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의 문학 강의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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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웠던 90년 여름에 출간됐던 <그대에게 가는 먼길>이라는 이성복의 책은 신선했다. 산문이라고 이름붙이기에 애매한 단편들을 모아 ‘이성복 아포리즘’이라는 형식으로 묶어냈기 때문이다. 낯설고 새로운 형식이었으나 이외수 등의 산문집을 경험한 독자들에게 처음이라는 인상을 줄 수는 없었다. 어쨌든 아포리즘이라는 형식의 글들을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은 내가 접한 첫 책이었다. 이제 움베르토 에코의 <문학 강의>를 통해 아포리즘과 역설에 대해 다시 그의 책을 뒤적여본다.

“문학은 현실로 들어가는 문(門)이다. 문학을 신주단지처럼 받드는 사람들이 문학으로부터 배신당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조금이라도 문학이 중요하다면, 그것은 삶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 그대에게 가는 먼 길, 이성복, 살림, 1990

문학에 관한 그 많은 책들을 읽는다고 해서 문학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렐레스의 ‘시학’으로 시작해서 김현, 김주현의 ‘문학이란 무엇인가’까지 고개만 돌려도 눈에 띄는 무수한 문학에 관한 담론들을 바라보면 지겹기까지하다. 하지만 문학에 대한 수많은 질문과 대답들 속에서 그리고 문학에 대한 열정과 애정들 속에서 우리의 삶은 더없이 풍요로워지고 봄 햇살처럼 부드러운 느낌으로 생을 대하게 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유명한 작가들과 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만의 몫은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질문들이며 그 질문들에 대한 각각의 진지한 대답이고 길들이기 때문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문학 강의>는 여러 대학과 각종 행사에서 발표한 글들과 논문집과 잡지에 실렸던 글들을 모은 책이다. 문학의 기능에서부터 상징, 문체, 아이러니의 층위들까지 폭넓은 독서와 사유의 세계를 독자들에게 어렵지 않게 설명해주고 있다. 보르헤스의 영향을 고백하고 형식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으며 ‘거짓의 힘’을 통해 보여주는 ‘장미 십자가단’에 관한 유럽의 환상과 신화적 상상력을 실증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학자로서 보다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의 작가인 소설가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에코의 문학론은 이탈리아의 작가들과 유럽 문화의 토양에서 성장한 에코의 문학적 편력들을 읽어낼 수 있다. 동양적 문화와 가치관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문학의 보편성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는 부분들에만 동의한다. 실제로 읽지 않은 보르헤스의 영향력을 이야기하는 소단원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알지 못하는, 흥미가 없는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역일 것이다.

에코의 이 책이 갖는 미덕은 문학에 대한 다양한 반응 방식중 하나라는 사실이다. 더 이상 나올것도 보태질 필요도 없을 듯한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름의 방식의 재구성하고 실제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에코 방식의 문학에 대한 자세를 듣게 되는 것이다. 역자인 김운찬 교수가 달아놓은 주가 가독성을 방해하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이탈리아와 유렵 문화에 까막눈인 나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나는 문학에 관한 모든 길을 다 안다. 그 어느 한 길도 제대로 갈 수 없다는 것까지…… 문학은 삶이다. 삶이 곧 문학은 아니라 하더라도.”라고 했던 이성복 시인이 이 책을 읽는다면 아포리즘과 역설에 대해 어떤 표정을 짓을지 궁금하다. 단 한마디로 인생을 정의할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작가를 기다리는 것보다 숱한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보다 많은 작가들과 책을 만나고 산책하며 사유할 시간을 가져볼 것이다.

2005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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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창비시선 239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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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안도현의 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되고 있다. ‘너에게 묻는다’는 다소 도발적 제목으로 이기적인 삶에 대한 반성과 각성을 요구한다. 이타적 사랑과 소외된 것들에 대한 관심은 어쩌면 작가가 갖추어야할 기본적인 정서인지도 모른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으로 그를 처음 만났는데 벌써 여덟 번째 시집이라니 세월이 빠르다. <모닥불>,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까지 보았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그의 시집은 많이 달라졌다. 시인들은 보통 나이가 들면서 인식의 고삐가 늦추어지고 사물에 대한 시선의 각이 무디어 진다. 이것을 생에 대한 부드러움과 포용, 사고의 확장과 인식의 변화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뭔가 거대한 사상과 모든 것들에 대한 관조로만 이해될 수는 없다. 뭔가 부족하고 아쉽다. 권혁웅의 상찬식 해설은 시를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간격>을 보자.



