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본 아이덴티티>와 미셸 푸코 ②

   


2.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있는 길이 없다!

   
 

내가 누구냐고 묻지도 말고, 또 내가 변함없이 그대로 있기를 바라지도 말라. 우리의 서류가 제대로 갖추어졌는지, 그런 것들은 관료와 경찰들에게 맡겨두라. 


 - 미셸 푸코

 
   

    기억상실증으로 고생하는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영화들을 보면 우리는 이 사회 곳곳에서 ‘도대체 넌 누구냐’라고 묻는 곳이 저토록 많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우선 ‘이름’이다. 사람들은 낯선 타인을 만났을 때 일단 타인의 ‘이름’을 먼저 알아두어야 마음이 편해진다.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실질적인 정보’가 아무 것도 없는데도, 그저 대충 임의로 지어서 불러도 그만인 ‘이름’을 알면 그에 대해 가장 중요한 것을 알았다는 듯 뿌듯함을 느낀다.
    이름은 타인을 우리 두뇌 속의 ‘지인 목록’에 올리기 위한 첫번째 구성 항목이다. ‘호명’을 함으로써 타인을 분석하고 때로는 지배하고 싶은 욕구를 숨기지 않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국가’다. 국가가 증명하는 개인의 정체성을 기록한 ‘여권’ 없이는 우리는 국가의 바깥 그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다. 국가는 개개인의 이름과 생년월일, 태어난 장소 등의 ‘기본적인’ 정보를 통해 개인의 정보를 목록화하고 만약 그러한 정보가 국가의 정보망에 ‘기재’되지 않는다면 멀쩡히 살아 있는 한 사람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 되어버린다. 주민등록만 말소시키면 개인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때 정체성을 기재한 엄중한 ‘기록’들은 역설적으로 개개인의 생생한 실체를 ‘부정’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하는 것이다. 지중해 한 가운데서 등에 총상을 입은 채 표류하고 있던 이 이름 없는 사내가 의식을 되찾은 순간. 그가 맞닥뜨린 것은 낯선 어부가 발견한 난데없는 스위스 은행의 계좌번호다. 표류하고 있던 사내를 구해준 이탈리아 어부는 그의 몸속에서 작은 기계장치를 꺼내고 그것을 벽에 비추자 스위스 은행의 계좌번호가 나타난 것이다. “000-7-17-12-0-14-26. 게마인샤프트 은행, 취리히. 보시오, 은행 계좌 번호요. 이게 왜 당신 엉덩이에 있었던 거요?” 그는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고 단지 등에 입은 총상과 엉덩이 속에 들어 있었다는 이 계좌번호만이 그가 살아온 ‘흔적’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사내는 어부들의 일을 도와주며 시간이 날 때마다 기억을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해보지만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다. “읽는 것도 쓰는 것도, 덧셈 뺄셈도 할 수 있고 커피도 탈 수 있고요. 카드놀이도, 체스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기억이 전혀 없어요, 젠장! 그게 문제라고요!” 그는 자신을 구해준 어부에게 고민을 토로하고, 어부는 곧 기억이 돌아올 것이라 위로하지만 ‘사내’의 상태는 절망적이다. “벌써 2주일째에요. 소용없어요. 뭘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기억이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내일이면 항구에 도착할 텐데, 난 아직 내 이름도 몰라요.” 항구에 도착할 시간이 다가오자 사내를 도와준 어부는 차비를 쥐어주며 말한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스위스까지 갈 수는 있을 거야.”

   그는 혈혈단신,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스위스에 도착한다. 막상 스위스에 도착했지만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다. 그는 마땅히 머물 곳도 돈도 없어 공원 벤치에서 노숙하려다가 경찰을 만난다. 경찰이 ‘신분증’을 요구하자 그는 신분증을 잃어버렸다고, 잔뜩 풀 죽은 목소리로 쭈뼛쭈뼛 말한다. 그 순간 경찰이 몸을 수색하려 하자 사내는 자기도 모르게 엄청난 속도로 경찰 두 명을 때려눕히고 어느새 경찰의 ‘총’을 빼앗아 쥐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그의 의식은 이러한 ‘판단’을 내리지 않았지만 그의 ‘신체’가 의식보다 먼저 반응하여 경찰들을 일거에 제압해버린 것이다. 도대체 내 몸 어디에서 이토록 전광석화 같은 액션이 흘러나오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자신이 사람 둘을 순식간에 쓰러뜨린 사실 자체에 놀라, 무엇보다도 자신이 자신도 모르게 경찰의 ‘총’을 빼앗았다는 사실에 놀라, 불에 덴 듯 엉겁결에 총을 내버리고 줄행랑을 치는 ‘사내’.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실제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의 무기는 ‘몸’이었다. 우리 몸에는 우리 자신이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방대한 정체성의 코드가 입력되어 있다. 아직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사내의 정체성도, 그가 살아온 흔적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단서도 ‘몸’이다. 그는 단지 ‘이름과 인적 사항’만 모를 뿐 그의 몸은 그의 삶을 구성하는 결정적인 단서들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의식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의 몸은 충분히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진짜 중요한 정보는 ‘내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아닐까. 언제든 자유롭게 편집되고 가공되고 재해석되는 ‘기억’보다 더 선명하게 우리의 삶을 증언하는 것은 우리의 ‘행동’이니까. 우리의 기억보다 우리를 더 정직하게 비추는 거울은 우리가 지금-여기서 창조하고 있는 바로 이 ‘행동’이니까. 

