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 시인선 86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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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내 마음은 골짜기 깊어 그늘져 어두운 골짜기마다 새들과 짐승들이 몸을 숨겼습니다 그 동안 나는 밝은 곳만 찾아왔지요 더 이상 밝은 곳을 찾지 않았을 때 내 마음은 갑자기 밝아졌습니다. 온갖 새소리, 짐승 우짖는 소리 들려 나는 잠을 깼습니다 당신은 언제 이곳에 들어오셨습니까


  시를 만나는 일은 언제나 즐거워야한다. 앞서 말했듯이 일단 시험과 공부에서 벗어나야 시가 마음에 들어온다. 현대 시인 중 이성복을 골라보았다. 아직 활동하고 있는 시인이라서 그의 문학 세계를 평가하는 것은 조심스럽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시들을 통해 섬세한 감수성과 번뜩이는 비유, 역동적 상상력을 보여준 시인이다.

  『그 여름의 끝』은 그의 세 번째 시집이다.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은 시 문법의 파괴와 현실세계에 대한 냉소, 화려한 연상 작용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고 두 번째 시집 『남해금산』에 이어 『그 여름의 끝』을 발표했다. 이 시집은 전체가 연애시로 읽을 수 있다. ‘당신’의 의미를 찾는 것은 한용운의 ‘님’을 찾는 것과 같다. 80년대의 시대현실이나 객관적인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이 부족하고 다소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시를 읽기 시작하는 청소년들에게는 시의 본질적 성격을 보여주며 다양한 비유와 상상력을 경험할 수 있는 시집으로 추천할 만하다.

산길 2

  한 사람이 지나가기 빠듯한 산길에 아카시아 우거져 드문드문 햇빛이 비쳤습니다 길은 완전히 막힌 듯했습니다 이러다간 길을 잃고 말 거라는 생각에, 멈칫멈칫 막힌 숲 속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떨면서, 가슴 조이며 우리는 산길을 내려왔습니다 언제나 끝났다고 생각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었지요


  어느 산인지 그것이 꼭 걸을 수 있는 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산’의 의미와 ‘길’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면 이제 본격적인 시 읽기가 시작되었다. 비유니 상징이니 하는 말들을 어렵게 받아들이지 말고 자신의 상황에 비춰보거나 구체적인 장면을 연상해 보면 된다. 시는 이론과 개념을 굳이 알 필요가 없다. ‘언제나 끝났다고 생각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 되었’다는 말의 의미를 다양하게 생각해 보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대부분 시는 교과서에서 혹은 신문이나 잡지에서 한 편씩 읽게 된다. 공감할 수 있는 시 한 편을 읽고 감동을 받거나 그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한 권의 시집을 통해 한 시인의 흐름을 파악해 보는 것은 어떤가. 시인의 특징과 시세계를 전반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전체적인 구성과 일정한 기간 동안 시인이 관심을 가졌던 대상이나 생각의 흐름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장점이 있다. 마지막의 ‘거울’이라는 시를 읽어보자.

거울

  하루종일 나는 당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 길은 끝이 있습니까 죽음 속에 우리는 허리까지 잠겨 있습니다 나도 당신도 두렵기만 합니다 이 길은 끝이 있습니까 이 길이 아니라면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이 나의 길을 숨기고 있습니까 내가 당신의 길을 가로막았습니까 하루 종일 당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거울처럼 당신은 나를 보고 계십니다


  문학은 나와 대면하는 시간이다. 시는 기쁨과 감동을 주기도 하고 나를 위로해 주기도 한다. 마치 ‘거울’처럼 나를 비춰볼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것이 시다. 조용히 나의 내면을 돌아보고 자연 현상과 사회 현실을 감동적인 우리말로 표현한 시집을 읽어보는 건 어떤가? 시는 언제든 당신에게 안길 준비가 되어 있다.


090820-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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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시간에 시읽기 1 문학시간에 읽기
전국국어교사모임 엮음 / 나라말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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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


  괄호를 채워보자. 쉽고 감동적인 시가 시 읽기의 출발이다. 시는 상상력의 출발이고 감동의 시작이다. 시는 머리로 이해하기 전에 가슴으로 전달된다. 시를 어려워하는 학생들에게 칠판에 적어놓고 빈 칸을 나름대로 채워보라고 하면 다양한 말들이 쏟아진다. 문학에는 정답이 없다. 사물과 사람 그리고 세계에 대한 작가의 인식과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가 있을 뿐이다.

