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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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세상은 얼마나 견고한가. 어쩌면 점점 단단해지는 구조물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기득권을 가진 자와 그것을 지키려는 자들을 위한 철옹성이 되어간다. 이념적 성향을 떠나 이기적 욕망이 앞서고 다수를 위한 사회가 바람직한가에 대한 고민은 식후의 디저트처럼 항상 2차적이고 부수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현재 누리고 있는 것을 확고하게 다질 수 있고 더 많이 가질 가능성을 열어둔 상태에서 주변을 돌아볼 수도 있다는 태도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 과연 현재와 같은 상태가 꾸준이 이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인류는 독재와 파시즘, 식민지 등 암흑과 같은 시대를 견뎌내기도 했지만 지금 현재 우리 사회는 매우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문학은 이 견고한 구조물에 계란을 던지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건물 안에 사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우스꽝스런 건물의 외관을 비웃기도 한다. 또한 너무 익숙해서 이상하다고 생각지도 못하는 구조와 설계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장애물을 두고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기도 한다. 이대로 좋은가? 과연 우리는 제대로 살고 있는가? 얼마나 견딜 수 있으며 어디까지 참아야 하는가?

  <인간에 대한 예의>를 통해 공지영을 처음 만났었는지 기억이 가물거린다. 이 소설가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소설 외적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만 작가는 항상 그저 소설로 말할 뿐이다. <도가니>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들>를 잇는 그녀의 장편소설이 가진 힘을 보여준다. 포털 Daum에 연재했던 소설이라는 발표 형식상의 특징이 내용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 같지는 않다. 그녀 특유의 섬세하고 비유와 구체적인 표현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저리들은 독자들을 몽롱한 안개 속으로 안내하기에 충분하다. 너무 깔끔하고 정돈된 솜씨로 유려하게 읽히는 소설의 문장들은 때때로 불편하기까지 하다.

  이번에는 실화를 바탕으로 사회복지시설에서 벌어진 성폭행 사건과 그 처리 과정을 그려낸다. 사형 문제에 이어 장애인의 문제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과 우리 사회에서 그것이 처리되는 과정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니, 작가가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애써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구조적 모순들과 우리 안에 잠재된 ‘광란의 도가니’에 대해 이야기한다.

  도가니의 사전적 의미는 ‘쇠붙이를 녹이는 그릇’이라는 뜻이다. 흥분이나 감격 따위로 들끓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인다. 작가는 소설 속 공간인 ‘무진(霧津)’을 그렇게 부른 것이다. 모든 것이 모호하고 구별되지 않는 안개의 특성은 진실과 거짓이 뒤엉킨 채 우리들의 사고와 가치판단조차도 흐리게 만드는 듯하다. 가장 추악한 인간의 모습과 이기적 욕망들이 결합된 도가니는 무진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마음속에 오롯하다.

  이 사회의 흉측한 몰골을 여실히 드러내는 무진시의 기득권층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다.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모습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모습들을 간략하게 묘사한다. 단순한 스케치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핵심적인 문제들을 거론하며 윤리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에 대해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이 질문들에 대답을 할 수 있는 것인가. 게다가 문제는 답을 알고 있으면서 외면하고 생활에서 실천하지 못하거나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가치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답이 없을 것 같은 모호한 이야기가 아니라 너무나 선명하고 확고한 진실 앞에서도 우리들은 다르게 반응한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 가진 자의 손에서 무언가를 뺏어내는 일은 그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어려울 수 있다. 목숨을 걸고 자기 것을 지키려는 자가 쉽게 손가락에 힘을 빼지는 않는다. 선악의 문제로 단순화할 수 없는 문제일 경우 더욱 그렇다. 그래서 사립학교법은 도로아미타불이 되었고, 미디어법은 목숨을 걸고 통과시키려하고 있다. 세상은 그런 곳이다.

