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하게 참 철없이 - 2009 제1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창비시선 283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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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소원

적막의 포로가 된다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한 시인의 시집을 읽는다는 것은 그의 한 시절과 만나는 일이다. 시인은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흐르며 살아온 시간들과 바라본 사물들, 떠오른 생각들로 언어의 집을 짓는다. 그것이 한 권의 시집이 되어 독자에게 읽힌다. 그래서 한 권의 시집을 읽다보면 시인의 눈이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본 세상과 내면의 풍경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독서가 말없는 저자와의 끊임없는 의사소통 과정이라면 시읽기는 시인의 정서와 교감하는 통음通音의 과정이다.

  특히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시인의 시집은 더욱 그러하다. 그에 대한 사전 정보와 배경지식이 있고 다른 시를 통해 그와 만난 적이 있다면 매우 친숙하고 반가운 마음으로 시인의 시를 읽게 된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시를 통해 널리 알려진 시인 안도현의 <간절하게 참 철없이>는 이전의 시편들에서 보여주었던 모습들과 새로움이 중첩된다. 나는 그를 첫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으로 만났다. 2004년에 나온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에 이르기까지 안도현의 시는 변함없이 연탄불의 따스함을 바탕으로 한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자연에 대한 따스한 시선들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 훈훈함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세상에 대한 애정없이 어떻게 시를 쓸 수 있을까마는 안도현의 시선은 여전히 축축하다. 물기어린 시선으로 때로는 나약하게 때로는 간절하게 대상을 관찰하고 훈훈한 숨결로 감싼다. 이해되기 전에 전달되는 시의 특성을 가장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문학적 변모와 변화의 기대까지 만족시켜주지 못한다는 아쉬움은 소수 독자들의 바람일지 모르지만 아직 이른 판단이기도 하다.

병어회와 깻잎

군산 째보선창 선술집에서 막걸리 한 주전자 시켰더니 병어회가 안주로 나왔다

그 꼬순 것을 깻잎에 싸서 먹으려는데 주모가 손사래 치며 달려왔다

병어회 먹을 때는 꼭 깻잎을 뒤집어 싸먹어야 한다고, 그래야 입 안이 까끌거리지 않는다고


  이번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에서도 시인 특유의 잠언투의 문장과 주관적 판단과 감성에 기댄 시선들이 여전히 매력적이다. 특히 ‘백석(白石) 생각’이라는 시를 쓸 정도로 이번 시집에는 음식에 관한 시가 많다. 사라지는 것이 모두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잊혀져가는 수많은 음식에 관한 추억과 아련한 기억들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관계 맺었던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 잘 나타난 시편들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익숙한 음식들인 수제비, 무말랭이, 닭개장, 민어회, 에서부터 먹어본 적도 없는 예천 태평추, 건진국수, 전어속젓, 콩밭짓거리 등 다양한 음식들이 입 안에 침을 고이게 한다. 음식은 오감을 자극하며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것들을 지나간 시간들과 사라져가는 기억 속에서 아슴하게 들추어낸다. 짙은 아쉬움보다 붉은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시들이 이 시집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오래된 발자국

시골 서점 책꽂이에 아주 오랜 시간 꽂혀 있는 시집이 있다
출간된 지 몇해 째 아무도 펼쳐보지 않은 시집이다
시인이 죽은 뒤에도 꼿꼿이 그 자리에 꽂혀 살아 있다
나는 그 시인의 고독한 애독자를 안다
본문은 펼쳐 읽지 못하고 제목만 뚫어지게 바라보던
날마다 시집 귀퉁이만 밟아보다가 돌아서던 그를 안다
햇볕의 발자국을 가진 사람을 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은 망각을 담보로 한다. 시인의 시도 잊혀질 것이고 수많은 책꽂이에 꽂혀 칼잠자는 낡은 책의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 제각기 다른 자세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들 속에서 안도현의 시가 빛을 발하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대상에 대한 부드러운 시선 때문이다. 따뜻하게 감싸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낮은 목소리로 사람과 자연과 그리고 나를 사랑할 줄 아는 언어로 무장한 채 살아가는 시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세월이 흘러도 ‘서울로 가는 전봉준’에 대한 애정과 또 다른 관심들도 이어지길 바란다. 진심으로 간절하게 나는 ‘참 철없이’ 살고 싶기 때문이다.


