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등은 오래가지 못한다 - 조재도의 교육 에세이
조재도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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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능력을 계량적으로 측정하는 모든 시험에 반대한다. 최근에는 벌어지는 반역사적이고 반인권적인 교육 행태는 울분을 참을 수 없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일제고사를 실시하다니 - 21C 대한민국은 시대를 거슬러 살고 있다.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 즐기면서 바라보기만 해야 할까?

  내가 가장 혐오하는 것은 인간을 한 줄로 세우는 것이다. 성적이라는 숫자로 학생을 평가하고 그것이 전부가 되어버리는 세상이 과연 정상인지 묻고 싶다. 토마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정상과학의 패러다임을 이야기했다. 패러다임이라는 용어가 이제 일상적으로 사용된다. 교육에서 특히 학교 공교육에서 추구하는 이념과 목적은 발전해 왔는지 묻고 싶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일등부터 꼴찌까지 줄 세우는 숫자 놀음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 것일까? 하워드 가드너의 다중지능 이론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간의 지능을 여덟 가지로 분류하면서 각각의 지능은 독립적이라고 주장했다. 수학을 못하는 학생이 자연친화적 지능이나 대인관계 지능이 뛰어나서 나름의 분야에서 최고의 재능을 발휘할 수도 있다. 우리의 교육 현실은 꼼짝 마라! 일단 국영수라는 삼발이를 굳건히 세워놓고 이야기하자는 논리이다.

  교육에 관해서라면 나름대로 모두가 전문가이고 철학과 가치관이 뚜렷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런 신념과 믿음들이 우리 교육이 지향해야 하는 올바른 방향인가? 해법은 제각각이고 현장에서 혹은 외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교육의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도 만만치도 않다. 대입 제도의 개선의 초, 중등 교육 환경 개선의 키워드라고 말할 수 있지만 과연 대입제도가 줄세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대가 올 수 있을까?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학생들을 선발해서 대학교육을 통해 우수하고 각자의 분야에서 재능있는 사람으로 교육하겠다는 자세가 되어 있는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자괴감과 모순 투성이의 현실은 참담하기만 하다.

  그것은 단순히 개인과 학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고민하고 합의해야 가능한 교육적 토대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필요성에서 비롯된다. 전교조 합법화 시절 해직교사였던 조재도 선생님이 다시 학교에 돌아와 오랜만에 담임을 맡으면서 써내려 간 교육 에세이 <일등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단숨에 한 호흡으로 읽힌다. 1년간의 담임 기록장에 불과한 이 책은 특수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의 시선을 접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교사라는 직업이 갖는 특수성, 공교육에서 담임의 역할과 애환을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현장감이다. 생생하게 전달되는 학교 교육 현장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 준다. 지역에 따라 학교급별로 상황이 다르겠지만 조재도 선생님이 느끼는 학교와 모순들은 일반적인 수준에서 모든 학교가 겪는 공통된 문제점이기도 하다.

  사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비판적인 시선은 다르다. 한 줄로 세우는 교육에서 일등은 참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일등은 얼마나 불안하고 위태로운 자리인가. 일등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제목은 우리의 교육 현실을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모든 학생이 제각기 다른 분야에서 일등을 할 수는 없을까? 쉽지 않지만 우리의 고민은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교사의 역할과 기능은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다만 좋은 교사가 되려는 노력은 교사마다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아니, 좋은 교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조차 제각각일 것이다. 자신이 그려놓은 훌륭한 교사상에 부합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교사들이 많겠지만, 그려놓은 상(象) 자체에 문제가 있다면 우려할 만한 노릇이다.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수준에서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인식이 아니라 문제를 제대로 지적하고 합리적을 개선해야겠다는 생각조차 교사들에게는 부족한 것이 아닐까? 지극히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주장과 과정들이 부정적인 시각으로 사물을 본다고 한다면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다.

