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하는 저녁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앗싸, 가오리!”가 떠올랐다. 에쿠니 가오리의 이름을 보고 처음에 ‘쿡’하고 웃었던 것 같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를 인상 깊게 보았다. 원작자가 에쿠니 가오리라는 걸 알았지만 찾아 읽고 싶지는 않았다. 한때 무라카미 류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거부 전부 찾아 읽었으나 이후 일본 작가에 대한 관심은 시들해졌다. 가끔 나쓰메 소세키나 미시마 유키오의 책을 찾아 읽지만 요시모토 바나나 유의 책들에 몰입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정서의 샘에 물이 고이지 않나보다. 아니면, 세월과 나이를 탓할 수밖에.

  어쨌든 간만에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낙하하는 저녁>을 읽었다. ‘실연을 담은 소설’이라는 부제는 결말을 알고 시작하는 추리소설처럼 흥미를 떨어뜨리지만 이런 유의 소설은 마음의 갈피들과 섬세함으로 승부를 건다는 걸 안다. 누구나 한 번 쯤은 실연의 아픔을 겪었을 것이고 감정은 이입되기 마련이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건 유사한 상황이나 감정들을 일반화 시킬 수 있는 작가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는 데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사람들은 나에게 책을 선물하지 않는다. 특별히 불행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가끔 아쉬울 때도 있다. 손에 책을 놓지 않기 때문인지 몰라도 정말 오랜만에 선물받은 책이다. 내용이야 어떠하든 선물한 사람의 마음을 먼저 읽혔다. 선물하는 책은 둘 중 하나다. 선물하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거나 선물 받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거나. 이 책은 전자에 해당된다. 휴일에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잠시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실연했다면 더더욱.

  사랑은 두 사람이 하지만 이별은 혼자서 한다. 쌍방향과 일방향은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불안을 야기하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연인 관계가 아니라 친구 사이에서도 가능한 일이지만 이성간의 ‘사랑’이라는 감정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경험적으로 혹은 주변에서 흔히 발견하는 과정과 결과들을 통해 인간의 마음도 학습을 하게 된다. 열정과 냉정 사이에서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고 상처나 치유의 과정을 반복하기도 한다. 조작적 기억은 스스로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든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 만큼의 러브 스토리가 만들어지는 것은 물론이다. 당연히 모든 사랑은 유일무이하다. 이 소설의 나레이터 리카는 연인이었던 다케오와 이별하는 데 참 많은 시간이 걸린다. 8년간의 연애가 3일 만에 끝날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다. 리카는 어쩌면 지나간 시간들을 정리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인생의 한 부분을 누구에게 떼어 준 것은 아니지만 다케오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의 깊이나 농도는 측정할 수 없다. 다만 유추의 방식을 통해 타인의 사랑과 나의 감정들을 비교할 수는 있겠다. 이 소설은 모든 독자들의 사랑과 이별할 수 있는 바로미터의 역할은 할 수 있겠지만 이별하는 방법이나 정리하는 기술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그저 이별하는 하나의 방법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하니 더더욱 가슴 아플 수밖에.

  누구나 자신의 아픔과 상처는 견딜 수 없을 만큼 크다고 생각하며 이별의 고통을 견뎌내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드러내는 방식과 숨기는 방식의 차이로 고통과 생채기의 크기를 측정할 수는 없다. 연인의 연인과 동거라는 특별한 상황을 연출한다고 해서 그것이 더욱 비극적이지 않다. 모든 상황은 상황일 뿐이며 감정은 감정일 뿐이고 시간은 모든 것들을 변화 시킨다. 시니컬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랑 얘기는 하품을 유발하거나 따분한 신문보다 지루하다.

다케오와의 만남은 하늘을 바라보는 것하고 비슷하다. - P. 67

  소설의 내용과 무관하게 눈에 들어오는 몇 개의 문장들. 하늘을 좋아하는 개인적인 취향이 겹쳐진다. 하늘만큼 좋아하다니,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무수한 풀벌레 소리, 그렇게 세상은 어김없이 돌아가고 있다. 내 인생의 바깥쪽에서. - P. 71

  군대에서 처음 느껴 본 감정이다. 세상에서 내가 사라졌는데도 세상은 어김없이, 그것도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잘도 돌아가고 있었다.

