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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술의 풍경
윤난지 지음 / 한길아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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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류의 역사만큼 급격한 변화를 겪어온 것이 예술이다. 인간이 이루어낸 어떤 분야든, 변화의 속도가 현기증이 날 정도가 아닌 것이 있을까마는 미술은 어떤 분야보다도 훨씬 민감하고 다양한 변화의 양상을 보여 준다. 특히 근대 이후의 현대 미술은 일반인들이 접근하거나 감상하기가 더 어려워진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역설적으로 작가들의 의도는 화이트 큐브로 불리는 박제된 미술관의 폐쇄된 공간을 벗어나려는 끊임없는 노력과 시도가 이루지지만 결과는 미지수다. 전통적인 회화와 조각, 건축에 나타난 미술에 대한 통념과 고정관념은 현실과 거리를 둔 채 일상과는 먼 이야기로 느껴진다.

  “19세기 중반 이후의 서구사회를 이전과 구분 짓는 가장 큰 계기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정착, 그리고 이에 따른 대중사회로의 전환이다.”는 작가의 진단은 객관적인 시각이다. 이러한 흐름속에서 현대미술이 걸어온 길과 지금 보여주고 있는 풍경은 과거가 아닌 진행형의 미술이기 때문에 훨씬 더 흥미롭다. 그래서 윤난지는 <현대 미술의 풍경>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미술의 역할과 위상을 점검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롤랑 바르트의 말을 인용한 ‘작가는 죽었는가’를 현대 미술의 특징으로 짚어 낸다. 아울러 21세기의 화두로 환경과 생태 문제의 중요성이 미술에서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잡고 있다. 설치미술의 특징으로 대표되는 현대미술은 시간의 예술을 넘어 이제는 특정한 장소에 위치함으로써 가치는 독특한 미적 가치를 살펴보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국의 구겐하임이 현대미술에서새로운 패트런 역할을 해내고 있는 상황을 점검한다. 저자가 말하고 싶은 현대 미술의 풍경은 대체로 이러하다. 2부는 현장이라는 제목을 달고 브루스 나우만에서 로스 블렉너까지 지금 현재 진행중인 현대미술의 거장들의 작업 ‘현장’을 일별해본다. 직접 보여주는 것만한 방법은 없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과천 국립 현대미술관 담장에 거대한 역삼각형 조형물을 설치한 마우로 스타치올리와 올림픽 공원에 설치된 대니 카라반의 ‘빛의 길’등은 관심있게 보고 기억에 남아있지만 국내 작가의 작품으로 짐작했던 작품들이었다. 공간과 시간의 흐름속에서 설치 미술이 갖는 의미는 영속성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상황과 맥락 속에서 더 큰 의미를 획득하고 있는 듯하다. 아쉬운 것은 국내 작가는 한명도 소개되어 있지 않다.

  현대 미술이 걸어온 길도 결국은 사회와 역사의 변화 발전 속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의식과 미적 가치는 끝없이 변화하는 것이고 미술가의 눈에 비친 세상과 사람들에게 던지는 무언의 메시지는 한 개인의 작가의 개성을 넘어 시대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의 죽음’이라는 말에 대한 논의가 생겨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미술품의 생산과 수집 매매와 전시, 기획은 모두 경제력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이 구겐하임이다. 자본이 미술에 미치는 영향은 긍 ․ 부정의 논의를 넘어 상상을 초월한다. 구겐하임에 대한 저자의 일갈이다.

  구겐하임 신화는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자국을 세계미술의 중심지로 만든 영웅 신화다. 그러나 그것을 뒤집어보면 돈을 무기로 전 세계를 미국이라는 문화제국의 영토로 포섭하려는 문화식민 기획의 비화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와 같은 변방 국가에서는 정치,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면에서도 미국의 속국이 되어간다는 피해의식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 P. 169