좋은 교사는 지금 여기 그 아이의 존재 자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다. - P. 128

  책 전체를 통해 가장 훌륭한 문장이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이겠지만 존재 자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교사, 알기 위해 노력하는 교사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살아오면서 쌓여온 수많은 편견들과 학생이라면 이러해야 한다는 완고한 도덕적 틀과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보수적 관념들을 가진 교사를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모범생으로서 역할에 충실해서 체제 순응적인 교사 집단의 문제점은 내부적인 모순조차 해결이 되지 않는 상태이다. 전문가 집단이라고 하지만 상명하달, 교장 교감에 의한 전횡 등 구태연한 모습들은 20대의 교사와 60대의 관리자가 공존하는 학교의 가장 큰 딜레마이다. 학교가 변하기 위해서는 교사가 변해야 하고 교사가 변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에 대한 태도와 미래에 대한 안목과 열린 마음과 상대방을 인정할 줄 아는 똘레랑스의 정신이 필요하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21C 교육 현장을 고스란히 기록하고 있다. 사람을 다루는 직업인 교사는 성과를 쉽게 계량화 할 수 도 없고 측정하기도 힘들다. 그들이 변해야 학교가 변하고 학생이 변하고 세상이 변한다. 답답한 우리의 교육현실을 통해 무언가 변화의 필요성과 개혁의 단초를 확인했다면 이 책은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어느 교사의 푸념이 아니라, 일년 동안의 학급 경영 보고서가 아니라 우리 교육이 안고 있는 수만은 문제점과 학교라는 완고한 틀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공교육의 현장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오늘도 대한민국의 아이들은 아침에 눈만 뜨면 학교로 질주한다. 그러나 아무도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됐어.”라고 서태지처럼 외치지 못하고 있다.


08031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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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3-13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 문장...며칠전 저희 아이가 일을 겪었기에 더욱 사무치네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다는 표현 제 맘에 쏙 들어요.

sceptic 2008-03-13 22:50   좋아요 0 | URL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는 교사가 훨씬 많겠죠.

비로그인 2008-03-13 23:07   좋아요 0 | URL
그건 그렇지요.
저도 지금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제 아이들에게 닥쳐있기 때문에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제껏 겪어본 바에 의하면 저 어렸을 때보다는 많이 좋아졌다고 보거든요.
최근에 저의 아이가 겪은 일 때문에 분노해서 위와 같은 댓글을 달게 된것이구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다는 표현은 얼마전 옆지기에게도 들었기에 무슨 생각으로 그리 썼는지는 대충 감이 와서 그랬구요.
물론 제 생각과 다 같지는 않지만 멀리서 볼 때와 내 자식이 그 곳에 있다 생각할 때는 많이 다르지요.
학기초에는 더 예민해지고, 특히 1학년일 때는 더욱 예민해져서 그럴게요.
제가 지금 그러니까요.
두서없는 글 써버렸네요.

sceptic 2008-03-14 21:00   좋아요 0 | URL
처음 공교육에서 아이들이 받는 인상과 부모들이 받는 충격(?)이 이런대도 현실은 쉽게 변하지 않고 상식밖의 교사들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랍기는 합니다. 혼자만의 노력이 아니라 모두의 합의와 노력이 요구되는 거대한 장벽을 마주한 기분이시겠죠.

쉽게 위로하거나 대안을 제시할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하나씩 다른 학부모님들과 함께 고쳐 나가야겠죠. 힘내세요!
 
두뇌를 알고 가르치자
김유미 지음 / 학지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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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두뇌에 관한 호기심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들에 대한 것만으로도 신의 영역을 들여다 본 듯이 신기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모두 알고 싶은 욕심도 없다. 특히, 물질적인 뇌의 구조와 영역을 나누고 각각의 역할을 실험했던 수많은 과정들 때문에 의학의 발달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심리학이나 교육학 등 인류의 문명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알고 있는 것과 알고 싶은 것 사이에는 늘 ‘문’이 존재하는 법이라고 한다. 후회할지언정 인간은 늘 그 문고리를 잡아당기고 만다.