암묵적 합의, 우리는 보통 이것을 침묵의 카르텔이라고 한다. 말없이 서로를 위해 복무하고 정교한 그물처럼 짜인 세상에서 변화는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그것을 달가워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나와 무관해도 그 피해정도와 여파를 고민한다. 세상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사람들은 좌절하고 쉽게 포기하며 타협하고 손을 내민다. 그들만의 리그에 편입하기 위해 때로는 목숨을 걸기도 하는 삶이 시작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은 엄청난 경우의 수를 측정하기도 하고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기도 한다. 그렇게 살지 않은 사람은 자기만 손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평범성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더 불행할까? 이 소설 속 주인공의 마지막 선택은 고뇌의 흔적이 별로 없다. 무진을 떠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이 순탄치 않지만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주인공처럼 무진을 떠난다. 하인숙을 떠난 윤희중처럼 서유진을 떠난 강인호는 도피라고 볼 수 있을까. 또 다른 현실과 진실 사이의 고뇌와 갈등의 결과일까. 이 소설의 결말은 독자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강인호였다면?

  광주 인화학교 사건은 노무현 정권 말기에 5년형이 구형됐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사건이다. 단순히 ‘용서’의 문제가 이 소설의 주제는 아니다. 김승옥의 소설에서 차용한 구조는 현실 밖의 이야기라는 뜻이 아니다. 동떨어진 머나먼 장소에서 끈적하고 답답한 분위기를 가져왔지만 그것은 무진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의 이야기다. 2009년의 현실이 무진 아니겠는가? 그래서 서유진은 이렇게 외쳤는지도 모른다.

“세상 같은 거 바꾸고 싶은 마음,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다 접었어요.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것예요.” - P. 257


090708-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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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ia 2009-07-08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날카로우시네요..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거에요. 이 문장에 가슴을 벤 듯 아려요.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라는 진실하나로 버텨가기에 하루하루 힘겨운 나날들.

sceptic 2009-07-10 23:01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러고 있다고 생각하고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시원한 주말 보내세요.
 
2백년 전 악녀일기가 발견되다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6
돌프 페르로엔 지음, 이옥용 옮김 / 내인생의책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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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공정무역 커피 ‘안데스의 선물’을 마시기까지 과정을 생각해 본다. 남미의 커피 농장에서 땀 흘려 일한 노동자들에게 조금 더 보답할 수 있다는 말을 믿을 뿐이다. 커피의 진한 맛과 향을 음미할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는 않다. 또한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자본의 횡포와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에 무감각하게 지내기도 어렵다. 공정무역 커피 몇 잔을 마신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생각하고 행동하는 작은 실천들이 모여, 배려하고 연대하는 움직임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길 바랄 뿐이다.

  200여 년 전 노예들의 생활이나 커피 농장의 생산 방식을 알게 되면 커피라는 음료수를 마시기 어렵다. 다국적 기업 나이키 등 스포츠 브랜드가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에 거주하는 아동들의 노동력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200여 년 전 커피농장의 농장주와 다를 바 없다. 그들에게 작은 기회와 임금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고 그것조차 막는다면 그들의 생계는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는 반론도 가능하지만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엎드려 침묵하는 것은 악의 편이라는 말은 옳다.

  <200년 전 악녀 일기가 발견되다>는 어린이들을 위한 책이다. 형식과 내용이 쉽고 간단하지만 내용은 무겁고 진지하다. 열 네 살 소녀 ‘마리아’의 생일에 아버지는 쟁반에 ‘꼬꼬’라는 흑인노예를 선물한다. 200여 년 전 네덜란드의 식민지 수리남의 커피농장 주인의 외동딸 마리의 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아직 가슴이 봉긋 올라오지 않아 걱정이고 이웃집 오빠 루카스를 좋아하는 소녀의 눈에 비친 노예의 모습은 일상 속에 마주하는 ‘악의 평범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마리아에게 인종차별이나 계급의 문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일상이 된다.

  작가는 바로 이 지점을 선택했다. 인권이나 인종차별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 소설이나 이론서적은 감동의 깊이가 조금 다르다. 같은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태도도 달라진다. 더구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다면 그 형식과 내용을 조금 더 신경쓰고 내용의 깊이를 잘 조절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성공을 거두고 있다.

