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코스키가 간다 - 제2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한재호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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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은 날과 비오는 날 중 언제를 좋아하시나요? 누가 묻는다면 나는 비오는 날이라고 대답한다. 그건 날씨의 문제가 아니다. 정서의 문제이고 태도의 문제다. 날씨와 정서라니? 날씨와 삶의 태도라니?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귀찮을 때 사람들은 ‘그냥’이라고 대답한다. 비오는 날이 그냥 좋은 거다. rainy라는 아이디를 오랬동안 썼던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뭐 딱히 특별한 이유는 없고 그냥 비가 좋다는 정도. 굳이 찾으려면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과연 그러한 이유들 때문일까 싶기도 하고.

  그녀를 만날 때면 언제나 비가 내렸다. 이렇게 시작하는 연애 소설이 아니라, “말도 안 돼.”로 시작하는 말도 안 되는 소설이 <부코스키가 간다>라는 한재호의 장편 소설이다. 제 2회 창비장편소설상을 수상한 이 소설은 ‘말도 안 돼’로 시작해서 말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다. 모든 문학이 그러하듯이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해석되거나 혹은 의도적 오류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시대를 벗어난 소설이 존재할 수 없듯이 이 소설도 불안한 21세기의 한 복판을, 지금 우리들의 자화상을 통렬하게 비꼬는 듯하다.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은 시대를 거스를 수 없을 것처럼 강렬하다. 고용 없는 성장과 승자 독식의 시대로 표현되기도 하는 이 시대의 괴물과 맞서 싸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싸움의 대상도 모호하고 자본의 그림자에 포섭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어느 시대에나 그렇듯이 움직이지 않는 다수와 발 빠르게 적응하게 살아남는 소수 그리고 이건 아니라고 외치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공존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이 소설의 주인공은 ‘88만원 세대’의 전형이다. 소설에서 표현하고 있듯이 ‘30대 소년’은 시대의 산물이다. 대학졸업 3년차, 예비군 6년차인 주인공의 일상은 이력서 쓰기와 웹서핑으로 요약된다. 무임금 노동이지만 시대를 견뎌내는 유일한 탈출구이기도 하다. 개인이 손 쓸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 늙은 소년의 이야기가 바로 <부코스키가 간다>의 화자다.

  주인공으로 나선 부코스키는 소설의 중심축을 이루며 단 한 마디 말도 없이 모든 등장 인물을 이끈다. 보이지 않는 괴물이 보이는 실체로 등장한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하고 없는 대상을 구체적 인물로 등장 시킨 것 같기도 하다. 이 소설이 끝날 때까지 부코스키의 정체도 존재도 알 수 없고 그 의미는 점점 모호해지면 캐릭터는 흐려지고 사라진다. 적어도 내 안에서 부코스키는 그렇게 사라졌다. 그리고 오롯이 청년 백수만 남았다.