돌아갈 장소가 없었어. - P. 160

  간혹 예외는 있지만 돌아갈 장소, 돌아갈 사람이 없어져 본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문장이다.

“한 번 밖으로 나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거야.”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그런 거야.” - P. 177


  안과 밖의 경계, 눈에 보이지 않는 금 넘어가기.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것을 넘어서는 순간 자신을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돌덩이와 같은 것이다. 나이와 무관하게 성숙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영혼의 고통을 동반한다. 당연한 말인가?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아. 언제였던가 절망적인 진실을 얘기했던 하나코가 떠올랐다. - P. 190

  사람들은 스스로 믿고 스스로를 배반한다. 그러면서 타인을 원망하며 스스로는 반드시 피해자가 된다. 정혜신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배신은 착각 혹은 의존적 심리현상에 대한 보상일 뿐이다. 소설의 결말은 짐작대로다. 한 사람을 떠나보내는 길고 지루한 시간들. 물론 본인에게 죽음 같은 고통이겠으나 리카는 비명 지르지 않고 담담하게 이야기 한다. 죽음은 오히려 예기치 못한 곳에 찾아온다. 비현실적이서 현실에 발붙이고 살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에게.


081228-1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 시인선 346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명민한 철학자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서정시인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슬픔을 준다. 서정시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이 끊임없이 반복되지만 여전히 서정시는 건재하다. 아니 더 이상 아무도 시를 읽지 않는다고 하지만 시는 계속 팔리고 읽히고 있다. 그것이 지적 허영과 자기 충족에 기인하든 흘러간 혹은 철지난 유행가처럼 소비되든 무관하게 시는 여전히 쓰여지고 있으며 팔리고 있고 읽히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이 아니겠는가.

  심보선의 <슬픔이 없는 십오 초>는 매력적인 제목을 달고 있다. 슬픔이 없다니? 그것도 십오 초? 저절로 손이 간다. 책장을 더듬고 어루만지다가 한 편씩 읽어 나간다. 음미하듯 천천히. 때론 빠른 호흡으로 넘기기도 하고, 때론 중간에 멈춰 긴 숨을 내뱉기도 한다. 어느 시집이든 그러하겠으나 여유와 안정이 없다면 시는 읽히지 않는다.

  심보선의 시는 익수하지만 생경하다. 인간의 감정이야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 법이니 시에 담아낸 정서가 익숙하다는 말은 하나마나 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이 진부해지기 쉬운 법. 조심할 것은 시인뿐이 아니다. 편안한 감상과 한 방울의 눈물을 원한다면 멜로드라마를 찾아 볼 일이다. 시를 통해 우리가 확인해야 하는 것은 비극과 절망이다. 희망과 기쁨은 그것을 둘러싼 후광처럼 자연스럽게 빛을 발한다.

  그러 면에서 심보선의 시는 메마름과 극단적인 슬픔이 주는 간절함이 없다. 그래야 좋은 시라는 말과는 다르지만 개인적인 취향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정호승의 <새벽편지>나 <서울의 예수>는 이제 더 이상 울림을 전하지는 않는다. 오래 전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전해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내 언어에는 세계가 빠져 있다
그것을 나는 어젯밤 깨달았다
내 방에는 조용한 책상이  장기 투숙하고 있다

세계여!
영원한 악천후여!
나에게 벼락같은 모서리를 선사해다오!

설탕이 없었다면
개미는 좀더 커다란 것으로 진화했겠지
이것이 내가 밤새 고심 끝에 완성한 문장이었다.
- ‘슬픔의 진화’ 중에서

  서시에 해당하는 ‘슬픔의 진화’ 중 일부다. 낯설게 하기와 새로운 시야의 확보는 시인의 전매특허이리라. 밤새 고심한 결과가 독자에게 닿지 않는 것에 대해 고심해야 한다. 독자를 위해 시를 쓰는 존재가 아니라는 데야 할 말이 없어지겠지만 생경한 시선 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시절이 벌써 당도해 있었다.