  바닥에 떨어진 케익을 핥아먹는 꼬꼬는 누구인가? 피부색이 다르다고 해서, 힘이 세다고 해서, 돈이 많다고 해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가. 아이들의 입장에서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은 그대로 자신의 가치관이 된다. 사물과 사회를 바라보는 인식의 틀은 자연스럽게 형성되며 반성하지 않은 한 그것이 옳다고 굳게 믿는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마리아라는 소녀의 일기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소설은 짧은 분량, 쉽고 단순한 문장, 일상적인 표현으로 누구나 읽고 이해하기 쉽게 구성되어 있다. 어린이, 청소년, 성인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한번쯤 조금만 시간을 내면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감동과 여운은 오래간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실제로 가르치고 익혀야 하는 것들이 영어단어와 수학공식에만 있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그밖에 것들에 대해서는 매우 소홀하다. 우리가 가르치지 않는 동안 아이들은 무관심해지고 마리아처럼 어느 순간 그 방식에 익숙해질지도 모른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고 누구나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으며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기본적인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알게 되었나? 아이들은 사회시간에 교과서를 통해서 배우고 익히게 될까? 그것이 내면화되고 일상생활에서 피부색이 다르거나 장애를 가졌거나 직업이 다르다고 해서 차별하지 않게 되는 것은 시간이 가르쳐줄까?

  악녀일기라고 명명된 이 책은 어쩌면 우리 안에 숨어 있는 편견과 선입견들에 대한 부끄러운 반성문일지도 모른다. 외국인 노동자, 비정규직, 장애인, 성적소수자,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우리의 편견은 마리아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200여 년 전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로 치부하고 아주 먼 역사속의 에피소드라고 하기엔 이 책의 주제가 너무 무겁다.

  알면 사랑하게 된다. 무지는 용서될 수 없는 죄악일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불평등의 역사 속에 놓여있다. 아이들에게 그것을 깨우치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인권이나 사회적 평등, 노동자의 권리, 나눔과 배려, 평화와 행복에 대해 고민하도록 해야 한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이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가르쳐야 한다. 우리에게도 이런 소설은 절대로 필요하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고병권 박사는 추천사를 통해 “악녀일기는 노예주의 폭력과 위선, 광기에 대한 해맑은 고백이자 어른들 마음 속 인종주의의 추악함의 천진난만한 외양”이라면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체 일부를 사고 팔고, 피부색이 다른 이들을 차별하는 등 노예제와 인종주의의 온갖 변형들이 우리 옆에 있다.”고 말한다. 짤막한 소설 한 권을 통해 너무 무겁고 진지한 태도로 교훈을 주려는 것은 좋지 않다. 하지만 생각할 수 있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이 아이들에게 좀 더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200년 쯤 후에 누군가 이 시대를 기록하고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소설을 쓴다면 어떤 악녀가 등장할까? 과연 우리는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으며 그것을 알고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현재의 과거의 거울이며 미래의 토대가 된다. 오래된 미래는 지금-여기에서 출발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090614-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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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를 잡는 아버지 창비청소년문학 18
현덕 지음, 원종찬 엮음 / 창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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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정생이나 이오덕 선생님을 진짜 선생님이라고 상찬하는 이유는 뜻과 삶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 땅의 모든 선생님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선생님들이다. 잘 가르치는 교사는 많지만 훌륭한 선생님은 많지 않은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참 스승을 만나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행복한 일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아이들이 선생님과 만들어가는 관계 속에서 참 스승은 만들어진다. 모든 학생에게 좋은 선생님은 없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은 나쁜 사람이듯이. 그래서 사제지간도 결국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일 뿐이다.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부모와 친구다. 그 다음이 선생님이 아닐까? 보고 듣는 대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사회화 과정은 가정에서 끝난다. 2차적인 사회화가 친구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양보와 배려를 배우고 자아 정체성이 형성되기도 하며 세상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기도 한다. 학교에서 만나는 교사는 독특한 위치에 놓여 있다.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교무실에 놀러오는 학생들이 있고 친구처럼 장난을 치기도 하지만 여전히 지적 토대를 형성하는 기초 과정에는 선생님의 역할이 중요하다. 나와 타인과의 관계를 배우고 개인과 사회를 경험하며 간접 체험을 통해 세상을 알아간다.

