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luctant Fundamentalist (Paperback, Reprint, Media Tie In) - Movie Tie-in
Mohsin Hamid / Houghton Mifflin Harcourt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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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Mohsin Hamid 파키스탄 태생으로 The Reluctant Fundamentalist(주저하는 근본주의)라는 소설로 2007년에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이소설은 미국 9.11테러 당시 금융업에 종사하는 파키스탄계 미국인이 미국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단순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단조로운 공간, 많은 이들이 한번쯤은 들렸을법한 공간에서 차분하게 읍조리는 독백이 마치 한순간에 무너진 고층빌딩 잔해 속에 덩그러니 버려진 이방인의 슬픔 음성으로 가득채워져있다.

 누군가의 범죄 행위로 인해 한순간에 자신도 그들과 다를바없는 무슬림으로 취급 받으며 어제는 활짝 웃어보였던 이들이 오늘은 싸늘하게 등을 돌리는 냉소가 짙게 깔려 있다.

 

출간 당시 영미 언론계에서는 21세기에 카뮈가 살아 있었다면 이런 작품을 썼을것이라며 극찬했었다.

 

작가Mohsin Hamid는 이슬람 근본주의자가 이교도인을 사랑하게 된다면 어떤 사랑을 하게 될까?라는 궁금증으로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과연 사랑 앞에서는 9.11테러의 트라우마가 사라지게 될까?

 

 

파키스탄에서 대학 교수의 아들로 태어난 Mohsin Hamid는 이미 세살때 3개국어를 구사할정도로 영특한 아이로 아버지의 부임지였던 캘리포니아로 이주했을 당시 친구들에게 '우르두어를 구사하는 근본주의자'라고 말할만큼 자신이 태어난곳, 신앙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히 컸다.

 

능숙하게 구사했던 우르두어보다 영어로 말하고 글을쓰는 날들이 더 많아지자 엄마는 우르두어를 쓰지 않으면 가문에서 추방시켜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을정도 였다.

결국 가족들은 자식들이 더이상 완전한 미국인으로 성장 하지 못하게 하려고 6년만에 고향 파키스탄으로 돌아가고 Mohsin Hamid는 우르두어로 의사소통이 힘든 자신을 발견하고 충격과 정체성 혼란에 시달리게 된다.

주변의 친구들, 친지들, 가족들은 너는 이곳에서 태어났어. 우르두어로 표현 못한다고 해도 너는 우리 아들이야 라고 말해줘도 Mohsin Hamid는 영어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때 비로소 우리가 아닌'나' 내자신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결국 처절하게 처음부터 모국어를 다시 배우고 부모앞에서 완벽한 아들, 굳은 신앙을 입증시킨후 18세때 미국으로 돌아가서 프린스턴 대학에 입학한다.

이곳 에서 토니 모리슨,조이스 캐롤오츠의 창작 수업을 들으며 글쓰는 재미에 푹 빠져버리고 졸업후 잠시 고향 파키스탄으로 돌아가 금융일을 하다가 다시 미국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한다.

 졸업후 맥켄지에서 기업 경영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밤마다 꾸준히 습작을 하고 2000년에 첫번째 작품을 출간해서  미국뿐만아니라 파키스탄에서 날개돋힌듯이 팔리고 고향에서는 드라마, 연극으로 만들어질정도로 인기를 끈다.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작가로 돌아선후 두번째 작품 The Reluctant Fundamentalist가 대성공을 거두고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고향 파키스탄으로 돌아간다.

 

아내는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며 파키스탄보다 미국이 안전할것 같다고 불안해 할때면 그는 미국에 있으면 이곳만큼 불안한곳이 없고 런던에 있으면 이곳 마저 위태로울수 없을정도로 이세상에 절대적으로 안전한곳은 없다고 설득한다.

 

하지만 올해 2월경에 안과의사였던 엄마와 누나가 누군가에 의해 살해 당하고 12살짜리 조카는 머리에 총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 Mohsin Hamid는 큰충격과 슬픔에 휩싸이면서도 증오할만큼 용서할자신이 없다고 고백한다.

 

 가족을 잃은 슬픔을 전부 떨쳐버리지 못했지만 더이상 어떤 곳으로든 도망치지 않기로 결심하고 근본주의자들 세속주의자들, 급진 이슬람주의 자들도 자신들이 뿌리내리고 살고 있는 세상 까지 무차별로 파괴시키지 않을것임을 믿기로 한다.

