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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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체적 대상이면서도 이 땅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도 없고 규정되지도 않는 존재가 엄마다. 어머니와는 또 다른 느낌인 이 말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되었고 진화의 과정에서 생물학적 관계로 설명되어질 수도 있는 존재가 엄마일 것이다. 눈에 보이고 살아있는 존재지만 정서적으로만 감당할 수 있는 말이 엄마다.

  아주 오랜만에 신경숙의 소설을 읽었다. 잊고 있던 친구의 편지를 받은 것처럼 반갑고 쑥쓰러웠다. <엄마를 부탁해>. ‘고양이를 부탁해’도 아니고 엄마를 부탁한다니. 

  첫 페이지부터 심상치 않더니 이 소설은 이제 많은 사람들의 숨겨 둔 눈물 보따리를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것 같다. 세상에 엄마가 없는 사람은 없다. 누구에게나 ‘눈물나는’ 엄마가 숨겨져 있다. 돈이 많고 적음 때문도 아니고 직업 유무 때문도 아니다. 자식에게 엄마는 그저 엄마일 뿐이다. 전 존재의 완전한 합일로만 이해할 수 있는 엄마의 모습들을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떠 올릴 것이다. 

  나도 이 책을 읽는 내내 ‘엄마’를 생각했다. 몇 번이나 눈물이 나려고 해서 곤란했다. 눈물을 흘릴 상황이 아니었고 애써 참으려니 견딜만했다. 감정이입이나 동일시된 감정들을 건드리고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요소들을 담아낸 작가의 선택과 집중은 탁월하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책을 다시 읽게 할 수 있고 가슴 뭉클하게 만들 수 있는 따뜻한 소설 한 권을 만났다. 마지막 페이지가 다가올수록  아까운 책을 만난 기쁨이 적지 않았다. 

  아마 농촌에서 부모님이 생활하시고 도시에서 생활하는 자식들이 오가는 형태의 가족도 머지않아 없어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시대가 변하면서 농업 문제가 다른 형태로 해결되지 않으면 농촌의 생활 모습은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시골에 사시는 엄마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 될 지도 모르겠다. 

  가슴에 묻어둔 엄마의 이야기를 이렇게 절절하게 풀어낼 줄 아는 작가의 능력이 놀랍기만 하다. 잃어버린 엄마의 이야기는 폐부를 찌르고, 간결하고 쉬운 문장들은 가슴을 적신다. 촉촉한 가을비를 바라보며 읽다가는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흘려야할 지 모르니 조심해야겠다.
개인적으로 눈물샘을 자극하는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데 이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다. 이 가을에 엄마를 생각해 보는 일이 새삼스럽지만 아주 소중한 일이 될 것이다. 

  장편 소설의 중심축은 서울역에 내린 엄마의 실종으로 시작된다. 아버지와 서울역에 내려 지하철을 못탔고 아버지가 두 정거장을 지나 다시 서울역에 돌아왔으나 엄마를 찾을 수 없었다. 소설을 쓰는 나레이터가 직접 나선다. 신경숙은 스스로 화자가 되어 엄마의 이야기에 몰입했을 것이다. 소설가인 큰 딸은 ‘너’라는 2인칭으로 소설을 시작한다. 다소 낯선 형식이지만 화자를 객관화 시키는 역할을 한다. 지나친 감상과 주관적 서술에 치우칠 수 있는 내용을 경계한 탓일 것이다. 

  오빠 형철이와 아버지도 화자로 나서 어머니와 아내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이 소설이 장편이면서도 지루하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잃어버린 엄마에 대한 다소 일반적인 단순한 사건을 이끌어 나가는 힘은 시점의 이동에서 보여주는 놀라운 섬세함이다. 각자의 입장에서 엄마를 바라보고 이해하고 또 남편의 입장에서 그것들을 풀어내는 솜씨가 탁월하다. 소소한 일상들을 배경으로 이 땅의 모든 어머니를 교묘하게 조합해 놓은 주인공 ‘엄마’는 우리 민족의 엄마로 거듭난다. 

