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한국 여성의 역사
박수정 지음 / 아름다운사람들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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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여성이라는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방향성에 따라 다르게 마련이다. 특히 ‘한국여성’이라고 범위를 한정시키고 보면 참 할 말이 많아 보인다. ‘일하는 여성’으로 범위를 한정시키고 보면 어느정도 가닥이 잡힌다. <숨겨진 한국여성의 역사>는 일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다. 더 구체적으로 70년대 초창기 민주노조의 기틀을 마련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다. 산업화 사회의 숨은 일꾼으로 자리매김하고 그 역할과 위상을 인정받아 마땅한 이 땅의 ‘공순이’들의 이야기다.

  가난은 한 개인의 잘못도 아니고, 복권처럼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사회적 계급도 아니다. 해방이후 우리의 정치 현실을 들여다보면 울분을 참을 수 없다. 잘못된 과거의 청산과 반성이 없이 진행형의 과거를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 과정에서 소외된 민중과 그들의 딸들은 어떻게 살아왔나? 멀지 않은 내 어머니 세대의 일이고 보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눈물이 흘렀다.

  ‘구로노동자문학회’ 상근자로 일하기 시작한 박수정의 글들이 다소 감성에 호소하는 측면이 있으나, 박순희, 이철순, 이총각, 정향자, 최순영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과거의 추억담이나 지나간 옛노래가 아닌 현재진행형의 역사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때보다 나아졌다는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래도 희망은 있다. 그들이 노둣돌과 디딤돌이 되어 이만큼 진보했고 발전했으며 앞으로도 조금씩 나아질거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똥물 투척 사건으로 전국을 뒤흔든 동일방직 노동조합 위원장 이총각. 신민당사 점거농성으로 민주화의 불씨를 당겨 반유신 정치투쟁과 부마행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끝내 10․26으로 정권의 종말을 보았던 YH무역 노조 지부장 최순영. 원풍모방 사태의 주역 노동조합 부지부장 박순희. 한국여성 노동자회 협의회위원장 이철순. 전남제사 노동조합 위원장 정향자.

  섬유노조와 관련된 한계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7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 노동운동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산 증인들이다. 이들은 여전히 민노당의 원내 진출로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최순영을 비롯하여 우리 사회 곳곳에서 아직도 여성 노동자들의 권익과 사회적 약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일로 평생을 보내고 있다. 서슬퍼런 유신 독재의 칼날아래 개인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해 싸웠던 이들의 모습들이 더욱 감동적이다. 그후 80년대 학생 운동과 섞이며 겪었을 갈등과 본질적 문제의 대립은 차치하고서라도 온몸으로 싸워온 삶의 모습들이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못 배우고 가난한 설움이 개인의 무능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 모순과 자본의 논리로부터 출발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언제나 혼자가 아니고 우리가 되어 살아가는 모습들은 나를 돌아보게 한다. JOC(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역할이 곳곳에서 보인다. 힘없고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더불어 함께 걸어 갈 수 있는 길에 등불을 밝혀 주는 일이 진정한 종교의 몫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내 어머니와 누이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쉽지 않은 문제가 된다. 21세기를 여성, 환경, 문화의 시대라고 단언하는 사람도 있다. 미래를 준비하는 화두로서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우리들의 문제로서 여성의 문제는 곧 나의 문제 우리의 문제가 되어 있다. 여성의 가정내 역할과 사회적 역할에 대해 지루한 이론과 공방들로 시간 보내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현실속에서 구체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방법들이 제시되고 각 사업장에서 권익과 인권측면의 여성 문제를 모두가 고민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믿고 있다. 여성 문제라는 용어가 사라지는 그날까지 많은 관심과 노력이 생활속에서 실천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처음부터 길은 없었다. 한사람이 가고 두람이 가고 여러 사람이 가다보면 길이 생기는 것이다. 노신의 글을 보며 인상 깊게 가슴에 새겼던 말이다. 맨처음 그 가시밭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용기. 그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물론 혼자만의 용기도 아니다. 어깨 겯고 함께 걸어갈 누군가가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 모두가 꿈을 꾸면 그건 꿈이 아니라 곧 현실이 되듯이 말이다. 아직 살아 계신 분들에 대한 삶에 경의를 표하며 이땅에서 생이 다하는 날까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시길 빈다.


