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웃 이야기 동화는 내 친구 65
필리파 피어스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고경숙 그림 / 논장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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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2학년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열 때문에 처음으로 조퇴를 했다. 나는 집에 가는 길이 너무 낯설어서 놀랐다. 그게 지금 나다니는 어린이가 나밖에 없기 때문이란 걸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왠지 잘못을 저지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한편 이상하게도, 누군가 너 왜 밖에 나와 있니, 물어봐주었으면 했다. 저 조퇴한 거예요, 선생님이 가도 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나는 눈치가 보이는 동시에 당당했던 것이다. 몸에는 기운이 없고 머리에 찬 바람이 꽉 찬 것처럼 눈과 코가 매웠다. 산동네에 있는 집까지 가는 길은 당연히 그날 더욱 멀었다. 집에 가려면 긴 계단 두 개를 거쳐야 했는데, 첫 계단을 다 오른 다음 나는 꼭대기에 걸터 앉아 여태 온 길을 바라보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시간도 풍경도 낯설었고, 너무 아픈데 혼자 있었다. 그 사실이 무서웠고, 이상하게도 뿌듯했다.

 

이 책에 실린 단편동화들은 그런 이상한 순간들을 기록했다. 「목초지에 있던 나무」에서 리키네 옆집 목초지에는 거대한 고목이 있다. 너무 당연한 풍경이어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는데 굵은 가지들이 불시에 떨어지자 사람들은 나무를 베기로 한다. 제 방 창문 밖으로 언제나 나무가 있는 풍경을 보아온 리키는 나무가 없는 목초지는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나무가 쓰러지는 광경은 볼만 할 것 같아서, 평소 어울리고 싶었던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결국 사내아이 여섯은 어쩌다 직접 이 나무를 쓰러뜨리게 된다. 어른들에게 꾸중을 듣고 몸살까지 나지만 아이들은 뿌듯해하고 저녁엔 몰래 자기들이 쓰러뜨린 나무 위에 나란히 서서 승리의 노래도 부른다. 리키는 바람대로 친구 패거리에 든다. 여기에서 이야기가 끝났다면 평범하게 좋은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리키는 '지옥의 벌채꾼' 패거리가 된 것을 기뻐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가 자신이 흘린 눈물 때문에 잠이 깬다. 까닭 모를 슬픔이 그를 깨운 것이다. 리키는 아마 나무를 쓰러뜨린 개선 장군이 된 기쁨만큼 나무에 연민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삶에 대한 감각이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악동들과 어울려 노래를 부르는 것도 삶이고, 고목이 쓰러지는 것도 삶이라는 것을 언젠가 불현듯 깨달을지도 모른다.

 

도시에 사는 사촌동생을 위해 조개를 잡아 임시로 가두었지만, 바닥을 파고드는 조개를 보면서 왠지 놓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댄(「프레시」), 어렵게 나선 작은 모험에 이웃집 동생을 달고 가면서 혼자 있고 싶은 마음과 동생을 챙기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팻(「운 좋은 아이」)도 그런 갈등을 겪는다. 아이들은 나름대로 선택을 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인다. 어쩐지 쓸쓸해 보인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다시는 물 밖으로 나가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과 싸우면서 얻은 양철 상자를 벽난로 위에 두고 "나는 양철 상자를 죽을 때까지 간직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 백 살까지는 거뜬히 살 것 같다"고 자랑스러워하는 '나'(「다시 물 위로」)를 보라. 이 아이는 결코 물에 들어갈 때와 같은 아이가 아니다.