  소설을 통해 현실을 읽어내고 세상을 새롭게 보는 것은 일견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소설의 재미는 거기에서 찾아지지 않는다. 이 소설의 즐거움은 부코스키의 정체에 있다. 그가 비오는 날 아침 아홉시가 되면 어김없이 길을 나서는 이유 때문에 독자들은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다. 그러면서 그의 뒤를 밟는 주인공 백수 청년의 시선으로 그를 따라간다. 도대체 ‘왜’라는 호기심을 제어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이 종반으로 치달을수록 부코스키의 정체보다 화자인 청년백수에게 시선이 옮아간다. 그가 살아온 시간이나 살아갈 과정이 아니라 지금 현재 그가 겪고 있는 혹은 견뎌내고 있는 시간들이 바로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시대를 탓해 보아야 피해는 개인에게 남겨질 뿐이다. 구직행위는 힘겨운 무임금 노동이다.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지만 대가없이 시간만 흐른다. 이 소설이 치기어린 백수의 세상 도전기와 다른 이유는 우리 시대가 양산해 놓은 넘을 수 없는 벽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노력하지 않거나 게으르거나 목표와 희망이 없어서 놀고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청년백수가 견뎌야 하는 것은 개인의 아픔이 아니라 시대의 통증이다. 이 소설은 그렇게 새로운 세대와 시대로 넘어가기 위한 성장 과정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서른이나 먹은 늙은 소년을 통해 성장통을 읽어야 하는 독자 또한 마음이 편치 않다. 추리 소설적 요소가 개입되어 스토리를 이끌어 가고 화자의 반복적 일상과 경쾌한 문장과 표현들은 흡입력있게 독자들을 끌어들이지만 장편으로 끌어가기에는 허약한 이야기와 ‘거북이’의 캐릭터가 모호하다. 쫓는 자에서 쫓기는 자로 설정된 상황은 흥미롭지만 끝내 그 연쇄적인 고리의 의미를 드러내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작가의 시작인 작품이니 많은 응원과 박수가 필요할 것 같다. 늘 그러하듯이 경쾌하고 가볍게 현실을 비틀고 웃음과 눈물을 비벼줄 수 있는 작품을 독자들은 항상 기다리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삶에 대한 질문들을 스스로 해결해 가는 과정을 보여줄 수 있는 다음 작품을 기다릴 수 있겠다. 정답은 없다. 다만 무언가를 쫓는 과정, 그 지난한 과정이 삶이 아닐까?

  그러면서 무언가에 쫓기는 인생. 우리는 그 영원한 순환 고리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시대를 넘어서 세월을 이겨내고 치열한 삶의 문제들을 풀어내는 과정은 결국 내 안에 있다는 사실만 확인할 지도 모르지만 문제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청년백수와 그 애인 그리고 놀이터에서 만난 민호와 부코스키는 모두 제 자리에서 그만큼의 무게를 짐 지고 있다.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은 소설가의 몫이 아니라 현실에서 우리들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무엇인가 쫓고 있다면, 아니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면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봐야한다. 비가 오지 않는다면 오늘은 안심이다. 부코스키도 별 일 없이 가게를 지키고 앉았을 테니까 말이다.


090314-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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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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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은 작은 이야기다. 거창하고 대단한 이야기를 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작고 사소한 이야기를 소설이라고 한다. 우리는 소설에게 많은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저 낄낄거리거나 작은 미소를 띠울 수 있을 정도면 된다. 대다수 소설을 읽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호기심과 두근거림이다. 무슨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얼마나 많은 한숨과 눈물이 기다리고 있을까, 포복절도 할 만큼 재밌는 이야기일까.

  사람들의 기대에 부흥하는 소설은 그렇게 쓰이고 그렇게 읽힌다. 독자를 배려하는 작가도 있고 그저 자신의 표현 욕구에 충실한 작가도 있다. 한과 그리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글쓰기를 선택한 작가도 있고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주는 능력이 있는 작가도 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작가도 있고 숨겨진 역사의 이면을 상상하는 작가도 있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아픔과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애정을 가진 작가도 있다.

  소설은 그렇게 다양하고 수많은 이야기들을 작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이는 듯하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들과 가족의 이야기는 가장 흔하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재미있는 소재다. 가장 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고 보편적 정서에 기댈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를 지금까지의 방식으로 풀어낸다면 실패할 확률 또한 가장 높다. 진부하고 지루한 이야기만큼 독자들을 못견디게 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주목받는 젊은 작가 중의 하나인 김애란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달려라, 아비>를 읽었다. 그녀의 첫 소설집으로 2005년에 출판되어 2008년에 15쇄를 찍었으니 젊은 작가의 첫 소설집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 때 이 책을 읽지 않은 개인적인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칙릿(chick+literature)이라는 이름으로 유행처럼 번져가던 가벼움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다.