  엄마는 자식들이 부르는 엄마다.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실존적 존재, 여자로 볼 수 없는 가족 관계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 엄마다. 그 엄마를 새롭게 발견하는 일은 낯선 것이 아니라 고통스럽다. 기대고 의지하고 물과 공기처럼 늘 그 자리에 있어 준 사람의 이름을 우리는 엄마라고 부른다. 그래서 엄마가 없는 사람은 그 어떤 것으로도 메울 수 없는 빈 자리를 안고 살아가며 엄마의 부재는 치유될 수 없는 상처가 되기도 한다. 

  소설은 엄마를 찾아 나선 자식들의 기억과 반성과 회한으로 메워진다. 일반화 시켜 내어 놓은 상황들 속에 독자들은 몰입할 것이고 내면의 풍경들이 을씨년스럽게 펼쳐지는 소설의 공간에는 눈물이 배어든다. 엄마의 한 생애를 돌아보는 일은 모든 자식들에게 슬픔으로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들이 모여 읽는 사람을 먹먹하게 하는 것이다. 영원히 가장 아름다운 이름으로 기억될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를 제공하게 될 소설이다. 

  소설 말미에 새가 된 어머니의 시선이나 소설가인 큰 딸이 장미묵주를 사는 장면들이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작위적으로 느껴져 거북했다. 보다 구체적으로 혹은 철저하게 자식들의 입장과 남편의 시선으로만 엄마와 아내의 부재에 대해 집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부자연스럽거나 어색하지는 않지만 긴장감이 결여된 듯 하고 성모마리아의 등장으로 종교적 색채가 덧씌워져 오히려 거부감이 드는 결말이 못내 아쉽다. 물론 개인적이 취향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의 재미와 의미가 퇴색한다고 볼 수는 없다. 

  간만에 오래 기억에 남을 만한 장편 하나를 만났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인간의 이성의 아니라 잠자고 있는 감성의 바다에 돌을 던지는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삭막한 도시의 바람이 불고 있지만 농촌에 계신 어머니가 그리울 때가 있는 사람,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에 가끔 하늘을 바라보아야 하는 사람은 조심해서 읽어야 할 소설이다. 언제 어디서 눈물을 보이게 될지 모른다.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 - P. 267


08103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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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 창비시선 292
고은 지음 / 창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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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50년쯤 쓰면 어떤 기분이 들까? 연필을 들면 저절로 시가 써질 것만 같으다. 모든 언어가 조화를 부려 종이에 펜을 대는 순간 막힘없이 자유롭게 배열될 것만 같으다. 고은의 50주년 기념 시집을 읽으며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부터 시를 쓴 사람에 대한 경의로움에 젖는다.

  시간은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한다. 그리고 여백을 남길 것이다. 모든 관계와 모든 사물들을 무화無化시킨다. 신작 시집 제목은 그래서 <허공>일까?

빈 공간에 그려내는 절제된 언어의 진경은 예사롭지 않고 나이를 넘어 그의 전성기가 어디인지 독자들을 당황스럽게 한다. 고은이 보여주는 시는 지금부터까 아닐까?

추억 하나

사랑이든
사랑의 밑창
미움이든
그것 뛰어넘어서

너 거기 허공에 대고
총을 쏘아보았어?

나는 열일곱살 때 용케 살아남아
미 육군 이탈사병 오웰의 M1소총으로
허공
거기 대고
세 발
네 발 연발로 쏘아보았어

허공은 적이 아니더군
그 총알들 어디로 갔을까
오 킬로미터쯤
육 킬로미터쯤 갔을까
가는 동안의 직선이 포물선으로 바뀌어
끝내
검불 하나도 건드릴 힘 없이 툭 떨어질 때
거기가 내 저승일까 어디였을까

아직도 나 이승의 은산철벽(銀山鐵壁) 여기 줄곧 처박혀 있어


땅끝

해남 땅 끝에 왔습니다
살아온 날들
잘못 살아온 날들도 함께 왔습니다

천근의 회한 내버리고
여기 술 먹은 밤 파도소리에 먼저 온 누구의 이승이 혼자 떠 있습니다


  추억은 모든 것을 뛰어넘는다. 사랑도 미움도. 시간 속에 녹슬어 버린 기억의 편린들을 더듬어보는 老詩人에겐 무엇이 보였을까? 경험한 것 이상은 쓸 수 없는 것이 작가의 한계라지만 사유의 진폭은 직접 경험을 뛰어 넘어 환상과 상상의 공간을 오가기도 하고 생각의 갈피들을 헤집고 다니기도 한다.