 

골목 끝 계단에 걸터앉아 현기증을 느꼈던 어린 날 한 순간은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때는 설명할 방법을 몰랐지만 아마 나는 고독했던 것 같다.  그 시간과 공간을 짧으나마 오롯이 혼자 차지했다는 자부심 때문일까? 어떤 교훈을 주는 것도, 달콤한 추억을 남긴 것도 아닌데 그때가 떠오를 때면 이상하게도 조그마한 용기가 생긴다. 『우리 이웃 이야기』가 일깨우는 고독도 그런 종류의 것이다. 섬세한 문장을 침착하게 따라 읽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어린이나 어른 누구나 읽어도 좋을 걸작 단편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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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11-05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은 리뷰다. 나는 앞으로 동화는 안 읽고 네꼬님의 동화 리뷰만 읽고 살아도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아마 백 살까지는 거뜬히 살 것 같아요.

네꼬 2013-11-05 23:26   좋아요 0 | URL
ㅎㅎㅎ 동화책도 읽어요! 같이 백 살까지? ㅋㅋㅋ

레와 2013-11-05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에게 고독이라는 말이 어울리나 잠깐 생각했어요.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를 떠나 아이들이 고독이라는 감정을 모를꺼라 지레 짐작한 어설픈 어른이 저였어요. 네꼬님. 분명 나도 그 비슷한 감정을 알았을텐데 말이에요.

음.. 어제 '수퍼맨이 돌아왔다'라는 프로를 봤는데요. 거기 배우 장현성과 두 아들이 나와요. 하루를 마감하는 의미로 아빠가 두 아들을 데리고 술을 마셔요. 본인은 맥주 큰아들(11살)은 오렌지 쥬스 작은 아들(7살)은 요구르트. 아빠가 아들들한테 물어요. '지금까지 인생에서 가장 기뼜을 때가 언제야? 그리고 가장 슬펐을때는?'

저는 이 질문을 아빠가 아이들한테 했다는게 신선(당황스러움이 포함된 어색함에 좀 더 가까움.ㅋ) 한거에요! 아빠가 아이들을 단순히 아이로 대하는게 아니라 사람으로 대하는구나.. 나라면 열살 된 아이한테 저런 질문은 안 했을것 같은데..
단순히 '아이니깐 어리니깐 이런건 몰라도 돼' 또는 '이건 모르겠지' 라는 선을 그어놓고 어른 흉내를 내고 있는 제 자신이 보이면서 아후 부끄러운거에요.ㅎㅎㅎㅎ;;;;

어렸을 땐 제가 이렇게 어설픈 어른이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ㅋㅋㅋㅋㅋㅋ;;

네꼬 2013-11-05 23:29   좋아요 0 | URL
어떤 철학자는 레와님, 아이들이 고독해야 자란다고 했대요. 고독한 시간이 있어야 생각도 하고 그런다고요. 저도 그땐 몰랐죠. 나중에도 몰랐고, 지금에야 어렴풋이 그때 그 기분이 그런 거였나 짐작해요.

와, 제가 이 책 읽으면서 생각한 게, 레와님이 하신 말씀이랑 비슷한데, 글에 녹여지지 않아서 묻어 두었어요. 아이들을 낮잡아보지 않고 한 인격으로 존중한 동화들이거든요. 레와님 똑똑하다 어떻게 알았지? 그러니까 부끄러우실 거 하나 없어요. 완전 똘똘하고 야무진 레와님. 자꾸 반성해서 자꾸 더 훌륭해지는 레와님!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창비시선 369
권혁웅 지음 / 창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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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완 감독의 영화 "아라한 장풍 대작전"은 내가 반복해서 본 영화 중 하나다. 특히 윤소이가 정말 무술 같은 걸 배우는 게 가능한가 묻는 류승범한테 일상 속 숨은 도인들을 보여주는 장면을 좋아한다. 거의 자기 키만 한 짐을 머리에 이고 양손 놓고 유유히 걷는 사람, 손가락 사이에 구두를 수십 켤레 끼고 지나가는 사람, 냉장고쯤 번쩍 들어 이삿짐 트럭에 싣는 사람. 눈을 크게 뜨고 보라, 세상에 고수가 얼마나 많은가. 권혁웅 시집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를 읽는 동안 그 장면이 떠올랐다. 시집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눈을 크게 뜨고 보라. 시가 없는 삶이 어디 있나.

