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본 아이덴티티>와 미셸 푸코 ⑦

 

7. 나는 위험인물이다. 그런데 누구에게? (2)

   
 

범죄는 재판에 대한 감옥의 복수이다. 재판관을 어안이 벙벙하게 할 정도로 대단히 무시무시한 복수이다. 그때 범죄학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 미셸 푸코,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 나남출판, 2004, 390쪽.

 
   

   여동생의 애인을 처음 봤을 때 오빠나 아버지가 하고 싶은 질문 1위는 무엇일까. 애인이 무척 어리다면 ‘아버지는 뭐하시나?’일 것이고 애인이 충분히 성숙하다면 ‘자네 직업은 뭔가?’ 정도가 아닐까. 이 기준에 따르면 마리 크루츠가 사랑에 빠진 이 남자 제이슨 본은 결코 ‘바람직한’ 신랑감이 아니다. 직업이나 부모님의 자산 정도는 물론 가족이나 주소나 국적조차 확실하지 않은 이 남자. 결국 우리는 ‘본’ 시리즈 1편에서 주인공의 ‘진짜’ 이름조차 모르고 영화관을 나오게 될 정도니 말이다. 
 

   마리의 오빠 에몬은 어김없이 마리에게 질문한다. “저 사람 직업이 뭐야?” 직업도 확실하지 않고 이름과 국적조차 확실하지 않은 제이슨 본의 인적사항에 대해 마리는 대충 둘러댄다. “선박 회사 다녔었어.” 아마도 그것조차 ‘만들어진 정체성’임에 분명한, 제이슨 본이 파리에 있었을 때의 가짜 직장은 선박 회사였던 것이다. 검열의 장치는 감옥이나 CIA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알아가는 방식’, 타인에 대한 인식 방법 자체에 끈덕진 검열의 문신이 새겨져 있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베아스’라는 어느 부랑자의 1840년 재판 기록을 들추어낸다. 재판장은 집요하게 당신의 집은 어디이냐, 당신의 직업은 무엇이냐, 당신의 가족은 누구이냐 등등 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외부적 조건을 묻는다. 그런데 이 부랑자 베아스는 재판장의 각종 질문 공세에 절대 쫄지 않는다. 유유자적하고 여유만만하게, 마치 이런 질문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귀찮다는 듯이, 재판장의 질문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린다.

   재판장 : 사람은 자기 집에서 잠을 자야 합니다.
   베아스 : 내가 집이 있겠습니까?
   재판장 : 피고는 언제까지나 떠돌이로 지낸다는 거군요.
   베아스 : 나는 일해서 먹고 삽니다.
   재판장 : 피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베아스 : 내 직업이라…… 우선 적어도 36개 정도가 되지요. 게다가 어느 일정한 자리에서 일하고 있지 않습니다. (……) 나는 밤과 낮을 가라지 않고 일합니다. 예컨대 낮에는 모든 통행인들에게 자그마한 무료 인쇄물을 나눠 주기도 하고, 승합 마차가 도착하면 좇아가서 승객의 짐을 나르고, 뇌이이 거리에서 팔다리를 번갈아 짚어 가는 재주넘기를 하고, 밤에는 극장을 기웃거리고, 무대의 휘장을 열어주고, 극장의 외출권을 팔기도 합니다. 나는 무척 바쁜 사람입니다.
    재판장 :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일을 배우는 것이 피고에게는 더 나을 텐데요.
    베아스 : 천만에요. 좋은 직장, 견습, 그런 것은 지겨울 뿐이요. 그리고 부르주아가 되어도 늘 불평거리가 많고 또 자유도 없지 않습니까.
   재판장 : 피고의 아버지는 피고를 야단치지 않습니까?
    베아스 : 아버지가 없습니다.
    재판장 : 그렇다면 피고의 어머니는?
    베아스 : 없습니다. 친척도 친구도 없습니다. 나는 남의 속박을 싫어하는 자유인입니다. 

   
 

2년 징역 선고를 듣자, 베아스는 매우 험악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으나 곧 유쾌한 기분을 되찾고는 이렇게 말했다. “2년이라면 기껏해야 24개월밖에 안 되겠군요. 자, 일어서지요.” 


 - 푸코,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 나남출판, 2004, 441~442쪽. 

 
   

   베아스는 무려 36개의 직업을 가진, 말하자면 ‘홍반장’ 같은 사람이었나 보다. 이토록 바쁜 그를 재판장은 단지 주소가 없다는 이유로, ‘일정한’ 직업이 없다는 이유로, 부모가 없다는 이유로, ‘위험한 인물’로 처리한다. 푸코의 말처럼 재판장은 자신이 주거를 공급하는 사람도 아니면서 모든 사람에게 안정된 주거와 가정생활을 강요하고 있다.
    “피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피고뿐 아니라 우리가 ‘한 사람’을 인식할 때 필수적으로 입력하는 기본 데이터다. 이 질문 하나에 엄청난 이데올로기적 검열의 그물이 친친 감겨 있었던 셈이다. 이런 ‘근대적 직업관’에 따르면 베아스처럼 수십 개의 일용직을 가지고 있어도 그 사람은 통계적으로 무직자, 부랑자, 홈리스, 그러므로 ‘위험인물’로 낙인찍힌다. 사법기관을 비롯한 각종 국가장치가 보호하려는 것은 ‘안정된 사회의 기득권’이며 저 ‘하찮은’ 부랑자의 안위가 아니니까. 그는 주소와 직업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문명’을 거부한 ‘야만인’으로 선고받았다. 