  다매체 사회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소설의 의미는 예전에 전래동화와 많이 다르다. 세계 형성의 기초 역할을 했던 이야기가 이제는 지루하고 따분한 충고에 불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재미있는 책 한 권이 가치관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특별한 경험으로 추억이 되기도 한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풍부한 정보와 자료가 제공되는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이야기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여전히 독서를 통해 형성된 세계와 상상력의 공간은 어떤 매체보다도 중요하다.

  1909년에 태어나 1950년에 작고한 월북 작가 현덕의 이야기는 특별한 맛과 즐거움을 지닌다. 1930~40년대가 주로 소설 창작의 시대적 배경이 되기 때문에 시대의 기록물로도 손색이 없다. 이번에 창비에서 발간된 소설집 <나비를 잡는 아버지>는 현덕 소설집은 특별한 청소년문학 시리즈의 하나가 되었다. 현재 활발하게 활동 중인 작가의 작품들이나 외국작가의 작품들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 책은 시원한 샘물처럼 맑고 깨끗하다.

  유아, 아동, 청소년으로 세분화되어 있는 출판시장에서 중학생에게 적당하게 읽힐 만한 책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현장의 목소리들이 많다. 지적 발달 수준이 다르고 배경 지식에 따라 독서 수준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모든 학생들에게 적합한 책이 나오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사춘기를 전후한 질풍노도의 시기에 알맞은 책들이 많지 않다. 일명 성장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청소년 문학이 존재하지만 현덕의 소설처럼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막 입학한 남자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는 많지 않다.

  이 책은 2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단편소설들을 묶어 놓았다. 소설의 배경이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시대다. 가난해서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친구 이야기는 지금 아이들이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고개를 갸우뚱거릴 만하다. 소년들 사이의 우정, 가난한 농촌 현실 등이 실감나게 그려지고 있는 ‘나비를 잡는 아버지’, ‘군밤장수’, ‘고구마’, ‘월사금과 스케이트’, ‘집을 나간 소년’, ‘모자’ 등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 70~80대가 되신 분들이 읽는다면 아련한 향수에 젖을 수 있는 내용들이다.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의 결들이 잘 묘사되어 있고 현실감 있는 이야기들이 정확한 문장으로 표현되어 있어 재미있다.

  지금 사용하지 않는 어휘들이 그대로 살아있어 가독성을 떨어뜨리지만 당시의 풍속이나 색다른 문체를 통해 당시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현실감은 더해진다. 어휘 문제는 아래에 주석을 달아놓아 해결했기 때문에 의미를 몰라 책을 읽기 어렵지는 않다. 아이들의 심리와 실제 상황을 재현한 듯한 묘사가 두드러져 재미뿐만 아니라 엮은이 원종찬의 구분처럼 소년소설의 참맛이 우러난다.

  2부 남생이는 연작 소설의 형태로 이어진다. ‘경칩’과 ‘남생이’는 당대 농촌 현실을 적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소작농의 애환과 서민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읽어내는 일은 마음이 심란스럽다. 21세기에도 부재지주의 형태로 남아 있는 토지 문제는 사회 문제라고 보아야 한다. 토지 경작의 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이웃 혹은 친구 사이의 문제는 생존과 직결된다. 현덕 소설의 정수를 보여준다. 마지막 ‘두꺼비가 먹은 돈’은 평화로운 농촌 풍경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어린 아이의 마음을 따라 가며 순수한 웃음을 만들어준다.

  현덕은 동화, 소년소설, 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을 남겼다. 어느 한 부분도 격이 떨어지거나 수준미달의 작품이 없어 보인다. 카프(KAPF) 해체 이후 등단해서 직접 영향을 받지는 않았지만 리얼리즘 소설의 전형을 보여준다. 문학에 뜻을 둔 후 김유정과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고 하는데 서로의 소설에서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작품 세계나 다양한 작품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하는 일보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현덕의 작품을 읽고 그의 소설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 우리들의 현실과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듯 보이는 이 신선하고 특별한 소설들은 아이들에게는 물론 어른들에게도 색다른 재미와 애틋함을 전해 준다.