 

시가 있는 삶은 그럼 무엇인가. 시계 방향을 따라가면 죽음을 맞이하니, 반시계 방향으로 고스톱을 치며 "힘을 합쳐 시간에 저항하는" 동네 할머니들의 삶이다(고스톱 치는 순서는 왜 왼쪽인가). "현세와 통하는 스위치를 화끈하게 내려버린" 취객이 "다시 직립 인간이 되지는 않겠다는 듯이 / 부장 앞에서 목이 굽은 인간으로 / 진화하지 않겠다는 듯이" 수평으로 편안하게 누워 있는 시간이다(봄밤). "이자는 필요 없으니 원금만 돌려다오" 청춘을 달라고 격렬하게 외치는 주부들의 노랫소리다(주부노래교실). "불굴의 의지로 최선을 다해 망가지는" 아들을 애타게 기다려도 "말 거는 전화는 경찰서에서만" 오는 어미들의 삶이다(호랑이가 온다2). 심지어, 음식에 단번에 앉기 쑥스러워 끈끈이 위에 잠시 앉으려다 영원히 붙잡히는 파리의 짝사랑이다(짝사랑). 모두의 삶에 시가 있다. 그것을 시인은 부지런히, 엄숙하게 받아 적는다. 엄숙하게.

 

애인은 토막난 순대처럼 운다

권혁웅 

 

 

지금 애인의 울음은 변비 비슷해서 두시간째

끊겼다 이어졌다 한다

몸 안을 지나는 긴 울음통이 토막 나 있다

신의주찹쌀순대 2층, 순댓국을 앞에 두고

애인의 눈물은 간을 맞추고 있다

그는 눌린 머리고기처럼 얼굴을 눌러

눈물을 짜낸다

새우젓이 짜부라진 그의 눈을 흉내낸다

나는 당면처럼 미끄럽게 지나간

시간의 다발을 생각하고

마음이 선지처럼 붉어진다 다 잘게 썰린

옛날 일이다

연애의 길고 구부정한 구절양장을 지나는 동안

우리는 빨래판에 치댄 표정이 되었지

융털 촘촘한 세월이었다고 하기엔

뭔가가 빠져 있다

지금 마늘과 깍두기만 먹고 견딘다 해도

동굴 같은 내장 같은

애인의 목구멍을 다시 채워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버릇처럼 애인의 얼굴을 만지려다 만다

휴지를 든 손이 변비 앞에서 멈칫하고 만다  

 

 

시집 속의 삶들이 우리를 웃게 하지만 결코 우습게 보이지 않은 것은 시인이 연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이의 삶에는 눈물이 핑 돌지만 결코 그가 불쌍하지 않은 것은 시인이 그의 삶을 존경하기 때문일 것이다. 울고 웃고 쓰러지고 버티면서 장하게도 살아남는 것이 삶이라고 시집은 웅변한다. 재미있는 소설을 읽을 때처럼, 첫 시를 읽고는 앉은자리에서 마지막 시까지 읽었다. 좋아서 표시해둔 부분은 아직 하나도 인용하지 못했는데, 이 글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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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10-21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시가 없는 삶, 시가 없는 순간이 없군요.^^ 동감되는 것 같아요.
요즘 저는 시에 좀 더 꽂히는데요.
그래서인지 이 시도, 연애의 치졸함과 지난함도 왠지 더 와닿네요.
삶이 연애랑 닮은 것도 같고.
"시간의 다발을 생각하고 마음이 선지처럼 붉어진다"
참 좋은 계절에 좋은 시집 한 권 맛보고 가요^^
행복한 하루하루 보내시길요^^

네꼬 2013-10-28 15:33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안녕하세요? 이 시집은 별다른 마음가짐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마음에 들어서 이야기 책 읽듯 다 읽어 버렸어요. 뜨끈뜨끈하고 재밌고, 또 사실 좀 귀여운 시집이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지금 프레이야님 앞에서 시집 어쩌고 하고 있는 건가요? 제가 지금 번데기 앞에서 인상 쓰고 있는 건가요?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_-;; )

아무개 2013-10-21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번째 단락에 인용구들이 참 ....그렇네요.
그래서
장바구니로 쏙~

시 없는 삶이 어디있을까만은
아직도 제게 시는 사는것 만큼 쉽지 않네요.