    숲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때는 몰랐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어깨와 어깨를 대고
    숲을 이루는 줄 알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
    넓거나 좁은 간격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벌어질 대로 최대한 벌어진,
    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되는,
    기어이 떨어져 서 있어야 하는,
    나무와 나무 사이
    그 간격과 간격이 모여
    울울창창(鬱鬱蒼蒼) 숲을 이룬다는 것을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숲에 들어가보고서야 알았다

  사람들 사이의 거리두기에 대한 시인의 인식은 뛰어나다. 나무와 숲의 조화를 ‘거리’로 파악한 눈은 놀랍기만 하다.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 묻지만 않는다면 인간관계는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거라는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지나친 관심과 이해와 사랑만이 미덕은 아닐텐데. 살아가면서 더욱 어려워지는 이 관계 맺기에 대한 통찰이 놀랍기만 하다.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같이 울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괭이는 아직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돌의 울음)라고 말하는 안도현의 말이 아프게 새겨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생 동안 나무가 나무인 것은 무엇보다도 그늘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하늘의 햇빛과 땅의 어둠을 반반씩, 많지도 적지도 않게 섞어서
    자기가 살아온 꼭 그만큼만 그늘을 만드는 저 나무가 나무인 것은
    그늘이라는 것을 그저 아래로 드리우기만 할 뿐
    그 그늘 속에 누군가 사랑하며 떨며 울며 해찰하며 놀다가도록 내버려둘 뿐
    스스로 그늘 속에서 키스를 하거나 헛기침을 하거나 눈물을 닦거나 성화를 내지 않는다는 점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말과 침묵 사이, 혹은
    소란과 고요 사이
    나무는 저렇게
    그냥 서 있다
                          -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중에서

  이렇게 노래하는 시인이 ‘이끼’에서는 “사랑에 빠지면 눈이 멀거나 눈이 환하게 밝아진다고 했거니와 이끼가 알고 있는 건 그늘이 허공의 전부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얼마나 낯설고 다른 시선으로 나무와 숲과 돌과 이끼를 바라보아야 새로움이 보이는 걸까 싶다. 말하기 전에 느껴져야하는 것이 시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 안도현이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이유라 할 수 있다. 어렵지 않은 언어로 스치기 쉬운 생의 구석구석을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상처를 보듬을 수 있는 통찰을 전해준다. 마지막으로 시집의 표제작 ‘강’을 살펴보자.

     너에게 가려고
    나는 강을 만들었다

    강은 물소리를 들려주었고
    물소리는 흰 새떼를 날려보냈고
    흰 새떼는 눈발을 몰고 왔고
    눈발은 울음을 터뜨렸고


    울음은강을 만들었다
    너에게 가려고

  나는 또다시 기막힌 시 한편을 만난 느낌을 지울 수 없어 한참동안 반복해서 음미했다. 스무살,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서 처음 돈을 벌었다. 책방으로 달려가 시집 두권을 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시작해서 이제 겨우 400여권의 시집이 책꽂이 하나를 채우고 있다. 어렵고 힘들때, 기쁘고 행복할 때마다 시집에 기댄다. 손때 묻도록 꺼내보고 인용했던 많은 시들과 가슴에 담아두고 사람들에게 전했던 시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빛나길 바란다. 천권의 아름다운 시집을 전해줄 아이들에게도 기쁨이 될 수 있으면 더욱 기쁘겠다.

  비록 날카로움과 날선 비판의 시선은 거두었으나 사십대 중반을 넘어서는 시인의 안주가 아니라 세상을 읽어내는 또다른 방식이라고 이해하고 싶다. 좀더 새롭고 낯선, 독자의 기다림에 부응하리라 믿는다. 꼬리에 꼬를 물고 연쇄적인 순환의 반복 구조를 보여주며 “너에게 가려고”하는 모든 사람들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2005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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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한국 여성의 역사
박수정 지음 / 아름다운사람들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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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라는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방향성에 따라 다르게 마련이다. 특히 ‘한국여성’이라고 범위를 한정시키고 보면 참 할 말이 많아 보인다. ‘일하는 여성’으로 범위를 한정시키고 보면 어느정도 가닥이 잡힌다. <숨겨진 한국여성의 역사>는 일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다. 더 구체적으로 70년대 초창기 민주노조의 기틀을 마련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다. 산업화 사회의 숨은 일꾼으로 자리매김하고 그 역할과 위상을 인정받아 마땅한 이 땅의 ‘공순이’들의 이야기다.

  가난은 한 개인의 잘못도 아니고, 복권처럼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사회적 계급도 아니다. 해방이후 우리의 정치 현실을 들여다보면 울분을 참을 수 없다. 잘못된 과거의 청산과 반성이 없이 진행형의 과거를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 과정에서 소외된 민중과 그들의 딸들은 어떻게 살아왔나? 멀지 않은 내 어머니 세대의 일이고 보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눈물이 흘렀다.

