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주의와 바로크 라루스 서양미술사 7
피에르 카반느 지음, 정숙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탈리아의 반개혁 사실주의는 카라바조의 혁명으로부터 시작된다. ‘성 마태의 소명’에서 보여주는 광선에 의한 뚜렷한 화면분할과 명암의 대비는 관객의 시선을 단번에 잡아끈다. 그만큼 강렬하지만 성직자는 즉각 거절해 버린다. 그의 또다른 작품 ‘성 바울로의 개종’은 건장한 말의 입체감과 더불어 빛에 의해 말에서 떨어진 기사의 몸짓을 강조하고 있다.

  프랑스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루이14세의 영광, 베르사유의 궁전 예술은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사치스럽과 화려한 공간을 보여준다. 권력으로 치장된 예술은 높은 경지에 이르렀으나 그것에 값하는 당시 시민들의 삶이 어떠했을지는 쉽게 짐작이 가지 않는다. 루이 14세의 질투를 일으켰다는 ‘루이 르 보, 보-르-비콩트 성’은 인간의 건축 양식에 대한 경외감이다. 당시의 사회․역사적 배경을 떠난 예술을 이해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절대주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개별 건축과 회화들의 아름다움은 본능적 충동에 가깝다.

  A.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와 같은 저작은 주변 상황과 이성적, 철학적 배경의 의미를 고찰하고 있지만 라루스 출판사의 <서양미술사>시리즈는 이 처럼 시대별로 각기 다른 저자가 국가별 시대별 대표적인 예술장르와 개별 작품을 중심으로 그 의미를 분석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의 맥락과 흐름으로 서양 미술사를 일괄할 수는 없으나 보다 구체적인 개별 작품들을 이해하고 작가의 역할과 특히, 종교와 신화 그리고 권력자와 밀착되어 있던 당대의 사실들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데 충실하고 있다. 그것은 예술 자체에 대한 흐름과 이해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믿는다. 한 작품을 가지고 다양한 방식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일은 물론 한 사회의 예술에 대한 안목이며 미래의 발전에 대한 밑거름이 되겠지만, 유키 구라모토의 ‘여행의 나날들(2002)’을 들으며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떠나는 것이 더욱 값진 일일 것이다.

고전주의와 바로크 양식이라는 두 가지 경향은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다.
하나는 경제와 이성의 양식이고, 다른 하나는 음악과 풍부함의 양식이다.
전자는 중엄하며 지속적인 형식을 선호하고, 후자는 퍼져나가는 뒤틀어진 형식을 우선적으로 여긴다.
이 두 경향 사이에는 쇠퇴도 변질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영원한 감각성을 갖는 두 가지 형식들이다. - 외제니오 도르스

  위에서 인용한 말은 고전주의와 바로크라는 두 양식의 특징을 가장 극명하게 설명해 준다. 스페인, 플랑드르 그리고 네델란드의 예술이 보여주는 특징들을 집약한 설명이다. 들라크르와가 “회화의 호메로스다.”라고 평가한 루벤스의 천재성은 17세기 플랑드로 지방의 회화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16세의 소녀와 결혼한 53세의 화가 루벤스는 ‘사랑의 정원’으로 그 행복의 절정을 헌사했으며 풍부한 색감과 빛의 의한 명암대비, 인물들의 자연스런 표정은 그에게 내려진 모든 찬사를 갈음한다.

바로크 양식은 위대한 예술이 쇠퇴할 때마다 태어난다.
고전적인 표현 예술에서 요구사항들이 지나치게 많아지게 되었을 때에,
바로크 예술은 마치 하나의 자연적인 현상처럼 나타나게 된다. - 니체

