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가 된지 두 달여 되어 간다.
알라딘 서재에 퇴사 소식 전한 거랑, 트위터에 가끔 한두 마디 올린 것 말고는
문장을 만든 일이 거의 없다.
편집자로 지낸 13년, 문장을 들여다보고 고치고 만들고 하는 데 지쳤나 보다.
(더 오래 하시면서도 열정을 잃지 않는 선배들을 떠올리고 보면
사실 난 적성에 안 맞는 거였어, 무릎이 꺾인다. ㅠㅠ)
퇴사하고 한 달 남짓은 오히려 전보다 바빴다.
회사 다니는 동안 바쁘다고 미루어온 만남들도 있었고,
마무리 단계라 손을 못 떼서 갖고 나온 일도 좀 해야 했고,
은행일이며 운전면허 갱신 신청 같은
사소한 듯하지만 중요한데 평일 낮에만 할 수 있는 일들도 해야 했다.
틈틈이 밀린 TV 시청도 해야 했다. (실망스럽게도 낮엔 재밌는 게 별로 없었다.)
새로 뭔가 배우는 걸 하나 등록해서 일주일에 두 번 서울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가급적 버스를 타기로 마음 먹어 버리는 바람에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걷는 시간, 거기서 버스 타고 서울까지 나가는 시간,
내려서 공부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는 데 내 인생의 한 부분을 바쳐야 했다.
그리고 돈 내고 단체기합 받고 감사하다고 인사까지 한 뒤 허기진 채로 집에 돌아와
선 채로 사과를 우적우적 씹어 먹으며 요가 선생님을 미워하는 일에도 익숙해져야 했다.
제일 중요한 부분은 이것,
회사 다닐 때는 주말에 몰아서 하던 집안 일의 프로세스를 새로 만든 것이다.
매일매일 집에 윤이 나게 하겠다는 과욕과 내가 이러려고 백수 됐나 하는 낙담 사이를 오가며
죽 끓는 듯한 변덕을 퐁퐁 부리다가_참아주신 남편님 감사합니다_
조금 귀찮아도 그럭저럭 유지할 수 있는 적정 강도를 겨우 찾았는데
그것은 바로 '매일 조금씩 한다'는 것이다. (역시 파랑새는 우리집에 있었어!)
물론 난제들도 남아 있다.
만날 낡은 옷만 입고 있긴 싫은데, 집에선 대체 무슨 옷을 입고 있어야 되는 거지?
*
사실은 한동안 알라딘에 서운하고 서먹해서 다른 데 블로그를 열려고 했다.
새로운 일을 구상하는 데 필요해서, 일로 하는 것도 절반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블로그에 글을 쓰려고 하면 막 처량해지고
다음 포스팅을 올릴 재미도 안 났다. 왜 그럴까 고민하다 답을 찾았다.
일을 해온 13년, 고생도 하고 상처도 받았지만 대체로 즐거웠고 후회가 남지 않는 것,
출판에 대한 굳은 신념이나 각별한 자부심도 없고,
좋은 책을 만들겠다는 투철한 사명감 같은 것도 없던 내가 이만큼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내가 그 일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떠나기로 결정했을 때 인생의 한 장이 넘어갔다는 생각에 엉엉 울었지만
미련이 남지 않았던 것도, 그 일을 충분히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블로그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나는 친구들이 좋고, 친구들한테 미주알고주알 참견하는 게 좋고,
친구들이 감 놔라 대추 놔라 훈수 두는 게 좋다.
여기 오니까 신난다. (이럴 줄 알았지, 내 이럴 줄 알았어.)
강아지 연구소도 열고, 표 안나게 서재 손질도 좀 했다.
앞으로 자주 쓸게요! (외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