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질 들뢰즈 ②

  

2. 어제의 나는 과연 오늘의 나와 같은 존재일까

   
 

헛되이 보내버린 이 시간 안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마지막에 가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배움의 본질적인 성과이다. 
  

- 질 들뢰즈, 서동욱 · 이충민 역, <프루스트와 기호들>, 민음사, 2004, 47쪽. 

 
   

    고층빌딩이 조각조각 찢어버려 토막 난 하늘에 익숙해진 관객의 눈은 문득 <시간을 달리는 소녀> 속의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이 한없이 낯설다. 우리가 저토록 아름다운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았던가. 하늘뿐만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고등학교 교정으로 보이는 공간 구석구석이 문득 고풍스러운 유물처럼 신비한 아우라를 뿜어내고, 칠판에 적힌 글씨에 드리운 석양의 그림자조차 우주의 비밀을 간직한 듯 느닷없는 애수를 자아낸다. 인물의 액션과 대사가 그려내는 눈부신 역동성의 배경이 되는 시공간은 ‘학원물’ 특유의 명랑함이 아니라 애잔한 정적으로 가득하다. 이 흥미로운 애니메이션은 ‘분명한 현재’를 마치 오래전부터 그리워해오던 머나먼 옛날처럼 ‘노스탤지어의 시간’으로 역전시킨다.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을 찰나의 순간이 0.1초만 지나도 아득한 과거로 사라질 듯한 조바심. 관객은 마코토와 치아키와 고스케의 학창 시절을 보여주는 단 몇 개의 장면만으로 이미 ‘교복을 입고 건들거리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있다. 관객이 마코토와 동년배라면 그녀와 실시간으로 겪고 있는 이 생생한 현재가 왠지 문득 그리울 것이다. 관객이 마코토보다 더 어리다면 그는 아직 겪어보지도 못한 미래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분명 아득한 과거가 아닌 동시대의 현재를 그려내지만, 그 선명한 현재를 아련한 과거처럼 못 견디게 그립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덜렁이 소녀 마코토가 ‘머피의 법칙’에 제대로 걸려든 어느 날, 7월 13일. 특별한 걱정이나 엄청난 고민 없이 그럭저럭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고 있던 마코토에게 정말 되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날이 찾아온다. 아침부터 그토록 자전거 페달을 밟았는데도 지각을 했으며, 아무런 준비도 안 했는데 갑자기 쪽지 시험을 보질 않나, 가정 실습 시간에 실수를 해서 불을 낼 뻔하질 않나, 모르는 남자아이와 호되게 부딪쳐 우당탕탕 넘어지질 않나……. 그런데 바로 이날 마코토는 과학실에서 갑자기 넘어져 호두처럼 생긴 신기한 물체를 만나게 된다. 이 호두껍데기가 마코토의 뒤통수 아래서 깨지는 순간 그녀의 인생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같은 날 마코토는 칠판 위에 마치 계시처럼 박혀 있는 문장을 보게 된다. Time waits for no one. 이 문장을 바라보는 말괄량이 소녀 마코토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다. 마코토는 친구 유리와 대화를 하며 문과에 갈지 이과에 갈지 고민한다. 아직 자신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데 문과와 이과 중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바로 그 순간. 그토록 어린 나이에 운명의 지형도를 완전히 바꿀 수 있는 엄청난 결단을 내려야 했던, 그 당혹스런 시간 속으로 우리는 함께 빨려 들어간다. 우리의 뒤꽁무니를 맹렬히 추적하는 시간을 뒤로한 채, 우리는 어느새 이곳까지 흘러 왔다. Time waits for no one. 시간은 망설이고 주저하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았으니까.

   하루 종일 좌충우돌했던 하루를 마감하고 이제 집으로 가려는 마코토에게 또 한 번의 끔찍한 ‘머피의 유령’이 도사리고 있다. 기찻길까지 내려오는 급경사 길에서 신나게 질주하던 중 자전거 브레이크가 고장 나버린 것이다. 이 순간이 마치 영원히 이어질 듯, 마코토의 몸은 하늘 높이 떠올라 정지된다. 죽기 직전의 마코토는 생각한다. “오늘이 만약, 오늘이 만약 평소와 다름없었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잊고 있었어. 오늘은 최악의 날이란 걸. 설마 했는데 죽는구나.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일찍 일어날걸. 늦잠을 안 잤으면 지각도 안 했을 테고 튀김도 더 잘 튀겼을 거고 어리바리한 남자애한테 부딪히지도 않았을 테지…….”
    그런데 눈을 떠보니 이상하다. 난 이미 죽은 줄 알았는데, 벌써 유체이탈에 성공한 것일까. 아니다. 그게 아니다. 이 아줌마와 꼬마는 아까 사고 나기 직전에 봤던 그 사람들인데. 왜 나는 몇 분 전의 시간으로 돌아간 것일까. 꿈일까. 현실이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고민을 미처 다 마치기도 전에 아줌마의 엄청난 핀잔이 날아온다. “야! 눈을 어디다 달고 다녀! 사과해. 사과하란 말이야!” 마코토는 이모에게 달려가 이 모든 괴상한 정황을 미주알고주알 설명하며 흥분한다.

   이모는 태연히 웃으며 마치 아무 일도 아니란 듯이 설명한다. “마코토, 그건 타임  리프야.”  “타임 리프?”  “전철에 치일 뻔했다며? 자전거 채 날아가서? 그런데 정신이 들고 보니 사고 나기 직전으로 돌아와 있었고. 그게 타임 리프야. 시간이란 건 불가역이거든. 시간은 돌아오지 않잖아. 그러니까 돌아온 건 마코토 너 자신이야. 네가 시간을 뛰어넘어 과거로 되돌아온 거야.” 마코토는 마치 이미 겪어본 일을 이야기하듯 술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이모의 반응에 또 한 번 놀란다. 이모는 여유롭게 웃으며 덧붙인다. “그렇게 특이한 건 아냐. 네 또래 여자애들한테는 종종 있는 일이니까.”
    마코토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말한다. 이모는 장난스레 웃으며 말한다. “타임 리프는 나한테도 있었는걸?”(알고 보면 마코토의 이모는 원작소설에서 타임 리프를 경험했던 바로 그 소녀다) “예를 들어 일요일에는 늦잠을 자잖아. 그냥 누워만 있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그러다 정신이 들면 날이 이미 저물었어. 화들짝 놀라지. 내 소중한 일요일은 어디로 간 거지?” 이모는 타임 리프를 마치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상적인 일인 것처럼 세련되게 얼버무린다.

