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 2009년 제3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연수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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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李箱)에게 빚을 졌다면 갚아야 한다. 그는 우리 문학사의 화수분이다.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 된 그의 이미지들을 보라. 화려하고 다양하게 분석되고 해체되는 그의 작품들을 보면 알게 된다. 이상이 누구인가를. 아니 어쩌면 영원히 그를 몰라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을지도 모른다. 이상 김해경은 우리에게 불가해한 존재로 남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흐릿한 존재로 남아 있을 수는 없을까. 일관성 있는 목소리나 통일된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모범적인 작가들과 달리 그는 럭비공처럼 튀어 오르는 방향을 알 수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 다양하고 입체적으로 살아 숨 쉬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당대 유행하던 혹은 유럽에서 흘러든 기법이든 유행이든 상관없이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홀로 걸었든 그 쓸쓸함과 외로움 곁에 서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면 한번쯤 작가의 길을 꿈꾸었음에 틀림없다.

  2009년 ‘이상문학상’은 김연수에게 돌아갔다. 2000년 이인화가 받았을 때처럼 당황스러웠던 적이 없다. 남의 문학상에 뭐라 끼어들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이상문학상’이 가진 위상과 의미를 생각할 때 오래전 황당한 기억이 떠오른다. 보는 각도와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게 문학이지만 김연수는 최근의 작품들이나 활동으로 보아 충분히 예견된 수상이었다. 문학상은 김연수의 말대로 그저 칭찬이고 위안일 수 있다. 더 잘하고 잘해 보라고. 종착점에서 걸어주는 꽃다발이 아니라 마라톤 도중 마시는 탁자위에 생수 같은 게 아닐까 싶다. 힘들고 지친 발걸음을 내딛는 작가에게 격려와 칭찬이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그러하듯이. 김연수가 이제 조금 더 힘을 내고 행복한 작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수상작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은 새로운 서사적 기법도 ‘메타적 글쓰기의 방법에 의해 상호 텍스트적 중층성을 확립’한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읽은 수상작은 그저 문학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활용되는 상징에 다름 아니다. ‘코끼로’로 상징되는 인간 내면의 고통은 현실과 무관하지 않으며 소설 안에서 단순하게 상징화 되었을 뿐이다. 누구에게나 고통은 있다. 그렇다면 소설에서 이야기하듯이 그것이 코끼리가 아니라도, 동물이 아니라도 좋다. 추상적 대상을 구체화 시킬 수 있는 상징적 메타포가 필요할 뿐이다.

  나는 이 단편을 통해 김연수 소설의 미래를 가늠해 보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겠지만 그것은 각 심사위원들의 중점적 심사평에서는 조성기만이 언급했고 작품론에서 김형중이 언급한 ‘촛불’이다. 소설 말미에 ‘그것’이라는 고딕체의 글씨가 선명하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이 소설을 읽어내는 키워드는 그것이 아닐까? 구체적 대상을 보여주지 않고 다양한 함의를 내포하고 있는 지시어 그것을 김형중은 ‘촛불’이라고 읽었다. 무릎을 치며 공감했다. 개인의 고통은 분명한 이유가 있다. 특히 소설에서 보여주는 인물들에게 고통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존재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는 장치가 된다. 이 개인적 고통이 사회로 확대되는 일은 현실 참여 문학이 아니고서는 좀체로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 90년대 이후 한국 소설의 지향은 철저하게 개인적이고 내면적 세계관에 함몰되어 있다. 아니면 지나간 역사에게 소설의 방향을 묻고 있다. 사회적 삶을 영위해 나가고 있는 인물들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부족하다. 고통의 근원에 도사리고 있는 사회 구조적 문제나 교묘한 틀과 구조들을 살펴보는 소설을 찾기 어렵다. 철지난 노래를 부르자는 게 아니다. 인간의 삶은 영원히 반복되고 또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그 아픔과 고통은 쉽게 치유되지 않고 원인이 밝혀 고통을 나누기도 쉽지 않다.