네꼬 2013-10-28 15:34   좋아요 0 | URL
아무개님. 우왕 '시는 사는 것만틈 쉽지 않다'니 시적이군요!
이 시집은 (위에도 썼지만) 재미있고 따뜻한 책이었어요.
저도 시를 잘 모르는데(동지!) 좋아하면서 읽을 수 있었어요. 추천추천.

치니 2013-10-21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도, 글도, 참 좋아서 가슴이 벅차요.

네꼬 2013-10-28 15:36   좋아요 0 | URL
치니님! 으왕 이런 사랑이라니! (부끄러움 모르고 이런 칭찬을 덥석 받습니다.) 치니님, 저랑 남편이랑 다, 두리 보고 싶어요. (제가 "나 제주도에 아는 개 있다?" 하고 자랑해두었음.)
 
[세계와 만나는 그림책]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세계와 만나는 그림책
무라타 히로코 글, 테즈카 아케미 그림, 강인 옮김, 츠지하라 야스오 감수 / 사계절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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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이름난 작가가 어린이들과 함께 저개발국가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쓴 동화를 읽었다. 이야기는 인상적이지 않았는데, 작가의 말은 뜻밖에 마음에 남았다. 함께 간 어린이들이 봉사 여행을 통해 한층 성숙해졌다면서 아이들이 "이 나라 애들은 왜 이렇게 못 사는 거냐."며 눈물을 글썽거린 것을 그 증거로 내세웠고, 우리나라에도 도울 어린이들이 많은데 왜 굳이 다른 나라까지 돕냐는 주변 사람들의 핀잔에 자신은 "한국전쟁 후 도움을 받던 나라가 이만큼 성장해 남을 도울 위치가 되었다는 것을 알려 우리나라의 달라진 위상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응수한다며, "우리 스스로 노력해 다른 나라에 가서 인종차별을 받지 않도록 능력을 키워야 된다"고 쓰여 있었다. 남을 돕는 선의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그 말들에 숨어 있는 시혜적인 시선과 미묘한 열등감이 불편했다.

 

어쩌면 세계를 이해하는 데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감수성이 아닐까? 세계가 아주 넓고, 문화는 다양하며 사람들은 다 다르고 또 비슷하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감각이 필요하다. 어린이들이라면 특히 그렇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계와 만나는 그림책』은 바로 그런 감수성을 키워주는 책, 여기에 흥미로운 정보들이 잘 녹아 있는 책이다.

 

"여러 가지 나무가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 여러 동물이 모이듯이, 세계에는 여러 사람이 살고 있어." 첫 두 장면에서 나는 마음을 빼앗겼다. (미리보기를 꼭 보세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전제와 비유, 이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다른지 찬찬히 설명한다. 신체의 특징 -> 멋 내기 -> 민속 의상 -> 전통적인 집의 특징 -> 좋아하는 음식 -> 간식 -> 시장 풍경 -> 독특한 생활 용품 -> 운송수단 -> 놀이-> 운동 -> 음악과 춤 -> 종교 -> 언어 -> 인사법의 순서다. 세계의 삶이 비슷하게 현대화된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TV 여행 프로그램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옷맵시나 가옥의 특징을 전통에 초점을 두어 설명하는 방식은 독자의 흥미를 확 끌어당긴다. 신체와 같이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것에서 시작해 추상적인 생활습관 쪽으로 설명을 이어가는 것도 아주 효과적인 구성이다. 