20050331
여성이라는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방향성에 따라 다르게 마련이다. 특히 ‘한국여성’이라고 범위를 한정시키고 보면 참 할 말이 많아 보인다. ‘일하는 여성’으로 범위를 한정시키고 보면 어느정도 가닥이 잡힌다. <숨겨진 한국여성의 역사>는 일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다. 더 구체적으로 70년대 초창기 민주노조의 기틀을 마련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다. 산업화 사회의 숨은 일꾼으로 자리매김하고 그 역할과 위상을 인정받아 마땅한 이 땅의 ‘공순이’들의 이야기다.

  가난은 한 개인의 잘못도 아니고, 복권처럼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사회적 계급도 아니다. 해방이후 우리의 정치 현실을 들여다보면 울분을 참을 수 없다. 잘못된 과거의 청산과 반성이 없이 진행형의 과거를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 과정에서 소외된 민중과 그들의 딸들은 어떻게 살아왔나? 멀지 않은 내 어머니 세대의 일이고 보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눈물이 흘렀다.

  ‘구로노동자문학회’ 상근자로 일하기 시작한 박수정의 글들이 다소 감성에 호소하는 측면이 있으나, 박순희, 이철순, 이총각, 정향자, 최순영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과거의 추억담이나 지나간 옛노래가 아닌 현재진행형의 역사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때보다 나아졌다는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래도 희망은 있다. 그들이 노둣돌과 디딤돌이 되어 이만큼 진보했고 발전했으며 앞으로도 조금씩 나아질거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똥물 투척 사건으로 전국을 뒤흔든 동일방직 노동조합 위원장 이총각. 신민당사 점거농성으로 민주화의 불씨를 당겨 반유신 정치투쟁과 부마행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끝내 10․26으로 정권의 종말을 보았던 YH무역 노조 지부장 최순영. 원풍모방 사태의 주역 노동조합 부지부장 박순희. 한국여성 노동자회 협의회위원장 이철순. 전남제사 노동조합 위원장 정향자.

  섬유노조와 관련된 한계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7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 노동운동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산 증인들이다. 이들은 여전히 민노당의 원내 진출로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최순영을 비롯하여 우리 사회 곳곳에서 아직도 여성 노동자들의 권익과 사회적 약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일로 평생을 보내고 있다. 서슬퍼런 유신 독재의 칼날아래 개인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해 싸웠던 이들의 모습들이 더욱 감동적이다. 그후 80년대 학생 운동과 섞이며 겪었을 갈등과 본질적 문제의 대립은 차치하고서라도 온몸으로 싸워온 삶의 모습들이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못 배우고 가난한 설움이 개인의 무능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 모순과 자본의 논리로부터 출발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언제나 혼자가 아니고 우리가 되어 살아가는 모습들은 나를 돌아보게 한다. JOC(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역할이 곳곳에서 보인다. 힘없고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더불어 함께 걸어 갈 수 있는 길에 등불을 밝혀 주는 일이 진정한 종교의 몫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내 어머니와 누이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쉽지 않은 문제가 된다. 21세기를 여성, 환경, 문화의 시대라고 단언하는 사람도 있다. 미래를 준비하는 화두로서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우리들의 문제로서 여성의 문제는 곧 나의 문제 우리의 문제가 되어 있다. 여성의 가정내 역할과 사회적 역할에 대해 지루한 이론과 공방들로 시간 보내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현실속에서 구체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방법들이 제시되고 각 사업장에서 권익과 인권측면의 여성 문제를 모두가 고민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믿고 있다. 여성 문제라는 용어가 사라지는 그날까지 많은 관심과 노력이 생활속에서 실천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처음부터 길은 없었다. 한사람이 가고 두람이 가고 여러 사람이 가다보면 길이 생기는 것이다. 노신의 글을 보며 인상 깊게 가슴에 새겼던 말이다. 맨처음 그 가시밭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용기. 그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물론 혼자만의 용기도 아니다. 어깨 겯고 함께 걸어갈 누군가가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 모두가 꿈을 꾸면 그건 꿈이 아니라 곧 현실이 되듯이 말이다. 아직 살아 계신 분들에 대한 삶에 경의를 표하며 이땅에서 생이 다하는 날까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시길 빈다.