  고은의 시는 땅끝에서 다시 하늘로 날아오른다. 술 먹은 밤 파도소리를 들어 본 사람은 지난 날들과 회한에 대해 고개를 끄덕여 줄 것이다. 단정한 시들이 뿜어내는 조용한 목소리는 듣기 좋게 공명된다.

갈망

혼간 허울 바람에 날리는 영광들의 한 생애 얼룩졌다
번뇌들
맹신들
다 두고
여기 왔다

서해 저녁 밀물 앞에서 한동안 나는 올데갈데없다.


밤비 소리

천년 전 너는 너였고
천년 후 너는 나이리라 어김없으리라

이렇게 두 귀머거리로

너와 나
함께 귀 기울인다

밤비 소리


  자연에 몰입하는 노년의 일반적 경향으로는 볼 수 없다. 선시처럼 의미의 충돌과 비약이 없고 가볍거나 즉흥적이지 않다. 깊은 사색의 결과이며 언어 이전의 세계와 마주하는 느낌이다. 손에서 놓여난 모든 욕망들, 삶과 죽음들 속으로 천천히 산책하고 싶어진다.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의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아니어도 좋다. 가랑잎에 부대끼는 낮은 곳으로 흘러드는 모든 물소리, 소리들. 바다에 모이자는 약속들일지도 모르겠다. 한 편의 시는 끝없는 상상의 세계로 혹은 환상의 나라로 이끌어 주는 동화의 나라가 되기도 한다. 내게.

후배에게

국가는 섬세할 수 없단다 국가는 그냥 왈패란다
그럴수록 문학은 섬세해야 한단다
자네 문학이
행여나
떠밀리고 떠밀려
변방 읍내 호프집에 처박히게 될지라도
낙담 말게

더더욱 외따로 고개 저어 섬세하고 섬세할 노릇일세

장차 그 섬세함의 장관이라니


  고은의 작은 문학론은 그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국가가 왈패라면 문학은 섬세함이라는 단순한 언명이 깊이 울린다. 문학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 고은이 보여준 이력들은 묵언으로 보여준다. 그가 노벨상 후보에 오르든 말든 중요한 것은 그의 시를 읽는 것이다. 세간에 관심은 노벨상이 아니라 그의 시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죽음’, ‘여생’, ‘무한’을 골랐다. 이쯤 되면 시인도 생의 황혼에 대해 죽음과 허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탐욕과 허욕으로부터 자유롭고 안과 밖이 구별되지 않는 두려움의 끝에 대해 가만가만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시인은 자유를 얻었을까?

죽음을 보며

오랜 두려움 끝
이제 두렵지않다
오전의 하늘에 없던 구름이 슬쩍 와 있다
구름 밑
산이 간다
산 밑
산그늘이 간다
그동안 내가 나에게 목숨 바쳤다

정말이지
죽음은 남이 아니다 아니구말구


여생

감히 고백하건대
저는 안이 아닙니다
밖입니다
저는 이 나라 안의 고아가 아닙니다
무한 밖의 미아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무한

이 무한가능 하염없는 백지 없이는
저의 여생 하루도 한나절도 숨막혀 살 수 없습니다
탐욕이 아닙니다
허욕이 아닙니다
절절히 현실 뒤켠 아스라이 백척 낭떠러지입니다


  나는 자주, ‘하늘’을 바라보며 ‘자유’에 대해서 생각한다. 무엇으로부터, 어떻게 생기는 것인줄도 모른채 반편이처럼 자유에 대해 늘 고민한다. 자유는 어떤 상태나 상황이 아니라 완전한 무애無碍의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자유롭다는 의식조차 없어진 마음의 상태가 가능한지 모르지만 50년쯤 시를 쓰고 나면 혹여 그런 상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 보았다. 고은의 詩와는 무관하게.