   
 

 고백해야 한다는 의무가 이제…… 우리들 속에 너무나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어서,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우리를 구속하는 권력의 효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미셸 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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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09-11-12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몸이 말한다. 공부=쿵푸^^*
 


 


영화 <본 아이덴티티>와 미셸 푸코 ①

   


1. ‘나’를 나이게 만드는 것들은, 정말 나다운 것인가

   
 

죄수의 첫번째 의무는 탈옥이다
 

 - 미셸 푸코

 
   
   
 

 내가 어떻게 너를 잊을 수 있겠어? 넌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람인데……
  

- 제이슨 본(맷 데이먼), <본 아이덴티티> 중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무엇인가. 가족, 국적, 모국어, 학력, 직업, 재산……. 이런 것들 중에 나의 나다움을 진정으로 결정하는 요소들은 얼마나 될까. 그런데 분명한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우리 스스로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우리의 정체성을 ‘이용하는’ 세력들은 넘쳐난다는 것이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타인의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하는가 하면, 각종 스팸메일과 스팸메시지를 보내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남의 번호를 알았는지 천연덕스레 ‘지인’ 행세를 한다. 아직 우리의 온몸에 바코드가 새겨지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개인의 정보를 유출시킬 빌미를 이 세상에 너무 많이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신용카드, 주민등록증, 현금인출카드, 운전면허증. 이러한 극히 일상화된 ‘신분 증명’이야말로 우리의 정체성을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버젓이 노출하는 절호의 미끼가 된다. 

 

   미셸 푸코는 현대인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통제하는 사회의 규율 권력을 탐구했다. 말하자면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들에 대한 계보학적인 탐구, 나아가 나를 진정한 나이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과의 전투가 그의 학문적 실천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인간 주체가 ‘자기 자신’을 합리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를 비롯한 서구적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었다. 이성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출발했다. 자기 자신을 이성의 힘으로 인식 가능하다는 확신이 서구적 근대의 기원이기도 했다. 미셸 푸코는 바로 이 근대성의 탄생 지점을 공략하여 그 확실성을 뿌리부터 뒤흔들었다. 그의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 어떤 형태의 합리성과 역사적 조건을 통해서 인간 주체는 그 자신을 지식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는가? 그리고 궁극적으로 어떤 대가를 치렀는가? 이것이 나의 질문이다. 주체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 주체에 대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인가?
 

 - 푸코, <텔로스>에서의 인터뷰 중에서

 
   

   주체는 과연 어떤 대가를 치르고 주체에 대한 진실을 말할 수 있는가. 이 뼈아픈 질문에 가장 잘 어울리는 영화 중 하나가 <본 아이덴티티>, <본 슈프리머시>, <본 얼티메이텀> 시리즈이다. 일명 ‘본 시리즈’라고도 불리는 이 역작은 주인공이 ‘내가 누구였는가(Who was I?)’를 밝히기 위해 목숨을 걸고 지상 최대의 추격전을 벌이는 이야기다. 그는 자신에게 덧입혀진 정체성, 자신의 기억에도 없지만 자신을 규정하는 강요된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주체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잃는 뼈아픈 대가를 지불하고 ‘나는 누구인가’를 간신히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는 영화 속 주인공들을 보며 우리가 느끼는 것은 단지 뜨거운 연민이 아니라 그들보다 더 갇혀 있는 것 같은 우리의 삶이다. 나를 나이게 하는 것들이 저토록 간단히 말소될 수 있는 것이라면(기억상실증), 나를 나이게 만드는 정체성을 저토록 간단히 위조할 수 있는 것이라면(한 사람을 잔혹한 인간병기로 만드는 CIA처럼), 우리가 이토록 필사적으로 움켜쥐고 살아가는 ‘나’라는 경계는 얼마나 대책  없이 허약한 것인가.
   그 허약한 정체성의 표지들을 한 톨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이토록 하루하루 굴욕을 참아야 하는 것인가. 아직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한 사내는 낯선 바다 위를 표류하며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찾아내야 한다. 게다가 나를 죽이려 하는 자들을 통해서만 나의 정체성을 증명할 수 있다니. 이 끔찍한 역설을 우리의 ‘이름 없는 사내’는 어떻게 뚫고 나갈 것인가. 