080127-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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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빵 2008-01-29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에서 저도 '가을의 소원'이 제일 마음에 와 닿았는데 여기도 그렿네요,
반갑습니다.
가을이 되면 친구들에게 들려주려고 아껴 두겠습니다,

sceptic 2008-01-29 22:15   좋아요 0 | URL
그렇죠...그냥 전달되는 시들은 마음이 먼저니까...공감할 수 있다면 더욱 좋구요...
 
저녁 6시 창비시선 282
이재무 지음 / 창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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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는 삶이다. 가장 고급한 예술 장르가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며 반응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호흡이다. 지천명知天命에 들어선 시인의 눈에 비친 세상과 삶의 숨결들은 그대로 생생한 언어로 되살아난다. 시를 칼을 빼들고 언어의 탄환을 장전한 시인은 삭막한 시대현실과 부대끼는 사람들의 고통과 한숨을 겨냥해 날카롭고 절절한 목소리를 토해낸다. 한 시대가 가고 세월은 흘렀으며 또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시인은 시라는 창을 통해 또 다른 풍경과 새로운 깨달음과 삶에 대한 통찰을 적는다.

  정치적 현실이 변했고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간다. 새로운 세대는 그들의 문화와 세계관으로 무장한 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질곡의 현실과 ‘나’를 둘러싼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다. 시인의 내면 풍경에는 여전히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그래서 가끔 ‘마량에 가면’ ‘좋겠다’는 희망과 소박한 꿈을 꾼다. 그것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뜻도 모르는’ 인생에 대한 회한이며 긍정이며 낙관인 지도 모른다.

좋겠다, 마량에 가면

몰래 숨겨놓은 애인 데불고
소문조차 아득한 포구에 가서
한 석 달 소꿉장난 같은 살림이나 살다 왔으면,
한나절만 돌아도 동네 안팎
구구절절 훤한, 누이의 손거울 같은 마을
마량에 가서 빈둥빈둥 세월의 봉놋방에나 누워
발가락장단에 철지난 유행가나 부르며
사투리가 구수한, 갯벌 같은 여자와
옆구리 간지럼이나 실컷 태우다 왔으면,
사람들의 눈총이야 내 알 바 아니고
조석으로 부두에 나가
낚싯대는 시늉으로 던져두고
옥빛 바다에 시든 배추 같은 삶을 절이고
절이다가 그것도 그만 신물이 나면
통통배 얻어 타고 휭, 먼 바다 돌고 왔으면,
감쪽같이 비밀 주머니 하나 꿰차고 와서
시치미 뚝 떼고 앉아
남은 뜻도 모르는 웃음 실실 흘리며
알량한 여생 거덜냈으면,

  마지막으로 거덜 내고 싶은 인생이 ‘웃음’으로 마무리 될 만큼 우리들 인생에는 사랑과 웃음이 중요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남루한 생의 저물녘에 마주하는 ‘나’의 모습과 과거의 기억 속에는 늘 따스한 미풍이 분다. 상처받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을까? 그것도 결국 사랑으로 인한 상처일 뿐이다. 시인에게 세상은 이제 무덤과 어둠과 그늘일 뿐일 수 있다. 비극적 인식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시라는 장르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버텨 낼 수 있는 유일한 희망과 남은 시간에 대한 추동력은 어둠 속에 묻힌 작은 불빛과 아름다운 추억과 생명에 대한 외경에서 비롯된다. 이재무의 시를 오독한 것이 아니라면 부조리한 현실과 석양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생의 한가운데서 느끼는 통찰과 섬세한 감각들은 열정과 욕망과는 거리가 멀다.