081028-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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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립자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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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울한 환상과 성적 자극들이 모여 빚어내는 회색빛 소묘.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는 최근의 내 감정 상태만큼 극도로 불안하고 우울한 무채색으로 가득하다. 그 원인은 차치하고 내면의 풍경을 드러내는 방식과 현실에서 발현되는 모습들이 무성영화 시대의 흑백필름을 보는 듯했다. 우엘벡의 이 소설이 낳은 수많은 논란은 지극히 당연하다. 누가 이 소설의 의미를 제대로 읽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끝없이 복잡한 미로를 찾아 헤매는 사람은 출구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어 오히려 행복할 것이다. 마음의 갈피 사이로 난 오솔길들, 상처 난 길섶의 들풀들, 흐린 하늘 아래 비추는 한 줄기 해살과 같은 형언할 수 없는 이미지와 숨결들이 배어나오는 소설이었다. 어떤 작품이든 마찬가지겠지만 독자의 감정이 이입되거나 영혼이 투영되거나 이도저도 아니면 고개를 끄덕이며 동경한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다양한 효과를 나타내고 상반된 평가를 받기에 충분할 것 같다.

  작가의 말대로 이 책은 삶의 대부분을 20세기 후반기에 서유럽에서 보낸 한 남자의 이야기다. 최고 수준의 생물학자 미셸 제르진스키가 실종된다.

그리하여
오늘 처음으로,
우리는 옛 시대가 어떻게 종말을 고했는지 돌이켜보고자 한다.


  는 말로 프롤로그가 끝나면서 한 남자가 이야기는 시작된다. 형이상학적 돌연변이를 대표하는 이 인물은 기독교로 설명될 수 없는 시대정신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20세기 말의 특별한 인물 유형을 보여준다. 아버지가 다른 미셸의 형 브뤼노는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통해 자라난 아이가 아니다. 동생 미셸 또한 한 어머니에게서 서로 다른 아버지의 아이들이 태어났으니 평범하다고 볼 수 없는 삶을 예고한다. 그들 형제는 만나게 되고 서로의 생을 위로하기도 하고 바라보기도 하며 고독과 우울 속에서 생을 버텨낸다.

  어린 시절 기숙사에서 당한 브뤼노의 모욕도 그토록 사랑했던 아나벨을 잡지 못하는 미셸도 결국 다른 몸에 숨어 있는 두 개의 영혼처럼 보였다. 그들이 드러내는 삶의 방식은 우리에게 너무도 낯설다. 68세대와 그들의 공동체 그 안에서 벌어지는 허위의식과 개인의 부조리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남겨준다. 길가에 떨어진 동전 지갑을 줍듯 탄핵사태에 대한 반발과 분노로 국회의원이 된 386들의 정치 행태가 떠 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정치적인 것은 아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색적인 소설이다.

  적확한 심리 묘사와 내면 풍경은 기막힌 묘사와 적절한 어휘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오힐 냉정하고 객관적인 사실들을 건조하고 냉랭한 목소리로 독자에게 뱉어내듯 한다. 프랑스 소설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들로 기억될 것이다. 우엘벡이 의도적으로 논란을 예고했는지 알 수 없으나 성적인 부분에 대한 묘사나 등장인물의 취향뿐 만 아니라 그 원인과 삶의 과정들이 때론 불편하게 때론 어색하게 소설 속에 녹아 있다.

  한 인간에게 있어 고통이란 숙명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잘 견디지 못하고 극한적인 반응을 드러내기도 한다. 자살을 하기도 하며 과장된 목소리로 울부짖기도 한다. 그러나 섣불리 그만큼의 고통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비교가 불가능하며 실존적 고민의 깊이는 개인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아픔과 상처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에게 우리는 오히려 연민을 느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거 회상과 현재의 삶을 연결시키는 연대기적 서술에 의존하면서 미래 사회까지 진단하는 이 소설을 쉽게 규정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통해 보여준 미래 사회를 이 소설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 탁월한 예지력은 이 소설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는데 재미있는 것은 1998년에 출판된 이 책의 미래는 불과 몇 달 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10년 만에 커다란 기술의 진보나 생물학적 변화를 예고 했다기 보다는 현대 사회의 패러다임 자체가 변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시인으로 데뷔한 작가라고 하는 데 읽어 본 적이 없으니 뭐라 말 할 수는 없지만 서사와 사건 중심의 소설이 아니라 섬세한 개인의 내면 묘사, 때때로 과거의 기억을 들추는 건조한 목소리가 오히려 읽는 사람을 답답하게 만든다. 땀과 태양이 엉겨 붙은 바람 한 점 없는 바닷가의 적막감. 작가는 이 소설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독자는 소설의 한 복판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당장 책장을 덮고 시원한 맥주를 목구멍에 들어붓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하는 그 무엇이 이 소설의 백미다.