그리고 어떤 결정적인 구토의 연도
내 몫의 비극이 남아 있음을 안다
누구에게나 증오할 자격이 있음을 안다
오늘 나는 누군가의 애절한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
- ‘오늘 나는’ 중에서


  차라리, 철저하게 진부한 ‘오늘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는 말은 무겁고 끈적하지만 군더더기가 없다. 누구나 하루치의 인생을 열심히 살아내지만 그 안에 담긴 문법들은 제각각이다. 상대적인 시간의 양과 담아내지 못한 슬픔들을 무엇으로 말할 수 있을까. 하루의 피곤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남겨진 비극과 증오는 무기가 될 수 없다.

  오늘 나는 누구의 얼굴을 노려보았나? 오늘 나는 누구를 사랑했나?

전날 벗어놓은 바지를 바라보듯
생에 대하여 미련이 없다
이제 와서 먼 길을 떠나려 한다면
질투가 심한 심장은 일찍이 버려야 했다
태양을 노려보며 사각형을 선호한다 말했다
그 외의 형태들은 모두 슬프다 말했다
-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 중에서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중에서

  순간을, 아주 잠깐에 대해 말하는 시를 우리는 자주 발견한다. 그것은 찰나의 인상이 주는 기쁨이자 행복이다. 순간을 영원으로 기억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과 그만큼 짙은 향기를 담보하기도 한다. 생에 대한 미련도 없고 슬픔도 없다면 그것이 가능하다면 원하는 사람이 있을까?

  천국이라고 말하는 곳에는 미련도 슬픔도 어떤 구체적인 형태를 띠고 존재하다가 사라지게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멸한다. 사라진 자리에는 흔적조차 남겨지지 않는다.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말이다. 비어가는, 사라지는 과정 속에서 흔들리는 불빛을 응시해 보자. 과연 누가 생의 슬픔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있는가를.

구름이 내게 모호함을 가르치고 떠났다
가난과 허기가 정말 그런 뜻이었나?
- ‘착각’ 중에서

이제껏 도약을 꿈꿔본 적 없다
다만 사각형의 문들이 나를
공허에서 공허로
평면에서 평면으로 옮겼다
- ‘전락’ 중에서

  끊임없이 욕망을 부정하지만 그것은 거짓이다. 도약을 꿈꿔본 적 없는 인간이 있을까. 평면에서 옮겨지든 입체에서 평면으로 옮겨지든 그것은 크기의 차이일 뿐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그것을 ‘전락’이라고 말하지만 시에서는 ‘공허’라고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법이다. 가난과 허기라니. 사랑과 슬픔처럼 동어반복으로 들리는 말이다.

  피와 눈물에 대해 그리고 생활과 심연에 대해, 그 바닥에 대해 한참 들여다 보고 있는 시인의 시들은 커다란 울림보다 작은 메아리에 머물고 있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는 현실 밖에 존재하는 우리들의 영원한 꿈일지도 모른다. 도약을 꿈꾸어도 현실을 부정해도 흔들림없이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구름처럼 모호하게. 그 소리는 이명처럼 들리다가 들리지 않다가, 보였다가 보이지 않았다가. 그렇게 사라진다. 모든 것이.


081216-1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래된 일기
이승우 지음 / 창비 / 200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것은 부재를 통해 그 존재를 가장 잘 드러낸다. - P. 17

  흑백 사진처럼 선명한 기억은 부재를 증명한다. 현존하지 않는 모든 것들이 그리움을 만들어 내듯이. 우리에게 지나간 시간은 다가 올 미래보다 찬란하다. 과거지향형 인간이 아니더라도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모든 것들은 과거의 결과물이라는 것임을 절감한다. 이 모든 삶의 비극은 일회성에서 비롯된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 혹은 간절함.