그 여자

만날 때마다 몸과 마음

숯불 위에 놓인 번철처럼 뜨겁게 달구어놓는

그 여자 빼어난 미모가 차라리 슬퍼 보이는,

도발 안쪽에 감추어진 가련함을,

구멍 속으로 기어드는 구렁이같이

무논 속으로 뛰어드는 개구리같이

사랑했네 하지만 그 수려한 미색 속에는

호랑이 날카로운 발톱의 마음도 살고 있어

사랑이 클수록 상처도 컸네

그녀를 사랑하는 일 수만평 진흙밭

새구두 신고 걷는 일처럼 벅찬 일이었네

신은 여자에게 지색을 주고 요철 심한

생의 굴곡 안겨주었네

사랑은 불행까지 품어주는 일

나, 오랫동안 그녀를 앓아야 하네


  그러다 문득 도시 한가운데서 혼란을 느끼기도 한다. 이 시집의 표제작이 된 ‘저녁 6시’는 냄새를 통해 생의 감각을 되살린다. 생물학적 공복감의 근원은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게 한다. 먹기 위해 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살기 위해 먹어야만 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은 도심 한복판 저녁 6시에 마주하는 냄새를 통해 확인된다. 때로는 ‘치명적인 독’일 될 수도 있는 본능적 욕망의 범람을 경험한다.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의 냄새는 현대인들의 욕망이며 신산스런 삶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 냄새의 숲속을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나’의 뒷모습은 처량하기 보다는 안타까움이며 두려움이고 우울한 우리들의 모습이다. 시인은 일상의 감각과 생활의 패턴들을 ‘냄새의 감옥’으로 표현한다. 비아냥거리는 냉소가 아니라 경험에서 우러나온 내밀한 고백이다.

저녁 6시

저녁이 오면 도시는 냄새의 감옥이 된다
인사동이나 청진동, 충무로, 신림동,
청량리, 영등포 역전이나 신촌 뒷골목
저녁의 통로를 걸어가보라
떼지어 몰려오고 떼지어 몰려가는
냄새의 폭주족
그들의 성정 몹시 사나워서
날선 입고 손톱으로
행인의 얼굴 할퀴고 공복을 차고
목덜미 물었다 뱉는다
냄새는 홀로 있을 때 은근하여
향기도 맛도 그윽해지는 것을,
냄새가 냄새를 만나 집단으로 몰려다니다보면
때로 치명적인 독
저녁 6시, 나는 마비된 감각으로
냄새의 숲 사이를 비틀비틀 걸어간다.


  ‘냄새’로 시작된 ‘공복’은 ‘가난’으로 이어진다. 그 개념이 달라진 시대를 반영한 아래 시는 자본의 물결과 신자유주의 시대 한복판에 알몸으로 서 있는 ‘가난’을 ‘선하지도 힘이 세지도 않다’는 반복적인 표현으로 강조한다. 이제 가난은 죄이며 악이며 부정이다. 더 이상 생을 긍정하지 못하고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가난에는 아무 의미도 희망도 낙관도 없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라고 반문하던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 노래>는 이제 철지난 유행가가 되어 버렸다. 가난하면 외로움도 두려움도 그리움도 사랑도 허용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이 시대의 가난은 과연 어떤 것인가?

가난에 대하여

선과 악의 기준이 사라진,
오직 미추만이 가치를 결정하는 시대에
성자였던, 생을 긍정하던 가난은
선하지도 힘이 세지도 않다
산개되어 얼굴조차 볼 수 없는 가난은
다만 무력할 뿐이어서 크게 울지도 못한다
가난이 힘이 되던 시절이 있었다
뭉쳐서 무기가 되고 전망이 되던 날이 있었다
떼지어 살고 있어서 쉽게 눈에 띄던 시절
가난은 단연 주목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가난은 저마다 무력한 개인이 되어
모래알로 흩어졌다 지하로 잠적해버렸다
눈에 띄지 않는 가난에 대하여
누가 관심과 애정을 보일 것인가
생활의 중증장애자, 구차한 천덕꾸러기 되어
몰매 맞는 가련한 왕따,
가난은 이제 선하지도 힘이 세지도 않다

  시인의 마지막 희망은 ‘젊은 꽃’으로 상징된다. 노인의 피부에 검버섯이라는 저승꽃이 피는 것은 ‘누구에게나 밀려드는 시간의 밀물’이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자연의 순리이다.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생의 진리와 마주하게 되면 우리는 겸허하게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된다. 늙은 나무에 꽃이 피는 것처럼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 꽃을 피우겠다는 희망을 버릴 수는 없다. 그래서 ‘젊은 꽃’이 시집의 마지막에 놓여 있는 것일까?