  시를 보면 일단 분석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는 어느 고 3 학생의 말은 시교육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처음부터 즐겁고 재미있게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말보다 내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상상을 즐겨야 한다. 위의 시는 『국어시간에 시 읽기』3권에 수록되어 있는 나태주 시인의 작품이다. 시인은 ‘너도 그렇다’는 말로 이 시를 마무리 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보아야 사랑스러운 ‘너’는 풀꽃일 수도 있지만 이 시를 읽는 사람 모두가 될 수도 있다. 시는 이렇게 하나의 의미로 규정되지 않고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시는 재미있고 즐거운 상상이어야 한다.

행복

오늘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뉴스는 없습니다

우리나라 국영방송의 초창기 일화다
나는 그 시대에 감히
행복이란 말을 적어 넣는다

- 박세현, 『문학시간에 시 읽기 2』


  박세현의 ‘행복’은 나태주의 ‘풀꽃’처럼 긴 설명이 필요 없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끔찍한 뉴스들을 생각해 보면 과연 행복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시인은 특별한 뉴스가 없는 시대를 ‘행복’이라고 말한다. 행복의 의미와 사회 현실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시다. 이렇게 시를 즐길 수 있으려면 수업시간에 ‘외우고 풀어야 할 시’라는 생각을 먼저 버려야 한다. ‘느끼고 즐기는 시’가 되지 않으면 시를 감상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야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시를 만나도 두렵지 않고 시를 즐길 수 있게 된다. 즐기지 못하면 이해하지 못한다. 참고서에 적힌 다른 사람의 해석을 외우는 방법은 평생 시와 멀어지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문학시간에 시 읽기1~3』은 전국의 국어 선생님들이 가려 뽑은 시들을 ‘나’, ‘사회현실’, ‘자연’이라는 큰 주제로 엮은 책이다. 어려지 않게 읽히고 그 뜻을 금방 알 수 있는 시부터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 시들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어떤 시든 정확한 단어의 뜻을 알고 문장을 이해해야 한다. 스스로 전체적인 의미와 화자의 감정에 공감할 수 없다면 시는 지겹고 어려운 것이 되고 만다. 학생들에게 직접 읽혀보고 뽑은 시들이기 때문에 혼자서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생각해볼 거리’가 있어서 교과서 같은 느낌이 들지만 이 시를 통해 무엇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생각해 보면 된다. 시 읽기의 즐거움은 언어적 감수성을 높여주고 따뜻한 마음을 갖게 한다.


090820-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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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 없는 세상 - 제6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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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번 하자.
  - 싫어.


  도입부가 황당한 소설이다. 독자들은 어리둥절한 채 ‘한번 하자’의 목적어를 찾기 시작한다. 작가는 모른 척하고 주인공의 일상을 서술하기 시작한다. 눈을 뜨자마자 담배를 찾다가 ‘명호씨’의 것을 슬쩍 하는 주인공은 다름 아닌 고3 남학생이다. 수능이 끝나고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는 주인공 ‘준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섹스’밖에 없다. 여자 친구 ‘서영’이게 ‘한번 하자’고 조르는 고3 남학생의 모습은 너무나 적나라하여 오히려 코믹하게 읽힌다.

  청소년들에게 ‘성(性)’에 관한 문제는 뜨거운 감자다. 내려놓을 수도 먹을 수도 없는 뜨거운 감자. 사춘기를 겪으면서 성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은 최고조에 이른다. 보통명사가 되어버린 ‘야동’은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최고의 성교육 학습 자료다. 인간의 신체 발달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 현실에서 답을 구할 수 없어 생기는 괴리현상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입시와 취직 전쟁을 피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룬 소설조차 드물다. 현실은 고사하고 문학에서조차 금지되어 있는 청소년들의 성문제를 본격적인 주제로 다루고 있는 박현욱의 <동정 없는 세상>이 빛나는 첫 번째 이유가 여기 있다.

