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다보면 문득 창비시선 291
정희성 지음 / 창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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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의 흐름을 확인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나는 시인들의 나이듦을 통해 내 나이를 확인하고 세월을 절감한다. 가끔씩 그들의 사진을 통해 변해가는 모습을 확인한다. 나도 그렇게 변해갈 것이다. 눈에 보이는 나이가 아니라 시를 통해 확인되는 변화의 흐름은 가슴이 아리도록 슬프기도 하고 때로 낄낄거리기도 하고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정희성의 <저문강에 삽을 씻고>(1978)를 대하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1991)를 거쳐, <詩를 찾아서>(2001)을 다시 꺼내 뒤적여 본다. 책꽂이에 먼지가 쌓여가고 시인은 나이를 먹는다. 오랜만에 시집을 읽다가 웃었다. 편안하고 친근한 구절들은 결코 쉽게 나오지 않았다. 물론 단순히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지 않지만 그만한 연륜과 여유는 또 젊은 시인들에게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어느 쪽이든 날카롭고 첨예한 감각만큼 중요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이제 내 나이의 무게 때문이기도 하다면 지나치게 주관적 판단일까 모르겠다.

  시가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운 진경 속에서 길어 올린 맑은 시들이 언제나 그의 시를 기다리게 했다. 다작은 아니지만 나올 때마다 충분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시에 흠뻑 취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올해 읽은 최고의 시집으로 주저없이 이 시집을 꼽겠다.

희망

그 별은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 별은 어둠속에서 조용히
자기를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의 눈에나 모습을 드러낸다

  서시의 힘은 강렬하다. ‘희망’이 무엇인지 간결하게 말한다. 희망은 원하는 자의 눈에서나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눈 속에 주관적이고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희망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말이지만 희망은 별이다. 별은 어둠 속에서만 빛나며 찾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특별한 존재이다. 살아가면서 그 별은 눈에 보일 수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을날

길가의 코스모스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나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
선득하니,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그림자가 한층 길어졌다


  이 시를 읽고 내가 철렁했다. 미래를 예견하는 듯한 작가들의 글을 읽는 것은 불편하다. 오규원이 그랬고 이청준도 그랬다. 세월의 흐름 속에 사람이 죽어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지만 그것을 예견하거나 스스로를 돌아보기만 하는 시는 섬뜩하기까지 하다. 서글픈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시로 읽혔다.

  이 가을에 코스모스 그림자가 길어지면 예사롭게 보이지 않겠다. 벌써 피어있을 코스모스를 보지도 못하고 가을을 보내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 하루가 다르게 찬바람이 분다. 또 하늘빛이 달라졌다.

해골

저 몸서리치는
캄캄한 눈구멍이
이를 악물고
세상을 내다보고 있다
한때는 저 눈에
별이 빛났으리


  가슴이 철렁했다가 이제는 아득해지는 법이다. 시간의 풍화작용. 우리는 언젠가 무화無化된다. 존재는 소멸하고 마는 법이다.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릴 육신의 허망함이여. 이를 악물고 세상을 내다보지 말고 허허로운 눈빛으로 한 세상을 짊어지고 가자. 거기 그렇게 놓여있는 채로.

  누구나 해골이 되어 만난다. 허무혼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아주 먼 미래에 대한 후일담으로 읽었다. 한 때는 모든 사람의 눈에도 별이 빛났으리라. 살아있는 지금도 눈에 별 하나 없는 사람들과 더불어 오늘도 우리는 저 험한 정글을 향해 뛰어가고 있다.

희망공부

절망의 반대가 희망은 아니다
어두운 밤하늘에 별이 빛나듯
희망은 절망 속에 싹트는 거지
만약에 우리가 희망함이 적다면
그 누가 이 세상을 비추어줄까


  그래도 희망공부를 멈출 수는 없다. 여전히 시는 희망이며 시를 쓰고 읽는 일은 희망공부와 다름없다. 어두운 곳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별처럼 희망은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법이다. 이 세상을 비춰줄 마지막 불빛은 희망이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공부해야 한다. 잠시도 쉬지 말고 게으르고 누추한 곳에서 벗어나 희망을 비춰줘야 한다.