  ‘구로노동자문학회’ 상근자로 일하기 시작한 박수정의 글들이 다소 감성에 호소하는 측면이 있으나, 박순희, 이철순, 이총각, 정향자, 최순영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과거의 추억담이나 지나간 옛노래가 아닌 현재진행형의 역사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때보다 나아졌다는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래도 희망은 있다. 그들이 노둣돌과 디딤돌이 되어 이만큼 진보했고 발전했으며 앞으로도 조금씩 나아질거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똥물 투척 사건으로 전국을 뒤흔든 동일방직 노동조합 위원장 이총각. 신민당사 점거농성으로 민주화의 불씨를 당겨 반유신 정치투쟁과 부마행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끝내 10․26으로 정권의 종말을 보았던 YH무역 노조 지부장 최순영. 원풍모방 사태의 주역 노동조합 부지부장 박순희. 한국여성 노동자회 협의회위원장 이철순. 전남제사 노동조합 위원장 정향자.

  섬유노조와 관련된 한계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7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 노동운동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산 증인들이다. 이들은 여전히 민노당의 원내 진출로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최순영을 비롯하여 우리 사회 곳곳에서 아직도 여성 노동자들의 권익과 사회적 약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일로 평생을 보내고 있다. 서슬퍼런 유신 독재의 칼날아래 개인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해 싸웠던 이들의 모습들이 더욱 감동적이다. 그후 80년대 학생 운동과 섞이며 겪었을 갈등과 본질적 문제의 대립은 차치하고서라도 온몸으로 싸워온 삶의 모습들이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못 배우고 가난한 설움이 개인의 무능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 모순과 자본의 논리로부터 출발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언제나 혼자가 아니고 우리가 되어 살아가는 모습들은 나를 돌아보게 한다. JOC(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역할이 곳곳에서 보인다. 힘없고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더불어 함께 걸어 갈 수 있는 길에 등불을 밝혀 주는 일이 진정한 종교의 몫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내 어머니와 누이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쉽지 않은 문제가 된다. 21세기를 여성, 환경, 문화의 시대라고 단언하는 사람도 있다. 미래를 준비하는 화두로서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우리들의 문제로서 여성의 문제는 곧 나의 문제 우리의 문제가 되어 있다. 여성의 가정내 역할과 사회적 역할에 대해 지루한 이론과 공방들로 시간 보내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현실속에서 구체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방법들이 제시되고 각 사업장에서 권익과 인권측면의 여성 문제를 모두가 고민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믿고 있다. 여성 문제라는 용어가 사라지는 그날까지 많은 관심과 노력이 생활속에서 실천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처음부터 길은 없었다. 한사람이 가고 두람이 가고 여러 사람이 가다보면 길이 생기는 것이다. 노신의 글을 보며 인상 깊게 가슴에 새겼던 말이다. 맨처음 그 가시밭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용기. 그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물론 혼자만의 용기도 아니다. 어깨 겯고 함께 걸어갈 누군가가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 모두가 꿈을 꾸면 그건 꿈이 아니라 곧 현실이 되듯이 말이다. 아직 살아 계신 분들에 대한 삶에 경의를 표하며 이땅에서 생이 다하는 날까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시길 빈다.


20050331
여성이라는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방향성에 따라 다르게 마련이다. 특히 ‘한국여성’이라고 범위를 한정시키고 보면 참 할 말이 많아 보인다. ‘일하는 여성’으로 범위를 한정시키고 보면 어느정도 가닥이 잡힌다. <숨겨진 한국여성의 역사>는 일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다. 더 구체적으로 70년대 초창기 민주노조의 기틀을 마련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다. 산업화 사회의 숨은 일꾼으로 자리매김하고 그 역할과 위상을 인정받아 마땅한 이 땅의 ‘공순이’들의 이야기다.

  가난은 한 개인의 잘못도 아니고, 복권처럼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사회적 계급도 아니다. 해방이후 우리의 정치 현실을 들여다보면 울분을 참을 수 없다. 잘못된 과거의 청산과 반성이 없이 진행형의 과거를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 과정에서 소외된 민중과 그들의 딸들은 어떻게 살아왔나? 멀지 않은 내 어머니 세대의 일이고 보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눈물이 흘렀다.