   소녀는 이모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리며 더 큰 혼란에 빠진다. 어제의 나는 정말 오늘의 나인가. 아까 죽을 뻔했던, 아니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나 자신과 지금 멀쩡히 살아 있는 나는 과연 같은 존재인가. 과거가 지나면 현재가 되고 현재가 지나면 미래가 되는 것이 시간의 규칙이 아니었던가. 천만다행으로 죽기 전의 나로 돌아왔지만 아까와 다른 또 다른 시간에 도착한 나는 과연 과거에 있는 걸까, 미래에 있는 걸까. 내가 한 것이 정말 타임 리프가 맞는다면 태어나서 가장 운 나쁜 날이 될 뻔했던 날이 불과 몇 초 사이에 태어나서 가장 신기하고 흥미로운 날로 변한 셈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나라는 존재는 과거→현재→미래를 향해 순차적으로 달려온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비논리적으로 공존하는 알 수 없는 시간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시간이 그저 쏜살같이 흐르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드라이아이스처럼 고체에서 액체를 거치지 않고 바로 기체로 승화해버린 듯한 느낌. 그것이 우리가 초능력 없이도 겪는 타임 리프 아닐까. 내 소중한 10대는 어디 간 걸까. 왜 나에겐 어린 시절의 좋은 추억이 없는 것일까. 아, 왜 나는 연애의 추억도 없이 이별만 해댄 걸까. 이 모든 지나간 시간에 대한 덧없는 상실의 감정,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한 절박하지만 때늦은 그리움. 이것이 우리에게 매일매일 일어나는, 초능력 없이도 가능한 영혼의 타임 리프 아닐까.

   
 

 오후만 있던 일요일 눈을 뜨고 하늘을 보니
 짙은 회색 구름이 나를 부르고 있네
 생각 없이 걷던 길 옆에 아이들이 놀고 있었고
 나를 바라보던 하얀 강아지 이유 없이 달아났네
 나는 노란 풍선처럼 달아나고 싶었고
 나는 작은 새처럼 날아가고 싶었네
 작은 빗방울들이 아이들의 흥을 깨고
 모이 쪼던 비둘기들 날아가 버렸네
 달아났던 강아지 끙끙대며 집을 찾고
 스며들던 어둠이 내 앞에 다가왔네
 나는 어둠속으로 들어가 한없이 걸었고
 나는 빗속으로 들어가 마냥 걷고 있었네
 오후만 있던 일요일 포근한 밤이 왔네
 오후만 있던 일요일 예쁜 비가 왔네
 

 - ‘어떤 날’의 노래, <오후만 있던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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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09-10-08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부산한 사무실 창문을 뚫고 <오후만 있던 일요일>이 울려퍼지는 듯. 일손을 놓고 갑자기 평온해진 느낌.

meanwhile 2009-10-08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직 겪어보지도 못한 미래를 그리워하는 그 나이로 한 번 돌아가보고 싶어지는 오후입니다. 오후마저 없는 목요일, 꾸벅꾸벅 졸다가 번쩍 깸.^^

냠냠 2009-10-09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드라이아이스처럼 휘리릭 사라져버린 내 시간은 어디로 간 것일까. 가져보지도 못한 걸 상실한 느낌은 왜 이리도 매번 아린지. 쿠울럭~^^

sotkfkd 2009-10-10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떤날, 이병우님 어제 텔레비젼에서 뵜는데요.

어떤 날이 그리운 2009-10-11 0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병우의 기타와 함께 듣는 오후만 있던 일요일, 소름이 쫙 끼쳤슴다. 넘 좋아서, 흑흑....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질 들뢰즈 ①

 

1. 시간의 단위는 무엇일까

   
 

우리가 우주로 나갈 때 가져가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우주도 우리를 변하게 할 수 없습니다.  


 - 조셉 캠벨, 이윤기 역, <신화의 힘>, 이끌리오, 2002, 336쪽.

 
   

   쏜살같이 달리는 시간의 뒷덜미를 슬쩍 낚아채어, ‘헤이, 그만 좀 달리고 웬만하면 쉬어 가지 그래?’라고 속삭일 것 같은 소녀. 등교시간의 압박과 알람시계의 난리법석만 없다면, 골목길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과 도란도란 수다를 떨고, 눈길을 끄는 모든 장소마다 기꺼이 멈춰 요리조리 두리번거릴 것만 같은, 지구를 몇 바퀴 돌고도 남을 오지랖을 펄럭이는 명랑 소녀 마코토.

 

   ‘차라리 지각을 하는 게 낫겠다!’라는 친구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어김없이 달콤한 늦잠을 자고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누르며 빛의 속도로 자전거 페달을 밟아대는 소녀.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시간을 달린다’라는 표현보다는 ‘시간을 깜빡 잊고 띄엄띄엄 건너뛰는 소녀’, 걸핏하면 시간을 망각하기에 그 어떤 시간의 광풍에도 휘둘리지 않는 소녀의 이야기다.
    영화가 시작되는 즈음 마코토가 시간의 흐름에 짓눌리지 않는 이유는 그녀가 시간의 ‘교환가치’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소녀 마코토는 ‘타임 리프’라는 엄청난 능력을 갖게 되고 나서도 그 능력을 좀처럼 ‘유용한’ 곳에 쓰지 않는다. 약삭빠른 어른들이라면 주식투자나 로또 당첨이나 경매나 도박 같은 ‘환금성 높은’ 일에 타임 리프 능력을 썼을지도 모른다. 이런 엄청난 초능력이 생긴다면 아마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뭔가 대단한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타임 리프 능력이 생긴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설문조사는 ‘당신이 투명인간이 된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설문조사와 비슷한 결과를 낳지 않을까. ‘한정된 시간’과 ‘한정된 육체’야 말로 인간 스스로 느끼는 자신의 명백한 한계이니까. 천하의 보들레르도 ‘시간의 인식’ 앞에서는 맥을 못 추었다. 황홀한 망상에 빠짐으로써 시, 분, 초로 환원되는 기계적 시간의 압박에서 벗어났던 보들레르. 그는 ‘시간’을 떠올리는 순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몽상에 물들어 향기와 빛으로 가득했던 자신의 방이 ‘악몽의 방’으로 바뀌어버리는 환상을 체험한다. 기계적 시간, 진보적 시간, 직선적 시간이야말로 시인의 소중한 뮤즈를 앗아가는 ‘폭군의 무기’였던 것이다.

   
 

오! 그렇군! 시간이 다시 나타났다. 시간은 이제 폭군으로 등장했다. 이 무서운 늙은이, 시간과 함께 추억, 회한, 공포, 고통, 악몽, 분노, 신경증 등 모든 시간의 악마적 행렬이 돌아온 것이다.
 (…) 한 초 한 초가 시계추에서 솟아나면서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나는 삶이다. 견디기 힘든, 요지부동의 삶!
 (…) 그렇다! 시간이 지배한다. 시간이 그의 난폭한 독재권을 다시 찾은 것이다. 그리고 시간은 마치 황소를 부리듯 그의 두 개의 바늘로 나를 채찍질하며 ‘자, 바보야 소리를 질러! 노예놈아, 땀을 흘려! 저주받은 자야, 살아라!’하고 나를 재촉한다.  


 - 보들레르, 윤영애 역, <파리의 우울>, 민음사, 1995, 38쪽.  

 
   

   타임 리퍼(time leaper)와 투명인간은 ‘주체의 책임’을 삭제함으로써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신의 전지전능함을 떠올리게 한다. 타임 리프나 투명인간 되기는 신의 권능을 훔치는 일처럼 짜릿하면서도 은밀한 쾌감들을 상상하게 한다. 그러나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고 엄청난 모범생도 아닌, 언뜻 보면 그저 평범한 소녀인 마코토는 이 눈부신 초능력을 다소 엉뚱한 곳에 사용한다. 노래방 시간을 연장하거나 동생이 푸딩을 꿀꺽 집어삼키기 이전으로 돌아가기 같은, ‘정말 시답잖은, 하등 중요하지 않은’ 일에 말이다. 