  김연수에게 과연 ‘촛불’이 어떤 의미로 그리고 어떤 형태로 밝혀질 수 있을지 그의 다음 소설들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이다. 지금까지 보여준 작가의 역량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남음이 있을 것이다. 작가론에서 손정수는 ‘소통’으로 김연수의 소설을 이야기했지만 그 소통은 내면적인 고통이나 아픔을 드러내는 타인과의 소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소통에 실패한 주인공의 내면의 풍경을 그린 것은 아닌가 싶다. 소통을 넘어 연대와 참여로 나설 수 있는 역사적 주체로 홀로 설 수 있는 사람들이 등장할 것을 기대해 본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한 ‘여자’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 수록됐던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을 다시 읽었다. 새로운 느낌으로 작가 자선 대표작이라는 이름으로 읽었다. 그가 찾으려는 혹은 헤매고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 혹은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해 보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쓰는 일 자체가 즐거움으로 시작해서 책임감과 의무가 되고 또 다른 세계를 만나고 자신을 극복하는 과정이라면 행복한 작가가 아닐까 싶다.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내게 읽는 재미를 주었던 작가의 수상을 축하한다.

  우수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작품들 중 박민규의 ‘𪚥’가 주목을 끝다. 예의 발랄하고 풍자적인 어법으로 현실을 풍자하는 수법이 독자들을 한없이 즐겁게 한다. 현실을 비틀고 풍자하는 많은 방법 중에 무림의 고수를 선택한 것은 무협의 세계라는 아련한 추억과 더불어 진정한 고수의 의미를 중첩시키고 있다. 윤이형의 ‘완전한 항해’ 또한 주목을 끌었지만 새로움 이상을 보지 못했다. 이혜경, 정지아, 공선옥, 전성태, 조용호의 소설들도 나름의 개성과 탄탄함을 갖추고 있지만 눈에 띠는 신선함이나 깊은 감동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수상작을 읽어며 윤대녕을 떠 올렸는데 심사평에서 김윤식이 한 번 언급해서 반가웠다. 누군가의 영향과 교집합을 읽어내는 것도 소설 읽는 또 다른 재미다. 상찬으로 끝나지 않고 더욱 정진할 것을 믿는다. 깊이와 넓이라는 상호 모순된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작가가 되기를 바란다. 독자들의 입맛은 점점 까탈스럽다. 작가도 독자와의 만남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더라도 소설은 영원히 새로움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새로운 삶, 새로운 인물, 새로운 기법 그리고 새로운 사회를 꿈꾸어야 한다. 우리 모두의 그것처럼.


090208-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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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2-08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다 읽고 리뷰 제목 이해했어요.

sceptic 2009-02-20 12:09   좋아요 0 | URL
김연수의 소설이 재미있죠...변하지 않더라도 계속 읽고 싶죠...그래도 내일이 더 기대되는 작가이기도 하구요...^^
 
키스 문학과지성 시인선 353
강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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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연히 모든 것이 완벽해지길 꿈꾼다
  ― 장뤼크 고다르


  프랑스 누벨바그(Nouvelle Vague)의 선두 주자였던 고다르의 말이 심상치 않다. <네 멋대로 해라>를 떠올리며 책장을 열게 하는 것은 다분히 시인의 의도된 장치일 것이다. 영화의 이미지와 시의 이미지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선명한 시각적 효과는 장면 이외에도 전달 방식에 따라 감독의 의도가 전달될 수 있으나 시에서는 철저하게 언어에 의해서만 독자들의 빈약한 상상력을 자극할 뿐이다. 의도된 오류는 고사하고 제대로 전달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시는 어쩌면 더 이상 이미지의 생경한 전달에 그치는 장르의 시대를 끝냈는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할 때 우연에 기대어 김경주의 <기담>에 이어 강정의 <키스>를 읽었다. 두 시인은 따로 또 같이 시를 쓴 것처럼 보인다. 내게 그렇게 읽혔겠지만 재밌는 비교가 가능하다. 기묘하게도 두 사람의 공통점은 현재 음악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특별한 연결고리나 교묘한 퍼즐로 엮어질 수는 없지만 언어를 가지고 논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하다.