 

 

 

(죄송하지만, 알라딘에 소개된 그림 갖고 왔어요)

 

 

그리고 그림이 적절하다. 간결한 선으로 대상의 특징이 잘 드러나게 그려졌기 때문에 오히려 사진보다 효과적으로 정보가 전달된다. 이렇게 단순한 선 덕분에 화가 자신의 특징(국적을 포함해서!)은 뒤로 숨고 객관적인 정보가 남는 것이다. 객관적이서서 오히려 냉정하게 보일 수도 있는 그림을 따뜻한 색감이 보완해준다. 전략적인 그림인 것이다!  "놀이 방법도 여러 가지야. 그치만 놀기 좋아하는 건 모두 똑같아. 여러 나라 사람들과 함께 놀고 싶어." 이렇게 핵심을 잘 잡아낸 지문들과, 소소한 듯하지만 흥미로운 캡션도 좋다.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라면 큰 지문을 읽고 그림을 손으로 짚어가며 캡션의 정보를 읽을 수 있을 것이고, 스스로 읽을 수 있는 어린이라면 읽고 싶은 부분만 골라 읽어도 좋을 것이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마지막 지문, " 함께 사는 지구. 서로 다르니까 더 재미있어." 서로 존중하자거나, 사이좋게 지내자거나, 도와주자거나 하는 군더더기없이, "서로 다르니까 더 재미있어."가 결론이다. 어린이들에게는 이로써 충분하지 않은가?

 

TV와 인터넷 덕분에 오늘의 어린이들은 더 많이 '세계'라는 정보에 노출되어 있다. 다문화가정(대체할 말이 있었으면 좋겠어요)이 많아지면서 어린이들에게 "다르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노력도 많아졌다. 하지만 많은 경우 세계의 다양성을 가르치는 책들은 "(약자인) 다문화 가정 아이들을 배려하자"는 구호에서 시작된 것이어서 결국 그 아이들을 타자화하거나, "세계는 넓다"는 것을 알리고 필요한 지식을 전달하는 데 머물곤 한다. 그런데 다양성이란 게 뭔지 진짜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식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소양, 즉 감수성이 전제가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세계를 이해하는 감수성이라니,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은 오히려 단순한 것이다. 세계는 넓고, 문화는 다양해. 사람들도 다 다르지만 어떤 것은 똑같아. 그게 재미야. 이 책과 함께라면 어른들도 그 감수성을 새롭게 배울 수 있을 것이다(일단 나부터).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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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3-10-16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문화 가정, 대체할 말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네꼬님의 회색글씨에 격한 공감 누르고 가요..
초면에, 초절정 인기 서재에, 처음으로 첫댓글 남기려니 뒤통수가 뜨끈하네요.ㅎㅎ

네꼬 2013-10-16 22:57   좋아요 0 | URL
견디셔님 안녕하세요? 인사 나누는 것은 처음이지만, 저도 견디셔님 알고 있었어요. (이런 닉네임을 어떻게 모를 수 있겠습니까!) 인기라뇨! *_*

다문화가정이라는 말이 생길 때 사람들의 마음을 알 것도 같지만 요즘은 참 내키지 않아요. 다른 적절한 말이 있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없어지든가!

다락방 2013-10-17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은 어제 했고 오늘은 이 댓글 달러 왔어요.

훌륭한 리뷰입니다!!!!!!!!!!!!!!!!!!!!

네꼬 2013-10-17 13:18   좋아요 0 | URL
헤헤헤헤헤헤헤헤 (<- 이런 표정을 짓고 있어요.)

꿀꿀페파 2013-10-22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보고갑니다.

네꼬 2013-10-28 15:30   좋아요 0 | URL
꿀꿀페파님 안녕하세요? 이거 고맙습니다. (^^)
 
[피카이아]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피카이아
권윤덕 글.그림 / 창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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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가 보는 책이라고 해도, 어려운 지식은 어렵게 전하는 게 맞다. 오래 두고 고민해야 하는 내용을 간단히 전하려고 술수를 쓰면 안 된다... 이런 생각을 내가 해낸 거면 평생 잘난척하며 살 수 있을 텐데, 안타깝게도 이건 어린이책을 만드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경전 삼아 곁에 두고 보는 책 『책 어린이 어른』(폴 아자르)에 나오는 얘기다. 어린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잘 전달하는 것과, 손쉬운 설명으로 '아는 것 같은 느낌'을 전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뜻일 것이다. 『피카이아』를 읽으면서 다시금 그 대목을 떠올렸다. 이 책은 어려운 이야기를 담은, 간단치 않은 책이다.