젊은 꽃

때 되면 누구에나 밀려드는 시간의 밀물
그 또한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물에 잠긴 자리마다 검게 죽어가는 피부
지나온 생의 무늬는 목까지 차오른다
하루의 팔할을 사색으로 보내는 그,
긴 항해 마치고 돌아온 목선처럼 지쳐 있지만
바깥으로 드리운 그늘까지 늙은 것은 아니다
주름 많은 몸이라 해서 왜 욕망이 없겠는가
봄이면 마대자루 같은 그의 몸에도 연초록
희망이 돋고 가을이면 붉게 물드는 그리움으로
깡마른 몸 더욱 마르는 것을,
늙은 나무가 피우는 저 둥글고 환한 꽃
찾아와 붐비는 나비와 벌 들을 보라
검은 피부에도 가끔은 꽃물이 든다


080114-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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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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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먹고 싶은 과자를 아껴 두는 아이의 마음-그것이 단순한 욕망의 절제가 아니라 충족이 주는 낯선 소멸과 허무 때문일지라도-은 차라리 공포에 가깝다. 소풍 전날 잠 못 이루는 아이가 결국 땅거미 질 무렵 귀가 길의 비참함을 꿈에서 보아 버리듯이 말이다. 나는 이 책을 그렇게 읽었다. 오랫동안 미뤄두다가.

  김연수의 유일한 산문집을 애써 외면한 것은 은근한 기대나 설렘과는 다르다. 애써 감춰 둔 서랍 깊숙한 곳에 존재 여부만 알고 있는 낡은 편지의 내용처럼 짐짓 모르는 척 하는 마음에 가깝다. 서른 다섯. 소설가는 청춘을 정리한다.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는 순간들을 알아채버린 것이다. 그 때부터 아주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워야 한다는 사실을 실감한 것이 분명하다.

  축축하게 비에 젖은 날씨를 핑계로 포장마차에 들어서는 기분으로 책장을 넘겼다. 이 책은 처음부터 그렇게 심하게 젖어있다. 현재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 모든 순간이 발화되는 순간 과거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김연수는 그 아쉬움을 달래듯, 자신의 젊음 혹은 과거의 한 찰나들을 정리한다. 과연 이런 책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우선 소설이 아닌 현실속의 작가를 만나고 싶어 하는 팬서비스 차원이라고 볼 수 있다. 드라마나 영화의 배역이 아니라 현실 속의 배우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처럼. 좋아하는 소설가의 일상과 마주하며 친근감을 느끼고 그의 소설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배경지식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반면 작가는 소설의 형식으로 담아내지 못한 이야기들을 편안하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장소가 된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

  또 하나는 시대적 공감이다. 동년배이거나 유사한 환경에서 성장했거나 생활하는 사람과의 교감과 공통점은 작가와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고 알고 있으면서도 미처 생각지 못했거나 지나쳤던 것들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의미한다. ‘그때 그 시절’을 노래하는 철지난 유행가처럼 낡고 빛바랜 사진들이지만 흑백으로 포장되고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왜곡되어도 굳이 상처받지 않을 수 있고 심지어 아름답다는 수식어를 사용할 수도 있다.

  이런 시간의 흔적들과 삶의 파편들은 단순한 회고담을 넘어서 한 작가를 이해하고 그의 작품들을 심층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보고 지금의 나를 돌아보며 미래에 대한 자그마한 꿈과 희망을 만들어보기도 한다.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은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는 먼지 묻은 뮤직 박스와 같다.