   어젯밤 뉴스에서 ‘10대 청소년 가출, 한 해 10만 명으로 급증’이라는 뉴스 헤드라인을 봤다. 뉴스를 가만히 들어보니 ‘집계되는’ 가출 요인으로서 가장 많은 것은 ‘가정 폭력’이라고 한다.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매일 잔혹한 가정 폭력을 지켜보거나 당하며 아무리 힘들어도 집에서 버티는 것이 나을까, 적어도 내 가족에게 구타당하거나 내 가족이 구타당하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도망치는 것이 나을까. 
    그런데 그 뉴스의 결론이 압권이었다. “가출한 청소년들은 수없이 많은 범죄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가출 청소년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확실한 데이터도 제시하지 않은 채, 그 기사는 막연히 ‘가출 청소년 = 통제되지 않는 인구 = 위험인물군 = 미래의 범죄인’이라는 식의 도식을 전제하고 있었다. 단지 집을 나갔다는 이유만으로, 청소년들은 ‘잠재적 위험인물군’으로 처리된다.
    주소와 직업과 연락처……. 이런 가장 ‘기본적인’ 인적사항은 우리를 가장 뿌리 깊게 통제하고 있는 검열의 코드인 셈이다. 우리가 연락처와 주소, 직업과 가족 관계를 밝히는 것을 거부하는 순간, 우리는 누구라도 손쉽게 ‘위험인물군’에 편입될 수 있는 것이다. ‘이해될 수 있는 인물’의 행동 패턴을 그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순식간에 문명사회의 이방인이 되어버린다. 사상 최대의 위험인물, 우리의 제이슨 본은 자신 앞에 놓인 이 ‘정체성의 원형감옥’을 어떻게 탈주할 것인가.

 


   
 

“피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사회에서 확립되는 질서의 가장 단순한 표현이다. 방랑생활은 질서에 어긋나고 사회를 교란시킨다. 따라서 모든 공격에 대항하여 사회를 튼튼하게 방위하기 위해서는, 중단되지 않는 장기간의 안정된 작업, 장래의 계획과 미래에 대한 설계가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주인이 있어야 하며 위계질서 속에 포함되어 제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사람은 일정한 지배관계 안에 고정된 상태로만 존재한다. “피고는 누구의 집에서 일합니까?”라는 물음은 다시 말하자면, 당신은 주인이 아니므로, 어떤 조건에서든 하인이 아니면 안 되며, 당신 자신의 만족이 아니라 질서의 유지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 푸코,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 나남출판, 2004, 4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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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finder 2009-11-23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방랑자 베아스 에피소드, 완전 웃깁니다 ㅋㅋ 나 같으면 재판장이 눈앞에 앉아 있기만 해도 엄청 쫄았을텐데^^

맨손체조 2009-11-24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 주민등록증을 보니, 예전에 여권 다시 발급 받을 때가 생각납니다. 여권과에서 제 얼굴을 보면서, 예전 여권 사진에는 없는 쌍까풀이 있다며, 본인 추궁을 받았더랬습니다. 제가 맞다고 우겨도, 제가 무슨 범죄인인 듯한 표정으로 여기 저기 조회를 하더니, 30분만에 쌍까풀이 없던 예전 사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동일인물이라는 확인을 받았더랬습니다. 물론 전 쌍싸풀 수술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사진이 그랬을 뿐!!!!

doingnow12 2009-12-03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길동의 여자친구가 홍길순이었군요..ㅋㅋ동생인가? 맨손체조님 혹시 쌍꺼풀수술 하신거 아니에요? 부끄러워말고 고백하세요ㅋㅋ

쿠쿠 2009-12-03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래요. 쌍꺼풀 수술이 뭐 대순가요^^ 고백하시죠 ㅋㅋ
 

 


영화 <본 아이덴티티>와 미셸 푸코 ⑥

 

6. 나는 위험인물이다. 그런데 누구에게? (1)

   
 

나의 정치적 자유는 곧 나의 반대파의 정치적 자유다. 


 - 로자 룩셈부르크

 
   

   우리는 내 의견을 존중받고 싶어하는 만큼 나와 다른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배웠다. 그러나 세상 밖으로 뛰쳐나오자마자 우리는 실제로 그 ‘원칙’이 지켜지는 곳을 찾아내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것을 배운다. 순전히 ‘나와 다르다’, 혹은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얼토당토 않은 비난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하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 많이 목격했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그들’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든지 자신의 신상 정보와 활동 내역을 낱낱이 감시당할 위험에 처해야 한다. 미네르바 사건은 수십 년 동안 사문화되었던 정보통신법을 이용해 ‘그들과 다른’ 의견을 가진 한 사람의 인생을 뿌리째 뒤흔든 한국판 제이슨 본 사건이었다.
   제이슨 본은 ‘그들의 이해관계’(CIA의 비밀조직 트레드스톤)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세계 어딜 가든 죽음의 위협에 노출된다. 그들의 이해관계에 맞추기 위해서는 제이슨 본이 계속 ‘죽었다’고 알려져 있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제이슨 본은 ‘나는 죽었다’는 ‘기록’과 ‘나는 살아 있다’는 ‘사실’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제이슨은 이제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추격하고 살해하려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된다. 게다가 그들이 마리까지 추격하고 있음을 알게 되자 제이슨은 마리를 어떻게 해서든지 구해내려 한다. 