  문학을, 시를 더 이상 진지하고 깊은 고민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는 듯하다. 가볍고 기괴한 말놀음에 그친다는 것이 아니라 엄숙주의에서 벗어나 즐기고 있다는 느낌이다. 시의 언어는 일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문학언어와 일상언어 사이를 오가며 의미를 포착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독자는 보수적인 관점에서 더 이상 시에 기대하는 것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철저하게 기존의 문법대로 시가 주는 안락한 감성을 주문하는 것일까.

  두 시인은 아랑곳없이 자신의 길을 간다. 강정의 <키스>는 낯선 이미지와의 접촉이며 일상을 비틀어보는 것과의 만남을 시도한다. 촉각적, 시각적 이미지의 범람이 아니라 온 생의 감각 세포들을 되살려내어 미세한 떨림까지도 포착하지 못한다면 금방 길을 잃고 헤매게 될 것이다. 그가 무엇을 의도했든지 말이다. 이 시집의 서시를 보자.

死後의 바람

오래전 한 편의 詩가 끝나고 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이 짐승의 거죽을 뒤집어쓴 채 민둥산의 태양을 끌어내렸다

불타는 시간들은 그대로 숲이 된다
인간이 인간 바깥으로 떠돌아 짐승의 마음을 허공에 쓴다


  불확실성 시대에 시는 더욱 불안하고 인간의 마음들은 허공을 헤맨다. 시인은 서시에서 불타는 시간의 숲에서 인간이 짐승의 마음으로 떠도는 이야기를 써나갈 것임을 암시한다. 시집 전체에서 일관되게 추구하는 타인에 대한 사랑, 그 매혹의 깊이에 대해 시인은 끊임없이 고뇌한다. 애무는 접촉이다. 관심이며 열정이고 몰입이며 안타까움이다. 나 혹은 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견디고 인생을 살아가며 삶을 가꾸어 나간다.

  너는 문을 닫고 키스한다 문은 작지만 문 안의 세상은 넓다 너의 문으로 들어간 나는 너의 심장을 만지고 내 혀가 닿은 문 안의 세상은 뱀의 노정처럼 굴곡진 그림들을 낳는다 내가 인류의 다음 체형에 대해 숙고하는 동안 비는 점점 푸른빛과 노란빛을 섞는다 - ‘키스’ 중에서

  아스라이 멀어지는 감각. ‘부드러움과 달콤함’이라는 관용적 표현으로 말해질 수 없는 느낌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감각적 이미지의 전달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전할 수 있는 이야기는 생경한 풍경과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세계로 표현된다. ‘문은 작지만 문 안의 세상은 넓다’고.

  시집 중간 중간 시인의 그림이 삽입되어 있다. 인간의 신체를 극단적으로 표현하여 부분이 극대화되고 생략된 신체는 기괴해 보인다. 온전한 모습으로 타인을 대하는 사람은 없다. 전면적인 접촉과 만남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도 도달할 수 없는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것이 우리들의 관계가 아닐까.

  그래서 시인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고 언어가 만들어내는 불가능한 세계와 불편한 이미지를 재생산한다. 독자들은 그 안에서 어리둥절할 것이고 나름의 방법으로 현실과 이미지와 연결 작업을 시도할 것이다. 그것은 독자들의 몫일 뿐!

그렇지 않겠소?
어찌해도 당신은 내게 속아 넘어갈 뿐,
대체로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용서하지 마시오 - ‘자멸의 사랑’ 중에서


  추상과 상징의 세계는 결국 현실의 메트릭스일 뿐일지도 모른다. 왜 아니겠는가. 현실의 행복을 극대화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불가해한 현실 밖의 세계를 꿈꾸는 상상계의 일원이 되고 싶은 욕망을 어쩌겠는가. 어느 시인의 말대로 인생은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늘 그 너머에 눈길을 던져본다.