  서유미, 정이현 등의 소설은 2, 30대 여성들의 생활과 고민들을 감각적 필치로 그려내고 있어 쉽게 읽히고 흥미롭다는 특징을 지닌다. 섬세한 심리묘사나 여성 특유의 감각적 문장들은 재미를 더했지만 개인적으로 취향에 맞지 않았다. 이후 등장하는 소설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김애란의 이 소설집은 그것과 조금 구별된다. 20대의 젊은 여성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가볍고 작위적이지 않았다. 각각의 단편들 속에는 실존적 고민에 대한 깊이가 느껴졌다. 물론 개인적인 판단이다. 이 시대에 20대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도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행간에서 읽었다. 그 대척점에 있는 ‘아버지’의 존재는 크고 무거운 느낌이 아니라 희화되고 가벼운 대상으로 치환되어 그녀의 소설 속에 등장한다. 표제작이 된 ‘달려라, 아비’는 아버지를 재미있는 방식으로 극복(?)한다.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균형을 이룬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젊은 작가는 직접 체험으로부터 소설에 진정성을 더하고 간접체험으로 상상력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는 단편은 탁월하게 현대 사회의 단면을 들춰내며 우리들의 일상에 대한 색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누구나 감시당하며 살 수밖에 없는 판옵티콘의 세상을 잘 묘사하고 있다. ‘노크하지 않는 집’은 고시원이라는 주거형태에 대한 냉정한 통찰을 담고 있다. 그것이 확대되면 아파트의 삶이고 통조림처럼 확대 재생산되는 기계적인 욕망과 현대적 삶이 된다. 슬프고 섬뜩하다.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를 살펴보고, 아버지의 삶을 추측하며 나의 이야기 속에서 삶이란 무엇인지 고민하는 흔적들이 신선하게 읽혔다. 소설은 그렇게 작은 이야기들이 모여 거대한 탑을 쌓는 법이다. 당당하고 경쾌한 문장과 감각적이고 진지한 목소리가 어우러진 그녀의 문체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지도 궁금하다. 재미있는 만큼 많은 독자들이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즐겁고 아름다운, 슬프고 눈물나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소설들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090306-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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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시선 298
김기택 지음 / 창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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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낯이 많이 익은 얼굴이었지만
누구인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너무나도 낯선 낯익음에 당황하여
나는 한동안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도 내가 누구인지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 ‘그와 눈이 마주쳤다’ 중에서


  누구나 그리고 언제나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상황이다. 가장 일반적이고 익숙한 상황을 시로 엮어내는 것이 시인의 능력일 것이다. 김기택의 <껌>은 <소>에 이어 탁월한 성취를 보여준다. 언어들 사이의 긴장감이나 생동감이 아니라 오히려 느슨한 관계들로 묶여 있다. 이 시는 ‘그는 쓰레기봉투를 뒤지고 있었다. 그는 고양이 가죽 안에 들어가 있었다.’로 이어진다.

  고양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익숙한 그를 만난다. 그는 나일 수도 있고 너일 수도 있다. 그 모든 독자들에게 혹은 자신에게 묻는다. 고양이 가죽 안의 당신은 누구인가. 김기택의 시는 고뇌의 흔적이나 내면의 통증을 우려내기보다 낯선 시각과 진지한 관찰에서 비롯된다.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문법이겠지만 김기택의 시는 김광규의 시처럼 일상에서 묻어나는 생활의 향기를 느끼게 한다.

  비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고매한 정신을 노래하거나 생경한 언어의 세계에 천착하는 시도 나름의 의미가 있겠으나 김기택처럼 가장 익숙하고 가까운 곳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서 비롯되는 시도 있다. 단순하고 일상적인 무색무취의 시가 될 수도 있는 위험성을 벗어나기 위해서 시인은 낯선 상상력과 독특한 관점을 유지한다. 늘 그러하듯이 문제는 대상이 아니라 창조적 상상력과 표현이다.

살처럼 부드러운 촉감으로
고기처럼 쫄깃한 질감으로
이빨 밑에서 발버둥치는 팔다리 같은 물렁물렁한 탄력으로
이빨들이 잊고 있던 먼 살육의 기억을 깨워
그 피와 살과 비린내와 함께 놀던 껌.
지구의 일생 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
제 한 몸에 고스란히 받고 있는 껌.
마음껏 뭉개고 갈고 짓누르다
이빨이 먼저 지쳐
마지못해 놓아준 껌.