  고등학교 시절에 읽은 <데미안>과 <파우스트>와 <설국>에 대한 기억, 김광석의 노래에 대한 선명한 기억과 그의 죽음, 천개의 눈을 가진 밤을 사랑한다는 고백, 중문 바다에 대한 회고, 스무 살 언저리에 느꼈던 삶의 불확실성……. 책을 읽으면서 나는 김연수와 낄낄거리고 소주를 한 잔 했으며 어깨 겯고 거리를 쏘다니기도 하다가 김광석의 노래 소리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지극히 개인적으로 그리고 반어적으로 이 책은 참 나쁜 책이다.

  작가의 젊은 날을 사로잡은 문장들, 시편들, 노래들과 얽힌 추억들을 들려주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김연수라는 작가의 삶에 대한 내밀한 고백들은 맨 정신으로 들어주기 힘들다. 어설픈 가난과 시간에 대한 불가해함을 읊조리는 문장들이 아니라고 한다면 나의 지나친 편애가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작가의 말대로 ‘덧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먼 기억 속에서 안개처럼 모호하게 혹은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서성이고 있는 것을. 제발, 부디 오래도록 철들지 않고 나이와 무관하게 ‘청춘’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삶을 꿈꾼다. 그리고 단 하나의 문장을 기다려 본다.그와 함께.

사이에 있는 것들, 쉽게 바뀌는 것들, 덧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여전히 내 마음을 잡아끈다. 내게도 꿈이라는 게 몇 개 있다. 그 중 하나는 마음을 잡아끄는 그 절실함을 문장으로 옮기는 일.


08011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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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 - 10대의 사랑과 성에 대한 일곱 편의 이야기 창비청소년문학 6
김리리 외 지음, 김경연 엮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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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에게나 꿈은 있다. 어릴 적 내 꿈은 서른일곱 살 아저씨가 되는 거였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리고 천천히 멋있게 늙어가는 나를 상상해 보았다. 그렇게 이루기 어려운 꿈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많은 함의가 포함된 ‘멋’있는 사람이 되긴 쉽지 않다. 2008년이 들어서면서 나이에 대한 거부감이 생겼다. 자신의 나이가 싫어진다는 것은 분명 늙어간다는 반증이다. 빨리 나이 먹고 싶어 애꿎은 떡국만 퍼먹던 시절이 그리워진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어쩌면 나도 이제 나이를 줄여 말하고 싶은 나이가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호기심’이다. 그것이 사라져간다.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의 경계를 알 수 없지만 이제 미치도록 궁금하거나 끝까지 파헤쳐 알고 싶은 것들이 줄어간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의 차원은 아니겠지만 분명한 변화중의 하나이다. 아는 것이 많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만한 열정과 욕망이 사라져 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진다.

  10대의 사랑과 성에 대한 이야기를 묶은 <호기심>은 ‘창비청소년문학’ 시리즈 여섯 번째 책이다. 일곱 명의 소설가가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쓴 단편이 묶여있다. 이번 주제는 ‘사랑과 성’이다. 10대 뿐만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관심과 재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다. 중요한 것은 10대라는 제한 조건이다. 2차 성징이 끝나고 사춘기를 겪고 나면 어른이 된다. 우리가 그들을 10대라고 부르든 청소년이라고 부르든 상관없이 그들은 성인의 몸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정신적인 성숙이다. 자신의 의사 결정권이 제한되고 사회적 억압이 기다리고 있으며 부모의 통제와 가정에서의 역할 때문에 그들은 갈등하고 고민하며 혼란을 겪는다.

