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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294
김기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월
평점 :
한 시인의 등단 무렵부터 시들의 변화 과정을 읽는 것은 재밌다. 시집을 읽는 것은 가슴에 남거나 화자와의 동일시, 상황에의 몰입이라는 단편에 관한 느낌과는 또다른 무게가 있다. 마치 단편 소설 하나하나가 모여 전체 장편을 이루는 피카레스크식 구성법을 이용하는 소설집과 같은 의미로 읽힌다. 전시집과 다음 시집 사이의 시간의 흐름과 시인의 변화를 고스란히 읽어낼 수 있고 어떤식으로든 그것은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김기택의 <소>는 그의 네 번째 시집이다. ‘태아의 잠’, ‘바늘 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에 이은 이 시집은 화해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치밀한 관찰과 묘사가 시인의 가장 큰 무기이다. 특히 김기택은 더욱 그러하다. 잠들고 묻혀 있는 일상속의 작은 변화와 행동들을 시인은 날카로운 감각과 시선으로 그것들을 집어 낸다.
달팽이 지나간 자리에 긴 분비물의 길이 나 있다
얇아서 아슬아슬한 갑각 아래 느리고 미끌미끌하고 부드러운 길
슬픔이 흘러나온 자국처럼 격렬한 욕정이 지나간 자국처럼
길은 곧 지워지고 희미한 흔적이 남는다
물렁물렁한 힘이 조금씩 제 몸을 녹이며 건조한 곳들을 적셔 길을 냈던 자리, 얼룩
한때 축축했던 기억으로 바싹 마른 자리를 견디고 있다
‘얼룩’의 전문이다. 사물을 낯설고 새롭게 바라보는 것이 시인의 기본적인 의무라면 김기택은 시인의 의무에 너무 충실하다. ‘단말마로 악쓰다가 아스팔트 바닥에 붙어버린 마음을 아무것도 모르는 타이어들이 씽씽 밟고 지나간다’는 표현처럼 타이어 자국에서 시작된 상상력을 개인적 상상력으로 복원시킨다.
특히 이 시집에서 시인은 모든 사물을 꿰뚫어 보듯, 투명한 상상력으로 지나간 시간들의 흔적과 기억들을 조합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긴 세월은 남편이 되고 아이들이 되어
네 몸에 단단히 들러붙어
마음껏 진을 빼고 할퀴고 헝클어뜨려 놓았구나 - ‘아줌마가 된 소녀를 위하여’ 중에서
불도 없는데 생선 비늘 들썩거린다.
할머니 얼굴 쭈글쭈글해진다.
등뼈가 휘어지고 오그라들고 굳어진다.
거친 숨, 가는 신음이 몸 안에서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깊은 주름을 흔들며 앞니 빠진 아이처럼 깔깔거리는 할머니,
상한 데 없는 맑고 어린 웃음이 경로당에서 나온다. - ‘전자레인지’ 중에서
위의 두 편의 시에서 인용한 것처럼 이제 오십을 바라보는 시인은 시간의 흐름과 세월에 깊이에 시선을 던져두고 있다.
창문이 모두 아파트로 되어 있느 전철을 타고
오늘도 상계동을 지나간다.
이것은 32평, 저것은 24평, 저것은 48명,
일하지 않는 시간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나는 또 창문에 있는 아파트 크기나 재본다.
……<중략>……
전철이 지하로 들어가자
아파트로 된 창문들이 일제히 깜깜해지더니
아파트 대신 창문마다 얼굴들이 나타난다.
내 얼굴도 어김없이 그 사이에 끼어 있다.
어릴 적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 ‘어린 시절이 기억나지 않는다’중에서
무엇인가 새롭고 긴장된 감각과 신선함을 보여주는 시를 원한다면 김기택의 시와는 거리가 멀다. 이 시집을 통해 시인은 세월의 깊이와 흔적들을 보여주고 있으며, <사무원>에서 보여주었듯이 도시생활의 척박함을 ‘주말농장’에 가서 ‘별미’로 표현하며 메마른 시선으로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시인의 말을 읽는다. “너무 건조해서 불면 먼지가 날 것 같은 머리와 가슴. 도저히 시가 나올것 같지 않은 그곳에서 그래도 시가 나오는 이유는 끊임없이 몸을 물고 늘어지며 뒤척이는 마음이 있기 때문. 지루하고 답답한 삶의 압력이 강제로 상상력을 분출키기 때문.” 시는 어디쯤에 서서 우리에게 늘 깨진 유리거울로 눈을 부시게 하고 마른 하늘에서 소나기를 내려 주기도하고 가끔 귀밑을 간질이며 신선한 바람과 부드러운 미소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서 가끔 슬며시 그의 손을 잡는지도 모르겠다.
2005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