  그저 한 몸 등 따시고 배부른 인생을 위해 질주하는 저 수많은 인간 군상들 뒤로 피어 오르는 먼지구름 너머에 무언가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다. 그것은 통속적인 사랑의 결실도 아니고 즐거운 인생이라고 믿었던 신기루도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단 한 번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너머에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걸 종교라는 이름으로만 포장하지 않는다면 용서할 수 있겠다. 또 그렇지 않으면 어떤가?

  이 시집에서 시인은 끊임없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랑이라 무어라고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지 말란다. 서로를 속이는 감정의 게임에서 정답도 없고 정해진 길 따위는 더더욱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마주치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터.

무엇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해 보아도 보이는 건 안개처럼 희미할 뿐이다. 절대적인 것과 확실한 그 무엇은 아무것도 없다. 내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애무일 뿐! 애무하라 그리고 살아 있음을 확인하라! 고 시인은 외친다. 이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시집 해설에 간만에 밑줄 긋는다! 애무하기 좋은 밤이다.

애무를 넘어

  진정 사랑하는 사람과의 접촉에는 고민도 순서도 있을 리 없다. 애인의 부드러운 살갗에 매혹되고 혀의 촉감에 넋 나간 사람이 다음 순간의 손놀림이나 자세 따위를 걱정할 틈이 있겠는가. 생각하고 준비할 겨를도 없이, 순간순간의 느낌에 몰두하며 사랑하는 이의 몸을 더듬고 또 더듬을 뿐이다. 애무는 최종의 완벽한 만족을 위해 거쳐야 할 단계는 아니다. 애무는 그 자체로 목적이다. 사랑하는 대상을 결코 자기 수중에 거머쥘 수 없다는 사실을 은연중 감지했지만 쉽사리 그 불가능을 수용할 수 없는 자의 절절한 몸짓이다. - [해설] ‘애무의 윤리(조연정)’ 중에서


090119-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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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위의 신발
뱅쌍 들르크루아 지음, 윤진 옮김 / 창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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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은 늘 환상 속의 그림자에 불과한 지도 모르겠다. 동굴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현실의 그림자가 아니라 이데아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다고 플라톤이 말했다. 하지만 이데아의 그림자나 신기루는 그것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들이 믿고 있는 실체라는 것이 중요하다. 어쩌면 본질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믿는다. 대부분.

  하나의 사물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각을 소개하는 것은 예술의 본령이다. 음악이든 미술이든 문학이든 상관없이 어떻게 보느냐가 문제가 될 때가 많다. 방법과 시점에 따라 언제나 그대로인 대상은 갑자기 낯설게 느껴진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우리 주변에는 그런 종류의 일들이 종종 벌어지기도 한다. 예술가가 아니라도 어느날 문득 ‘낯설게 하기’가 가능해진다면 일상에서 벗어나 드디어 새로운 삶을 얻었다고 외쳐도 좋을 것이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답 없는 질문이 아니라면 나는 답을 찾아볼 용의가 있다. 물론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혹은 아직 답을 찾지 못해서 말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다양한 방식의 질문과 간섭들에 대해 작가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시비를 걸고 딴지를 걸며 비틀고 뒤집는다. 그것을 즐길만한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항상 예술의 언저리를 기웃거리게 된다. 스스로 즐기고 타인의 시선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가장 가깝게 즐길 수 있는 소설이 우리에게 늘상 새로움만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거꾸로 우리가 소설에게 낯선 흥분만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시선과 상큼한 감각은 일차적이고 즉흥적이지만 여운과 생각의 찌거기를 남기지 않는다. 반면 생활 속에서 부대끼는 사소한 문제에서 출발했거나 거시적 관점에서 생의 의미를 탐구하는 이야기가 때때로 읽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그 많은 독자들의 취향 속에서도 변함없이 대중의 취향을 읽어내거나 커다란 호응을 받은 작가는 얼마나 행복한가.