   그러나 이 대단한 능력을 이토록 하찮은 일에 써먹는 소녀의 천진함이야말로 이 소녀에게 ‘타임 리프’라는 위대한 능력이 주어질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는 요소가 아닐까. 그녀는 이토록 사소한 일에서 무한한 희열을 느낄 줄 아는 무구한 영혼을 지닌 소녀다. 그녀는 시간을 쥐락펴락하여 시간을 지배하고, 시간에 쫓기는 인간을 지배할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상천외한 능력을 엉뚱한 일에 사용함으로써 ‘심각한 미션’을 ‘우스꽝스러운 놀이’로 역전시킨다. 

   그녀에게 타임 리프는 시간을 권력으로 사용하는 ‘지배의 기술’이 아니라 시간을 찰흙처럼 주무르고 구부려 저글링을 하는 듯한 ‘놀이의 기술’이다. 이 모든 좌충우돌 속에서 그녀는 디지털시계처럼 순서대로 어김없이 정확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뒤집어 ‘권태의 시간’을 ‘사랑의 시간’으로 탈바꿈시키는 기적의 연출자가 된다.
   이제 치명적인 사이렌의 노래를 듣지 않기 위해 귀를 틀어막아버린 소심남 오디세우스가 아니라, 지상의 모든 소리에 귀 기울이느라 언제나 좌충우돌 사고를 치는, 너무도 불안하지만 지극히 사랑스러운 한 소녀의 신개념 오디세이가 시작된다. 그녀는 바뀌어버린 시간의 의미 때문에 수동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하면 시간도 변할 수 있다’는 기적을 요리하는, 경이로운 ‘시간의 탈주자’가 된다. 이 멋진 시간 여행의 동반자는 바로 질 들뢰즈이다. 

   
 

음악의 최종 목적으로서, 탈영토화 된 리토르넬로를 생산하고 그것을 우주 안에 풀어놓는 것, 그것은 새로운 체계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다. 우주적 힘을 향해 배치를 개방하라. 하나의 배치에서 다른 배치로, 소리의 배치에서 음향화 하는 기계로. 음악가의 어린이-되기에서 어린이의 우주적으로-되기. 


 ―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이진경 · 권혜원 외 역, <천의 고원> 2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자료실, 2000, 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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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hurts 2009-10-07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우, 시간을 달리는 소녀, 정말 사랑스러운 애니메이션이죠. 두근두근!!

맨손체조 2009-10-07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앗, <시간을 달리는 소녀>다! 영화가 너무 짧다고 느껴져서, 한참동안 극장에서 나오지 못했던 그 영화를 이 곳에서는 아주 '길게' 읽을 수 있는 건가요. 여울님. 그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그 소녀의 매력과 여울님의 장기인 '작두 탄 구라'가 만나면..... 앗싸, 봉봉!!!

sotkfkd 2009-10-10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들뢰즈, 반갑습니다. 석사논문 때문에 한 때 그와 함께 살았지요.
잘 읽었습니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와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⑩

 

10. 내 안의 메피스토펠레스를 만나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이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비판적 이성이 우세할수록 인생은 그만큼 빈약해진다. 그러나 무의식과 신화를 의식화할수록 우리의 인생은 그만큼 통합을 이루게 된다. 과대평가된 이성은, 그것이 지배하면 개인이 궁핍해진다는 면에서 독재국가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무의식은 우리에게 뭔가를 알려주거나 영상으로 암시하면서 하나의 기회를 준다. 무의식은 어떤 논리로도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우리에게 때때로 전해줄 수 있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536쪽.  

 
   

   내가 차마 가지 않은 길이 나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 때가 있다. 우리는 그때 가지 않은 길 때문에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이 바뀌었음을 알고 있다. 내 앞에 놓인 길이 매끄럽고 탄탄한 도로이며 모두가 걷고 싶어 하는 대로(大路)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 길이 생각처럼 평탄하지도 않으며 게다가 어느 날 문득 그 길 위에 나 혼자 서 있음을 깨달을 때도 있다. 우리는 그제야 깨닫는다. 몇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여전히 그 길을 선택했을 것임을.
   내 앞에 분명히 믿음직한 길잡이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길로 접어든 경우, 우리의 절망은 더욱 깊어진다. 분명 그 사람을 믿고 따르면 외롭지도 두렵지도 않으리라 믿었는데, 알고 보니 우리는 ‘다른 길’을 ‘같은 길’이라 생각하며 걸었던, 서로를 향한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융이 프로이트와 결별했을 때도 그랬다. 융은 가장 존경하는 대상에게 가장 깊은 실망을 느껴야 했고, 자신이 ‘아버지를 따르는 아들’이 아니라 아직 아들조차 낳아본 적이 없는‘새로운 아버지’가 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프로이트와 인연을 끊은 후 융은 절망적인 방향상실 상태에 빠진다. 아무 것도 붙잡을 것이 없는 상태에서 텅 빈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느낌, 생의 나침반을 영원히 상실한 듯한 아찔함, 환자들을 돌보다가 스스로 정신이상이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던 융은 차라리‘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진보의 욕망을 떨쳐버린다. 그는 그동안 공부했던 모든 것이 ‘내가 아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바로 그때 그는 내면에서 속삭이는 또 하나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토록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 그저 마음이 시키는 대로 내버려두자. 융은 의식적으로 자신을 무의식에 충동에 맡겨버린다. 

   
 