   제이슨 : 당신, 경찰한테 가요. 당장, 일이 악화되기 전에 가야 해요.
    마리 : 나 혼자서요?
    제이슨 : 괜찮을 거예요. 내 여권을 가져가요, 알겠죠? 이걸 보이란 말예요. (……) 있었던 대로만 진술해요. 경찰은 당신을 믿을 거예요. 믿어야만 해요. 마리, 여기 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요. 안전하지 않다고요.
    마리 : (……) 도대체 그들이 우리가 함께 있는 걸 어떻게 알죠?
   제이슨: (설명하기 난처한 표정을 애써 숨기며) 난, 당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그게 다예요.
    마리 : 날 위해? 경찰에 날 혼자 보내는 게 어떻게 최선이죠?
    제이슨 : 일부러 보내려는 것 같아요? 난 뭐 좋은 줄 아냐고요? (제이슨 본 자신을 현상수배하는 사진을 가리키며) 난 이 남자와 사진에 대해 전혀 몰라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단 말예요! 함께 도망 다닐 순 없어요. 안돼요. 평생 도망치면서 이렇게 살겠죠. 누구로부터의 도망인지도 모른 채. 날 쫓는 이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알아요. 네, 난 여기 있어야 해요, 어떻게 된 건지 알아봐야 해요. 

   마리는 본능적으로 경찰조차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다. 마리는 자신이 아무리 정직하게 진술해도 경찰이 자신을 믿어줄지 확신할 수 없다고 여긴다. 그녀는 하루 만에 자신이 믿어왔던 세상의 가치관이 완전히 전복되는 것을 경험해버렸다. 이제 아무도 믿을 수 없고, 이제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마리의 입장에서는, 바로 어제 스위스 길거리에서 낯선 남자 제이슨과 이야기하던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촬영되어 바로 오늘 아침 프랑스 파리의 현상수배 전단지에 붙어 있는 것인지, 도대체 이 남자는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저 이 남자와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조차 수배대상이 된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마리의 본능은 역설적으로 지금 자신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이 남자뿐임을 직감한다. 아무런 가시적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며 좌충우돌하는 이 남자의 진심만은, 믿고 싶다. 운전대를 잡은 제이슨은 코앞에서 서성이는 경찰들을 보며 마지막으로 질문한다. “마리, 당신이 이 차에서 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예요.” 마리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안전벨트를 맨다. 나는 당신과 함께 가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마리.
   제이슨은 이제 혼자가 아니다. 이제 제이슨은 두 배로, 아니 천 배로 더 위험해졌다.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목숨까지 책임져야 하기에, 그러나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한 인간이 타인의 목숨까지 지킬 수는 없음을 알기에. 그날 밤 제이슨은 마리의 머리카락을 직접 잘라주고 염색해주며 어제보다 더욱 깊어진 마리의 서늘한 눈빛을 조용히 응시한다. 그들은 가장 위험한 순간에 사랑에 빠졌고, 그 위험만큼이나 열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한편 트레드스톤은 제이슨 본을 쉽게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한다. 왜냐하면 제이슨 본은 한 사람의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낸 프로그램’ 자체니까. 제이슨이 기억을 상실해도 제이슨 본이라는 살인무기를 만들어낸 그들의 프로그램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컴퓨터 프로그램과 다름없어요. 지휘 통제를 따르죠.” 이제 트레드스톤의 입장에서는 제이슨과 마리를 추격하기가 훨씬 쉬워졌다. 마리의 신상정보를 모조리 캐낸 그들은 마리의 동선을 예측함으로써 제이슨의 동선도 함께 예측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6년 동안 마리가 체류한 모든 장소를 샅샅이 찾아낸 트레드스톤은 마리의 가족들의 전화를 거리낌 없이 도청하고, 마침내 마리의 다음 행선지를 소름끼치도록 정확히 예측해낸다. 마리의 이복오빠 명의로 된 외딴 집, 그곳이 마리의 다음 행선지였고 그녀가 아는 한 가장 안전한 장소였던 것이다. 

   마리의 오빠와 그의 귀여운 아이들이 잠든 모습을 바라보며 제이슨은 처음으로 차라리 나를 찾지 않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의심한다. 평화롭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가정이 눈물겹게 부럽다. 혹시 나 때문에 이들이 위험에 처하지 않을까 두렵다. 차라리 모든 것을 잊고 새로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 내가 누구인지가 뭐 그렇게 중요한가. 그러나 내 몸속에 입력된 이 소름끼치는 정보들은 무엇인가. 도대체 누가 날 이토록 무서운 인간병기로 만들었을까. 나는 과연 정신적으로 ‘건강한’ 인간인가. 나의 두뇌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세뇌되고 훈련된 것인가. 나는 누구를 위해 만들어진 인간 병기인가. 제이슨은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알기를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프랑스 철학계에서는 ‘제이슨 본’ 못지않게 신출귀몰했던 미셸 푸코는 자신이 ‘위험인물’로 분류되는 것을 역설적으로 자랑스러워했다. 푸코를 해고한 대학 당국은 물론, 푸코가 실천했던 각종 저항운동을 혐오했던 사람들에게 그는 제이슨 본만큼이나 위험한 인물이었다. 푸코는 자신을 ‘기성제도의 인식’의 그물로 가두려는 사람들 앞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이 언제나 그 그물을 빠져나오는 데서 저항의 쾌락을 찾았다. 그는 정신의 ‘건강’이라는 획일화된 기준 자체를 철저히 의심했다. ‘건강’이라는 또 하나의 획일적 기준이야말로 우리 인식의 복잡성과 모호성 그 자체가 지닌 창조적 긴장을 파괴하는 폭력이기 때문이었다.  