  더구나 해외 작가의 소설일 경우 이미 알려진 작가와 달리 낯설고 새롭지만 그만한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시간과 돈과 노력이라는 위험을. 프랑스 작가 뱅상 들르크루아의 <지붕 위의 신발>은 문학적 상상력과 철학적 사유가 빚어낸 훌륭한 소설이다. 새롭게 소개되는 소설이 감내해야 하는 위험성을 무릅쓰고 읽을 만하다.

  장편소설이지만 9가지 이야기와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는 특이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제목에서 보여주고 있는 ‘지붕 위의 신발’을 중심으로 한 서민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복사기 판매원의 딸이 바라보는 ‘지붕 위의 신발’과 화가의 입장에서 바라본 ‘지붕 위의 신발’은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각각의 이야기들이 서로 연결된 구조로 되어 있다. 나는 이런 형식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하나의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거나 동일한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시하는 방법을 즐긴다.

  영화든 소설이든 내게는 그 ‘차이’가 중요하게 받아들여진다. 동일한 것은 없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제각각 다른 의미로 다가가는 모든 요소들이 재미와 즐거움을 만들고 때로 슬픔과 눈물을 만든다.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과 삶에 대한 가치관이 투영될 수밖에 없다. 억지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사유의 흔적이 배어난 작품들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독자와의 공감은 결국 작가의 영혼과의 대화를 의미한다.

  작은 이야기들이 마치 한 편의 단편처럼 완결성을 띠면서도 전체 장편소설로도 손색이 없다. 철학자들의 주저가 등장하고 환상적인 요소도 삽입되어 조금 산만하게 보이기도 한다. ‘진리는 아이들 입에서 나오는가?’에서부터 ‘미학적 요소’에 이르기까지 정교하게 이야기가 맞물리고 배치되어 있다. 이웃들과 개인의 관계를 돌아보기도 하고 전체와 부분의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는 소설이다.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은 공통점 한 가지를 갖고 있다. 그것은 외로움이다. 고독한 존재로 세상을 살아가야하는 숙명을 지닌 채 태어난 것이 인간이라면 소설 속 주인공들은 그 의미를 깊이 새기고 있다. 서로 다른 성별, 나이, 직업,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고통스러울만큼 고독한 존재들임에 틀림없다. 당연히 그들은 우리들의 이웃이며 나의 가족이고 바로 나 자신이기도 할 것이다.

  현대인에게 개별적 존재 의미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겠다. 어차피 가족 이상의 전체를 고려해 보지 않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상의 에피소드도 소설이 될 수 있겠지만 이색적이고 평범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 그 사람들조차 결국 외면하고 싶은 우리들의 외로움을 드러내고 있다면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도 비슷한 마음과 생각의 갈피들을 짚어낼 지도 모르겠다. 국경을 넘어 동양에서도 서양에서도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비슷할 것이다. 신산스런 삶 속에서 우리가 마음을 닫고 살아야 하는 이유와 고독을 이겨내는 법을 배우고 싶어할 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 주변 사람들도 과연 그렇게 외로운가 궁금하기도 하다. 본질적으로 혼자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받아들인다면 사실 그것은 그리 고통스럽지는 않다. 무소의 뿔처럼 그저 혼자서 가면 되는 것이다. 좌충우돌하며 그렇게 가는 것이 인생 아닌가.


09011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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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담 문학과지성 시인선 354
김경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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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언어의 감옥에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유의 도구가 언어이며 삶의 방편도 언어이다. 말과 글이 없다면 인간은 다른 동물과 구별되지 않는다. 언어의 힘은 인간 이성의 위대함을 증명한다. 따라서 언어의 세계는 인간의 한계이며 숙명이다.

