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의 발달 문학과지성 시인선 35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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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시를 쓸 수 있는 시대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고 말한 아도르노의 말은 역사와 시대현실과 詩의 거리를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지금은 서정시를 쓸 수 있는 시대인가? 그 기준은 시인마다 다르겠지만 시대를 막론하고 서정시는 시의 본령으로 자리매김한 채 사람들에게 언어의 쾌감과 감정의 순수성에 기대왔다. 일제 식민지 지배가 극에 달한 시절에도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을 볼 수 있는 눈은 시인의 몫일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서정시를 무엇이라 명명할 수 있을지는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태준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나가면서 서정시의 본질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늘의 발달>은 <가재미>로 촉발된 문태준에 대한 관심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그의 시는 다른 시인이 접근하기 힘든, 아니 걷지 않는 길에 대한 ‘경외’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우리말의 의미망을 확장시키고 과거와 현재를 이어나가는 힘은 누구에게나 생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 시의 특징은 말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기막힌 의성어와 의태어의 배열이나 느린 템포로 사물의 동작을 집어내고 마음의 흐름을 짚어내는 솜씨가 탁월하다.

  시를 쓰는 사람은 무릇 다른 세계를 바라볼 줄 아는 눈과 특별한 감각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부단한 노력이나 탁월한 감성이 어우러져야 하고 무엇보다도 대상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관심이 전제되어야 한다. 무엇이든 그렇게 사랑하면 잘 알게 된다. 문태준의 눈에 비친 사물들과 사람들, 혹은 그늘들이 맑고 투명하게 비친다.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말이 있어

오늘은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말이 있어

길을 가다 우연히 갈대숲 사이 개개비의 둥지를 보았네

그대여, 나의 못다 한 말은

이 외곽의 둥지처럼 천둥과 바람과 눈보라를 홀로 맞고 있으리

둥지에는 두어 개 부드럽고 말갛고 따뜻한 새알이 있으리

나의 가슴을 열어젖히면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나의 말은

막 껍질을 깨치고 나올 듯

작디작은 심장으로 뛰고 있으리

작디작은 심장이 두근거리며 막 껍질을 깨치고 나올 듯한 ‘나의 말’은 무엇일까? 시어의 다의성은 이렇게 읽는 사람마다 다른 해석이 가능하도록 의미가 풍부하다. 누구에게나 그럴듯하게 적용되지만 아무에게나 비유될 수 없는 말들의 잔치가 흥성스럽다.

그물

수풀을 지나간다

가을벌레들이 운다

몇 겹의 그물

완만하고 탄력이 있다

촘촘하다가 헐렁하다

발이 폭폭 빠지지는 않는다

내 심장보다는 크게 얽어놓아

멈추어 서게 한다

잠시 끌었다가 살짝 다시 놓아준다

당신과 내가

언제부터 이곳서 살았던가,

바람을 타고 날아 흩어지는

  가린 것도 보이는 것도 아닌, 막힌 듯 뚫려있는 그물에 대한 반응은 새롭다. 자연과 교감하거나 함께 호흡하는 사람의 모습만큼 평화로운 것은 없다. 당신과 내가 언제부터 이곳서 살았는지 모르지만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모든 것은 무화無化된다. 바람처럼 사라지는 모든 것은 그물 사이로 달아났다.

장님

찔레나무에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그 곁에
오금이 저리도록 앉아 있었습니다
하나의 의혹이 생겨났습니다
그대의 가슴은 어디에 있습니까
찔레 덤불 속 같은 곳
헝클어진 곳보다 보다 안쪽
막 눈물이 돌기 시작하는 곳
그곳으로
날아오는 새와 날아오는 구름
그곳으로부터
날아가는 새와 날아가는 구름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호기심과 열망은 인간의 본능이다. 막 눈물이 돌기 시작하는 곳이 가슴일까? 세상의 모든 사랑은 가슴에서 시작하는 것일까? 그곳이 새와 구름의 둥지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그곳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영원회귀의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리라. 하지만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깨달음?