  이 책은 시간의 모래 속에 사라져갈 우리 모두에게 경의를 바친다. 우리의 삶이 어떤 형태로 이어질 것인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한 인간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서 그 삶의 결들이 보여준 무늬들을 통해 짐작해 볼 수는 있다. 제르진스키가 사라진 곳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돌아보는 것이 작가의 의도일 것이다. 우엘벡이 무엇을 보려주려 했든지 이 책은 내게 고통과 우울의 진한 페이소스를 안겨주었다. 자, 이제 밤하늘을 향해 기지개나 한 번 켜볼까?


08102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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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삼 전집 나남문학선 3
권명옥 엮음 / 나남출판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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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죽음은 한 시대의 종말을 예고한다. 2007년에 오규원이 세상을 떠난 것처럼 2008년에는 박경리와 이청준이 시대를 마감했다. 사람은 흔적을 남기며 오래 기억되기를 바라지만 무정한 시간은 흔적조차 남겨 놓지 않는다. 수많은 시인들이 명멸하지만 그를 기억하는 독자를 갖고 있는 시인은 많지 않다. 김종삼은 나에게 <북치는 소년>으로 다가온 특별한 시인이었다.

  오랜만에 민음사에서 펴낸 오늘의 시인총서 15 김종삼시선 <북치는 소년>을 꺼내보았다. 황동규는 서문 ‘잔상의 미학’이라는 글을 이렇게 시작한다.

“여백이 완벽보다 더 꽉 차 보이는 때가 있다. 잘 짜여진 일상 가운데서 일부를 떼어내어 거기 달려 있는 창에 창호지를 발라 안이 안 보이게 한 후 그 속에 들어가지 않는 쾌감이 있는 것이다. 그 쾌감에는 반성을 거부하는 어떤 것이 들어 있다.”

 1979년에 초판이 나왔지만 10년 후에 내가 산 시집은 1989년에 찍은 7판이다. 그러고도 20년이 흘렀으니 종이는 누렇게 변색되어 간다. 조심스레 몇 페이지를 펼쳐 보다가 다시 <김종삼 전집>을 순서대로 읽어나갔다.



人家들을 끼고 흐르지 않는
오밤중의 개울은
碇泊中인
납작한


  우리의 현대시사現代詩史를 조망할 때 화려하지는 않지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시인이 김종삼(1921~1984)이다. 은근하고 조용한 매력을 지닌 시인 김종삼을 다시 읽는다. 그의 시는 긴장과 압축으로 표현될 수 있으며 읽고 나면 꼬리가 긴 여운을 남긴다. 전후 한국 현대시에서 그가 남긴 족적은 선명하다. 정갈한 한국어의 적절한 배치만으로도 그의 시는 농가의 초가집처럼 깨끗하고 소박한 느낌을 준다.

묵화墨畵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시詩가 완성된 하나의 구조물이라면 김종삼이 지은 집은 여백의 미를 가장 잘 살린 한옥과 같은 느낌이다. 군더더기 없이, 언어가 주는 울림과 이미지만 남겨진 단형 시들은 은근하며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 여운과 감동은 시를 읽고 난 후에도 머릿속에서 공명되고 잔잔한 파문이 되어 가슴 깊은 곳까지 멀리 퍼진다.

북치는 소년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김종삼 시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그의 시에서는 압축과 정제된 언어의 울림 그리고 언어 밖의 여백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언제 읽어도 깔끔하고 어떻게 바라보아도 편안하다. 한 편의 시가 아니라 그림처럼 하나의 장면을 선명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말의 여백과 울림을 기막하게 배치하는 솜씨는 그의 시를 특별하게 한다. 그의 시는 절제의 미학이라 할 만하다.