09061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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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휘의 속삭임 문학과지성 시인선 352
정현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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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력 있고 살아 숨 쉬는 문장은 만들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태어나는 것일까. 글을 쓰는 행위는 어느 정도 노력과 훈련에 의해 가능하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 시인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라는 생각 또한 그러하다. 어지간한 시인은 부단한 노력과 다듬기로 만들어지겠지만 감탄을 자아내는 시 한 편을 쓰기 어렵다. 두보와 이백처럼 스타일이 전혀 다르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근원적 언어의 한계를 절감할 때가 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인식의 힘
   절망한 자들은 대담해지는 법이다 -니체

도마뱀의 짧은 다리가
날개 돋친 도마뱀을 태어나게 한다.


  정현종의 시 ‘섬’과 최승호의 시 ‘인식의 힘’을 보는 순간 느꼈던 전율을 잊을 수가 없다. 언어를 부려 쓰는 사람의 능력은 무한하지만 그것을 적절한 상상력과 창조적 표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는 상상력이나 대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힘을 갖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잠 못 이루던 밤이 있었다. 무엇이든 지나친 욕망은 사람을 지치고 병들게 한다.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언어의 힘에 압도 되었던 시절을 아름답다고 말하려는 치졸한 욕망 또한 부끄럽기도 하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는 말이 있다. 천사의 옷은 꿰맨 흔적이 없다는 뜻으로, 일부러 꾸민 데 없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우면서 완전함을 이르는 말이다. 이것이 문자에 사용된다면 최고의 찬사가 된다. 오래전 백발이 되어버린 황동규나 정현종의 시를 보며 떠 오른 말이다. 오규원의 마지막 시집 <두두>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단순히 나이 탓만은 아니겠지만 나이와 무관하지도 않은 듯하다.

꽃 시간 1

시간의 물결을 보아라.
아침이다.
내일 아침이다.
오늘 밤에
내일 아침을 마중 나가는
나의 물결은
푸르기도 하여, 오
그 파동으로
모든 날빛을 물들이니
마음이여
동토는 그곳이여.


  힘을 주지 않아도 저절로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써지는 득도의 경지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자연스런 시간의 물결이 보이지 않으면 정현종의 <광휘의 속삭임>은 밋밋하다. 그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평론가의 눈이 아닌 독자의 판단에 맡겨져야 한다. 단순하지만 긴장이 있고 편안하지만 허술하지 않다.

  광휘(光輝)는 환하고 아름답게 빛난다는 뜻이다. 표제작 ‘광휘의 속삭임’은 이 시집의 특징을 적절하게 드러내고 있는 말이다. 눈부시지만 화려하지 않고 어렵고 난해하지도 않다. 주장을 내세우지도 웅변을 하는 것도 아니다. 작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노인의 목소리처럼 정갈하고 부드럽다.

맑은 날

날빛이 밝고 맑아
이마가 구름에 닿는다

바람결은 온몸에
무한을 살랑댄다

기쁨은 공기 중에
희망은 날빛 속에


  구름이 두어 점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떠 있는 날이어도 좋고 그저 푸르게 푸르게 청정한 날이어도 좋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맑고 깨끗한 생각들로 가득 찰 수 있다면 말이다. 짧고 간명한 표현과 여운이 남는 어떤 상태를 지향하는 듯하다. 우리의 삶이 구차할지라도 결국 공기와 빛으로 스러질 운명이라면 맑은 날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바쁜 일상 속에서 마주치는 모든 순간들이 어느 한 점에 모아지기도 한다. 모든 것이 정지하는 그 순간이 느껴진다. 찰나의 아름다움이 곧 영원이다.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고 믿는다. 지금 이 모든 순간이 점묘법으로 흩어진다. 그리고 이내 바쁜 듯이 그렇게 부대낀다.

바쁜 듯이

1

정말 바쁘지는 말고
바쁜 듯이.
그것도 스스로에게만
바쁜 듯이.

2

한가한 시간이 드디어
노다지가 될 때까지 느긋하게
느긋하게 바쁜 듯이.