  인지 심리학이나 교육학의 경우 기초 학문 분야의 성과를 바탕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인지 신경 과학의 경우 뇌전도나 MRI 촬영이 블랙박스를 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어쨌든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원을 파악하는 것은 뇌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그 한 축을 형성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몸과 영혼을 관장하는 뇌의 기능을 안다는 것은 인간의 학습과 행동과 반응 등 많은 것들을 설명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교육 분야에서 두뇌 기반 학습에 관한 관심과 연구는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학지사에서 2002년에 나온 김유미의 <두뇌를 알고 가르치자>는 3쇄가 발행되었지만 앞으로도 계속 많은 독자와 만나게 되었으면 좋겠다. 단순히 두뇌에 대한 관심이나 교육에 대한 흥미로 접근하는 독자들에게도 권할 만하지만 잘못된 상식과 모르고 저지르는 아이들에 대한 실수들을 줄이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 모두에게 좋은 안내서가 될 수 있겠다.

  뇌에 관한 기본적인 구조와 기능은 물론이고 연령별 두뇌 발달과 연구 성과들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는 이 책은 궁극적으로 교육에 관한 많은 시사점을 전해 준다. 특히 아동의 다양성에 관해 가드너의 ‘다중지능이론’이나 풍요로운 경험의 중요성, ‘주의注意’, ‘정서’, ‘음악’ 등과 관련된 이론과 교육의 적용에 관한 이야기들은 귀 기울여 들을만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사실들은 원인과 대책을 모를 때가 많다. 원인을 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의 경우 그 해법과 대안은 자연스럽게 찾아지기 마련이다. 예전부터 그래왔다는 막연함이나 이유를 알 수 없는 막막함으로부터 뇌에 관한 연구는 인간을 밝은 세상으로 나오게 해 주었다. 다양한 과학 기술의 발달과 지적 호기심의 결과 불과 몇 십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을 손쉽게 알아내고 있다. 단순한 누적적 지식의 양으로 인간의 문명을 판단할 순 없지만 우리의 미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적응하기 힘든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뇌에 관한 연구도 이와 같이 계속될 것이고 그 성과 또한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러나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돌아 볼 필요가 있다. 부모가 아이들을 키우고 대하는 태도가 어떠하며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가르치는 궁극의 것들이 무엇인가에 대한 반성도 필요하다. 두뇌 기반 학습이 효율적이라면, 그것을 수업에 활용할 때 놀랄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면 분명 반길만한 일이다. 하지만 교육의 목적과 사회의 변화에 따른 교사들의 태도 변화와 궁극적인 지향점에 대한 반성이 없다면 뛰어난 전술들은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만다.

  훌륭한 전략에 대한 적절한 논의와 관심 그리고 효과적인 전술들이 결합될 수 있는 풍토를 상상해 본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들이 모두 다 교육에 반영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맹목적인 경쟁과 가진자를 위한 교육에는 근본적인 대책과 해결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원론적인 수준에서 ‘잘해보자’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3불 정책을 흔드는 몇몇 대학들의 배타적 이기주의와 0교시 부활에 관한 소식들이 뉴스 일면을 장식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교육을 위시한 모든 정책들은 언제나 기득권 보호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고 세상은 불온하고 검은 그림자를 굳이 숨기지도 않는다. 번지르르한 말과 명분뿐인 구호들만 난무하는 세상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지. 신동엽의 말처럼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07041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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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4-12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너무 잘 쓰셔서 모시고 갑니다. 모시고 가도 되죠. 행복하세요.

비로그인 2007-04-13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멩이만 남기고 껍데기가 가는 세상은 언제나 올지..
교육에 관한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고 답도 없고 이야기 끝에는 꼭 한숨이 섞입니다.

sceptic 2007-04-15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antaclausly님 쓸데없는 글 가져가셔도 물론 상관없죠. 늘 건강하세요.

承姸님, 답이 없어도 끝없이 답을 찾아야 하는 것이 현실이죠. 내일부터 또 찾아봐야죠...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
노암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아침이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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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암 촘스키(Noam Chomsky)의 이름을 처음 들어본건 대학 1학년 언어학 개론 시간이었다. 변형생성문법에 관련된 그의 이론을 처음 접하며 단순히 언어학자로의 명성만을 익혔다. 그러나 미국의 살아있는 지성으로 그의 저서들이 말하는 것은 우리들 현실의 이면에 숨어있는 추악한 얼굴들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처럼 그는 언어를 연구하는 일이 대학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론적 학문 탐구의 영역으로만 머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우리들 존재 양식의 문제이며 눈을 가리고 보이지 않도록 숨겨놓은 진실들을 양심의 소리에 맡겨 소리 높여 외친다.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은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길들이기 교육을 넘어서와 2장 민주주의와 교육 두 장은 이 책의 편집자인 마세도와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3장부터 5장까지는 마치 현실의 정치와 언론을 신랄하게 비판한 사회과학 서적처럼 읽혀진다. 그러나 1, 2장에 촘스키의 교육관을 이해했다면 3~5장이 덧붙은 이유도 쉽게 짐작이 될 것이다.