  누구나 똑같은 성장통을 겪으며 어른이 되지만 부모와 사회에 대한 대응 방식은 각기 다르다. 스무 살이 넘도록 부모에게 기대거나 자신의 의지대로 세상을 살아갈 능력을 갖추지 못한 다 큰 어린이도 점점 많아진다. 그것은 단순한 경제적 자립 능력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나 자신의 신념과 의지, 꿈을 향한 열정과 신나는 노력이 부족해지는 것은 아닐까? 88만원 세대를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눈과 이제 10대의 홍역을 치르는 사람들의 눈은 제각각이다. 그들이 살아내야 하는 세상에 대한 고민과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은 그들의 꿈과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전근대적, 봉건적 사고방식과 새로운 세대가 지닌 가치관은 늘 충돌하고 갈등하며 혼란을 가중시킨다. 선악의 가치 판단은 무의미해지고 ‘사랑과 성’이라는 것도 쉽게 규정되지 않는 세대의 고민들을 소설가들은 잘 이해하고 있을까? 사회, 문화적 환경이 달라지면 ‘사랑’에 대한 개념도 ‘성’에 대한 태도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가정에서 부모의 역할과 학교나 사회에서 보여주는 성인들의 가치관과 문화는 청소년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10대들의 ‘사랑과 성’에 대한 고민은 어쩌면 고스란히 성인들의 자화상일 수도 있겠다. 아련한 추억 속에 낡은 사진처럼 자리잡은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기에 현실은 훨씬 더 심각하다.

하지만 이 소설집에 나타난 아이들의 고민은 평온하며 안전하며 일상적이다. 김리리의 <남친 만들기>, 이혜경의 <공주, 담장을 넘다>, 임태희의 <호기심에 대한 책임감>은 귀여운 수준의 고민들이고 순수하고 깨끗한 동화같은 이야기들로 비춰진다. 항상 심각하고 아픈 상황만을 다룬 소설이 청소년들에게 유익하겠느냐는 반문에는 할 말이 없지만 식상한 내용과 뻔한 전개와 결론이 보여주는 교훈적 혹은 전형적 스토리가 감동을 줄 수 있을까?

  박정애의 <첫날밤 이야기>는 형식면에서 소설이 주는 의미를 찾고 있다. 청소년문학도 ‘문학’이라면 내용은 물론이고 전달 방식이고 구성면에서 참신하고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 박정애는 그런 면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훌륭한 방식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금이의 <쌩레미에서, 희수>에는 유일하게 학생이 아닌 청소년이 등장한다. 제도권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거나 공교육의 범위를 벗어난 청소년들에 대한 고민들은 좀 더 심각하고 진지하게 고민되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학생과 학생이 아닌 청소년 사이의 교감을 다루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겠다. 이용포의 <키스 미 달링>은 나이와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을 다룬다. 도덕이나 사회적 제도나 틀로서 사랑을 규정하거나 묶을 수 없거나 그것이 가능하다는 논리와 교훈이 아니라 재치있는 문장으로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고 가벼운 고민으로 넘겨 버리는 아쉬움이 있다.

  박수와 응원을 보내고 싶은 시리즈이며 분명히 필요한 종류의 책들이 발간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욕심이겠으나 보다 깊고 다양한 방식의 고민들을 담아낼 수 있는 작가들의 노력과 출판사의 기획이 요구된다. <호기심>이라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주제를 가지고 10대들의 ‘사랑과 성’을 다루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았다. 그 시절을 거쳐 온 성인들에게는 생에 첫 경험들을 통해 성숙해가는 수많은 후배들을 이해하는 도구가 될 수 있겠다. 방학을 맞은 학생과 학생이 아닌 청소년들 그리고 그들의 부모들이 함께 읽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계속되길 바란다.


080109-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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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0 0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2 0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2 2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4 2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이청준이라는 소설가의 이름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잠시 아득해진다. 20년 쯤 기억과 감정의 퇴행을 잠시 경험한다. 내게 문학적 감수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처음 건드려 진 적이 있다면 이청준과 정호승에 의해서였다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헤르만 헤세나 전혜린처럼 그들에게 다가간 것은 나였지만 마음의 문을 열어준 것은 그들의 글이었다. <새벽편지>와 <서울의 예수>의 빛바랜 표지처럼 <매잡이>, <당신들의 천국>, <퇴원>, <병신과 머저리>, <잔인한 도시> 등 헤아릴 수 없는 장단편을 통해 내게 문장의 힘을 보여 주었던 작가가 바로 이청준이었다.