  렘브란트의 ‘야간순찰’을 보면 3세기 동안 예술사가들이 의아하게 여기는 소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마치 수수께끼처럼 대위와 민간 경비대 소총수들 사이에서 어울리지 않는 복장과 표정으로 금빛 후광으로 끼어들어 있다. 화가만의 비밀스런 장치가 보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으니 그의 목적이 여기 있었을까? 네덜란드 회화의 관심은 베르메르에게 집중된다. 물론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관심이지만. 영화를 보기 전까지 베르메르라는 화가에 대해서는 아는바가 없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라는 그림을 본 적은 있지만.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화가와 소녀는 실제 작품을 연상시키며 영화의 완성도와 더불어 그림에 대한 풍부한 상상력을 더해 주었다. 왼쪽 귀에 걸린 반짝이는 진주귀걸이와 맑고 큰 두 눈동자가 뒤를 돌아보듯 어깨 너머로 관객을 응시하고 있다. 그 표정과 눈빛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르누아르가 루브르 박물관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은 ‘델프트’의 노란 벽이 주는 시간의 영원성은 문외한인 나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프랑스의 부셰와 영국의 게인즈버러를 위시하여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이성에 대한 관심으로 이행되는 과정들을 살펴볼 수 있는 건축과 회화들 그리고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방한 신고전주의를 소개로 이 책은 시대를 마무리 하고 있다. 이어질 낭만주의를 기대해 본다.


200504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낭만주의 라루스 서양미술사 7
제라르 르그랑 지음, 박혜정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를 거쳐 고전주의와 바로크에 이어지는 낭만주의까지 미술을 통해 살펴보는 역사는 인류의 고뇌와 삶의 양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근대와 함께 출발한 낭만주의 미술은 다비드의 신고전주의를 극복(?)하면서 시작된다. 18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낭만주의와 충돌하면서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는 이 양식들은 이제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곳까지 숨가쁘게 넘어오고 있다. 1789년 회화가 논쟁의 중심에 있을 때 혁명은 시작되었다. 다비드는 혁명을 통해 그의 명성을 더했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가 거둔 성공은 ‘마라의 죽음’에서 절정을 이룬다. 정확한 구도와 과학적인 세부묘사, 은은한 채광과 단순한 색채의 조화, 마라의 표정은 실제 그림을 보았을 때의 감동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보나파르트가 권력을 잡게되는 1800년을 전후하여 전쟁과 혁명, 미술과의 관계가 예술가들의 갈등으로 직접 이어지지는 않았다. 지금처럼 현실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못하는 사회적 배경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름의 방식대로 그림의 주제에 영향을 미치고 추방을 당하거나 살롱과 아카데미를 장악하는 정도의 변화가 이어졌다. 다비드에 이어 그로가 선두에 나서 낭만주의의 선구자로 등장한다. 앵그르, 제라르, 퓌슬리의 그림들은 전시대와 구별되는 나름의 색깔을 분명히 한다. 그것은 개별 사건과 신화의 내용들을 주체적으로 변화시키며 예술가 나름의 해석을 더하기 시작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소외된 화가 고야처럼 악마와 뭉글어진 얼굴 형태의 그림들과 더불어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낼 수는 없을 듯하다.