 

파키스탄, 인도를 돌아다니며 사인회를 열면 오지 사는 젊은이들이 한푼씩 모아서 작가의 사인을 받기 위해 몰려드는데 '우리 또래들은 drugs ,sex scenes이 언제 나오냐며 잔뜩 고대하며 책장을 넘겨요. 하지만 모호하게 묘사하거나 불분명한 단어로 은근슬쩍 비켜가는 문장을 발견하면 어째서 제목이'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라는지 알겠더군요. 다음번 작품에는 제대로 구체적으로 묘사해주세요. 당신 팬들을 좀 기쁘게 해달라고요.' 라는 팬러터를 무진장 많이 받는다고 한다.

 

 

 

요즘 인도에서 발생하는 여성을 상대로 자행되는성폭력, 폭행,살인, 자살등의 사건을 볼때면 마음이 몹시 아프다. 도대체 종교가 신앙이 무엇이길래...

무고한 이들의 생명과 인권이 마구 짖밟혀야 하는가....

 

누가 이곳을 secular democracy 라고 부르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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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쓰지 않은 이야기 - 빅토르 프랑클 회상록
빅토르 E. 프랑클 지음, 박현용 옮김 / 책세상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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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비엔나 태생의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빅토르 프랑클(1905~1997)이 90세가 되던해에 쓴 자전적 회상록으로 격벽기 20세기초에 자행되었던 전쟁과 살육을 겪었던 것들이 자신에게 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담담하게 이야기 한다.

 빅토르 프랑클은 일찍이 4살 무렵부터 '나는 언젠가 죽게 된다'라는  사실을 깨닫을 정도로 조숙한 꼬마 였다.

 당시 유태인을 압박하고 목조여오던 불안한 유럽정세와 나치의 움직임 보다 어린꼬마 빅토르는 세상의 모든 생명들 모두 개개인의 시한부 생을 안고 있고 스스로의 운명을 극복하는 의지는 어떻게 나오는지 깊히 고민하며 7살이 되던해에 이미 의사의 길을 걷게 다라는 결심을 세운다.

의사가 되던해에 1차대전을 겪으면서 '삶의 허무함이 삶의 의미까지 파괴할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명망있는 의사로 명성을 날렸던 빅토르는 오스트리아가 나치에 점령당하기전에 이미 미국 비자를 발급받았지만 연로하신 부모님과 형제들을 두고 떠나지 못하고 함께 강제 수용소로 끌려간다.

이미 80세가 가까웠고 극심한 폐질환을 앓고 계셨던 아버지에게 수감되기전에 몰래 가져갔던 모르핀주사를 놓아주며 굶주림과 노쇠함에 지칠때로 지쳐버린 아버지가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고 숨을 거두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가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아들로써 할수 있는 것을 해드렸다는 생각에 처참하게 도살되는 그곳에서 신비로운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다른 수용소로 이송된후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꽁꽁얼어붙은 바닥에 파묻힌 당근껍질을 손톱으로 긁어 먹으며 자신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죽기전에 빈깡통에 달라붙은 감자껍질을 긁어먹던 모습을 떠올리고 나서야 살아 남아야한다는 생의 강렬한 의지를 불태운다.

어머니와 아내는 가스실에서 숨을 거두고 형은 광산에서 굶주림과 추위,극심한 노동에 시달리다 죽고 나치 친위대장교는 빅토르가 유명한 정신과 의사인걸 알고 가스실로 보내는 그룹에 포함시키지만 그는 살벌한 감시를 피해 줄을 바꿔서 살아남게 된다.

그는  수용소로 끌려가기전에 잃어버린 ' 의료성직자'라는 원고를 다시 써야한다는 의지로 3개의 수용소를 전전하면서 하루에 단한번 배급된 물한컵으로 마시고 세수를 한후 남은 물로 면도를 하며 스스로 살아야하는 인간임을 항시 되내였다.

 

이책의 초판본 원제목은 '.....trotzdem Ja zum Leben sagen - Ein Psychologe erlebt das Konzentrationslager.'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예’라고 말하네- 한 심리학자가 수용소를 경험하다.)으로 빅토르 프랑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공포속에서 오늘의 절망보다 내일의 희망을 위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원고를 써나간다.

자신이 알던 모든이들이 죽고 참혹했던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빅토르는 철학공부에 매진해서 박사학위를 받고 32권의 책을 쓰고 '로고테라피’라는 심리치료법을 만들고 노벨상 후보에도 오르게 된다.