나에게는 해방이란 것이 없다. 내가 소유하지 않고 내가 행하거나 체험하지 않은 그 어떤 것들로부터 나를 해방시킬 수 없다. 진정한 해방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했을 때,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을 헌신하여 철저히 참여했을 때 비로소 가능한 법이다. 내가 참여하지 않고 물러서면 거기에 해당하는 영혼의 부분을 그만큼 절단하는 셈이 된다. (……) 자신의 열정의 지옥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러면 열정은 집 가까이 있게 되고 그가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불길을 일으켜 바로 그의 집을 덮칠 것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포기하고 내버려두고 겉으로 잊어버린 체하고 있을 경우, 그 포기한 것과 내버려둔 것이 두 배의 힘으로 되돌아올 가능성과 위험이 상존한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490쪽.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욕망을 내려둔 채 무의식에게 길을 묻자 무의식은 이렇게 대답했다. 어린 시절 가장 좋아했던 놀이를 떠올려보라고. 학문과 출세의 길을 거의 동시에 달리고 있었던 30대 후반의 융에게 불현듯 떠오른 이미지는 진흙과 벽돌을 오밀조밀하게 쌓아올려 ‘나만의 집’을 만들던 어린 시절의 자신이었다. 그때 그 시절 열한 살 소년이 이제 성인이 되어버린 나 자신을 부르며 ‘함께 놀자’는 메시지를 보낸 셈이다. 융은 깨닫는다. 열한 살 소년과 지금의 나를 이어주기 위해서는, 쑥스럽고 어색하지만 그때 그 소년의 놀이를 다시 재연해보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그 작은 아이는 여전히 벽돌로 집을 지으며 까르르 웃고 있는데, 성인이 된 자신은 인생의 방향타를 잃어 완전히 좌절하고 있음을, 융은 직시한다. 그 소년은 내가 완전히 잃어버린 창조적인 삶을 누리고 있는데, 나만 여기남아 권태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니.
   융은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마침내 그때 그 시절 열한 살 소년이 되기로 결심한다. 아이의 놀이를 하는 것밖에는 다른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자 어쩔 수 없는 굴욕감이 덮쳐오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호숫가와 물속에서 돌을 찾고 흙을 퍼 나르는 동안 그는 놀이의 적합성을 ‘판단하는 의식’을 깡그리 잊고 다만 즐겁게 놀이에 몰두한다. 그는 날마다 조금씩 집을 짓기 시작했다. 환자가 찾아오는 시간을 빼고는 온전히 열한 살 아이가 되는 시간을 기쁘게 누렸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어느새 ‘길 잃은 나’조차 잊어버린 스스로를 발견한다. 그는 그렇게 자신이 차마 가지 못한 길을, 잃어버린 자신을, 늦었지만 생생하게 다시 체험하는 ‘혼자만의 통과의례’를 거친다. 그 과정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욕망과 길잡이를 잃어버린 고독과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싸우는 고통을 선뜻 넘어서버린다. 그는 그때부터 인생의 어려운 고비를 맞을 때마다, 아내가 죽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나가고, 전쟁이 일어나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느낄 때마다, 매번 ‘새로운 아이의 놀이’를 시작함으로써 자신이 억압했던 무의식의 맨얼굴을 만난다. 유능한 정신과 의사이자 학자가 갑자기 모든 연구 활동을 접고 집짓기 놀이에 몰두하는 것은 자칫 어리석은 퇴행이나 부질없는 망상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는 처절한 전투와 망아의 희열을 동시에 경험하는 정신의 리모델링을 감행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기념비적인 저작이 탄생했고, 잊을 수 없는 발견이 잇따랐다. 그에게 어린이 되기는 무의식의 내밀한 무늬와 숨결을 올올이 체험하는 내면의 통과의례였다.   

   한편 내쉬는 서른 살 이후 거의 30여 년간 자기 안에서 타오르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속삭임과 씨름했다. 때로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달콤한 유혹에 정신을 잃기도 하고, 오직 메피스토펠레스만이 창조력의 고갈에 신음하는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 믿기도 했으며, 그에게 메피스토펠레스를 빼앗아 가려는 정신병원과 가족과 친구들에게 저항하며 모든 사회관계로부터 단절되기도 했다. 그는 정신분열증의 회복과 재발을 반복하며 자신의 좌절된 무의식과의 힘겨운 조우를 계속했다.
    ‘신의 왼발’을 자처하는 내쉬의 사명감은 너무 거대해진 나머지 교수직도 버리고 아예 미국을 떠나버렸으며,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기 위해 전대미문의 소동을 벌이기도 했고, 생의 전부였던 수학도 버린 채 정치에 뛰어들어 ‘세계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낡은 정체성을 훌훌 벗어던지면 자신의 무의식이 인도하는 우주적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융은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무의식에 ‘잡아먹힐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신중함과 조심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무의식의 광휘에 사로잡히거나 무의식의 난폭 운전에 의식이 희생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기 때문이었다. 

   무의식은 ‘선악을 넘어서’ 존재하는 거대한 영혼의 마그마다. 무엇으로 부활할지 모르는,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덩어리. 이 무의식을 예술로, 학문으로, 또 다른 소중한 그 무엇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은 의식의 힘이었다. 그 의식이 ‘통제’로만 기능하면 강박증에 사로잡히고, 거꾸로 의식이 무의식에 사로잡히면 광기로 치닫기 쉬웠다. 무의식의 바다 위에서 출렁이면서 의식에 고삐를 놓지 않는 것, 의식의 고삐를 잡은 것조차 잊고 무의식의 창조적 상상력에 몸을 맡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칼 융과 존 내쉬의 과제는 같았다. 인간 무의식의 극한을 실험하면서 그 무의식의 광휘에 눈멀거나 그 불길에 타버리지 않는 것. 무의식의 무한한 가능성을 한 줌이라도 더 의식의 차원으로 불러내어 창조적 작업에 영감을 불어넣는 것. 

   내쉬는 오랫동안 무의식의 광휘에 압도되어 자신의 의식과 평범한 일상을 완전히 폐기처분하는 극도의 모험을 감행했다. 이혼과 실직의 고통보다 더 아픈 것은 둘째 아들마저 자신처럼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때로 ‘강제 입원’과 ‘강제 치료’로 인해 증상이 ‘호전’되는 기미가 보일 때마다 내쉬는 안도하기보다는 오히려 분노했다. 그에게 ‘치료’는 우주와 교통하는 듯한 신성한 체험의 행운을 빼앗는, 거대한 폭력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무의식의 통찰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되었음을 알았을 때의 걷잡을 수 없는 상실감. 그것이 그가 ‘치유’될 때마다 느끼는 고통이었다. 동료들이 그의 ‘명석한 판단력’이 돌아왔다고 안도할 때마다 내쉬는 스스로 ‘타락했다’고 느꼈다. 아직 완전히 정신분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그의 고백은 ‘부분적으로’ 무의식에 대한 빛나는 통찰을 담고 있었다. 그는 합리적 사고를 할 때, 우주와 개인과의 소통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했으며, 증세가 완화되는 것은 ‘강제된 합리성의 막간극’이라고도 했다.
   정신질환 자체는 고통스러웠지만 내쉬는 일상생활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정신활동을 하고 있다는 ‘향유’의 유혹을 버리기 힘들었다. 그 향락이 끝나는 것이 곧 ‘치유’였기에, 그는 정상으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안의 신비한 기운, 고차원적인 사고 능력이 박탈되었다고 느꼈던 것이다. 게다가 정신의학이 아직 고도로 발달되기 전의 미국 주립정신병원은 거의 ‘모든 검증되지 않은 치료법의 실험실’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내쉬 또한 스스로를 끔찍한 실험대상 중의 하나라고 느낄 만했다. 위험천만한 인슐린 요법과 전기 치료는 그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모멸감과 수치심을 남겼다. 증세가 잠시 호전될 때마다 내쉬는 ‘아름다운 망상’ 대신 ‘참담한 삶’과 마주해야 했다. 그는 투약을 거부했으며 ‘왜 약을 먹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대답했다. 약을 먹으면 내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내쉬의 고통을 바라보는 또 다른 고통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해 떠나간 아내 앨리샤. 그녀가 오랜 방황 끝에 다시 내쉬에게로 돌아온 것이 결정적인, 진정한 ‘치유’의 시작이었다. 발병 이후 거의 20년 만에 내쉬는 그토록 원하던 자유와 안전과 우정을 되찾게 되었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그를 또다시 입원시키려 하자 겁에 질린 내쉬는 이혼한 전처 앨리샤에게 구원요청을 했던 것이다. 앨리샤는 내쉬와 헤어진 이후 스스로도 심각한 우울증을 앓으며 ‘공격적인 치료’가 진정한 치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앨리샤는 지난 날 여러 차례 그를 강제 입원시켰던 것은 그의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앨리샤는 오갈 데 없는 전남편을, 한때 천재로 명성을 날렸으나 이제 변변한 직업도 없이 옛 친구들의 도움에 의지해 살아가는 그를, 다시 받아들이기로 한다. 고통을 배제하려고 몸부림칠수록 고통의 늪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그녀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고통으로부터 한사코 도망치다 고통의 올가미에 사로잡히느니 차라리 당당하게 고통과 더불어 살기로 마음먹는다. 태연하게 고통과 동거하기 시작하자 고통은 더 이상 예전의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하지 못했다. 30년 이상의 고통스런 견딤의 시간이 지난 후 앨리샤는 내쉬가 치료된 원인을 이렇게 멋지게 해석했다. 그래요. 내 남편은 정신분열증을 앓다가 치유되었지요. 회복의 원인은 구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고요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뿐입니다. 