  촘스키의 책은 신선하다. 세상을 보는 시각에 변화를 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육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제의 군국주의식 근대교육에서 출발한 학교 제도가 보여주는 불합리와 모순을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교육을 통해 우리가 세상을 보는 눈은 길들여졌고, 그런 조작을 정부가 주도하고 언론이 뒷받침했다는 것이 촘스키의 주장이다. 신랄하며 통쾌하다. 누구에게 한방 먹인 기분이 아니라 짜증스러움과 답답함을 누군가 대신 그것도 영향력 있는 사람의 입을 통해 대신 듣는다는 것은 시원한 일이다.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당연히 받아들여야하는 것처럼 유행이 되어버린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자본주의의 극한을 보는듯하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노동 유연성에 대한 경고와 국적 불명의 투기 자본들이 보여주는 마수를 우리는 지금 경험하고 있다. 교육 분야에서는 ‘교육 개방’이라는 미명아래 외국 대학의 분교 설립과 교원들의 자질을 문제삼아 미국식 계약제로의 전환까지 거론될 정도가 되었다. 물론 교육의 형식적인 틀과 제도적 측면은 논외가 될 수도 있으나 형식은 내용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촘스키는 외친다. 민주교육은 강요가 아니라 실천이라고. 바로 교육의 현장,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보다는 스스로 깨우치게 하는 교육을 하라는 것이 촘스키의 주장이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들을 - 특히, 정부와 언론 - 제대로 파악하고 비판적 안목을 길러주는 역할을 해야하는 곳이 학교다. 그것이 학교의 기능이다. 우리의 교육 현실을 돌아보면 암담한 한숨만 나온다. 그래도 힘겹지만 꿋꿋하게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2005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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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교육혁명
강수돌 지음 / 그린비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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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가 시작되었고, 새천년에 대한 기대와 흥분으로 사람들은 참 많은 희망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변화의 조짐조차 보이지 않는 유일한 분야가 있다면 바로 교육 분야일 것이다. 지나치게 부정적 견해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혁명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가당찮은 기대는 아니더라도 선순환의 고리는 마련되어야 하지 않는가. 바야흐로 21세기에 접어들었는데 말이다. 갑자기 21세기 타령을 하는 이유는 교육 문제에 관한한 우리는 아직도 19세기 초 현대 교육이 시작된 시절보다 달라지지 않았다는 자괴감 때문이다.

  아직도, 19세기 교육환경에서 20세기 교사들이 21세기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말이 유효한가?

  학생과 학부모와 교사를 교육의 3대 주체로 본다. 그들의 의식, 특히 기성세대인 학부모와 교사의 교육에 대한 입장과 틀이 다를 때 문제가 발생한다. 물론 학생은 그 사이에서 훨씬 더 큰 혼란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현실(?)을 고려하여 3자 합의(?)하에 ‘인류대 진학’이라는 지상 최대의 목표로 모두가 일로 매진한다.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면 선행학습이 시작되고 영어와 수학만이 살길이며 문학은 입시 주요 과목으로 떠오른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현실 속에 우리는 살고 있을까?