 

 그가 창시한 '로고테라피’라는 심리치료법은 삶의 의미를 경험과 만남,사랑에서 찾는것으로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운명과 대결해서  인간의 능력 중에서도 가장 인간적인 능력, 즉 자신의 고통을 업적으로 승화시켜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한다."고 주장한다.

 

67세에 비행기 조종사 면허증을 따고 세계 유명대학에 초청 강연을 하고 명예박사학위를 받으며 삶이 주는 의미를 스스로 보여주며 92세로 생을 마감한다.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어떤 궁극적인 의미이자 초월적인 신앙이다. 인간은 그 초월적인 의미를 알 수 없어도 그저 믿어야만 한다. 자신의 운명에 대한 사랑을 통해 삶의 의미에 대해 대답할수 있다.'

 

70세가 되기전에 단독 비행을 마치고 안경테를 고르고 넥타이를 매는것을 통해 하루의 즐거움을 찾았던 빅토르 프랑클

아무의미 없는 삶은 없듯이 결국  삶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에 의해서 그 의미가 결정되는 것이라는 것을 한세기를 살다간 자신의 삶을 통해 절실하게 상기시킨다.

 

 

초판본     '.....trotzdem Ja zum Leben sagen - Ein Psychologe erlebt das Konzentrationslager'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예’라고 말하네- 한 심리학자가 수용소를 경험하다.)                         

 

첫출간이후 21쇄넘게 팔렸고 2002년부터 'Was nicht in meinen Büchern steht: Lebenserinnerungen'(책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회고록)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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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시간을 걷다 - 이야기의 땅, 터키 이스탄불에서 델피의 신탁까지
김덕영 지음 / 책세상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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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발상지이자 신화속 그곳을 인문학적인 사유를 안고 서양과 동양의 경계선에 위치한 터키의 이스탄불부터 여행이 시작된다.

터키땅에 남아 있는 이오니아 문명의 돌무더기 흔적을 따라 오스만 제국과 유럽대륙이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격전을 벌였던 현장의 현재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며 수천년 동서양 충돌의 시간을 견뎌온 현재 시간속 사람들의 모습도 보여준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 마르마라해 남서쪽에 위치한 부르사(페르가뭄)는 트로이전쟁으로 트로이가 파괴되자 헥토르 왕의 미망인 안드로마크는 아카이아인들에게 노예로 잡혀갔다가 아킬레스의 아들 넵톨레무스와 결혼한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들 가운데 한 명인 페르가무스가 건설한 도시로 후에 이곳을 지배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사망하자 그의 부하였던 리시마쿠스 장군이 이곳을 통치하려고 산꼭대기에 성을 쌓았다. 곳곳에서 마주치는 문명의 흔적들은 우장함과 거대함보다 가파른 정상에 무너져버려서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돌무더기 파편들로 지진과 경제난,정치적 불안정으로 제대로 관리 되고 있지 않은 비참한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몇백 년간 지하에서 잠자던 페르가뭄의 찬란한 유적은 이스탄불과 이즈미르를 연결하는 철도공사를 감독하던 독일인 감독이 발견해서 독일인 고고학자에게 알려준이후 독일인들이 발굴해내고(30퍼센트 정도) 반출해서  베를린 박물관에 전시해놓았다.

곳곳에 신전의 웅장한 크기를 알려주는 기둥들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데  세계 최초의 병원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온의 유적으로 기원전 4세기경에 지어져서 각종 정신질환을 자연요법으로 치료한곳이였다고 한다.

주변에는 대규모 공연장과 신전들이 있고 맑은 샘물이 흐르는곳을 따라 들어가면 지하터널로 연결이 되도록 정밀한 설계된곳으로 이곳 전체에 얼마만큼의 유물이 파묻혀 있는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

유적지 흔적에서 알수 있는 고대 도시의 모습과 당시 사람들의  생활습관 사상을 유추해볼수 있는데 2만5천명정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원형극장,대형병원, 공공도서관,공중 목욕탕,공중화장실을 비롯해 아름다운 무늬의 고급스런 타일이 장식된 귀족들의 고급 주택들, 신전,음악당 그리고 모든이들이 깨끗한 식수를 먹을수 있게 토관으로 이어진 상수관시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여러 형태의 고대 무덤과 거대한 증기목욕탕의 흔적들이 흩어진 파편들을 통해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이란, 이라크, 시리아, 그리스, 불가리아와 흑해 건너 러시아지역, 지중해 건너 아랍국들과 이집트까지 그리스와 로마의 군대와 상인들, 기독교 사도들과 이슬람교도들이 수시로 지나다니며 문명의 또다른 문명이 겹치고 파묻혀서 이곳이 현재 누구의 땅인지 잊게 만든다.