  세계화는 자본주의의 절정이며 서구 유럽화이고 ‘미국화’이다. 사회 경제적 측면 뿐만 아니라 예술 분야에서도 거스를 수 없는 주류가 되어 버렸다. 이런 현상을 우리와 상관없는 논쟁이나 현실과 거리가 먼 문제로 인식하는 우리의 태도는 반드시 점검해야 한다. 물론 미술을 사회와 절연시켜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사회문화적 맥락에서만 바라보아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결국 예술은 “문자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미술만의 독특한 서술성임을 증명”하는 좋은 방법이다. 그것이 미술이든 음악이든 무용이든. 문자예술인 문학을 넘어선 자리에 미술이 있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장르의 우열을 논하자는 것도 아니다. 현대 미술은 전통적인 회화 위주의 박제된 전시공간을 벗어나 좀 더 가깝게 우리들 삶의 모습을 드러내고 반성하고 확 과정 속에 서 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과천의 산속으로 기어들어가지 않으면 ‘현대 미술’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예술의 전당에서 르네상스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연중 기획으로 외국의 미술작품들을 접할 기회가 많아지?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 우리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생각하고 반성할 수 있는 작가들의 독특한 상상력을 엿볼 수 있는 현대 미술에 대한 감상 기회가 적은 것이 아쉽다.

  저자의 객관적이고 차분한 설명에 깊이가 있어 읽을 만한 책이다. 주관적 감상과 가벼운 느낌 위주로 산만하거나 흥미위주로 엮어 놓은 책들과는 확실히 구별된다. 푸코의 책을 만난 후였지만, 보들리야르를 읽지 않아 개념 설명만으로 많은 아쉬움이 남았다. ‘시뮬라시옹’이 숙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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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 - 개정판,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14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14
금난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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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리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참 다양하다. 같은 소리에 대한 정서와 이성에 대한 느낌이 다른 것은 본능적인 면과 훈련에 의한 면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훈련이라는 것은 문화적 영향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소음에서부터 영혼을 울리는 음악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태어나 귀를 통해 듣는 수많은 소리들을 생각하면 즐거움과 고통의 이중주를 들려준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눈을 감아버리면 그만이다. 그래서 우리의 오감중에 유일하게 취사선택이 가능한 감각이 시각이다. 나머지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특히 소리는 더더욱 그러하다.

음악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이다. 악기의 연주와 노래로 크게 나누어지는 음악은 어느 것이 우월하다고 할 수는 없다. 또 어떤 악기가 가장 훌륭한 소리를 내는 악기인지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음식이 가장 맛있다는 것을 객관화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설령 음악이 아니더라도 잠자는 아기의 숨소리, 사랑하는 연인의 두근거리는 심장소리, 눈을 가만 감고 듣는 바람소리, 산사의 밤에 들려오는 개울물 소리 등 주관적으로 판단되는 최상의 소리는 가늠하기 조차 어렵다. 그 모든 소리가 음악이 아닐까?

세계적인 지휘자의 반열에 오른 금난새가 청소년들을 위한 서양음악 가이드 북을 낸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은 딱딱하고 어렵게만 느껴지는 클래식의 대중화에 기여하고 있다. 이 책에 ‘서양 음악사의 라이벌’이라는 부제를 부치고 싶다. 바흐와 헨델에서 시작해서 모차르트와 하이든, 베토벤과 로시니, 슈베르트와 멘델스존, 쇼팽과 리스트, 브람스와 바그너, 차이코프스키와 림스키-코르사코프, 드뷔시와 라벨에 이르기까지 서양 음악사에서 빛나는 거장들을 소개하고 있다. 소개하는 방식이 단순한 이론과 지식에 머물지 않고 동 시대인 두 사람씩을 시대별로 묶어 비교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색깔과 개성이 뚜렷한 음악가들의 차이점을 통해 자연스럽게 그들의 음악에 반영된 정신을 읽을 수 있는 배경지식을 제공한다. 음악가들의 초상화와 관련 그림들을 풍부하게 삽입해서 지루하지 않게 읽히려는 배려가 눈에 띤다. 청소년을 예상 독자로 설정했기 때문에 전체를 조망하는 책으로는 부족하지만 클래식에 한 발 다가서고 듣고 싶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고전주의 음악을 선도했던 서양의 음악가들을 중심으로 한 우리의 음악교육은 여전히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학창 시절 미국의 민를 배웠고, 서양 음악가와 작품들을 암기해서 음악시험을 본 기억이 있다. 판소리나 꽹과리, 징, 북소리의 깊은 울림에 관한 설명과 감상의 기회는 전무했다. 대학의 사물놀이패와 민속음악에 대한 관심은 자발적인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학교교육에서 조차 차별받는 동양, 특히 한국의 음악은 설 자리가 별로 없어 보인다. 동양의 고전 음악은 말할 나위도 없다.