   
 

 Q : 선생님(푸코)께서는 왜 해고당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A : 내가 특별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점은, 몇몇 사람들이 나를 학생들의 지적 건강을 해치는 위험인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나는 사람들이 지적 활동에 있어서의 건강을 생각하기 시작할 때, 거기에 무엇인가 잘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나는 마르크스주의의 비밀동조자이며 비합리주의자이고 허무주의자이기 때문에 위험한 인물입니다.   

 - 미셸 푸코, 럭스 마틴과의 대담 중에서, 1982년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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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브로 2009-11-20 0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로자 룩셈부르크의 명언, 요즘 같은 때 더욱 가슴에 사무칩니다. 언젠가 유시민씨가 백분토론에서도 인용했던 말이지요^^

맨손체조 2009-11-20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제 <100분 토론>의 손석희가 환한 미소를 띄우며 떠나갔습니다. 유시민과 포옹을 하고. 그들을 떠나보내게 한 '그들은' 왜 그럴까요? 죽었다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그들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을 이해할 수 있기나 할까요? 오늘도 '본'을 생각하며, 으랏chachacha!!!

봉인 2009-11-21 05:20   좋아요 0 | URL
저두 손석희 고별방송을 봤네요. 참 손석희다운 마지막 인사라고 느꼈습니다. 마지막 인사조차도 너무 야속하다 싶을 정도로 깔끔했지요. 손석희가 아닌 다른 사람이 진행하는 백분토론은 아직까지 상상하기 어렵네요. 물론 예전에 유시민이 진행하는 걸 보기도 했지만. 점점,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게 되겠지요? 점점, 무뎌지게 되겠지요. 하지만 예상한 데서 한 치도 어긋남이 없어서 그게 더 놀랄 따름입니다.

봉인 2009-11-21 0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 시리즈 은근 기대되네요. 얼티메이텀은 어떻게 분석하실지 기대할게요.^^

doingnow12 2009-12-03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다르게 살고 싶은데, 이미 세상의 틀에 맞춰 자라난 '나'는 다름에 대한 두려움과 무력함, 그리고 무지함을 느끼면서..점점더 멀어져만가는 것 같습니당.. 저같은 일반인은 그저 본제이슨을 바라보며 응원만할뿐..ㅎㅎ
 

 


영화 <본 아이덴티티>와 미셸 푸코 ⑤

 

5. ‘기억할 수 없는 나’가 ‘기억을 찾는 나’를 추격하다 (2)

   
 

과거의 나는 이미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은 새로운 나이다. (……) 자기 명시는 동시에 자기 파괴이다.  


 - 미셸 푸코, 이희원 역, <자기의 테크놀로지>, 동문선, 77쪽. 

 
   

    


   제이슨 본은 낯선 여자의 차를 힘겹게 얻어 타고 파리로 가면서 생각했을 것이다. 나를 찾기만 하면, 내가 잃어버린 나를 찾기만 하면, 이 모든 상황이 종료될 것이라고. 그러나 과거 그가 거주했던 파리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질수록, 커져가는 두려움도 숨길 수 없다. 나를 찾기만 하면, 정말 이 모든 공포와 불안이 해소될 수 있을까. 나를 찾아내는 것이 꼭 좋은 일일까. 파리에 간다고 해도, 나를 찾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파리에 가면 나를 기다리는 가족이나 친구가 있기는 한 걸까.
   온갖 생각의 실타래로 난마처럼 얽혀 있는 제이슨의 머릿속. 지금 그에게 유일한 지인(知人)은 오직 1만 달러를 받고 취리히에서 파리까지 운전을 해주기로 한, 보헤미안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낯선 여성, 마리 크루츠뿐이다. 막상 파리로 도착하자 둘은 그냥 헤어지기에는 왠지 아쉬운, 서로의 감정을 동시에 알아차린다. 제이슨은 ‘내가 누구인지’를 혼자 알아내고 확인하기가 문득 두려워지고, 마리는 파리행 차비로 2만 달러를 아낌없이 내버리는 이 남자, 기억상실로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이 남자의 아이덴티티가 못 견디게 궁금해진다. 물론 두 사람은 ‘내가 누구인지’, ‘네가 누구인지’ 모르는 낯선 남녀일 뿐이지만, 두 사람은 그 모든 외적 상황과 전혀 관계없이 매혹적으로 빛나는 서로의 싱그러운 육체를 무의식적으로 알아차린다.  
 