  인 에릭 로샹의 영화 『동정(同情) 없는 세상』을 『동정(童貞) 없는 세상』으로 표현한 이 소설은 제6회 문학동네작가상 당선작이며 박현욱의 데뷔작이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소설이 영화화되어 주목받기도 했는데 현실적 인간, 사회적 제도 문제에 관심이 많은 작가인 듯싶다.
 
  인본주의 심리학자 매슬로우(Abraham Maslow, 1908~1970)는 인간이 성장하고 발달하는 과정을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나가는 과정으로 설명했다. 그는 먼저 인간 본성에 대해 세 가지 가정을 하고 있다.

1. 인간은 만족할 수 없는 욕구를 갖고 있다.
2. 인간의 행동은 충족되지 못한 욕구를 채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3. 인간의 욕구는 기본욕구(생리적인 욕구, 안전욕구)에서부터 상위욕구(소속과 애정욕구, 자아 욕구, 자기실현의 욕구)까지 5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매슬로우에 따르면 욕구 충족에는 위계가 있어서, 마치 우리가 양동이에 물을 부으면 아래로부터 위로 물이 차오르듯이, 반드시 하위에 있는 욕구가 먼저 충족되고 나서야 상위 수준의 욕구를 추구할 수 있다고 한다.

  서론이 너무 장황했나? 생리적인 욕구가 해결되지 않고 이해도 설명도 해결도 되지 않는데 어른들은 대학 입시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요구한다. 청소년들의 성문제는 단순한 억압이나 교육만으로 해결될 수는 없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결혼하는 나이가 점점 늦어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벌어먹고 살기 위해서는 점점 더 높은 학력과 교육과정이 요구된다. 대한민국에서는 군대까지 갔다 와서 최소 20대 후반이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소설의 미덕은 첫째가 ‘재미’다. 이 소설은 재미도 분량도 서점에 서서 두어 시간이면 읽고 나올 수 있다. 우선 책읽기의 재미를 붙이고 공감할 수 있는 책을 찾는 다면 가볍게 <동정 없는 세상>으로 시작해 보는 것도 좋다.

  성장 소설이라고 불리는 소설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이 소설은 가장 직접적이고 솔직하다. 정공법을 선택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지름길인 경우가 많다. 에둘러 설명으로 하품나는 성교육 프로그램으로 학생들을 지루하게 하는 것보다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상담과 문제 해결 방법을 고민할 때다.

  이 소설은 단순하고 재미있는 ‘준호’의 성장 소설만으로 볼 수는 없다. 준호는 아버지의 존재조차 알지 못한다. 게다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한 백수 삼촌을 ‘명호씨’라고 부르고 어머니를 ‘숙경씨’라고 부른다. 막나가는 학생이라는 뜻이 아니다. 개방적이고 우호적인 어머니의 태도는 준호의 ‘대학’ 고민을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만든다. 적어도 부모의 기대나 억압 때문에 좌절하거나 고통스러워하지는 않는다. 다만, 준호의 고민은 오늘도 내일도 한 번 하는 것뿐이다. ‘엄친딸’인 여자 친구 서영이는 잘 생긴 나의 제안을 번번이 거절하지만 그녀 역시 남자친구 문제로 고민했을 것이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대한민국의 학벌문제, 한 부모 가정, 청년실업까지 읽어낸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준호나 서영이의 상담역으로 등장하는 삼촌 ‘명호씨’는 십 년째 박에 틀어박혀 책만 읽는다. 준호의 성문제를 상담하는 내용이나 대학에 가야하는 이유에 대한 짤막한 충고가 이 소설을 가볍게만 볼 수 없게 하는 요소가 된다. ‘한번 하자’로 시작해서 ‘한번 하자’로 끝나는 재미있고 유쾌한 소설을 통해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현주소를 짚어볼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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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문학과지성 시인선 358
정일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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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초가 길 때

