 듣게 된다는 말이다. 2008년을 뜨겁게 달군 화두는 단연코 ‘김용철’과 ‘촛불집회’가 될 것이다. 벌써 아득하게 잊혀진 과거처럼 생각된다면 당신은 무척 바쁘게 살거나 세상을 등지고 사는 사람이다. 먹고사는 문제도 바쁜데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왜 바쁜지, 계속 바쁘면 잘 먹고 잘 살게 되는지 묻고 싶다. 이명박을, 한나라당을 찍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가지만 악화는 꾸준히 양화를 구축해 가고 있다. 인간 관계에서 가장 심한 절망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실연이 아니라 배신이다. 배신背信은 믿음을 등지다, 믿음에 등을 돌린다는 뜻이다. 사람이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의미일 수 있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서로에 대한 ‘기대’와는 다른 의미로 파악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여기서 말하는 배신이란 객관적 사실에 대한 확고한 약속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배신당한 수많은 사람들만 찾을 수 있다. 배신한 사람은 찾을 수가 없다. 왜 그럴까? 답은 간단하다. 정혜신의 말대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행동은 동기부터 이해하고 타인의 행동은 현상을 중심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배신에는 수동태만 있고 능동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적인 관계에서부터 공적인 관계에 이르기까지 두루 적용되는 공식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기적인 인간은 누구나 내 눈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동어 반복의 결론 때문이다. 타인의 입장에 대한 고려나 내 행동에 대해서는 결코 돌아보지 않는다. 내가 아픈데 다른 사람을 돌볼 겨를이 있겠는가? 2004년부터 교양, 상상력, 거짓말, 자존심에 이어 올해는 배신이라는 주제로 한겨레신문사에서 특강이 이루어졌다. 시의 적절한 주제를 중심으로 인터뷰 특강이 이루어진다. 3월에 이루어지는 이 특강에 한 번도 참석하지 못하고 매년 가을 책으로 만난다. 아쉽지만 놓칠 수는 없는 책이다. 5년째 꼬박꼬박 사서 읽는 이유는 내겐 소화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답답해서 뉴스를 끊은 지 1년이 되어 가지만 그것이 대안은 될 수 없다. 고민보다 행동, 참여와 연대만이 살 길이다. 이 책은 내게 매년 자극과 함께 용기를 준다. 사면초가 - 홀로 서 있는 막막함을 느낄 때가 있다. 살아가다 보면. 그때마다 멀리 있지만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이며 위안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제자리에 엎드려 닥치고 있으면 손해 볼 일은 없다는 사실을 직장 생활 3년만 지나면 강아지도 안다. 하지만, 김용철은 왜 그랬을까? 검사 출신의 삼성 구조본부 팀장. 그의 선택에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던 ‘카더라 통신’들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자. 삼성은 무엇이 달라졌으며 검찰은 어떻게 변했는지 점검해 보자. 국민들의 의식과 생활은 조금 변했는지 살펴보자. 자신이 속한 단체나 조직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과 말이 더 큰 사회적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면 우리는 쉽게 그것을 ‘배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전근대적 사고 방식이 뿌리 깊은 우리에게 배신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과연 개인적 이익 때문이거나 배신의 유전자를 타고 난 사람들일까? 내부 고발자를 비롯한 수많은 양심선언을 한 사람들의 심리와 행동을 연구한 책을 기다려 보지만 감감 무소식이다. 김용철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초헌법적 기관인 삼성과 맞서려고 했을까? 2008년 한겨레신문의 인터뷰 특강 주제인 <배신>은 우리에게 또 한 번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반성하게 한다. 하종강의 말대로 본능적 유전자인 불평등에 대한 저항은 용기가 필요하고 생존을 넘어 선 실존적 고민에는 성찰이 필요하다.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배신 할 용기는 갖추고 있는가? 눈감고 귀막고 벙어리로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김용철은 결코 스스로 배신자라고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영웅이 되고 싶지도 않았겠지만 말이다. 이 책에는 김용철 외에도 정혜신의 ‘배신의 정신 분석’이 특별하다. 사람들이 느끼는 배신감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부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고 배신의 개념을 구별하라는 조언이 인상적이었다. 진중권은 언제나 대중을 배신하며 한 길을 걷고 있다. 그의 논리와 오호의 감정이 어찌되었든 개인적으로 가장 유사한 성향의 인간으로 혼자서 친근감을 느낀다. 과학자 정재승의 이야기도 재미있다. 뇌과학의 입장에서 이마 뒤쪽에 있는 전전두엽에 위치한 자존심과 배신에 대해 좀 더 고민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다른 책에서도 여러차례 반복적으로 읽었지만 정태인의 FTA 이야기와 이명박 경제 이야기는 이제 저질 코미디에 가깝다.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웃고 있다. 슬프다. 계속 미루고 있는 조국의 강연도 인상깊다. 앞당겨 차근차근 그의 책을 보고 싶어졌다. 법은 여전히 평등과 서비스가 아니라 권력과 부정의 수단으로 우리 사회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어둠이 내린 창밖을 바라보다 즐겁고 발랄한 책 한 권이 읽고 싶어졌다. 내가 발딛고 선 이 현실에서 조금씩 움직여보지만 쉽지 않다. 더딘 발걸음이지만 불빛을 저버릴 수는 없다. 묵묵히 걷다 보면 길이 생길 것이라고 믿는다. 지식인도 투사도 아닌 나같은 사람의 정체성과 실존적 고민들은 언젠가 다수와 대중의 이름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 강연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꿈을 꾸고 그것이 현실이 되는 세상을 상상해 본다. 그랬더니 슬몃 미소가 새어나왔다. 벌떡 일어나 뛰어야겠다. 또 다시. 081005-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