2005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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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생활사박물관 1 - 선사생활관 한국생활사박물관 1
한국생활사박물관 편찬위원회 지음 / 사계절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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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대한 관심과 성찰은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역사가 된다는 당연한 이치에 대해 생각해 본다. 연속적인 세계관에서 보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구분하는 기준과 시기 자체가 무의미하다. 공간 개념과 더불어 시간 개념에 대한 인식 자체가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구의 역사를 1년으로 가정하면 인류가 발생한 것은 12월 31일 해질 무렵 오후 다섯시쯤 된다.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의 탄생은 해가 바뀌기 5분 전 쯤이다. 영겁의 시간 속에 한 인간이 인생을 고민하는 것은 무한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은 정말 낯간지러운 짓이다.

  시야를 좁혀 인류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와 내 조상의 뿌리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가르치고 배워온 대부분의 역사는 왕조 중심이었으며 영웅 중심이었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기록된 순간들을 되짚어 보는 것은 후손들의 호기심과 의무였으며 기록되지 않은 민중들의 삶과 생활 모습을 유추하는 일은 관심밖의 일로 치부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더 소중하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관심은 당연히 이름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들의 일상이 궁금하다. 영화 제목처럼 ‘생활의 발견’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역사에 관한 수많은 석학들의 견해와 사관에 대한 논의는 물론 중요하다. 역사를 서술하는 관점과 역사에 대한 해석하는 입장은 객관적 사실들에 대한 판단부터 시작해서 천양지차의 견해들이 존재한다. 그 모든 사관도 중요하고 올바른 정리와 비판도 필요하다. 하지만 조금씩 더 관심이 가는 분야는 역사의 주변에 머물러 있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필립 아리에스와 조르주 뒤비가 책임 편집한 <사생활의 역사>는 방대한 분량으로 유럽의 문화와 일반인들의 생활사를 정리하고 있다. 2002년에 새물결에서 번역 출간된 이 시리즈는 1권이 900페이지에 이른다. 읽지 않고 꽂혀 있는 몇 권 안되는 책 중의 하나다. 나의 게으름을 탓할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생활사도 다각도로 조망을 받고 있지만 <한국생활사박물관> 시리즈와 비교할 수 있는 책은 없다고 본다. 미루고 미루다 이제 그 1권을 시작한다. 시간을 핑계삼아 비싼 책 값을 핑계삼아 미루어 온 것을 이제야 구입했다. 지난해 이이화의 <한국사이야기>에 이어 역사에 대한 또다른 시각과 재미를 맛볼 수 있을 것 같다.

  제1권 선사생활관은 처음부터 흥미 만점이다. 기원전 4000년전의 사냥 장면과 서기 2000년 서울의 모습을 대비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 생활관으로 구분되어 있다. 석기의 종류와 쓰임새가 사진 자료와 더불어 꼼꼼하면서 쉽게 설명되어 있다. 수렵과 채집 농경와 장례 등 사실적인 그림과 내용들이 철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훨씬 더 실감나고 흥미롭다. 특별 전시실과 가상 체험실을 통해 선사시대 인류의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기획과 편집에 놀랄 수밖에 없다. 정교한 내용과 자료를 준비하는 것부터 90페이지 밖에 안되는 분량속에 일목요연하고 재미있게 당시 인류의 생활을 중심으로 서술된 이 책은 성인들은 물론 청소년들에게도 흥미있는 역사 접근 방법의 교재로 활용될 만하다.

  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과 안목이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책의 크기와 하드커버, 도판과 내용을 살펴보고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한 권 한 권 각 시대를 ‘생활사’를 중심으로 정리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듯싶다. 반복되는 일상과 보잘것없는 생활들이 모여 문화를 이루고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며 인간이 살아온 시간들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간들을 비교해 보는 재미도 맛볼 수 있다. 가히 빛의 속도만큼 빠르게 진화하고 발달하고 있는 인류의 문명이 주는 문제에 대해서도 당연히 반성하게 된다.