  <서편제>, <신화를 삼킨 섬> 등 수많은 작품을 읽어오면서 백발이 되어가는 그의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나도 나이를 먹어간다. 동시대의 작가와 교감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독자에게는 큰 행복이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의미있는 작가들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곳을 다시 잊어야했다>는 그의 문학 인생 40여년을 정리하는 듯하다. 70이 다 된 노년에 이르면 모든 책이 마지막일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더 애틋하게 읽혔다. 순전히 개인적인 감회에 불과하겠지만, 그를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말이다.

  일곱 편의 단편과 네 편의 에세이 소설을 묶어 놓은 이 책은 김윤식의 ‘아, 이청준’이라는 글로 시작해서 ‘소설이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라는 이윤옥의 글로 마감된다. 독특한 형식만큼 새롭고 충격적이거나 특별함은 없다. 이청준다운 글과 소회들이 밝혀져 있고 그가 생각하는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밝혀주는 글들이 대부분이다. 애정어린 시선으로 혹은 그간 그의 소설들을 꾸준히 읽어오지 않은 독자들이라면 느낌과 감동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청준에 따르면 “예술창작 작업은 사물의 현상과 본질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통해 삶과 세계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노릇”이다. 존재론의 핵심인 우리 삶의 비극적 실존의 문제를 평생의 화두로 삼아온 작가의 뒷모습은 견고한 바위처럼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운다. 설명할 수 없는 삶의 부조리와 비극적 진실들을 드러내는 작업이 어디 쉬울 수 있겠는가. 자칫 우울한 감상의 토로이거나 어설프고 작위적인 말장난에 그칠 수 있는 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 이청준이 하고 싶었던, 드러내고 싶었던 삶의 진실들은 ‘삶과 세계의 진정성’으로 요약할 수 있을까?

  단편 ‘천년의 돛배’나 ‘그곳을 다시 잊어야했다’, ‘지하실’은 죽음과 상실의 관점에서 우리가 걸어온 역사와 삶의 비극성을 조망하고 있다. 바다위의 떠 있는 섬은 떠날 수 없고 가라앉을 수도 없다. 치열한 생존의 조건에서 밀려나 망각과 실존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그곳을 다시 잊어야했다’와 ‘태평양 항로의 문주란 설화’는 경험적 서사를 통해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를 허물고 있는 듯하다.

  ‘이상한 선물’이나 ‘부처님은 어찌하시렵니까?’, ‘조물주의 그림’은 관찰자의 시선으로 관계 맺고 있는 주변 인물들이나 공동체의 신화를 그려내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이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에 기대고 확실한 증거들에 의해 규정된다면 유리구슬처럼 투명해 질 것이다. 우리들의 삶은. 허나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들과 그것이 진실인 줄도 모르고 지나치는 것들은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되어 우리들의 가슴속에 웅숭깊게 자리를 잡는다. 결코 어려운 말과 난해한 문장으로 그것을 표현하지 않는 이청준의 문장들은 머리보다 가슴에 와 부딪히고 먼 바다에 떠 있는 하나의 섬처럼 외롭고 쓸쓸하다. 그것이 ‘조물주의 그림’이다.

밤바다 가운데로 나가 있으면
섬들이 사방에서 나를 에워싸고 다가든다.
섬들이 어찌 나를 에워싸랴.
섬들은 저희끼리 밤 이야기 위해 서로 둥글게 다가앉는 것 뿐이다.
섬들 가운데에 나는 없다.
- ‘조물주의 그림’중에서(본문 261페이지)


  가슴 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인물들의 ‘종주먹질’이 없다면 이청준은 소설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보다 넓고 깊게 혹은 다양하고 새로운 소설을 나는 기대하지 않는다. 이청준에게. 남겨진 시간동안 그가 살아온 깊이만큼 보아온 세계만큼 삶과 세계의 진정성에 대해 보다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놓길 바란다.

  그저 오래 소설을 써 왔기 때문에 주어지는 상찬과는 거리가 먼 이청준의 소설은 그대로 우리들 삶의 역사이고 오래된 미래이다. 한 해를 마무리 하는 시점에 읽는 소설로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간 이청준의 소설을 읽어 온 독자라면, 혹은 이청준을 읽기 시작한 독자라면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는 책이 될 것이다. 좋은 책에서는 항상 향기가 난다.


071226-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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