얼마 전 중국의 전통 음악을 현대화해서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는 ‘여자12악방’의 연주회에 다녀왔다. 팝과 클래식을 넘나들며 퓨전음악을 들려주는 여성 연주단이었다. 물론 상품화의 논란을 비껴갈 수는 없다. 미모의 여성들을 내세워 중국 전통 악기인 비파와 구젱이 주류를 이루는 연주팀으로 영화음악과 팝음악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대중에게 쉽게 다가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연이 끝나고 주저하지 않고 CD를 사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들었다. 공연장에서의 감동과 현장감은 떨어지지만 뉴에이지라는 장르가 우리나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사실을 감안한다면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된다. 돌아오는 길에 못내 아쉬웠던 것은 김영동이나 김수철 등 국악의 현대화를 위해 개인적인 노력을 했던 사람들의 음악적 실험들이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사장되어 버린 것 같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김덕수 사물놀이패를 제외하면, 우리 전통 음악의 현대화는 멀게만 느껴진다. 단순히 현대음악과의 결합만을 위해 노력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처럼 여겨진다.

그에 비해 서양의 클래식은 폭넓은 교육과 교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다. 장르와 기원을 가리지 않고 좋은 음악이 주는 감동과 삶의 기쁨들을 즐기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이겠지만 클래식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지식이 밑바탕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알지 못하면 잘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은 옳지 않지만 그저 듣고, 본다고 해서 사랑할 수 있을까?

쉽고 흥미있는 내용을 위주로 음악가들의 생애와 음악적 특징을 사회문화적 배경과 함께 설명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내공의 결과다. 가장 대표적인 음악가들과 친숙해지는 일은 클래식의 세계로 입문하는 좋은 방법으로 여겨진다. 전국을 뒤흔든 함성소리도 아름답지만 창밖에 소리없이 내리는 빗소리처럼 부드러운 클래식의 바다에 풍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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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에 반대한다 이후 오퍼스 7
수잔 손택 지음, 이민아 옮김 / 이후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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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란 어떤 것의 일별, 스쳐 지나가는 섬광입니다. 아주 작은 것이지요. 아주 작은, 내용 말입니다.(월램 드 쿠닝, 어떤 인터뷰에서)

외양으로 판단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얄팍한 사람들 뿐이오. 세계가 간직한 수수께끼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란 말이오.(오스카 와일드, 한 편지에서)

위와 같은 인용문으로 <해석에 반대한다>는 시작된다. 이분법적 흑백논리가 가지는 위험성에 대한 경고가 수잔 손택의 첫 번째 경고로 들리는 것은 극단적이 이 두개의 인용문 때문이다. 예술에서, 엄밀하게 문학에서 ‘내용’과 ‘형식’ 논쟁의 전제에는 그것을 분리 가능한 것으로 인식하는데서 출발한다. 하지만 수잔은 그것을 부정한다. 예술에서, 특히 문학에서 내용과 형식을 구분하고 그 특성을 ‘해석’하는 것이 지금까지(책이 출판된 1960년대)의 관행이었다. 문학 비평은 30년대 신비평주의자들에 의한 형식비평을 필두로 급격한 변화와 도전을 받게 되어 지금까지 숱한 변화와 주장들을 겪어 왔지만 여전히 ‘비평’의 존재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첨예한 시대에 수잔의 이 책은 그녀를 폭풍의 핵으로 만들었고 지속적인 논쟁을 불러 왔다. 또한 문학 비평에 대한 재인식의 기폭제가 된 것이 사실이다. 문제작이란 이런 책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이후 수잔은 사회적 목소리를 높혔으며 문학안에 머물지 않고 예술 전반과 그것의 모방 대상인 실제 현실에 직접 개입하게 된다.

60년대까지 이분법적으로 분리된 내용과 형식은 우선순위와 상호 배타적 우월성을 표방하는 논쟁들과 소모적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석 자체를 반대한다는 도발적인 선언과 그 대안은 여류 비평가를 주목하게 하는 데 충분했다. 수잔은 이 책에서 단순히 문학과 예술에 대한 해석과 이해가 주는 무의미한 논쟁에 대한 종식을 선언함은 물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스타일’이다. 형식과 다른 개념과 용어로 설명하기 위해 번역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스타일’과 ‘스타일화’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적용이 제시된다. 스타일은 ‘투명성’으로 설명될 수 있는 개념이다.