  선사시대와 지금의 인류 중 어느 쪽이 더 행복할까?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인 현생 인류와 지금의 인류는 뇌용량에 차이가 없다. 삶의 목적과 가치가 달랐겠지만 한 번 태어나고 죽어가는 과정 속에서 그들이 느꼈을 자연과 생존의 문제 그리고 행복과 고통의 과정들을 상상해 본다. 과연 지금 우리는 그 때보다 진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시대를 뛰어넘는 이 재밌는 여행을 천천히 오래오래 계속하고 싶다. 그러고 나면 지금 여기 나의 모습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모습이 조금은 어렴풋하게?痴?않을까하는 불가능한 바람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지속되는 책과의 사귐이 지겹지 않도록, 쌓여가는 읽을 책의 목록만큼 살아갈 수 있도록 가장 작은 소망을 져본다.


06010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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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생활사박물관 2 - 고조선생활관 한국생활사박물관 2
한국생활사박물관 편찬위원회(2권) 지음 / 사계절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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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시대 이전, 사람들의 삶에 대한 관심은 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본격적인 정착 생활을 시작했던 우리 조상들이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2000여 년 전 고조선이라 불리는 나라다. 그래서 단기(檀紀)는 2333년을 더해서 사용한다. 올해는 단기 4339년이다. 단군의 실존 여부를 와 고조선의 역사적 의미는 우리 민족의 국가의 기원을 밝히는 일이기 때문에 중요한 일이다. 평양의 위치에 대한 논란도 마찬가지다. 최근 북한 학계에서 단군의 묘를 발굴하고 실존 인물로 인정한 것은 지나친 해석일 수도 있으나 그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로 여겨진다.

  씨족사회에서 부족간의 전쟁을 거쳐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형성된 시기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동기 시대이후 ‘고인돌’의 무덤은 인류의 신산스런 역사를 암시한다.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가 생겨나고 원시 공동체 사회의 평등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한다. 힘에 겨운 노동과 협동으로 거대한 무덤을 세운 사람들은 자발적 노력과 헌신이었을까? 죽음 이후까지 권력을 행사하고 싶었던 위정자들은 많게는 100여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순장하기도 했다. 주거생활과 농경은 점차 고도로 발달했고 청동기는 농경을 위한 도구 사용을 넘어 전쟁과 살상을 위한 무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 책의 의미가 이미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재조명은 물론 일상적인 생활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권력에 관한 이야기와 생성과정은 생략되어 있어 아쉬운 면이 없지 않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넘어선 힘에 대한, 권력에 대한 욕망은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이라고 볼 수 있겠다. 수천 년 간 지속되어온 전쟁과 국가 간 갈등은 피할 수 없는 현실적 요구와 민중들의 생존 때문이 아니다. 한나라에게 패망한 고조선은 이후 고구려와 고려로 그 국가의 명칭이 살아 숨쉬게 된다.

  여전히 민무늬 토기를 만들고 청동기와 석기가 공존했던 농경 중심의 문화가 이어지던 시대였던 고조선은 우리 민족이 세운 최초의 국가라는 의미를 지닌다. 국가는 사람들의 생존권을 보호해주는 일차적인 목적을 지키지 못할 때가 많았다. 전쟁에 동원되기도 하고 삶의 터전이 짓밟히기도 했다. 그렇다면 국가의 존재는 권력자를 위해 복무했던 폭력적인 제도가 아니었을까하는 공상을 해보기도 한다. 전쟁과 살육이 반복되는 가운데 국가의 흥망성쇠는 이어진다. 그렇다고 사람이 바뀌거나 생활의 형태가 국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들이 속한 국가의 명칭만 바뀌어갈 뿐이다.