    제이슨 : 태워줘서 고마워요.
    마리 : 천만에요.
    제이슨 : 뭐, 올라와도 돼요. 여기서 기다리든지요. 확인하고 올게요, 기다려요.
    마리 : 같이 가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당신은 아마 날 잊어버릴 거예요.
    제이슨 : 잊을 리가 있겠어요? 당신은 이 세상에서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람인 걸요. 

 

   제이슨의 집 주인은 ‘본 선생’을 알아보고 엄청나게 반가워하지만, 제이슨은 정작 집주인 아주머니를 전혀 알아볼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호화로운 인테리어로 가득한 제이슨 본의 집안에서 저마다 ‘나의 흔적’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물건들을 하나도 알아볼 수가 없다. “세상에, 하나도 못 알아보겠군요.” 자신이 살았다고 추정되는 곳에 와서도 기억을 떠올릴 수가 없자 제이슨은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는 자신이 묵었다고 추정되는 호텔의 주소를 찾아 전화를 건다. 제이슨 본의 이름으로 투숙자를 찾아보니 없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또 다른 여권’의 이름 ‘마이클 케인’으로 찾아보니 드디어 자신의 ‘소식’을 들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알게 된 소식은 청천벽력이었다. 호텔 프론트의 전화 너머로 들리는 직원의 메시지에 제이슨, 아니 아직 여전히 그저 ‘제이슨으로 추정될 뿐인 정체불명의 이 남자’는 절망한다. “안타깝게도, 마이클 케인 씨는 2주 전에 사망하셨습니다. 고속도로에서 일어난 교통사고였습니다. 현장에서 즉사하셨습니다. 손님께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어 진심으로, 대단히 유감입니다.” 

   그토록 찾았던 ‘나’인데, 내 목숨을 걸고, 원치 않는 살인까지 해가며 죽을 힘을 다해 나를 찾았는데, 나를 찾는 순간 내가 죽어버렸다는 소식을 듣는다. 나는 여기 살아있는데 내가 찾는 나는 죽어버렸다. 도대체 죽어버린 나와 살아 있는 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모든 기억을 다 상실해버렸는데도 왜 나는 ‘살인 기술’만은 잊지 않고 있는 것일까. 정말 ‘죽어버린 나’를 되찾아도 되는 것일까.
    급기야 안전한 줄만 알았던 이 파리의 아파트에까지 ‘괴한’이 침입해 들어오고, 겁에 질린 마리 앞에서 그는 자신과 마리를 동시에 죽이려는 그 괴한을 쓰러뜨리고 만다. 마리는 물론 제이슨 그 자신도 자신이 보유한 엄청난 ‘살인 능력’에 기가 질려버린다. 그는 점점 ‘자기가 찾고 있는 자신’이 무서워진다. 내가 누구기에 나는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이 상황에서도 이토록 엄청난 살인의 기술을 정확히 기억하는 것일까.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은 누구일까. 도대체 어떤 무서운 훈련 과정을 거쳐야 온몸이 살인 무기인 나 같은 존재를 제조해낼 수 있는 것일까. 자기 자신이 너무 두려워진 제이슨은 마리에게 이 모든 두려움을 고백한다. 그가 알고 있는 이 세상 유일한 사람은 마리 한 사람뿐이니까. 

   제이슨 : 대체 어떤 사람이 돈과 여섯 개의 여권, 그리고 총으로 채워진 비밀계좌를 가지고 있죠? 누가 엉덩이에 은행 계좌번호를 박고 다니죠? 내가 여기 들어와서 처음으로 한 일은 눈에 띄지 않는 자리와 비상구를 찾는 것이었죠. 밖에 주차된 자동차 여섯 대의 번호판을 외웠고, 웨이트리스가 왼손잡이라는 것도, 카운터에 앉아 있는 사내의 몸무게가 97.5kg이라는 것도 말할 수 있죠. 저기 회색 트럭 안에 총이 들어 있다는 것도 알아요. 또 이런 고도에선 난 800미터 정도는 끄떡없이 달릴 수 있다는 것도 알아요. 대체 내가 어떻게 이런 걸 아는 거죠? 난 내 자신도 모르는데 어떻게 이런 걸 알고 있는 거죠? 

   
 

 개인별로 특징화하면서도 집단적으로 유용한 능력을 양성하기 위한 방법의 최초 핵심이 되었던 것은 아마도 교단적인 생활 방식과 구도 과정이었을 것이다. 신비주의적이거나 혹은 금욕적인 형식을 통하여, 수련은 구원을 얻기 위해 이 세상의 시간에 질서를 부여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 수련은 (……) 그 의미를 점차적으로 전도시키게 된다. 즉, 인생의 시간을 관리하고, 그것을 유용한 형태로 축적하며, 이렇게 조정된 시간은 인간에 대한 권력의 행사에 이바지한다. 신체와 시간에 관한 정치적 기술의 한 요소로 편입된 훈련은 천상의 세계로 올라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완성되는 복종을 지향하는 것이다.    


 - 미셸 푸코,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 나남출판, 2004, 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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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09-11-18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엉덩이에 박힌 은행계좌번호! 암만 생각해도 너무나 기발한 상상력^^*

심슨 2009-11-18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맞아요~ 저의 틀에박힌 상상력은 그게 '폭탄'이라고 생각했답니다, 쿨럭~ㅋㅋ

doingnow12 2009-12-03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멋있네요 미셸푸코..
 