 

한국 그림책 작가중 가장 사랑받는 작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권윤덕과 척추동물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고생물 '피카이아'의 조합은 얼핏 신기하게 보인다. 그림책과 진화론이라니. 게다가 책도 두껍다. 아름다운 표지와 그림이 무게를 좀 덜어주지만, 저 멀리 고생대의 피카이아에서 인간의 기원을 찾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고, 그로써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반추하는 책이 쉬울 리 없다. 그러나 작가는 차근차근 독자를 설득하고 때로는 질문하면서, 어렵지만 생각해보아야 할 것들, 어렵기 때문에 오래 생각해야 하는 것들을 글과 그림으로 풀어놓았다.

 

도서관에서 개 '키스'에게 책을 읽어주는 아이들이 묵묵한 리스너 키스에게 각자 속얘기까지 털어놓는다. '폐지 145킬로그램을 모아서 13500원을 버는' 할아버지와 사는 상민이는 출발부터 불평등한 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 뜨개질을 좋아하는 미정이는 공부밖에 모르는 엄마의 압박 때문에 올이 풀리듯 자기 존재가 사라지는 것만 같다. 폭력적인 부모의 무관심에 성폭력에 노출된 윤이는 목소리가 사라지는 듯하고, 정리해고 위기에 놓인 아빠 때문에 걱정이 많은 채림이는 헤어진 가족이 다시 모여 살기를 소망한다. 고기를 좋아하는 강안이는 이따금 친구의 말을 떠올리며 육식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 아이들에게 '피카이아'를 알려준 것은 혁주다. 혁주는 만난 적 없는 엄마를 그리워하다, 책에서 '피카이아'를 처음 알게 되었다.

 

"고생대 캄브리아기에 생겨났던 많은 동물들이 5억 3천만년 전 갑자기 멸종했다. 어떤 종은 멸종하고 어떤 종은 살아남은 원인이 무엇일까? 훌륭한 가시를 가졌고 개체 수도 많았던 마렐라, 몸집이 크고 먹이를 부수어 먹을 수 있는 턱을 가졌던 최고의 포식자 아노말로카리스는 멸종하고, 왜 피카이아가 살아남았을까? 피카이아는 모양이 특별하지도 않고 개체 수도 많지 않았는데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어쨌든 그렇게 많은 동물들이 멸종한 시기를 피카이아는 이겨 냈고, 그래서 인간이 생겨날 수 있었다." (112면)  

 

피카이아가 그랬듯이, 남보다 뛰어나야만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는 걸 상민이는 어렴풋이 생각한다. 뜨개질이 그렇듯 경쟁보다는 협동이 좋기 때문에 미정이는 친구를 찾는다. 인간은 스스로 치유하기 때문에, 윤이는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는다. 무리지어 사는 흑두루미를 보며 가족을 떠올리는 채림이도, 고기는 먹지만 '육식'이 무얼 뜻하는지는 생각하는 강안이도 각자 고민을 안고 그것을 피하지 않으면서 자기 생각을 다져간다. 역시 피카이아가 그랬듯이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살 이유가 된다. 어렵지만 놓쳐서는 안 될 생각이다.

 

작가는 진중한 주제, 어쩌면 논란이 될 수도 있는 여러 주제들을 정면으로 다루면서 독자 역시 피하지 않기를 주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를 옥죄지 않는 것은 차분한 톤의 아름다운 그림 덕분이다. 독특한 글 텍스트 배열 방식도 독자가 숨을 고르며 읽어갈 수 있게 한다. 책 뒤에 실린 작가 인터뷰와 참고 그림도 작품 이해를 돕는다. 다만 군데군데 어려운 서술이나, 어린이들의 대사에 작가의 목소리가 묻어나는 점이 아쉽다. 