  그 희망이 때로는 먼 미래의 시간일 수도 있고 가까운 사랑일 수도 있겠다. 까만 밤하늘에 오늘도 별이 빛나는 이유는 아득한 그리움 때문이거나 보이지 않는 희망에게 기대기 위해서일 것이다. 모은 아픔과 상처를 보듬어줄 어둠에게 속삭여 본다. 작은 희망들이 모여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어 밤하늘의 별이 되고 은하수가 될 것이라고.



가까이 갈 수 없어
먼발치에 서서 보고 돌아왔다
내가 속으로 그리는 그 사람마냥
산이 어디 안 가고
그냥 거기 있어 마음 놓인다


  산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산이 아닌 것처럼. 그냥 거기 있는 사람은 영원이라는 기준으로 보면 찰나에 불과하다.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뭉스런 몸짓을 하는 것은 시인의 넉살이거나 정교한 희망이거나.

  주위를 둘러봐도 산은 보이지 않고 그저 야트막한 능선들이 이어져 있다면 또, 그 아니 즐거운가. 산이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놓일 것이 없으므로.


080925-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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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정도상 지음 / 창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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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붉게피는 남쪽나라 내고향
언덕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고름 입에물고 눈물 젖어져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믿을 사람아,

달뜨는 저녘이면 노래하던 동창생
천리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
작년봄에 모여앉아 배긴사진
하염없이 바라보니 즐거운 시절아.


  인터넷을 뒤적거려 패티 김과 백난아가 부른 ‘찔레꽃’을 들었다.

엄마의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하나씩 따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밤깊어 까만데 엄마 혼자서
하얀 가루 아프게 내려오시네
밤마다 꾸는 꿈은 하얀 엄마꿈
산등성이 나무로 내려오시네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초가집 뒷산길 어두워질때
엄마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이어서, 정하나와 이은미가 부른 ‘찔레꽃’을 들었다.

  정도상의 연작소설 <찔레꽃>은 처음부터 익숙한 찔레꽃의 선율이 떠올랐다. 다만 ‘찔레꽃 붉게피는 북쪽나라 내고향~’이라고 가사를 바꾸어 부른다면 이 소설에 더욱 잘 어울린다. 고향과 어머니는 도시의 삶에 익숙한 우리들에게도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전해준다. 언젠가 어딘가로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는 사람은 그리움을 안다. 파편화된 삶의 조각들이 또 하나의 퍼즐처럼 연결된 곳에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최소한 물질적 풍요로움을 누리게 때문이다.

  기본적인 생활 여건으로부터 추방당한 사람들의 신산스러움을 겪어보지 않는 나로서는 공감의 능력만을 최대한 발휘해 볼 뿐이다. 6.25와 1.4후퇴를 기억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후세대의 잘못은 아니다. 다만 동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외면은 조금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분단 50년 세월이 훌쩍 지났지만 남과 북의 관계는 지구상의 어느 곳보다 첨예한 대립을 유지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때문인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북 정책은 일관성을 잃었고 2008년 9월 현재 북한은 핵연료봉 폐기를 정지한 상태이다. 한반도의 문제는 여전히 우리의 손을 떠나있고 6자회담이라는 주변국들과의 역학 관계 속에서 풀어낼 수밖에 없다. 미국의 주도권 아래 나머지는 들러리에 불과하다. 이명박 정권은 한 술 더 뜨고 있다. 무조건적 퍼주기를 중단하겠다는 선언과 북한의 인권 문제를 거론하고 나섰다. 남북관계는 경색국면으로 접어든 지 오래고 평화와 화합의 노력은 중단된 지 오래다. 반목과 질시로 민족의 통일이 가능한지 궁금하다.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생존의 문제가 되어버린 남북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과 태도가 달라져야 하지 않은가. 위정자들이 바라보는 남북관계는 정책의 일관성 없이 5년마다 바뀌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국민들도 모두 동의하고 있는지 먹고 사는 일이 바빠 관심이 없는 것인지.

  황석영의 <바리데기>를 통해 독자들은 무엇을 읽어냈는지 모르겠다. 정도상의 <찔레꽃>은 우리에게 또 어떤 의미를 던져주었는지 알 수 없다. 단순히 탈북 여성 문제를 다룬 이색적인 소설로 비춰지는지 아니면 우리 형제와 부모들이 겪고 있는 진행형의 아픔인지. 단편들이 모여 연작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이 소설은 북한의 주민들이 겪고 있는 삶의 모습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작가의 직간접적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 현장감 넘치는 묘사와 생생한 표현들이 소설의 긴장감을 더해준다. 겨울 압록강변에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충심이었다가 메이나였다가 소소였다가 은미로 탈바꿈하는 한 여성을 통해 이 시대의 비극을 극명하게 전달하고 있다.