  단 하나의 문장으로 사유의 실타래가 자연스럽게 풀어지고 상황과 맥락에서 벗어나 몽환적 상상의 세계를 주유한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읽다 창밖을 내다보며 하늘을 쳐다보고 길게 한숨을 쉬기도 한다. 고개를 끄덕이고 낄낄거리며 책장을 넘기는 즐거움을 무엇과 바꿀 수 있을까. 소설은 사건 전개의 흥미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어쩌면 그것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승우의 소설집 <오래된 일기>는 빛바랜 누런 일기장의 표지를 들추는 것처럼 아득하다. 타인의 삶이 보여주는 진정성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그의 소설은 아름답진 않지만 독자를 사유의 세계로 안내한다. 과연 우리들 삶의 결에 배어있는 무늬들은 어떠한가. 수많은 빗금들과 켜켜이 내려앉은 먼지들 사이로 오래된 일기장을 넘기는 마음으로 그의 소설들이 읽혔다.

  소설집을 읽고 나서 다시 차례를 보면 단편의 제목들과 내용이 뒤섞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 책의 단편들은 선명하게 떠오르며 각 단편들이 분명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충격적이고 특이한 사건들이 모여 독자에게 각인되는 소설들은 아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평범하고 전형적인 인물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사실 우리 주변에 평범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찬찬히 들여다보면 각양각색의 인간 군상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서로 부대끼며 상처받고 아파하며 서로 위로 받기도 한다.

  이 책에는 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등장인물들은 ‘불행’의 친구들이다. 하지만 그 불행이 낯설지도 이물스럽지도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건 아마도 우리들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잘도 들춰내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는 부조리하다. 인생은 불편하며 삶은 신산스럽다.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우리들의 마음과 근원적인 외로움에 대해 불편한 심사를 드러낸다. 그 목소리는 불협화음이다. 행복을 가장한 생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불행의 그림자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는 모두 행복을 기원하지만 아무도 불행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려 하지는 않는다. 그 원인과 과정을 정면으로 바라볼 자신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이승우는 그 마음들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인물을 보여준다. 나는 그들이 불편하지만 마음 한 구석이 애련하다. ‘오래된 일기’의 규가 그렇고 ‘무슨 일이든, 아무 일도’의 상규가 그러하다.

  ‘타인의 집’의 그녀는 ‘나’를 볼 수 없다. 세상은 거미줄처럼 얽혀있고 타인의 고통과 불행을 인식할 수 없다. 공감이라는 심리적 배려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유추를 통해 그 마음을 짐작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나는 너가 될 수 없고 너는 나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기본전제를 부정할 때 불행이 시작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전기수 이야기’와 ‘실종 사례’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사회 구조적 모순 속에 불행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외로움과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 아니라 타인과 사회 속에서 겪게 되는 불행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일 때가 많다. 물론 작가는 그 불행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주목한다. 어떤 모습으로 그리고 어떤 자세로 그것을 맞이하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은 어쩔 수 없는 것과 있는 것으로 나뉜다. 인간의 의지로 감당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해 혹은 불가해한 불행에 대해 성찰하기도 하는 것이 ‘방’의 할머니일 것이다.

  이 책의 말미를 장식하는 ‘정남진행’과 ‘풍장-정남진행2’는 만남과 떠남이라는 아주 오래된 주제를 변주하고 있다. 정동진이 아니라 정남진이라는 다소 생경한 공간을 통해 호기심을 유발하고 그곳에 가고 싶은, 그러나 가지 못하고 죽은 여자와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가슴앓이’라는 특이한 이름의 섬의 일부가 되어 버린 남자는 과거와 현재 속에서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한다. 그것은 내게 운명과 우연의 차이로 읽혔다. 숙명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인생은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고 우연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재미없는 연극일 뿐!