 


영화 <본 아이덴티티>와 미셸 푸코 ④

 

4. ‘기억할 수 없는 나’가 ‘기억을 찾는 나’를 추격하다 (1)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정치적인 것, 곧 생물학적인 것, 신체적인 것, 육체적인 것이다.  


 - 미셸 푸코

 
   

    기억의 주기가 딱 24시간이라 매일 아침 같은 남자와 처음처럼 사랑에 빠지는 여자의 이야기(<첫 키스만 50번째>), 10분 이상 기억을 지속시키지 못하는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가 된 남자가 온몸에 단서를 문신해가며 아내의 살인범을 쫓는 이야기(<메멘토>), 가슴 아픈 기억만을 지워준다는 회사를 찾아가 이제 싫증이 나버린 애인과의 아픈 사랑을 지워버리지만 기억을 지우고도 이상하게 ‘기억할 수 없는 그녀’를 더더욱 그리워하는 이야기(<이터널 선샤인>)…….
    ‘기억 상실’을 소재로 한 수많은 영화 속의 주인공들 곁에는 ‘그들이 잃어버린 바로 그 기억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타인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기억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의 도움, 혹은 방해 끝에 ‘잃어버린 자아’를 찾게 된다. 즉, 기억 자체를 찾지 못해도 기억에 상응하는 ‘타인’이 그 기억의 빈자리를 메워준다. 기억, 혹은 기억의 대체제를 찾을수록 주인공은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본 아이덴티티>, <본 슈퍼리머시>, <본 얼티메이텀>으로 이어지는 ‘본’ 시리즈의 주인공 제이슨은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정체성의 퍼즐을 완성하기보다는 ‘잃어버린 기억’에게 추격당하며, 기억을 되찾을수록 오히려 점점 고통스러워진다. 자신이 누군지는 아직 모르지만 자신이 엄청난 조직력과 무력을 갖춘 거대한 조직에게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제이슨. 그는 자신의 여권이 가리키고 있던 거주지인 파리에 도착하여 자신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기억을 잃어버린 이후로 몇 달 동안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끊임없이 두통에 시달리던 제이슨은 처음 보는 여자 마리의 밑도 끝도 없는 수다를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졸음이 몰려오며 두통도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기억을 잃어버린 그의 불안과 절망을 어루만져줄 최초의 멘토를 만난 것이다. 


    마리 : 지금껏 60킬로미터나 달려오는 동안 나만 지껄여댔잖아요. 난 신경이 곤두설 때 이렇게 수다를 떨게 돼요. 이제 입 다물고 있겠어요. 
   제이슨 : 아뇨, 계속해요. 한동안 아무와도 얘길 나누지 못했거든요.
    마리 : 됐어요, 어쨌든 나 혼자만 말하고 있잖아요. 당신은 취리히를 떠난 후 겨우 열 마디를 했을 뿐이에요.
    제이슨 : 당신 이야기 듣는 게 편해서 그랬어요. 한동안 잠도 못 잤고 두통으로 고생했어요. 항상 머릿속에 맴돌던 게 이제야 좀 사라지는 것 같아요. 그러니 계속 이야기해줘요. 


   그가 파리로 도착할 즈음, 카메라는 그를 추격하고 있는 CIA의 정황을 상세히 보여준다. 제이슨의 등 뒤에 두 발의 총성을 남긴 ‘움보시’는 CIA의 골칫거리였고, 제이슨은 움보시를 살해하는 데 실패한 채로 행방불명되었던 ‘트레드스톤’이라는 비밀조직의 일원이었다. CIA의 비리를 언론에 누설해서 한 몫 단단히 챙기고 싶어 하는 움보시는 ClA의 아프리카 활동에 대한 책을 집필 중이고, 또 다시 CIA의 암살대상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는다. 움보시는 암묵적으로 CIA의 공납을 요구하는 중이고, CIA는 성가신 움보시를 해치우지 못해 안달이다. 트레드스톤의 존재는 CIA 내부에서도 공공연한 비밀이며, 그들의 단독 활동은 CIA의 치명적인 치부가 될 수도 있다.
   CIA의 이름을 걸고 ‘대놓고’ 할 수 없는 불명예스러운 일까지 도맡고 엄청난 비리까지 숨긴 트레드스톤의 행동대장 콩클린(크리스 쿠퍼)은 행방불명된 요원 제이슨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다. 제이슨이 없어져야 트레드스톤의 ‘과오’까지 함께 삭제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리 크루츠까지 함께 수배하여 둘을 한꺼번에 살해하여 모든 ‘증거’를 없애버리려 한다. 그들은 순식간에 마리의 정보를 입수하여 그녀를 ‘이해 가능한 존재’로 분석하려고 한다.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집시처럼 떠돌며 살아온 그녀는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다음 행동을 계산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골칫거리 ‘타깃’인 셈이다. 


