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주기적으로 책의 날이 있는 달이면 독서 인구층은 점점 줄어 들고 있고 1년에 책 한 권 안 읽는 비율이 50퍼센트를 넘어섰다는 발표를 하고 있다.
종이책, 전자책에 모두 포함해서 2024년은 역대 최저치를 찍었다.
세계적으로 독서 인구층이 점점 줄어 들고 있는 추세 속에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구 소멸과 독서 인구 소멸의 최상위 단계로 진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매달 베스트 상위를 차지 하고 있는 책들 상당수는 사는 것과 살아가는 것에 대한 책들로 작년 부터 시작된 쇼펜하우어 철학 열풍은 2024년 상반기 까지 이어지고 있다.
200년전 금수저 집안 출신의 깐깐한 독신남으로 살다 세상을 떠난 쇼펜하우어가 남긴 명언들이 2024년을 살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욕망)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능력)을 분별하는 자기 인식이 행복의 전제 조건이다.]
- 쇼펜하우어
태어 날 때부터 극한의 경쟁의 세상으로 내던져 지는 한국 사회에서 영어 유치원 열풍, 수학 영재, 의대 입시반, 각종 자격 시험을 향해 줄곧 달려서 부모 세대보다 더 많은 교육비를 쏟아 부어서 사회로 나오는 순간 도살 될 차례를 기다리는 소떼, 돼지떼들 같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육체적 고통의 크기 만큼 견디기 힘든 건 정신적 고통으로 일상에서 일과 가정, 사회에서 소소한 행복과 기쁨을 느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쇼펜하우어는 애초에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질없다는 말을 남겼다.
따라서 인간적 동물의 삶이 비인간적인 동물의 삶보다 더 낫지도 않아서 결국 삶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한 동물이 다른 동물을 잡아 먹을 때 그 동물들 각각 느끼는 바를 비교해보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만일 들판을 뛰어다니는 '나'라는 소가 저 멀리 지켜 보고 있는 도살자에게 선택 당하는 운명이라면 오늘 마음껏 발에 밟히는 데로 풀을 실컷 뜯어 먹어 버릴 것이다.라는
운명을 깨닫게 되는 순간. 현실의 안락함, 평안함, 명예, 부귀 심지어 어제 주문한 물건들에 대한 어떤 집착이나 아쉬움 조차 남아 있지 않는다.
어차피 지구 상 모든 생명체들은 언젠가는 이 땅에서 사라져 버릴 운명이다.
이런 운명을 알고 있음에도 오늘은 좋지 않아도 내일은 더 좋아 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온갖 어려움, 힘듦을 견딜 수 밖에 없다.
그러나 200년 전 쇼펜하우어는 이에 대해 이런 말로 일침을 가한다.
'오늘은 좋지 않고, 내일은 더 나빠질 것이다.
그리고 최악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그럴 것이다.'
현재 세상 돌아가는 상황과 지구촌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전쟁과 재난, 고통의 문제들이 내일 그리고 내년까지도 더 나아질 것 같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도 일하고 걱정하고 고통에 시달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다 하루를 마감하기 전 단 몇 시간 동안 스마트 폰과 영상물, 이런 저런 소문과 뉴스 덩어리들의 조각글을 읽다 잠이 든다.
우리가 소망 하는 건 그다지 대단하지 않다.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의-식-주를 걱정 없이 해결 하기만 하면 된다.
의-식-주만 해결 된다면 대단한 행복을 맛보지 않아도 그럭 저럭 세상에 살아 갈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쇼펜하우어는 이런 일침을 가한다.
[삶을 그렇게 보는 시각에 익숙해지면 당신은 자신의 기대를 적당히 조절 할 것이며 모든 불쾌한 사건들을 이례적이거나 규칙을 벗어난 일로 보기를 그칠 것이다.