  직조 기술이 발달하기 베를 짜고 옷을 해 입기 시작했으며 장신구와 치장거리가 만들어지고 과학적인 이성의 혁명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고인돌위에 새겨진 별자리는 기나긴 밤시간 동안 하늘을 바라보며 우주의 신비와 별들의 아름다움을 느낀 결과물이 아닐까. 과학적 영농의 시작은 자연현상의 예측과 대처 방법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연에 속한 부분에서 인간이라는 독립적 개체로서 본격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는 시기였을 것이다. 그때보다 우리의 삶은 더 나아졌을까?

  어떤 면에서 인류는 끊임없는 진보보다 스스로 만들어가는 올가미속에 빠져드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몇 천년 전보다 나아진 것은 물질과 생존의 문제 밖에 없을까? 지금도 물질문명의 혜택과 식량과 생존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엄청난 수의 인류는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잠시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는 많은 사람들의 하루하루가 생활을 만들고 시대를 이끌며 역사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 모두의 오늘이 21세기 대한민국의 역사가 되는 것처럼.

  옷을 벗고 뛰어다니던 현생 인류가 이제는 농경과 정착 생활을 거쳐 국가를 형성했다. 다음은 고구려다. 국가와 시대를 뛰어넘는 끈끈한 생활의 역사 속으로 걸어간다.


06011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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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역사 교과서 - 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테마로 본 11개국의 역사교과서
이시와타 노부오.고시다 타카시 엮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역사와 교과서가 만나면 이야기는 복잡해진다. 역사 자체에 대한 논의만으로도 시대와 사관에 따른 다양한 문제가 발생한다. 지금도 사학계는 논쟁중이다. 물론 건전한 학문의 발전과 역사에 대한 발전적 논의가 진행 중일 것이다. 국정교과서 제도를 채택하면서 시작된 우리나라의 교육과정은 이제 7차를 시행하고 있다.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통치이념을 주입하는 수단으로 민족주의, 국가주의가 해방이후 대한민국 교과서의 특징이다. 특히 윤리와 도덕, 국어와 역사는 더욱 교묘한 헤게모니의 장악 수단이 된다.

 

  끊임없이 반복 재생산 되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과 논란은 앞으로도 영원히 결론이 나지 않을 것이다. 개별적 사건에 대한 원인과 배경을 이해하는 방식은 계층에 따라 혹은 국가와 민족에 따라 달라진다. 특히 국가 간의 전쟁에 대한 역사 서술은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러한 현상들을 비교 분석하다보면 무엇인가 접점을 보이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떤 눈으로 바라보길래 같은 사건에 대해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이 이토록 상이한 것일까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더구나 그것이 후세에 대한 역사교육의 관점이라면 얘기는 또 달라진다.


  이시와타 노부오와 고시다 다카시가 편저한 <세계의 역사교과서>는 매우 의미 있는 책이다. 우선 주제가 선명하다. 세계사의 수많은 사례와 쟁점들을 점검하려는 무모한 계획은 애초부터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는 ‘전쟁’과 ‘식민지지배’라는 두개의 주제만을 다룬다. 일본인의 입장에서 그들의 현재와 미래를 조망할 수 있는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각국의 입장과 태도를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을 것이다. 1, 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나라들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방식은 일본과 관련된 국가들을 살펴보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첩되는 나라들의 역사교과서를 분석하는 일은 일본의 현재와 미래를 확인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11개국의 작은 소제목이 각 나라의 역사교과서를 특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민족주의사관에 의거한 역사 - 한국, 생생하고도 사실적인 기술 - 중국, 1980년대 ‘교서 문제’가 불러일으킨 ‘변화’ - 싱가포르, 역사교육과 ‘과거의 기억’ - 베트남, 독립을 쟁취했다는 자부심 - 인도네시아, 역사를 현대의 문제로 생각한다 - 독일, 역사의식은 가정에서 형성된다 - 폴란드, 세계를 다각적으로 이해하는 인식력을 기른다 - 영국이 그것이다.