사랑이 위대한 것은
번쩍,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나를 찌르기 때문이다
서정시가 위대한 건
시 한 편을 읽는 그 짧은 순간
사람의 영혼, 자연의 색깔로
달궈지기 때문이다
나를 찔러 쓰러뜨리지 못하는 사랑은
나를 달구지 못하는 서정시는
그건 실패한 암살범과 같다
사랑은 목표물 향해 이미 당겨진 방아쇠
서정시는 전부를 쓰러뜨리는 한순간의 감염
테러리스트여 번개처럼 나를 찔러라
당신의 칼끝 나를 치명상 입히는 데
1초도 긴 시간이니


  서정시를 읽는 여름밤, 창밖의 내린 어둠만큼이나 가슴이 먹먹해진다. 산다는 일이 ‘그립다’는 말 한마디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상은 여전히 따뜻한 가슴으로 움직여진다고 믿는 사람들은 ‘사랑’을 이야기 한다. 서정시는 사랑이다. 1초도 긴 시간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닌 것은 사랑의 역설이다. 폐부 깊숙이, 단번에 찌를 수 없다면 이미 게임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속도가 승부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승부가 결정되고 난 뒤 속도의 문제가 남는다. 그것이 무엇이든. 시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읽히고 머리를 거쳐 발에 도달한다. 다른 글과 구별되는 시의 특징은 전달 방식이 아니라 속도와 여운에 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처럼 따뜻하게 전해지고 의미가 구성되고 전체가 다가오며 천천히 감동이 밀려오지 않는다. 이해되기 전에 전달된다는 엘리어트의 말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서정시가 내게 도달하는 시간은 1초도 길다.

  정일근의 시집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를 1초 만에 읽었다. 제목을 보는 순간 누구나 기다리는 일이 삶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나는 무엇을 기다렸을까? 아니 무엇을 기다리며 사는 것일까? 기다릴 줄은 아는 것일까? 먼 바다에 나가 고래를 기다리는 것은 우리의 숙명이다.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먼 바다로 나가 하루 종일
고래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사람의 사랑이 한 마리 고래라는 것을
망망대해에서 검은 일 획 그으며
반짝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지는 고래는
첫사랑처럼 환호하며 찾아왔다
이뤄지지 못할 사랑처럼 아프게 사라진다
생의 엔진을 모두 끄고
흔들리는 파도 따라 함께 흔들리며
뜨거운 햇살 뜨거운 바다 위에서
떠나간 고래를 다시 기다리는 일은
그 긴 골목길 마지막 외등
한 발자국 물러난 캄캄한 어둠 속에 서서
너를 기다렸던 일
그때 나는 얼마나 너를 열망했던가
온몸이 귀가 되어 너의 구둣발 소리 기다렸듯
팽팽한 수평선 걸어 내게로 돌아올
그 소리 다시 기다리는 일인지 모른다
오늘도 고래는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에서부터 푸른 어둠이 내리고
떠나온 점등인의 별로 돌아가며
이제 떠나간 것은 기다리지 않기로 한다
지금 고래가 배의 꼬리를 따라올지라도
네가 울며 내 이름 부르며 따라올지라도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사람의 서러운 사랑 바다로 가
한 마리 고래가 되었기에
고래는 기다리는 사랑 아니라
놓아주어야 하는 바다의 사랑이기에


  하지만 고래는 기다리는 사랑이 아니라 놓아주어야 하는 바다의 사랑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 있을까? 삶의 역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정일근의 이번 시집은 온몸으로 신음소리를 낸다. 기다림은 이별 이후에 찾아오는 고통의 화인같은 것이다. 그의 시집 곳곳에 숨어 있는 삶의 고통과 허망함은 우리의 그것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울산 ‘은현리’라는 예쁜 이름의 동네에서 살고 있는 시인이 보인다. 기다림과 그리움 사이에 서 있는 시인의 모습이.

  시집을 다 읽고 난 후 홍정선의 해설을 본문만큼 재미있게 읽었다. 시집 곳곳에 묻어 있는 상처를 확인하고 그의 생을 들여다보는 일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시인에 대해 말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을 홍정선을 용감하게 그리고 차분하게 헤쳐 나간다. 시인을 통해 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를 통해 시인을 말하는 일이 위험천만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설득력있게 그리고 차분하고 꼼꼼한 시읽기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한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우주를 이해하는 일이다. 생의 진솔한 기록이기도 한 시를 통해 시인을 읽어내는 일은 아프지만 감동적이다. 서정시는 시인의 영혼을 기록한 것이다. 그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알 수 있고 그의 말과 숨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더구나 그가 보여주는 세상과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공감한다면 두 말할 나위 없다.