  “그림과 감정은 같은 사물을 표현하는 두 개의 다른 단어이다”라고 말한 컨스터블의 말처럼 1817년 루이 18세가 완전히 파리로 돌아오자 공포정치의 희생양들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달라진다. 체제의 변화는 그 안에 숨쉬는 예술가들의 사상과 활동에 영향을 직접적으로 미치게 된다. 개선문에 새겨진 ‘라 마르세예즈’를 조각한 뤼드의 작품이나, 다비드 당제의 부조 작품들은 조각에서 또다른 생동감을 보여주고 있다. 군주제에 대립하는 경향의 대변자가 되는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은 정치적 해석을 배제하고서라도 어두운 색조와 인물들의 동선과 표정에서 우러나오는 감동을 느끼게 한다. 실제 250명이 탄 메두사호가 침몰하고 150명 중에 겨우 15명만이 구조된 사건을 배경으로 한 그림이다.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보면 외젠 들라크루아의 명성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프랑스에서 출판된 원본을 볼 수 없으나 책의 가격과 화보의 수를 고려하면 생략된 화보가 있을 듯한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다. 앵그르의 ‘앙젤리크를 구하는 로제’에서 보여주는 선명함은 여전히 사슬에 묶여있는 여성의 몸의 곡선에서 배어나오는 관능미를 감출 수 없어 보인다. 폴 위에의 ‘황혼의 트루빌 해변’은 강력한 빛으로 야생의 거친 면모를 보여준다. 데생을 무시했기 때문에 ‘성실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들라크루아를 비난한 앵그르는 대다수 아카데미 비평가들에게 끊임없이 공격을 당했다. 그 이유는 ‘비극성’이 부족하고 절충주의를 권유한다는 것이었다. ‘해안으로 들어오는 배’를 통해 형태를 색채로 분산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는 윌리암 터너의 영국과 독일, 스페인에서 몇몇 화가들이 이 시기의 특징들을 보여준다. ‘단장하는 에스더’를 그린 사세리오, ‘붉은 옷을 입고 독서하는 소녀’를 그린 코로 ‘돈키호테’를 그린 도미에 등 시대를 풍미했던 화가들의 그림은 이제 서서히 근대의 폭넓은 개념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그것은 슐레겔이 “낭만주의는 여전히 생성되고 있다. 그리고 영원히 생성될 수 밖에 없다는 점에 그 본질이 있다”고 말한 것에서 찾을 수 있듯이 예술의 시대구분으로서의 협의의 개념이 아니라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들을 반영해 주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나는 ‘내 예술과 인류에게 봉사하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라느 칼스텐스의 말은 낭만주의 예술가의 강령으로 통할 수 있을 것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을 전후하여 1800년 나폴레옹의 등장과 1817년 루이 18세의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는 시기는 우리나라의 그것처럼 민중들에게는 더없이 혼란스런 시기였고 신산스런 삶의 고통스런 현장이었으리라. 당대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로서 미술은 어떤 모습으로 자리매김되고 그 역할을 다했는가는 예술 외적 논의의 대상만으로 치부해 버릴 수는 없다. 본격적으로 ‘소설’이라는 장르가 시작되는 시대, 그래서 ‘로망스(romance)’와 ‘노블(novel)’이 탄생하고 다양한 장르의 현대성이 잉태되었던 척諛?바로 여기쯤이 아닌가 싶다. 빅토르 위고의 ‘크롬웰’ 서문과 ‘에르나니’ 논쟁으로 서서히 근대의 문이 열리는 시대, 미술비평의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며 시인의 명성도 얻은 보들레르의 이야기들은 미술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뭐라 특징 지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19세기의 미술과 근대, 현대 미술이 다가오고 있다. 맛있게 음미해 볼 일이다.


200504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렌지소녀 - 소설로 읽는 사랑철학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이정순 옮김 / 현암사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책을 읽어 보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작가와 제목, 대강의 내용과 출판사 등 객관적 요소들을 두루 살펴보고 책을 산다. 그렇게 선택한 책이 기대했던 내용과 일치하고 그 이상의 감동과 재미를 얻을 수 있으며 또한 새로운 정보와 깨달음을 줄 때 독서의 즐거움은 배가 된다.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은 때로 즐겁다. 하지만 단 한권의 책만으로 그 작가를 평가하는 것 또한 위험한 일이다. 요슈타인 가아더는 <소피의 세계>로 문명을 떨쳤지만 다른 작품을 읽어보지 못하다가 이번에 ‘소설로 읽는 사랑철학’이라는 부제가 붙은 <오렌지 소녀>를 그의 두 번째 책으로 선택했다. <소피의 세계>도 물론 그렇게 볼 수 있지만 이 책은 청소년들을 위한 단상으로 읽혀 질 책이다.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단순한 연애소설로 읽기 시작했을 때와 정반대의 느낌이다. 소설 형식으로 쓰였지만 이 책은 가장 객관적이고 철학적인 사랑이야기다. 남녀간의 이성적 사랑을 운명이라 믿으며 정신 못차리는 사람들에게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물론 그것이 생의 과정이고 가장 화려한 시절일 수 있으나 알랭 드 보통은 사랑의 우연성과 감정의 변화를 냉철하게 짚어 나가고 있다.