흔들리다

나는 코스모스를 보고 있다
나는 중심
코스모스는 주변
바람이 오고 코스모스가
흔들린다, 나는 흔들리는
코스모스를 보고 있다
코스모스가 흔들린다고 생각할 때
중심이 흔들린다
욕조의 물이 빠지며 줄어들듯
중심은
나로부터 코스모스에게
서서히 넘어간다
나는 주변
코스모스는 중심
나는 코스모스를
코스모스는 나를
흔들리며 바라보고 있다


  기막히다. 나의 주변이 코스모스였다가 내가 코스모스의 주변이 된다. ‘흔들리며’ 바라보는 나와 너의 모습이 다를 리 없다. 하나가 되기 싶어도 중심조차 흔들린다. 가끔 바람이 불어오지만 그것은 핑계일 뿐이다.

  그러나, 결국 내가 코스모스가 되고 코스모스가 내가 되는 일은 없다.

살얼음 아래 같은 데 1

가는, 조촘조촘 가다 가만히 한자리서 멈추는 물고기처럼

가라앉은 물돌 곁에서, 썩은 나뭇잎 밑에서 조으는 물고기처럼

추운 저녁만 있으나 야위고 맑은 얼굴로

마음아, 너 갈 데라도 있니?

살얼음 아래 같은 데

흰 매화 핀 살얼음 아래 같은 데


  살얼음 아래 같은 데 조으는 물고기처럼 사는 게 마음이 아니라면 그렇게 시리고 맑고 투명하게 빛날 수 없다. 갈 데 없는 마음은 고여 있고, 고인 마음은 어디 흐를 데를 찾아 헤매게 마련이다. ‘조촘조촘’ 가다가 혹은 얼어버리기도 하지만 살얼음은 언젠가 녹아 흐른다.

이별이 오면

이별이 오면 누구든 나에게 바지락 씻는 소리를 후련하게 들려주었으면
바짓단을 걷어 올리고 엉덩이를 들썩들썩하면서
바지락과 바지락을 맞비벼 치대듯이 우악스럽게 바지락 씻는 소리를 들려주었으면
그러면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입을 틀어막고 구석구석 안 아픈 데가 없겠지
가장 아픈 데가 깔깔하고 깔깔한 그 바지락 씻는 소리를 마지막까지 듣겠지
오늘은 누가 나에게 이별이 되고 나는 또 개흙눈이 되어서


  그렇게 사람 사는 세상과 이별의 순간이 오겠지.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주변의 모든 사물들과 이별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시인은 구석구석 안 아픈 데가 없다고 말하지만 이별의 고통이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다.

  우악스럽게 바지락을 씻을 때처럼 온 힘을 다해도 그렇게 서로 부대끼며 생채기를 내도 결국은 제자리 걸음이다. 어디 떠나 본 적도 없고 한 걸음 다가서지도 못했을 뿐!

  <그늘의 발달>은 문태준의 지금과 우리시의 내일을 함께 보여주는 것같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신호탄을 쏘아올리지만 그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은 제각각이다. 문태준 시의 진경을 이제부터 가만 기다려 볼 참이다.

  엉뚱한 상상 하나. 동갑내기 동향출신인 김연수와 문태준은 친구일까?

080820-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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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 창비시선 286
문인수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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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한 단면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하나의 장면과 인상을 풀어내는 능력, 간결한 언어로 응축시켜내는 힘은 저절로 길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인수의 시들을 읽으면서 세월의 힘과 삶의 무게, 그것을 바라보는 예리한 시선에 감탄하다. 수천년 아니, 수만년 동안 지속되어 온 인간의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생은 한마디로 정리될 수 없다. 어차피 찰나의 인상에 불과하다. 나는 물론 우리들 모두의 삶은 그렇게 지리멸렬하지만 무엇가를 찾으려는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은 더욱 어렵다. 모든 것을 손에서 놓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장면들을 바라보려는 것도 또다른 욕심일까?

  세월의 골을 따라 존재의 무게감을 느낄 수 있는 문인수의 <배꼽>은 만만치 않은 중량감을 느끼게 한다. 가벼움의 시대, 키취 세대를 즐기던 90년대를 넘어 이제는 우리 시대를 무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이념도 실존도 더 이상 시가 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는 건 아닐까? 항상 책 속에서 길을 잃고 끝없는 질문 속에서 허덕인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바람부는 날 길가에 떠 다니던 검은 비닐봉지를 바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입구도 출구도 모른 채 바람을 잔뜩 머금고 일방적으로 질주하는 바람의 맹렬함 덕분에 하늘로 날아 오를 수 있었던 비닐봉지에게 묻는다. 우리들은 도대체 무엇을 향해 떠올랐다가 힘없이 가라앉는 것이냐고.