아니, 당신은 우리 각자가 고유의 특수한 방식으로 존재의 죗값을 치르는 세계에서 모든 것이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대로 그러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전 세계 거의 모든 종교의 공통된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이웃에게 관용을 베풀고 힘듦과 고통을 인내하고 서로 존중하며 사랑하라.'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는 순간 부터 평등하지도 공평하지도 않은 세상에 떨어진다.
그렇다면 산다는 건 무엇일까? 생명을 유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지막 순간까지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상황에서 죽음을 맞이하기 보다 좀 더 편안하게 조금은 덜 고통스럽게 죽기 위해서 오늘을 희생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출발선에 서는 순간 부터 지속적으로 내리막길을 가는 것이다. 행복하게 꿈꾸는 유년기를 지나 모든 것이 새로운 불만으로 가득 찬 청소년기를 지나 고생과 고난으로 가득 찬 성인기를 지나면 모두 다 비참한 노년을 맞이 하며 온갖 잔병과 괴로움들이 한꺼번에 몸 밖으로 나오게 된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어느 누구에게나 똑같이 찾아 오지 않는다 해도 세상의 시작과 끝의 종착지는 단 하나의 고통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분석은 기본적으로 옳은 말이다.
고통- 현재의 삶의 덧없음-확정된 죽음의 시간
이 모든 것이 삶의 의미를 방해하고 의미 있는 죽음을 방해 하고 있다면 애초에 태어나지도 말아야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살아야 하나?
우리는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보여지는 나의 몸은 만져 볼 수 있고 어디에도 비춰지지만 내 안에 있는 마음, 정신의 세계는 볼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나는 느낄 수 있다.
오늘 내가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감정을 품었으며 무엇에 화가 났고 무엇에 기뻐 했는지 자각 할 수 있지만 딱 여기까지다.
나의 앎은 여기서 끝이 나고 죽기 전까지도 어쩌면 내가 누구인지 모른 상태로 끝이 나버릴 것이다.
'과거의 행복에 매달리지 말고 미래에 행복을 미루지 마라.'
2024년의 달력이 4장이 넘어 갔다.
앞선 시간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미래의 시간들이 이전의 시간보다 좀 더 많이 주어지지도 않을 것이고 무한하게 펼쳐지지도 않는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서 없고 오지 않는 미래를 걱정하기에 현재의 내 코가 석자다.
무심코 틀어 놓은 화면에 익숙한 얼굴들이 나온다.
물론 그들은 나를 모르지만 나는 그들의 생활과 취미 그리고 어디로 여행을 가서 촬영했는지 알고 있다.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예능 프로그램을 시즌 별로 방송 하고 있다.
화면 속 스타들의 삶은 너무 쉽게 재밌게 유익하게 살아가고 있고 주변 사람들과 두루 두루 원만하게 행복하고 다정한 사이로 지내고 있다.
재미로 하는 게임과 시합에서만 경쟁 하는 것 처럼 보이는 이들의 삶은 몇 편의 프로그램에서 먹고-놀고-여행하고- 그리고 몇 시간 수다를 떨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즐거운 예능 프로그램이다.
사는 동안 평범한 것들로 부터 행복과 기쁨,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 채 타인의 모습을 통해 대리 만족을 하면 할 수록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불행하다고 느끼게 된다.
삶은 우리가 바라는 걸 전부 주지 않는다.
욕망을 버리고 체념하며 모든 걸 받아들여야 한다 해도 마음의 상태는 쉽게 떨쳐 버리거나 지워 버릴 수 없다.
따라서 마음의 상태를 온전하게 유지 하려면 예술, 철학 그리고 음악을 통해 분노를 가라 앉히고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보며 나와 다른 타인의 시선과 관점을 분석해 볼 수 있다.
여기 한 시인이 쓴 아이스크림의 황제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아이스크림의 황제
월리스 스티븐스(1879~1955)
큰 시가 마는 사람을 불러
근육질인 사람으로, 그리고 휘젓게 해
부엌의 컵 속 색정적인 응유(凝乳)를 말이야.