   물론 그 고요한 삶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수많은 동료 수학자들의 우정과 아내의 사랑, 그리고 빛나는 지적 성찰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내쉬 스스로의 노력이었다. 이례적으로 수학자에게 노벨경제학상이 돌아갔을 때, ‘정신병자에게 노벨상을 줄 수는 없다’는 편견을 관철한 반대파도 존재했으며, 설사 그에게 노벨상을 준다할지라도 ‘그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과연 내쉬가 감당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들도 있었다. 내쉬의 평전인 <뷰티풀 마인드>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영화로 각색될 때 명장면으로 꼽힌 ‘만년필 세러모니’. 이 장면은 내쉬를 둘러싼 동료들의 우정을 형상화한 멋진 알레고리다. 존경하는 학자에게 자신이 늘 쓰는 만년필을 헌정하는 아름다운 세러모니. 그것은 실제 존 내쉬의 재능을 아끼고 그를 포기하지 않았던, 그가 아무리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려고 몸부림쳐도 끊임없이 미국 대학에 일자리를 주선하고 병원비를 모금해주었던 수많은 동료들의 우정과 기대를 압축한 상징적 장면이 아닐까.

   실제로 노벨상 수상보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내쉬가 그 화려한 월계관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전집조차 출간을 거부한 채, 과거의 성공을 뛰어넘는 ‘미래의 저작’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집을 발간한다는 것은 곧 ‘평생의 연구가 완료되었음’을 인정하는 꼴이기에, 자신의 마지막 가능성을 열어놓고 싶다는 간절한 의지였던 것이다. 내쉬는 자신의 최고의 작업이 20대에 이미 완성한 게임이론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는 나날 동안’ 만들어질 미지의 작업이 되기를 바랐다. 물론 그의 병이 언제 다시 재발할지도 모르고, 그가 평생 게임이론을 뛰어넘는 연구를 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노벨상을 받은 천재 수학자의 드라마틱한 삶’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조용히 지속되는 학자의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이 정신분열증 환자와 의사들에게 ‘희망의 상징’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희망에 부응하는 달콤한 대답을 준비하진 않았다. 그는 자신의 노벨상이 ‘발병 이전의 성과’가 아니라 ‘발병 이후, 병을 극복한 후 낸 성과’였다면 훨씬 감동적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정신과의사들을 향한 강연에서 내쉬는 이렇게 말한다.

   
 

비합리적이었다가 합리성을 회복한다는 것, 정상적인 삶을 회복한다는 것, 그것은 멋진 일입니다. (……) 그러나 그것은 그리 멋진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환자 중에 화가가 있다고 칩시다. 그는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고 칩시다. 그는 정상적으로 활동합니다. 그것이 진정 치료가 된 것입니까? 그게 정말 구원입니까? 나 또한 모범적인 회복 사례일 수가 없다고 봅니다. 내가 앞으로 훌륭한 연구를 해내지 못한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아쉬워하는 듯, 거의 들리지 않는 낮은 음성으로 덧붙였다.) 내가 좀 늙었기는 하지만.  


 - 실비아 네이사, <뷰티풀 마인드>, 707쪽.

 
   
   융은 무의식의 속삭임에 한껏 귀 기울이면서도 현실에 발 딛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에게 ‘이승의 발판’은 가족과 직업이었다. 의사 면허를 가지고 환자를 도와주어야 하고, 다섯 아이의 아버지와 한 여자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그가 내면세계의 목소리에 완전히 점령당하지 않을 수 있는, 소중한 일상의 무게중심이었다. 그러나 ‘일상의 중심’과 ‘세속적 열망’은 구분되어야 했다. 그는 무의식의 탐험을 좀더 적극적으로 감행해야 한다는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학문적 출세의 길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교수직을 버린다는 것은 융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자신의 숙명에 분노하기도 했고, 상식적인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평생에 걸친 ‘마음 만지기’ 끝에 무의식에 대한 어떤 믿음에 다다른다. 우리 안의 내적 인격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말하는지 진심으로 귀를 기울인다면 마음의 고통은 사라진다고. 그는 열정과 분노에 몸이 달아오르다가도 조금만 흥분을 가라앉히면 자기 안의 ‘우주적인 고요’가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세속적 열망을 되는 대로 다 추구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때부터 만다라 그림을 연구하고 연금술과 신화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며 아프리카 탐험까지 감행하여 ‘개인의 무의식’을 넘어 ‘인류의 집단 무의식’을 탐구하는 기나긴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물론 생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때마다 가뿐하게 ‘어린이 되기’ 하는 내면의 통과의례도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시간이 곧 어린이임을, 어린이처럼 놀며 주사위를 던지고 체스를 두는 것이 바로 시간임을 깨닫는다. 그는 어린이의 놀이에 몸을 맡겨 ‘아직 아무 것도 아니었기에 그 무엇도 될 수 있었던 자신의 무한한 잠재성’을 발견한다.  

   
 

나는 고아, 혼자다. 그런데도 어디서나 발견된다. 나는 하나의 존재, 그러나 나 자신과 대립하는 존재다. 나는 젊은이인 동시에 노인이다. 나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른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나를 물고기처럼 깊은 곳에서 끄집어 올려야만 하므로. 아니면 하얀 돌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므로. 숲과 산에서 나는 두루 쏘다니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다. 나는 누구를 위해서도 죽지만 시간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408쪽. 