   요원 : ‘마리 헬레나 크루츠’입니다. 26세, 하노버 시 외곽 출생입니다. 부친은 용접공이었어요. 87년에 사망했습니다. 모친에 대해선 아직 조사 중입니다. 할머니는 아직 하노버에 살고 있어요. 그녀가 이 재앙의 결정적인 인물인 듯싶습니다. 배다른 오빠가 하나 있어요. 복잡하죠, 집시나 다름없거든요. 데이터가 너무 방대한데다 엉망진창이라, 예측불능입니다. 95년에 스페인에서 전기료를 납부했어요. 96년에는 벨기에에서 3개월 동안 전화료를 납부했고요. 세금 내역도 신용카드도 없습니다.
   콩클린 : 맘에 안 드는 여자야, 자세히 조사해보지. 할머니와 오빠의 전화선을 도청해. 연관이 있다면 누구든 지난 6년 동안 그녀가 묵었던 모든 장소를 알아내. 파리 요원들에게 이 정보 전송해. 
 


   마리는 단지 제이슨을 파리까지 데려다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암살 대상’이 되어버린다. 관객은 한 사람의 신상 정보가 저토록 쉽고 빠르게 유출될 수 있다는 것, 개개인의 삶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시스템이 저토록 정교하게 전 세계를 아우른다는 사실에 새삼 전율한다. 우리는 이토록 쉽게 ‘이해 가능한’ 존재였단 말인가. 푸코는 과거의 연대기가 ‘영웅적’인 행동을 강조한 것에 비해 근대의 서류파일은 ‘규범의 일탈과 위반’을 관찰하는 것이 주된 임무라고 이야기한다. ‘기억할 만한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성찰보다는 ‘측정 가능한 인간’을 강조함으로써 근대적 의미의 ‘인간 과학’은 탄생했다는 것이다. 학교와 병원과 감옥과 군대의 각종 ‘서류철’이야말로 천차만별의 개인을 ‘규격화 가능한 신체’로 균질화한 ‘프로파일링의 천국’인 셈이다. 

   
 

인간에 대한 통제와 그 활용을 위한 세부의 치밀한 관찰, 그리고 동시에 사소한 것에 대한 정치적 고려는 고전주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일련의 총괄적인 기술과 방법, 지식, 설명, 처방, 데이터 등의 일괄적인 자료를 공유하게 된다. 아마도 이러한 사소한 일들로부터 근대적 휴머니즘의 인간이 탄생하게 되었을 것이다. 


 - 푸코,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 나남출판, 2004, 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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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09-11-17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주민등록 번호를 입력하는 곳이 너무 많은 웹사이트, 카드키를 찍을 때마다 기록되는 나의 일상들, 고속도로의 '하이패스'^^*를 지날 때마다 찍히는 내 동선의 정보들, 술값을 카드로 계산할 때마다 마눌님에게 추적당하고 '암바' 걸리는 나날들ㅠㅠ

니모 2009-11-17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도 일상 속에서 약간의 '첩보전'을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너무 많은 시스템에 우리의 신상정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둥이 2009-11-18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손체조님 그래서 우리에겐 완벽범죄가 필요한거죠^^
이글로 저의 행각이 탈로날 위험이 있으니
이글은 정확히 2년후 삭제됩니다^^

doingnow12 2009-12-03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그래서 전 로그인할때 이메일을 뻥으로 썼답니다. 크하하하하하
 

 


영화 <본 아이덴티티>와 미셸 푸코 ③

 

3. 내가 누구인지 알수록 나는 위험해진다

   
 

규율은 개인을 제조한다. 즉, 그것은 개인을 권력 행사의 객체와 도구로 간주하는 권력의 특정한 기술이다. 
  

- 미셸 푸코,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 나남출판, 2004, 267~268쪽.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 자체가 두려워진 이름 모를 사내. 그는 유일한 가시적 단서인 스위스 은행 계좌번호를 사용하기로 한다. 우여곡절 끝에 스위스 은행에 들어간 그는 비밀계좌에 들어 있는 자신의 소지품을 열어 보고 드디어 자신의 이름을 찾아낸다. 미합중국의 여권 위에 기재된 그의 이름은 ‘제이슨 본’이었다. 좀처럼 표정이 없던 이 ‘사내’의 얼굴에 처음으로 안도의 미소가 스쳐간다. “내 이름은 제이슨 본이구나. 파리에 살고 있군.” 자신의 이름을 알게 되자 자신의 모든 것을 찾아낼 수 있는 열쇠를 찾은 듯 기뻐하는 제이슨.
   그러나 소지품이 들어 있는 상자의 칸막이를 벗겨내니 수십 장의 여권이 쏟아져 나온다. 사진은 모두 ‘내 얼굴’을 가리키는데 이름과 국적은 모두 다른 수십 장의 여권이 기다리고 있다.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서류가 이토록 많은데, 나는 더더욱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 소지품 상자에는 돈다발이 한가득 들어 있는데다가 ‘총’까지 들어 있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이기에 이런 엄청난 물건들을 스위스 은행의 비밀계좌에 갖고 있는 것일까.

   그는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 ‘보통 사람’처럼 살아갈 수는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제이슨은 자신에게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몰라 일단 여권과 돈은 챙기지만 ‘총’만은 용납할 수 없어 다시 소지품 상자에 넣어두고 스위스 은행을 떠난다. 기다렸다는 듯이 누군가 자신을 미행하는 듯한 느낌을 감지한 그는 ‘케인’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된 미국 여권을 가지고 재빨리 미대사관으로 도피한다.
   미대사관의 ‘안전한’ 품 안에 잠시 의탁한 그는 이곳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경찰뿐 아니라 군인들까지도 그를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경찰관 두 명을 때려눕힌 액션 실력은 ‘빙산의 일각’이었음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신출귀몰한 액션과 과감한 두뇌 플레이를 화려하게 선보이며 수백 명의 추격자들을 따돌리고 ‘한 여자’에게로 접근한다. 제이슨이 대사관에서 눈여겨보았던 한 독일여성이 차를 몰고 떠나려는 찰나, 제이슨은 그녀를 불러 세운다.  
 