   
 

나의 목적은 그 어떤 목적론도 사전에 축소할 수 없는 불연속성 속에서 역사를 분석하려는 것이다. 그 어떤 초월적 구성도 주체의 형태를 강요하지 않는 익명성 속에서 역사를 전개하는 것이다. 그 어떤 새벽의 귀환도 약속하지 않는 시간성에다 역사를 개방하는 것이다. 나의 목적은 역사로부터 모든 초월적 나르시시즘을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 푸코, <지식의 고고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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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모 2009-11-11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우, 본 시리즈! 넘 멋진 영화죠. 죄수의 첫번째 의무는 탈옥이다! ^^

맨손체조 2009-11-11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와, 본 본 본... 007의 기름진 후까시를 한 방에 날려준 매력적인 본 본 본!!! 혹시 여울님은 맷 데이먼의 광팬? 맷 데이먼 주연의 영화를 두 개 씩이나^^*

illumiation 2009-11-11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시네필 다이어리~ 이젠 본 시리즈와 미셸 푸코의 커플 매니저를ㅋㅋ
 


 


영화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 ⑩

   


10. 몽상의 스트레칭, 이성의 근육 이완법

   
 

 우리가 어떤 사람을 바라보면, 그래서 그 사람이 누군가 자기를 보고 있다고 느끼게 되면, 그 사람의 시선은 자신을 바라보는 우리에게로 향하게 된다. 우리가 바라보는 어떤 대상에게 아우라를 느끼는 것은 결국 그 사물에 우리를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 벤야민, <보들레르에 대한 몇 가지 주석> 중에서 

 
   

    


   몽상의 세계는 의식에 발 딛고 무의식의 세계를 갈망한다는 점에서, 무의식의 환상을 체현하면서도 의식의 감각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예술가의 창조 작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화가가 자신의 몽상을 캔버스 위에 실현하는 순간, 그는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없는 존재로 흔들린다. 환상과 의식 사이, 존재와 부재 사이에서 예술가는 자신의 몽상을 특유의 손재주로 이 세상에 불러낸다.
   우리가 예술 작품에 감동하는 것은 예술가의 몽상이 불러일으키는 영혼의 에너지에 교감하기 때문이다. 바슐라르가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도 이러한 예술가의 몽상을 닮아 있다. 원령공주가 숲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들개의 등허리 위에서, 들개의 눈높이와 들개의 숨결로 숲을 바라보며, 자음과 모음으로 날카롭게 분절되지 않는 숲의 웅얼거림을 듣고, 고요한 숲의 말없는 시선을 느낀다. 

   인류학자 로렌 아이슬리 또한 바슐라르처럼 자연의 언어로, 자연의 시점으로 움직이는 세계의 숨결을 생생히 느꼈다. 그것은 감히 인간의 힘으로 지구를 보호할 수 있다는 오만이 아니라, 우리 부족, 우리 인류를 지키기 위해 지구라는 삶의 ‘배경’을 보존하려는 정착민의 욕망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더 커다란 그림, 우주라는 무한한 소실점을 향해 멀어지는 생의 순간을 포착하려는 열망이었다.
   로렌 아이슬리는 언젠가 인류가 사라진 도시에서도 새들이 고스란히 살아남아 ‘그들의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그는 ‘인간 중심의 1인칭’이 아니라 ‘생명의 다인칭(多人稱)’을 사유했다. 인류의 1인칭이 아니라 생명의 무인칭(無人稱)을, 신의 관점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인류의 부감샷이 아니라 핸드 헬드 카메라를 들고 뛰며 자연이 숨 쉬는 속도에 자신을 동화시키는 미메시스의 시점으로 세상을 보았던 것이다.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중심적 시점을 스스로 내려놓은 지금, 아시타카의 속내도 이렇지 않았을까.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동안, 아니 바라보지 않는 순간에도, 자연은 인간을 응시한다. 인간이 등산로에서 쓰레기를 몰래 버릴 때, 하천에 폐수를 방류할 때, 각종 벌레를 ‘해충’이라는 명목으로 짓밟아죽이고, 고속도로 위에서 야생동물을 ‘로드킬’로 만들 때……. 아무도 보지 않아도 가슴 한편이 서늘해 오는 그 감각은, 자연이 인간을 말없이 응시하는 그 시선을 느끼기 때문이 아닌가. 

 

 

 

   
 

요 몇 년간 때때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은 최후의 인간이 산으로 도망을 친 후에 뉴욕을 접수하게 될 새들의 모습일 거라고 생각하곤 한다. 물론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그 장면을 다시는 보지 못하겠지만, 나의 거처가 줄곧 높은 곳이어서 나는 새들이 어떤 소리로 노래 부를지 알며, 또한 그들이 우리 인간을 어떻게 주시하는지 알고 있다. 아무도 자기들 소리를 엿듣고 있지 않다고 여겨질 때, 참새들이 에어컨 바깥쪽을 톡톡 치는 소리에 나는 귀를 기울이곤 했다. 또한 나는 다른 새들이 텔레비전 안테나를 통해 들어오는 진동을 어떻게 감지하는지 알고 있다.

 “그가 갔나?” 하고 그들이 물으면, 아래에서 “아직 아니”라는 진동이 올라오는 것이다.  


 - 로렌 아이슬리, 김현구 역, <광대한 여행>, 강, 2005, 248쪽. 

 
   

   왜 우리는 지구의 석유 보유량으로 ‘인간이’ 몇 년이나 버틸 수 있는지, ‘우리나라’가 몇 년이나 지나면 ‘물 부족 국가’가 되는지, 매일 무서운 속도로 사라져가는 원시림과 빙산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온도와 해수면’이 얼마나 상승할지에만 관심이 있을까. 인간은 자연을 자원으로만 바라봄으로써 자연에 무지하게 되었고, 자연에 무지해진 인간은 스스로에 대해서조차 점점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자연은 ‘소중하다’는 인식도 자연에 대한 소유욕의 일종이다. 자연을 자연 그 자체로 바라보는 ‘눈’을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우리는 한 번도 자연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는 지도 모른다. 
 