 
   
   융은 프로이트라는 거대한 스승이자 아버지이자 동료를 잃음으로써 세상 전체가 자신을 향해 등을 돌린 듯한 뼈아픈 고독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는 무의식과의 날카로운 조우를 통해, 말하자면 45년 이상의 학위도 수업도 스승도 교과서도 없는 처절한 독학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자신의 무의식을 ‘스승’으로 삼았다. 내쉬 또한 고통스러운 증상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결국 자신의 통제되지 않는 영혼의 불수의근, 즉 무의식을 자신의 진정한 스승으로 삼았다. 그들은 이 세상 모두가 자신에게 등을 돌려도, 끝내 살아남는 내 안의 스승, 내 안의 친구, 내 안의 연인이 있음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성은 소중한 선물이다. 그러나 이성은 러닝머신처럼 이미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이미 알고 있는 삶만을 살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의식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으며 살아가고 있다. 믿어지지 않는 사랑에 빠질 때,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될 때,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만들어낼 때, 영혼의 마지막 기름까지 쥐어짜내어 감동적인 연애편지를 쓸 때, 사랑하는 사람의 신변에 생길 위협을 미리 감지할 때, 왠지 이곳에서는 멋진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으로 이사를 할 때, 우리는 무한리필되는 무의식의 연료를 자신도 모르게 마음껏 활용한다. 우리의 영혼은 저마다 아직 알지 못하는 아름다운 노래 가사이며, 아직 지어지지 않은 아름다운 시이며, 아직 그려지지 않은 멋진 그림이며, 아직 인간의 발자국이 닿지 않은 미지의 우주 공간이며, 아직 시작되지 않은 세기의 로맨스인 것이다.    
   
 

무의식의 깊은 곳으로 가는 불확실한 길에 자신을 맡기는 일은 위험한 실험이나 수상한 모험으로까지 여겨진다. 그것은 오류와 불확실의 길, 그리고 오해의 길이라고 간주된다. 나는 괴테의 다음과 같은 말을 생각한다. “외람되게도 저 문을 열어젖혀라. 사람마다 통과하기를 주저하는 저 문을…….” <파우스트> 제2부는 문학적 시도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철학적 연금술과 그노시스파 사상에서 시작하여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에까지 이어지는 ‘황금사슬’의 한 고리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34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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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09-10-05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굿 바이 뷰티풀 마인드??? 무한리필되는 여울님의 수다가 기대됩니다^^*

amant 2009-10-05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직 떠나지 못한 여행, 아직 펼쳐보지 못한 꿈, 아직 사랑받지 못한 연인, 아직 먹어보지 못한 최고의 음식....아, 마구 떠오릅니다. ㅋㅎㅎ

love hurts 2009-10-06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외람되게도 저 문을 열어젖히라, 사람마다 통과하기를 주저하는 저 문을...멋진 문장입니다. 아마도 그 문은 못견디게 궁금하면서도 겁이 나서 열어볼 수 없는, 무의식이라는 이름의 판도라 상자겠지요?ㅋㅋ
 

 


영화 <뷰티풀 마인드>와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⑨

 

9. 무의식을 제압하려는 의식 vs 의식의 보호관찰을 거부하는 무의식 (2)

   
 

어느 랍비에 관한 오래된 훌륭한 이야기가 있다. 그의 제자가 와서 이렇게 물었다. “옛날에는 하느님을 대면하여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왜 그렇지 못합니까?” 랍비가 대답했다. “오늘날에는 그럴 정도로 허리를 깊이 굽힐 줄 아는 사람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623쪽.

 
   

   비밀로 인해 전전긍긍하느라 황폐해지는 영혼이 있다면, 비밀로 인해 더욱 풍요로워지는 영혼이 있다. 내쉬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무의식으로부터 끊임없이 도피했다면, 융은 무의식조차 자신의 ‘응원군’으로 삼았다. 무의식의 선연한 존재를 좀더 일찍 ‘의식’의 수면 위로 끌어올렸던 융은 무의식의 폭발적인 잠재력을 예감했다. 그는 부모에게도 친구에게도 스승에게도 좀처럼 이해받지 못한 어린 시절부터 이미 무의식의 ‘또 다른 자아’를 양육하기 시작했다. 일곱 살에서 아홉 살 사이에 이미 ‘나 자신과의 불화’와 ‘거대한 세계 속에서의 불확실성’을 느꼈다고 하니, 이 아이는 조숙하다 못해 조로했던 셈이다. 

   초등학교 시절 융은 프록코트와 높은 모자에 광택 나는 검정 구두를 신은 길이 6센티미터 정도의 남자 인형을 만들었다. 인형을 잉크로 까맣게 칠하고 필통을 ‘인형의 집’으로 삼았으며 인형 침대까지 만들었다. 인형 옆에는 라인강에서 주워온 매끄러운 검은 돌을 놓아두었다. 소년 융은 앙큼하게도 자기만의 비밀스러운 세계를 준비했는데, 말하자면 ‘제1의 인격’이 위로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제2의 인격’이 남몰래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만든 셈이었다. 그 인형이 ‘출입 금지’되어 있는 다락방,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져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는 고독하고 침울해질 때마다 그 인형과 매끄러운 돌을 생각했다.
    ‘현실 속의 나’는 상처받고 아파해도 그의 분신이었던 까만 인형은 든든하게 늘 그 자리에 있어준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그에게 인형과 만나는 일, 인형이 잘 있을 거라고 상상하는 일, 인형의 집을 관리하는 일은 아직은 잘 알지 못하는 무의식의 자아를 돌보고 가꾸는 ‘혼자만의 제의적 행위’였다. 엄격한 목사였던 융의 아버지가 만약 이 일을 알았다면 노발대발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 아이의 인형 놀이는 다분히 밀교적이며 신비주의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 있으니 말이다. 

   
 

나는 어떤 사람도 그 필통을 거기서 발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아무도 나의 비밀을 발견하여 망가뜨릴 수 없었다. 나는 안정감을 갖게 되었고 나 자신과의 불화로 인한 괴로운 감정은 사라졌다. (……) 나는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 때만, 보통 일주일 간격으로 종종 몰래 꼭대기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 나는 미리 어떤 글을 써놓은 작은 종이 두루마리를 필통 속에 넣었다. 그 글은 내가 고안해낸 비밀 문자로 학교 수업시간에 적어둔 것이었다. 그것은 작은 종잇조각이었는데, 빽빽하게 글을 써서는 돌돌 말아서 그 남자 인형이 보관하고 있도록 그에게 전달되었다. 새로운 종이 두루마리 하나를 보탠다는 것은 항상 엄숙한 의식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기억된다. 


 - 칼 융, 조성기 역,<기억, 꿈, 사상>, 김영사, 49쪽.

 
   

  소년 융은 ‘비밀 문자’까지 만들어 자신의 소중한 메시지를 인형이 보관할 수 있도록 하는 의식을 치르며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까만 인형은 그에게 있어 ‘무의식의 도서관’을 관리하는 사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알지 못하며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그 무언가를 소유했다는 데서 오는 자신감과 충만함으로 소년 융은 행복했다. 융의 자신감의 원천이 바로 그 비밀 도서관, 즉 무의식의 각종 정보들로 가득 찬 데이터베이스에서 비롯된 셈이다. 까만 인형은 무의식의 비밀을 물질적으로 형상화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던 셈이다.   


