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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일기장
알바 데 세스페데스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25년 1월
평점 :
과거의 흔적을 불현듯 책장과 서랍을 정리 하다가 꽁꽁 테이프로 붙여둔 상자 속에서 발견 될 때가 있다.
이번에 전부 버려 버릴까 아니면 추억의 저장고처럼 남겨 둘까....라는 고민을 하게 만드는 것은 지난 시절 노트 마지막 장까지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일기장이다.
그리고 언젠가 숙제로 제출 했던 것들이 상자에서 불쑥 튀어 나올 때도 있다.
몇 학년 때 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가사 숙제로 자수를 놓는 걸 제출 할 때 였던 것 같다.
실과 바늘로 무언가 꿰매는 것에 서툴렀던 나를 위해 오래전 외할머니께서 기본 자수 스티치 10개를 표본 처럼 스크랩북으로 만들어 주셨다.
자수 틀과 실, 바늘 그리고 직접 기본 스티치를 해서 디자인까지 고안해 주신 외할머니는 바구니에 색색 과일이 담긴 이 자수 스티치 옆에 이런 설명을 적어 놓으셨다.
-아우트라인 스티치:줄기, 덩굴, 윤곽선, 작은 글자등 가는 선을 표현 할 때 사용.한국 자수의 이음수와 같은 수법,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바늘땀이 반씩 겹치도록 수놓아간다.
외손녀의 숙제를 위해 직접 자수 스티치 스크랩북을 만들어 주셨던 외할머니는 항상 손에 무언가 쥐고 계셨다.
그 무언가는 주방과 거실, 마당과 정원, 방안마다 달라졌고 하루 해가 질 무렵 거실 쇼파나 식탁 의자에 앉아 계실 때면 뜨개질 바늘이나, 펜 그리고 연필이 쥐어져 있었다.
항상 부지런하셨던 외할머니는 아침 방송 요리 프로그램을 볼 때도 노트를 꺼내 놓고 끄적이셨고 라디오를 틀어 놓았을 때도 노트를 꺼내셨다.
외할머니가 쓰셨던 노트는 아들과 딸이 학창 시절에 쓰던 노트들이나 어디선가 무료로 준 노트, 가계부나 부록으로 달려 온 것들이였다.
이따금씩 내 것을 구입 할 때 외할머니에게 새것을 사다 주면 무척 기뻐 하셨고 쓰기 아깝다며 서랍장에 넣어두셨다.
외할머니가 쓰는 것에 대해 가족들 모두 큰 관심을 갖지 않았고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할아버지나 삼촌들은 가계부를 적고 있다고 생각했고 집안과 관련된 것 장보기, 해야 할 일 같은 일정을 정리 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외할머니는 노트에 무엇을 쓰고 계셨던 것일까?
여기, 반 세기 전 가족들 몰래 일기장을 사서 모두가 잠든 사이에 일기를 쓰는 여성이 있다.
“애초에 일기장을 산 것 자체가 실수였다. 그것도 아주 큰 실수. 하지만 후회해봤자 소용없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으니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일기장을 산 건지 모르겠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처음부터 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니었다. 일기를 쓰려면 몰래 쓸 수밖에 없는데 그러려면 미켈레와 아이들에게 숨겨야 할 테니까. 나는 비밀을 만들기 싫다. 게다가 우리 집은 너무 비좁아서 비밀을 만들래야 만들 수도 없다.”
-알바 데 세스페데스의 <금지된 일기장> 중에서
1950년 11월 어느 일요일 아침 일찍 남편에게 담배를 사다주기 위해 집을 나선 발레리아는 남편 미켈레, 아들 리카르도, 딸 미렐라와 함께 살고 있는 마흔 세 살의 평범한 주부다.
그녀는 반질반질하고 새까만 표지의 두툼한, 학생들이 쓰는 평범한 공책 첫 장에 '발레리아'라고 자신의 이름을 쓰는 상상을 하며 공책을 산다.
1950년대 이탈리아에서는 담배가게와 문방구의 공정한 경쟁을 위해서 일요일에 담배가게에서 담배 이외의 상품 판매를 금지했다.
공책을 사겠다는 발레리아에게 담배가게 주인은 '금지된 일'이라며 엄한 표정으로 거절을 한다.
발레리아는 담배 가게 주인을 설득해 공책을 손에 넣고 코트 속에 꼭 숨겨서 집으로 돌아 오지만 집안 어디에도 일기장을 안전하게 보관할 서랍도 없고 가족들 눈에 띄지 않게 쓸 장소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고 보니 이 집에는 나만을 위한 서랍이나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 하나도 없다. 이제부터라도 내 권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950년 11월 20일 첫 장의 일기를 쓰기 시작한 발레리아는 2주 넘게 한 글자도 못 쓰고 일기장을 감춰만 두고 가족들에게 들키지 않을 곳을 찾기 위해 장소를 수시로 바꾸기 시작한다.