  생존의 문제인 탈북자에게 정치적 이념과 종교적 시혜 문제로 접근하는 모든 주변 상황들을 비웃고 있기도 한 이 소설은 그들이 과연 한국 사회에서 어떤 사람들로 화합하는 지의 문제를 거론하기보다 현재 상황의 심각성과 그들의 과연 우리와 무관한 사람들인지 되묻고 있는 듯하다. 독자 일반의 각성을 촉구하는 프로파간다가 아니라 조금 더 넓은 시각과 열린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작가의 메시지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소설의 감동은 기발한 아이디어와 감칠맛 나는 문장으로 전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이렇게 시대현실을 투명하게 비춰주는 거울의 역할을 할 때가 더 많다. 정도상의 소설은 아프고 쓰린 생채기를 눈앞에 정면으로 드러내고 있어 독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그 불편함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부지런히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

  진정으로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생각한다면 21세기의 유랑민이 되어버린 그들의 삶과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한다. 정치적, 군사적 역학 관계는 미국의 패권주의의 들러리에 불과함을 직시해야 한다. 개방과 호혜의 원칙만이 우리 민족이 공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원칙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순진하고 이상적 대안이 아니다.

  반인권적 반평화적 행위를 서슴지 않는 정부와 국가권력이야말로 민족의 화합을 더디게 하며 더불어 함께 공존해야 한다는 당연한 진리로부터 국민들을 멀어지게 하고 있다. 한 권의 소설로 사람들의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작가가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우리들 삶의 중요한 부분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함께 고민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그것을 감동적인 소설로 형상화해내는 작업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정권이 바뀐 지 1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모든 분야에서 우려할 만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근현대사 교과서가 좌편향이라 손을 봐야겠단다. 국민 대다수가 노동자로 살아가는 데도 노동자의 권리나 노동법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비정상적인 나라에서 이제 또 다시 국가 지배이데올로기의 망령이 살아나고 있다. 박정희, 전두환 시절의 부활이 멀지 않았다. ‘용비어천가’를 달달 외워 대학에 입학하고 신경림이나 김지하의 작품을 빨갱이의 시로 몰아 문학 교과서에서 삭제하는 날이 머지 않았다. 우리는 가만히 손놓고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저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리라. 오, 필승~ 대.한.민.국!

  10년 후에, 아니 지금 이 시대의 작가들은 도대체 무엇을 쓰고 있으며 이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해졌다. 갑자기.


08092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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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나의 마나님
다비드 아비께르 지음, 김윤진 옮김 / 창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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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결혼이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사랑도 결혼이 필요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며
결혼도 때로는 외로운 것이다


  정호승의 시 ‘결혼에 대하여’의 마지막 부분이다. 결혼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인 시대에 살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이라는 사회적 약속에 충실하게 살아간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선택한 삶의 형태가 가장 뛰어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아직 다른 대안은 없는 듯하다. 인류의 결혼 형태는 모계사회의 일처다부제, 가부장적 일부다처제를 거쳐 일부일처제로 정착된 듯하다. 인류학자들은 향후 백년 동안 사라지게 될 사회 제도 중 첫 번째로 일부일처제를 꼽기도 한다지만 아직까지는 가장 보편적이고 유효한 사회의 기본 구성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결혼은 도대체 한 개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쉽게 말할 수 없다. 톨스토이의 말대로 행복은 하나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불행은 수천가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혼을 행복이나 불행을 가르는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 결혼 생활 안에서도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관계와 삶의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위험한 도전이다. 그러니 소설을 쓰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화수분처럼 소재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대저 남녀 간의 사랑과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기본으로 하지 않는 소설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프랑스의 다비드 아비께르는 <오, 나의 마나님>을 통해 결혼한 남자로 살아가는 21세기형 남성 종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원제 ‘인간 박물관’을 ‘남자 박물관’으로 오역한 것에 대한 번역자의 말에서도 공감할 수 있듯이 이 책은 단순히 결혼한 남자의 푸념과 일상이 아니라 혼인 관계를 통해 남자 혹은 인간이 걸어온 길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보여준다. 이 책은 소설도 에쎄이도 그렇다고 일기도 아니다. 아니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이 뒤섞여있는 책이다. 모호한 장르적 특성을 가진 프랑스적 글쓰기의 새로운 변형태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재미있다.

