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모든 참고문헌을 찢어버린 인간의 고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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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정신의학 외에는 다른 목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전격적으로 계시처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 내과 교수에게 그 결정을 알렸을 때 그의 얼굴에서 실망과 놀라움의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내 옛날의 상처, 즉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서 소외되는 느낌이 아프게 되살아났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이유를 한층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이런 동떨어진 세계에 흥미를 느끼리라고는 그 누구도, 아니 나 자신까지도 상상하지 못했다. 친구들은 놀라고 의아해하며 나를 바보로 여겼다. 내가 내과의사로서 출세할 기회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정신의학 같은 하찮은 것과 바꿔버리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회는 누구나 당연히 잡으려고 하며 나에게도 무척 유혹적이었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2, 210~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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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의학계에서 정신의학은 철저히 버려진 황무지였다. 병원 원장이 환자들과 함께 같은 건물에 ‘갇혀(?)’ 있어야만 했으며, 정신병원은 나환자 수용소처럼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격리되어 있었다. 의사들도 일반인들처럼 정신의학을 기피했다. 정신병에 드리워진 절망적이고 치명적인 그림자가 정신의학에도 드리워져 있었다.

융은 내과의사로서 탄탄대로가 보장되어 있던 상황에서 ‘암흑의 땅’이었던 정신의학으로 발길을 돌렸다. 스스로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이 결정이 갑자기 내려진 계기는, 한 정신의학 교과서 때문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당시 ‘정신의학의 주관성과 불확실성’이 정신질환 자체가 ‘인격의 질병’으로부터 유래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융은 ‘인격의 질병’이라는 언뜻 평범해 보이는 말에서 자신의 두 가지 거대한 관심이 맹렬하게 하나의 흐름으로 합쳐지는, 가눌 수 없는 희열을 느낀다.
그는 그동안 사방팔방 헤맸지만 찾지 못했던, ‘생물학적 사실과 정신적 사실에 관한 공동 경험의 장’이 형성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 융은 정신의학이 ‘자연’과 ‘정신’의 충돌이 ‘실제 사건’이 되는 결정적인 분야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겉으로는 제1의 인격으로 ‘자연과학’을 연구하던 자신의 일상적 자아, 그리고 제1의 인격으로 완전히 통합되지 못한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격렬한 탐구열(제2의 인격)을 통합할 수 있는 학문적 장이 바로 정신의학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때까지 융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는 것조차 부끄러워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했고, 가난한 부모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의사의 길을 선택했다. 융은 자신의 제2의 인격이 관심을 갖는 ‘무의식’의 영역이 매우 ‘비실용적’인 분야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며, 제1의 인격의 활동 영역, 즉 내과의사로서의 길에 만족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정신의학이 ‘인격의 질병’을 다룬다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이 문장에서 융이 ‘계시’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오랫동안 홀로 고민해왔던 문제가 아주 작은 계기에도 엄청난 폭발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인격’이라는 인문학적 시선과 ‘질병’이라는 자연과학의 시선이 융에게 있어서는 제2의 인격과 제1의 인격을 표상하는 대리물로 체험되었던 것이 아닐까. 즉 그는 자기 인격의 분열을 오랫동안 감지하고 있었고 그 분열의 원인을 무의식에서 찾았기 때문에 미세한 자극에도 곧바로 폭발해버릴, 욕망의 임계점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융의 자서전을 휘감는 분위기는 바로 이것이다. ‘나는 내가 어떤 자아로 분열되는지를 알고 있다’는 것. 아마 융과 내쉬의 결정적인 차이도 이 부근에서 발원할 것이다. 내쉬의 분열이 무의식과 의식의 단절로 인해 심화된 것이라면 융의 분열은 자신의 분열을 ‘정상성’의 일부로 인정했다. 융은 무의식의 잠재성을 최대한 의식의 활동으로 끌어올리려 했으며, 의식의 시선으로 무의식의 활동을 최대한 가까이서 관찰하려 하는 태도가 정신의학의 시선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아까지도 나 자신의 일부라는 것을 일찍부터 받아들인 융의 경우는 오히려 자기 내부의 분열을 즐겼다. 그가 자신의 인생을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로 규정한 까닭도 무의식의 자기실현 과정을 ‘의식’의 프리즘으로 생생히 복원해내는 것을 필생의 과제로 삼은 까닭이었다. 내쉬가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와 ‘필요 없는 정보’로 두뇌 활동을 철저히 구별하면서 의식의 ‘체’에 걸러지지 않은 잔여물을 관찰할 기회를 스스로 박탈했다면, 융은 ‘체’를 치는 행위 자체가 의식의 활동임을, 우리는 매 순간 의식의 검열로 무의식의 활동을 철저히 감시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융은 의식의 ‘체’에서 떨어진 고운 밀가루뿐 아니라 체를 빠져나가지 못한, 즉 의식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한 자신의 버려진 무의식을 ‘꿈’에서 찾으려 했다. 그리하여 그것이 ‘나만의 비정상성’이 아니라 ‘인류의 집단 무의식’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으로까지 스스로의 이론을 밀어붙였다.