그녀의 일기장은 빨래 바구니 속에 들어 가 있을 때도 있고 부엌 찬장에 들어 가 있을 때도 있고 신발장 서랍, 옷장 속 낡은 코트 속에 들어 가 있다가 마침내 서랍 깊숙이 넣고 열쇠로 잠금장치를 해 놓고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내가 나만을 위한 서랍을 가지고 싶다고 하자 남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안에 뭘 넣으려고?”
“그거야 나도 모르지. … 중략 … 아니면 일기장을 넣어 놓을 수도 있자. 미렐라처럼.”
일기장이라는 말에 모두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심지어는 미켈레까지도.
“오 여보, 이 나이에 무슨 비밀이 있을 수 있겠어?”
- 금지된 일기 중에서
자신의 내밀한 감정을 기록하기 시작한 발레리아는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전쟁으로 귀족 가문이였던 외가가 몰락한 발레리아는 전쟁터에서 돌아와 겨우 은행원으로 취직한 남편과 두 아이를 키우는데 생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사무직에 취직한다.
귀족 가문 자녀들만 다녔던 학교를 졸업한 그녀의 친구들은 모두 부유해서 여유롭게 쇼핑하고 티타임을 갖는 시간에 발레리아는 퇴근 후 장을 보고 세탁을 하고 집안 청소까지 하느라 한시도 쉴틈이 없다.
여성의 경제적 자립이 가난의 상징이자 수치였던 시대에 발레리아는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 만으로 사회의 따가운 눈총과 편견을 이겨 낼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정작 가족들은 그녀의 이런 노력을 전혀 고마워 하지도 않고 당연히 집안의 모든 일은 가족 모두에게 <엄마>라고 불리는 발레리아 몫이였다.
발레리아는 가족 몰래 숨어서 일기를 쓰면서 가족을 위해 사용해야 할 시간을 허비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죄책감에 시달리지만 노트를 채워 나갈 수록 결혼생활의 위기, 희생과 헌신을 강요하는 모성의 버거움, 욕망하는 존재로서의 자아 정체성을 마주한다
겨우 푼돈을 모아 추위에 떨지 않으려고 산 코트를 딸 미렐라는 엄마는 늙었으니 새 옷 같은 건 필요 없다며 엄마의 코트를 입고 학교에 간다.
딸의 말에 동의 하는 남편 미렐라는 빚을 내서 영화를 제작한다는 허황된 꿈에 사로 잡혀 있고 남편의 빚을 갚기 위해 일터로 나가는 아내에게 자신을 낳아 주고 키워준 어머니를 닮기를 바란다.
“내게도 생각이 있다는 것을 믿기 보다는 차라리 내가 잘못된 감정에 빠져 있다고 믿기가 더 쉬웠던 거다.”
발레리아는 일기에 내면의 고백이 쌓여 나가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내면 깊은 곳에 묻어둔 욕망을 일깨우고, 결국 그녀의 삶은 완전히 변모한다.
‘내가 정말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
‘아내와 어머니로 사는 삶에 만족하고 있는가?
가족들 눈을 피해서 일기를 썼던 발레리아는 혼란해지는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토요일에 사무실을 나가고 뜻밖에도 주말 가족과 시간을 보내지 않고 회사로 출근한 사장 귀도와 마주치게 된다.
그가 그림을 그리듯 내 이니셜을 손가락으로 훑었고, 우리는 별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눴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 이니셜을 훑는 그의 손동작은 기억한다. 마치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순간 몸이 떨렸다. 그의 손이 내 몸을 만지는 것 같았다. 내 피부를 어루만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글씨를 읽듯이 “발레리아”라고 했다.
마흔 세 살에 장성한 두 아이의 엄마 발레리아는 부유한 친구들처럼 화려하게 꾸미지 않아도 여전히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갖고 있다.
발레리아의 매력을 알아 본 사장 귀도가 진심 어린 공감을 보여주자 그녀는 넉넉하지 못한 형편 속에서 가족에게 헌신했던 지난 시간에 분노 하며 직장에서의 일이 자신에게 기쁨을 준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그녀는 남편과의 관계는 오래전에 끝났음을 깨닫고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베니스로 귀도와 밀월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나는 항상 나의 삶을 하찮게 생각했다. 결혼과 출산 빼고는 특별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연히 일기를 쓰기 시작한 후로, 사소한 말투나 단어 선택이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겼던 일들만큼, 아니 때로는 그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발레리아는 몰락 귀족으로 평생 우아한 드레스 차림에 하인을 부려 온 그의 어머니를 '해묵은 종교화 인쇄물'처럼 바라보면서도 귀족 가문의 남편과 이혼한 친구 클라라가 평생 돈 걱정 없이 여유로운 삶을 사는 것을 부러워 한다.
대학생인 딸 미렐라가 이혼한 유부남과 연애 하면서 그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을 하겠다고 선포하자 고난의 길을 자처 했다고 분노하고 권위적으로 여자 친구를 대하고, 자기보다 똑똑한 여동생을 깎아내리며 여성을 경멸하는 아들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모순된 인물이다.