비닐봉지

차들이 검은 비닐봉지 하나를 연신 치고
달아난다. 비닐봉지는 힘없이 떴다 가라앉다 하면서
찢어질 듯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지만 도통
소리가 없다. 연속으로 들이닥치는 무서운 속력 앞에, 뒤에, 두둥실
웬 허공이 저리 너그러운지.

누군가의 발목에서 떨어져나온 그림자, 그늘인 것 같다. 과거지사는 더 이상 다치지 않는다. 이제
적의 멱살도 박치기도 없는 춤, 검은 비닐봉지 하나가 또 잔뜩
바람을 삼킨다. 대단한 소화능력이다. 시장통,
거리의 밥통이다. 금세 홀쭉하다.


  때로는 우연에 기댈 때도 있다. 박태환처럼 뚜렷한 목표와 결승점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물에게 온몸을 내맡기고 전력을 다해 손이 닿는 순간 이제 그는 어디로 가야할까? 경쟁도 없고 확인된 적도 없는 싸움을 계속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지. 그래서 거리의 밥통은 금세 홀쭉해지는 것인지.

배꼽

외곽지 야산 버려빈 집에
한 사내가 들어와 매일 출퇴근한다.
전에 없던 길 한가닥이 무슨 탯줄처럼
꿈틀꿈틀 길게 뽑혀나온다.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이 있구나.
그 어떤 희망에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부지기수다.
마당에 나뒹구는 소주병, 그 위를 뒤덮으며 폭우 지나갔다.
풀의 화염이 더 오래 지나간다.
우거진 풀을 베자 뱀허물이 여럿 나왔으나
사내는 아직 웅크린 한 채의 폐가다.

폐가는 이제 낡은 외투처럼 사내를 품는지.
밤새도록 쌈 싸먹은 뒤꼍 토란잎의 빗소리, 삽짝 정낭 지분 위 조롱박이 시퍼렇게 시퍼런 똥자루처럼
힘껏 빠져나오는 아침, 젖은 길이 비리다.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은 있다. 태초에 탄생이 있으니 소멸이 있고 삶이 있으니 그 종착역은 죽음이 될 것이라는 자명한 사실 앞에 우리는 조금 겸손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내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부리며 산다.

  ‘그 어떤 희망에도 말 걸지 않는 세월’이 얼마나 많은가? 아니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절망의 종착역이 희망은 아니다. 희망을 담보로 절망이 찾아온다면 견딜만 하겠지만 절망은 또 다른 절망으로 치닫고 희망은 그저 생을 유지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신기루에 불과할 때가 더 많다. 헛된 희망 고문으로 환상 속에 현실을 방기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도 그것조차 없다면?

  우리 모두는 도망자가 되는 것이다.

도망자

밤새 눈 내려덮였다.
저 일격이 날 때려눕힌 것일까
세상 모든 길, 길을 풀고 돌아가버렸다.

일생이 전면, 불문에 붙여진 것 같다.
사라진 기억들이 삼엄하다.

누가 또 밖에 나가고 싶으랴,
나가고 싶지 않으랴.

낯선 곳에서 창을 열고 멀리 내다보는
흰 복면의 죄, 말없다.


  사라진 것을 우리는 ‘기억’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라진 기억’은 모순이다. 하지만 삼엄하긴 하다. 하늘은 먼저 가을을 예감한다. 지상의 뜨거운 열기를 비웃듯 뭉게 구름은 한가롭고 푸른 하늘은 여유있다. ‘낯선 곳에서 창을 열고 멀리 내다보는’ 여유를 찾아 헤매는 것이 우리들의 먼 미래의 희망이다. 아닌가? 여전히 말없이 그것을 내다 볼 밖에.

  손에 잡힐 듯이 눈앞에 떠 있는 흰 구름이 소리도 없이 사라지고 다른 모습으로 헤어졌다 다시 만난다. 목적 없이 그렇게 흘러가는 아주 오래된 기억이 배꼽이다. 생의 근원이며 절망의 출발이고 다시 돌아가야 할 침묵의 바다이다. 가만히 내 배꼽을 들여다본다.