  “너에게는 우연이나 나에게는 숙명이다(정호승의 ‘첫눈’중에서)”라고 말하는 모든 연인들에게 사실 어떤 조언이나 감정의 절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우습다. 반대로 요즘이야 그런 감정의 편린들만을 따라가는 사랑을 하는 젊은이도 없다고 하는 시대이긴 하지만.


  <오렌지 소녀>는 그의 다른 소설처럼 액자 형식을 취하고 있다. 얀 올리브가 스무살에 만난 오렌지 소녀 베로니카와의 첫 만남, 두 번째 우연한 만남과 기다림 사랑과 결혼으로 이어지는 모든 사람들의 평범할 듯한 사랑이야기가 기본 서사 구조를 이룬다. 미술을 전공한 베로니카와 의사인 얀 올리브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행복의 절정에서 네살바기 아들 게오르그를 남겨둔 채 죽음을 맞이한다. 이 모든 사실은 11년 뒤, 게오르그의 유모차 밑에서 발견되는데,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진행된다. 현재의 15세 소년 게오르그에게 11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미래의 아들에게 전하는 편지라는 독특한 형식의 이야기다. 물론 그 오렌지 소녀는 게오르그의 어머니 베로니카이다. 지금은 외르겐과 재혼해서 살고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를 읽어나가며 게오르그는 차츰 삶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야기 시작 부분에서 허블 망원경과 우주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과 관심을 보여주는 것으로 죽은 아버지와 교감을 나누기 시작한다. 우리들 삶의 과정과 생에 대한 아이러니가 우주의 변화와 아름다움 만큼이나 계속된다는 사실로 읽힌다. 언젠가 이 모든 것들과의 이별이라는 것은 생의 절대 진리이다. 그 규칙을 피해 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지금 이 모든 순간의 삶을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생각하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수 있으나 죽음을 앞둔 아버지가 미래의 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이야기로는 적당하다. 부모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아들에게 인생에서 사랑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싶었던 아버지와 그 편지를 통해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발견하고 드넓은 우주 속에서 스스로 성장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그것은 게오르그라는 소설속 소년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의 모습으로 읽을 수 있겠다.


  누구나 한 번쯤은 지독한 사랑의 열병을 앓고 누구나 한 번쯤은 지독한 이별의 고통을 경험한다. 단순한 생의 규칙이다.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경험하지 못한 사람을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없다. 아픈만큼 성숙해지고 잃어야 얻는다는 단순한 진리는 직접 체험의 과정 속에서 더욱 빛난다. 본격적인 사랑의 의미를 되묻고 진지하게 성찰하는 소설이었다면 오히려 부담스러웠을까? 학생들에게 적당히(?) 권할만한 가벼운 소설이라서 부담없이 피해간다. 본질적인 문제를.

 

 

200505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ROUTLEDGE Critical THINKERS(LP) 1
토니 마이어스 지음, 박정수 옮김 / 앨피 / 200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득 ‘우리 문화의 근대성은 모두 서양에 빚지고 있을까?’하는 물음이 생긴다. 근대의 개념조차 모호하며 문화적 지평은 고사하고 그 뿌리조차 척박한 이유는 일제 식민지의 유령으로부터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닐까?

  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는 영국의 투틀리지 출판사의 야심작 시리즈 1권이다. 세계의 지성들을 차례로 소개할 예정이라는데 앞으로도 읽어볼 만 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린비에서 출판한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의 1권이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었고, 2권이 <자본을 넘어선 자본>이었다. 그 이후에는 읽은 책이 없지만 두 권 모두 값진 책이었다. 출판사에서 펴내는 시리즈는 대개 1, 2권에 승부(?)가 결정된다. 이 책의 구성과 형식이 독특하다. 지젝의 사상과 저작을 중심으로 그의 논의를 정리해 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용어와 개념 정리는 친절하게도 각 단원마다 요약 정리를 해 주고 있다. 중간에 지젝에게 영향을 미친 사상가들의 사진과 개념을 설명으로 덧붙이고 있는 것도 지루하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게 해 준다.