“내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나는 신음처럼 내뱉었다.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누군가 나로 인해 아파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떳떳한 일일까. - P. 34

  그래서 문득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것이라는 깨달음. 한없이 겸손해지고 한없이 작아지고 한없이 주위를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단 한 사람도 떳떳한 사람이 없다는 비극의 확인. 오늘도 우리는 세계의 불행과 직면했으며 하루를 살아냈다. 소설가는 운명적으로 그 불행에 대해 말해야 한다면 이승우는 그 역할에 충실했다. 독자는 <오래된 일기>를 통해 작가의 일기를, 아니 우리가 차마 쓰지 못한 일기의 행간을 읽어내야 한다. 그것이 작가가 보여주려 했지만 우리가 읽지 못한 이 책의 나머지가 될 것이다.


081211-13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대한 일상 창비시선 294
백무산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봄날이었다. 점심 식사 후 나른한 5교시. 절인 배추처럼 늘어진 아이들에게 한문 선생님은 책상에 엎드려 눈을 감으라고 하셨다. 선생님께서 읽어주시는 시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흘러 친구들이 볼까봐 얼른 닦았다.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었다. 사회에 막 눈을 뜰 무렵 박노해와 백무산은 노동문학의 선두주자였고 <만국의 노동자여>, <동트는 미포만>은 시대를 반영하는 기념비였다. 80년대의 뜨거움이 사라졌지만 시간 속에 모든 것이 묻혀 버리는 것은 아니다.

  백무산의 시를 참 오랜만에 다시 읽는다. 프로필 사진 속 시인의 모습은 세월을 웅변한다. 세월은 흘렀지만 여전히 그는 시인이며 시를 통해 세상과 만나고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다양한 시의 색깔들만큼 시대가 변했고 세월이 흘렀나보다.

내게도 벌써 여러 봄과
여러 겨울이 지났네
지난 계절들 내 손으로 다 거두어온 줄 알았는데
여기저기 나의 낯선 생이 바람 속
빈 둥지처럼 나뒹굴고 있네
나는 지나온 나의 전부가 아니네

내 온몸이 통과해왔건만 낯선 생이
불쑥 낯익은 바람에 타인의 것인 양 흩어지고 있네

나는 그걸 하나의 생이라고 우겨왔네
저기 다른 생이 또 하나 밀려오네
- ‘생의 다른 생’ 중에서


  <거대한 일상>의 서시에 해당하는 시의 일부다. 또 하나의 생이 밀려오고 있다는 것은 한 사람의 후반생을 이야기하는 것일 뿐 아니라 시대의 도도한 흐름 앞에서 선 개인의 슬픔을 드러내기도 하는 일이다. 낯선 생이 낯익은 바람에 흩어지는 모습은 처연하다. 누가 누구의 생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시간 앞에 모든 생은 겸허해 지고 한 시대의 끝자락에서 지난 시대를 바라보는 일은 허망할 뿐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꿈을 꾼다. 꿈꾸지 않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그것은 시인이든 아니든 어느 시대를 살고 있든 마찬가지다. 하지만 시인은 꿈을 꾸지 않으면 절망도 없다고 냉정하게 말하는 듯하다.

꿈꾸지 않는 자의 절망은 절망이 아니다

마음에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비구니는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순결한 것은 스스로 기댈 곳이 없다
- ‘기대와 기댈 곳’ 중에서


  삶의 일상성은 불온한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이 시대를 무어라 정의할 수 없지만 시인에게는 여전히 세계는 불안한 곳이고 부조리한 상태다. 그러한 인식은 부정적 세계관이 아니라 비판적이고 깨어있는 의식을 대변한다. 폭압적 정치 현실에서 벗어나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전쟁과 기아에 허덕인다. 그 침략 전쟁에 군대를 파병하고 이웃들의 굶주림과 가난을 외면한다. 생존 경쟁을 넘어 개인주의적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쓸쓸하기만 하다.

  누군가를 쏘아야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는 총은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 총을 뺐기지 않으려면 쏘아야 한다. 그것이 정의다. 정의의 이름으로 쏘는 것은 불가능하다. ‘쏘다’가 정의라는 역설적 인식은 현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며 우리들의 아픈 자화상이다.