 

이렇게 '어렵고 두꺼운 그림책'을 누가 읽으면 좋을까? 작가의 말에 힌트가 있으니, 이 책은 읽어주는 그림책이 아니라 '읽는' 그림책, 어린이와 어른 누구나 읽을 만한 책이다. 읽는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방식도 수준도 다를 것이다. 어린이가 혼자 읽는다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해볼 만한 책이다. 아름다운 것들이 종종 그렇듯, 어렵기 때문에 문득 더 아름다운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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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9-25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 리뷰는 오늘 내가 하루종일 읽은 글 중에서 가장 좋은 글이에요. 네꼬님이 신간평가단을 해서 무척 좋아요. 어쨌든 정기적으로 글을 꾸준히 써줄테니까. 다음에도 꼭 신간평가단 해주도록 해요, 알았죠?

나도 읽어볼래요.

네꼬 2013-09-25 23:52   좋아요 0 | URL
다락님, 좋은 책인데 리뷰 쓰기가 어려웠어요. 으아 나 똑똑했으면 좋겠다. 내 지식과 언어의 한계를 느끼며 잠깐 절망했다가, 에이 뭐 그럴 것까지야, 하고 씩씩하게 마무리해보았어요. 근데 다락님이 좋다니까 좋군요. 껄껄껄.

레와 2013-09-27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맙소사.. 이 리뷰 정말 좋잖아요!!
네꼬님 나 이 리뷰에서 위로 받았어요. 어디라고 콕 찝어서 말 할순 없는데. 읽고나니깐 뭉쳐있던 뭔가가 툭툭 터졌어요. 고마워요.^^


네꼬 2013-09-30 20:58   좋아요 0 | URL
이거 참.. 이럴 때 의연하게 껄껄 웃고 말고 싶지만... 이런 칭찬을 받으면 저도 모르게 상모를 돌리며 꽹가리를 치게 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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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쉬운 한 그릇 요리 - 간편해서 좋아
함지영 지음 / 시공사 / 2013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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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상차림은 보통 밥과 국, 김치를 포함한 밑반찬을 바탕으로 한다. 나의 경우 국을 생략하고 찌개를 올리거나 고기나 생선을 주재료로 한 요리를 더하거나 경우에 따라 밑반찬만으로 밥을 먹거나 하는 식이다. 그런데 요즘은 혼자 먹는 때가 많아서 밑반찬은 고사하고 감자나 떡으로 대강 '때우는' 때가 많아 서럽던 차. '한 그릇 요리' 컨셉의 책이 일단 반가웠다.

 

이 책은 차리기 손쉽고, 어느 정도 포만감도 주는, 또 맛도 있는 한 그릇 요리들을 소개한다. 사실 이 책을 구해서 보는 사람들은 이미 요리책을 몇 권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데, 나 역시 그렇다. 이전 요리책들이 주로 밥, 국, 찌개, 반찬 등의 구분으로 요리를 소개하는 것이 비슷비슷하다면 거기에 비해 이 책은 '한 그릇 요리' 컨셉에 충실하게 밥, 죽, 면, 탕 등 비교적 간소하게 차릴 수 있는 메뉴와 맛탕이나 핫도그 같은 간식거리를 소개한다. 이제는 요리책의 필수요소처럼 된 '육수 내기' '계량하기' 등 요리 초보자들을 위한 기본 정보와 군데군데 소개한 팁들도 충실히 담긴 편이다.