   우리가 자연의 언어에 진정 귀 기울이고 싶다면, 바슐라르의 말처럼 지성과 상상력의 과감한 이혼을 선택해야 한다. 바슐라르의 철학을 몸으로 배우고 싶다면, 진정한 몽상의 세계에 빠져들어 행복해지고 싶다면, 먼저 지성의 경직된 근육부터 이완시켜야 할 것 같다. 합리적 이성과 인터넷 검색어 순위에 찌든 우리의 두뇌는, 감각의 모든 촉수를 해방시키는, 자유로운 두뇌의 스트레칭법부터 배워야 한다.
   이것이 어렵다면 어린아이들이 ‘혼자 노는’ 모습을 10분만 관찰해도 좋다. 아이들은 주위의 모든 사물을 싱그러운 교감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반짝이는 형광등 불빛을 보고도 엄청 반가운 손님을 만난 듯 방싯방싯 미소를 짓고, 사소한 자극에도 호들갑을 떨며, 주변의 모든 자극을 ‘그것’이 아닌 ‘그대’로 대하는 아이들. 아이들은 사물 뒤에 내재된 힘, 마나(mana)를 포착하는 비법을, 이 세상 모든 것이 우리의 삶과 ‘유관’하다는 것을 몸으로 아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한때 그 비밀을 알았지만 잠시 ‘깜빡’했을 뿐인데…….   



   
 

모든 대상들은, 우리가 그것들로부터 상징적 의미를 끄집어낼 때, 강렬한 드라마의 기호들이 된다. 그것들은 감수성의 확장되는 거울들이 되는 것이다. 이 우주 속에서 우리가 그것들의 깊이를 모든 것에게 부여할 때, 우리와 무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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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모 2009-11-06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성과 상상력의 과감한 이혼! ^^

둥이 2009-11-10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럼 우리 복딩이가(우리집 14개월된 넘) 바슐라르가 말한 진정한 철학가?^^

viewfinder 2009-11-10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는 바슐라르스러운 아기들을 보며 그렇게 잃어버린 시간들을 되찾고 있는 거군요^^
 


 


영화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 ⑧

   


9. 아니무스의 눈물, 아니마의 미소 (3)

   
 

 팽팽한 활의 떨리는 활시위여
 달빛에 수런거리는 그대의 마음
 예리하게 연마한 칼날의
 그 아름다운 칼끝을 닮은 그대의 옆얼굴
 슬픔과 분노에 숨어있는 진실한 마음을 아는 자는  
 숲의 정령 모노노케(원령)들뿐 모노노케들뿐…… 
 

 - <원령공주>의 주제곡 중에서

 
   

   재앙신의 몸에서 솟아오르는 저주의 촉수에 갇혀 함께 재앙신이 되어버릴 위기에 처한 원령공주. 에보시를 설득하고 원령공주를 구해내려는 아시타카. 아시타카의 충언에 아랑곳 않고 시시신을 기어코 살해하려는 에보시. 그리고 에보시의 군사들과 옷코토누시의 멧돼지들과 들개들. 이 모두가 벌이는 전쟁의 아수라로 숲은 짓밟히고 불탄다. “숲과 마을이 함께 살 수는 없나요?” 아시타카는 만나는 사람마다, 들개마다, 멧돼지마다 붙들고 이렇게 질문하지만 모두들 단호히 ‘No!’를 선언한다.
   아시타카는 계속 ‘넌 도대체 어느 편이냐’라는 질문을 들으며, 누구도 질문하지 않는,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하기 위해 목숨을 건다. 그의 해법은 이것이다. 너를 구원할 순 없지만 너와 ‘함께’ 살아가겠다는 것.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운명 앞에 섰을 때, 운명 앞에 거만 떨지 않는 인간의 우직한 정공법이다. 나에겐 너를 구할 엄청난 능력은 없지만, 너와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책임을 묵묵히 짊어지겠다는.

   인간들의 총탄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죽어가는 모로는 마지막으로 에보시에게 복수하기 위해 남겨두었던 힘을, ‘들개의 딸’이었던 원령공주를 재앙신으로부터 구하는 데 쓰고 조용히 죽어간다. 모로가 참혹하게 죽어간 자리에서 아시타카가 원령공주를 구하는 동안, 에보시는 시시신을 찾아내 화승총을 겨누며 의기양양하게 외친다. “다들 잘 봐! 신을 죽이는 건, 바로 이런 거야!” “쏘지 마요! 제발!” 아시타카와 원령공주는 필사적으로 에보시를 말리지만 에보시는 기어이 총을 쏘고 만다.
   시시신의 목을 정조준하여 날려버리는 에보시. 그 순간 아름답고 풍성한 뿔로 무성하던, 시시신의 가녀린 목이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모두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순간, 투명한 비췻빛을 뿜어내는 ‘시시신의 체액’이 숲 전체를 적시기 시작한다. 시간이 멈춘 듯, 이 세상 모든 인생들의 스토리가 멈춘 듯, 모두가 망연자실하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바로 이때, 현상금을 타내기 위해 시시신의 목을 노리던 사냥꾼은 재빨리 시시신의 목을 ‘전리품’으로 챙겨 미리 준비한 나무 상자에 담아버린다. 
 