전쟁 때문에 군대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군대가 있으므로 전쟁을 생각하는 것이다
총을 든 자에게는
‘쏘다’와 ‘정의’는 언제나 같은 말이다

세상의 어떤 침략전쟁도
정의의 전쟁이 아닌 것이 없고
성전(聖戰)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므로 정의의 ‘쏘다’는 없다
‘쏘다’가 정의인 것이다
- ‘‘쏘다’가 정의다’ 중에서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왔노라고 노래하지만
그러나 아직도 그가 승리하고 있다
- ‘위인전’ 중에서

  시대가 변했다. 시간이 흐른 것이다. 세월은 흐르고 아이들은 자라며 노인은 죽는다. 그러나 아직도 그가 승리하는 시대는 계속된다. 역사는 순환하는 수레바퀴와 같은 것일까? 오욕의 세월을 견뎌낸 사람들에게 또 다른 형태의, 혹은 절망적이고 처절한 시대의 노래가 들려오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래도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이 시대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다. 그가 사라지는 순간 희망이 시작되는 것인지 눈에 보이지 않는 환상과 장밋빛 미래에 대한 그들만의 축제를 구경하는 방관자가 되어야 하는지.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는 온다. 그 시대가 어떤 시대이든. 다만 우리는 그 시대를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를 생각해야 한다. 아니 그 시대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래야 최소한 ‘순결한 분노’를 느끼지 않겠는가. 분노가 없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다. 냉정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다. 좋은 게 좋은 거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는 사람에게 분노는 필요 없다.

  시인이 말하는 분노는 사회적 명상을 말한다. 기사(騎士)는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바로 내가 아니 당신이 기사일 지도 모른다. 기다림에 앞서 순결한 분노조차 느끼지 못한다면 거울을 보고 바로 우리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바로 우리들의 얼굴 표정을 먼저 살펴야 한다. 그리고 눈을 감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떤 일을 통해 그 분노를 드러내고 있는지 말이다.


순결한 분노

꿈을 꾸는 일은 분노하는 일이다
책을 읽는 일은 분노하는 일이다
고요에 드는 일은 분노하는 일이다
노동을 하는 일은 분노하는 일이다
글을 쓰는 일은 분노하는 일이다

소유 욕망의 성냄이 아니다
탐욕에 치미는 화가 아니다

순결한 분노는 사회적 명상이다

이제,
그들이 온다

기사(騎士)들이 온다



081128-13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을 하라. 네가 살아 있다면 그 무엇이든 사랑을 하라.” …… “서로의 심장을 꺼내놓고 싸우고 나면 세계는 어떤 식으로든 정리될 테니까. 역사책이란 그런 사람들의 심장에서 뿜어난 피로 쓴 책이야.” - P. 25

  불가해한 인생을 소설로 읽는다는 것은 하나의 허상에 불과하다. 그 허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현실이며 매트릭스이고 심리적 실재인지도 모른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허구를 만나는 일은 그래서 불편하다. 현실을 허구로 만들고 공허한 이야기가 오히려 세계와 유사하다. 특히 역사적 사실은 또 하나의 세계를 구성한다. 시간의 씨줄과 공간의 날줄이 만나 사실적 세계를 만든다. 역사와 소설이 만나면 완벽한 상상적 허구의 세계가 되거나 보이지 않는 진실의 세계를 더듬어보거나 당대에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소설이 읽을 만한 것이 되려면 단순하게 두 가지 조건만 충족하면 된다. 재미있거나 진실을 건드리거나. 두 가지가 결합된 책을 우리는 고전이라고 부른다. 한 권의 소설을 통해 인생을 통찰하고 역사를 이해하며 삶의 진실을 들여다 볼 수 있다면 독자들은 더없이 만족스러울 것이다. 개인적 취향이나 입맛에 따라 기호가 나뉘기도 하고 그 재미라는 것도 사실 기준과 성격이 모호하기는 하다. 어쨌든 ‘진실’에 관한 문제가 훨씬 복잡하다. 그것이 개인의 진실이든 역사적 진실이든 말이다.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닌 바에야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김연수의 소설은 감수성의 표현이 탁월하고 문장이 생생하다. 구석구석 감정의 말초를 건드리고 사실을 드러내는 방법이 정확하고 세심하다. 특히 사적인 영역의 감정이나 상황에 부딪힌 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뛰어나다.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나 소설을 쓰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필요한 미덕이겠으나 김연수의 그것은 잘 벼려진 칼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벤다. 그래서 서늘하고 시린 느낌이다. 나는 그 발랄함과 경쾌함 혹은 어눌하고 찌질한 감상의 편린들이 마음에 든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이겠지만.