  어느 블로그였는지 미니 홈피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자녀를 둔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들이 자신이 졸업한 대학보다 당연히 좋은 대학에 진학해야 했으면 소박한(?) 바램을 적었고 이웃들은 그렇게 되길 바란다는 덕담을 댓글로 달아 놓은 걸 본 적이 있다. 그 후로 그곳에 발길을 끊었다. 하지만 그걸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아무도 교육문제로부터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 입시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교육혁명>은 잔잔한 파문만을 일으킨다. 그것은 모두가 동참하지 않기 때문이다. 희망적으로 본다면 이제 서서히 그 파문이 물결이 되어 파도가 되고 해일이 되어 큰 물줄기를 바꿀 수 있기를 우리 모두는 바란다. 그러나 내가 먼저 실천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다. 정말 어려운 것은 실천의 문제다. 모두가 짐싸들고 시골로 산으로 들어가자는 주장이 아님을 안다. 주변에서 할 수 있는 일들부터 바꾸자는 이야기다. 사소한 일이다. ‘인류대 강박증’ 벗어나기, ‘옆집 아줌마’ 조심하기, 삶의 목표와 과정을 다시 생각하기.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바꾼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힘이 합해지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고, 기득권을 포기해야 하며, 장기적인 안목으로 교육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전제를 내포하고 있다. 단순하고 쉬우면서도 어려운 문제다.

  생태적인 삶을 살며 자연의 소중함을 깨우치기 보다는 노동 생산성의 관점에서 ‘인재’로 육성되는 아이들을 입시지옥으로 몰아넣고 남들과의 경쟁에서 앞서고 좀더 비싼 집과 보다 높은 지위에 올라 인생의 성공이라는 달콤함을 맛보게 해주고 싶은 것이 모든 부모의 바램일까?

  우리는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하며 어떻게 가르쳐야 하고 어떻게 살아가기를 바라는가. 어디에도 답이 없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책의 부제처럼 ‘엄마 아빠가 달라져야 교육이 살아요!!’는 처절한 절규처럼 들린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교육문제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삶의 가치관과 태도 지향점이 달라져야 하며, 노동과 환경 문제와 더불어 대한민국의 가장 뜨거운 감자다. 내 아이의 문제가 되면 태도가 변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은 현실을 반영한다.

  “나는 개인의 자유나 개성이 억압되는 국가 발전이나 민족중흥은 기득권층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라 본다.”는 강교수의 선언이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발전이 사회와 국가의 발전이라는 평범한 진리는 노동과 생산수단으로 바라보는 관점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발전이라는 것이 개인의 자유와 개성이 억압되지 않으면서 사회와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방법이 쉽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개인은 공동체 발전의 전제가 되고 공동체는 개인 발전의 전제가 되는 사회, 이것이 바람직한 미래 사회일 것이다.”라는 말이 꼭 우리가 꿈꾸는 미래가 아닐까 싶다. 그런 교육을 위해 나는, 우리는 노력하고 있는가? 우리의 아이들을 그렇게 키울 수 있는가?

  “당신이 만약 ‘당신은 인재’라는 말을 들으면 모욕인 말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는 부모라면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내게 이 책은, 교육문제에 관한 그 많은 선언들과 각론들에 대해 냉소적인 시선과 과격한 접근 방법을 선택했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게 했던 책이다. 질 높은 노동 생산수단의 관점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을까? 살아가는 과정의 행복과 삶의 질적인 측면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치고 싶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을까? 그런데도 우리는 왜 현실(?)을 핑계로 그렇게 키우지 못하는가? 나로부터의 혁명과 작은 것들로부터의 변화가 이렇게 어려운가? 내가 변하고 사회가 달라지면 교육도 아이들의 미래도 달라진다. 지금 우리가 아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무엇인가?


200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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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나서면 딸의 인생이 바뀐다 - 사이가 멀어지지 않고 딸에게 좋은 아빠 되는 법
장경근. 정채기 지음 / 황금부엉이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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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나서도 딸의 인생은 바뀐다. 90분만에 책장을 덮을 수 있는 책은 많지 않다. 분량이 적거나 내용이 부실하거나 참을 수 없을만큼 지루해져 다음 줄로 다음 장으로 자꾸 눈이 넘어가서 속도가 배가되고 되새김질 같은건 아예 생각도 하지 않은 책이면 가능하다. 200페이지 분량의 <아버지가 나서면 딸의 인생이 바뀐다>는 책에 대한 정보 없이 ‘리뷰 신청 도서’에 이름을 올린 탓이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런 아버지는 없다. 비교급이 불가능한 것이 부모이며 관계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무엇과 무엇을 비교한다는 것은 돈의 수치화 계량화 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어떤 딸이냐에 따라서, 아니 어떤 자식이냐에 따라서 훌륭한 아버지의 모습은 다르게 기억될 것이고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소통하고 살아간다.