  재미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이 책은 시종일관 웃음을 유발한다. 그것은 상황에 대한 희화화 때문에 발생한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들을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탁월한 비유와 과장된 표현들이 프랑스 문화와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도 재미있다. 옮긴이가 부지런히 주석을 달고 있지만 문맥상 충분히 이해하고 넘어가도 무방한 정도이다. 유머는 진지한 성찰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무겁고 결론없는 인류학적 고민들을 가볍고 즐겁게 살펴볼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하기도 한다.

  철저하게 남성이라는 종족의 입장에서 결혼에 대한 입장과 상황 그리고 가족에 대한 생각들을 가감없이 표현한다. 직설적이고 적나라한 방법이 동원되기도 하고 여성의 입장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 잘 간파하고 있지만 때로는 의뭉스럽게 외면하고 때로는 슬쩍 넘겨짚기도 한다. 작가 특유의 경쾌하고 가벼운 문장들은 유쾌한 웃음과 느슨한 틈새를 만들어 준다.

  ‘태초에 유아용 콧물흡입기가 있었다’에서 출발해서 ‘인간박물과’으로 끝나는 이 책은 인류의 진화과정을 남성과 결혼이라는 측면에서 종횡무진 경쾌한 발걸음으로 누비고 있다. 형식에 구애받지도 않고 특별한 목적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사적인 경험을 일반화시키는 능력이 뛰어나서 그저 남의 이야기로만 흘려버릴 수만은 없다. 국가와 인종을 초월해야하는 문제가 결혼이지만 이 책은 최소한 문명이 발달한 지구의 몇몇 종족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는 있다. 결혼은 문화적 배경에 따라 천양지차이다. 남녀간의 역할 분배가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의 권리와 사회적 지위에 따라 가정 내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비중 그리고 가사 노동의 분배 문제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문화적 토양은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이고 프랑스의 그것이 모든 나라에 적용될 수는 없기 때문에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여성의 지위 향상과 더불어 남성의 역할 축소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이 스스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듯이 인류의 진화 과정이 원숭이에서 남성으로 그리고 여성으로 바뀌고 있다는 인식에 동의해도 좋을 듯하다. 극단적으로 남성이 없는 사회를 그려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물론 이 책에서 기술적인 문제나 미래 사회의 현상들에 대한 심각한 논의를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남성의 입장에서도 비명을 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코믹하게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그 비명이 정도에 따라서는 심각해 질 수 있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여성들의 입장에서 이 책은 어떻게 읽힐 것인가? 흥미로운 부분이다. 수많은 항변과 논란이 있을 수 있겠다. 하나의 사물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은 우리에게 흥미로운 사태를 제공한다. 단순한 재미가 아니라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의 차이와 행동의 차이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 저자는 이 위험을 무릅쓰고 결혼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겁도 없이 자신의 아내를 팔아 책을 썼다. 무사한지 그의 건강이 궁금하다.

  결혼한 세상의 모든 남편과 아내, 결혼할 세상의 모든 남녀 모두 피해갈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 ‘남편’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싶다면 심심찮은 책으로 충분히 권할 만하다. 큭큭거리며 읽고 유쾌하게 웃음 지을 수 있으며 타인의 시선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할 것이다. 3부작 중 하나라고 하니 몇 번 더 그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수도 있다.


080907-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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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핑거
김윤영 지음 / 창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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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소설을 읽어왔고 영원히 소설을 읽겠지만 이젠 좀 지친 느낌일까? 다치바나 다카시가 소설을 읽지 않는 것을 읽고도 피식 웃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소설은 때로 인간의 모든 지혜와 철학과 역사를 담아내는 가장 세련된 양식일 뿐 아니라 우리 삶의 이면을 다르게 해석해 볼 수 있는 만화경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소설은 여전히 힘이 조금 부족해 보인다.