그녀는 가난 했던 시절 남편 미켈레와 신혼 여행을 떠났던 베니스에 부유한 사장 귀도와의 밀월 여행을 계획 하지만 엄마를 무시 했던 아들 리카르도가 마땅한 일자리 없이 어린 여자 친구 사이에서 아이를 갖고 결혼을 선포 하면서 자아 독립 계획이 흔들기기 시작한다.
아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엄마에게 맡기고 신발 가게 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어린 아내와 함께 ‘기회의 땅’ 아르헨티나로 가서 안정된 일자리를 찾으면 그 때 아기를 데려 가겠다고 말한다.
가부장제의 피해자이면서도 그 체제를 답습 할 수 밖에 없었던 발레리아는 1950년 11월부터 1951년 5월까지 약 반년가량 썼던 일기장의 두께 만큼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는 아들의 결혼식이 끝나는 대로 사장 귀도와 함께 하겠다는 선포를 가족 앞에서 하겠다고 결심하면서도 그로 인한 파장을 걱정하며 이 모든 감정의 변화를 가져온 일기장을 불태워 버리기로 한다.
'최대한 빨리 일기장을 불태워야겠다. 지금 당장. 일기장을 다시 읽고 마음이 약해지기 전에, 작별 인사할 시간도 없이. 이것이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가 될 것이다.
다음 장에는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미래에 올 나의 나날들을 아무것도 쓰지 않은 이 백지처럼 하얗고 매끈하고 차가울 것이다.'
내면을 고백하고 정체성을 서서히 찾아 갔던 발레리아는 일기장을 불태워 버리고 난 뒤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아기만 그녀 곁에 남겨졌다.
이 세상에서 딸로 태어나 아내로 어머니로 살면서 가족에게 자식에게 헌신 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던 지난 세기는 지금 세기에도 수많은 여성을 ‘엄마’라는 이름으로 족쇄 를 채운 채 희생과 무임금 노동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몇 년째 저출생 위기를 거론하는 한국 사회에서 국가가 꼭 책임져야 할 모성 및 가족 보호와 교육, 보건의료는 대부분 기업과 민간병원, 사립학교와 학원이 국가가 해야 할 일들을 ‘유료로’ 떠맡고 있다.
국가가 국민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한국 사회에서 대기업에 대주주 일가를 제외한 여성 등기이사가 몇 명이나 될까?
남녀 간 임금 차이는 왜 개선되지 않고 있는가?
출산과 육아가 각자 도생인 사회 구조 속에서 일하는 여성이 일기를 쓸 수 있는 시간 조차 허용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직장에서 퇴근 하고 집으로 돌아 온 어머니들은 쉴 틈이 없고 가정 주부에게는 더더욱 쉴 수 있는 날이 없다.
쿠바 출신 외교관인 아버지가 주 이탈리아 쿠바 대사로 재직 하던 시절 이탈리아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알바 데 세스페데스는 이탈리아 시민권을 갖기 위해 15살 나이에 이탈리아 귀족과 결혼 하지만 아들을 낳고 나서 2년 후 이혼을 한다.
여러 외국어를 능숙하게 했던 세스페데스는 영화와 방송, 라디오 작가로 활동하며 당대 유명한 문인과 지식인들과 교류 하면서 24살 나이에 단편을 출간 하고 여러 장편 소설을 출간 하면서 20세기 이탈리아 사실 문학시대를 대표하는 인기 여성작가로 자리 잡는다.
무솔리니 정권에 맞섰던 세스페데스는 1935년과 1943년 반파시스트 행위로 두 번 투옥 당하고 그녀의 작품은 이탈리아에서 금서로 지정된다.
1952년에 출간된 장편 소설 '금지된 일기장'은 로맨스 소설로 치부 되다가 알바 데 세스페데스가 프랑스 파리로 이주하게 되면서 세상에서 잊혀 졌다.
21세기 현대 고전으로 선정된 장편 소설 '나의 눈부신 친구'의 작가 엘레나 페란테가 <프란투말리아>라는 에세이에서 세스페데스의 <금지된 일기장>을 통해 창작의 용기를 얻게 되었다고 언급 하면서 세상에 다시 조명 받기 시작했다.
2023년 마침내 반 세기를 지나서 <금지된 일기장>이 미국에 출판되면서 작가 세스페데스는 세계 문학계에서 빛을 발하게 되었다.
동물과 달리 인간만이 일기를 쓸 수 있다.
자신의 일상사를 기록하기도 하고, 복잡한 상념을 정리하는 일기의 독자는 오로지 자기 자신 뿐이다.
하지만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사회에서 현 시대의 여성들은 "되고 싶었던 <나>와 현실과 타협한 <나>의 모습"을 매일 마주하며 오늘도 내일도 일기장을 꺼내 쓰지 못하고 있다.
"일기장의 은밀한 존재는 내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지만,
솔직히 그 덕분에 내 삶이 더 행복해지지는 않았다."
-알바 데 세스페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