   시시신의 체액이 거대한 숲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장이 온통 쏟아져 나와 땅 위를 적시는 듯한, 고통스러운 환각을 느낀다. 대지를 뒤덮은 시시신의 체액에 닿으면 모두 죽는다며 혼비백산하는 사람들. 노아의 홍수를 방불케 하는 거대한 홍수에 숲의 모든 생물들은 살길을 찾아 숲을 버리고 도망간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전쟁’을 멈추고 시시신의 체액을 피해갈 궁리에 바쁘다. 시시신의 체액은 천천히 촉수를 뻗어 자신의 ‘잃어버린 머리’를 찾으려 한다. 그는 지금 살아 있는 것도 죽어 있는 것도 아니다. 머리를 찾지 못하는 한, 그는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다. 그의 몸 밖으로 빠져나온 액체는 단지 시시신의 체액이나 혈액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참혹한 풍경은, 바로 시시신을 바라보는 우리의 몸 안에서 가장 소중한 무언가가, 결코 세상 밖으로 빠져나와서는 안 될 무언가가 빠져나와 속절없이 흘러넘치는 듯한 절망감을 불러일으킨다. 

   머리가 잘린 것은 시시신만이 아니었다. 평생을 바쳐 인간의 딸 원령공주를 키우고 시시신의 신변을 보호했던 들개들의 수장 모로. 이미 몸은 죽어 머리만 남은 들개 모로는 죽어서도 에보시를 향한 원한을 잊지 못해 그녀의 팔을 잘라 버린다. 그의 잘린 머리에 맞아 팔이 잘려버린 에보시는 그제야 광기에서 벗어나 ‘수치심’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이제야 자신이 저지른 짓이 얼마나 엄청난 만행인지를 깨닫게 된다. 숲을 접수하려는 그녀의 야망은 곧 자기 자신뿐 아니라 숲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던 모든 존재들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부상당한 에보시를 타타라 마을로 되돌려 보내려는 아시타카를 향해, 그녀 때문에 엄마 모로를 잃은 원령공주는 절규한다.  

    원령공주 : 그 여자 내게 넘겨! 죽여버릴 거야!
    아시타카 : 모로가 복수했어. 이젠 잊어…….
    원령공주 : 싫어! 너도 인간들과 한패야! 그 여자 데리고 썩 꺼져! (아시타카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안으려 하자) 오지 마! 인간 따위 질색이야!
    아시타카 : 나도 인간이고 너도 인간이야…….
    원령공주 : 닥쳐! 난 들개야! 저리가!  
    아시타카 : (원령공주를 포옹하며) 미안해……. 막으려고 최선은 다했어.
    원령공주 : (흐느끼는) 이젠 끝이야. 숲은 죽었어.
    아시타카 : 아직 안 끝났어. 우리가 살아 있잖아.   


   이때 시시신의 머리가 움직이며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한다. 없어진 머리를 찾는 몸과 없어진 몸을 찾는 머리의 꿈틀거림이 시작된다. “머리가 움직인다! 머리가 몸을 부른다!” “시시신이 머리를 찾으러 왔어요! 이 액체에 닿으면 죽어요! 물에 들어가면 피할 수 있어요!” 아시타카는 사람들을 신속히 대피시키고 시시신의 머리를 찾아 그에게 돌려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친다. 사냥꾼은 숲이 파괴되는 광경을 버젓이 보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현상금에만 눈이 멀어 시시신의 머리를 내놓지 않는다. 
   “햇빛에 닿으면 저놈은 끝이야! 보라고! 이제 시시신은 죽기 직전에 발광하는 저주의 신일 뿐이야! 해만 뜨면 놈은 끝장이지!” 그러나 시시신의 체액이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항복한다. 원령공주와 아시타카는 시시신의 잘린 머리를 소중히 감싸 안아 하늘높이 들어올리며, 시시신에게 기도한다. “시시신이시여! 이제 머리를 가져가시오! 부디 진정하시오!” 그 순간 시시신의 목은 몸과 합체되고, 제 머리를 찾은 몸은 거대한 육신을 대지에 뉘이며, 이제야 안식을 찾은 듯 천천히 스러져간다.  
 

   이윽고 시시신이 스러져간 대지 위에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숲, 모든 것이 불타버린, 이제는 ‘숲’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거대한 폐허 위로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꽃과 나무와 식물들이 피어오른다. 시시신을 해묵은 전설의 귀신쯤으로 여기던 사람들은 이제야 알았다는 듯 수군거린다. “시시신은 싹을 틔우는 신이었나 봐…….” “시시신은 꽃을 피어나게 하는 신이었나 봐…….” 모두가 이 숲의 눈부신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마법처럼 피어오르는 꽃들을 바라보며 행복해 한다. 자신을 겨냥하는 에보시의 화승총 위에까지 아름다운 꽃을 피워 올렸던 시시신의 넋은 그렇게 아름답게 부활했다. 그는 자신의 온몸을 대지에 공양하여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된 것이다. 사력을 다하여 마지막으로 이 아름다운 숲을 다시 되찾아준 시시신, 총탄에 맞아 머리를 잃고도 잔인한 인간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운 숲을 되돌려준 시시신의 가없는 사랑 앞에 사람들은 떳떳이 고개를 들지 못한다. 