- ‘껌’ 중에서

  문학과지성사에서 <소>를 펴내고 창비에서 <껌>을 펴내는 시인의 선택도 재미있지만 한 글자로 된 시집 제목도 의미심장하다. 시의 내용이나 관심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상을 바라보는 눈이나 그 안에서 낯선 질문들을 길어 오르는 모습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다만 이 시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우울과 죽음이다. 전체적으로 음산하거나 비극적 정서를 담아내고 있지는 않지만 일상에서 마주하는 자화상이나 대상에 대한 관심이 기쁨과 명랑으로 채워지지는 않는다.

  생명이 없으나 ‘껌’의 일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런 것들이 어디 한 둘 일까마는 수동적이며 피동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껌에 대해 생각한다. 그게 누구이든 껌의 운명은 비극적이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슬픔은 운명처럼 철저하게 대상에 각인되어 나타난다. 그 대상은 껌일 수도 있고 얼굴일 수도 있다.

이윽고 슬픔은 그의 얼굴을 다 차지했다.
수염이 자라는 속도로 차오르던 슬픔이
어느새 얼굴을 덥수룩하게 덮고 있었다.
혈관과 신경망처럼 몸 구석구석에 정교하게 퍼져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으나 슬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 ‘슬픈 얼굴’ 중에서

  가장 내성이 강한 바이러스는 슬픔이다. 면역이 생기지도 않고 특효약도 없으며 원인도 치료도 없을 때가 많다. 누구에게나 슬픔은 있고 찾아오는 속도와 방법이 다르다. 혈관과 신경망처럼 구석구석 정교하게 퍼져 있으며 웃음이라는 극약 처방에도 슬픔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뻔뻔스럽게도. 그러나 속수무책일 뿐이다.

  전작 ‘소’에서 보여준 소에 대한 관심은 이번 시집에서도 간간이 드러난다. 영화 ‘워낭소리’로 전국이 냄비처럼 들끓는다. 독립영화라서가 아니라 주인공을 찾아 전국을 헤매고 5년만에 찾아낸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이 영화보다 더 영화적이서 그랬을 것이다. 40년을 넘도록 슬픔조차 무심하게 견뎌낸 늙은 소의 모습은 그대로 인간의 모습이다. 임종 직전 할아버지가 코뚜레를 잘라 바닥에 던지는 장면이 나온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유를 찾은 소는 도대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겠다.

  ‘죽음이 두 콧구멍을 영원히 갈라놓을 때까지’ 늙은 소는 코뚜레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코뚜레를 하고 다니는 우리들의 모습은 또 어떠한가. 시인이 본 것은 소의 코뚜레가 아니라 나의 모습일 지도 모르겠다는 깨달음!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는 시찌프스보다는 우리의 삶이 나을 지도 모르겠다는 안도감!

두 콧구멍 사이에
수갑처럼 둥근 자물통이 채워져 있네.
두 콧구멍이 괜히 둘로 갈라질 리도 없고
콧구멍을 열어 그 안에 은밀히 감춰둘 것도 없으니
콧구멍 금고에서 꺼낼 특별한 보물도 없을 터인데
이상하다,
죽음이 두 콧구멍을 영원히 갈라놓을 때까지
누구도 그 안에 들어갈 수 없도록
자물통에서 열쇠구멍을 완벽하게 없애버렸으니!