  이 땅의 딸들은 분명 아들과 다른 모습으로 키워졌고 길들여져 왔으며 출발을 달리했고, 한정된 역할과 능력과 상관없이 규정되어왔던 과거를 지닌 채 현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딸과 아들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의 문제다. sex라는 생물학적 성의 차이가 아니라 gender라고하는 사회문화적 성역할의 차이를 간과하고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동양적 유교적, 아니 한국적 가부장적 문화가 빚어낸 왜곡된 차별부터 극복되는 것이 마땅하다. 물론 여성부가 설치되고 양성 평등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고 있는 지금 이 시대는 전시대에 비해 상당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딸에게 뿐만 아니라 아들에게 그리고 아내에게도 중요하다. 특히 딸에게 더 중요하지는 않다고 본다. 물론 아들과는 다를 것이다. 이성 부모의 역할모델에 따라 배우자의 선택에도 결정적 역할을 미칠 것이고 남성 전체에 대한 인식도 다르게 결정될 것이다. 기본적인 생각에 누가 동의하지 않겠는가.

  다만 무언가 읽을 거리의 형식을 취하게 되면 얘기가 좀 달라져야 한다고 믿는 것이 개인적인 판단이다. 유형별로 항목별로 번호를 붙혀 ‘좋은 아버지 10계명’이나 ‘딸과 아버지의 관계가 돈독해지는 법’을 실천하라고 마치 강령처럼 표지 뒤쪽에 조잡한 삽화를 곁들여 부록으로 만들어 놓는다고 해서 달라지지는 않는다. 차라리 실천 사례 중심의 감동을 선물하는 방법이 좋지 않았을까 싶다. 넘쳐나는 방법론 속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인생을 성공하는 일곱가지 방법’, ‘생산적 책읽기 50가지 방법’, ‘논문 잘 쓰는 방법’에서부터 심지어 ‘합법적으로 세금을 안내는 110가지 방법’에 이르기까지 가히 방법의 천국 속을 헤매고 있다. 읽으면 정말 그렇게 되나 싶다. 나는 여전히 책속에 길이 있다고 믿는다. 그 길은 연금술의 비법을 몇 줄의 항목화된 방법으로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 스스로 깨우치고 찾아내야 하는 사색의 길과 방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실제 사례 중심의 감동을 전하거나 차라리 이론적 접근 방법을 제시해서 현실 생활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하도록 해보는 방식은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책의 내용이 부적절하거나 진실과 거리가 멀다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만한 내용과 방법들과 가득하다. 하지만 그게 문제다. 당연한 이야기를 구체화 시킨 것일 뿐.

  모든 아버지는 시간이 없고 바쁘며 근엄해야 한다는 과거의 이미지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깨지고 있다. 주 5일제의 여파로 여유 시간은 넘쳐나고 가족은 삶의 목표이자 희망이며 그 관계는 세대를 뛰어넘어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 단위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그것이 지나쳐 가족 이기주의로 비쳐질 정도가 되었다. 아이들은 부모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부모의 소유물은 아니다. 그 관계에 있어서도 적당한 거리두기가 필요하며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줄 수 있는 부모 스스로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이 책에서 여러번 묻고 있다. ‘자녀가 당신같은 사람이 되기 바랍니까?’, ‘자녀가 당신같은 사람을 만나기를 원합니까?’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부모가 되도록 내가 먼저 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직업과 경제적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세상이 달라져도 아이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 순수한 본성이 변하는 것은 부모의 영향이며 사회의 가르침이다. 내 자녀가 아닌 우리 모두의 아이들을 위한 고민도 아울러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아버지가 나서 딸의 인생을 바꾸기 전에 딸의 인생이 어떠했으면 좋겠는가를 먼저 고민하는 일이 더 어렵고 소중할 것이다. 그것이 결정되면 좋은 관계, 행복한 방법들이 다양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2005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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