080810-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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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착해질 때
서정홍 지음 / 나라말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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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로 쓰는 글이 있고 가슴으로 쓰는 글이 있다. 차가운 이성과 냉철한 판단력, 비판적 관찰력은 나를 깨어나게 하고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한다. 반면에 뜨거운 가슴과 열정으로 생에 대한 감각을 보여주는 글은 부드럽고 진한 감동을 준다. 영혼의 깊은 울림을 주는 글과 가슴을 촉촉하게 적시는 글 중 어느 것을 우위에 둘 수는 없다. 검의 양날처럼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서정홍의 새 시집 <내가 가장 착해질 때>는 지금 창 밖에 후드득거리는 빗소리처럼 조용하고 차분하게 가슴을 적신다. 끝없는 관심과 애정어린 관찰을 통해 대상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생활’이 곧 시가 되는 감동을 경험한다. 농촌에서 몸소 겪은 일들을 들려주는 솜씨가 탁월하다. 농부가 되어 살아가는 시인의 모습은 피상적으로 낭만과 연결시킬 수 있겠지만 그에게는 생활이며 힘겨운 삶의 현장이다. 하지만 넉넉한 마음으로 이웃을 보듬고 자연을 대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우리의 걱정은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수많은 시집을 읽어왔지만 정말 오랜만에 눈물이 날 뻔한 시들을 여럿 만난 시집이다. 먼 데 하늘을 바라보며 산다는 게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면 내겐 이미 아주 소중한 시집이 되어 버렸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진솔한 몸짓과 꾸밈없는 목소리에서 출발한다. 보태지도 덜어내지도 않고 인상적인 순간이나 찰나를 잡아내고 혹은 긴 호흡으로 타인의 생을 숙연하게 보여준다. 시는 그렇게 우리를 조금씩 젖게 만든다. 깊은 밤 어둠을 적시는 장마처럼.

기다리는 임은 오지 않고

봄비가 내리는데
외송 할머니가 비를 맞으며
정자나무 아래 혼자 서 있다.

“할머니, 누굴 기다리세요?”
“읍에 일 보러 나간 영감
하매나 올랑가* 하매나 올랑가
기다렸는데 아직도 안 오네.”
“할머니, 옷이 다 젖었어요.
감기 들면 어쩌시려고.”

눈치도 없이 비는 자꾸 내려
야윈 할머니 어깨 위에 뚝뚝 떨어지고
멀리 개 짖는 소리만 아득한데
하매나 올랑가 하매나 올랑가
기다리는 임은 오지 않고…….

* 하매나 올랑가 : 이제나저제나 오려나.

  그리움엔 나이가 없다. 읍내 나간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마음은 청춘의 그것과 다름없다. 생의 기억과 행복의 순간들은 늘 반복되고 온몸으로 그리고 본능적으로 삶에 충실한 사람들은 순수하며 거짓이 없다. 그래서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고개 숙이게 한다. 아무것도 아닌 순간들이, 장면들이 마치 거울처럼 우리를 되비친다.

사람이 그리운 날

여럿이 어울려
산밭에서 고구마 싹을 심다가도
여럿이 어울려
저녁밥 먹다가도
사람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그리워 미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혹은 익숙한 곳에서 우리는 사람을 그리워한다. 어깨를 부대끼며 혼잡한 거리를 걷다가 느끼는 군중속의 고독이 차라리 행복할 지도 모르겠다. 산밭에서, 어울려 먹는 밥상에서 갑자기 사람이 그립다는 말은 무엇인가. 감당해 본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겠다. 미치도록 누군가를 그리워해 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겠다.

아름다운 시절 3
- 외식하던날

  한 달에 한 번 우리 식구들 외식하는 날이었다. 아내는 아이들에게 미리 저녁밥을 먹이고 통닭집으로 데려갔다. 한 달에 한 번 닭고기 맛을 볼 수 있는 날, 한창 자랄 나이에 닭 한 마리씩 거뜬하게 먹어 치우는 모습이 보기만 해도 흐뭇할 텐데 왜 저녁밥을 먹이고 데려갔을까?