   원령공주 : 아무리 숲이 살아나도, 이젠 더 이상 시시신의 숲이 아니야……. 시시신은 죽었어.
    아시타카 : 시시신은 죽지 않아……. 시시신은 생명 그 자체거든. 그는 삶과 죽음을 모두 갖고 있지. 내겐 삶을 돌려주셨어. (어느덧 그의 온몸으로 퍼져나가던 저주의 흉터가 사라지고 분홍빛 새살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원령공주 : 난 널 좋아하지만. 인간은 용서 못해.
    아시타카 : 그래도 좋아. 너는 숲에서, 나는 타타라 마을에서. 우리 그렇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더 좋은 마을을 세우자.
 


   자신의 종족인 에미시 부족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났던 아시타카는 결국 부족에게 돌아가지 않고 이 낯선 공간에서 ‘타인의 꿈’을 살아가는 길을 택한다. 자신에게 삶을 돌려준 시시신의 사랑에 보답하는 것은 단지 자기 부족의 안위를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 숲을 함께 일으키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아시타카. 그는 굳이 원령공주를 ‘문명화’시켜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길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녀 곁에서, ‘들개의 딸’이라는 그녀의 정체성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그녀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 그는 그렇게 그녀를 사랑하기로 한다. 완전히 바뀌어버린 자신의 미션을 스스로 선택하는, 들개와 인간 사이, 자연과 문명 사이의 그 위험천만한 길을 선택하는 아시타카. 나의 목숨, 나의 가족, 나의 땅, 나의 부족, 나의 삶……. 이 모든 ‘나의’ 소유격에 들러붙은 욕망의 가면을 벗어던졌을 때 아시타카에게는 진정한 ‘몽상의 시간’이 시작될 수 있었다. 

   시시신의 육체가 파열되는 순간. 우리는 시시신의 육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본질을 처음으로 ‘대상’으로서 마주하는 충격을 느낀다. 이 순간은 바슐라르가 말하는 ‘수직적 시간’이기도 하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는 시계적 시간, 자연과학적 의미의 양적 시간과는 달리 인간이 존재를 시적 이미지로 파악할 수 있는 몽상의 시간. 바슐라르의 수직적-우주적 시간은 이토록 둔감하고 무신경한 인간에게 우주의 비밀을 잠깐 엿볼 틈을 주는 기적적인 찰나의 순간이다. 이 수직적 시간은 한 인간이 우주로 향할 수 있는 비밀 통로이다. 
   인간들은 숲을 파괴하면서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있었던 것이며, 숲을 파괴함으로써 우주와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를 파괴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설명도 없이 그 순간의 ‘시적 이미지’가 바로 이해되는 그 순간. 아무런 해설자도 필요 없이, 어떤 주석도 어떤 언어도 필요 없이, 그동안 이해되지 않았던 모든 생의 비밀이 곧바로 온몸으로 이해되는 그 순간. 바슐라르는 그 순간을 시적 순간이자 형이상학적 순간이자 우주적 순간이라고 했다. 이토록 작은 인간이 저토록 커다란 우주와 직통으로 통화하는 시간, 운명이 우리의 ‘머리’가 아닌 ‘몸’을 관통하는 순간. 위대한 시인이, 오랫동안 고민하던 시적 대상에 가장 어울리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형용사’를 마침내 찾았을 때의, 그 섬광 같은 환희의 순간. 

   
 

몽상가는 슬프다는 것이 행복스러우며, 홀로 있고 기다린다는 것이 만족스러운 것이다. 그 구석 속에서 그는, 열정의 정상에서는 으레 그러하듯, 삶과 죽음에 대해 명상한다. (……) 그는 곧 세계는 명사의 영역에 속하는 게 아니라 형용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 바슐라르, 곽광수 역, <공간의 시학>, 동문선, 2003, 259~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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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finder 2009-11-05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예리하게 연마한 칼날, 그 아름다운 칼끝을 닮은 그대의 옆얼굴....원령공주 주제곡 가사 정말 아름답네요...바슐라르의 '순간의 시학'과 딱 어울리는^^

doingnow 2009-11-06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가끔 무언가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을 정리하고 싶거나 아니면 아무생각하지 않고 어떤일들을 잊고 싶을 때 미야자키하야오의 이야기들을 보고싶어지는 것은 바로 이것때문인듯 싶습니당..
그가 그려낸 이야기들이 너무나 몽상적이고 또 아름다워서 이야기의 모든 순간들을 느낌으로 기억하게 하거든요..^^
 


 


영화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 ⑧

   


8. 아니무스의 눈물, 아니마의 미소 (2)

   
 

 멈출 수 없는 총알이 관통할 수 없는 벽에 가닿을 때, 우리는 종교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정확히 바로 이 지점에서 성장이 일어난다. 융은 “상담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찾아라. 그의 다음 성장은 바로 그곳에서 일어난다”라고 말했다. 자아(ego)란 망치와 모루 사이에 있는 금속 같은 것이다. 