  각 나라는 고유한 역사 발전과정을 가지면서 현재를 이루고 있다. 객관적이면서도 자유로운 태도로 역사를 바라보고 인식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겠지만 대부분의 국가는 그렇지 못하다. 선택적으로 자국의 피해사실에 대한 부분은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가해 사실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언급하거나 아예 회피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 식민지 지배 사실은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일본에 대한 분노와 증로를 세습시켜나가지만 베트남 민족에 대한 가해 사실은 기초적인 사실관계와 피해 사실조차 확인하고 있지 않다. 미국의 침략 전에 가세한 한국의 경우 베트남전에 대한 성격규정조차 모호하다. 그나마 7차 교육과정에 ‘근현대사’라는 과목이 설정된 것 자체에 의미를 두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역사교육이란 사실만을 가르치면 되는 일이 아닙니다. 배우는 학생들의 마음속에 형성되는 역사인식이 더 중요합니다. 이렇게 사실의 학습과 역사인식을 동시에 시야에 넣고 실시해야 하는 것이 바로 역사교육입니다. - P. 42


  역사교육에 대한 논의가 각국의 교육당국과 국민들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져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그런 논의의 과정을 거치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경우도 있다. 교육은 한 나라의 미래다. 특히 역사 교육은 인식의 틀을 제공한다. 나와 우리, 사회와 국가를 넘어 세계사의 흐름에서 정체성을 확인하는 문제다. 눈물 질질 짜는 애국주의에 호소하거나 맹목적이고 무비판적인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서술에서 벗어나 전국역사교사모임 등에서 활발히 벌이고 있는 제대로 된 역사교육에 관한 노력들이 결실을 맺어갈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야 한다.


  획일적이고 공통된 관점으로 보이지 않는 실체, 국가와 민족에 복무하는 역사가 아닌 현재 우리의 삶을 성찰할 수 있는 역사교육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같은 교과서를 읽어도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또 달라야 정상이다. 서로 다른 해석을 두고 대화하는 장소가 교실인 것이다. 빵틀에 구워낸 듯 똑같은 생각을 하는 섬?한 공부기계들은 이제 그만 생산을 중단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교사는 전쟁에 대해서나 다른 일들에 대해서나 언제나 비폭력, 인권존중이라는 가치관을 가치관을 가지고 수업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평화교육이 아닐까 합니다. - P. 291


  역사를 국가에서 분리하고, 보다 더 민중 쪽으로 이끌어 가는 역사가 교과서에 배어 나와야 할 것입니다. - P. 338


  역사교육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교사의 역할이다. 위와 같은 관점이라면 교사와 역사교육의 위치가 그래도 적당하다고 합의할 수 있을까? 우리 현실에선 아직도 이념논쟁의 망령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소원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으나 인간의 향기가 나지 않는 역사는 의미 없다. 차갑고 냉정한 논리만 남은 역사교육은 더 위험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 투하는 일본인들에게 정신적 외상으로 남아있다. 각국의 역사교과서를 비교 하면서도 반드시 점검하는 일본인들의 태도가 그것을 반증한다. 어쨌든 이런 거시적인 프로젝트가 민간에 의해 주도되고 올바른 역사인식과 미래의 역사교육에 대한 거시적 담론을 이끌어 내는 작업들은 쉽지도 않을 뿐더러 그 의미와 성과 면에서 전환점이 되어야 한다. 일본 내에서 벌어지는 ‘후소샤 교과서’ 파동에 대한 우려로 시작된 작업이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나름의 의미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한중일 공동 역사 교과서를 넘어서 앞으로의 논의와 진행과정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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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6-10-30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읽은 기억이 납니다. 세계에 대한 역사를 정확하고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이 매우 독창적이죠.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sceptic 2006-10-30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말씀을...님도 즐거운 독서 계속 되시길 바랍니다.
 