  아이들이 다 자란 이제야 알았다. 닭 한 마리 값이라도 아껴서, 가난한 셋방살이 퍼뜩 벗어나려고 저녁밥을 먹이고 외식했다는 것을. 그런데 스무 살이 지난 우리 아이들은, 지금도 빈속에 고기를 먹지 못한다. 어릴 적부터 밥을 먹고 나서 고기를 먹는 버릇이 들었기 때문이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먹을 수 있는 세상인데, 왜 문득문득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일까.


  거시적인 안목으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비판하고 자본주의의 갈등을 분석하고 이데올로기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다가 이런 시를 만나면 맥이 탁 풀린다. 추상적 이론보다 삶이 구체성이 주는 감동은 말로 표현되지 않는 법이다. 밥을 먹이고 닭고기를 먹으러 가는 가족의 뒷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이와 유사한 우리의 이웃들은 점점 늘어만 간다. 그들만의 리그는 더더욱 치열해지고 가슴만 따뜻한 이웃들은 그 이유도 모른 채 어떻게 이 현실을 바라보고 실천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조차 할 수 없을 때가 많다. 그래서 김수영의 말대로 우리는 왜 작은 것에만 분노하는지 스스로에게 반문하기도 한다.

이른 아침에

감자밭 일구느라
괭이질을 하는데
땅속에서 개구리 한 마리
툭 튀어나왔습니다.

날카로운 괭이 날에
한쪽 다리가 끊어진 채
나를 쳐다봅니다.

하던 일 멈추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루 내내
밥도 먹히지 않았습니다.
물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잠시 가슴이 뻐근했다.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사람이 있다는 말인지. 착한 사람을 보면 화가 난다. 그 마음의 언저리가 헤아려지기 때문에 더욱 그런지도 모르겠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감을 가진 착한 인간은 결국 자연에서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아는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가장 착해질 때’를 이렇게 말한다.

내가 가장 착해질 때

이랑을 만들고

흙을 만지며

씨를 뿌릴 때

나는 저절로 착해진다.


  이랑을 만들고 흙을 만지고 씨를 뿌려 착해질 수 있다면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명령하고 싶다. 모두 나가 이 땅의 흙을 만져보고 씨를 뿌려 보라고. 타인의 배려와 나눔을 교실에서 배울 수 있을까? 온몸으로 감당해야 할 순간들을 책 속에서 만날 수 있을까? 우리가 안다고 하는, 배웠다고 하는 것은 결국 몸의 기억이며 습관이다. 그렇게 배워야 이런 시를 쓸 수 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
내가 이른 새벽부터 일하면
누군가 아무 걱정없이
편안하게 쉴 수 있기를.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
내가 사나흘 굶으면
누군가 아무 걱정 없이
배불리 먹을 수 있기를.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
내가 세상 걱정 때문에 잠 못 들면
누군가 아무 걱정 없이
깊은 사랑 나눌 수 있기를.


  자기 희생을 통해 타인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는 지극히 도덕적이고 이타적인 생각은 배울 수 없다. 스스로 깨닫거나 체험을 통해 알아가는 것이다. 나를 통해 너를 배우고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눈물처럼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을 시인이라고 불러야 한다. 머리고 쓰고 정제된 언어로 매끄럽게 표현된 시가 울림과 감동이 없는 이유는 바로 서정홍과 같이 온몸으로 쓰는 방법을 아직 모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 시인은 다섯줄 짜리 시작법을 시로 썼다.

  이렇게 명쾌하고 단순한 진리를 여러 권의 책으로 묶어낸 수많은 평론가와 시인들을 부끄럽게 한다. 재밌는 말장난이 아니라 시란 무엇인지 극명하게 드러낸 기막힌 구절이다. 서정홍은 이 시를 통해 그리고 앞서 인용한 시들을 통해 시의 본질을 말하고 있으며 그 진경이 무엇인지 소박하고 깨끗하게 펼쳐 보여준다.

  편안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읽기만 하면 되는 이 책을 통해 나는 또 다른 세상을 배웠다.