  ‘구로노동자문학회’ 상근자로 일하기 시작한 박수정의 글들이 다소 감성에 호소하는 측면이 있으나, 박순희, 이철순, 이총각, 정향자, 최순영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과거의 추억담이나 지나간 옛노래가 아닌 현재진행형의 역사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때보다 나아졌다는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래도 희망은 있다. 그들이 노둣돌과 디딤돌이 되어 이만큼 진보했고 발전했으며 앞으로도 조금씩 나아질거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똥물 투척 사건으로 전국을 뒤흔든 동일방직 노동조합 위원장 이총각. 신민당사 점거농성으로 민주화의 불씨를 당겨 반유신 정치투쟁과 부마행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끝내 10․26으로 정권의 종말을 보았던 YH무역 노조 지부장 최순영. 원풍모방 사태의 주역 노동조합 부지부장 박순희. 한국여성 노동자회 협의회위원장 이철순. 전남제사 노동조합 위원장 정향자.

  섬유노조와 관련된 한계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7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 노동운동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산 증인들이다. 이들은 여전히 민노당의 원내 진출로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최순영을 비롯하여 우리 사회 곳곳에서 아직도 여성 노동자들의 권익과 사회적 약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일로 평생을 보내고 있다. 서슬퍼런 유신 독재의 칼날아래 개인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해 싸웠던 이들의 모습들이 더욱 감동적이다. 그후 80년대 학생 운동과 섞이며 겪었을 갈등과 본질적 문제의 대립은 차치하고서라도 온몸으로 싸워온 삶의 모습들이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못 배우고 가난한 설움이 개인의 무능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 모순과 자본의 논리로부터 출발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언제나 혼자가 아니고 우리가 되어 살아가는 모습들은 나를 돌아보게 한다. JOC(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역할이 곳곳에서 보인다. 힘없고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더불어 함께 걸어 갈 수 있는 길에 등불을 밝혀 주는 일이 진정한 종교의 몫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내 어머니와 누이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쉽지 않은 문제가 된다. 21세기를 여성, 환경, 문화의 시대라고 단언하는 사람도 있다. 미래를 준비하는 화두로서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우리들의 문제로서 여성의 문제는 곧 나의 문제 우리의 문제가 되어 있다. 여성의 가정내 역할과 사회적 역할에 대해 지루한 이론과 공방들로 시간 보내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현실속에서 구체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방법들이 제시되고 각 사업장에서 권익과 인권측면의 여성 문제를 모두가 고민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믿고 있다. 여성 문제라는 용어가 사라지는 그날까지 많은 관심과 노력이 생활속에서 실천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처음부터 길은 없었다. 한사람이 가고 두람이 가고 여러 사람이 가다보면 길이 생기는 것이다. 노신의 글을 보며 인상 깊게 가슴에 새겼던 말이다. 맨처음 그 가시밭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용기. 그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물론 혼자만의 용기도 아니다. 어깨 겯고 함께 걸어갈 누군가가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 모두가 꿈을 꾸면 그건 꿈이 아니라 곧 현실이 되듯이 말이다. 아직 살아 계신 분들에 대한 삶에 경의를 표하며 이땅에서 생이 다하는 날까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시길 빈다.


2005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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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보낸 편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린 로너 엮음, 양희정 옮김 / 민음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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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추에 사자머리(윤택의 머리를 연상하면 되겠다)를 하고 안경너머 명징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그람시의 사진은 체 게바라의 사진만큼 인상적이다. 정호승의 ‘서울의 예수’에 실려있는 사진 속 그의 눈빛을 보고 섬뜩했던 기억이 있다. 주관적 느낌이겠지만 세상에 대한 그의 시선은 송곳처럼 날카롭게 보였고 꽉다문 입술은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듯 했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사진도 그의 삶과 사상만큼 선명하고 확신에 찬 모습이다.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설하고 파시즘에 대항하여 무솔리니의 감옥에서 병과 싸우며 정신 투쟁으로 남은 여생을 보낸 위험한 지식인 그람시는 행복했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11년간 감옥에서 그는 <옥중수고>와 <감옥에서 보낸 편지>라는 양대 저작을 남겼다. 
  

  “마르크스라는 지도 위에 상부 구조의 자리를 마련한 거대한 대륙”이라는 옮긴이의 말이 결코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다. 처형 타니아에게 보낸 그의 편지들 곳곳에서 발견되는 역사와 사회에 대한 비판적 견해와 크로체를 통한 견해들은 그람시의 독톡한 세계관을 보여준다. 아내 줄리아와 두 아들 델리오, 줄리아노에게 보내는 편지들은 그람시의 인간적인 면을 드러낸다. 