 

 신화의 나라 그리스는 터키의 서쪽끝 카라부룸 반도에서 배를 타고 40분정도 가면 에게해에서 네번째로 큰 섬

키오스에 도착한다. 이섬은 시인호메로스가 출생한곳으로  1822년 오스만 터키로부터 독립하려는 그리스의 해군이 터키 군대를 격파했던 곳이다. 이에 터키군은 보복으로 주민을 2만3천여명을 학살했고 네아모니 그리스정교 성당에는 당시 학살된 주민들의 유골이 안치 되어 있다. 신들의 반란이 아닌 인간이 빚어낸 참혹함은 에게해에 곳곳에 퍼져있는 무너진 돌무더기처럼 현실의 비극과 마주 친다.

 

고대헬레니즘 문명을 화려하게 꽃피운 서양 문화의 발상지인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도 천오백년간 로마의 지배를 받고 오스만 터키제국에 4백년간 지배를 받으면서 수많은 유적지들이 제대로 보존되지 못한채 여기저기 방치되어 있다. 아테네 중심부 아크로폴리스에 자리잡고 있는 파르테논 신전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1호로 지정되어 있어서 보조로 간신히 관리되고 있고 내부 유물과 벽화들은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가야만 볼 수 있다.

 

아테네 북서쪽 17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델피는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거대한 바위산으로 둘러쌓여서 아폴론 신전, 원형극장, 아테네 여신을 모셨던 원형 신전이 있는 마르마리아 성역이 즐비한곳으로 신화속 제우스와 여신들의 모습이 출몰할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아테네에서 남동쪽으로 70km 떨어진 아티카 반도 끝부분에 자리잡고 있는 수니온에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신전이 자리잡고 있다.이곳은 당시 그리스인들의 안전한 항해를 빌던곳으로 현재 15개의 기둥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1822년에 발발한 그리스 독립전쟁때 유럽의 지식인들은 오스만투르쿠에 대항에 그리스 독립을 지지하며 전쟁에 참전했다. 당시 영국의 시인바이런이 이곳 포세이돈 신전 기둥에 자신의 이름'Byron'을 새겨넣었다.

 

찬란했던 역사와 문화가 가득했던 곳의 여정은 돌무더기 파편과 잘려져 나간 기둥의 흔적위 4000년 시간의 퇴적물들이 겹겹이 쌓여 있는곳에서 멈춘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그리스인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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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 - 20주년 기념판
제임스 글릭 지음, 박래선 옮김, 김상욱 감수 / 동아시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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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에 출간 되어서 '카오스'현상을 불러 일으킨 이책이 이번에 20주년 기념판으로 나와서 큰 기대를 품고 펼쳤다.

 

이책에는 예측 불가능한 세계를 예측하려고 도전과 실패을 거듭하는 비주류 과학자의 탐구 정신은 무모해 보여도 기존 과학자들이 거들떠 보지 않았던 영역을 뒤흔들어 놓았다.

 

불안정하고 불규칙해도 나름대로의 질서와 규칙이 있다는걸 저자 제임스 글릭은 과학자들의 삶과 연구속에 얽혀 있는 프랙탈, 로렌츠끌개, 망델브로 집합, 쥘리아 집합등의 개념과 이론을 마치 탐사하듯 매혹적이게 펼쳐놓았다.

그가 던지는   ‘내일의 날씨는 어떨까’ 영국 해안선의 길이는 얼마일까’라는 물음을  쫒아가다보면 무질서 속에 파뭍힌 '질서'가 '혼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즉 혼돈속에도 일련의 규칙과 질서가 있어서 대기와 조류의 흐름속에 예측할수 없는 수많은 무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도 이처럼 예측 불가능한 기회와 우연,순간의 연속성 속에서 살아가는것 처럼 '카오스' 이론은 과학이라는 영역을 훌쩍 뛰어넘어 우리의 삶속에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렇다면 '카오스'의 이론과 개념을 꽤뚫고 있다면 우리의 미래도 예측할수 있을까?