  작년에 나온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과 확연하게 다른 이 소설이 1년 만에 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작가 후기에서 사정을 알게 되었지만 고민과 고통이 만만치 않았으리라는 것은 읽는 동안 짐작할 수 있었다. 1930년 만주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물지 않은 근대사의 상처를 기억하자는 것이다. 민생단이라고 하는 생경한 이야기를 들춰내는 것은 역사가의 몫으로만 돌리기에 감춰진 아픔이 너무 크다. 아직도 진행형인 분단의 역사와 좌우 이념 갈등은 우리에게 해결되지 않은 숙제다. 어떤 소설가든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적어도 한반도의 문제를 인식한 작가라면.

  그 문제는 분단이나 식민 통치 혹은 한국전쟁이나 4.19와 같은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이고 애정이다. 과거는 단순히 현재의 기억에 불과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작가에게 짐을 지워 주려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읽고 싶은 혹은 읽어야할 소설이라는 게 있다면 나는 주저없이 이런 종류의 소설들이 반드시 쓰여져야 한다고 믿는다. 역사적으로, 문학적으로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들의, 아니 나의 지금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어제가 없는 오늘은 없다.

  1932년 9월 용정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1933년 4월 팔가자를 거쳐 7월 어랑촌 그리고 41년 8월 다시 용정에서 끝난다. 중국공산당과 일본 제국주의 사이에서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무엇이었을까? 인간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불안이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처절한 사상투쟁이나 눈에 보이는 뚜렷한 적에 대한 분노보다 비참한 것은 불신이며 불안이다. 이 소설은 그 불안의 정체를 말하고 있다. 자신들조차 자신들의 정체를 몰랐던 그들은 아직도 역사의 그늘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자신들이 누구인지 모를지도 모른다.

  희망과 비극이 교차했던 간도. 그곳에 살았던 네 명의 중학생과 화자인 김해연은 이 소설에서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다. 시대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전형적인 인물이라는 거창한 타이틀보다 오히려 당대의 삶을 가장 치열하게 보여줄 수 있는 주변 인물들이다. 누가 그런 시대를 만들어 냈는지 시대의 진실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하다.

  작가의 의도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말하려 했든 나는 이 소설에서 오래된 기억과 현재의 아픔을 함께 읽었다. 희미한 등불처럼 저기 멀리서 비추는 작은 빛의 알갱이들이 모여 현재를 만들어냈다. 나는 지금을 살고 있고 소설속의 주인공들은 과거를 살았지만 보이지 않는유리 큐브에 갇힌 진실의 미로 게임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하나의 세계를 완벽하게 믿고 싶어한다. 부끄러움도 모른 채.

그때까지 내가 살고 있었고, 그게 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계가 그처럼 간단하게 무너져 내릴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건 이 세계가 낮과 밤, 빛과 어둠, 진실과 거짓, 고귀함과 하찮음 등으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을 그때까지 나는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게 부끄러워서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 P. 42

  이 소설의 그 부끄러움의 세계를 조금 보여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김해연에게 그리고 이정희에게 사랑은 무엇이었으며 그들의 죽음은 어떤 것이었는지 그리고 오늘의 우리에게 사랑과 죽음은 과연 어떤 것인 생각해 보는 기회를 제공했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하나의 세계와 그 곳의 사랑과 죽음.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그것은 무엇인가?

사랑이라는 게 우리가 함께 봄의 언덕에 나란히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라면, 죽음이라는 건 이제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뜻이겠지요. 그런 뜻일 뿐이겠네요. - P. 325


081111-1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