  태초에 말은 생존을 위한 의사소통의 도구였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보다 나은 수렵과 농경을 위해 힘없는 존재였던 원숭이들은 손과 언어의 힘을 빌렸을 것이다. 말로 전수된 기술과 생활의 지혜는 지식으로 축적되고 기억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기록을 시도하는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 벌어졌을 것이다.

  가만히 인류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의 삶은 결국 언어가 가져다 준 선물임을 알게 된다. 고급한 문화를 향유하고 문명을 이루어 살게 된 인간의 언어는 그칠 줄 모르는 실험과 도전과 모험을 여전히 계속하고 있다. 그 첨병에 서 있는 사람들이 바로 시인이라고 나는 믿는다.

  삶의 기록으로 혹은 보이지 않는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로 기능한 시는 여전히 우리에게 정밀하고 깊이 있는 사유의 극단을 보여준다. 시인들이 짊어진 천형의 고통은 또 다른 희열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시는 그 고통의 결과물이다. 한 편 한 편 쏟아낸 실험의 결과물들, 감정의 편린들, 이성적 사유들을 우리는 한 권의 시집을 통해 만나게 된다.

  김경주의 <기담>은 오랜만에 언어의 깊이와 넓이에 대해 돌아보게 하는 시집이었다. 전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에서 보여주었던 가능성은 이미 시인의 재기발랄함을 넘어서 버렸다. 극한 언어적 실험극은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하며 시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보여준다. 언어의 진경은 어디에나 있고 아무데도 없다.

  시(詩)와 극(劇)을 결합하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구조물을 이루고 있는 이 책은 시집의 통념을 깨고 있다. 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시의 거센 물결이 밀려오던 시절이 떠올랐다. 모진 세월을 견뎌야했던 시절이었다. 지금처럼. 시의 시대라 불릴 만큼 서정시로 도피했던 사람들에게 실험적 시도들은 낯선 경험이었고 새로움을 안겨주었다. 이 책은 그 시절을 떠오르게 했다.

  희곡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무대 위에 올릴 수 없는 추상과 이미지의 세계를 보여준다. 파괴되고 일그러진 모습으로 드러난 현실은 독자들이 감당하게 버겁다. 무엇보다도 실제 사진이나 시집 표지를 패러디한 시도 등 책 속에 또 다른 세계를 드러내는 방식은 언어의 양면성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 읽혔다.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서부터 시작된 이 시집 읽기는 황망한 마음으로 책장을 덮게 했다. 어차피 시가 아니 문학이 허구의 세계라면 시인은 그 극단을 만져보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세계에서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을 보여주고 있는 언어들은 낯설고 기묘하다. 하나의 이미지로 떠오르지도 않을뿐더러 구체적인 상황과 서사구조를 읽어낼 수도 없다. 뒤틀리고 이질적인 것들은 현실을 뛰어넘고 존재의 저편으로 멀리 사라져 버린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언어는 더 이상 의미를 드러내지 않을 지도 모른다. 때 묻고 익숙해진 습관들처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사물에 불과하다. 새롭고 신선한 바람이 불지 않는 한 켜켜이 먼지 묻은 세월의 더께만 어깨를 짓누른다. 말과 사물은 제각기 갈길을 떠난 지 오래고 사람들은 소통할 수 없는 언어만을 더럽힌다.

  투명한 유리벽 안에 놓여 있는 개별자들과 통합할 수 없는 존재들의 마주침은 우연이거나 혹은 숙명이거나. 이기적 욕망들과 한없는 외로움의 만남은 세상을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암흑으로 만들어버린다. 언어는 갈 길을 잃고 헤매다 서로의 입술을 만지작거린다.

  시인은 언어들이 만들어 낸 극(劇) 속에서 길을 찾았을까? 당연하게도 그렇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없는 길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가능성의 세계를 보여주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세상은 어차피 낯설거나 익숙한 곳이므로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것은 시인 혹은 독자의 몫이므로…….