  그리하여 매일 아침 ‘운명 같은 건 없다’고 외쳐본다. 저녁도 밤도 아닌 아침에 운명을 외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남은 하루가 너무 길고 햇살이 눈부셔 오로지 우리에게 희망만을 이야기한다. 알 수 없는 미래지만 무엇이든 꿈꿀 수 있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아침 이미지를 ‘운명’에 맞춰 우리 삶의 탄생과 죽음으로 치환하고 있어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저 그런 생각들과 특별하지 않은 시선들이 모여 한 편의 시를 이루었지만 ‘직관’과 만난다. 낯설고 신선하지 않은 정현종의 시가 우리에게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패기와 도전이 아니라 통찰과 무위다. 억지스럽지 않으면서 밋밋하지 않은 것은 언어의 긴장과 도약을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침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있는 건 오로지
새날
풋기운!

운명은 혹시
저녁이나 밤에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올는지 모르겠으나,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여자를 잘 안다고 말하는 시인의 의뭉스러움은 여자 그 자체에 있지 않다. 여성성은 자연과 닿아있고 부드러움과 따스함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결국 우리들 삶의 원형이며 죽음의 종착역이라는 깨달음! 그래서 우리는 여자를 잘 알아야 한다. 비약하자면 삶이란 여자를, 여성성을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여자

나는 여자를 잘 안다.
즉 여성성이 뜻하는 걸 잘 안다.
여자는 자연이다.

우리의 자연,
잃어버렸다는 낙원의 현현을
반짝이지 않을 수 없다.
역사 이전
문명 이전
나 이전
너 이전

원초
또는
앙드레 브르통과 더불어
“모음들로 넘쳐흐르는 화관(花冠).”


  한국어의 모음들이 화음을 이룬 듯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정현종의 시집은 비오는 저녁이나 햇살이 눈부신 휴일 아침에나 펼쳐들 수 있을 것 같다. 고요를 듣고 내 삶의 자취를 잠깐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어울린다. 때때로 시를 통해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작은 축복이다.


090608-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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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 0시 5분
황동규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로 시작되는 ‘즐거운 편지’를 버스에서 중얼거리며 등교하던 고등학교 시절이 까마득하다. 시에 처음 눈뜰 무렵부터 읽어 온 그의 시는 여전히 낯설지 않고 살갑다. 표지 사진이 세월을 말해주는 듯 노시인의 눈빛이 깊고 부드럽다.

  <겨울밤 0시 5분>을 통해 황동규의 근작들을 음미한다. 시인에 대한 믿음과 연륜이 어우러져 언어의 축제를 벌이는 듯하다. 화려하고 장엄한 풍경을 노래한다는 뜻이 아니라 정겹고 자연스러운 의미가 명확하게 전달된다. 여전히 긴장감 넘치는 표현과 신선한 감각이 살아 있다. 이번 시집의 특징을 뭐라고 이야기하든 황동규의 시에 흐르는 따뜻한 서정과 생의 대한 감각적 통찰은 여전하다.

  자연에 묻혀 생을 이야기하고 순간순간 마주하는 인상들과 이미지들을 풀어놓는 솜씨는 거침이 없고 물 흐르듯 편안하다. 개인적 서정의 극한을 보여주려는 듯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대상들을 언어로 표현하여 한 편의 시가 완성된다. 그의 시는 환하고 따뜻하다. 하지만 때때로 외롭고 쓸쓸하다.

어느 초밤 화성시 궁평항

비릿한 냄새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이맘때가 정말 마음에 든다.
황혼도 저묾도 어스름도 아닌
발밑까지 캄캄, 그게 오기 직전,
바다 전부가 거대한 삼키는 호흡이 되고
비릿한 냄새가 기다리고 있었다.
유원지로 가는 허연 시멘트 길이
검은 밀물에 창자처럼 여기저기 끊기고 있었다.
기다릴 게 따로 없으니
마음 놓고 무슨 색을 칠해도 좋을 하늘과 바다
그리고 살아있는 이 냄새,
밤새 하나가 가까이서 끼룩댔다.
쓰라리고 아픈 것은 쓰라리고 아픈 것이다!
혼자 있어서 홀가분한 이 외로움,
외로움 아닌 것은 하나씩 마음 밖으로 내보낸다.
속에 봉해뒀던 사람들은 기색이 안 좋지만
하나씩 말없이 나간다.
쓰라리고 아픈 것은 쓰라리고 아픈 것이다!
비릿한 냄새가 기다리고 있었다.
더 비울 게 없으면 시간이 휘는지
방금 읽고 덮은 휴대폰 전광 숫자가 떠오르지 않는다.
선창에서 배 하나가 소리 없이
집어등을 환히 켰다.