자연론

풀 한 포기 밟기 두려울 때가 온다

살아 있는 것의 목숨 하나하나 소중해지고

어제 무심히 꺾었던 꽃의 아픔

오늘 몸이 먼저 안다

스스로 그것이 죄인 것을 아는 시간 온다

그 죄에 마음 저미며 불안해지는 시간 온다

불안해하는 순간부터 사람도 자연이다


  은현리에 사는 시인은 은현리의 일부가 되었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생의 어떤 원리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닌지. 쉽고 간단해 보이지만 결코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세계를 우리는 모르고 사는 것은 아닌지. 꾸며진 말과 화려한 수사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인 불안을 알고 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자꾸만 부끄워진다.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나와 먼 미래의 내가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다.

  시를 읽으며 떠올린 상념과 끝간데 없이 달려가는 상상을 넘어 허상, 공상, 망상의 세계조차 즐겁다. 연결고리 없이 퍼져나간 생각의 자락들은 돌아올 줄 모른다. 한 편의 시는 생의 나침반이며 거울이고 연인이며 일기가 되기도 한다.

갈림길

길은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

너에게로 가는 길이 나에게 있었다
나에게로 가는 길이 너에게 있었다

지금 가장 멀고 험한 길 걸어
너는 너에게로 돌아가고 있다
나는 나에게로 돌아가고 있다

이승에서의 갈림길은 여기부터 시작이다

이제 이쯤에서 작별하자

가까워질수록 멀어지는 것이 길이니
멀어질수록 가까워지는 것이 길이니


  생의 모든 순간에 마주하는 이별에 대하여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 갈림길에 서서 시인은 이쯤에서 작별하자고 말한다. 길은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으니 갈림길에 도착하면 작별해야 한다. 갈림길에 도착할 때까지 함께 걷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는 아닐까?

  그리하여 어느 날, 갈림길인 줄도 모르고 혹은 서로를 보지도 못하고 갈림길에 도착하게 된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밤하늘에 달이 밝다. 부끄러운 듯 반쯤 얼굴을 가린 달빛은 언제나 그만큼의 밝기로 비춘다. 지구의 반대편에서도 같은 밝기와 크기와 모습인지 모르겠으나 서로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전혀 다른 하늘 아래서 함께 바라볼 수는 있을 것이다. 쓸쓸한 섬처럼 외롭게 놓여있는 달빛이 유난히 쓸쓸하다.

  시인의 신음소리만큼 아픈 소리를 내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가 가득한 정일근의 시집이 1초 만에 읽힌 이유는 달에게 물었다.

쓸쓸한 섬

우리는 서로를 보지 못했는지 모른다

서로 바라보고 있다 믿었던 옛날에도
나는 그대 뒤편의 물을
그대는 내 뒤편의 먼 바다를
아득히 바라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섬이다
그대는 아직 내릴 곳을 찾지 못해 떠도는
저녁 바다 갈매기다

우리는 아직 서로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내 밤은 오고 모두 아프게 사무칠 것이다

 

090731-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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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지성 시인선 351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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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다

오늘 네가 아름답다면
죽은 여자 자라나는 머리카락 속에서 반짝이는 핀과 같고
눈먼 사람의 눈빛을 잡아끄는 그림 같고
앵두향기에 취해 안개 속을 떠들며 지나가는
모슬린 잠옷의 아이들 같고
우기의 사바나에 사는 소금기린 긴 목의 짠맛 같고

조금씩 녹아들며 붉은 천 넓게 적시다가
말라붙은 하얀 알갱이로
아기미의 모래 위에 뿌려진다
오늘

네가 아름답다면
매립지를 떠도는 녹색 안개
그 위로 솟아나는 해초냄새의 텅 빈 굴뚝같이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이후 오랜만에 진은영의 시집을 읽었다.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지 못하고 언어의 간극에 발이 걸려 넘어진다. 서시에 해당하는 ‘아름답다’가 피워올리는 텅빈 굴뚝의 연기같은 이미지만 무성하다. 표상적 의미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같은’ 아름다움만 난무한다. 낯설고 생경한 이미지의 충돌 속에서 나는 오늘도 길을 헤매나보다.