 

우주의 작동 원리를 알아낸 뉴턴도 집을 나설 때 우산을 가져가야 할지 확신할 수 없듯이 살면서 끊임없이 부딪치고 맞닥뜨리며 하나둘씩 배우고 깨달아 갈수 밖에 없는게 인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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サラダ好きのライオン 村上ラヂオ3 (Hardcover)
무라카미 하루키 / マガジンハウス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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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부지런히 한편씩 에세이를 기고하시는 하루키상!

이번 노벨상 유력수상자로 거론되며 높은 베팅율을 올렸던 하루키상!

작가,작가님으로 불리우는게 여전히 적응하기 힘들다고 토로하는 하루키상!

소설을 쓰고 있지만 그들(문예계 관계자들)과 왜 거리를 두고 있는지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유쾌하게 투덜거리는 소리를 한번 들어보자.

とりあえず小説を書いているけど(부랴부랴 소설을 쓰고 있지만)

나는 거의 30년 넘게 소설을 쓰며 살고 있지만 작가들과 사귀지 않는다.
사진가라든가 화가라든가 음악가같이 다른 업종의 사람들과는 보통 사람들처럼 사귀지만, 소위 문예와 관계된 사람들과 연줄은 얇다.(좁다)
어째서일까라고 생각해보면 아직 젊었을적에 몇명의 작가들을 만났지만 유쾌한 추억이 없다는게 원인이 있었던 같다.
물론 굉장히 인상 좋은 사람이 몇명 있었지만 어느편이였지 기억은 나지 않는거 보니 불쾌한 체험을 한측의 사람의 마음에 깊게 남아 있는것같다.
외국인 작가들도 꽤 만났지만 주눅이 들어 상자속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였다.
소설가라는 사람들라는게 뭐 까다롭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전부터 호의를 품고 있는 작가들로 족하다고 맥빠진 소리를 해대니 그런 작가들의 책을 읽을 기분도 없어져 버렸다.
그리하여 [소설가라는게 꽤 성가시네]라는 생각이 항상 내마음속에 들러붙어 있어서 소설쓰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는 나가지 않게 되었다.
업계 파티에도 나가지 않는다. 문단파에도 나가지 않고 황금길(문예가들이 자주드나드는 장소)에도 아직 발을 담근적이 없다.
하지만 내가 동료작가들과 별로 사귀지 않는 가장 큰이유는 자신이 소설가라는 사실이 하나가 더해졌다고해서 친해져야하는건 아니지 않나.
나는 29살이 될때까지 특별한 걸 써본적이 없다. 매일 육체 노동을 하며 살았었다.
그러다 어느날[그래.소설을 써보자.]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라서 한밤중에 부엌 테이블을 마주하며 단편 소설(비슷한것)을 술술 썼다.
그러다가 우연히 신인상을 받았고 곧바로 [작가]라고 불리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런 까닭으로,그후로 30년이 지나갔고 지금까지도 [소설가다.]라고 불리며 좀 대접 받는게 기분나쁘 (어느정도 뒤가 켕기지만)다고 여전히 느끼고 있다.
소설 쓰는 것 자체를 무척 좋아하고, 어떻게 봐도 천직이라고 생각하지만 소설가라는 직함이나 사회적 위치에 관한 것이라는게 아직까지도 왠지 모르게 어울리지 않는다.
젊은 문예 비평가들은 그런대로 상냥하게 환담을 건네며[와, 하루키씨의 소설을 맹렬하게 애독 했습니다.]라는 둥 하며 다음달 잡지를 읽으시라며[무라카미가 쓴 소설 전체가 엉성해서 정성이나 재능이 조금도 없는게 아니신지.]라며 [같은 또래가 써도 그정도 쓸수 있죠](그래,어디까지나 비하 하는지 들어보자).
이런말을 들으면 [여기는 도대체 이따위 세계냐고] 머리에 열이 확 뻗친다.
그래,결국 이런 세계이니깐 그다지 내가 좋아할만한 종류의 세계가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게 말이 있어서 큰목소리로 확실히 말해야 한다면 아무말도 하지 않겠다.
그건 그렇고 늘 궁금하다고 생각하는것이 있다.
언제나 소설가는[작가님]이라고 불리워지잖아.
옛날에 그런말은 누구도 쓰지 않았다.
[야채상] 이라든가[생선장수]라고 불리면, 와 ~ 들리는 소리만으로도 속이 확뚤리면서, 그렇게 불릴때마다[네네,고마워요.]라며 손을 비비며 나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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