내쉬에게 정신분열이 무의식으로부터 도피하려 했던 천재의 자기파멸적 결과였다면, 융은 자신의 분열조차 ‘정상성’의 징후로 판독하면서 그 분열의 힘을 오히려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긍정적 성과물로 이해하려 노력했다. 즉 융은 무의식의 ‘어두운 부분’까지도, 무의식에 ‘가장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까지도, 자신의 일부로 기꺼이 인정함으로써 무의식의 각종 공격으로부터 일종의 심리적 항체를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이런 생각은 환자들을 돌보면서 더욱 정교하게 이론화되었다. 그에게 환자들은 ‘정상인과 뭔가 다른 비정상인’이 아니라 정상인의 비정상성과 비정상인의 정상성을 역설적으로 확인케 해주는 ‘우리 안의 타자’였다.
정상인이 자신의 비정상성을 최대한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게 방어하는 것에 비해 ‘비정상인’으로 분류되는 정신질환자들은 오히려 비정상 가운데 내재한 정상성을 보여주는 거울이었던 것이다. 융은 환자들의 각종 증상을 인류의 ‘정상성’의 발현 결과로 보았기 때문에 환자들로부터 항상 ‘인류의 무의식’에 관한 지혜를 배울 수 있었다. 융은 인류의 역사와 신화 연구를 통해 정신 분열의 징후를 ‘집단적 신화’의 차원에서 해석하여 ‘통시적 보편성’을 발견해내려 했고, 현실 속에서는 임상 경험과 사례를 통해 ‘공시적 보편성’을 발견해 가고 있었다.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 등 융의 핵심적인 개념도 이러한 종횡무진의 사례 분석에서 나온 열매였다.
융은 정신병에서 미지의 섬뜩한 무엇, 새롭고 특이한 무언가를 본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존재의 바탕을 발견했다. 융은 자기 자신을 질병의 ‘판단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질병을 판단하는 순간 그는 의사의 권위를 덧씌워 환자의 질병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융은 환자가 연출하고 있는 무의식의 연극 속에서 그 자신을 한 명의 배우로 참여시키고자 노력했다. 모두가 무의식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거나 무의식의 ‘추악함’과 마주하지 않으려고 할 때, 융은 환자들의 총천연색 ‘망상’ 속에서 ‘아름다움’을 보았다. 융에게 무의식은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예술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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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환자는 제수이트에게 박해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 다른 환자는 유대인이 자기를 독살하려 한다고 믿고 있으며, 제3의 환자는 경관이 자기를 뒤쫓고 있다고 하는데, 이런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사람들은 환상의 내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낳고 이를테면 그냥 일반적으로 ‘피해망상’이라는 식으로 말해버렸다. (……) 프로이트가 1909년 취리히로 나를 방문했을 때 나는 바베트의 사례를 그에게 제시했다. 나중에 그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이토록 추한 여성과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함께 지내는 일을 참아낼 수가 있었단 말이오?” 나는 좀 멍해져서 프로이트를 바라보았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생각은 결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그런 아름다운 망상을 가지고 그토록 재미있는 일들을 이야기해주었으므로, 나는 그녀를 어떤 의미에서는 친구 같은 노파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녀의 괴기한 헛소리의 혼돈 속에서도 인간적인 모습이 나타났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2, 242~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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