  시간과 장소가 어우러져 낮과 밤의 경계를 건너는 순간을 보여준다. 눈에 보이는 모든 이미지가 언어로 되살아난다. 시각과 후각으로 감지되는 저녁 어스름을 시인은 궁평항에서 온몸으로 맞았으리라. 하지만 그 속에 나는 없고 대상과 풍경만 존재한다.

  아득하게 모든 것이 무화되는지 시인은 집어등과 함께 사고의 흐름을 멈춰버린다. 혼자 있어 홀가분한 외로움이 아니라 환한 집어등에 대한 동경으로 읽혔다. 무엇엔가 마음을 빼앗기면 생의 감각은 벅차오르기 마련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겨울밤 0시 5분

별을 보며 걸었다.
아파트 후문에서 마을버스를 내려
길을 건너려다 그냥 걸었다.
추위를 속에 감추려는 듯 상점들이 셔텨들을 내렸다.
늦저녁에 잠깐 내리다 만 눈
지금도 흰 것 한두 깃 바람에 날리고 있다.
먼지는 잠시 잠잠해졌겠지.
얼마 만인가? 코트 여며 마음 조금 가다듬고
별을 보며 종점까지 한 정거를 걸었다.

…… 중 략 ……

별 하나가 스르르 환해지며 묻는다.
‘그대들은 뭘 기다리지? 안 올지 모르는 사람?
어둠이 없는 세상? 먼지 가라앉은 세상?
어둠 속에서 먼지 몸 얼렸다 녹이면서 빛 내뿜는
혜성의 삶도 살맛일 텐데.’
누가 헛기침을 했던가,
옆에 누가 없었다면 또박또박 힘주어 말할 뻔했다.
‘무언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 곁에서
어둠이나 빛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별들이 스쿠버다이빙 수경(水鏡) 밖처럼 어른어른대다 멎었다.
이제 곧 막차가 올 것이다.


  사람냄새 나는 시다. 버스 종점에서 막차를 기다리며 별을 바라보는 시인과 낯선 사람들. 그들에게 시인은 ‘무언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 곁에서 어둠이나 빛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을까? 그건 아마도 스스로에게 하는 말일 게다. 무엇이 집 앞에서 종점으로 그를 이끌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독자라면 마음 한 구석에 쓸쓸함이나 외로움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행동과 말들 저편에 생의 부조리와 허허로움이 서 있는 듯하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혹은 바닷가에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사람마다 다를까? 복잡한 현실의 문제를 풀어내지는 않을 것이다. 아주 작은 존재가 되었다가 무의미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 삶의 의욕을 얻기도 하고 허무한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겨울밤은 그리고 0시 5분 그런 시간이다.

낯선 외로움

자기만의 길이와 폭과 분위기를 가지고 살면서 풀에겐들
왜 저만의 슬픔과 기쁨이 따로 없으랴.
마주 앉아 찻잔 비울 때까지
속으로 삭이고 삭여야 할 생각 왜 없으랴.
삭이고 일어설 때 사방에 썰물 빠지는 적막, 속의 황홀!

학교 식당 건물과 땅 틈새에 배죽 나온 저 풀,
오늘은 노란 꽃대 하나 조그맣게 내밀었다.
손가락 끝으로 얼굴 들어보니
쬐끄만 꽃잎과 꽃술들이 오밀조밀 한 모양을 이루고 있다.
조금 싸한 냄새까지 한 모양을.
왜 한 뼘쯤 앞으로 기어 나와 좀 편히 살지 않을까,
거기도 인간의 발길 채 닿지 않는 곳인데.
풀에게도 끼가 있는가?
기차게 고달파도 제 본때로 살아보겠다는?
말이 없어서 그렇지
몸을 온통 졸이는 황홀한 낯선 외로움이?

