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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보낸 편지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린 로너 엮음, 양희정 옮김 / 민음사 / 2000년 10월
평점 :
절판
곱추에 사자머리(윤택의 머리를 연상하면 되겠다)를 하고 안경너머 명징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그람시의 사진은 체 게바라의 사진만큼 인상적이다. 정호승의 ‘서울의 예수’에 실려있는 사진 속 그의 눈빛을 보고 섬뜩했던 기억이 있다. 주관적 느낌이겠지만 세상에 대한 그의 시선은 송곳처럼 날카롭게 보였고 꽉다문 입술은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듯 했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사진도 그의 삶과 사상만큼 선명하고 확신에 찬 모습이다.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설하고 파시즘에 대항하여 무솔리니의 감옥에서 병과 싸우며 정신 투쟁으로 남은 여생을 보낸 위험한 지식인 그람시는 행복했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11년간 감옥에서 그는 <옥중수고>와 <감옥에서 보낸 편지>라는 양대 저작을 남겼다.
“마르크스라는 지도 위에 상부 구조의 자리를 마련한 거대한 대륙”이라는 옮긴이의 말이 결코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다. 처형 타니아에게 보낸 그의 편지들 곳곳에서 발견되는 역사와 사회에 대한 비판적 견해와 크로체를 통한 견해들은 그람시의 독톡한 세계관을 보여준다. 아내 줄리아와 두 아들 델리오, 줄리아노에게 보내는 편지들은 그람시의 인간적인 면을 드러낸다.
린 로너가 엮은 이 책은 다소 긴 ‘서문’이 붙어 있다. 서문에서 로너는 그람시의 생애와 사상들을 보다 일관성있게 독자들에게 소개해 주고 있으며 이 책만으로 알수 없는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상황과 사상적 배경들을 설명해주고 있다. <옥중수고>를 읽지 못한 나로서는 그람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본문 곳곳에 주석을 달아 놓아 <옥중수고>의 부분들을 인용하고 이탈리아의 당시 상황과 인물들을 소개하는 노력은 이 책을 읽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때로 주석이 사족이 되어 가독성에 방해를 주고 짜증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지만 이 책의 주석은 거슬리지 않고 꼼꼼히 읽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파시스트들의 강요된 고립 속에서 그는 혁명의 성공에 버금가는 가장 활발한 지적, 문학적 성취를 이룩해 낸 것이다. 무솔리니 정권에 의해 사고를 멈추도록 유배되었지만 극한 상황에서 오히려 빛나는 한 인간의 영혼을 보여주고 있다.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물론 그 제목과 상황에서 그람시에게 빚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면서도 개인에 대한 보이지 억압과 통제, 사회 현상과 정치 제도에 대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채 우리는 21세기를 맞이했다. 정답이 있을 수 없다는 논리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지켜낸 한 인간의 숭고한 삶에 고개가 숙여진다.
‘헤게모니’라는 개념를 통해서만 만나던 그람시의 모습들은 또다시 내 삶의 자세와 태도를 돌아보고 반성하게 하는 반면교사가 되었다. 로망롤랑의 영향을 받아 자주 반복했던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라는 말은 그가 상황을 견뎌낼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금언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람시가 남긴 위대한 사상보다 ‘사상의 종점은 행동이다’라고 말한 J. 네루의 말처럼 온몸으로 그의 전 생애를 통해 보여준 삶이 모습이 더 위대해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람시의 생애가 보여준 한 마디를 기억해 본다.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2005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