  20세기의 가장 명민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처럼 학문의 한 분야를 개척한 학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지젝은 적이 많은 것인지도 모른다. 제목에서 보여주듯이 해체주의자, 푸코주의자, 페미니스트들, 데리다주의자, 하버마스주의자들 모두 제젝을 싫어한다. 그것은 지젝이 라캉주의자로 스스로 선언한 데서 연유한다. 학계는 늘 지젝보다 느리게 움직이기 때문에 그의 비판이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사유의 하나”라고 불리는 지도 모른다.

  영국인 저자 토니 마이어스는 슬로베니아 출신 지젝을 ‘끊임없이 놀라는 사람, 대중문화로 철학을 더럽히는 철학자, 진실로 구멍을 드러내는 부정어법, 할리우드 영화광, 프랑스 철학통, 대통령 후보’이며 ‘오늘날 가장 탁월한 사상가’라고 정의한다. 1981년에 철학 박사학위를, 파리 8대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지젝의 사유는 예사롭지 않다. 독자적인 형이상학적 개념이 없다는 이유로 탁월한 철학자로 평가받지 못하지만 그 자리를 할리우드 상업영화와 같은 대중문화로 보충하고 있다.

  지젝은 변증법이라는 사유의 형식 혹은 방법론을 헤겔에게 제공받았다. 그의 작업에 실천적 영감을 제공한 사람은 마르크스다. 지젝이 시도하는 것은 마르크스적 사유 전통, 특히 이데올로기 비판에 공헌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지젝의 분석틀과 개념용어를 제공하는 역할은 라캉이 맡는다. 그에게 특히 중요한 것은 상징계와 실재계의 개념이다. 그는 이 두 세계의 접속지점에 ‘주체’ 개념을 위치시키고 그것을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헤겔과 마르크스와 라캉, 세 명의 철학자는 슬라보예 지젝의 ‘주체’를 탄생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외에도 셰링이나 루이 알튀세, 오토 바이닝거 등을 동원하여 포스트모더니즘과 탈근대를 비판하고 라캉의 ‘여성은 남성의 증상이다’에 대한 오해를 설명한다. 

  슬라보예 지젝이 신선하고 매력적인 21세기형 사상가로 보이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숨쉬고 일상에서 접하는 대중문화와 정치현상들을 통해 새로운 해석과 독특한 방식의 사유를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좌충우돌하는 키취적 문화 게릴라쯤으로 평가될 수 없는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향락과 그것의 정치적 부침’이라는 한국어판 출판을 기념하며 보냈다는 지젝의 최근 글로 책을 끝맺고 있다.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으로 조만간 지젝을 다시 만나야겠다. 정치적 성향과 세상에 대한 대응 방식으로 한계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는 우리 시대에 주목받는 대표적인 사상가임에는 틀림없다. 세월 앞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의 사상과 행보에 주목받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그의 변화를 들여다보는 일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듯 싶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분노하며 부시의 뺨을 후려치고 싶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히치콕이나 할리우드 영화에 나타난 이 시대의 우울한 자화상과 현대인들의 다양한 정신세계를 분석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슬라보예 지젝 사상적 변모와 흐름을 소개받고 싶은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200505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젖은 들풀 냄새가 배어 나오는 봄비가 내리는 밤이다. 빈 공간을 채우던 적막이 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창밖을 떠돌고 있다. 무엇을 바라겠는가. 살아 있다는 안도감과 하루하루 바쁜 생의 언저리에서 이렇게 늘 잠깐의 여유로 책장을 넘길 수 있다는 행복 이외에 또 무엇이 필요할까. 책 속에는 길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인생의 정답을 찾으려는 헛된 노력만 하지 않는다면 끊임없이 현실 세계의 존재감 정도는 전해준다.

  감히 ‘사랑’에 대해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귀기울여 들어볼 자세는 되어 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처럼 이야기해도 나는 진지하게 바라볼 자세는 되어 있는 것이다. 그 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이라는 작품은 1982년 처음 구상되었고 2004년에 출판되었지만 그것은 무의미하다. 작가는 모든 작품을 모든 순간에 구상한다. 존재하고 사유하는 모든 대상은 어떤 형태로든 작가에게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되고 표현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읽어내고 보여주는 방식이다. 그것을 읽고 받아들이는 것 또한 독자의 몫이듯이.