올페

올페는 죽을 때
나의 직업은 시라고 하였다
後世 사람들이 만든 얘기다

나는 죽어서도
나의 직업은 시가 못 된다

宇宙服처러머 月谷에 둥둥 떠 있다
귀한 時刻 未定.


  직장다운 직장 한 번 가져보지 않았는데도 김종삼은 6.25 전쟁 직후부터 1984년 타계할 때까지 30여 년간 200여 편에 불과한 작품만을 남겼다. 이러한 과작寡作은 그의 시작詩作 태도를 말해준다. 절제된 언어의 형식과 간신히 탄생한 한 편의 시들은 깊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오래 생각하고 정성들여 시 한 편을 완성하는 과정이 보이는 듯하다. 한 편 한 편을 꾹꾹 눌러 쓴 그의 육필 원고를 보면 그 과정을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장편掌篇 ․ 2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川邊 一○錢 均一床 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一○錢짜리 두 개를 보였다.


  시의 본령이 언어에 충실하게 복무하는 일이라는 측면에서 김종삼은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1930년대와 1960년대에 벌어졌던 순수 참여 논쟁의 관점으로 볼 때 김종삼의 시詩는 가장 순도 높은 순수시에 해당한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의 시가 가진 특별함에 값할 만한 시인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그만큼 그는 시詩의 본질에 충실했던 시인이다.

민간인民間人

1947년 봄
深夜
黃海道 海州의 바다
以南과 以北의 境界線 용당浦

사공은 조심 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嬰兒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水深을 모른다.


  스무살 무렵 동생이 죽고 나이 들어서도 형을 먼저 보낸 불행한 가족관계는 그에게 술을 마시게 했다. ‘아우는 스물두 살 때 결핵으로 죽었다 / 나는 그 때부터 술꾼이 되었다(‘掌篇’중에서)’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은 트레이드 마크처럼 손에서 놓지 않은 파이프 담배와 술잔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평생 월세방을 전전했을 만큼 가난했지만 그의 시에서 생활의 흔적은 만날 수가 없다. 오히려 서구 지향적이고 클래식과 음악에 함몰된 모습들이 곳곳에 배어나온다. 그것은 김종삼의 시에서 생경하고 어색함으로 남아 다른 시들보다 독자들의 공감을 얻는데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제작製作

그렇다
非詩일지라도 나의 職場은 詩이다.

나는
진눈깨비 날리는 질짝한 周邊이고
가동中인
夜間鍛造工廠

깊어가리마치 깊어가는 欠谷

  고종석의 말대로 ‘무적자無籍者의 댄디즘’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김종삼은 영혼의 유목민이었으며 보헤미안이었다. 현실 밖의 어린왕자처럼 맑고 순수한 서정의 시세계를 보여준 시인 김종삼은 수많은 독자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시는 여전히 살아 숨쉬는 한국어의 현재형이다. 깊은 가을에 그의 절창 몇 편을 읽어볼 만하다. 오래 곁에 두고 가끔씩 꺼내 읽고 싶은 몇 안되는 전집 하나가 늘었다.


08101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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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행복해
성석제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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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작가의 작품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독자가 있는 작가는 얼마나 행복한가. 그런 면에서 성석제는 몇 안 되는 행복한 작가 중의 한 사람일 것이다. 독자들의 사랑과 생계에 대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할까? 모든 작가들이 보험을 가입하듯 대학에 자리를 마련하는 동안 최종심에 오른 교수 자리를 거절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한 용기이다. 개인사적인 이야기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생활인으로서 고충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작품 세계에 대한 이해와 분석이 작품 자체만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1930년대 신비평주의자들에 의해 주창되었으나 작품을 둘러싼 사회, 문화적 배경이나 현실의 문제를 제거하고 작품을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성석제의 소설도 예외일 수 없다.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들은 해설을 맡은 이경재의 말대로 ‘방외인’들이다. 평균보다 조금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들 말이다. 그것이 설정이든 진솔한 모습이든 토요일 저녁 가끔 보게되는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의 진행자들과 유사하다.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다가서지만 현실의 벽은 높기만 하고 반대편 끝에 서 있는 사람들과의 거리감을 좁힐 수 없는 사람들 말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성석제의 소설에서 자주 만나게 된다. 특별한 사람들의 황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보여주는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라 코미디여서 비극에 가까운 이야기가 성석제 소설의 근간을 이룬다.