  90년대 신경숙이나 은희경, 전경린, 공지영으로 대표되는 내면풍경의 섬세한 묘사를 넘어서고 있지 않은 것이 2000년대의 소설들이다. 소설가의 성을 구별할 필요는 없지만 칙릿으로 대표되는 최근의 작품 유형을 보면 대개 비슷한 구조와 성향과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이 시대정신으로 읽힐 수 있겠지만 사소설의 범주를 넘지 않을 수도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서사의 힘은 여전하다.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 등 영상세대를 뛰어넘을 수 있는 서사의 힘은 조금 부족해 보인다. 소설은 거창하고 위대한 장르나 특별히 위엄을 갖추어야 하는 분야가 아니다. 때로 가볍고 흥미있게 그리고 미친듯 웃고 낄낄거릴 수 있으면 그만 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독자들의 취향과 목적은 다양하다. 한 권의 소설에서 우주를 발견하고 심오한 인생의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키취를 넘어 칙릿을 논하는 시대로 넘어오면서도 무언가 메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삼십대 후반 여성인 소설가 김윤영의 소설집 <그린 핑거>는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해서 진부한 것은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까탈스런 독자를 못 견디게 하는 것은 말하는 방식과 소설의 무늬이다. 똑같은 말을 어쩜 그리 달리 할 수 있을까 하는 느낌을 갖게 하는 소설가의 책은 다시 읽게 된다. 김윤영의 소설은 처음이지만 다시 읽고 싶어진다.

  잔재주가 지나쳐 문장이 춤을 추거나 내용과 어울리지 못하고 삐걱일 수도 있고, 지루하고 진부한 문장으로 책장을 돌처럼 무겁게 만드는 소설가도 있다. 옆집 아줌마나 처녀들의 수다를 재미있게 들어줄 만큼 시간이 남아돌지도 않고 참을성도 없는 나같은 독자는 그런 종류의 책을 읽고 나면 욕을 하고 만다. 어디 모든 독자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마는.

  식물을 잘 키우는 사람을 뜻하는 표제작 ‘그린 핑거’는 대상에 대한 관계부터 색다르게 설정하고 있다. 식물은 정성과 사랑을 주어 가꾸고 돌본만큼 풍성해진다. 토양이나 속성을 잘 이해하고 그것들을 만족시켜 주면 그만이다. 그래서 항상 그 자리에서 얼만큼 자랐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상대적이며 상호 관계속에서 다르게 반응하고 타인을 통제할 수도 없다. 아무도 그 불가해한 관계망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작가 김윤영은 이 소설집에서 ‘여성’만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여성성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한 흔적보다는 가장 잘 이야기할 수 있는 시선으로 타인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남성과의 관계를 의미하지만 결국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과 내면의 풍경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관심과 애정이 필요한 작업이다. 그 작업이 소모적이거나 지루하지 않고 진부한 방식으로 말해지지 않으니 독자들은 즐겁다.

  ‘그린 핑거’와 ‘전망 좋은 집’은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여성들이다. 언청이였던 여인이 수술을 하고 이민을 가 살아가면서 겪는 일과 거짓으로 임신 사실을 꾸미고 살아가는 여성은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인물 유형이 아니다. 특별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독자들은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어 있는 일상성을 발견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리라. 공감하며 분노하고 울먹이다 슬퍼지는 일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내가 타인에게 비춰지는 모습에서 찾아진다. 우리는 타인이라는 거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거울아, 거울아 나는 누구니?

  ‘블루오션 연애학’, ‘너무 고결한 당신’, ‘Heartbreaking Love', ‘초콜릿’, ‘모네의 정원으로’라는 제목으로 묶인 다섯 편의 소설은 피카레스크 소설로 볼 수 있다. 각각 소설은 독립되어 있으나 그 주인공들은 다른 단편에서 만나고 다음 단편의 다른 인물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래서 ‘내게 아주 특별한 연인’이라는 부제가 붙어 연작물임을 표시했다. 형식의 즐거움은 소설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재목 또한 흥미롭다. 어디 특별하지 않은 연인이 있겠는가? 사랑하게 되면 모두 특별한 연인이 되는 것이다.