처자들은 늘 입던 옷 그대로
꾸물거리게 내버려 둬, 소년들에게는
꽃을 지난 달 신문에 말아서 가져오라고 하고.
있는 것이 보이는 것의 피날레가 되도록 해.
유일한 황제는 아이스크림의 황제니까.
유리 손잡이가 세 개 빠진
전나무 경대에서 꺼내, 그 시트 말이야
한때 그녀가 공작비둘기 수놓았던 그것을 펼쳐서
그녀의 얼굴을 덮도록 해.
딱딱한 발이 삐져나온다면 그건
그녀가 얼마나 싸늘하고 또 묵묵한지를 보여주는 것이지.
램프의 빛줄기를 잘 고정 시켜 놓도록.
유일한 황제는 아이스크림의 황제니까.
* 시집 <하모니엄>(Harmonium, 1923) 중에서
이 시의 배경은 죽은 자를 기리고 추모하는 '장례식' 자리다
한 방에는 아이스크림 같은 달콤한 환락이 있고 다른 방에는 시신이 안치 되어 있다.
아이스크림을 향한 욕망은 식욕을 향한 욕망이고 싸늘한 시신은 죽음으로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 삶과 죽음에 대해 할 수 있는 전부다.
동물적 삶은 존재하는 최선의 것이고 죽음 보다 더 낫다.
따라서 평범한 삶이 가장 비범한 삶이니 죽는 것 보다 오늘 하루 만이라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앞서 세상을 떠난 나의 조부들은 자손들 앞에 이런 말을 남겼다.
'하려고 했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이 가장 후회스럽다. 매 순간 열심히 살아라. 너의 앞에 있는 시간들을 소중히 여겨라.'
나의 할아버지는 자신의 생을 90세로 정해 놓고 아버지 처럼 100세를 앞두고 세상을 떠날 줄 아셨다.
할아버지는 사회에서 완전히 은퇴 하신 후 남은 생애 해야 할 목록을 작성 하셨지만 그 목록에 적힌 것들을 시도조차 해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모두에게 갑작스러운 죽음이였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사셨던 분이여서 은퇴 이후의 삶은 장미빛으로만 빛날 줄 알았다.
하지만 매 순간 매초 단위로 어느 누구 보다 바쁘게 사셨던 할아버지는 진정으로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것에는 등한 시 하셨다.
가끔 할아버지가 남기고 가신 책들을 펼쳐보면 이토록 치열하게 살아서 그 자리까지 올라가셨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마지막 순간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보다 더한 고통을 겪고 가셨을까라는 슬픔에 잠긴다.
반지의 제왕 톨킨은 이런 말을 남겼다.
'두 차례 세계 전쟁을 겪는 동안 이 세상은 신도 없고 날개 달린 천사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신도 없는 세상에 괴물만 살지 않는다.
이토록 불완전하고 부조리한 세상에서 인간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것 지극히 평범한 것 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소설 속 영웅처럼 살 수도 없고 날개 달려서 비상하는 이카루스도 될 수 없다. '
-톨킨
누구나 한 번쯤은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랬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나는 이상 어떻게서든 살아가야 하고 그렇게 견뎌 내는 것 만으로도 그리 잘못된 인생이라 할 수 없다.
우리는 사는 동안 늙음, 죽음을 인지 하지 못한다.
항상 이 사실을 인지 하고 있더라도 24시간 내내 늙고 죽는 문제에만 매달릴 수 만은 없다.
그러니 지상의 모든 평범하고 사소한 것에 의미를 두고 사는 게 힘들고 지치고 허무하더라도 살아가는 동안 일말의 행복과 기쁨, 희망을 찾기 위해 시간이 나는 데로 보고 느끼고 즐기고 맛보며 살아야 한다.
‘아이스크림은 달콤하다. 그러나 아이스크림은 녹는다.’