   린 로너가 엮은 이 책은 다소 긴 ‘서문’이 붙어 있다. 서문에서 로너는 그람시의 생애와 사상들을 보다 일관성있게 독자들에게 소개해 주고 있으며 이 책만으로 알수 없는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상황과 사상적 배경들을 설명해주고 있다. <옥중수고>를 읽지 못한 나로서는 그람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본문 곳곳에 주석을 달아 놓아 <옥중수고>의 부분들을 인용하고 이탈리아의 당시 상황과 인물들을 소개하는 노력은 이 책을 읽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때로 주석이 사족이 되어 가독성에 방해를 주고 짜증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지만 이 책의 주석은 거슬리지 않고 꼼꼼히 읽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파시스트들의 강요된 고립 속에서 그는 혁명의 성공에 버금가는 가장 활발한 지적, 문학적 성취를 이룩해 낸 것이다. 무솔리니 정권에 의해 사고를 멈추도록 유배되었지만 극한 상황에서 오히려 빛나는 한 인간의 영혼을 보여주고 있다.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물론 그 제목과 상황에서 그람시에게 빚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면서도 개인에 대한 보이지 억압과 통제, 사회 현상과 정치 제도에 대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채 우리는 21세기를 맞이했다. 정답이 있을 수 없다는 논리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지켜낸 한 인간의 숭고한 삶에 고개가 숙여진다. 

   ‘헤게모니’라는 개념를 통해서만 만나던 그람시의 모습들은 또다시 내 삶의 자세와 태도를 돌아보고 반성하게 하는 반면교사가 되었다. 로망롤랑의 영향을 받아 자주 반복했던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라는 말은 그가 상황을 견뎌낼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금언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람시가 남긴 위대한 사상보다 ‘사상의 종점은 행동이다’라고 말한 J. 네루의 말처럼 온몸으로 그의 전 생애를 통해 보여준 삶이 모습이 더 위대해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람시의 생애가 보여준 한 마디를 기억해 본다.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2005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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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교육과 거짓말
노암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아침이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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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암 촘스키(Noam Chomsky)의 이름을 처음 들어본건 대학 1학년 언어학 개론 시간이었다. 변형생성문법에 관련된 그의 이론을 처음 접하며 단순히 언어학자로의 명성만을 익혔다. 그러나 미국의 살아있는 지성으로 그의 저서들이 말하는 것은 우리들 현실의 이면에 숨어있는 추악한 얼굴들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처럼 그는 언어를 연구하는 일이 대학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론적 학문 탐구의 영역으로만 머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우리들 존재 양식의 문제이며 눈을 가리고 보이지 않도록 숨겨놓은 진실들을 양심의 소리에 맡겨 소리 높여 외친다.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은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길들이기 교육을 넘어서와 2장 민주주의와 교육 두 장은 이 책의 편집자인 마세도와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3장부터 5장까지는 마치 현실의 정치와 언론을 신랄하게 비판한 사회과학 서적처럼 읽혀진다. 그러나 1, 2장에 촘스키의 교육관을 이해했다면 3~5장이 덧붙은 이유도 쉽게 짐작이 될 것이다.

  촘스키의 책은 신선하다. 세상을 보는 시각에 변화를 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육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제의 군국주의식 근대교육에서 출발한 학교 제도가 보여주는 불합리와 모순을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교육을 통해 우리가 세상을 보는 눈은 길들여졌고, 그런 조작을 정부가 주도하고 언론이 뒷받침했다는 것이 촘스키의 주장이다. 신랄하며 통쾌하다. 누구에게 한방 먹인 기분이 아니라 짜증스러움과 답답함을 누군가 대신 그것도 영향력 있는 사람의 입을 통해 대신 듣는다는 것은 시원한 일이다.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당연히 받아들여야하는 것처럼 유행이 되어버린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자본주의의 극한을 보는듯하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노동 유연성에 대한 경고와 국적 불명의 투기 자본들이 보여주는 마수를 우리는 지금 경험하고 있다. 교육 분야에서는 ‘교육 개방’이라는 미명아래 외국 대학의 분교 설립과 교원들의 자질을 문제삼아 미국식 계약제로의 전환까지 거론될 정도가 되었다. 물론 교육의 형식적인 틀과 제도적 측면은 논외가 될 수도 있으나 형식은 내용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촘스키는 외친다. 민주교육은 강요가 아니라 실천이라고. 바로 교육의 현장,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보다는 스스로 깨우치게 하는 교육을 하라는 것이 촘스키의 주장이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들을 - 특히, 정부와 언론 - 제대로 파악하고 비판적 안목을 길러주는 역할을 해야하는 곳이 학교다. 그것이 학교의 기능이다. 우리의 교육 현실을 돌아보면 암담한 한숨만 나온다. 그래도 힘겹지만 꿋꿋하게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2005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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