  이 시대의 사랑을 기록하는 일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분명 의미있는 일이다. 그들의 사랑과 이별은 우리들의 자화상이며 삶의 방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과 소통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인간 사이에 소통이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 아니라 그렇게 관계맺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내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소통’과 ‘관계’의 문제에 천착하는 작품을 만나고 싶다.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그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소설의 또 다른 재미이며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윤영의 소설은 삶이란 타인의 시선은 내 존재감의 확인이며 정체성에 대한 이해라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작가가 무엇을 원하든 독자들은 그 이상을 본다. 그것은 의미있는 오역이며 독자들의 반응은 당연히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다만 그 반응들의 공통점을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타인의 시선에 대한 인물들의 심리 변화, 분명하게 전달되는 섬세한 비유, 가볍지 않게 소설 전체의 주제를 담아내는 힘이 느껴지는 좋은 단편들을 읽은 느낌이다. 이 시대와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함께 담아낼 수 있는 다음 소설을 기다려 본다. 재미의 종류는 다양하다. 작가의 독자적인 영역을 찾아 하나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노력도 기대해 본다. 나는 너무 욕심 많은 독자이고 기다림의 자세를 갖춘 독자이기도 하다.


080905-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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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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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이성에 눈 뜬 때가 초등학교 3, 4학년 쯤 될까? 긴 머리에 갸름한 얼굴, 웃을 때 초승달처럼 얇고 처지던 눈이 기억난다. 선영이였던가? 계몽사 세계 문학 전집을 읽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을까? <흰고래 모비 딕>, <플루타아크 영웅전>, <비밀의 화원>, <모히컨족의 최후> 등이 떠오른다. 처음 야구 글러브를 사서 품에 안고 잔 기억이 선명하고 축구화를 신고 그물망에 축구공을 차며 등교하던 모습도 생각난다.

  여러 가지 선택적 기억과 자기 암시에 의해 사람들은 저마다 같은 장소에서 다른 기억을 갖게 된다. 살아온 생을 모두 기억하는 사람은 없으며, 망각은 삶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인간이 모든 것을 기억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상상이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 볼 시간이 누구에게나 오는 걸까? 그때 어떻게 살았는지 스스로 평가하는 것은 정당한가? 아니 정당성의 문제가 아니지만 객관적인 재구성 또한 불가능하다.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는 소설이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로아나 - 여왕의 신비한 불꽃 상, 하>는 자전적 소설이다. 아무리 감추어도 표현과 묘사 사진과 기억들이 완벽한 허구로 읽히지 않는다. 작가가 그것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독자인 나는 이 짧은 생을 돌아보았다. 노년에나 해야 하는 짓을 미리 해보는 것도 때로는 필요하지 싶다. 심각한 반성과 지나친 자만이 아니라면 재미있는 놀이가 되겠다. 아니 어쩌면 사람들은 매순간 모든 공간에서 뒤를 돌아보는 지도 모르겠다. 과거에 대한 기억과 아쉬운 미련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고칠 수 없는 단 한 번 뿐인 연극 무대의 주인공으로 어떤 연기를 선보일 것인가?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주인공이 된다.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 또한 자기자신 단 한 사람인 경우가 있다. 지나간 드라마를 다시 보듯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일은 쓸쓸하기도 하고 때로는 따뜻하기도 하다.

1. 기억과 망각

과거를 잊기 위해서 술을 마시거나 마약을 복용하는 바보들이 있다는 게 놀랍다. 아,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걸 잊고 싶어, 하고 그들은 말한다. 하지만 나는 진실을 알고 있다. 망각이란 잔인한 것이다. 기억을 도와주는 마약은 없는 걸까? - P. 102

  주인공 얌보는 어느 날 사고로 모든 기억을 잊는다. 안개처럼 모호한 현실과 과거의 기억들이 혼재하지만 어떤 것도 분명한 것은 없다. 자신의 이름과 직업, 나이 그리고 아내와 딸, 손녀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고서적 전문가. 그의 시간 여행은 안개처럼 불투명하다. 친구와 가족,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이 노인은 누구인가?