시인이란

시인이란
쉬운 걸
어렵게 쓰는 사람이 아니라
어려운 걸
쉽게 쓰는 사람이다.                                                   


080702-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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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딸의 7일간
이가라시 다카히사 지음, 이영미 옮김 / 까멜레옹(비룡소)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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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와 명왕성만큼 닿을 수 없는 관계가 아버지와 딸의 관계가 아닐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 어머니와 딸의 관계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아버지와 딸의 관계이다. 물론 성격과 상황에 따라 관계는 변화하고 서로를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진다. 그것은 나이라고 하는 불가항력적인 요인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어린시절 아장거리며 품에 안기던 기억, 선머슴 같던 유년시절을 거쳐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아버지와 딸은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세대가 달라지고 시간이 흘러도 그만큼의 시차가 존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 딸이 어머니가 되고 나이가 들면서 그 때 아버지를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 둘의 관계는 또 다른 양상으로 변화하며 또 다른 관점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된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차이와 세대 차이 그리고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가 만들어내는 복잡한 관계는 가장 친밀하고 애틋한 관계가 되기도 하지만 애증의 거리를 회복할 수 없도록 만들기도 한다.

  <아빠와 딸의 7일간>은 환상적 리얼리즘이다. 의학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을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당황스럽고 놀랄만한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어 환상적이다. 하지만 가장 보편적이고 공감할 만한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돌아보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실적이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있어 서로를 이해하는 상황극이나 역할극의 성격을 보여준다. 흔히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을 쓰지만 실제로 그렇게 해 볼 수는 없다. 다만 공감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자신의 경험과 느낌으로 유추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것을 실제 상황으로 치환시켜 놓고 있다. 아버지가 딸이 되고 딸이 아버지가 되는 상황.

  고등학교 2학년 여고생과 마흔 일곱 살 중년의 아버지는 대화도 없고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부녀지간이다. 아버지는 딸에게 말도 건네고 친해보려고 무던히 노력하지만 세대 차이와 생각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신세대 딸과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지는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지진으로 인한 전차 사고로 인해 두 사람은 심한 충격을 받고 깨어나지만 몸이 뒤바뀌는 황당한 일을 겪게 된다.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 부분은 소설만이 가능한 상상력의 힘이다. 다른 소설이나 영화에서 여러 차례 반복되어 신선도가 떨어지긴 하지만 아버지와 딸의 몸이 바뀐다는 상상은 끔찍하지만 재미있다.

  일본에서는 이미 드라마로 방영된다는 데 책을 읽다가 알게 되었다. 상황 설정이 재미있어 호기심에 읽게 되었지만 나름대로 관계에 대한 의문과 이해를 바탕에 두고 있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읽게 되었다. 문장은 가볍고 쉽게 읽힌다. 요즘 팔리는 대부분의 일본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담  이 넘어가는 책장과 코믹 터치의 문장은 흡인력있게 독자들에게 다가갈 만하다. 재미와 감동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최고는 아니지만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이다.

  타인은 이해 불가능한 텍스트에 불과하다.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소모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려는 무모한 도전 때문에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스스로 자괴감을 느끼며 외로움과 절망 속을 헤매기도 한다. 내가 아닌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의 생각을 존중하는 것은 어쩌면 산을 옮기는 것보다 힘들다. 주변을 보라. 사소한 언쟁에서 중요한 판단에 이르기까지 타인에 대한 배려나 인정은 정말 어렵다. 나이가 들수록 심해지는 이 현상을 나는 보수화라고 부른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이 책에서 보수적인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딸이다. 어리기 때문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으나 아버지에 대한 이해도 노력도 부족하다. 오히려 아버지가 딸에 대한 배려와 노력이 드러난다. 물론 사고 이후에는 서로의 입장에서 상대를 바라보기 때문에 완전히 뒤바뀐 상황과 시선이 나타난다. 자신의 장점이 상대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나의 생각만이 옳은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 것인지 깨닫는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을 높이 평가할 만하다.