  행위의 주체는 없고 세계의 현상만 남아있다. 세계를 말하려는 시는 구체적인 대상과 이미지가 없다. 추상과 상징만 남은 의미의 충돌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지만 추하거나 아득하지 않은 세계다. 말로 설명되지 않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를 드러내는 고단한 작업이 시인의 업은 아닐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름다움 이전의 세계를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것은 더더욱 아닐터.

멜랑콜리아

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
누구의 부드러운 혀 끝에 닿지 못했다

그는 늘 나 때문에 슬퍼한다
모래사막에 나를 그려놓고 나서
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음을 기억한다
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
그는 나를 지워준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


  닿을 수 없는 곳에 존재하는 그의 존재는 그리움이다. 나는 누구인가? 멜랑콜리아는 치유될 수 없는 슬픔이다. 시인에게 우울증은 천형의 형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쾌하고 즐거운 세상이라면 굳이 시를 쓰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근본적으로 그의 부재나 나의 부재로 인해 존재의 무화를 통해 고통은 시작된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가 아니다. 주체와 객체를 바꾸면 그대로 그는 시인이 된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엎어지고 자빠지지만 벗어날 수 없는 숙명같은 게 있다. 하나의 이미지와 상징으로 말해질 수 없는 사소함이 있다. 흰 셔츠에 버찌가 번지는 것처럼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그 사소함들을 어떻게 말할까?


우리는 매일매일

흰 셔츠 윗주머니에
버찌를 가득넣고
우리는 매일 넘어졌지

높이 던진 푸른 토마토
오후 다섯 시의 공중에서 붉게 익어
흘러내린다

우리는 너무 오래 생각했다
틀린 것을 말하기 위해
열쇠 잃은 흑단상자 속 어둠을 흔든다

우리의 사계절
시큼하게 잘린 네 조각 오렌지

터지는 향기의 파이프 길게 빨며 우리는 매일매일


  틀린 것을 말하기 위해 우리는 너무 오래 생각했다는 조소아닌 조소. 우리가 매일 반복하고 있는 일상의 우스꽝스러움, 그 어리석음을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다만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의 혼돈과 어둠만이 존재할 뿐.

  깨지고 흔들리는 이미지들은 세계 밖에 존재한다. 언어로 표현될 수 있으나 감각할 수 없는 세계는 독자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부서진다. 우울한 염소가 한 마리씩 지나가는 것처럼 그 그림자는 길고 지루하다. 시는 언어의 세계를 형상화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된다. 달나라처럼 머나먼 거리감만 더해줄 뿐이다. 그것이 시의 자가당착이다.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경계선!

70년대産

우리는 목숨을 걸고 쓴다지만
우리에게
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다
그것이 비극이다
세상을 허리 위 분홍 훌라후프처럼 돌리면서
밥 먹고
술 마시고
내내 기다리다
결국
서로 쏘았다

  구체적인 상황도 설명도 없이 결국 서로 쏘는 세대가 되어버린 자화상을 그린다. 시인은 70년産이다. 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 것이 비극이라는 사실을 깨닫지만 결국 서로 쏜다. 그러나 현실은 상징이 아니다. 굳이 시에서 현실을 읽어낼 필요도 없지만.

  기다림의 끝에 서서 자신의 정체성을 묻고 있는 세대. 비극적 결말을 이끌어 낼 수밖에 없는 현실. 권혁웅의 해설처럼 그것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후일담이 사랑보다 선행할 때가 있으므로.

사랑에 대한 후일담이 사랑보다 선행할 때가 있고, 자신에 관한 회고담이 자신보다 앞설 때가 있다. 시원(始原)은 파생과 유출을 통해서만 자신의 지점을 지시할 수 있는 법이다. 무언가가 자신을 긁고 지나간 후에야 우리는 그게 사랑이었음을 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이고 실체가 아니라 속성이다. - 권혁웅, ‘멜랑콜리 펜타곤Melancholy Pentagon’중에서, P.100


090719-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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