  그의 소설은 이야기라고 하는 소설의 본질에 가장 근접해 있는 듯하다. 독자들은 허리띠를 풀고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졸기 직전의 나른한 상태에서 그의 소설을 읽을 수 있다. 예민한 감각과 긴장은 필요없다. 좌우로 입술을 당겨줄 근육과 아무생각 없이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만 하면 된다. 이보다 더 편안하고 즐거운 소설이 있을까 싶다. 성석제는 천상 이야기꾼이다. 소설이라는 형식도 기본적인 틀도 때로는 그에게 거추장스러워 보인다. 마지막 단편 ‘깡통’의 경우 화자가 직접 소설 속에 개입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소설이라는 형식적 장르를 떠나 ‘이야기’라고 하는 가장 원초적인 작업에 가까워지는 그의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목으로 사용된 <지금 행복해>는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의 제목이면서 작품 전체를 드러내는 은유에 해당한다. 과연 사람들에게 행복의 의미는 무엇인지 되묻고 있다. 사람마다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도 방법도 제각각이다. 다양한 인물을 통해 그 접근 방식을 다각도로 보여주는 정교한 구성은 아니지만 평균에서 벗어난 황만근과 같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이야기는 우리들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그것은 반성적 성찰이 아니라 유쾌한 공감이며 자각이다. 물론 그 웃음에서 숨어있는 예리한 시선들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단순한 재미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웃음에는 진한 페이소스가 섞여있다.

  성석제 특유의 문체와 발랄한 감성이 어우러져 재미와 유쾌함을 선사하는 이 책은 여행 이야기에 특별히 눈이 간다. ‘여행’, ‘설악풍경’, ‘피서지에서 생긴 일’이 그것이다. 이 세 작품은 누구나 한번쯤 꿈꾸었을 법한 이야기로 공감을 얻고 있으며 구수한 사투리와 지역적 특성을 살려 구체적이고 생생한 표현들이 매혹적이다. 예의 주도면밀하고 걸죽한 입담은 그의 소설과 여행 이야기들을 하나로 엮어내는 접착제 구실을 한다. 씁쓸하고 개운치 않은 결말이 예견되며 비교를 통한 혹은 환상과 기대를 통한 인물들의 심리가 빤히 들여다보이면서도 안타깝고 애잔하다.

  철저하게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을 유지하고 있는 그의 소설들은 인물들을 자유자재로 조정하고 묘사하며 정밀한 심리묘사를 가능하게 한다. 구체적이고 섬세한 전달이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단순한 시점의 효과가 아니라 능란하고 편안하게 이끌어가는 구성에 기반하고 있으며 특히 신선하고 적절한 비유는 성석제 특유의 소설적 재미를 더해준다.

  우울하고 내면화된 도시적 감수성이 아니라 여전히 지방색이 물씬 묻어나는 인물들에게 독자는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친근감은 동일한 계급의식에서 출발하는 것만은 아닌 것이다. 공동체의 일원들이 보편적으로 얻게 되는 편안함과 익숙함은 성석제의 소설에 나타난 인물들의 특징이다.

  낚시 이야기를 풀어 낸 ‘낚다 섞다 낚이다 엮이다’와 미래 사회를 예견하듯 톱니바퀴처럼 정교한 이야기의 구성을 보여주는 ‘톡’은 또 다른 시도와 즐거움이 있다. 하나의 규격화된 틀이 아니라 자유롭고 편안한 형식들을 내용에 따라 재단하는 솜씨가 즐겁고 그 발걸음은 경쾌하기만 하다. 그러니 누가 성석제의 소설에 딴지를 걸 수 있겠는가?

  아주 오랫동안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내고 그것을 지켜가며 조금씩 변화를 시도하는 작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귀 기울이는 독자. 나는 그 독자중의 한 사람이다. 그간 읽어왔던 <홀림>,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인간의 힘>과 더불어 이 책도 책장 한켠에 꽂혀 성석제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의 편안하고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와 함께 지금 행복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잠깐 동안의 여유를 찾고 싶다면 <지금 행복해>를 읽어보자.


081008-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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