  기본적인 서사구조와 구성 자체는 지극히 단순하다. 7일 만에 사고로 다시 제자리를 찾으면서 소설은 막을 내린다. 그간 부녀가 겪었던 지극히 비일상적이고 황당한 순간들은 에피소드로 남겨진다. 제 자리로 돌아온 두 사람은 또 예전처럼 다정한 대화도 없고 멀고 먼 존재로 돌아간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는 폭과 깊이는 분명 이전과 달라진다. 당연하게도 그것은 지난 7일간의 경험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특별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통과제의를 겪고 어른으로 성숙하는 성장소설처럼 몸이 뒤바뀐 7일간은 두 부녀에게 지독한 통과의례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로 적당해 보인다. 다소 황당하지만 흥미 있는 설정이기 때문이다. 그 상황을 코믹하고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내용 또한 그러하고 여고생의 연애와 중년 남성의 일을 꼼꼼히 담고 있어 폭넓은 계층의 관심을 끌 만하다.

  가볍고 재미있는 소재로 한번쯤 서로의 관계를 살펴보고 고민해 볼 수 있다면 소설이 할 수 있는 역할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사춘기 딸을 둔 아버지들에게, 중년의 아버지를 둔 딸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멀지 않은 나의 미래는 아닌가 싶어지기도 해서 서글퍼지기도 하지만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고 위안을 삼는다. 아니 어쩌면 소설이 현실보다 사실적일 수 있다는 불안감을 위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080627-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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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 1 - 안드로메다 하이츠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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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은 가장 대중적이면서 가장 재미있는 문학의 장르임에 틀림없다. 모든 것이 ‘산업’의 이름으로 자본과 결합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소설의 서사 구조는 ‘스토리 텔링’ 산업을 견인하고 있다. 게임을 비롯해서 다양한 문화 산업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해서 창의성과 다양성은 미래 사회의 황금어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투자대비 높은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고 자원이 부족해도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은 과연 그런가? 소설의 전통적인 역할과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 진부하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최소한 인간 삶에 대한 깊은 통찰과 비판적인 시각으로 사회를 조망할 수 있는 눈이 없다면 그것은 소설이 아니라 쓰레기다. 고도의 지성과 감성을 자극하고 성찰적 관점을 제시해야 한다. 적어도 소설은 재미와 교훈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어도 최소한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는 매 순간 고민해야 한다.

  대단히 고급한 장르가 아니라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드라마나 영화와도 구별되어야 한다. ‘진짜’ 소설은 그래서 만나기 힘들다. 그런 소설을 쓸 만 한 작가를 우리는 존경하며 그의 작품을 기다린다. 쉽고 재미있는 내용만으로 판매부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고 해서, 즉 best seller가 best novel이 될 수는 없다.

  몇몇 일본 작가의 소설은 젊은(?) 독자층을 대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예민한 감수성과 감각적 문체는 깊이 고민하지 않고 즉각적인 몰입의 상태로 이끌어 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맛보지 못한 환상을 제공하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상황들을 부드럽게 이야기한다. 독자들은 빠져들고 열광한다. 게다가 시각적 영상 정보를 제공하는 영화로 제작된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은 <키친>과 <하드보일드 하드 럭> 두 편을 읽었다. 그리고 이 작품이 세 번째. 우연한 기회에 읽게 되었지만 다시는 읽지 않으리.

  <왕국> 시리즈는 3권으로 나왔는데 195*136 손바닥 만한 변형 판본 세 권을 합쳐바야 440여 페이지 밖에 안된다. 세 권의 책값을 합치면 무려 25,500원이다. 하드커버로 열심히 꾸몄으나 책보다는 돈에 혈안이 된 앵벌이로 보인다. 종이에 대한 예의가 없는 책이다. 한 권짜리 9,000원에 10,000원이면 충분하고도 남겠다. 책값은 차치하고라도 유명 작가라고 해서 신작을 이런 식으로 출판하고 독자들의 주머니를 털 작정이라면 출판사는 대오각성해야 할 것이다. 씁쓸함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 독자들은 바보가 되었나?

  그렇다면 이제 내용을 살펴보자. 완간을 기다리지 못할 정도로 재밌고 환상적인가? 오랜만에 기다렸던 대가의 신작으로 한 문장 한 문장 음미하며 천천히 읽을 만큼 심오한가? 이 책은 짜증스런 상태로 책을 읽어나가기는 참 오랜만의 경험이다.

작가도, 출판사도 반성하라는 위험한 충고를 감히 드린다. 리뷰를 쓰는 것도 부끄럽다.

080621-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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