   융에게 무의식은 기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조금씩 친밀해져야 할 내 안의 또 다른 나였다. 그 까만 인형은 자기 내부의 분열된 자아를 물질화하고 그리하여 그것을 의식의 장에서 시각화하는 행위였다. 융은 해결되지 않은 무의식, 재활용조차 불가능해 보이는 버려진 무의식에 불현듯 역습을 당한 내쉬와 달리,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보이지 않는 칸막이를 천천히 닦아내어 조금씩 투명해진 칸막이 너머로 보이는 무의식의 무늬를 관찰했다.
   게다가 존 내쉬가 초기에 입원했던 미국의 정신병원은 환자를 ‘정상인’과 ‘비정상인’으로 구분하여 ‘정상적인 자아’를 되찾게 하는 모범적인 진료방식을 추구했으므로 무의식에서 긍정적 잠재력을 읽어내려는 탐험 따위는 가능하지 않았다. 융은 무의식의 요소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으려 했다. 말하자면 융은 좀더 고상한 무의식, 좀더 천박한 무의식, 좀더 추악한 무의식, 좀더 아리따운 무의식 사이의 차별이 아니라, 무의식의 총천연색 별들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성좌’를 해독해내는 데 관심이 있었다.

   융은 그리하여 카오스로 가득한, 때로는 부끄럽고 경박하며 대면하기도 싫은 무의식마저 자신의 존재를 응원해주는 ‘원군’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존 내쉬에게 무의식의 역습이 그가 억압했던 존재들의 때늦은 복수처럼 공포로 다가왔다면, 융의 무의식은 의식의 보살핌과 비호 아래 매번 더 활성화되는 존재의 무한한 잠재성이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글이 ‘무의식이 구술하는 메시지를 의식이 그저 조용히 받아 적은 결과물’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싸워야 할 대상은 자신의 무의식이 아니라, 누구도 들으려하지 않고 궁금해 하지도 않는 것을 혼자 끊임없이 말해야 한다는 고독이었다. 스스로에게는 너무나 가치 있는 메시지가 타인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여겨질 때, 그 고독은 말할 수 없이 무겁게 느껴진다. 하지만 융은 ‘고독의 창조성’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었다. 

   
 

나의 고독은 어릴 적 꿈의 체험과 함께 시작되었고, 내가 무의식에 대한 연구를 할 시기에 최고조에 달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게 되면 그는 고독해진다. 하지만 고독은 반드시 공동체에 대립하는 것만은 아니다. 고독한 사람보다 공동체에 대해 더 호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모든 개체가 자신의 개성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과 동일시되지 않는 곳에서만 만개하게 된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624~625쪽. 

 
   
   
 

나의 모든 저술은 말하자면 내부로부터 부과된 과제인 셈이다. 그것은 숙명적인 강요로 이루어졌다. 내가 쓴 것은 내부로부터 나에게 엄습해온 것들이다. 나는 나를 충동질하는 영혼으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허용했다. 나는 나의 저술에 대해서 어떤 뜨거운 공감을 기대한 적이 없다. (……) 나는 누구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들을 말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특히 연구 초기에는 완전히 외톨이가 된 느낌을 자주 받았다. 나는 사람들이 싫어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3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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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슨 2009-10-01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꼬마 융의 비밀 인형 놀이, 완전 귀여운데요^^ 약간 으스스하면서도 침울한 천재 소년의 얼굴이 상상 됩니다.ㅋㅋ

amas 2009-10-02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고독은 공동체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멋진 고독이 보장되는 곳이 자유로운 공동체가 태어나는 조건이라는 것~! 어쩌면 천재는 '머리가 좋은 것'이 아니라 한없이 고독한 상태를 즐길 수 있는 사람들, 그 고독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된 사람인 것 같아요.
 

 


영화 <뷰티풀 마인드>와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⑧

 

8. 무의식을 제압하려는 의식 vs 의식의 보호관찰을 거부하는 무의식 (1)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봤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볼 것이기 때문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을 넘어서> 중에서

 정말 참다운 진실은 우리가 악의 상상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악의 상상이 우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칼 융, <기억, 꿈, 사상> 중에서

 
   

   어쩌면 해답은 존 내쉬가 ‘움켜쥔’ 것이 아니라 그가 ‘버린’ 것들에 있었다. 영화에서는 그가 정신분열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지나치게 과감히 생략되어 있다. 2시간여의 러닝타임 안에 한 인간의 모든 것을 구겨 넣을 순 없겠지만, 이 ‘생략’에는 어떤 의도적 배제와 은폐의 냄새가 난다. 헐리우드식 감동의 영웅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서 삭제된 부분들은 존 내쉬의 인생을 뒤흔든 치명적인 대목들이다.
    영화에서 생략된 존 내쉬의 결정적인 라이프 스토리는 그가 자신의 첫번째 아들을 사생아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 동성애가 발각되어 랜드 코퍼레이션에서 추방되었다는 것(당시 미국 사회에서 동성애는 심각한 금기사항이었다), 아버지께 사생아의 존재를 숨기다 발각되어 ‘당장 그 여자와 결혼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무시하고 지내다가 아버지의 임종마저 지키지 못했다는 것,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은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수많은 동료가 몰락하는 것을 지켜봤다는 것, 한국전쟁 당시 징병을 피하기 위해 갖은 술수를 동원했다는 것 등이다. 이 모든 일련의 사건들은 존 내쉬의 인생을 뒤흔든 중요한 사실들이었으며, 동시에 존 내쉬가 철저히 ‘외면한’ 삶의 진실들이었다. 

   젊은 시절 내쉬는 자신이 ‘천재’라는 점만으로 스스로의 모든 결점을 보상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기이한 행동과 무책임한 태도가 스스로의 천재성을 미학적으로 완성해준다고 믿었다. 천재에게는 지극히 유연한 ‘똘레랑스’를 발휘하던 미국대학의 상아탑 속에서 그의 믿음은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그의 천재성으로 인해 모든 괴상한 행동이 용납되던 랜드 코퍼레이션에서 해고된 사건은 그에게 지울 수 없는 충격을 안겨주었다. 랜드에서 내쉬는 미 공군 비밀취급 인가를 받았고 군사기밀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내쉬에게 엄청난 자부심의 근거가 되고 있었다.
   어이없게도 당시 미국 사회에서는 동성애 혐의자(?)의 비밀취급 인가를 금지하고 있었다. ‘각종 범죄행위’와 ‘동성애’는 동급으로 취급되었고 동성애자를 색출(!)하기 위해 산타모니카 경찰서는 은밀히 함정 단속을 할 정도였다. ‘유인책 경찰’을 써서 공중 화장실로 들어가는 남자를 쫓아가 유혹한 후 그 남자가 응낙하면 두번째 경찰이 들이닥쳐 그를 체포하는 식이었다. 내쉬는 바로 그 산타모니카 경찰들에게 동성애성향을 발각당한다. 그는 ‘공개적 외설죄’로 기소되었다. 내쉬에게 그 ‘발각’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해고’였다. 그는 인생 전체를 통틀어 그 누구에게도 ‘배제’되거나 ‘외면’당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남성들과의 친밀한 유대를 중시했고 우정과 사랑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모호한 상태를 즐긴 적도 많았다. 그러한 개인적 취향 때문에 자신의 일자리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그의 ‘작고 완전하고 그리하여 안전하던 세계’가 파열되는 첫번째 징후였다. 그는 부모님께 이 사실을 숨겼고 매카시즘의 광풍에 희생당한 MIT 동료의 핑계를 대며 모두가 그 친구 탓이며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다고 둘러댔다. 내쉬의 체포 소식은 프린스턴과 MIT를 비롯해 수학계 전체의 이슈가 되었고, 동성애에 대한 정부의 가혹한 처사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없었다. 매카시즘의 열풍으로 이미 수많은 사람이 희생당한 직후이기에 ‘호모 공포증’ 또한 널리 퍼져 있었다. ‘정상적인’ 사회의 협박에 불응하는 순간 곧바로 사회적 삶이 끝장난다는 사실을 잔인하게 가르쳐준 것이 바로 매카시즘이었던 것이다. 이 체포와 해고의 충격은 시간이 가면서 점점 치명적인 ‘증상’으로 나타나 내쉬의 인생에 심각한 균열을 일으키게 된다. 체포와 해고라는 인생 초유의 사건은 내쉬가 발병하기 4년 전에 일어났다. 