  누구에게나 그리움이 있듯이 풀에게도 황홀한 낯선 외로움이 있다. 사람도 저마다 제 자리가 있듯 풀이 돋아난 자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운명을 거부하기도 하고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산다는 일이 어쩌면 잘못 삐져나온 꽃대처럼 신산스럽기만 하다. 한 뼘만 벗어났다면 좀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을, 사람도 그리 하지 못한다.

  내 것을 다른 대상에게 발견할 때 우리는 낯설어한다. 외로움도 그렇다. 실체없는 감정이나 존재의 상태를 이르는 말이지만 타인이나 사물을 통해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생경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 외로운가?

잠깐동안

잠깐!
삶이 잠깐 동안이라는 말이 위안을 준다.
잠깐이 몇 섬광(섬광)인가?


  외로움도 그리움도 사랑도 슬픔도 잠깐 동안이라는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견딜 만하다. 삶이 섬광처럼 지나가버린 듯 노년을 맞은 시인은 잠깐이 몇 섬광이냐고 되묻고 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깨달음일 것이다. 현재를 살지만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일까 안타까움일까.

  창밖에 당도해 버린 어둠처럼 죽음도 그렇게 우리에게 어김없이 찾아온다. 단 한 번은. 살아있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매일매일이 안타깝게 느껴질 수 있도록 치열하게(?) 혹은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삶은 아직 멍청합니다―편지

얼굴이 많이 까칠해졌습니다.
허나 감기 타듯 암벽 타듯 해온 삶
손보지 않겠습니다.
삶은 아직 멍청합니다.
딸인가 눈 지그시 감은 아이 옆에 세워놓고
손 벌린 눈먼 사내에게 천 원으로 알고 내민 만 원
깡통에 떨어트리고
천 원짜리로 알았겠지? 아쉬워할 만큼
삶은 아직 멍청합니다.

기억의 화면에는 온갖 것들이 무작위로 뜹니다.
산책길에 굴러 내리다 간신히 자리 잡았던 돌이
또다시 구릅니다.
싸락눈 흩날리는 뜰에 혼자 핀 꼿이
겁 없이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왜들 그러는지 모를 만큼 멍청합니다.

오늘은 마을 공터에서 아이들이 날리는 배드민턴 콕을
재치 있게 피했지요.
언젠가 이런 편지 쓰는 일마저 싫증나면
마음 한가운데 생짜 공터가 생기리라는 생각이
마음 설레게 합니다.

생각나시면, 지난해 새끼줄로 칭칭 동여맨 나무들
두 번째 봄비 내릴 때 풀어주십시오.


  그리고 얻은 결론이 삶은 아직 멍청한 하다는 말이다. 누군가에게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고 노래하던 ‘조그만 사랑 노래’의 시인이 이제는 ‘삶은 아직 멍청합니다’고 말한다. 생의 보편적 진리를 깨달을 것일까 아니면 생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이제 그 모든 순간의 연속이 삶이며 미리 알고 정할 수 없다는 생각쯤은 어렴풋이 할 만하다.

  황동규의 시를 읽으며 욕심이 사라지고 생의 감각이 살아나고 깨달음을 얻을 만큼 마음이 맑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살아 숨 쉬는 존재의 이유에 대해서는 잠시 고개 숙이고 다시 생각해 보았다. 멍한 눈길로 허공을 바라보듯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의 시에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사람이다. 메마른 가슴도 아니고 감각이 무딘 것도 아니지만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거나 힘겨워 고통스런 사람은 없고 시인 홀로 외롭고 쓸쓸하다. 대상에 부딪치는 모든 감각들은 싱싱하게 살아있는 촉수를 뻗고 있으나 그 촉수가 사람에게 가 닿지 않는 것 같아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모든 것들이 육화되어 뿜어져 나오는 정제된 언어임에는 틀림없다. 정갈하고 깨끗한 신새벽의 맑은 정한수처럼.


090517-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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