- ‘코뚜레’ 중에서


09030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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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지 않겠다 창비청소년문학 15
공선옥 지음 / 창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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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이라는 연령과 대상은 모호하기만 하다. 학령으로 보통 중학생부터 대학생 정도를 이르는 말이고 연령으로는 13세에서 23세 정도까지 세대를 가리킨다. 이들은 미성숙한 성인이지만 어린이와 구별된다. 2차 성징을 통해 성인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정신적으로 완전하지 못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세대를 지칭하는 용어 자체가 사회적 계급 체계 안에서 기성세대들의 이데올로기가 반영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시키는 대로 해야 하고 아직 미완의 상태이기 때문에 성인들의 요구와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청소년은 세대를 뛰어넘는 감수성을 지니고 있으며 신선하고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마땅하다. 무한한 가능성에 도전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특권이 있다. 그래서 항상 진보적이고 머물러 있기보다 변화 가능한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그들은 항상 우리의 미래를 엿볼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우울한 표정, 희망 없이 처진 어깨, 매일 반복되는 공부 기계로 명명되는 이들의 일상성을 깨뜨릴 만한 용기와 토대는 마련되어 있는가. 경쟁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사는 방법을 배우고 우정과 사랑을 느끼며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보낼 수는 없을까? 방황과 고뇌가 청소년의 특권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실존적인 것이 아니라 진학과 취업에 국한된 것이라면 얼마나 우울한 일인가. 그런 현실을 인정하라고 강요하는 우리는 얼마나 불쌍한가.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동문학과 성인문학으로 양분되어 있다. 청소년 문학이 따로 영역 구분할 필요성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러했다는 뜻이다. 통상적으로 성장소설이라는 이름으로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 <수레바퀴 밑에서>, <데미안>이나 황순원의 <소나기> 정도가 청소년들에게 사랑 받았다. 청소년들의 사회적 위치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들의 고민을 이해하고 영혼과 육체의 성숙에 따른 문제들을 다룬 본격 청소년 소설이 없다는 것은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을 보여준다.

  앞서 말한 대로 육체적으로만 성숙한 미숙아로 바라 본 것은 아닌지. 성인이 되기 위한 준비 기간이나 학생이라는 모호한 명칭으로 그들을 억압하고 구속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하나의 완성된 인격체로 그들을 바라본다면 강제로 머리를 자르게 하거나 치마 길이가 1cm 짧다고 모욕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숫자로 매겨진 성적으로 한 인간을 평가하는 것도 모자라 전국의 학생들을 한 줄로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현실의 패러다임을 전환하지 못하는 한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밝은 미래는 없다.

  대학 이름 대신 추첨으로 번호를 붙여 대학 이름을 결정한 것은 68혁명 당시 고등학생들의 참여와 행동으로 얻어낸 것이다. ‘88만원’세대로 명명된 20대는 이제 경제 불황의 책임을 임금 삭감으로 감내하고 있다.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생각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합리와 이성보다 권력과 헤게모니에 의해 장악되고 있다. 그들은 언론관계법을 통해, 교육 개혁이라는 교묘한 경쟁 구도를 통해 그것을 공고하게 유지하려는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 현실은 각박해 질 것이며 살아남은 자는 슬픔을 느낄 틈도 없이 경쟁을 위한 경쟁 체제에 돌입해야 한다.

  <나는 죽지 않겠다>는 공선옥의 소설집은 청소년이 주인공이거나 청소년이 화자인 소설들이다. 이 소설집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나 사건들이 청소년‘만’을 위해서 쓰여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구분이나 창작이 가능하지도 않을 것 같다. 그저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창비청소년문학’ 시리즈로 발간된 이 책은 기성 작가의 본격 청소년 문학이라는 데 의의를 둘 수 있겠다.

  전문 청소년 작가로 등단하거나 작품 활동을 시작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기성 작가들의 작품들 중 그 대상이 청소년인 경우와 아동 작가들이 활동 영역을 넓히는 경우가 나의 예상 작가층이다. ‘문학동네’나 여타 출판사들도 ‘돈’이 되는지 ‘사명감’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청소년 출판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꼭 필요한 책과 내용들은 무궁무진하다. 이 관심과 열정을 부디 지속적으로 이어가시길 당부 드린다.