'베이컨김치볶음밥', '스팸달걀밥'처럼 "요리"나 "레시피" 같은 단어를 쓰기엔 좀 싱겁게 느껴질 정도로 간단한 메뉴부터 '단호박해물찜', '애플타르트'처럼 요리에 자신감이 붙었을 때 도전해볼 만한 복잡한 메뉴까지 무려 123가지나 되는 요리가 소개된 것도 장점이다. 꼭 이 책의 레시피를 따르지 않더라도 딱히 요리할 메뉴가 떠오르지 않을 때 좋은 참고가 된다.(사실 이 책을 받은 날 바로, 맨처음 소개된 새우양파덮밥을 내 맘대로 해서 먹었다.) 또 한 가지, 완성접시들이 예쁘고 장식도 세련되어서 사진을 보는 것만도 눈이 아주 즐겁다.

 

그런데 책을 넘겨 보는 동안 나는 계속 고개를 갸웃했다. 제목을 비롯해 표지 어디에도 이 책이 '가족이 있는 사람'을 전제로 했다는 내색이 없는데, '한 그릇 요리'라는 명확한 컨셉이 오히려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 것 같은데, 정작 본문은 '남편 입맛에 꼭 맞춘 한 그릇 요리' '아이가 잘 먹는 한 그릇 요리' '나를 위한 한 그릇 요리' 등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한 달에 한 번 즐기는 특별한 요리' '주말 낮에 즐기는 간식거리' 챕터도 있지만 이미 가족이 컨셉으로 들어와 있는 셈.) '강된장부추비빔밥'과 '떡갈비쌈밥'은 남편을 위한 요리로, '소시지볶음우동'은 아이를 위한 요리로, '가지덮밥' '꼬마 김밥'은 나를 위한 요리로 꼭 나누어야 했을까? 별것 아닐지 모르지만 혼자 사는 사람(특히 남자) 독자들에게는 좀 당혹스러운 구성은 아닐지, 왠지 정말 왠지 나는 그런 게 마음에 걸렸다. 또 사소한 일이지만 (나는 왜... ㅜㅜ) 계량 단위에 '꼬집'이라는 단어를 쓴 것도 나로선 내키지 않았다. 한번 들으면 딱 아 얼마큼 넣으라는 거구나 하고 알 수 있는 '꼬집'이라는 단위는 참 귀엽고 직관적인 단어다. 그렇지만 꼭 책에서까지 이 말을 써야 했을까? 어차피 일러두기에 "꼬집, 조금, 약간 : 소금이나 후춧가루 등을 엄지와 검지로 살짝 집은 정도를 말해요."라는 설명을 붙일 것 같으면, '꼬집'이라는 단어는 안 써도 되지 않았을까? 참고로 이 뜻에 대응하는 우리말로 '자밤'이라는 단어가 있다.

 

내 손으로 밥을 해 먹으면서부터 끊이지 않는 고민.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귀찮은 고민이 바로 '뭘 해 먹을까?'다. 이 책은 메뉴 정하기의 참고서로, 이만하면 혼자 먹더라도 해보자 싶은 요리들의 안내서로서 의미가 있다. 자격증 없는 요리사 레벨을 1~5로 나눈다면(5가 높은 것) 자기가 최소 2레벨은 된다고 생각하는 요리사들이 보기에 적당하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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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3-09-09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리뷰 참 좋다..! ^^
'자밤' 잊지 말아야지. 헤헤

네꼬 2013-09-12 09:39   좋아요 0 | URL
레와님아 나 지금 빙긋 웃으면서 댓글 달고 있소. 사실은 흐흐 소리가....
뭐 저도 순우리말 애호가는 아니지만 '자밤'은 쓸모가 많은 말이라 안 까먹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흐흐.

Mephistopheles 2013-09-10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표현도 있더군요 1아빠숟갈, 2아빠숟갈....소금은 소큼소큼 뿌리고 후추는 훗주춧~뿌려줘야 한다고

네꼬 2013-09-12 09:38   좋아요 0 | URL
아아아아아아악 메피니이이이임! 왜 그런 말을 제 서재에 쓰시는 거예요. 혼자만 아시지 왜왜왜왜왜 (귀 막고 외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