 - 로버트 존슨, 고혜경 역,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에코의 서재, 2008, 117쪽.

 
   

   아시타카에게 ‘관통할 수 없는 벽’은 바로 인간도 들개도 아닌 원령공주였다. 그러나 아시타카도 원령공주의 강철 방어벽 못지않은 힘으로 돌진하는, ‘멈출 수 없는 총알’이었다. 아시타카는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에 맞섬으로써 통과의례의 마지막 장벽을, 이제껏 그를 가로막고 있던 영혼의 문턱을 넘어서게 된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부족의 멸망’이었고 ‘자신의 죽음’이었지만, 이제 아시타카는 원령공주가 맞닥뜨린 더 커다란 두려움을 목격함으로써 자신의 두려움조차 잊어버렸다. 이제 아시타카에게는 최후의 선택이 남았다. 

   높다란 절벽 위에서 장엄한 숲의 정경을 내려다보며 고뇌에 잠겨 있는 아시타카에게, 모로는 말한다. “고통스럽나? 거기서 뛰어내리면 간단히 끝날 게야. 몸이 회복되면 네 몸의 상처도 함께 날뛸 테니까.” 아시타카는 이미 자신의 ‘작은 상처’ 따윈 잊은 말투로 말한다. “아름다운 숲이군요.” 이제야 몽상의 여유가 생긴 아시타카는 이 숲이 잃어버리기엔 너무 아름답다는 것을, 전쟁터로 초토화해버리기엔 너무도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는다. 목숨을 건 통과의례를 겪고 있는 아시타카는 자기 부족의 삶만 걱정해도 충분히 바쁜 삶을 살다가, 처음으로 타자의 삶, 다른 동물과 다른 숲과 다른 세계의 삶을 사유하게 된다. 
 


   자신의 몸에 총탄을 박은 에보시를, 숲을 초토화시킨 원흉인 에보시를 죽이기 위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모로에게 아시타카는 애원하듯이 말한다. “모로, ‘산’(원령공주)을 놓아줘요. 그 애는 인간이잖아요.” 모로는 그제야 자신이 어떻게 인간 소녀를 키우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해준다. “그 애는 우리 일족의 딸이다. 숲이 살면 ‘산’도 살고 숲이 죽으면 ‘산’도 같이 죽는 거다. ‘산’은 숲을 침범한 인간들이 내 이빨을 피하려고 내던진 갓난애였어. ‘산’은 인간도 들개도 될 수 없는 가엾고 사랑스런 내 딸이다.”
   인간에게 버림받은 소녀를 들개의 딸로 키워낸 모로의 모정이 절절히 묻어난다. 원령공주에 대한 아시타카의 마음을 눈치 챈 모로는 시험하듯 아시타카에게 질문한다. “네가 ‘산’을 구원해줄 테냐?” 아시타카는 말한다. “그건 모르겠지만 그녀와 함께 살아갈 순 있어요.” 그러나 모로는 아시타카의 팔뚝에서 점점 번져가는 선연한 상처를 보고도 원령을 맡길 순 없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넌 곧 상처로 죽게 될 테니. 날이 밝으면 바로 여길 떠나거라.”

   자신이 곧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피할 수 없는 아시타카는 숲을 떠나려 하지만, 거대한 멧돼지 군대와 에보시 일족의 혈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고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이제 ‘나의 목숨’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족의 영광과 번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지키려던 것을 지키기 위해, 그녀의 운명을 ‘함께’ 견뎌내기 위해 아시타카는 목숨을 건다. “네가 ‘산’을 구원해줄 테냐?”라는 모로의 질문은 아시타카의 새로운 미션으로 자리 잡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미션을 처리하러 떠난 여행에서 오히려 또 다른, 더 거대한 미션을 떠안게 된 아시타카. 



   한편 에보시의 군대는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연기를 피워 올려 멧돼지를 숲 밖으로 유인하여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책을 세운다. 모로는 멧돼지 부족의 최후를 예견한다. “옷코토누시는 다 알면서도 정면공격할 거야. 그게 멧돼지의 긍지라고. 마지막 한 마리까지 덤비고 쓰러지겠지.” 원령공주는 모로의 품에 안기며 눈물을 글썽인다. “엄마, 난 떠나야겠어. 옷코토누시의 눈이 되어줄래. 그는 연기 때문에 제대로 달릴 수도 없을 테니.”
   모로는 사랑하는 딸 ‘산’과의 마지막 만남이 될 것만 같은 슬픈 예감을 뒤로 하고 딸을 위로해준다. “난 괜찮다. 넌 저 젊은이와 함께 살 수 있는 길도 있을 텐데…….” 원령공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인간은 싫어.” 이때 아시타카가 원령공주에게 보낸 목걸이가 다른 들개를 통해 전해지고, 그토록 아름다운 ‘액세서리’를 처음 본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찬사를 뿜어낸다. “아시타카가 내게 이걸? 정말 예쁘다!” 목걸이를 바라보며 감탄하는 원령공주의 표정에서 들개가 아닌 인간 소녀의 달뜬 표정이 스쳐간다.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된다. 인간들은 총포와 화약 뒤에서 자신의 몸을 안전하게 숨긴 채 멧돼지와 들개들의 목숨을 노리고 있고, 모로와 원령공주를 비롯한 들개들과 멧돼지 군대는 목숨을 걸고 총력전을 각오한 채 적진으로 달려간다. 에보시는 그녀의 재산과 땅을 노리는 사무라이들에게, 그리고 시시신의 목을 노리는 국왕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 짐승보다 숲보다 더 큰 적은 인간이라는 것을, 그녀와 ‘비슷한’ 재화를 노리는 경쟁자들이라는 것을, 그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안다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목표는 ‘자연의 자원화’이기에. 