한국생활사박물관 3 - 고구려생활관 한국생활사박물관 3
한국생활사박물관 편찬위원회(3권) 지음 / 사계절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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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고칠 수 없는 본능 중 하나는 타인에 대한 분노와 증오다. 안으로 향하는 눈이 없어서다. 거울을 보면서도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는 인간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항상 남의 탓이다. 한 인간에 대한 관찰과 평가가 쉬운 한 마디로 대체되거나 편견과 선입견이 되어 버린 말들은 고정된다.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 탓이다. 나와 타인과의 관계망은 그렇게 쉽고 간단하지 않다. 그 끝없는 미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과연 시간만일까?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증오가 국가 차원으로 확대된 것이 전쟁이다. 물론 생존권 확보를 위한 동물적 본능에 의한 투쟁이 발단이 되었을 수도 있으나 이후 인간들은 끊임없이 싸워왔다. 항상 너를 탓하면서.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지녔었고 호전적이고 적극적이며 자유로운 기상을 지녔다는 고구려의 멸망도 전쟁에서 비롯된다. 어느 쪽이 먼저였을까는 중요하지 않다. 국가의 존립마저 뒤흔들어버리는 갈등은 개인이든 국가든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의 인간성이 파괴되듯 국가는 멸망에 이른다.

  고구려의 벽화에서는 특이한 두 신이 등장한다. 야철신과 제륜신이다. 야철신은 철과 도구를 담당하는 신으로 그리스나 로마신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바퀴를 관장하는 제륜신은 독특함을 지니고 있다. 당시 수레를 통한 운송 수단의 발달을 보여주는 증거다. 수레는 단순히 많은 물건을 손쉽게 운반할 수 있다는 인간의 지혜를 넘어서 삶의 터전과 공간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유목과 정착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가 문제다.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는 자유 말이다. 직경 1.5미터가 넘어 보이는 바퀴는 2천 여년 전 작품으로 믿어지지 않을 만큼 찬란한 발명이다.

  왕과 귀족이 사는 성안과 성밖 사람들의 구분이 생겨나고 세금 징수가 시작되면서 인간은 끊임없이 행복해졌을까? 복잡하고 정교한 통치수단과 민중들의 삶의 모습은 반비례 관계에 있다. 벽화에 그려진 왕과 귀족들의 생활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항상 주변에 작게 그려진 사람들이다. 능력과 신분이 일치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교육과 예술 분야에서도 탁월한 진전을 보인 고구려는 이제 본격적인 인간 사회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후 예술이라는 것이 생겨난 측면도 있지만 삶의 과정 속에 드러난 부분들이 실용성을 배제한 채 본격 예술도 등장하기도 했다.

  고분에 그려진 고구려인들의 생각은 지금도 비슷하다.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이다. 죽어서도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욕망. 많은 부장품과 고분 천장의 그림이 그것을 말해준다. 청룡, 백호, 현무, 주작 등 각각 방위를 담당하는 동물들의 역할은 사후 세계에 인간의 두려움과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해 주었을 것이다. 어둔 밤하늘을 바라보며 반짝이는 별들을 관찰했던 선조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 우리들이 바라보는 하늘과 달랐을까? 무덤에 그려진 별 그림들은 지금과 많이 다르지 않다. 다만 명칭과 위치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그 별들을 묶어내고 관찰하는 방식은 지금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죽어서 하늘로 간다고 믿은 것인지, 하늘로 가는 싶은 욕망을 드러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광개토대왕비문 해석을 놓고 아직도 일본과 견해가 다르다. 많은 설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정답과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다. 불행했던 일제강점기에 발견된 비문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 해석과 의견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살아보지 않은 과거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아 보인다. 경험에 보지 못한 상황들과 감정들에 대해 더 크게 떠들고 있는 현재 우리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민족의 자부심과 영토에 대한 아쉬움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 나라 고구려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의미 이전에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 어떤 모습과 구체적인 형태의 삶에 영향을 미쳤는지 다시한번 생각하게 한다.

  역사는 어떤 모습으로든 존재한다. 그것이 기록으로 남든 그렇지 않든. 개인이든 국가든. 지나온 시간과 쌓아온 세월에 대한 흔적들은 고스란히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그리고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남겨진다. 객관성이라는 성격 자체가 역사에서는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다만 사실을 확인하고 그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는 방식들은 지금도, 여전히, 개인이든 국가든 반복되고 있다. 정답이 있겠는가. 이기적 유전자를 지닌 인간들의 반복된 습관인 것을. 소크라테스의 말이 떠오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너 자신을 알라’

060123-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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