  이 소설집에는 6편의 소설이 묶였다. 마지막 보리밭의 여유는 올해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에서 본 우수상을 받은 작품이다. 이념이나 우리 민족의 트라우마가 어떤 식으로 다음 세대에 전해지는지 잘 보여준 소설이다. 중학생의 입장에서 어른들의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표제작 ‘나는 죽지 않겠다’는 학교에서 흔히 벌어질 수 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난은 선택이 아니다. 마치 복권처럼 부모를 선택할 수 없이 태어난 생득적 환경 때문에 차별받거나 상처를 견뎌내야 하는 아이들은 오늘도 아주 많다. 쌍팔년도 이야기가 아니다. 현실감이 조금 미흡하기도 하지만 관심의 대상이나 주제가 많은 함의를 지닌다.

  ‘일가’의 배경은 농촌이다. 우리나라의 청소년은 모두 도시에 거주하지 않으며 전부 학교에 다니지는 않는다. 보다 다양한 계층에서 여러 가지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청소년들에 대한 관심과 이야기가 필요하다. 삶의 다양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모두가 한 줄 서기에 바쁘고 붕어빵처럼 똑같은 꿈을 꾸며 원하는 게 모두 돈일 수는 없지 않은가.

  ‘라면은 맛있다’와 ‘힘센 봉숭아’는 연작처럼 읽힌다. 알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볍고 재치있는 문장들로 청소년들의 입맛과 눈높이를 고려한 흔적이 역력하다. 여러 가지 문제들을 차근차근 살펴볼 수 있는 소설들도 기대된다. ‘울 엄마 딸’은 한부모 가정을 다루고 있다. 어머니도 여자라는 사실을 인식해 가는 딸의 목소리를 통해 결국 자신의 미래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소설이다.

완전한 삶은 없다. 어느 시인의 시 구절처럼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한 것이 인생일 지도 모른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고 해서 모두 소설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청소년들이 겪는 꿈과 희망, 고민과 방황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함께 고민해 보려는 시도와 노력은 문학을 통해서 먼저 시작될 필요가 있다. 본격적인 청소년 문학의 등장을 알리는 소설집으로 공선옥의 작품집은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


090227-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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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가 찾은 맛있는 문장들
성석제 엮음 / 창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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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장은 글의 처음이며 마지막이다. 하나의 완결된 의미를 드러내는 최소 단위를 문장이라고 볼 수 있다. 국어 문법에서는 형태소를 최소 유의미 단위로 보지만 우리는 통상적으로 문장을 하나의 의미 단위로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의미는 하나의 완결된 생각이나 맥락을 의미한다. 문장이 모여 문단을 이루고 문단이 모여 한 편의 완성된 글이 된다. 문장은 그 자체로 생각의 단위를 전달하고 빛을 발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문장들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생각해 보자. 하나의 생각과 그 다음 이어질 내용이 생략되어 있기도 하고 자세하게 설명되기도 한다. 반복되기도 하고 비유적으로 표현되기도 하며 상상력과 도약을 보여주기도 한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하나의 완결된 문장을 쓰는 일만큼 어렵다. 이런 탄탄한 구조와 전체적인 맥락이 독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전달될 때 그 글은 읽을 만하다. 문장의 아름다움은 글을 영혼을 불어넣고 구조와 연결 관계는 믿음을 준다. 그것이 소설이든 아니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누리집 ‘문장’에서 문학 집배원 서비스를 하고 있다. 현재는 나희덕이 시를 배달하고 김연수가 문장을 배달하고 있다. 도종환과 안도현이 이미 배달했던 시를 모아 시선집을 냈고 이번엔 성석제가 <맛있는 문장들>이라는 제목으로 배달된 문장들을 묶어냈다. 문학 집배원 성석제가 찾은 문장들은 진짜 맛있다.

  문장을 맛으로 표현했을 때는 그만큼 감각적으로 접근하고 싶다는 말이다. 문학 집배원 서비스는 이메일로 플래시와 함께 시를 낭송해주기도 하고 문장을 상황에 맞게 연출해서 보여주기도 한다. 문학의 대중화를 위한 방편으로 좋은 방법이기도 하지만 고육지책으로 보여 서글프게 보이기도 한다. 책을 읽지 않는 사회, 책이 필요 없는 사람들은 없다. 다만 좋은 문장들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일로 보면 그 뿐일 수도 있겠다.