   아시타카는 ‘숲의 군대’와 ‘인간의 군대’ 사이를 목숨을 걸고 오가면서 최대한 전투와 피해를 막아보려고 한다. 그러나 양측으로부터 돌아오는 반응은 냉담하다. “역시 짐승과 한패로군!” “역시 인간들과 한패였어!” “저 녀석 도대체 어느 편이야?” 그는 이편도 저편도 아닌 존재로서 ‘주어’나 ‘목적어’가 아니라 ‘전치사’와 ‘접속사’처럼 존재와 존재를 이어주고 관계를 맺게 해주는 존재다. 


   더 이상 ‘사이의 존재’에 머무를 수 없게 되어버린 아시타카는 원령공주와 들개를 도와 죽음을 불사하는 길을 택한다. 그것이 최선의 균형감각임을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 양편은 대등한 관계로서 갈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일방적인 공격과 숲의 예정된 파멸로 치닫고 있기에. 한편 멧돼지들은 인간이 쏜 화약과 총탄으로 줄줄이 ‘바베큐’가 되어버리고, 크게 다친 옷코토누시와 원령공주는 시시신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이동한다. 사냥꾼의 무리들은 시시신을 죽이기 위해 죽은 멧돼지 가죽을 덮어 쓰고 멧돼지 떼로 위장한 채 원령공주를 미행한다. 죽은 멧돼지의 가죽을 덮어 쓴 인간 사냥꾼들을 알아보지 못한 옷코토누시는 죽어버린 멧돼지들이 돌아온 줄로 착각하고 기뻐한다.
 


   “전사들! 돌아왔다! 황천 갔던 전사들이 돌아왔어! 나를 따르라! 시시신께 가자!” 분노에 치를 떨며 더 이상 제정신이 아닌 옷코토누시를 말리는 원령공주. “진정하세요! 죽은 게 살아날리 없어요. 멧돼지들의 가죽을 덮어쓰고 피를 바른 인간사냥꾼들이예요. 제발 멈춰요! 우릴 미끼로 시시신에게 접근하려는 거예요.” 함께 동행하던 들개는 원령공주를 말린다. “옷코토누시는 곧 죽어! 버리고 가자!” 원령공주는 고개를 젓는다. “안 돼! 내가 그를 버리면 그는 재앙신이 될 거야.” 그러나 그녀가 옷코토누시를 버리기도 전에 그는 이미 재앙신이 되어 그녀의 몸까지 함께 재앙신으로 만들어버리려고 한다. 자신의 멧돼지 부족을 잃고 절망에 빠진 옷코토누시는 본래의 용맹스런 영혼을 잃고 ‘나고신’처럼 끔찍한 재앙신으로 변모해버린 것이다. 이제 원령공주조차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다. 숲이 지켜야 할 소중한 아니마 그 자체인 원령공주, 그녀의 죽음은 곧 숲의 죽음일 것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균형이 완전히 깨져버린 이 숲에는 과연 어떤 파국의 스펙터클이 기다리고 있을까. 

 

   
 

현대의 모든 정신분석학 중에서, 칼 구스타프 융의 정신분석학은 가장 명확하게 인간의 심리상태는 그 원초적인 상태에서 쌍성(雙性)이라는 것을 입증해낸 바 있다. 융에 의하면, 무의식이란 억압된 의식이 아니며, 잊힌 추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제1의 본성이다. 무의식은 그러므로 우리 속에서 남녀양성(男女兩性)의 힘을 유지한다. 남녀양성에 대해 말하는 자는, 이중의 안테나를 가지고, 자신의 무의식의 심층을 건드리고 있다.  


 -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70~71쪽.

 
   
   
 

자연은 하나의 신전, 살아 있는 기둥들에서
 때때로 뭔지 모를 웅얼거리는 말소리가 새어나온다.
 인간이 상징의 숲을 가로지르며 자신의 길을 걷고 있을 때
 상징의 숲은 친근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다.
 

 - 보들레르, <조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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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09-11-03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자아란,,,,, 그럼 두들겨 맞아야'만' 성장하나요^^*

sotkfkd 2009-11-03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심슨 2009-11-04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주어나 목적어가 아니라 전치사나 접속사 같은 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