   
 

내쉬가 겉보기에는 상처받지 않은 것 같지만, 체포 건은 인생의 한 전환점이 되었다. 내쉬는 흔히 초연하고, 야심만만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주 무관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외톨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관용적인 상아탑 속에서 살면서, 그는 원하는 대로 뭐든 할 수 있다고 믿도록 길들어져 왔다. 그러나 이제 그는 아주 가혹한 방식으로 한 가지 교훈을 얻게 되었다. 그가 추구한 정서적 유대 관계는 그가 소중하게 여긴 다른 모든 것을 파괴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 그의 자유, 그의 경력, 그의 명성, 사회적 성공 등 모든 것을. (……) 단 한 차례의 트라우마보다, 유년과 청소년 시절을 거치며 누적된 사건들이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속담처럼 커다란 긴장을 낳는다. (……) 내쉬가 유년과 청소년 시절에 당했던 괴롭힘과 놀림이 그러했듯, 그 체포의 상처도 시간이 가면서 점점 뚜렷하게 드러났다. 


 - 실비아 네이사, <뷰티풀 마인드>, 승산, 2002, 341쪽. 

 
   

   그의 천재성은 그의 모든 인간적 결점을 은폐하고 사회의 질책으로부터 그의 존재를 보호해주는 심리적 쿠션이었다. 그러나 그가 추구했던 남성들과의 ‘특별한 친밀감’은 그가 지금까지 일구어온 모든 업적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매카시즘과 호모포비아가 결합한 미국 사회의 폐쇄성은 ‘천재를 향한 무한한 관용’조차 무너뜨리는 치명적인 배제의 논리를 구성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가 오랫동안 숨겨오던 내연 관계가 가족들에게 들통나고 그의 연인 엘리너가 낳은 아들 존 데이빗 스티어의 존재가 부모님에게 발각된다. 스캔들을 병적으로 싫어했던 존 내쉬의 아버지는 엘리너와의 결혼을 명령했고 내쉬는 그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그에겐 이미 또 다른 연인 앨리샤가 생겼고 은밀하게 만나는 ‘남자 친구’ 브리커도 있었다. 두 여자와 한 남자 사이를 오가던 내쉬는, 아들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아들의 양육비는 지급할 수 없다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엘리너는 양육비만이라도 지급할 것을 요구했지만, 내쉬는 결혼은 못하겠으니 자기 아들을 ‘입양하자’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여 엘리너를 기함시켰다. 급기야 엘리너가 앨리샤와 함께 있는 내쉬의 모습을 발견하여 ‘엘리너 vs 엘리샤’의 대격돌이 벌어지자 내쉬는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완벽한 내 작은 세계가 파괴됐어. 완벽한 내 작은 세계가 파괴됐어.” 

   그 와중에 내쉬의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전화가 없는 내쉬는 그 소식을 뒤늦게야 접하고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 드리지 못한다. 아들이 아버지가 될 준비가 되었을 때 떠나는 아버지는 없다. 모든 아버지들은 그렇게 불현듯 아들을 떠난다. 남겨진 아들에게 가족들을 떠맡긴 채, 아들에게 제2의 아버지가 될 것을 말없이 요구하며. 그의 작고 안전한 세계가 파열되는 순간 ‘아버지’라는 존재의 토대마저 사라지자 그는 급격한 공포와 불안을 경험한다. 영화는 존 내쉬의 인생을 미화하기 위해 그의 고뇌와 분열의 계기를 첨삭하거나 윤색했다. 그러나 영화가 삭제해버린 내쉬의 각종 실패와 실수야말로 내쉬의 분열증을 격화시킨 것이었고 내쉬의 내쉬다움을 만들어간 것이었으며 ‘작고 완벽한 나만의 세계’가 감당할 수 없는 ‘파도와 해일이 몰아치는 진짜 세상’을 깨닫게 한 사건들이었다. 
 

   게다가 랜드에서 해고된 이후 격추된 그의 사회적 위상은 그에게 심각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원했던, 이미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던 ‘필즈 상(수학계의 노벨상)’을 받지 못하자 그의 좌절감은 더욱 깊어진다. 그는 너무 빨리 성공했기에 가장 시간에 쫓기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그토록 원했던 모든 것을 이루지 못했다. 하버드나 프린스턴의 교수직도 얻지 못했고 MIT에서도 평판이 안 좋았기 때문에 종신 교수직을 얻지 못했으며 주식투자에서까지 참담한 실패를 맛본다. 서른 살이 되면서 내쉬는 심각한 인지적 불협화음을 겪게 된다. 당시 그의 행동들은 마치 ‘내가 하나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없는 이 세계는 거짓 세계다. 나는 당신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위대한 미션을 떠맡은 신의 사도다’라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  

   
 

그는 <뉴욕타임즈> 1면 왼쪽 상단의 기사를 가리키며, 말하기 시작했다. 외계에서 온 불가사의한 권력자들이 <뉴욕타임즈>를 통해 자기와 교신을 하고 있다. 그 메시지는 오로지 자기만 보라는 것이기 때문에 암호화되어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 메시지를 해독할 수 없다. 오직 자기만이 이 세계의 비밀을 공유하도록 허락되었다.  (……) 내쉬는 MIT 캠퍼스에서 빨간 넥타이를 맨 남자들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 남자들은 자기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 빨간 넥타이를 맨 남자들은 모두 일정한 패턴을 지녔으며, 또한 비밀 공산당과도 관련이 있다.
 (……) 수학과 우편함에는 이상한 편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 그것은 각국 대사들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발신인은 존 내쉬였다. (……) 편지 가운데 주소가 적히지 않은 것도 있었고, 대부분 우표가 붙어 있지 않았다. (……) 내쉬가 세계 정부를 구성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세계정부 구성위원회는 내쉬를 비롯해 수학과의 동료들과 여러 학생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 앨버트는 내쉬에게서 아주 이상한 편지를 받았다. 시카고 대학의 교수직 제의를 거부한다며, 친절한 제의는 고맙지만, 곧 남극의 황제로 부임할 예정이기 때문에 사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 실비아 네이사, <뷰티풀 마인드>, 승산, 2002, 448~4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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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9-30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세계가 깨어지는 순간이 있죠ㅋ 자신의 세계가 깨어져야 진짜 세계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이제 내쉬는 한층 성숙해지겠군요

eva 2009-10-01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무 빨리 성공한 사람이 가장 시간에 쫓긴다, 정말 맞는 말인 듯. 매번 자기 자신을 넘어서야 한다는 부담때문에 그렇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