  고향에서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게 된다. 오래된 책과 사진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이야기들이 스스로를 재구성하게 한다. 실존적 고민에 빠진 이 노인에게 정답은 없다. 어쩌면 모든 기억들이 퍼즐처럼 어지럽고 교묘하게 짜맞춰진 그림처럼 혼란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먼지 구덩이에서 발견해 낸 만화와 그림책은 그대로 얌보가 살아온 유년이며 이탈리아의 과거이고 인류의 역사이다. 기억은 현실의 조각들 속에서 발견된다. 흔적은 빛바랜 사진처럼 흑백으로 저장되지 않는다. 다만 사라지거나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얌보에게 주어진 삶은 과거의 현재의 연결 고리를 잇는 것만으로도 벅차기만 하다. 아련한 기억과 켜켜이 쌓인 세월의 먼지 속에서 퍼 올리는 추억들은 우리들의 그것과 같은 방식으로 재현된다. 파편화된 현대인의 삶은 이제 더 이상 50년 된 다락방을 허락하지 않지만 인간의 기억을 뛰어넘는 사물들이 간직한 기억은 확고부동하기만 하다.

인간에게 기억은 임시방편의 해결책일 뿐이다. 인생은 물처럼 흐르고, 한 번 지나간 것은 다시 오지 않는다. 나는 기억이 없는 대신, 인생 초년의 경이를 처음부터 즐기고 있었다. - P. 364

2. 소년과 사랑

  검은 교복을 입은 릴라는 얌보의 첫사랑이다. 어둠 속에서도 변치 않는 한 줄기 빛과 같이 그녀에 대한 환상은 집요하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를 놓지 못하는 소년의 사랑. 그는 더 이상 노년의 얌보가 아니라 순수와 열정을 무기로 뜨거운 가슴을 식히지 못하는 소년이다. 안개처럼 사라진 그녀, 그리고 생의 마지막 순간에 알게 된 그녀의 죽음은 허망한 인생보다 더욱 더 그를 절망에 빠뜨린다.

세상일을 나 몰라라 할 때면, 당신은 이렇게 말했죠. 역사란 피로 얼룩진 수수께끼이고, 세계란 하나의 오류라고 말이에요. - P. 121

  그것은 그녀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그녀를 기억했던 시간에 대한 절망이다. 과거와 현재를 잇지 못하는 망각에 대한 슬픔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가 스러지는 찰나이기도 하다. 얌보의 사랑은 우리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구체적인 개인의 기억은 보편성을 획득하고 일반적인 패턴으로 전용된다. 누구나 그런 사랑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소년은 소년이기 때문에 사랑은 사랑이기 때문에 서로 뜨겁게 껴안을 수 없다. 그것은 소년과 소녀의 사랑이 아니라 순수와 열정의 모순된 만남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그렇게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가 남겨진다. 다만 추억만이 가슴에 남아 꺼져가는 불씨를 되살리고 일렁이는 가슴에 돌을 던진다.

3. 죽음 혹은 그리움

  죽음의 순간은 내게 어떻게 다가올 것인가? 가끔 흥미진진하기만 하다. 그것은 생의 종착역에서 느껴야하는 두려움이라기보다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연민이다. 누구나 걷게 되는 피할 수 없는 길에 호기심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임사체험>이나 <죽음, 또 하나의 세계>에서 보여주는 사후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그 찰나에 대한 혹은 그것을 맞이하기 위한 과정을 즐길 수는 없을까? 죽음 앞에 모든 인간은 겸손해진다고 하는 데 이런 생각은 오만일까?

  얌보는 환상을 본다. 그것은 현실과 다른 세계에 대한 꿈과 희망이 아니라 스스로 재창조해 낸 세계에 대한 기억과 추억들이다. 과거의 증거들이고 자신의 역사로 만들어낸 시간들이다. 그 속에 릴라가 있다. 죽음을 맞이하는 얌보의 모습은 슬프지 않다. 다만 현실 속의 에코와 오버랩되는 상상만 하지 않는다면 이 소설은 그저 한 생에 대한 진실한 보고서이며 삶의 과정과 순간에 대한 기억이다.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된 모든 기억들을 쫓아낼 필요는 없다. 어떤 것이든 한 생애를 살아온 사람에게는 소중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것의 결과가 현재이므로. 오래된 미래를 확인하기 위한 얌보의 노력은 우리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노년 혹은 죽음에 대한 태도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비슷한 패턴과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특별한 죽음은 없다. 숭고함에 대해 논할 필요도 없다. 다만, 얌보의 말대로, 태양이 검게 변하는 순간까지 살아 있음을 확인할 뿐.

나는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건듯 불어오는 것을 느끼며, 올려다본다.
왜 태양이 검게 변하고 있지? - P. 723



080827-096, 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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