  ‘사랑’처럼 진부한 단어가 또 있을까. 이 진부한 ‘사랑’이야기를 마르케스는 어떤 의미로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는지 나는 그 행간을 짚어 볼 수밖에 없다. 소쉬르의 표현을 빌자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가 -언어의 소리와 의미-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을 느낄 수 없어 번역소설은 늘 2% 부족한 감상을 전제로 한다고 믿는다. 나는 마음을 열고 늙은 작가가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어본다. 여든을 바라보는 그가 나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귀기울여 들어볼 뿐이다.

  단편도 장편도 아닌 150페이지 분량의 다소 어색한(?) 길이와 빛바랜 나무 등걸같은 활자의 색은 책을 읽는 내내 낯설다. 민음사의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라틴 아메리카의 낯선 지명과 가보지 않아 상상하기 힘든 더운 날씨와 분위기를 느낄 수 없어 아쉬움은 남는다. 온몸에 습기가 달라붙는 더위인지 바싹마른 고온인지 알 수 없고, 사회 문화적 배경에 대해 속속들이 알 수 없어 그들이 느끼는 감정과 전달 방식이 생생하게 다가오지 않아 답답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들처럼, 일테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나 <농담>, <불멸>처럼 장편이 전해주는 작가의 목소리를 잡아내기 힘들어 개인적으로 버거웠던 소설이다.

  90세 생일을 맞이한 노인이 포주 카바르카스에게 전화를 걸어 여자를 부탁한다. 평생을 창녀들과 함께 살아온 주인공에게 얼마남지 않은 생에 대한 선물로 처녀를 주문한 것이다. 14세의 소녀를 맞이한 주인공은 손도 대지 않은채 하루 밤을 보낸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단추 공장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는 소녀는 잠이 들어 주인공을 기다렸던 것이다. 주인공은 소녀에게 ‘델가디나’란 이름을 붙여주지만 그의 본명도 사는 곳도 알지 못한다. 주인공의 이름도 독자들은 알 수가 없다. 익명성이 모호함 때문일지 모르지만, 그는 독특한 생의 방식을 취하고 있는 신문 칼럼니스트로서 명망있는 늙은이로 그려지지만, 특별한 인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가 느끼는 생에 대한 고독과 비애 때문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소녀의 무의미한 몸짓이 보여주는 생의 신산스러움 때문이다.

  소설 전편에서 두 인물의 대화는 드러나지 않으며 노인의 심리와 내면의 독백을 통해 소녀에 대한 감정이 사랑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무덤덤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선입견으로 14세 소녀에 대한 90세 노인의 사랑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이 소설 읽기는 실패하고 만다. 나이를 잊고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최초로 느끼는 열정과 그것을 통해 느끼는 생의 의지를 읽어내면서 나는 또다른 삶을 들여다 본다.

  “나이는 숫자가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고” 말하는 주인공의 독백은 죽음을 목전에 둔 극단적인 나이를 통해서 오히려 극명하게 인간의 존재 방식과 삶의 의미를 되묻고 있다. 그렇다면 14세 소녀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이 남는다. 그를 위한 소품에 불과한 것인가. 소녀가 그에게 느끼는 감정과 변화는 대단히 주관적이고 일방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간접적인 방식으로만 드러난다. 그곳에는 여전히 대화가 없다.

  언어가 사랑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소설을 읽는 이유와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나는 때로 고통스럽게 때로 힘겹게 소설을 읽는다. 문학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정말로 ‘진부’한 의미를 찾을 생각은 없다. 다만 “섹스란 사랑을 얻지 못할 때 가지는 위안에 불과하다오”라고 전하는 노벨 문학상에 빛나는(?) 대가의 소설속 주인공이 남긴 한 마디가 제 나름의 의미를 갖고 한 조각 퍼즐이 되어 내 생의 어디쯤엔가 끼어 들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스럽겠다.

  여전히 비소리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 밤이다.


200505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