투명성은 오늘날의 예술 - 그리고 비평 - 에서 가장 고상하고 가장 의미심장한 가치다. 투명성이란 사물의 반짝임을 그 자체 안에서 경험하는 것,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 P. 33

지금 중요한 것은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임무는 예술작품에서 내용을 최대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에서 있는 것 이상의 내용을 더 이상 짜내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예술에 대해 뭔가를 말하여 한다면 우리는 예술작품(그리고 거기에서 유추한 우리의 경험)이 우리에게 훨씬 더 실감나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비평의 기능은 예술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됐는지, 더 나아가서는 예술작품은 예술작품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 P. 35

스타일을 논하는 것은 어떤 예술작품의 총체성을 논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총체성에 관한 담론이 으레 그렇듯이, 스타일에 관해 이야기를 할 때에도 은유에 기대야 한다. 그리고, 은유는 얘기를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 간다. - P. 39

위에 인용한 부분은 수잔이 ‘투명성’과 ‘스타일’에 대한 논의의 핵심을 말한 부분이다. 문학을 감상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전공자나 비평가의 몫일 뿐 실제 문학의 소비자인 독자들과 거리가 멀거나 아카데미즘의 고유 영역일 수 있다. 독자반응비평같은 주장이 제기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작가와 작품, 현실과 작품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하나의 축이었다면 작품의 내재적 의미만을 철저하게 분석하는 것이 또 하나의 작품 해석의 축이었다. 거기에 독자와 작품과의 관계를 점검하는 것을 중요한 요소로 삼았다. 그리고 이 책에서 수잔은 그 모든 형식과 내용에 관한 기본 틀을 제거할 것을 주장한다. 말하자면 문학 비평에서 패러다임 자체를 전환하자는 이야기다. 투명성과 스타일은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 작품 스스로 빛을 내는 반짝임 자체를 이해하는 일, 그것이 작품을 경험하는 일이다. 그것은 엘리어트가 말한 “시는 이해되기 전에 전달된다”는 해석 이전의 문제로의 회귀를 뜻한다. 투명성을 경험한 독자는 작품을 보다 잘 느끼는 법을 알게 된 것이다. 해석을 전제로 한 이해가 아니라 총체적인 스타일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글인 ‘해석에 반대한다’와 ‘스타일에 대해’가 수잔 손택의 문학비평에 관한 핵심 주장이다. 나머지는 실제 작품에 적용을 여준다. 특히 기존의 해석과 방법과 다른, 혹은 영화에도 적용되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 예술은 투명성을 확보하고 나름의 고유한 스타일을 찾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을 보다 더 잘 보고, 듣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녀가 요구한 예술에 대한 기본 자세이다.

하나의 예술 작품에서 받아 들일 수 있는 아우라를 총체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지나치게 거친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요구한 예술의 투명성은 결국 독자들의 생생한 경험이어야 한다는 지극히 단순한 논리를 주장한 것이다. 지금은 당연해진 받아들일 수 있는 논리가 그녀의 주장 이전까지는 통용되지 않았다는 것일까? 문학과 예술에 대한 접근 방식과 이해의 폭은 중간에 끼여든 평론가를 통해 왜곡되고 변형될 수 있다. 비평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부터 다양한 문제점과 해법들이 제시되고 있다. 문학을 포함한 예술 전반에 걸친 맹목적인 주례비평에서 헤게모니를 둘러싼 권력 다툼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 비평이다. 결국, 문학에서 감상과 수용의 최종 단계라고 할 수 있는 독자들과의 만남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하는 문제는 해석과 비평에 대한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로 남는다. 수잔 손택의 <해석에 반대한다>는 주는 의미는 바로 이 지점에 대한 논의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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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보여주는 손가락
김치샐러드 지음 / 학고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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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blog는 웹web과 로그log의 합성어로 21세기 주류 문화 현상중의 하나다. 집단 중심의 문화에서 개인이 중심이 되는 인터넷 문화의 중추로 자리 잡았다. 블로그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겠지만 소통을 위한 것과 개방형과 기록물의 저장소와 같은 칩거형으로 나눌 수 있겠다. 거칠게 두 가지로 나눴지만 혼합된 형태가 대부분이며 목적과 내용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블로그의 전제 조건이다. 블로그는 웹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가장 큰 특징은 쌍방향성이다. 책이나 다른 언론 매체와 달리 상호 작용이 가능하며 즉각적인 피드백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또한 블로그는 일정한 형식과 틀의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고 유연하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기 때문에 이전과 전혀다른 형태의 의사소통 구조가 형성된다. 그러나 개성을 앞세운 블로그의 양적 팽창은 단순한 시간의 소모와 현대사회의 인간 소외와도 무관하지 않다. 공동체와 자본으로부터의 소외가 나타나기도 하고 유행과 익명성의 폭력은 무시할 수 없는 현상으로 가상 공간이 아닌 현실적인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목적과 욕구를 감안해서 자신과 맞는 코드와 선별적인 소통능력을 기른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정보와 효용을 얻을 수도 있다. 단점과 약점을 최소화하고 강점과 장점을 극대화시키려는 노력은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다. 변화와 발전의 과정을 거치면서 시행착오를 극복한다면 우리는 즐겁고 행복한 사이버 세상에서 또다른 만남을 가질 수도 있다.