기담(奇談)

지도를 태운다
묻혀 있던 지진은
모두,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태어나고 나서야
다시 꾸게 되는 태몽이 있다
그 잠을 이식한 화술은
내 무덤이 될까?

방에 앉아 이상한 줄을 토하는 인형(人形)을 본다

지상으로 흘러와
자신의 태몽으로 천천히 떠가는

인간에겐 자신의 태내로 기어 들어가서야
다시 흘릴 수 있는 피가 있다

 

090109-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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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마무리
법정(法頂) 지음 / 문학의숲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형기의 ‘낙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제는 교과서에 실린 시가 되어 버리기 한참 전에 이 시를 접하고 한동안 같은 구절을 수없이 반복해서 암송했다. 스무 살 무렵이었지만 삶과 죽음에 대한 막연한 철학적 고민이 시작되던 무렵으로 기억된다. 만남과 이별은 일상다반사이며 삶의 기본 원리이기도 하다.

  사람은 누구나 만나면 이별한다.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反)의 원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윤리의 원리이면서 삶의 자명한 이치이기도 하다. 생성과 소멸은 자연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관계없이 적용되는 이치이다.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오만한 인간도 시간 앞에서는 겸허해진다. 말할 수 없는 생의 허무를 느끼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물리적이고 인위적인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지만 인간이 정해놓은 시간의 단위 자체가 하나의 경계를 이루는 것도 아니다. 시간은 아니 모든 순간은 그저 흘러갈 뿐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 순환구조가 우주와 시간의 원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시작을 정해놓고 끝을 말한다. 하루, 한달, 일년이라는 직선적인 시간의 단위를 통해 무언가 정리하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마음은 이제 지극히 당연한 것이 되어 버렸다.

  모든 시간이 처음이며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처음은 무언가의 마지막이었으며 그 마지막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그렇게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 앞에 인간은 또 다시 보잘 것 없는 작은 존재임을 확인 할 뿐이다.

  법정 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는 우리들 삶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과 같다. 노년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책도 아니고 무언가 깔끔한 마무리를 위한 지침서도 아니다. 스님의 삶은 성찰이며 반성이고 나눔이며 배려이고 자연이다.

  삶은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는 스님의 말씀을 한 해의 마지막에 새겨본다. 모든 순간이 마지막이야 시작이라는 생각은 오랫동안 생활의 기본자세로 삼고 있지만 태로 게을러지고 긴장의 끈을 놓치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며 한 해를 마무리했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삶은 그저 계속될 뿐이다.

  새로운 결심이나 눈부신 희망은 없다. 오래처럼 치열하고 숨가쁘게 스스로를 몰아낸 적도 없을 것이다. 이제 조용히 살아온 시간들을 반성하고 남은 시간을 겸손하게 받아들일 뿐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살아 있는 모든 순간이 생의 가장 찬란한 순간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말은 말로 끝난다. 스님의 지극히 당연하고 좋은 말씀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생활 속에서 실천할 것인가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삶의 자세와 태도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하고 반성하고 스스로를 성찰하는 시간은 매년 반복되는 행사가 아니다. 모든 삶의 순간에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행동의 실천 원리가 되어야한다. 그렇게 아름다운 마무리는 모든 시작의 순간을 의미하는 순환 고리의 처음일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에 대해 감사하게 여긴다. 내가 걸어온 길 말고는 나에게 다른 길이 없었음을 깨닫고 그 길이 나를 성장시켜 주었음을 긍정한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과 모든 과정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에게 성장의 기회를 준 삶에 대해, 이 존재계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아름다운 마무리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의 본질인 놀이를 회복하는 것.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금이 바로 그때임을 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나를 얽어매고 있는 구속과 생각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
  아름다운 마무리는 스스로 가난과 간소함을 선택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또한 단순해지는 것.
  아름다운 마무리는 살아온 날들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것.
  그리고 아름다운 마무리는 언제든 떠날 채비를 갖춘다.



08123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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