    제이슨 : 당신은 돈이 필요하죠. 난 당장 차가 필요해요.
    마리 : 내 차는 택시가 아니에요, 그럼 이만.
    제이슨 : 나를 파리까지 태워다 주면 만 달러를 주겠어요.
    마리 : 젠장, 내가 바보천지인 줄 아나?
    제이슨 : 그냥 가버리면 정말 바보예요.
    마리 : 장난해요? 사기 치냐고요?
    제이슨 : 사기 아니에요. (그는 만 달러 뭉치를 마치 야구공 던지듯 심상하게 그녀에게 던져주곤 심각한 표정으로 말한다.) 파리에 무사히 도착하면 만 달러를 더 주겠어요.
    마리 : (대사관 주변에 진을 치고 있는 경찰들을 보고 표정이 굳어지는 제이슨을 의심스런 눈길로 쳐다보며) 세상에! 경찰 때문인가요?
    제이슨 : 차를 타면 돈을 내는 게 당연하잖아요.
    마리 : (절박한 상황에서 돈을 보자 마음이 흔들리지만, 낯선 남자를 태우는 일이 영 찜찜한 듯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난 지금도 너무 복잡해요, 알겠어요?
    제이슨 : 그럼 돈을 돌려주겠어요?



   화폐는 때로 최고의 신분증명서가 된다. 그가 누구인지 몰라도 그의 화폐가 그의 ‘아이덴티티’를 증명한다. 제이슨은 결국 마리의 자동차를 타고 파리로 향한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빠른 속도로 학습하고 있는 중이다. 그는 치밀한 계획이 아니라 신체의 반사적 액션을 통해 자신의 엄청난 잠재력을 깨닫게 된다. 제이슨의 무의식은 ‘몸’이라는 유일한 비밀통로를 통해 그의 의식을 향해 끊임없이 감각의 모스 부호를 날려 보내는 중이다. 넌 지금의 네가 아니야. 넌 너를 찾을수록 미궁에 빠질 거야. 너를 찾는 길이 과연 최선일까. 네가 다룰 수 있는 무기는 총만이 아니야. 네 온몸이 곧 최첨단의 무기인 셈이지…….
   온몸의 세포가 기억한 삶의 흔적, 그 엄청난 분량의 메시지를, 무의식은 ‘몸’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의식을 향해 송신한다. 그는 그 어디라도 갈 수 있는 수많은 여권과 엄청난 돈까지 지녔지만 어딜 가나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보이지 않는 감방 안에 갇혀 살아가야 한다. 그를 쫓는 것은 한 개인이 아니라 거대한 권력기구이며 그의 모든 정보를 ‘프로파일링’하여 보유하고 있는, 제이슨 자신보다 제이슨을 훨씬 잘 알고 있는 무시무시한 비밀 조직인 것이다. 제이슨은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발견하자마자, 생사의 문턱을 가르는, 출제자도 출제 목적도 알 수 없는 엄청난 ‘시험’을 치르게 된 것이다. 

   
 

 시험은 개인을 자료의 영역 속으로 집어넣는다. 시험은 사람들의 신체와 일과의 차원에서 구성되는, 섬세하고 정밀한 모든 기록을 뒤에 남겨 놓는다. 개인을 감시 영역 안에 두는 시험은 또한 개인을 기록망 속에 넣어두는 것이다. 시험은 개인을 붙잡아 고정시키는, 두툼한 기록문서에 집어넣는다. 시험의 여러 가지 방식은 집약적인 기록과 서류보관의 체계를 동반하게 된다. ‘기록에 의존하는 권력’은 규율의 톱니바퀴 같은 장치 안에서 본질적인 부속품처럼 조립된다. 
   

- 미셸 푸코,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 나남출판, 2004, 295~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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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슨 2009-11-13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화폐는 때로 최고의 신분증명서가 된다! '때로'가 아니라 요새는 거의 '매일' 인 듯 합니다 ㅠㅠㅋㅋ

봉인 2009-11-16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를 구성하고 있는 그 수많은 데이터를 제거하면 무엇이 남는 걸까요? 나의 '아이덴티티'가 사라져버리는 걸까요? 그저 '아이덴티티 없는 나'가 남는 걸까요?

lover hurts 2009-11-16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 수많은 인공적 데이터를 제거하고 남는 '진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바로 <본> 시리즈가 아닐까요.^^

둥이 2009-11-17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공적 데이터를 제거한 '진짜 나'가 맷 데이먼이 될수 없다는게
서글픈 이유는 무엇일까여^^
역시 난 루저일 뿐인가여^^

doingnow12 2009-12-03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저..이말 너무 싫어요!-_-흥

빵꾸똥꾸 2009-12-03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루저란 말, 정말 '없어졌으면' 하는 단어 10위 안에 들죠!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