김치샐러드의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이란 책은 사이버 공간의 블로그를 책의 형태로 옮겨 놓았다. 어렵고 딱딱한 그림을 블로거의 안목과 적절한 설명 그리고 재치있는 말솜씨로 아주 쉽고 재미있게 풀어 놓았다. 스크롤을 아래로 내려야하는 수고를 책장을 넘기는 것으로 대신했다. 과연 수직적 시선의 이동을 수평적으로 옮겨놓은 것만이 이 책이 지니는 의미일까?

벤야민은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에서 ‘아우라aura’의 개념을 통해 사진이나 영화 예술에 대한 우려와 비판을 시작했다. 아우라는 예술작품의 원본이 지니는 시간과 공간에서의 유일한 현존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아우라가 없는 예술은 예술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 20세기 초 기술 복제 시대에 진입한 발터 벤야민의 논리이다. 21세기에 들어서 사진과 영화 그리고 만화를 예술이 아니라고 주저없이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은 많지 않다. 시대는 변했고 예술의 개념도 달라졌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예술이란 무엇인가?

숨어 있는 명화들을 화면으로 불러내고 말풍선을 달아 친절한 설명을 붙이고 개인적인 감정을 투사한 해설은 수많은 블로거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네트워크 시대의 특성을 감안하면 수많은 스크랩과 이슈를 만들어내는 포탈 사이트의 홍보에 힘입어 순식간에 유명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뿐이다. 깊이와 넓이를 닮아내지 못하는 단순한 여가 활용 수준의 사이버 갤러리 역할은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만 차별성과 본래의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실제 화가들의 그림들을 사이버 갤러리에서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기술 복제 시대의 장점이지만 아우라가 없는 복제된 그림의 해설은 실제 그림의 감상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일이다. 감상자와의 상호 의사소통과 예술의 개념을 달리 받아들이게 하는 의도가 담긴 작품이 아니라면 원본이 지니는 아우라를 전달할 수는 없다. 그림은 시처럼 이해되기 전에 전달되는 예술 장르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자명한 진리처럼 여겨지는 금언속에는 타인의 견해와 해설을 작품 이해의 전부라고 믿는 오류가 숨어 있다.

책은 나무로 만들어진다. 자연을 훼손하며 인간은 책을 만든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인류가 쌓아온 지혜의 전달과 저장과 보관을 위해 가장 유용한 수단이 책이라고 믿어왔다. 앞으로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자연의 일부를 파괴하면서 만들어가는 책은 나무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한다. 김치 샐러드의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은 그런 면에서 예의가 없는 책이다.

재밌고 즐거운 사이버 공간에서 이웃 블로거로 만났다면 사소한 슬픔과 기쁨에 공감할 수도 있고 안부를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책의 형태로 나타난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은 어떤 의사소통도 부재한 일방적인 의사전달 방식이 된다. 그렇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럴만한 이유도 내용도 없는 종이 낭비에 불과한 심심풀이 낙서장에 불과하다. 책의 내용과 의미를 묻기 전에 책이 지니는 효용과 전달방식을 먼저 생각해 볼 일이다. 과연 우??이런 책도 책이라고 읽어야 할까? 나무의 희생, 타인의 시간과 노력을 담보로하는 책은 만드는 데 좀 더 신중해져야 한다. 블로그는 블로그로 남겨두고 책은 책으로 남겨달라. 블로그의 목적이 이런 종류의 책이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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