  현역 작가가 골라낸 문장들은 소설의 일부를 발췌하는 형식이다. 단편 혹은 장편 중에서 인상 깊은 장면이나 문장의 맛을 느낄 수 있는 부분들을 모아놓았기 때문에 일종의 꽁트 모임집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앞뒤 상황을 전혀 모르는 토막글도 있고 완결된 한 편의 글이 아니기 때문에 맥락이 궁금하기도 하다. 독자들은 출전을 찾아 읽어야겠고 그러다 보면 책을 읽는 습관도 길러지고 재밌는 문장으로 인해 소설의 특별한 맛을 먼저 체험할 수도 있다.

  어떤 방법이든 많은 책들을 읽히기 위한 방편이라면 좋은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나름의 부작용도 우려된다. 소설가가 안내하는 대로 맛깔나는 문장들만 모아 놓은 책을 통해 본래 작품의 의도와 전체 맥락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인상 깊게 읽은 부분에 대한 한 소설가의 책갈피일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 문학의 정수라고 볼 수만은 없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많이 읽힌, 또 재미있는 소설들 속에서 골라낸 문장들이기 때문에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익숙한 소설가들의 화려한 문장들이 나열되어 있어 차례를 보면 우리 문학사의 면면을 돌아보고 간혹 고전과 외국 작가의 글들도 만날 수 있다.

  문장이란 무릇 그 사람의 진면목을 드러낸다고 한다. 한 개인의 내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 문장이다. 글은 그 사람의 영혼의 밑바닥을 드러낸다. 진실하지 못한 문장은 읽기도 전에 악취가 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깊이와 내면세계를 잘 보여주는 문장들은 읽는 사람에게 글 읽는 즐거움을 전해주고 책이 주는 기쁨을 배가시킨다.

  성석제는 자신이 읽었던 재미난 책의 일부분을 부담 없이 전해주는 것만으로 우리 소설사의 대표적인 작품이 될 만한 문장들을 골라냈다. 특별한 기준이나 엄격한 규칙을 적용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유쾌한 문장, 깔끔한 문장, 정제된 내용들을 한 눈에 읽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듯하다.

  화장실에서 혹은 버스나 지하철에서, 여행길에, 잠시 머리를 식히는 동안 이 책을 펼쳐 들고 몇 장 넘기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커피 한 잔의 여유처럼, 몇 문장만으로도 충분한 휴식이나 편안함을 전해줄 수 있는 문장들이 우리 주변에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다. 문학이라고 하는 공통분모 안에서 펼쳐지는 언어들의 향연은 그저 즐겁기만 하다.

  가볍고 쉽게 접근하고 싶은, 상대의 독서이력과 수준을 고려하지 않는 선물로도 적당해 보인다. 그저 책 자체에 재미와 즐거움을 느끼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면 이 책은 그 앞줄에 세워둬도 무방하겠다. 많은 사람들에게 문학의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문장들 뒤에 붙은 성석제의 간단한 메모와 해설은 사족에 불과하다. 그것은 독자 스스로가 정리할 수 있는 느낌이나 감상이어야 한다. 책을 읽어 줄 수는 있지만 대신 느껴줄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의 머리로 그 책을 이해하려 하는 요즘 아이들의 방식이 문학을 점점 멀어지게 하는 필수 조건이다. 가슴을 열고 문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소설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전해주지 않는다. 수많은 쓰레기를 양산하는 TV 드라마처럼 말이다.

  봄이 올 것이고 하늘은 맑아지겠다. 따스한 햇살과 향기로운 꽃처럼 때가 되면 알아서 우리를 찾아주는 자연과 달리 글을 읽고 쓰는 행위는 사람들의 적극적인 의지가 반영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엮은이의 노력도 노력이지만 보석 같은 문장들이 모여 빛을 발한다. 짧다는 아쉬움이 감질나기도 하지만 그 나머지는 독자들의 몫이다. 새로운 재미를 문장 안에서 찾고 싶다면 봄을 맞이하는 마음으로 읽어 볼 수 있는 책이다.


090225-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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